《答疑解惑》
答疑引言
《创世记》三十三章和我以前讲的不一样,因为有了新的领受。以前没整对,现在整对它,以后可能更对。可能也给大家带来了不少的困惑。
以扫怎么就挪到西珥山去了呢?西珥山是个什么样的地方呢?以扫自己做了一个决定,觉得西珥山这个地方是悬崖峭壁,好像没有人抢。是他自己挪到西珥山的,不是别人让他挪去的。一个受咒诅的人常常觉得自己做的选择可好了,是一个非常聪明的选择。
这就给了我们一个非常有意思的规律,就是鬼从来不会拿着枪、刀逼着你做这种选择,都是你自己做的。一个有神的人会莫名其妙地做蒙福的选择;一个受咒诅的人会莫名其妙地做受咒诅的选择。这就是有鬼与你同在还是有神与你同在,你是靠着神的祝福过日子,还是靠着自己的双手过日子。
Q1:老师,我还是不懂摔跤指的是啥?
摔跤就是较劲,看谁能把谁按趴下。我们有的时候就喜欢跟神较劲,神说:往前走,不要怕。我们会说:不,我害怕!这就是较劲。
Q2:老师,我很想效仿雅各的得胜。这是神给考试,一点一点地挣扎出来的?还是我们听了道就行,自己选择的?
这两件事好像不太相关。我尝试着来解释一下。我们人一生常常遇到一些事情不是我们很喜欢的。神真的不太会照着我们喜好的去安排,是照着神自己喜好的去安排。神的旨意是给我们信心的操练,到底你是选择信靠神,还是选择信靠自己?每一次的得胜都是在挣扎和争战当中,才叫得胜。所以,没有争战哪来的得胜?没有较劲哪来的得胜?什么叫得胜?赢得了神的祝福就叫得胜。把自己属肉体的邪情私欲按住,那才叫做得胜。
Q3:老师,怎么把小气变成大气?
每个人里面都有一套自己的逻辑,就是觉得这样的事我占便宜,那样的事我吃亏。我曾经见过一个姐妹,人家一来骗她,她就被骗。我给大家举个例子。比如有人对她说:姐妹,我是个基督徒,我不会骗你。现在有个超级好的机会你知道吗?有一种动物叫鸵鸟,鸵鸟肉可贵了!一千块钱一公斤。如果咱们养了一只一百公斤的鸵鸟,你算算多少钱吧。这个好机会我没有跟别人说,只跟你说。你要不要投资?姐妹就投了,十万块打过去了。结果,鸵鸟没了,十万块钱也没了。
后来,这个姐妹跟我说:老师,我一碰到这种事就控制不住,就打钱给人家。我就在想:这是什么脑子?我说:这样子吧,我把账号给你,你把钱打给我。她说:那不行啊。我说:怎么又控制得住了?因为她认为这是吃亏的。后来我发现,人里面总有一种逻辑,就是什么叫做吃亏,什么叫做占便宜。小气的人以为小气会占便宜;大气的人以为大气会占便宜。这挺有意思吧?为什么人会小气呢?因为他觉得占便宜。
我曾经遇到过一个上海最大气的男人,在我这里占了老多便宜了,因为他里面的逻辑不一样。大气有大气的逻辑,小气有小气的逻辑。要改的话就得改逻辑,逻辑不改,就像我刚才说的那个姐妹,她老觉得那是占便宜,一让她吃亏,就不干了。其实问题就在于,人里面对事物的认知出了问题。改啥都不如改我们里面的思想。思想搞对了,就没有解决不了的问题。
Q4:老师,神跟利百加说将来大的要服侍小的,是对属灵里的后裔说的吗?以扫并没有服侍雅各。怎么理解?
可能我刚才没有解释清楚,我就再解释一遍。以扫的存在就是为了雅各的存在而存在,他就是跑了一个龙套,在大千世界历史的长河当中,出现了一下,就是为了衬托一个属神的雅各。
Q5:老师,人经历了神的供应越多,心里就越能在钱财上放开,但不见得能在其他方面放开?都得经过神一个个的对付吗?
我要告诉大家,人笨就笨在这。比如神说:你们要将当纳的十分之一全然送入仓库,使我家有粮,以此试试我是否为你们敞开天上的窗户,倾福与你们,甚至无处可容。结果人们一试好使,他就以为这个奉献,倾倒点祝福就是我们要得着的。你要这样认为,你就搞错了。其实神要我们试一下,是要让我们知道,我们的神是信实的神,好让我们在其他的地方信靠神。
但是很多人就把眼光定在:我奉献我就蒙祝福,我蒙祝福我就奉献。大家就进到这个死循环里了。后来神就把他蒙福的念想给断了,让他发现好像不蒙福了。不蒙福了,很多人又会解释,这是与神的蜜月期过了,其实不是。你不能老是停留在奉献蒙福上,那不是神要的,神是要让你进到神的荣耀里啊!
Q6:老师,雅各里面不喜欢与人比较,也没有受外界环境的影响,真的很厉害,怎么才能向他一样?
一个人如果不把活着这点小屁事儿看透,觉得活着很有意思,你就不可能追求永恒里的荣耀;如果觉得活着没啥意思,就开始找寻一个永恒里的荣耀,发现世上的事不过是灵界里的一个影儿,你就不会紧紧抓住那个影儿,就会像雅各一样了。
我讲亚伯拉罕的信心N多遍了,可你里边还是属世的逻辑体系。属世界的逻辑体系不是亚伯拉罕的逻辑体系。亚伯拉罕的信心和我们平时说的信心不太一样,你光知道蒙福,可你不知道那得是亚伯拉罕的信心带来的。亚伯拉罕、以撒、雅各、约瑟都是把今生看透的人,他们都是聪明人。人要是看不透今生,整天纠缠这世上的事,累得够呛,毫无意义。不是雅各厉害,是人家追求的东西不是糊里糊涂。以扫才是糊里糊涂地活着的。
Q7:老师,肉体的邪情私欲是天生的,还是从后天邪灵辖制来的?
人都是天生属肉体的,就是你生下来就那样。后天的就是要学习神的话,然后治死肉体的邪情私欲。也就是说,人天生就是个属肉体的人,人天生就是不能明白神的话,所以后天要来学习。人属肉体,邪灵就辖制,辖制以后就更属肉体了,然后在属世界的逻辑体系里活着,最后惨兮兮地离开这个世界。如果你要想这样的活法,你就这样活。让人活着的乃是灵。神的话就是神的灵,所以人活着是靠神口里所出的一切话。
Q8:老师,我朋友老是说她感觉准备要死了,说她身体很不舒服。我叫她不要胡思乱想,有时间读经祷告。跟她说完话后,我感觉很沉重,是不是她的邪灵跑到我身上了呀?
那真的是啊,因为人说的话就是灵。耶稣说的话是灵、是生命。但是如果人身上带着邪灵,说的话就是邪灵,就是灭亡,人活着就很辛苦。弟兄姐妹,如果你的里面还带着浓厚的、属世界的逻辑体系,我看你还是先对付你自己吧。经过这么一试好像自己还不行,赶紧对付啊。你里面的垃圾老些了,还要去关心别人,我看你还是先关心一下自己吧。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창세기》 3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읽었을 때 저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제 시선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지난번 제 해석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나눈 내용 역시 반드시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2년 뒤에 다시 창세기 33장을 읽는다면 또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발전적인 안목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고, 발전적인 안목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결코 본받지 마십시오. 예전에 피해망상증을 앓던 정신질환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를 정신질환의 결박에서 자유하게 해 주었더니, 나중에 가슴을 치며 당당하다는 듯이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5년 전에는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도대체 5년 전이 틀린 것입니까, 지금이 틀린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매함입니다! 만약 제가 그와 함께 우매해진다면, 저는 막다른 길에 갇히고 맙니다. 5년 전의 해석이 틀렸음을 인정하자니 부끄럽고, 지금의 해석이 틀렸음을 인정하자니 역시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야곱과 같은 태도가 있어서 겸손히 꼬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내가 이전에는 온전하게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발전했다고 말합니다! 발전했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발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에 온전하지 못했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지금 다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华人命定神学)의 한 가지 특징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늘 자신이 온전히 다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저에게 도전하며 묻습니다. “선생님, 다 틀리게 가르치셨으면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많은 오도하는 말들도 당신을 미혹하지 못했는데, 제가 조금 부족하게 전했다고 해서 미혹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탐구하고 찾으면 반드시 찾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과거에 온전치 못했다면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지 않으신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은 저를 인도하셨지만, 제가 그 높이를 다 따라가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는 탁월하셨으나 제 수준이 낮아서 미처 다 따르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다시 본문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제목은 ‘야곱의 승리한 모습’입니다. 참 흥미로운 점은, 앞 장에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즉, 치열하게 씨름하여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겨루어 승리한 후의 모습이 왜 이렇습니까? 왜 승리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야곱의 내면에는 혼란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야곱의 입장이라면, 다리를 절면서 방금 하나님과 겨루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하나님께 “하나님, 제 다리가 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승리하고 났는데 다리를 절게 되었다니,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수많은 혼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 내면에는 혼란이 없습니다. 이 일에는 그 나름의 섭리와 설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다리를 저는 것, 이것이 승리입니까?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누가 자기 다리를 의지하여 대열 맨 뒤에 숨으라고 했습니까? 도망치려 했던 것 아닙니까? 도망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내면에는 혼란이 없었습니다. 당시 그의 생각은 ‘너희는 앞에 서고 나는 뒤에 있을 테니, 목숨만 건지면 언제든 기회가 있겠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내면에 있던 인간적인 생각을 완전히 무너뜨리셨고, 그의 다리는 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야곱이라면 혼란스러웠겠습니까?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칼이 그의 집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다윗이 혼란스러워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고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에게 매우 강인한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말하자면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그래도 나누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성도의 20%가 기도회에 참석하면 교회가 부흥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10년 전부터 모든 공휴일에 100%의 성도가 교회에 와서 금식 기도를 드렸지만,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고 부흥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그다음 말은 삼켰습니다. 감히 내뱉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런 상황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감히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왜 아직 부흥하지 않고 겨우 서너 명뿐이며, 이토록 황량해 보이는가?’ 때로는 의자를 붙잡고 기도하며 이 의자가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바랐지만,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입을 열어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몇 년의 광야를 더 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삼켜야 합니다! 어릴 적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을 훈육할 때 아이가 울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 억지로라도 눈물 삼켜!” 눈물을 삼킬 수 있습니까? 삼키려 애써도 잘 안 되지만 끝까지 참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저의 혼란은 무엇이었을까요? ‘이토록 기도했는데 왜 아직 부흥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부흥이었는데, 부흥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혼란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맞은편에서 그의 형이 잘 훈련된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군사들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훈련시킨 318명의 가신들보다 훨씬 더 정예였습니다. 말을 타고 멀리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데, 무협 소설에 나오는 정예 무사들처럼 모두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나님, 저를 축복하신다고 하시더니 제 초라한 꼴을 보십시오. 제 형은 얼마나 당당하고 위풍당당합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당당한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당당함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도 분명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취하고 형의 축복을 받았는데, 형은 저렇게 잘 살고 큰 세력을 이루었구나! 반면 축복을 받은 나는 노약자들만 이끌고 집안 꼴도 이 모양이며 다리까지 절고 있네.’ 혼란스럽습니까? 만약 혼란스럽다면 당신의 영적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이 먼 사람은 수많은 것을 보며 혼란에 빠집니다. 세상 기업들보다 사업이 번창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흔들립니다. 예전에 어떤 그리스도인 가족이 사업의 번창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영광의 회복’이라는 구호까지 외쳤지만 끝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가오는 모습을 본다면 여러분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굴레에는 ‘내면에 아직 세상적인 관점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 내면의 세상적 관점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승리하는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실패했기 때문에 혼란이 많은 것입니다. 내면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혼란스러웠을까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멀리서 말을 타고 번쩍이는 창을 든 채 속으로는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내 축복을 가로채더니, 이번에 너를 산산조각 내 주겠다!’ 그러나 멀리서 보니 야곱이 몇 걸음 걷다 엎드려 절하기를 일곱 번이나 반복하며, 다리까지 절뚝거리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축복을 빼앗아 가더니 고작 저 꼴이란 말인가?’ 뒤돌아 자신의 400명 군사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내 축복을 정말 빼앗긴 것인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축복이니 장자의 명분이니 하는 것들은 다 쓸데없는 소리였구나. 빼앗아 가봤자 아무 소용도 없네. 그때도 그것이 밥 먹여 주냐고 생각했는데, 지금 봐도 밥 먹여 주지 못하는구나.’ 결국 그는 후회했습니다. ‘에이, 저런 자를 죽여서 무엇하겠는가? 다리 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은빛 갑옷에 번쩍이는 창을 들고 적토마를 타고 달려왔다면 형제간에 한판 싸움이라도 벌였을 텐데, 지금 야곱은 세 걸음 걷다 절하고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리며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다리를 절면서 말입니다.
원래 셈이 빠르지 못했던 에서에게 하나님께서는 혼란을 일으키셨고, 군사 한 명 피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혼란과 다툼을 해결하셨습니다. 상황이 종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자병법보다 뛰어나십니다. “싸우지 않고 남의 군사를 굴복시킨다”는 손자의 말처럼 야곱은 얼마나 탁월합니까! 그것은 하늘에 속한 전략적 차원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에서는 헛걸음한 셈이 되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당당하게 이끌고 왔지만 맥이 다 풀려버렸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대한 것입니다.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하책에 불과하며 진정한 용사라 할 수 없습니다. 야곱과 같은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이며, 그 높은 경지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우리가 5년 전과 다르게 성경을 읽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영적 경지가 달라져 더 높은 경지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승리한 모습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사업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았고, 휘하에 얼마나 유능한 기술자가 있는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를 겨루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하늘에 속한 영광만을 사모했습니다.
진정한 영광의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영광이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며, 하늘에 속한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 반드시 하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여러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이자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십자가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마술을 부리는 분입니까? 주님은 그런 일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여전히 혼란이 남아 있다면, 성경을 읽었으나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경지가 여전히 세상적인 논리 체계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아브라함처럼 행하지 못하고, 이삭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삭처럼 행하지 못하며, 야곱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야곱처럼 행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수년 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갈망했고, 지금 우리는 수많은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함과 생각을 뛰어넘는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대열의 맨 앞에 서다
야곱은 대열의 가장 맨 앞에 섰습니다. 다리를 절면 어떻습니까? 내면에는 두려움도 염려도 없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이십니까? 야곱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대열의 가장 맨 앞에 섰고, 마음에는 혼란이 없었으며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죽고 사는 문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담대하게 대열의 맨 앞에 서십시오. 소와 양을 칠 때도 빈틈없이 충성스럽게 돌보며 남의 일에 온 힘을 다해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몫을 그에게 주십니다. 야곱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있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으며, 내가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으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형과의 관계에서도 이기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승리하리라. 나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죽으면 죽으리라!’ 야곱이 대열의 맨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바꾸지 못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형이 말에서 내려와 그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함께 울었습니다.
저는 늘 제 자신을 돌아보기를 좋아합니다. 리더가 되려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많은 소그룹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이 사역의 짐을 함께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언제나 대열의 맨 앞에 선다는 점입니다. 우리 가운데 목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제게 맡기시고, 사역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제게 맡기십시오. 저는 반드시 맨 앞에 서서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결코 “어휴, 귀신을 쫓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네가 가서 앞장서라! 선생님은 어디 가시냐고요? 나는 뒤로 빠질 테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승리하는 장수는 반드시 승리하는 군사를 이끌며,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언제나 맨 앞에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원리입니다.
야곱이 땅에 일곱 번 엎드리다
야곱은 형에게 다가가기까지 땅에 일곱 번을 엎드렸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그동안 형은 멀리서 다가왔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창세기》 33:3)
그것이 승리입니까? 어떻게 형에게 무릎을 꿇고 절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형이 당신에게 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일곱 번 엎드려 에서에게 다가간 것,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만약 땅에 엎드릴 줄 아는 내면의 용기와 절개조차 없다면 결코 승리를 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는 이러한 모습이며, 야곱의 승리도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거꾸로 행합니다.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하며 정부와 맞서 싸우고, 에서 앞에서 가슴을 치며 “어디 한번 찔러봐라, 나는 끄떡없다”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찌르면 피를 흘리는 연약한 육체일 뿐입니다. 어찌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고 하며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다’는 말을 허세로 부립니까? 그것이 참된 위대함입니까? 겉모습만 흉내 냈을 뿐 야곱의 뼛속 깊은 강인함은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땅에 일곱 번 엎드릴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굴욕적인 것이다. 나는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고 엎드려 절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를 주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싶다. 내가 무술을 연마했는데 다리만 절지 않았어도 말에서 당신을 끌어내렸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호전적인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칼을 휘두르지 마십시오. 자신의 칼과 무기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는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 한 사람을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만약 에서가 창을 들어 야곱을 찌르려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가정해 봅시다. 야곱은 땅에 엎드려 있고 에서는 말을 타고 있는데, 말에서 내려와 부둥켜안고 우는 대신 칼을 들어 “내 축복을 빼앗은 대가를 치러라” 하며 내리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창을 드는 순간 팔이 말라비틀어졌을 것이고, 더 큰 화를 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해결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변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야곱과 같은 성품을 길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으로 승리하십시오.
온 가족이 에서에게 절하다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세기》 33:6-8)
야곱과 에서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 후, 에서는 이 사람들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지혜롭게 말하는지 보십시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이르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창세기》 33:5)
야곱은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종이 되었습니까? 야곱은 “이 자식들은 하나님께서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에서가 다시 “이 가축 떼는 무슨 뜻이냐?”라고 묻자,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보십시오, 야곱은 에서를 ‘내 주’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야곱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대장부는 굽힐 때 굽히고 펼 때 펼 줄 알아야 한다’는 옛말처럼 그는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걸핏하면 거만해져서 다른 것은 배우지 못하고 오만함만 배운 채 ‘나는 이미 승리했으니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라며 붕 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너무 자아에 사로잡혀 머릿속이 온통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드러워질 수 없습니까? 상대를 ‘내 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가 진짜 당신의 주인이 됩니까? 온 가족이 그에게 절한다고 해서 정말 그에게 굴복한 것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영적 세계에서 에서가 존재하는 의미는 야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에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의 존재는 야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야곱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400명의 가신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며, 야곱이 에서에게 절했다고 해서 에서가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야곱의 온 가족이 절했다고 해서 에서가 진짜 그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에서는 단지 엑스트라 역할을 맡아 배경이 되어 주었을 뿐입니다.
엑스트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화에서 말을 타는 장면을 촬영할 때, 요즘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진짜 말을 타지 않고 손수레 위에 올라서서 고삐를 잡고 흔듭니다. 나중에는 손수레조차 쓰지 않고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뛰어다니면 배우는 가만히 있어도 마치 말을 타는 것처럼 화면에 나옵니다. 에서는 나뭇가지를 들고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사람과 같고, 야곱은 말을 타고 연기하는 진짜 주인공입니다. 나뭇가지를 든 자는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말을 탄 주인공이 고삐를 당기면 아래에 있는 엑스트라들은 그저 밥벌이를 위해 앞으로 힘껏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를 주라 부르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세기》 33:8)
이 말 한마디에 에서는 완전히 마음이 풀렸습니다. 에서는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영심을 좇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겉치레 칭찬에 쉽게 어리둥절해집니다. ‘야곱이 나를 주라고 부르네? 내가 동생의 주인이 되었구나. 내 축복을 빼앗았다는 것은 다 헛소리였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 야곱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에서를 주라고 불렀는데, 말을 지혜롭게 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지혜롭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목회자가 새신자를 맞이하며 대뜸 따지듯이 “당신 같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목양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목양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목양하든 상대방은 아직 당신에게 목양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본인이 먼저 주인이 된 양 행동하고 있는데, 상대는 아직 당신을 영적 지도자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교제해 보시면 제가 얼마나 말을 부드럽고 지혜롭게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야곱과 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말을 지혜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승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지혜롭지 못하여 에서가 다가왔을 때 “당신은 나를 주라고 불러야 합니다. 내가 장자이고 당신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에서가 창을 내려놓았다가도 즉시 단도를 꺼내 들고 “네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야곱 같은 사람은 매를 견뎌낼 체구도 되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싸움 연습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물리적인 싸움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님이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었고, 남편이 밖에서 문을 발로 차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 끝에 먼저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이 도착한 후에 현장에 나타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 경찰 없이 제가 먼저 갔다면 저까지 함께 맞았을 것입니다. 제 체구로는 그 매를 견딜 수 없습니다! 상대는 격투기를 배운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가정폭력이 일어나면 경찰에 신고하여 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제 연약한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며, 저 역시 무모하게 나서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을 픽업하여 싱가포르의 유명한 개구리죽을 먹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주차가 매우 힘들어서 동행한 사람들을 먼저 내려주고 주문하게 한 뒤, 저는 주차 공간을 찾아 주차를 마치고 급히 뛰어오다가 한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머리 전체에 칼자국 흉터가 가득하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매우 험상궂은 사람이었습니다.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에 꿰맨 흉터들이 가득하고 실밥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제 목숨이 그 사람보다 훨씬 귀하기에, 저는 즉시 허리를 굽혀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 목숨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형님이라 부를 땐 형님이라 부르고 어르신이라 부를 땐 어르신이라 부르며 상황을 넘겼고, 무사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른 일행에게 돌아가 개구리죽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상대를 ‘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가 진짜 주인이 됩니까? 이것을 바로 ‘승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하며, 그런 사소한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야곱은 누구를 주라 부르든 부르지 않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습니다. 배우셨습니까?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결코 고집불통이 되지 마십시오.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며 맞서다가 몰매를 맞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에서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다
야곱이 보낸 예물은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가치로 계산해 보십시오. 소 20마리, 낙타 20마리, 양 200마리가 있다면 그 가치가 얼마이겠습니까? 10명 혹은 20명의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오늘날로 치면 수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가치였습니다.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액수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예물이었으며, 그 큰 재물을 형에게 아낌없이 건넸습니다.
그 밤에 야곱이 거기서 유숙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창세기》 32:13-15)
에서는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까? 형에게 후한 예물을 보낸 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는 ‘내 하늘 아버지께는 재물이 무한히 많으니, 이 정도 예물을 주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야곱이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공부를 통해 핵심을 찾으셨습니까? 이전에는 단순히 ‘하나님이 야곱을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바꾸셨다’라고만 배웠지만, 진정한 승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인색한 사람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넓고 넉넉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남에게는 인색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많습니까? 많습니다. 남에게 인색한 사람이 많습니까? 많습니다. 한때 저는 통장에 십만 원 단위 이상의 돈은 전부 헌금하고 몇만 원만 남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적은 돈으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제게 찾아왔고, 많을 때는 서른 명이나 모였습니다. 저는 그들을 기쁘게 대접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굶주리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야곱과 같은 승리자의 마음가짐을 주셨습니다. 저는 혼자 밥을 먹을 때는 몇천 원짜리 국수 한 그릇으로 때우곤 합니다. 싱가포르에서 식사할 때도 삼사 달러짜리 검소한 음식을 먹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는 매우 절약하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을 대접할 때는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후한 예물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내면의 영적 부유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3:20)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입니까? 바로 ‘사람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평생 주님을 의지하면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나 자신과 씨름했으나 주께서 나를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과 씨름할 때 비록 처음에는 두려워 떨었으나 결국 주님 앞에 굴복하였고, 주님은 나의 힘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대열의 맨 앞으로 달려 나아가 승리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내가 땅에 엎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형의 마음을 순식간에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순간 여러분은 손뼉을 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가 무엇인지를 제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평생 그분을 신뢰할 때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제 눈은 나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마다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은 나를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삶 속에서 거듭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사람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게 하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승리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원수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순식간에 바꾸어 놓으십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한 걸음씩 걸어오며, 저는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곧 ‘엘엘로헤이스라엘’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은 승리하는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며, 모든 만물은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주’라 부르고, 그들에게 후한 선물을 주며, 그들 앞에서 엎드려 절할지라도, 영적 세계에서 그것은 거룩한 승리이며 하늘의 천사들이 우리를 향해 환호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성품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성품을 사모하십니까? 그들을 본받으십시오.
누구에게나 영적 몸부림과 갈등이 있음을 압니다. 저 역시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씨름해 왔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제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난과 갈등은 오직 승리를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때로 ‘에서도 야곱을 섬기지 않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지도 않았으며, 에서가 야곱에게 물 한 잔 떠다 주거나 주라 부르지도 않았고 야곱의 종이 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가?’라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내 앞에 있는 가축과 아이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세기》 33:14)
에서는 세일 산으로 떠났고, 야곱은 자연스럽게 말했습니다. “내 주께서 먼저 가시면, 저는 이 가축들과 가족들을 천천히 이끌고 세일 산으로 가서 내 주를 뵈러 가겠습니다.” 야곱이 정말 세일로 갔습니까? 왜 가겠습니까? 할 일 없이 그곳에 가서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에서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지혜롭게 둘러댄 말일 뿐입니다. 야곱이 승리했습니까?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요? 왜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까? 상황에 따라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목을 곧게 세우고 가슴을 치며 ‘나는 상처 입지 않는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바로 야곱과 같은 지혜롭고 유연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말씀을 온전히 깨닫고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33장 본문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유력한 자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33: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3: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33: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이르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33: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33: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33: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33: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33: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33: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33: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33: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33: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내 앞에 있는 가축과 아이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33: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자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33: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33: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리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33: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33: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