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6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 읽고 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인식을 묘사했는데, 사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장 없이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엄청난 공을 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이 내용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부터 전반부에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기록하고, 후반부에서는 사도 바울이 행한 사역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다스림과 관리에 부족함이 있었고, 많은 부분이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나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당시의 상황을 주먹구구식으로 엉터리로 행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일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무지하면 영적 소경이 되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을 경영할 때 머릿속에 관리 체계가 없다면 제대로 운영될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해도 지각(悟性)에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 6장의 주제를 **《교회의 관리는 영적 지각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서 나와야 한다》**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개념부터 명확하게 정립해야 합니다. 지각에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의 개념
우리는 먼저 몇 가지 개념을 명확히 정리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 개념이 불분명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먼저 ‘제자’의 개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사도행전》 6:1)
교회 안에서 제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모두가 거저 베푼다면 과부가 소외되는 일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설령 소외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제자든 그 빈자리를 채워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의 개념은 무엇이었습니까? 열두 사도 중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뽑았습니다. 이는 먼저 지각에 결핍이 있었고, 제자의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의 개념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사람 수는 늘어나는데 문제도 함께 늘어난다면, 그것은 관리가 뒤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문제입니다. 사업이 커졌는데 관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진정한 개념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그 무리는 자신들이 제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제자의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제자의 개념을 혼동했기 때문에 제자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만으로 좋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제자입니까? 예수님께서 3년여 동안 행하신 표적과 사역은 대단히 강력했습니다. 그렇게 하셨음에도 겨우 열두 제자를 얻으셨고, 그중 하나는 유다였습니다. 그들을 제자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기준에는 여전히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릇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9:29)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부모, 아내, 자녀, 전토, 집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기준으로 가늠해 본다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매우 황량합니다. 제자의 개념은 매우 큽니다. 제자가 늘어났는데 돌아서서 원망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제자가 많아지면 문제는 줄어들어야 마땅합니다. 교회를 처음 세울 때부터 교회와 제자의 개념을 확실히 정리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제자의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다들 베드로와 비슷한 수준일 것입니다. 그저 교회의 의자에 사람이 가득 차기만을 바라는 수준 말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한때 교회 의자에 사람이 가득 차기를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의자가 텅 비어 있으면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보고 마음이 식어 다음에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염려했습니다. 때로는 인공지능으로 마네킹이라도 만들어 자리를 채워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강의를 열어 한 사람당 5천 위안씩 받기로 했는데 딱 한 사람만 왔다면, 그 강의를 어떻게 진행하겠습니까? 설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화인 사명신학이 어떻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전에 많은 사람이 제 기준이 너무 높다며 이런 식으로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축해야 합니다.
제자는 제자답게 세워져야 합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며, 바로잡아야 할 때는 단호하게 훈련합니다. 사람은 수시로 혼란에 빠집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내버려 두면 다른 사람들도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다 함께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화인 사명신학은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결코 값싼 소위 '은혜신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많은 은혜를 흘려보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께 생명을 기꺼이 바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제자의 개념을 확실히 정립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의자가 가득 차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진정한 제자 한 사람만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이는 백 명의 단순한 신자보다 훨씬 낫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하듯, 교회의 사역은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훈련하여 제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조급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제자다운 모습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제자의 수가 늘어나자 원망도 함께 늘어났다는 것은 듣기에 매우 이상합니다. 누가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이 좋은 일인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은근한 풍자입니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바울의 관점에서 읽으면 곧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오직 그들 자신만이 스스로를 제자라고 여겼을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관리의 개념
지난 세월 동안 저는 관리에 대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연구했습니다. 관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우리 교회의 관리에 대해 조금 칭찬하고자 합니다. 저는 종종 《관자(管子)》를 읽습니다. 중국 역사 문헌에 보면 2천여 년 전에 이미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고, 20만 군사를 이동시킬 때도 걸어서 움직였습니다. 예로부터 국가는 관리와 통치의 개념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교회에도 관리가 필요합니다. 관리라는 개념은 교회가 생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이 바로 이 땅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가축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완벽하며, 단순히 모두가 모여 먹고 마시고 놀며 춤추고 찬양하며 "할렐루야"만 외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춤을 추고 난 뒤 굴러다니는 생수병 하나도 관리해야 합니다. 관리하지 않으면 쓰레기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시대에도 관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는 이 관리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관리는 최고 책임자의 책임입니다. 관리가 없으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며, 이미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두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처럼 관리한다 해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당시 베드로 일행의 교회 관리는 훨씬 더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리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성(省)에 문제가 생기면 성장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최고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원인은 관리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입니다. 관리를 못 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 중에서 요한을 포함한 이들에게 원망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행전》 6:2-4)
많은 교회가 이 길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며 관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이 단지 기도와 설교뿐입니까, 아니면 다스림과 관리입니까? 솔로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솔로몬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 역시 다스림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일행은 책임을 깨끗이 떠넘겨 버렸습니다. 원망이 터져 나오자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만 힘쓰겠다고 포장한 것입니다. 음식 나누는 일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다스림, 관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관리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먹고 마시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관리는 당신이 얼마나 먹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고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리 방식 때문에 예전에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놀기를 좋아하지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의 관리 시스템에 의해 훈련받아 일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관리의 개념은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온전히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관리하다가 결국 모두가 영적인 비만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와 육신을 위하는 마음만 자라나고 다른 것은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을 위하는 마음이 계속 커지면, 음식을 조금만 덜 받아도 원망이 나오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 또한 나날이 심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리는, 당신이 1천 위안의 가치밖에 되지 않더라도 관리를 통해 성장하여 1만 위안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올바른 다스림입니다. 최근 저는 교회의 다스림을 위해 다시 깊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들 "지금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방심하다 보면 금세 나빠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준에 아직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은 한 달란트를 맡기셨을 때, 당신이 그 한 달란트라면 제가 당신을 열 달란트로 성장시킬 수 있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교회의 관리는 영적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데서 나와야 합니다. 사실 제가 전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물론 저 역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신속하게 바로잡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개념을 제대로 잡았는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늘 경계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 오게 된 것은 복입니다. 이곳은 철저한 관리가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을 쓰든 우리의 관리는 반드시 여러분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과정입니다.
온갖 영적 무기로 더럽고 추악한 것과 온갖 영적 종양들을 제거하여, 당신의 온 영혼이 번성하고 가치를 창출하기 시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여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스스로 육신을 다루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방법으로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제가 몇 마디만 해도 한동안 마음이 찔리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는 기뻤는데 제가 한마디 하면 괴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게으름과 육신을 위하는 문제를 제가 불편하게 찔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연단은 단순히 고난을 당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연단은 여러분을 빛나는 순금처럼 만들어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는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관리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관리를 매우 잘했고, 저는 여전히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아 지금까지도 배우고 있습니다.
누가는 교회에 관리가 결여되어 제자의 수가 늘어나자 다툼이 일어났음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 일행은 음식 나누는 일조차 관리하지 못했는데 무엇을 더 관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는 단순히 기도와 설교에만 머무르는 곳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우리를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을 관리하고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솔로몬, 다윗, 모세는 모두 대단히 뛰어난 관리의 천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들입니다. 관리의 개념은 이전에는 1천 위안의 가치였던 사람이 이곳에 와서 훈련받은 뒤 1만 위안의 가치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 가치는 점점 더 높아져 이곳에 옴으로써 복을 받게 됩니다. 예전에 땡전 한 푼 없어서 인색하던 사람이 이제는 도량이 넓고 관대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베드로 일행은 일곱 집사를 세웠지만, 그 일곱 집사가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리더들이 제대로 돌보지 않고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맡겨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면, 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다시 묻습니다.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수관을 고쳤다고 해서 제가 배수관 수리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간단합니다. 물이 새지 않게 하는 것이고, 물이 새지 않게 하는 핵심은 테이프를 제대로 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각(悟性)'입니다. 제자와 관리의 개념은 한 신자를 진정한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여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교회의 부흥에 대한 개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7)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흥으로 치자면 이미 예수님 생전에 강력하게 일어났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다고 하는데, 만약 교회에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모입니다. 저도 예전에 그렇게 해본 적이 있습니다. 닭구이, 오리구이, 소고기 장조림 등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았습니다. 불과 1년 만에 교회의 사람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결국 먹기만 좋아하는 식충이들만 끌어모아 얼굴에 여드름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곧 부흥입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졌습니까? 수년 전부터 저는 교회의 사람 수는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왕성하지 못한 현실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단계 판매를 하거나 건강식품, 보험을 파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으니 사람을 끌어모으기 쉬웠고, 예배가 끝나면 자기 상품을 홍보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왕성하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쇼핑몰에도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도가 흥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육신을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연휴에 수억 위안을 소비하며 먹고 마신다 한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졌다거나 교회가 부흥했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정한 제자의 수만이 교회의 부흥을 대변합니다. 따라서 화인 사명신학의 기준은 매우 높습니다. 들어왔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과 가르침, 깎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매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를 깊이 연구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의 말씀의 왕성함이 사람 수와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교회가 머릿수로 부흥을 가늠하지만, 저의 관리는 결코 사람 수를 보지 않고 여러분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봅니다. 지금까지도 여러분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의 말씀의 흥왕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제자가 많아지자 원망이 많아졌다는 구절을 읽고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온종일 기도와 말씀에만 힘쓰고 관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관리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기뻐했다"는 수준까지 이르면 매우 비상식적인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행전》 6:5)
늘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각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잘못된 부분이 어디인지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한 코드가 실행되지 않는데도 내버려 둔다거나, 만든 자동차가 굴러가지 않아 뒤에서 밀어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날지 못하고,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달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만들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웠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없고 분쟁과 원망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만 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들을 따라 하다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신속하게 회개했습니다. 문제를 전혀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안의 착각과 미혹을 제거해야 합니다. 화인 사명신학의 가장 강력한 점은 기독교 신앙의 온갖 미신적 오해를 타파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도행전》 6장을 무조건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설교하지만, 저는 누가와 사도 바울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이면을 짚어냅니다. 사람이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기업도, 학교도, 교회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할지라도, 사람이 엉터리로 행하는 것까지 무작정 덮어줄 수는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전념한다는 착각
기도와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유일한 책임은 아닙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하며, 교회의 리더는 다스림의 책임을 지고 교회를 관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영적 지각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과 지식이 필요합니다. 무지는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와 설교에만 전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사명은 하나님의 양 떼를 올바르게 양육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곁길로 빠집니다.
저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 방식이 옳은지 반문합니다. 저는 자주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이 생각합니다. '2+3을 8이라고 계산하는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그렇게 고심할 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십니다.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제 손에 들어온 문제들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만 힘쓰겠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논리에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집 인테리어만 해도 수도와 전기 작업을 제가 직접 배워서 해냈고 수많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와 접촉하면 일이 많아져서 힘들다고 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혹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성장시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설교만 외치는 것은 실질적인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관리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서 그들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기꺼이 당신의 다스림을 따를 것입니다. 제가 집중하는 관리는 목회자들을 훈련하여 그들이 저를 도와 교회를 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를 훈련하는 데 쏟으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제대로 훈련하지도 않은 채 일곱 집사만 덜컥 세웠습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힘쓴다며 아무것도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무기력해지고 맙니다.
숫자를 맞추려는 착각
어떤 이들은 왜 열두 사도인지, 왜 열두 지파인지,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묻습니다. 사실 이는 숫자를 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사도 베드로 시대에 유다가 자살하여 열두 사도가 열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열한 사도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니 열두 사도가 서서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왜 여섯 명이 아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6이라는 숫자가 불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66은 마귀의 숫자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여섯 명만으로는 안 되니 기어이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끼워 넣어 숫자를 채웠고, 결국 그는 '니골라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라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굳이 유다의 빈자리를 억지로 채우려 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미신적인 형식에 얽매이기를 좋아하지만, 저는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세 명이 있으면 세 명으로 하고, 있는 그대로 진행하며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요즘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보면 4층이 없고 3A 다음 바로 5층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4를 싫어해서 건너뛰는 것인데, 솔직히 미신일 뿐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후로는 더 이상 숫자를 채우는 일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상황에 맞게 가면 됩니다. 제자를 훈련할 때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이든 상관없으며 굳이 일곱 명을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네 번째가 되어도 좋습니다. 저 자신도 네 번째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4가 '죽을 사(死)' 자와 발음이 같아 나쁘다고 하지만, 저는 죽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수의 착각
베드로 일행은 집사들이 식탁을 섬기는 목표, 방법, 전략이 무엇인지, 사람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눈을 감고 손을 얹어 기도하기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지혜로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고는 눈을 떠보니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이 말을 우스갯소리로 듣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안수만 받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집에 가면 저절로 지혜로워질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믿음을 가지면 집에 가서 오히려 더 어리석어질 뿐입니다.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지만, 이는 일종의 착각입니다. 사도가 기도하고 머리에 손을 얹어주면 다 해결될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실질적 효력이 없습니다.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6:6)
제가 당신에게 안수하고 나서 특정한 사역을 맡긴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의식을 나타낼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예식도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체계적인 관리와 영적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관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고 지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떠나 신비주의적인 것에만 매달린다면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화인 사명신학은 예언 따위에만 치중하는 교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완전한 교회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우리의 기준 또한 매우 높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화인 사명신학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세워간다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착각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이 신앙의 전부라고 오해합니다. 성령 충만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기만 하면 손가락으로 다리를 그려 건너듯 단숨에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해서 내일 당장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는 턱걸이 입학도 어렵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능력을 덧입게 되지만, 그것이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결코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성경을 깊이 읽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철저히 하십시오. 회계사는 회계를 완벽히 파악해야 하고, 변호사는 법률을 명확히 알아야 하며, 건축가는 건축 지식을 확실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허황된 착각 속에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 충만이 모든 현실적인 배움을 대체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맹신에서 벗어나십시오. 저는 종종 몇 년 몇 월 며칠에 거듭났다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어떻게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그날 성령이 임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지혜도 부족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에 대한 착각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음식 나누는 일을 관리하도록 세워졌습니다. 성경에는 스데반이 그 일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하고 은혜와 권능을 받아 민간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도행전》 6:8-10)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명신학이 강조하는 교회의 관리는 영적 지각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온통 깊은 지각과 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표적과 기사,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복음을 증언했지만, 우리가 전하는 도가 결코 표적과 기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의 환상에만 갇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명신학 안에서도 수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지만, 우리는 거기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사람들을 얽매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는 기적의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는 표적과 기사도 사모하지만, 동시에 지각으로 하나님을 충만히 알아야 하며 교회의 올바른 관리도 이루어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관리의 책임을 짊어질 준비가 되었습니까? 나이가 많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 대지 마십시오. 모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이제 겨우 60대이면서 늙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주저앉겠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죽을 날은 아직 멀었으니, 열심히 사역하십시오."
우리는 지각 안에서 끊임없이 영적 돌파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표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 그분의 뜻대로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 세계에서 계속 승리해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미혹하며, 우리는 아직 미혹하는 마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준비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미혹의 영은 거대합니다. 곧 사탄이며 옛 뱀으로서 매우 교활합니다. 현재 우리의 지각 수준으로는 그 계략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영적 지각 안에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여 결코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일을 많이 해서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합니다. 겉보기에는 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며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미혹의 논리입니다. 제가 몇 가지 전형적인 예를 들었지만, 설령 지금까지 속아왔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구하고 성장하여 미혹에서 걸어 나오면 됩니다.
천사에 대한 착각
베드로 일행은 스데반에게 식탁을 관리하도록 맡겼으나, 그는 관리에 전념하기보다 날마다 변론하기에 바빴습니다. 사실 말싸움은 무의미합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자신이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낮추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끊임없이 달변으로 논쟁을 이어갔고, 상대방이 말로 당해내지 못하자 결국 그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 6:11-15)
사람들이 천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습니까? 영계에는 독특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소는 하늘의 소의 형상대로, 말은 하늘의 말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천사는 하늘의 다양한 피조물의 형상대로 지어져 각양각색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본문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마치 천사처럼 되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 가장 위대합니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도 천사에 대해 언급하듯, 당시 유대인들은 천사를 숭배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천사는 부리는 영(섬기는 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각이 분명하지 못하면 이런 신비주의적 환상에 빠지게 됩니다.
누가가 이를 기록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지만, 사실 사람들은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날개 달린 귀여운 푸른 눈의 아기 천사 인형처럼 상상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천사의 참모습이겠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가졌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적 지각으로 하나님을 충만히 알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뜻을 깨달아 그분의 말씀대로 행할 때 비로소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누가는 천사의 이름만 들먹이기 좋아하는 이들을 은근히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화인 사명신학 안에서 천사에 대한 이야기나 음성을 들었다는 것, 환상을 보았다는 류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길지 않지만 저는 한 시간 넘게 설교했습니다. 신앙의 착각과 오해를 다 파헤치자면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정립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적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충만히 알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가운데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잘 다스리고 관리하며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