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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2025-09-07 1,719 有福系列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 설교 제목은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입니다. 이 설교는 참으로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느껴본 지 참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하고 통회함이 없으니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리더부터 동역자까지, 동역자부터 목회자까지, 목회자부터 소그룹 목자까지, 소그룹 목자부터 형제자매에 이르기까지 다들 “나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잘하고 있어”라고 느끼게 되고, 그러다 문제가 터집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저 스스로 만족하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면 큰일입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태도를 보시고, 사람을 택하실 때도 태도를 보십니다.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 태도를 보듯, 태도가 많은 일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잘생기고 예쁜지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작은 실수를 했든 큰 실수를 했든 그것보다 당신의 태도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아내로 삼은 이야기를 해봅시다. 왜 그랬을까요? 밧세바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전장에서 돌아와 자기 아내와 동침하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라, 이 아이가 왜 이렇게 다윗을 닮았지?’ 하고 다들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아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다윗은 희고 고왔는데, ‘어째 자랄수록 다윗을 닮아가지?’ 다행히 그 시절에는 친자 확인 검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으니, 이야기대로라면 다 끝난 일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기만 하면, 웅성거리며 귀신 떼가 몰려와 “다윗, 너 정말 악하구나” 하고, 또 귀신 떼가 와서 “네가 우리아를 죽였지! 밧세바를 빼앗았지!”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합창단처럼 여러 성부로 나뉘어 다윗의 범죄를 노래하며 귀신들이 신나서 날뛰었습니다.

다윗은 이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떼 지어 몰려오는 귀신들과 빗발치는 소리들이 보이고 들렸습니다. “다윗, 너는 구제불능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제가 묻겠습니다. 다윗이 “나는 참소를 거절한다, 저주를 거절한다, 물러가라!”고 외쳤을까요? 소용없습니다. 안 먹힙니다.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피 흘린 죄를 지으면 귀신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내면에는 한 가지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회개하겠다, 고치겠다”라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고쳤을 뿐만 아니라 시편 51편을 썼습니다. 우리 설교 제목이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이지 않습니까? 내가 고치겠다는 것, 이것이 태도입니다. 단순히 우리아를 죽인 것 때문에 귀신이 종일 괴롭혀서 그를 사울처럼 만들려고 했고, 다윗도 거의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만약 이때 다윗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터지면 저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몇 번이고 거듭해서 변명합니다. 사실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동이 합리적이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아, 듣는 제가 다 답답합니다. 무엇을 변명합니까? 변명한다고 해서 당신의 잘못이 정당화됩니까?

다윗이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지구인들의 방식대로 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실 제 탓만은 아닙니다. 저 여자가 대낮에 거기서 목욕하면서 저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걸 보고 어떻게 참습니까? 그날 또 제가 양고기탕에 구기자까지 넣어 마셔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데려와 동침했고, 임신을 해버렸습니다. 안 그랬으면 제가 어떻게 남편인 우리아를 죽였겠습니까? 제 잘못이 아닙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께 그렇게 말했다면 끝장났을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사울과 같은 병, 즉 정신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데려온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된 것 같았지만, 정신병의 영이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정신병과 우울증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는데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상태, 이해가 되십니까? 골반이 아프거나 무릎, 목 디스크, 두통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귀신이 왔는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왜 귀신이 왔습니까? 다윗이 죄를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과를 지워주실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시편 51편을 써서 온 천하에 공개하고 온 백성이 읽고 배우게 했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다윗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자신이 직접 말한 것입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온 나라 백성에게 알려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상하고 통회함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온 백성이 알게 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고 나서야 이런 습관이 생겼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이건 내 잘못이니 바르게 바로잡아야겠다.” 이해되십니까?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이런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일이 많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드십니까? 상하고 통회함에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등급을 매긴다면 여러분은 몇 단계입니까?

사기를 당했을 때 상하고 통회합니까? 떼인 돈 생각만 하느라 상하고 통회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기꾼이 죽도록 밉지 않습니까? 다윗은 어릴 때부터 이런 태도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훈련되었는지 아십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세 살 때 고집불통이면 커서 반드시 어리석어집니다. 세 살 때부터 바로잡을 줄 알고 어릴 때부터 어떻게든 바르게 고치려고 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기에 다윗은 어릴 때부터 대단했습니다.

다윗이 어릴 때부터 왜 늘 회개하고 끊임없이 조율하는 태도를 가졌는지 제가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전에 어떻게 훈련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어릴 때 이런 습관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 안에는 그런 옹고집이 없었습니다. 고집 센 사람들을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계속 앞으로 가면 바다로 빠지는데도, “어제도 여기 지나갔는데 누가 다리를 없앤 거야?”라고 합니다. 다리가 철거되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고집 센 사람들은 정말 이렇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일을 바르게 바로잡는 것을 좋아했고, 제대로 안 되면 끝까지 매달려 바르게 고쳐놓았습니다. 나중에 자라서 보니 많은 일에서 고생을 훨씬 덜 하게 되었습니다.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라, 이 일이 왜 이렇게 빗나갔지? 뜯어고쳐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 코드가 왜 이렇게 엉망이지? 갈아엎고 다시 짜야지.’

고치기 싫어서 원래의 엉망인 코드 위에 덧붙이기만 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틀렸는데 위에 덧붙여봐야 헛수고입니다. 아이가 공부해서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대학 가서 뭐 하려고?” “아니에요, 난 무조건 대학 갈 거예요.” 대학 졸업하고 일하러 나가면 어떻게 할 겁니까? 대학에서는 돈을 써서 과제를 대신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졸업 후 직장에 가면 누가 대신 일해 줍니까? 제 말대로라면 월급 1만 위안 받으면서 2만 위안짜리 사람을 써서 일 시키는 꼴이니, 매달 1만 위안씩 손해를 보는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돈만 많고 멍청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어릴 때부터 기초를 잘 닦아야 하며, 잘못되었으면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상하고 통회했는지 아십니까? 우리아를 죽인 후, 그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잤습니다. 왜 마음이 편안했을까요? 스스로가 너무 괜찮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평안하고 주변 나라들을 다 굴복시켰으며, 나에게는 최강의 군대와 최고의 원수, 최고의 장군들이 있다.’

그리고 다윗은 밤에 술을 한잔하고 푹 잔 뒤, 다음 날 아침에 시계를 보고 9시까지 더 자고, 10시까지 자고, 오후 2시까지 잡니다. 4시에 일어나 기지개를 켭니다. 발코니에 나가 기지개를 켜다가 눈을 떴는데, 희미하게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점점 또렷해졌습니다. 바로 옆집이었습니다.

다윗은 평생 큰 잘못을 거의 저지르지 않았지만, 딱 한 번 ‘나 자신 꽤 괜찮네’ 하고 자만했을 때 큰 문제가 터졌습니다. 어릴 때 그는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어린 다윗은 17세가 아니라 11, 12세쯤부터 양을 쳤을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들려주신 참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치며 서당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더랍니다.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돈이 없으니 남들은 교실에서 배우는데 자기는 소를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당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몇 마디 엿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다윗도 11, 12세에 양을 쳤습니다. 11, 12세 아이가 허리에 낫을 차고 양을 치러 갔는데, 늑대가 나타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양이 늑대에게 물려가면 다윗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집에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린아이는 분명 눈물 콧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도우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윗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그가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물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줄과 가죽 조각으로 탁 물매를 만들고 돌을 주워 휙 돌려 던졌습니다. 잘 날아갔습니다. 늑대가 올 때만 돌을 던졌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무에 망고나 사과, 키위 같은 열매가 열려 있으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우리 어릴 때 새총으로 참새를 쏘던 것처럼요. 새가 작은 사과만 한데 돌을 던져 빗나가면, 왼쪽으로 치우쳤으니 오른쪽으로 조절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조절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이 과정이 바로 상하고 통회함입니다. 맞히지 못했다고 포기하겠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연습하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빗나가면 오른쪽으로, 오른쪽이면 왼쪽으로, 위로 빗나가면 아래로, 아래면 위로 조절했습니다.

결국 백발백중의 실력이 되었는데, 이것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고침’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형제자매들처럼 잘못해놓고도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일도 엉망진창으로 흐리멍덩하게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손해배상 안 물어내면 다행입니다.

무엇이 고침입니까? 왼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으로 맞추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맞추는 것이 고침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것이 고침입니다.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그대로 둔다면 고친 것입니까? 안 고치면 다음에도 똑같이 엉망일 뿐입니다. 계속 조율하고 고쳐나가니 점점 더 좋아졌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연습을 다 마친 후 늑대가 어린 양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늑대가 다윗의 돌보다 빠를 수 있겠습니까? 늑대를 명중시켜 죽였습니다. 입에 물린 양을 맞혔습니까, 늑대를 맞혔습니까? 늑대를 맞혔습니다. 흑곰이든 불곰이든 사자든 호랑이든 무엇이든 다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 최첨단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쟁을 보면 미사일로 수천 킬로, 수백 킬로 밖에서 타격합니다. 사람을 보내 버튼만 누르면 끝나는 줄 아십니까? 그때도 원거리 타격, 즉 오늘날의 가시거리 밖 교전 능력이 필요했는데, 당시 다윗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눈물과 콧물을 흘렸을지 셀 수 없습니다. 겨우 11, 12세 아이가 고생이 많았지만, 평생의 실력을 연마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는 혼자 양을 치며 “흥, 형들은 집에서 편히 쉬는데 나만 괴롭히고 양 치러 보낸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양을 제대로 잘 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하나 제대로 못 치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계승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양을 얼마나 잘 쳤습니까? 온 천하에 야곱보다 양을 더 잘 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들은 일을 대충대충 히히덕거리며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하면 고치고, 제대로 안 되면 제대로 될 때까지 바로잡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하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고 택함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실수 속에서 끊임없이 정리해야 합니다. ‘이게 잘못되었네, 정리하자. 저게 잘못되었네, 정리해서 바로잡자.’ 이것이 바로 고침입니다.

‘이거 잘못했으니 난 망했어’, 다음에 또 잘못해서 ‘망했어’, 또 잘못해서 ‘망했어’... 그렇게 계속 틀리기만 하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안 됩니다. 말해도 안 듣고, 들어도 이해 못 하고, 이해해도 행하지 않고, 행해도 틀리게 하고, 틀려도 안 고치고, 고치라고 해도 불복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라고 내면의 소리가 없었겠습니까? 힘들 때 “포기해라, 아버지는 널 안 좋아해, 다들 널 괴롭히잖아” 하는 소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소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에 순종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11, 12세의 어린아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향해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부드러워야 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이 겸손입니까? ‘내가 잘못했으니 바로잡겠다’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훗날 다윗이 택함을 받을 때 사무엘이 왔습니다. 사무엘은 그 시대 가장 유명한 최고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다윗의 집에 왔는데, 사람들은 다윗에게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이 다 모였고 사무엘이 보기에 이 사람도 괜찮고 저 사람도 괜찮아 보였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 좋아 보이는데 왜 아무도 아닐까요?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물으니, 막내아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반드시 데려오라고 해서 데려왔더니 바로 그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고집부리지 마시고, 자기가 대단하다거나 괜찮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늘 나를 억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양을 치고 사자, 호랑이, 늑대를 상대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품을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택함받는 것은, 아직 택함받기 전 어릴 때부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알고 겸손히 뉘우칠 줄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늘 부족하고 잘못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넘치고, 자기는 늘 잘하는데 다 남 탓이라고 여깁니다.

얼마 전 한 사업가를 만났는데, 그 아들은 마흔이 넘도록 돈은 한 푼도 못 벌고 쓰기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아버지가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다며 당당하게 따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평생 돈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다윗이 택함받고 훗날 위대한 다윗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진정으로 배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1, 12세에 소 치고 양 치느라 학교 갈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양을 치면서 스스로 배운 것 아닙니까? 훗날 다윗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다윗이 썼는데, 대부분 독학으로 배운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고치자.”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면 “코드가 틀렸네, 고쳐서 제대로 만들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잘못되었네, 고치자.” 사람은 이것저것 관찰하며 스스로 지식을 흡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본말이 전도됩니다. 왜 그럴까요? 배움이어야지 주입식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교사를 붙여봐야 머릿속이 복잡해질 뿐입니다. 사람은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움으로써 성장합니다. 왜 학습이라고 합니까?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가르침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귀를 알아들으셨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건이 좋든 나쁘든 사람은 배울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힘겹게 기고 구르며 배워왔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곁눈질로 보며 배웠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직장에서 누가 친절히 가르쳐주려 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누가 가르쳐주겠습니까? 다 스스로 험난하게 부딪히며 배운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에게 큰 도전이 될 만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못했지만, 저는 배울 줄 알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윗에게는 이런 태도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잘못했으면 고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모르면 배우고, 잘못했으면 고치는 것입니다. 밧세바 사건 때도 자신이 잘못하여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 되자 그는 말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계속 이러다간 큰일 난다. 나는 미치광이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남의 아내를 범했다는 것을 온 나라 백성이 다 알게 하겠다.” 이해되십니까? 내가 고치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할 때 속이 쓰립니다. 제가 동역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말은 딱 한마디입니다. “아, 이게 잘못된 거군요. 그럼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바른 것은 이것이다.”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저는 시간을 들여 가르쳐줄 수 있고, 힘을 다해 시범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태도, 고치려는 태도가 없으면 어떻게 해도 안 됩니다.

“당신 어리석습니까? 정말 어리석군요”라고 제가 말했을 때, “아, 제가 어리석었군요. 목사님, 어떻게 해야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반응을 원합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내가 어리석다고요? 그래요, 나 바보예요. 우리 자매 둘 다 바보예요”라고 한다면 무슨 생각입니까? 잘못을 지적했는데도 안 고칩니까? 말해도 안 고치는 것은 태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실 때 태도가 올바른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잘못했으면 고치는 태도입니다. 체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죽였을 때 우쭐대며 거만해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군대를 통솔하게 되어 천부장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혼자였다가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 되어 1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중에 미리 알고 있던 것이 있었겠습니까? 다 나중에 배운 것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것도 어릴 때 연습한 물매 덕분이었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백전백승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을 살고 싶다면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작년에 성장하셨습니까? 재작년에는요? 지난 5년 동안 성장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입니까? 무엇이 성장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성장하겠습니까?

훗날 다윗이 사울의 딸과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200개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 아닙니까? 사울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까요? 알았지만 그의 태도는 올바랐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 후 다윗은 쫓기면서도 늘 잘못을 바로잡는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쓴 시편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내 눈물이 침상을 적시고 요를 띄우나이다.” 고단한 인생의 상태를 참으로 생생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곳을 최고의 배움터, 최고의 교실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세상 대학이 아니라 도망과 추격의 대학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하나님, 언제 저를 구원하시겠습니까?” 그런 고뇌, 괴로움, 절망, 실망, 염려 속에서 때로는 욕이라도 한마디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지난 설교에서 다윗이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을 뿐입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겉옷자락만 베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습니다. 다윗의 평생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도 내가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으니, 잘못한 것들을 다 바로잡자’라는 논리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 됩니다. 다윗이 인색한 나발(아비가일의 남편)을 거의 죽일 뻔했을 때도 번쩍 깨닫고 “내가 고치겠습니다. 내 잘못입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딱 이 한마디입니다. 잘못했으면 고치는 것입니다. 어젯밤 밤새 스마트폰을 보았다면 “내가 고치겠습니다” 하고 상하고 통회하며 고치는 것입니다. “내 속이 너무 더럽습니다. 하나님, 나를 정결케 하소서.”

평생 바로잡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잡으려는 태도입니다. 고치려는 태도를 갖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아플 때 제게 연락하시면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 드립니다. 그것이 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치고 변화되어 복을 받는 것을 볼 때 저는 훨씬 더 기쁩니다. 여러분의 복된 간증을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다윗을 배웁시다.

본문 말씀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기도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이 바로 다윗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축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저와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제 마음이 주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가 부드러워지게 하옵소서.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고집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자주 범죄하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구하오니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잘못을 보게 하시며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하나님, 제 입으로 “내가 잘못했습니다, 고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태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 주님의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기뻐하셨다면 진작 드렸을 것이나, 제가 주께 드릴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뿐입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형상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사오니, 지금 나를 바로잡아 주시고 고쳐 주옵소서. 주여, 주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영원토록 나를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님이 필요합니다. 평생토록 주님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은 다윗의 깊은 성찰입니다. 반성문을 쓸 줄 모른다면 다윗이 쓴 것이 표준적인 성찰입니다. 그는 무엇을 성찰했습니까?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후 마음이 몹시 괴로웠던 것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아, 저들이 나를 참소하네”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참소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으며, 이혼도 하지 않은 여인과 아이를 가졌으니 참으로 파렴치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파렴치합니다. “아, 참소가 오네. 난 참소 안 들어. 너희의 저주와 참소를 거절한다!”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헛소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억지 부리지 않았습니다. “참소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나는 참소받아 마땅하다.” 무엇을 거절합니까? 거절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귀신들이 종일 떠들어대며 괴롭히고 마음을 어지럽혀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참소하는 영을 꾸짖고 물러가라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통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 이래서 저랬고 저래서 이랬습니다” 하며 자기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변명하지 마십시오. 걸핏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변명하니 듣는 사람도 괴롭고 본인도 괴롭습니다. 태도를 바르게 하십시오. “내가 잘못했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사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다윗보다 훨씬 더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고치면 됩니다. 따지지 말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인식입니다. “하나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또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성찰도 기록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습니까? 죄가 내 문 앞에 도사리고 있어서 몇 번은 이겼지만 이번에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마귀의 억압이 떠오릅니다. ‘아니야, 나는 왕인데 왜 비굴하게 온 백성에게 확성기를 대고 선포해야 하지? 나는 다윗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 남의 아내를 훔치고 남편을 죽였으며 지금 그 여자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 얼마나 망신스럽고 창피합니까? 어떻게 입 밖으로 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이 사실을 만천하에 밝혔습니다. 이렇게 수치를 드러내고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요?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이해되십니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다윗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척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능력으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정직한 태도는 모든 태도 중에 가장 훌륭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 구할 때는 거짓말을 꾸며대지 마십시오. 면접 볼 때는 지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숨기지 마십시오. 소용없고 숨겨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십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은 훤히 다 아십니다. 속속들이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완악함입니다. 다윗이 살인하고 피를 흘리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하고 아이를 낳는 죄를 범했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뿐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결코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를 따르십시오. “통회가 무슨 뜻이지?” 하며 문자적으로만 따지지 말고 진짜로 실천합시다. “내가 이 일을 잘못 처리했으니 나 자신을 엄격히 다루어 고치겠다.” 이 세상의 모든 뛰어난 인물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가며 위대해졌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든 물리학자든 마찬가지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로켓을 쏘아 올릴 때 얼마나 많은 기술적 세부 사항을 수정했겠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완악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훌륭해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런 인식이 있다면 회개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다는 말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죄인입니다, 고치겠습니다” 말만 하고 안 고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임을 알고, 이 일이 잘못되었으면 이 일에서 고치고, 저 일이 잘못되었으면 저 일에서 고치며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제 말은 핵심을 찌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부족함을 알아야 하며, 부족함을 안다면 죄인의 생각을 더 이상 고집하지 마십시오. 죄인의 생각을 고집해봐야 상황만 더 나빠질 뿐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귀신을 끌어당기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귀신을 끌어당기는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로 바꾸어야 합니다. 고치는 것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끊임없이 고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도 날 때부터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죄인이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자라 11, 12세에 양을 칠 때까지 배운 모든 것, 조율해 온 모든 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안에 장착된 논리 체계는 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습니까? 자신을 엄격하게 쳐서 복종시켰습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므로 모든 것은 후천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배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논리 체계도 배워서 얻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면 이제 배우고 바로잡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편 51:1-4)

주님의 판단이 당신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죄인이라 부르시는 것은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저 역시 가끔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리석다고 말했다 해서 영원히 어리석은 채로 끝나겠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님이 나를 저주하니 거절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거절하는 것입니까? 거절해봐야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자신의 죄과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죄가 우리 앞에 있고 귀신이 수시로 우리 몸에 붙습니다. 귀신이 붙어 있는데 사람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이지, 헛된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닭을 바칩니다, 오리를 바칩니다, 돼지 한 마리를 바칩니다.”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딴소리하지 마십시오. 오직 이것만 붙드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늘 잘못하고 거의 모든 일에서 실수투성이입니다. 고치겠습니다. 하나님, 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옵소서.”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복잡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이 평생 살면서 제대로 바르게 해내는 일이 사실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4-17)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러므로 이런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저 꽤 괜찮지요?”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하루 지나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가 꽤 괜찮다고 여긴다면 조만간 큰일이 터진다는 신호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윗도 시편 51편을 쓰기 전까지는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자랑할 거리도 많았습니다. “내가 골리앗을 죽였으니 참 위대하지. 양을 칠 때도 사자나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게 지켰으니 대단하지. 이제 이스라엘을 이끄는 왕이 되었고, 도망자 시절에도 큰 죄를 짓지 않았으며, 왕이 된 지금도 내가 출전하기만 하면 대적들이 패하니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니까.” 그러다 보니 마음이 풀려 다음 날 해 질 녘까지 늘어지게 잤던 것입니다. 해 질 녘에 한 여인의 알몸이 눈앞에 나타나자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괜찮은 나’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하나님만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으며, 비로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마음속에는 늘 깊은 염려와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이 부분이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는데... 하나님, 교회가 이 단계에 이르렀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아직 바로잡지 못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제 마음속에는 일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누가 와서 “목사님, 이 부분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면 저는 “내가 잘못한 부분이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바로잡으려 애쓰는 중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태도가 중화권 교회의 신학적 정수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화려한 이력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이력서를 쓰라면 눈부신 성과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증명합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을 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중심의 진실함입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시편 51:6)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잔꾀를 부리거나 속이려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세를 부리지 말고 중심이 진실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하십시오. 저지른 일에 대해 더 이상 변명하지 마십시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주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마음과 진실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과거에 자기가 잘했던 일을 자랑할 때가 아닙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왜 어리석어집니까? 남편이 “당신 이것 잘못했잖아” 하면, 아내는 “내가 저건 잘했잖아!”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러니 어리석어지지 않겠습니까? 변명하지 마십시오. “내가 잘못했습니다.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자주 잘못 이해하곤 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살면서 병들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상하고 통회함이 없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늘 일을 그르치고 결과가 엉망진창이면서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가 부족하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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