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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사도행전 15장 -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2023-08-30 49,474 使徒行传 使徒行传第十五章 使徒行传15章 看透生死 对付肉体 明白神的心意 持守纯正的福音

相关经文

使徒行传15章-耶路撒冷会议
  • 1 有几个人从犹太下来,教训弟兄们说:“你们若不按摩西的规条受割礼,不能得救。”
  • 2 保罗、巴拿巴与他们大大地纷争辩论;众门徒就定规,叫保罗、巴拿巴和本会中几个人,为所辩论的,上耶路撒冷去见使徒和长老。
  • 3 于是教会送他们起行。他们经过腓尼基、撒玛利亚,随处传说外邦人归主的事,叫众弟兄都甚欢喜。
  • 4 到了耶路撒冷,教会和使徒并长老都接待他们,他们就述说 神同他们所行的一切事。
  • 5 惟有几个信徒是法利赛教门的人,起来说:“必须给外邦人行割礼,吩咐他们遵守摩西的律法。”
  • 6 使徒和长老聚会商议这事;
  • 7 辩论已经多了,彼得就起来,说:“诸位弟兄,你们知道 神早已在你们中间拣选了我,叫外邦人从我口中得听福音之道,而且相信。
  • 8 知道人心的 神也为他们作了见证,赐圣灵给他们,正如给我们一样;
  • 9 又藉着信洁净了他们的心,并不分他们我们。
  • 10 现在为什么试探 神,要把我们祖宗和我们所不能负的轭放在门徒的颈项上呢?
  • 11 我们得救乃是因主耶稣的恩,和他们一样,这是我们所信的。”
  • 12 众人都默默无声,听巴拿巴和保罗述说神藉他们在外邦人中所行的神迹奇事。
  • 13 他们住了声,雅各就说:“诸位弟兄,请听我的话。
  • 14 方才西门述说 神当初怎样眷顾外邦人,从他们中间选取百姓归于自己的名下;
  • 15 众先知的话也与这意思相合。
  • 16 正如经上所写的:‘此后,我要回来,重新修造大卫倒塌的帐幕,把那破坏的重新修造建立起来,
  • 17 叫余剩的人,就是凡称为我名下的外邦人,都寻求主。
  • 18 这话是从创世以来显明这事的主说的。’
  • 19 “所以据我的意见,不可难为那归服 神的外邦人;
  • 20 只要写信,吩咐他们禁戒偶像的污秽和奸淫,并勒死的牲畜和血。
  • 21 因为从古以来,摩西的书在各城有人传讲,每逢安息日,在会堂里诵读。”
  • 22 那时,使徒和长老并全教会定意从他们中间拣选人,差他们和保罗、巴拿巴同往安提阿去;所拣选的就是称呼巴撒巴的犹大和西拉。这两个人在弟兄中是作首领的。
  • 23 于是写信交付他们,内中说:“使徒和作长老的弟兄们问安提阿、叙利亚、基利家外邦众弟兄的安。
  • 24 我们听说,有几个人从我们这里出去,用言语搅扰你们,惑乱你们的心。(有古卷加:你们必须受割礼,守摩西的律法。)其实我们并没有吩咐他们。
  • 25 所以,我们同心定意,拣选几个人,差他们同我们所亲爱的巴拿巴和保罗往你们那里去。
  • 26 这二人是为我主耶稣基督的名不顾性命的。
  • 27 我们就差了犹大和西拉,他们也要亲口诉说这些事。
  • 28 因为圣灵和我们定意不将别的重担放在你们身上,惟有几件事是不可少的,
  • 29 就是禁戒祭偶像的物和血,并勒死的牲畜和奸淫。这几件你们若能自己禁戒不犯就好了。愿你们平安!”
  • 30 他们既奉了差遣,就下安提阿去,聚集众人,交付书信。
  • 31 众人念了,因为信上安慰的话就欢喜了。
  • 32 犹大和西拉也是先知,就用许多话劝勉弟兄,坚固他们。
  • 33 住了些日子,弟兄们打发他们平平安安地回到差遣他们的人那里去。(有古卷加:34惟有西拉定意仍住在那里。)
  • 34
  • 35 但保罗和巴拿巴仍住在安提阿,和许多别人一同教训人,传主的道。
  • 36 过了些日子,保罗对巴拿巴说:“我们可以回到从前宣传主道的各城,看望弟兄们景况如何。”
  • 37 巴拿巴有意要带称呼马可的约翰同去;
  • 38 但保罗因为马可从前在旁非利亚离开他们,不和他们同去做工,就以为不可带他去。
  • 39 于是二人起了争论,甚至彼此分开。巴拿巴带着马可,坐船往塞浦路斯去;
  • 40 保罗拣选了西拉,也出去,蒙弟兄们把他交于主的恩中。
  • 41 他就走遍叙利亚、基利家,坚固众教会。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사도행전》 1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수년간 《사도행전》 15장은 저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사명 신학, 곧 화인 사명 신학을 세우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바로 이 장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의 주제를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려 함’으로 정했습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에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1-5)

이 몇 구절이 당시의 역사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울은 사역의 길에서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바울이 직면한 도전

사실 우리는 사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도전에 직면합니다. 과거에 교회가 너무 작았을 때는 언제든 짓밟혀 죽을 수 있는 개미와 같았고, 현실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당신이 잘하든 못하든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이 바로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었으며, 교회 안에서 그의 입지는 불안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바울에게 물러나라는 편지 한 통만 쓰면, 바울의 사역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매우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바로 그곳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으므로 바울은 그들과 비교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몇몇 유대인들이 내려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사도행전》 15:1)

그들에게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셨으니,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할례를 지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무리는 바울 같은 하찮은 인물이 감히 자기 손에 복음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울에게 지혜가 조금이라도 없었다면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입지가 불안정했고, 비록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그곳에 도착한 뒤 해야 할 일은 대단히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야고보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기 위해, 배후에서 당시 명망과 명성이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사상적 설득 작업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엄청난 도전에 부딪혔습니다. 이방인이 일단 할례를 받게 되면, 여러분과 저는 순전한 복음을 잃어버리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세까지 믿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바울이 지금이나 과거의 달음질이 헛될까 두려워했다고 말한 것은,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했다는 뜻입니다. 중앙 정부의 붉은 직인이 찍힌 공문처럼 편지 한 통만 내려오면 바울은 즉시 면직될 판이었으니, 당시의 정치적 환경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직면한 도전, 그리고 당시의 모든 기회를 분석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계속 거하게 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에게 왜 종일 근심에 싸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고 묻자, 바울은 현재의 정세가 좋지 않아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사역이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하며, 이때부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사도행전》 15:2-4)

기도는 기도대로 하되, 바울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야 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 사람들이 먼저 입을 열어 준다면 일은 쉽게 풀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만 한다면, 피를 먹지 말라거나 도둑질하지 말라거나 살인하지 말라는 등의 조항이나 선한 일을 좀 행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핵심만 얻어낸다면, 피를 먹지 말라면 안 먹으면 되고,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면 안 먹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어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사도행전》 15:19-20)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구약 《성경》을 상고할까요? 《구약》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당시 모세의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치우쳐 읽고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리킨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훗날의 영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직접 기록한 모세오경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지혜로웠기에, 예루살렘에 가서 그 사람들이 입을 열게만 만들면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일을 처리할 때도 지위와 명망이 있는 사람들과 사전에 먼저 조율을 마친 뒤에 전체 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가 열린다 하더라도 함부로 발언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탁월함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야고보를 찾아가 설득 작업을 벌인 것입니다. 이때는 상대방의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되며, 훗날 입지가 확고해진 뒤에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은 순전한 복음을 위해 먼저 인내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지혜로웠고 충분히 똑똑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 15:5)

바울이 사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를 설득했지만, 베드로와 야고보 역시 극심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적 민주적인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바리새파 출신의 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투표를 한다면 베드로와 야고보마저 낙선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며칠 동안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를 증언했지만, 바리새파 출신 신도들은 오직 한마디만 반복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태도는 대단히 완강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구원하셨는데, 이들의 말이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완고해지면 이처럼 어리석어집니다.

지금까지도 화인 사명 신학은 순전한 복음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이 토요일이라며, 토요일 주일 예배가 일요일보다 더 낫다고 여기며 온갖 쓸데없는 일들에 매달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것들은 반드시 청소해야 합니다. 과거 이런 교회 환경 속에서 《성경》에 맞지 않는 전통적 관념에 얼마나 많이 물들었습니까? 바리새파 신도들이 《성경》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들은 조문과 규정만 알았지,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여,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 상황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이 어떠한지, 그들이 관심을 두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했습니다. 기회는 바로 그렇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먼저 간략히 말씀드리고 나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일으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복음을 처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뜨거운 감자를 다시는 만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이 일로 다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여, 이 사람들이 날마다 파리나 모기 떼처럼 몰려와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야고보는 이 뜨거운 감자를 더욱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방인이 부정하여 접촉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며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은 수월해집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과 정치적 역학 관계를 명확하게 분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여 그가 얻고자 했던 것, 곧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야고보 가운데 거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야고보가 바울보다 윗사람이었고 야고보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 했으므로 바울과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직분이었기에,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우리 가운데 보존해야 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화인 사명 신학은 다른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지만,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반드시 우리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끄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태도

모두가 한참 동안 논쟁을 벌였지만, 베드로는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로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이방인 고넬료의 온 집안에 복음을 전했다가, 복음을 전한 직후 감옥에 갇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출옥 후 먼 곳으로 도망쳐 몇 년을 지내다가 나중에야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당시 체포된 원인을 분석해 주었는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추측이며, 분석이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이후로 베드로는 이방인을 보면 피하기 시작했고, 특히 바리새파 출신 사람들이 나타나면 마음에 걸림돌이 생겨 더욱 멀리 피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사도행전》 15:7)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무리 중에서 자기를 택하사 이방인들로 자기 입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도 훤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 일에서 완전히 발을 빼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미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했으니, 이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를 던져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은 자신이었고, 바울은 단지 자신의 부하이자 조력자일 뿐이니 관련 사안은 바울을 찾으라고 천명한 것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사도행전》 15:8-11)

베드로는 사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이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취했을 뿐입니다. 그는 단지 사람을 시켜 이방인에게 편지를 쓰도록 조치했습니다. 이방인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자신은 절대로 지키겠다는 식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바울과 베드로가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여러분과 저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으며 추측할 수밖에 없으니, 제 추측이 틀릴 수도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베드로가 더 이상 이방인의 사도 역할을 하지 않게 된 점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바울이 그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안디옥에는 주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베드로와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마음이 두려워져, 자기는 바울과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즉시 변명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니 그와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없고, 바울이 이방인들과 함께 있는 것은 베드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이방인의 사도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만 보면 발에 기름을 바른 듯 잽싸게 자리를 피했습니다. 주변에 야고보 쪽에서 온 사람이 없을 때는 괜찮아서 식사를 계속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쪽 사람들이 오기만 하면, 베드로는 자신이 단지 이 이방인들이 우상 제물을 먹고 있는지 점검하러 온 것뿐이라고 황급히 둘러댔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방인 사역을 떠넘겼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 자리마저 야고보에게 양보했습니다. 어떻게 양보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내내 호기심이 생겨 그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서, 하나님께 ‘베드로가 어쩌다 2인자로 밀려났습니까?’ 하고 간절히 묻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제가 계속 여쭈었더니,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는데 바로 《사도행전》 15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구출을 받은 후, 어느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베드로는 떠나기 전에 예루살렘의 치리권을 야고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돌아와 다시 지도자가 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야고보가 자신의 확고한 지지 기반을 이미 단단히 다져놓았기 때문인데, 그 기반이 바로 바리새파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훗날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이유는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어서도 아니고,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명분을 포기해서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순전한 복음의 길을 걷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길로 치우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들도 예수님을 주라 불렀지만,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는 당연히 야고보의 태도가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태도가 교회 안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도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태도

야고보의 내면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마치 상하이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특유의 우월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베이징 토박이들도 우월감이 있어서, 당신이 동북 사투리를 쓰면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야고보는 육신적으로도 대단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문가 출신으로 예수님의 친동생이었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곧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누가복음》 1:41-48)

야고보의 이러한 우월감은 전적으로 육에 속한 태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런 우월감이 있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사도행전》 15:19)

여러분은 이 말에서 우월감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을 때 육신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에서 비롯된 우월감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이 말은, 사실 야고보의 수하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그 말의 속뜻은 자신들은 유대인이니,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굳이 괴롭히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바울 일행을 지지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우월감을 느꼈을 뿐,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에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야고보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뜻은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되, 이방인들은 괴롭히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2등 시민이고, 자신들 유대인이야말로 1등 시민이니, 저 2등 시민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그들 가운데 계속 보존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사도행전》 15:20-21)

야고보는 모세의 글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낭독된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진정한 기준인 양 인상을 주었습니다. 2등 시민들에게는 기준을 굳이 그렇게 높게 잡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모세의 율법이 복음입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만 얻으면 그뿐이었으므로,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었습니다. 훗날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때쯤에는 이미 교회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대단히 막강해져 있어서, 누구도 바울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당시 바울의 지위는 이미 확고해졌고,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교회들의 확고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 의견에는 누구를 괴롭게 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헌금에 대해서는 부담 갖지 마십시오.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순전한 진리를 굳게 지키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사람의 뜻을 위하고 배려하느라 예루살렘 교회 신도들의 생각을 바꿀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의 동생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호해야 할 때는 ‘여러분 모두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모세의 율법을 지킨 결과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지금까지도 식민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까?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생식기에 작은 수술(할례)을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육신을 쳐 복종시키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의 내면에 깔린 태도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모세의 말이 각 성에서 전파된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영적 차원이 새로워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모세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엉뚱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전통을 진리로 착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야고보의 태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이런 설명을 들으면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고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제가 이렇게 분석한 것에 대해 여러분도 딱히 반박할 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 이전 세대의 유명한 성경 강해 학자인 데이비드 파슨(David Pawson)조차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가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데이비드 파슨의 영향력은 우리보다 훨씬 큽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논증하는 복음적 관점 중 많은 부분은 이미 그 시대 데이비드 파슨이 가졌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뛰어넘었습니다.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데이비드 파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저 역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야고보 자신이 명확하게 쓰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명확히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을 곰곰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도전해 보고 싶어서 자신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제가 야고보에 대해 잘못 말했다고 생각하신다면,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온전히 깨닫고 명확하게 설명해 내신다면 저는 여러분의 말을 경청하겠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짐작에 야고보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그리 풍부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을 멸시하며,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집에 돌아가 얌전히 목수 일이나 하라고 말렸던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6-50)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사실 뼈가 있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데, 알아들으셨습니까?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데, 마리아와 야고보는 분명히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고보 쪽 사람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에 날마다 찾아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야고보는 통제할 능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방관하며 그들이 바울의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도록 묵인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수많은 물밑 작업을 벌였고, 뒤에서 오간 말들은 차마 다 꺼내놓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1-2)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을 저처럼 깊이 통찰하며 읽는 사람은 많지 않고, 저처럼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이들은 야고보가 매우 훌륭하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야고보의 태도는 명백히 모세의 제자였을 뿐,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하길 원하셨는지, 또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일으키려는 바리새파 사람 몇 명쯤은 쫓아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눈에는 그 바리새인들이 귀한 보물이었기에 그들을 내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상적 설득 작업을 통해 그들을 달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사도행전》 15:19-22)

이 말의 뉘앙스는, 이 바리새인들과 야고보 자신은 유대인이니 예수님을 믿더라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다른 이방인들까지는 괴롭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문제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생각하시고 스스로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

예루살렘 교회는 최소한 절반 이상의 신도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은 《구약》의 성전 안에서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차라리 ‘바리새파 교회’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나을 정도로 지대하여, 위선적인 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다 지키지 못하는 모세의 율법을 전파하려다 보니 결국 복음을 왜곡해 버렸습니다. 비록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한 복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성전에서 날마다 기도하여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굳어졌다고 하지만, 평생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모두 모세의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세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훗날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야고보는 유대 회당과 성전의 사람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뿌리가 같은 맥락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런 형편을 보시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서글프셨겠습니까? 마음이 아프지 않으셨다면 바울이라는 예비 카드를 꺼내 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루살렘 교회마저 바리새파적인 형편으로 끌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삼천 명이 주를 믿고, 오천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주를 믿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을 품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믿은 후에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전통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복음주의권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전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저는 믿지 않는 사람 열 명에게 복음을 전할지언정, 복음주의권 신자 한 사람과 씨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통 자체가 되지 않고, 대화하다 보면 너무나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 중에 부모님이 대대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 제 마음은 덜컥 내려앉습니다. 예상대로 그들은 우리를 이단이라고 규정짓습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정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전통이 신앙이 되어버렸으니, 이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순전한 복음을 상실했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을 쟁취해 냈고,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이방인 교회로 향하셨습니다. 참된 복음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는 데에는 바울의 성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의 성품이 미친 결정적 역할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덮개 아래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의 입지가 확고했더라면 진작에 《갈라디아서》를 써서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야고보 등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품은 굽힐 때 굽히고 펼 때 펼 줄 아는 매우 지혜로운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으니, 이때는 고개를 숙여야 할 때 숙이고, 얻어야 할 것은 반드시 얻어내는 등 목표가 대단히 분명했습니다. 피를 먹느냐 마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귀에 거슬리는 말들이 많았지만 사람들과 굳이 다투지 않았고,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극진히 예우하여 그곳에 가서는 ‘오른손 악수(친교의 악수)’의 예를 행했습니다. 즉, 이방인이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핵심만 관철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탁월함이자 지혜입니다. 때로 저는 제 안에 바울과 같은 이러한 지혜가 있어,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명확히 분별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지혜뿐만 아니라 지식도 풍부했습니다. 비록 생전의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지는 않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부르심을 받았지만, 성경 전체에 대한 바울의 깨달음은 야고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여 강해할 때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가 상고한 《창세기》의 깊이는 오늘날 우리가 상고하는 것과 거의 비슷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제 자신을 조금 높이는 듯하더라도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독보적인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대단히 명확하게 서술했습니다.

바울의 뼈속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성품이 있었고, 그의 기준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가 처음에 바나바와 바울을 따라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중간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버리자, 바울은 다시는 그를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가가 다시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겠다고 나서자, 바울은 마가가 지난번에 왜 중간에 낙오했는지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는 한 절대로 데려갈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사도행전》 15:36-39)

저에게도 이러한 기질이 있습니다. 물론 제 성격도 썩 온유한 편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역 소그룹 리더나 조교의 직분을 맡겼는데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도중에 무책임하게 손을 놓아버렸다고 합시다. 거듭 기회를 주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조교를 맡겨달라고 요구한다면,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지난번에 왜 책임을 내팽개쳤는지 분명히 소명하십시오!”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즉흥적이고 안일하게 일하고 싶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가 있는 곳은 아무나 다 받아주겠지만, 바울에게 오면 어림없습니다. 대충 놀고먹으려면 바나바나 야고보를 찾아가십시오. 우리 공동체 안에서 빈둥거리며 시간만 때우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으며, 그러다가는 우리와의 영적 인연마저 끊어지게 됩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또다시 무책임하게 손을 놓는다면 우리와의 인연은 끝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바울의 이러한 성품은 대단히 강력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곧 진리이며, 요구 기준은 명확한 기준이므로 결코 낮출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어야만 참된 복음을 온전히 계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성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혜로우면서도 굳건했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피를 먹든 안 먹든 그것은 본질이 아니며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핵심은 모세의 율법을 복음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만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수호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성품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가를 데려가려다 바울과 심하게 다투었는데, 마가의 연약함을 지나치게 동정하고 감싸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조건적인 이해와 온정주의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격렬히 다툰 후 마가를 데리고 바울과 결별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해 떠났는데, 실라의 내면에는 마가와는 완전히 다른 성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이러한 성품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평생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오늘은 기준을 조금 낮추고, 내일 또 낮추고, 모레 또 낮추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기준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5:40-41)

이후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순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온 사람이든, 심지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베드로는 이방인 교회를 얕잡아 보았는데, 이는 과거 많은 이들이 우리를 무시하며 ‘너희는 도무지 안 된다’고 폄하했던 것과 같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사도행전》 15:24-27)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유다와 실라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갖추어야 할 영적 성품입니다.

실라의 성품

실라의 성품은 복음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었으며,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이렇게 해야만 육신을 위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생사에도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를 따라 주님을 믿고 우리 가운데서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언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생사를 초월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사람이 온갖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데,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길을 결코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살면서 고난을 좀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으나, 그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고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결론

여러분 모두 분명한 영적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의 성품, 실라의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겠다고 스스로에게 선포하십시오. 생사를 초월하여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고,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해 묵묵히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깨에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육신을 쳐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제사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제자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 기골이 있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러한 성품은 천지를 진동시킬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이 땅에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성품의 핵심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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