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마태복음 26장을 함께 성경공부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을 돌아보면,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모두가 틀을 가지고 생각하는 습관을 시작하시기를 권합니다. 틀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보이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나 틀이 있으면 보이는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구분됩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 안에 담긴 내용만으로도 우리가 평생 누릴 수 있을 만큼 풍성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종류대로 구분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틀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전체를 하나의 틀로 정리해 보면, 두 가지 나라, 두 가지 논리 체계, 두 가지 추구와 두 가지 목표, 두 가지 삶의 방식,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입니다.
24장의 주제는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입니다. 25장은 두 번 설교했는데, 두 번째 설교가 더 좋았습니다. 그 주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미혹을 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6장은 더 중요한 점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깨달음에 있어서 매우 분명하다 하더라도,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육신이 여러분을 원하지 않는 일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사람은 스스로 육신을 다스릴 수 없다
마태복음 26장의 주제를 이렇게 정하겠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인데, 육신을 이길 수 있을까요?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님과 바울의 신학 체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신학 체계는 그가 쓴 서신들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주님을 믿는데도 마음속에 아무런 싸움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14-24)
우리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한 상황이 나타날까요? 이제 이 일을 논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마태복음 26장을 다 읽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먼저 베드로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고, 마음속으로는 완전히 이해했으며 머리도 매우 맑았습니다. 26장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 그들은 한곳에 가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니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 26:31-35)
베드로는 “모두 주님 때문에 넘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넘어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제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은 진심이었을까요? 진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은 형제자매가 비록 매우 연약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태복음 26:38-41)
사람 안에는 종종 이렇게 매우 슬프고 거의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피곤함은 사람이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역을 받는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영이 매우 강해서, 저도 극도로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을 섬기며 3~5분 정도 기도로 인도했는데, 제 온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머리에는 마치 긴고주가 씌워진 것 같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쓰러져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한 동역자가 저와 함께 있었고, 그분도 매우 능력 있게 저를 도와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그 피곤함은 전혀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곳에서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베드로는 계속 맹세하며 외쳤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려고 하자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피곤함을 전혀 막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증명하셨을까요? 육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4 참조)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는 이 제자들 안에 육신에 속한 것이 강했고, 영적으로는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후 사도 베드로는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며 안수기도와 성령 충만을 말했습니다. 사람이 육신을 의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성령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때 피곤함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고 싶지 않았고, 마음으로는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었기에, 베드로는 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도 매우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렸고, 흘러나온 것은 피처럼 진하고 끈적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육신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든 바울이든,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강한 우리는 반드시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육신을 죽이는 방법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육신의 연약함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태복음 26:42)
사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드리신 기도는 꽤 길었지만, 마태는 그중 일부분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기도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가 매우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기록이 짧고 요한복음의 기록이 길다는 이유로 길고 짧은 것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가 강조하려는 한 가지는 바로 사람이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계속 성령을 의지하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기도하신 후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또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매우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극도로 피곤하여 그 상태를 이겨 낼 수 없을 때에는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이 비교적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서 매우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육신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육신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핵심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육신 안에서 살아가면 반드시 육신이 가져오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 기도를 마치셨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계속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많이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곧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도 육신 안에 계셨기에 내면에서 싸움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불러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태복음 26:53-54)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육신이 겪는 고생을 예수님도 동일하게 겪으셨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을 때, 베드로는 무리 가운데 섞여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제자가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합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마음으로 원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과 방언기도가 가져오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방언은 매우 큰 은사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은사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베드로만은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뜰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여종이 말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베드로가 문밖에 서 있을 때 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부인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조금 후에 곁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들과 한 패다. 네 말씨가 너를 드러낸다. 네가 말하는 것이 갈릴리 말씨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니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 26:34-35)
당시 베드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육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들이 한마디 물어보자 그의 안에 두려움이 생겼고, 그의 육신은 즉시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내뱉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시는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이 너무 괴로워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사람이 왜 통곡할까요?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사실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성령이 그토록 필요한 이유입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살 때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붙잡아 그곳에 굴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믿는 복음이 큰 능력이 있는 복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의 큰 능력을 의지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물었던 이유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안 된다고 베드로는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죽을지언정 나의 주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베드로 앞에 서 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안 됩니다! 육신에 속한 모든 제자 가운데 내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수준이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더 많이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도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복음을 무능력한 복음으로 믿고 있을까요? 핵심적인 단계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단계이며, 성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이렇게 합니다. 회개하고, 힘껏 회개하고, 계속 회개하지만 아무리 회개해도 결과는 여전히 같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끝냅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절차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령을 받는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기도해 주었고, 그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원래 큰 능력이 있는 복음을 정말 큰 능력이 있는 복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든 바울이든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기억이 매우 깊이 남아 있어서 생각만 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아직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체계는 사람을 타락으로 이끈다
본문: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1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심으로써 그를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속박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육신을 의지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고 육신을 의지하여 율법을 행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은 한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태복음 27:3-5)
사람은 왜 목을 매어 죽을까요? 마음속이 극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이렇게 될까요?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도리어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내면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모순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걷고 또 걷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습니까?” 그들은 은 삼십을 주겠다고 했고, 결국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태복음 26:19-25)
유다는 예수님께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화였을까요? 보통 사람의 이해에 따르면,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 이미 드러났다면 더 이상 실행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여전히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마태복음 26:47)
유다는 언제 대제사장들에게 갔을까요? 아마 그 말을 듣던 때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상태가 있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절대로 자신을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내면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을지라도,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연약함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나라와 두 가지 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추구, 두 가지 논리 체계, 그리고 두 가지 서로 다른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다는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유다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했을까요? 유다가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랐으니 감정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돈밖에 없었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께서 식사하실 때에 그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태복음 26:7-12)
육신에 속한 사람이 사물을 어떻게 보는지, 영에 속한 사람이 사물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든 영에 속한 사람이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 담긴 논리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때로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무심코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많은 돈에 팔아 많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요.”
생각해 봅시다. 이 향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부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들의 생각은 돈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으니 내면이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했을까? 내가 어떻게 돈이 예수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 어디에서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말하여 그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철저히 다루고, 마귀 나라의 가치관을 철저히 부인하며, 사람이 육신을 의지해 살아가는 논리 체계를 철저히 버렸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원하고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성령을 의지하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향유 한 옥합은 정상적인 사람이 1년 동안 버는 수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판 유다의 머릿속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는 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였을까요? 은 삼십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고, 팔고 나서는 마음이 극도로 고통스러워 그 돈을 성전에 던지고 나가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유다만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고통스러웠고,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이끄시던 제자들 가운데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극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도리어 하며 고통과 몸부림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육신 가운데 계시면서 육신의 악한 습성을 대적하기 위해 계속 기도하셔야 했다면, 하물며 여러분과 저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지니셨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승리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 능력을 나타내시도록 하여 우리가 믿는 복음이 지극히 큰 능력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
마태가 이 장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성하려 하느냐고 거듭해서 말합니다. 시작할 때도 성령을 의지하고, 완성할 때도 성령을 의지하며, 모든 일을 성령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육신을 의지하여 완성하려 합니까? 이제 우리는 육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뿐입니다.
베드로의 몸부림이 보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 가운데 계시면서 매우 슬퍼하셨고 거의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땀이 피처럼 땅에 떨어졌고, 땀이 피처럼 몸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것을 다루고자 한다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평생 과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육신의 악한 습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서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 행하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야, 네가 선지자라면 너를 때린 자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예수님을 때리면서도 계속 외쳤습니다. “너를 때린 자가 누구인지 말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맞으실 때에도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육신의 악한 습성을 죽이고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것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바울의 말이 옳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이기셨다는 사실로 인해 반드시 기뻐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얼마간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 가운데 고난을 받으시고 승리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육신을 이길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점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 앞에서 자주 타협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은 약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을 의지하여 육신의 악한 습성을 죽이고 가장 중요한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겠다는 뜻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단 한 가지 일만 완성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우리 안에 있는 육신에 속한 악한 습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신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도 육신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매우 괴롭고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선택을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악한 행실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육신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면, 조금 손해를 본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헛되고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육신을 의지하여 완성하려 하지 마십시오. 육신으로는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계속 성령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