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에는 아주 훌륭한 시편인 제25편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편이 왜 좋을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사실 이 말씀은 《잠언》에도 나오지만,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시편 25편이 그리 유명하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시편 16편, 23편, 그리고 1편은 매우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 주에는 덜 유명하지만, 아주 훌륭하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이 말씀은 바로 ‘자기 느낌이 좋아서 자기가 꽤 괜찮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상태가 아주 좋다고 여깁니다. 그러다 길을 가다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실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재앙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일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앞으로 나아갈지 뒤로 물러설지 고민하며 걷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가 이미 적지 않습니다. “아이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거 네 스스로 걸어온 길 아니냐?’
제가 묻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공부를 제대로 안 했는데 2학년으로 올라갑니까? 2학년 때 제대로 안 했는데 3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마치고 중학교에 가니, 교실에 앉아 있어도 남들은 다 알아듣는데 본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선생님 강의가 마치 외계어처럼 들리고, 그렇게 몇 년을 듣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갑니다. 중학교 졸업까지는 의무교육이니 그렇다 칩시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멍하니 있다가 졸업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부터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기를 당하는 것도 사실 약간의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남들이 “아이고, 나한테 100만 원만 줘봐, 연말에 300만 원으로 불려줄게”라고 하면, 연말이 되었을 때 30만 원도, 3만 원도 없고, 오히려 원금 100만 원마저 날아가 버립니다. 그 당시에는 오직 그 300만 원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주식 투자를 하다가 파산하고 무너집니다.
많은 사람이 주식 투자로 큰 곤경에 처하는데, 다들 아름다운 소망을 품고 선택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모두 비극입니다. 일생이 후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매번 선택할 당시에는 더없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은 내비게이션의 GPS 신호가 끊긴 것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 신호가 끊겨서 바다로 안내하는데, 차를 바다로 몰고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그곳이 길인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내비게이션 신호가 끊긴 것처럼 엉뚱한 데로 인도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며,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가 택할 길을 반드시 지시해 주실 것입니다. 하! 이 말씀을 하니 저도 약간의 자부심이 듭니다. 경외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게도 정말 손톱만큼은 경외함이 있습니다. 물론 다 경외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주제입니다.
제가 시편 25편을 읽고 나서, 다윗이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설명과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시편 25편을 잘 들어보십시오. “에이, 시편 25편은 성경에 글자로 버젓이 적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직접 읽어도 되잖아요.” 맞습니다. 직접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겪었습니다. 어떤 일이었을까요? 아이를 가르치는데 아이가 너무 둔한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공부할 때는 너처럼 답답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둔한 아이를 낳았을까?”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아이가 더 둔해지겠습니까, 아니면 더 똑똑해지겠습니까? 당연히 더 둔해지지요.
“아이고,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이렇게 경외하는데 왜 저에게 이런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까?” 이것이 경외함일까요? 다윗과 비교해 보면 그것은 경외함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주 묻습니다. 미국에서 목회자가 아닌 어떤 목회자가 말씀을 전할 때, 탕 하고 땅콩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땅콩알이요. 그런데 그 땅콩은 쇠로 된 땅콩(총알)이었습니다. 그 쇠땅콩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라고 묻습니다. 왜 물으면 안 될까요? 절대로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못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통치하지 않으십니까? 사람의 생사가 하나님 앞에 있지 않습니까? 다 맞습니다. 묻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처럼, 이 세상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아벨이 죽은 것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십시오. 물론 아벨도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경외함인지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다윗에 대해 나눴고, 이번 주에도 계속해서 다윗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아를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 죄를 범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남편을 죽이고 남의 아내를 취했으니, 본인이 상하고 통회하지 않으면 누가 상하고 통회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다윗이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일도 잘하고, 성과도 훌륭하고, 실적도 좋고, 능력도 탁월하며, 대인관계와 일 처리를 다 잘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직장 상사 격인 그의 왕이 그를 죽이려고 뒤쫓으며 목숨을 노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말씀해 보십시오, 이게 죄를 자백해야 할 일입니까? 여러분 한번 말씀해 보세요. 그런데 다윗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이것을 바로 ‘경외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보십시오, 내가 일도 잘했는데 왜 사장님이 나를 이렇게 대합니까?” 세상에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따진다면 큰일 날 일입니다. 인생에 어떤 일이 닥쳐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그 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겪는 일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천재(天災)’이고, 다른 하나는 ‘인재(人禍)’입니다. 천재지변과 인재입니다. 천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재는 무엇입니까? 인재는 스스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보험에 가입할 때 보험은 천재지변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험이 천재지변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어로 천재지변을 ‘Act of God’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역사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천재나 인재를 만났을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다윗이 겪은 것은 13년간 쫓겨 다닌 일이었고, 훗날 압살롬에게 쫓겨 왕위에서 물러나 숨어 지내며 도망친 세월까지 합치면 대략 18년입니다. 요셉이 겪은 일도 실로 천재지변과 같았습니다. 자기가 애굽으로 가고 싶어서 “나를 묶어서 애굽에 노예로 팔아넘겨라, 내가 거기 가서 하나님을 경험하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제발 요셉을 그런 식으로 본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중국에서 가장 척박한 곳에 가서 내 믿음을 훈련하겠다.”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 믿음으로는 차라리 좋은 환경에서 믿음을 훈련하는 편이 낫습니다. 좋은 곳에서도 훈련이 안 되는데, 애굽으로 팔려 가면 노예 생활에서 뼈를 묻을까 봐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외에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참으로 기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쫓기고,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유랑하고,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 시절은 살기 힘들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아이고, 그렇게 단숨에 13년이 흘렀습니다. 13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늘을 원망하지도 땅을 원망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탓했습니다. 왜일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통치하고 계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탓하려면 자신이 날 때부터 죄인임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우리아를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서만 상하고 통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평소에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죄인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겪는 일 치고 마땅치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천재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몸에 기이한 역사를 행하셔서 훗날 여러분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려는 바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고! 저는 많은 일이 자업자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자업자득조차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온전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다윗에게서 배웁니다. 여러분도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경외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럴 때에만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날들을 크게 단축해 주십니다. 이 고난의 날들이 마침내 지나갔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고난받는 날들을 크게 단축해 주십니다. 요셉과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면, 그 13년이 26년이 되고, 26년이 52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52년이 104년이 된다면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고, 노예로 뼈를 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경외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아이고, 공로는 없어도 고생한 수고는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생한 것은 쳐주지 않습니다. 일을 하다가 물건을 잘못 만들어서 재료를 다 버렸는데, 내가 아직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구인들 중 많은 이들의 어리석음은, 자기가 꽤 괜찮다고 여기고, 자기는 죄인이 아니니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억울해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며, 하나님께 공의가 없다고 은밀하게 또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제가 예전에 한 자매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님은 전도인이었는데 훗날 암에 걸렸고, 배에 큰 혹이 튀어나와 몹시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뱃속에 나쁜 생각만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자기는 괜찮다고 여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자매는 “내가 힘쓰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하는 것 좀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국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온종일 “왜?”라는 질문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습관이며 재앙을 불러옵니다. 이런 상태를 ‘무지’라고도 부릅니다.
그분의 딸이 아직 우리 가운데 있는데, 딸이 말하기를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사실 바로 그런 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암에 걸렸는데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하늘을 탓하고 땅을 탓하며 사방을 원망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탓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색채는 가득하고 위선은 극에 달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위선을 떨었느냐면,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병문안을 오면 갑자기 기운을 차립니다. 형제자매들에게 훌륭한 간증을 들려주며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다 가짜였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제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줄거리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주 강력한 핵심 진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 힘을 다해 사랑해, 하나님을 무척 경외해.” 사실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큰일입니다. 다윗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억울하게 쫓기면서도 여전히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처럼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잘못을 저질러놓고, 일을 그르치는 데는 아주 능숙하면서도 한마디 들으면 억울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다윗은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죄를 자백했는데, 그들은 잘못해놓고도 죄를 자백하지 않으니 참으로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당시에 제가 교회를 세울 때 돈도 내고 힘도 쓰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니었습니다. 인재(人禍)가 닥쳐와 멀쩡하던 직장을 잃고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그때도 여전히 자기가 괜찮은 줄 알고 “내가 감히 나 자신을 욥이라고 말할 배짱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하는 것 좀 들어보십시오. 여전히 자기가 괜찮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나중에야 욥도 그리 대단치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욥이라 할지라도 대단할 것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후 저는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입에서 원망이 나오지 않게 했고, 하나님께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번 따져 물으면 끝장입니다. 13년이 26년이 됩니다. 또 한 번 물으면 26년이 52년이 됩니다. 또 물으면 52년 만에 숨이 꼴까닥 넘어가 끝장납니다. 그 당시 매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있었기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마땅히 해야 할 선택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울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가득 찬 길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인 중에서 저를 구원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제가 마땅히 택해야 할 길로 저를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정말 안 됩니다. 지난 수년간 섬김의 길에서 공격을 받고, 비난을 듣고, 억울함을 겪고, 사람들이 대드는 일은 사실 다반사였습니다.
지금 저는 제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충분히 경외하지 못했다고 여러분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경외함이 부족할지라도 이런 일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양들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제 입에서 원망이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늘도 탓하지 않고 땅도 탓하지 않으며, 탓하려면 오직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을 충분히 경외하지 못했음을 탓할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지만 제 허벅지로도 하나님의 새끼손가락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팔로 허벅지를 꺾을 수 없듯, 제 허벅지로도 하나님의 새끼손가락 하나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버티겠습니까? 하나님과 맞서 버티지 않습니다. “하나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저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반드시 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 내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한마디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오직 이것만을 바라며, 이 한마디만을 소망할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만을 원합니다.
참으로 고단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정말 고단한 일입니다. 다윗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수많은 갈등, 수많은 위험, 수많은 원수, 수많은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몸과 마음이 몹시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하나님을 앙망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경외함이라고 부릅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여호와여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그의 도를 그들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주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모든 자에게, 주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모든 자에게 여호와는 인자와 진실로 대하시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여호와께서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는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가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그가 내 발을 그물에서 건져내실 것임이로다.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이다.
내 마음에 근심이 심히 많사오니 나를 환난에서 건져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살피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생명을 지켜 나를 건져내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기다리오니 온전함과 정직함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시편》 25:1-22)
기도
하나님, 우리 가운데 형제자매들이 다윗이 처했던 것과 같은 힘겨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다윗과 같은 마음을 주셔서 다윗을 본받아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가 크오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을 덮으사 우리로 다시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게 하옵소서. 원수들을 향해 개가를 부르게 하옵소서.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입어 정직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사실 이 본문은 사울에게 쫓길 때 쓰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쓰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는 열일곱, 열여덟 살의 아주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그는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후의 일, 곧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했을 때입니다. 또 다른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내 원수를 살피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분명 그가 왕이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압살롬이 왕위를 찬탈하자, 과거에 다윗에게 징계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 다윗을 심히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의 자리에 있으면 원수를 사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것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쓰인 것이라고 봅니다. 온 이스라엘의 군대와 군사 통수권이 모두 압살롬의 손에 들어갔고, 다윗은 몇 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당시의 환경이 힘들었을까요, 힘들지 않았을까요? 힘들었습니다, 매우 힘들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주변 국가 중에 그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다 다윗에게 패배했던 나라들이라, 그는 주변 모든 나라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윗에게 정복당한 나라들이어서 그가 원수가 되었는데 갈 수 있겠습니까?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땅에 머물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땅도 모두 압살롬의 차지가 되었으니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처지라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는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꼼수나 삿된 길을 가려 해도 “아, 하나님, 온전함과 정직함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였으니 삿된 짓을 할 수도 없고,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변 나라들은 다 그에게 패배하여 원수가 된 자들이라 겉으로만 복종했을 뿐입니다. “이제 네 아들이 왕위를 찬탈했고 네가 내게로 도망쳐 왔으니 내가 너를 가만두겠느냐?”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늙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다윗도 나이가 들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늙었습니다. 묻겠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절망뿐이며, 너무나 힘겹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 외롭고 괴로우니 근심이 심히 많나이다. 나를 환난에서 건져주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환난이었습니다. 곁에 있는 호위병이 언제 그의 머리를 베어 압살롬에게 바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머리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호위병을 의심하고, 저 호위병을 의심하다 보면 마음이 심히 괴롭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옵소서. 내 원수들을 살피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생명을 지키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 상황에서 어디로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기도를 마쳤는데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이 말은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피난할 때 부하들에게 한 말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내가 겪는 고난과 수치를 보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른다.”
다행히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고, 훗날 압살롬이 죽임을 당하자 그는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저는 다윗이 참으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지혜롭습니다. 누가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런 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하였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늘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면, 어떻게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사실 늘 하나님을 의지해도 이런 상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이야말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드러납니다.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닥치게 하십니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했는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끝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앞길을 인도해 주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이 말씀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대하시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무슨 자격으로 나를 이렇게 대하십니까?”라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망한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함도 앙망함도 아닙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며 나의 미래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늘 주를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하였나이다
절대로 “왜”냐고 다시 묻지 마십시오. 절대로 하나님의 코앞에 삿대질하며 왜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이 녀석, 어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만약 여러분이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셔서 계속 그 길을 걷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13년도 아니고, 26년도 아니며, 52년도 아닙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걷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서른 몇 살에 암에 걸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 어떤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은 지식이 없어서 늘 “왜?”라고 묻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이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러자 의사가 “여기 약이 하나 있는데 유효율이 60%입니다. 10명 중 6명에게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빌려 약을 다 썼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제가 그 40%에 속합니까?”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그 후 의사가 “여기 더 비싼 약이 있는데, 이건 효과가 90%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다 써서 약을 썼는데, 그는 그 10%에 들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왜?”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왜 이 병에 걸렸냐고 따지다가 40%로 떨어졌고, 그 40% 안에서 또 왜냐고 따지다가 10% 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왜?”라고 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옳게 행했든 잘못 행했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여러분이 입으로 불평을 쏟아내며 하나님을 탓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찾아왔을 때 신령한 척 폼 잡지 마십시오.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게 어떤 일이 닥친다면 이 설교를 떠올리십시오. 절대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한낱 죄인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큰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일을 만났을 때 ‘다윗을 본받는’ 새로운 습관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가르쳐 주소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칠 때는 그래도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기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어요.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이 단어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교훈이란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갈 길이 없을 때 돌아보며 “아이고, 어쩌나” 할 것이 아니라, 이유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나의 길이시요, 하나님이 곧 나의 미래이시며, 하나님이 곧 나의 진리이시고, 하나님이 곧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탓하십시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를 때,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미래가 되십니다. 당시에 교회를 개척할 때를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고단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아이고, 너무나 힘들었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한 가지 지혜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곧 나의 미래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곳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앞이 캄캄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고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내게 13년을 주지 않으셨고 26년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오직 6년만을 주셨고, 6년이 지난 후 이런 재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치유와 축사 사역에서 우리는 성경에 부합하는 치유 축사 이론을 확립했습니다. 성경공부에서는 사명 신학에 기초한 성경공부 방식을 세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길에서, 교회를 세우는 길에서 사명 신학을 창립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의 신학입니다. 저를 힘겨운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힘겨운 상황 속에서 저는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곧 우리의 미래이셨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비참할지라도, 하나님이 곧 여러분의 미래이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 위에서 통치하고 계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천재와 인재 중에서 인재는 회개가 필요하고, 천재 역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행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연단하고 시험하며 불로 단련하셔서 그분의 의로운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 역시 그 선지자가 제게 말해 준 것처럼 “너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이 캄캄한 날들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求你以你的真理引导我,教训我,因为你是救我的神,我终日等候你。(《诗篇》25:4-5)
저는 조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저는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조급하여 한입에 배부르려 한다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 시절 저는 성경을 한 권 한 권 공부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평생의 삶이 길지 않더라도 성경을 한 권씩 공부해 나가며 구약을 다 공부하면 신약을 공부하겠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년이 흘렀고, 성경의 대부분의 권을 우리가 한 번씩 공부했으며, 어떤 책은 한 번 이상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창세기》는 다섯 번이나 공부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름의 작은 뿌듯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소서
우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골탕 먹이시는 분이 아님을 항상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골탕 먹이십니까?”라고 따져 묻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선생님), 전에는 하나님께 구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기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곤고함을 돌아보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저 질병의 치유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치유는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나오는 것이며,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며 은혜와 긍휼과 자비가 넘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에는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겪는 이러한 인재들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노목사님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분의 그 기도가 얼마나 훌륭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작은 의자에 앉아 “아,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하며 오전 내내 긍휼을 구하고, 오후 내내 긍휼을 구하고, 밤새도록 긍휼을 구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하며 또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도 긍휼을 구하셨습니다. “목사님, 더 말씀 안 하셔도 압니다.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군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지혜요 명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훗날 우리가 정립한 화인 사명 신학은 싸워 이기는 영적 승리의 신학입니다. 싸워 이기는 신학이란 영적 세계에서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원수를 사로잡는 것으로, 그것은 귀신들을 향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설 때는 “하나님, 우리가 인재를 만나든 천재를 만나든, 주께로부터 왔든 내가 자초했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무척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주는 은혜가 넘치시며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너무나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으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깊이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옵소서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여호와여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시편 25: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시편 25:11)
여러분이 과거에 지은 죄가 현재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죄악이 크고 무거운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자기가 괜찮다고 여길 자격은 없습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망하는 것이며 또 다른 인재를 부르게 됩니다. 우리의 허물이 너무나 많은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절대로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우리의 죄가 항상 우리 앞에 있어 조금만 방심해도 죄를 따라가게 됩니다. 죄를 따라가면 미혹당하고, 미혹당하면 손해를 보며, 손해를 본 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참으로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편》 25:18)
알아들으셨습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십시오. 아들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을 뒤쫓아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도 여전히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죄가 중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으니, 참으로 지혜롭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상하고 통회하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하나님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그러면 큰일 납니다. 13년이 되고, “왜?” 하면 26년이 되며, 또 “왜?” 하면 52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곤고함을 돌아보소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이다. 내 마음에 근심이 심히 많사오니 나를 환난에서 건져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편》 25:16-18)
이것은 압살롬이 다윗을 추격할 때 기록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할 때 시므이라는 자를 만나 그에게 저주를 들었습니다. 부하가 “내가 가서 저 자의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하자 다윗은 부하에게 “그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수하에는 무예가 출중한 용사들이 꽤 많았지만 그는 “죽이지 말라. 혹시 하나님께서 나의 곤고함을 보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분명히 맞아떨어집니다. “나의 곤고함을 보옵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실 것 같습니까? 다 느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의 곤고함이 그분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고 풍성한 자비가 있어 우리의 허물을 사해 주십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저는 나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제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겪었겠습니까? 아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곤고함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제가 당한 처지를 굽어살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이 제게 대들고 따지며 시비를 걸어올 때, 비록 마음은 몹시 쓰라리지만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겪는 고난을 보시고 저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저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든다고 해서 제가 감정대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저는 제 옳음을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기쁨의 영생의 길을 함께 달려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때로 곤고와 근심과 환난을 겪을지라도 우리의 영은 흥왕해질 것이며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많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고난 중에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일을 겪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요즘, 이 설교는 여러분을 위해 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우리의 곤고함과 마음의 근심을 돌아보아 주시기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다시금 우리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보호하소서
내 원수를 살피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시편》 25:19-20)
제가 묻겠습니다. 다윗의 주변에 그의 머리를 베고 싶어 한 자가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며 보니 ‘여기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내 출셋길이 이 다윗 손에서 끊어지겠구나. 차라리 다윗의 목을 베어 저 젊은 핏덩이 압살롬에게 가져가서 한자리 얻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자가 있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도망치고 또 도망칠 때, 다윗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지만 그의 부하들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아이고, 다윗도 다 늙었네. 그 아들 압살롬이 왕위를 차지했으니 압살롬 밑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압살롬이 얼마나 수완이 좋은가? 압살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밤이 깊어 사위가 고요할 때 다윗이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사울이 잠들었을 때 다윗이 그 곁에 서서 사울의 목을 베면 끝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윗이 가장 위험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하가 칼을 손에 쥐고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나, 다윗이 눈을 떠서 보고 “네가 무엇을 하려느냐? 무엇을 하려느냐?” 하면 “왕을 지키려 합니다”라고 합니다. “사람을 지키는 데 이렇게 지키는 자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지키는 자가 어디 있느냐?”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하나님, 나를 보호하소서.” 칼을 들고 다윗의 머리를 베려 했던 자가 누구인지, 물론 제가 상상하고 추측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왜 그토록 고달팠겠습니까?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된 자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그의 목 하나에 평생의 부귀영화가 걸려 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다윗을 따른다고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물론 다윗은 믿음을 선포하는 데 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니 다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그 경호원이 다윗 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다윗을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가까이 가려 해도 다가갈 수가 없고, 물러서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가가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힘에 튕겨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가까이 가보니 천군 천사가 다윗의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쿠, 건드릴 수가 없구나. 이 사람은 너무나 대단하다. 그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그를 해칠 수 없으니 그저 죽기 살기로 다윗을 따라야겠구나. 혹시 나중에 관직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 이것은 상상해 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를 경외하오니 내가 택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우리 사람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보기에 길처럼 보이는 것은 참된 길이 아닙니다. 보기에 길 같지 않은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온전히 다스리실 때까지 이끄십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그분의 손에 있으며, 그분께 생명의 말씀과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미래가 있으며, 단순한 미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평생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