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答疑引言
大家好!我们讲了《使徒行传》的第十二章,路加写的很有水平、很隐晦。但是我读的水平也很高!我把那些隐隐晦晦的东西都给读出来了。那个时候彼得还活着,到处蹭吃蹭喝,路加就不好意思写这些内容,就只能隐晦一些。彼得怎么就成了教会的老二,不但丧失了命定,还丧失了位分。
路加在写这些东西的时候,他到底在想什么呢?大家能不能跟我们探索一下,这叫读心术。路加写《使徒行传》的提阿非罗,提阿非罗大人应该是保罗在罗马等候审判的时候,可能是给保罗做辩护律师。路加要把这事从头到尾给它写明白,就是写给提阿非罗的。但是提阿非罗大人读的时候,如果像我说的:保罗怎么怎么样,然后彼得这个人很烂,那就容易制造出很多不必要的困扰。现在我这么讲都给大家制造了一些困扰,提阿非罗能不困扰吗?我们还以为他们在窝里斗,还以为彼得和保罗在掐架呢。
所以路加这个人厉害就厉害在这,他写的好像都是一家的、一伙的,彼得是耶稣的大门徒,教会的大使徒。保罗是外邦人的使徒,整的好像还挺明白的。其实在路加那个年代,他不太需要整明白彼得是怎么回事,所以他就这么写了。这事我就尽量想把它挖出来,反正现在都2000年以后了,也没人来找我算账了,就算有人找我算账,我也会这么写。
Q1:老师,平时怎么训练自己和孩子看透事物的本质?以及透过事物的趋势看透神的心意?
你有这样的想法很好啊!那平时应该怎样训练自己和孩子看透事物的本质呢?从根上来看,我得教你一件事:很多人以为把这个看透了,才能够一点一点地看透生和死。其实错了!我们要先看透生和死,然后很多事就很容易都看透了。如果生和死都看不透,那么很多事都会看不透。
你可能会问我:我要怎么样才能看透生和死呢?其实容易!你可以经常带着孩子去参加葬礼,那孩子就会问:这个人怎么了?死了,嗝屁了,也就是凉了!你再骂这个人,他也不会听见了,他也不知道了。你再揍他,他也不疼了,因为死了!所以我们一定要让人知道死是众人的结局,人最要命的就是看不明白生和死。
咱们教会走到现在,其中一个很重要的起点,就是我是一个看透生死的人,不是现在才看透,而是好多年前就已经看透了。那一个人看不透自己的生死,也看不透孩子的生死,然后什么都看不透。这个也想抓,那个也想抓,就是拼命地想活得好一点。你可以试试看,只要你想活得好一点,你就会活得不好;你要想早点死,结果还死不了。
我给大家举个例子:你说像我这种人怕什么呢,什么也不怕!假如说有一天,我被绑匪给绑去了。我会说:谢谢大哥!如果是女的绑匪,我就说:谢谢大姐!人家说:你谢我干什么?我说:我一直想死都没死成啊,我现在终于碰上你们了,太好了!撕票吧,越快越好!绑匪能杀了你吗?不能!那不能杀,留着也没有任何的用处。绑匪一打听:这小子经常说这玩意。结果还真的不绑我了。
绑匪绑完了忙活了半天不是白整了吗?他要是说:我揍你,刮你几个耳光子。我就说:你揍吧、打我吧,反正疼一会儿就好了,过一会就什么都不知道了!这可把绑匪给气坏了!也许就我这三寸不烂之舌,说着说着就逃出来了。
所以看透生死好啊!你看不透生死,被人家希律王给抓起来了。反正我觉得挺好的,可以庆祝一下。人家说:你死之前还有什么话要说的吗?我说:我有一句话要说,我老早就想与主同在,一直没那个胆量。谢谢你!希律大王,等我死了以后再回来找你吧,咱再喝杯茶什么的。所以我常常训练人看透生死,那一看透生死会怎么样呢?会去殡仪馆、搬骨灰盒、搬遗像。如果你感到害怕,比如你从小就怕这个,那就毁了。其实所有害怕的根源都跟怕死有关系,人一旦怕死就麻烦了。
怎么看透事物呢?就是看事物的趋势和看神的心意。我得教你怎么看事物的趋势:你扔一个硬币,正面;再扔一个硬币,又正面;又扔一个还是正面。这就是趋势!比如我在教会里,我就不太容易被迷惑。有一个牧师出车祸被车撞死了,我去参加葬礼,那简直就是车祸现场,尸体都是缝起来的。我不会感到疑惑去问神:神啊!怎么会让这样的事发生呢?后来又有一个人被车撞死了,我就琢磨他们俩有什么共同的特点。我发现这两个人都很爱车,你知道什么人喜欢汽车吗?就是把汽车当宝贝的人。这车模改一下、那车模改一下,整得红红绿绿的,就是喜欢汽车。
大家知道吗?喜欢汽车是会死人的。去年春节,有一个人买了一辆超跑车,载着五个年轻人,哐的一声就撞到路边的柱子上,结果五个人全死了。找到规律了吗?就是因为爱车!什么人会穷?你不用看别的,也不用看那不认识的,因为不认识的你也不知道,就看你认识的那些。因为人骨子里爱钱!你再统计一下得癌症的人,在你们家族里找到三五个人观察一下就够了。其实很多事物整完了也就那么点,你再跟孩子们一起探讨这些事。
你有没有见过那些上完大学,读完研究生的人,最后混的什么也不是的?如果你就是,那不好意思啊!那你有没有见过读完文科的,出来找工作却不知道要干什么的?有很多这样的人!最近张雪峰就在那讲一通吗?那读大学干什么呢?想来想去读大学是为了什么?读大学原来就是为了谋生。读完了还不能谋生的,你观察到规律了吗?慢慢看吧。我就觉得这是一件非常奇怪的事,比如你追求学区房,后来孩子就有出息了吗?赔了一大笔钱也没出息,你慢慢地观察吧!
Q2:老师,夫妻俩不能一起承受生命之道吗?
我是没看着。那我看到的都是什么呢?我看着的都是不太好的。亚当和夏娃这对夫妻,你觉得怎么样?亚当和夏娃一起承受生命之道了吗?亚当说:这是我骨中的骨,肉中的肉。结果过了几天就变成了:这是我骨中的骨刺,肉中的肉刺。你稍微观察一下,能观察出来什么?能观察出这话都是瞎说。因为我看到扯淡的事比较多。
教会牧师这一行当都是干了一份职业,在教会里装假,然后回家掐架。当然不全是,但是挺多的。而且在《圣经》里头我也没有找到一起承受生命之道的,这是彼得的发明,我是没有找到。耶稣结婚了吗?没结婚。保罗结婚了吗?没结婚。他们和谁一起承受生命之道呢?
我研究《圣经》比较深,我是没找到,我就觉着这是瞎说。如何才能解决生命之道的问题呢?你自己决定自己的就可以了!你能不能决定你自己?能!你能决定你的老婆吗?不能!你老婆能决定你吗?也不能!而且人的仇敌就是自己的家人,这句话是耶稣说的。
Q3:老师,彼得体贴肉体,神为什么还要拣选彼得呢?
拣选总比不拣选好!这是一个多好的功课,多好的警戒!就算你是神所拣选的大使徒,那也没用!你自己好好对付你自己的属肉体的逻辑体系,或者属人的逻辑体系。耶稣拣选的多了,彼得作为一个很好的案例不好吗?神拣选一个不好的,再拣选一个好的,两个放在一起多有味道啊。我觉得我们的神很幽默,有一个亚伯拉罕就有一个罗得。有一个以扫就有一个雅各,故事变得非常的精彩!人就比较笨!比如整一箱水果,这个是烂的,那个是好的,烂的长这样,好的长那样。
Q4:老师,带孩子参加葬礼,孩子会不会被死人的鬼整呢?
会!不去也会!这跟去还是不去没有任何的关系。如果一个人招鬼,他就会一直被鬼整。如果一个人不招鬼,鬼来了也拿他没招,你得把这些事看透。
Q5:老师,为什么当时耶稣没有去救施洗约翰,但现在却派了天使去救彼得呢?
没有为什么,因为死期没到。我们的耶稣基督是不是死在十字架上?是啊!几岁?三十三岁!多年轻啊,而且还没结婚呢,还没谈过一场轰轰烈烈的恋爱呢,那多悲哀啊!其实不悲哀,因为神看这些东西看得比较明白。
咱们别总结这些规律,总结这些玩意干什么呢?有人三十岁死了,有人五十岁死了,就有人说:神啊?你为什么让他三十岁就死了呢,让我五十岁死了呢?神啊!为什么让他八十岁才死了,不让我活九十岁呢?这事不重要!对我来讲,人活到几十岁死都是一样的。其实有的时候,像亚哈活了那么多年,做王二十多年,没有为什么,因为神就喜欢这么干。其实神也巴不得彼得能够好好的悔改,结果彼得一整,又整岔劈了。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사도행전》 12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도 흥왕하게 된다는 것을 점차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일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칼에 맞아 죽고,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해지기 시작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현상을 보고 멍해진다면 깨달음의 분별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화인 사명 신학은 깨달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현상을 꿰뚫어 본질을 바라봅니다. 현상을 통해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수많은 일들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미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주관하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을까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또 어떻게 살해당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수많은 찌꺼기들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삶과 죽음이라는 이 문제를 명확히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본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도는 날로 흥왕하여 널리 퍼져가다》입니다.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온통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요한의 형제가 살해당한 것,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 그리고 베드로가 또 붙잡힌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 ‘그만두자! 이런 도는 더 이상 못 믿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환경에 부딪혔을 때 신앙의 기초가 견고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냈으면서도 하나님의 행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 사람들을 싫어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으면서도 끝내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며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사십 년 동안 내가 그 세대를 싫어하여 이르기를 "이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행사를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시편》 95:9-10)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라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사도행전》 12:1-5)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쉽게 멍해질 수 있으며, 이 본문을 이해하는 것도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맞아 죽은 후 많은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안디옥이라는 곳으로 갔고, 그곳은 흥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을 비롯한 다른 모든 방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베드로가 또 잡혔고,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일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무리를 이끌고 성전으로 가서 매일 카니발 축제처럼 지내니 너무 소란스러웠습니다! 박해를 당한 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돈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기에 이 무리는 몹시 게을러 보였고, 걸핏하면 성전에 들어가 기도만 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여전히 표적이 나타났고, 그 후 이 사람들은 다소 오만해졌습니다. 베드로가 대사도가 된 후,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신앙은 날로 쇠퇴해 갔고 돈도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해지기 시작했고, 기근이 들었으며, 경제 위기까지 겹친 데다 박해마저 바짝 뒤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이라는 곳은 날로 흥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행사를 보셨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박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박해마저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완전히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박해를 일으키셨는데도, 대사도 베드로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며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그 무리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으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신 후에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지역의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한곳에 머물며 몇 대를 그냥 눌러앉아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박해를 일으키셨지만, 사람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박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전 세계적으로 뚜렷한 흐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화인 교회가 흥왕하고 서양인의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화인들의 허리가 이전보다 꼿꼿해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흐름입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물론 장차 복음 전파의 사명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와 밥을 먹는데, 그가 제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동전을 50번 던졌는데 모두 앞면이 나왔다면 다음 번에는 앞면이 나올까, 뒷면이 나올까? 그 말을 듣고 저는 말문이 막힌 듯했습니다. ‘이미 50번이나 앞면이 나왔으니 다음에는 뒷면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사물을 볼 때는 흐름을 봐야 해.’ 그가 제게 해 준 이 말에 대해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다소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사물을 볼 때는 흐름을 봐야 한다’는 결론은 제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줄곧 자신들의 문제를 보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의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표적과 천사만을 좋아했고, 그런 것들이 특별히 좋다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날로 강성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도이며, 결코 빈 항아리에서 뱀을 꺼내거나 허공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식의 눈속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해야 하며, 깨달음 속에서 앞으로의 흐름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정리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로 흥왕해 갔지만, 결코 예루살렘이라는 이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대사도였음에도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은 사물의 법칙도 관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몇 번이고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셨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마케팅 전문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목회자를 세계적인 유명 목회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유명해지면 스타의 출연료처럼 강사료를 수천만 원씩 받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저는 깨달음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얄팍한 속임수는 제 앞에서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스타로 띄워준단 말입니까? 내가 그들을 훈련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표적이 나타나 귀머거리가 듣고 맹인이 보며 다리 저는 자가 걷는 일이 많다 하더라도, 제 눈에는 기껏해야 베드로 수준에 불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의 깨달음은 끊임없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깨달음의 성장을 위해, 특히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깨달음이 부족하면 걸핏하면 속아 넘어가고 맙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자신이 이전 교회에서 어떻게 자기 목회자를 보호했고, 그의 목회자가 당시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속았으며, 자기가 어떻게 앞장서서 그 사람들을 다 제압했는지를 말했습니다. 듣기에는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그의 보호가 별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지 못한다면,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는 꼴이니 이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토록 많은 박해를 겪었고, 본장에 이르러 또다시 붙잡혔습니다.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붙잡혔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제 생각에 베드로는 깨달음이 부족하여 잘못 짚었고, 엉뚱한 것들을 결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미혹에서 걸어 나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흥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흥왕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흥왕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물이 발전해 가는 흐름을 본다면 마땅히 그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역사에는 발전의 필연적 법칙이 있다’고 말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는 결코 변한 적이 없습니다!
본장은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여기에 머물지 말고 어서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을 깨닫는 데는 많은 뇌세포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듣기 거북한 표현을 쓰자면 발뒤꿈치로도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굳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녀석이 제법 고집이 세구나, 성질이 완고하군!’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헤롯 왕을 통해 베드로를 붙잡히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힌 후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사역을 적지 않게 했지만, 그때 아마도 자기가 겪은 일들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부정해져서 생긴 일이 아닌가 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해 버렸을 것입니다.
대사도인 베드로는 특히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는 크고 작은 베드로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적어도 세 번 이상 말씀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너무 힘들구나.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후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고,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대에 수많은 사람이 흥하고 수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사람이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고 관찰할 줄도 모르며,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비록 하나님께서 명백히 말씀해 주신다 해도 핵심을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전통적인 관념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사람의 생각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도 제한합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사도행전》 12:6-11)
베드로라는 사람은 참 흥미롭습니다. 감옥에서 이튿날 끌려 나가 죽게 생겼는데 천사를 보고도 환상을 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튿날 정신을 차려 이미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그가 생각한 것은 ‘천사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후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서도 그는 천사가 사람보다 더 큰 권능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천사 숭배 역사와 전통은 사물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제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천사라는 말만 들어도 대단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전통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자기를 옥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직접 보고는 천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천사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온통 자의적인 관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지 못했고, 이것이 바로 온 예루살렘 교회가 무너져 버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이었지만, 예루살렘에는 바리새파 제자들이 많았기에 돌아와서는 베드로에게 어떻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며 따져 물어 온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많은 개념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부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으며, 다 그가 스스로 지어낸 말입니다.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깨달음도 부족하면 제멋대로 엉뚱하게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스데반이 박해받는 것을 보고 머릿속에 온통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삶과 죽음조차도 꿰뚫어 보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베드로는 죽을 때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반문합니다. 사실 바로 매달리든 거꾸로 매달리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것이 안 된다고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조차 예수님을 본받을 수 없다고 여겼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이 가난해지고 박해를 받자 그저 헤롯 왕 같은 자들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주관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이르되 “이 말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사도행전》 12:12-17)
베드로는 옥에서 나온 후 마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누구입니까? 마가는 오순절에 그들과 함께 기도했던 사람이며, 그가 살던 장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려 했으나, 당시에 거기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가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천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베드로와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린 채 그저 천사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 아예 별자리 운세까지 갖다 붙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온 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야고보와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러 떠났습니다.
이때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두머리로서 마땅히 온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어떻게 옥에서 나왔는지만 야고보에게 전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관리권을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라는 이 인물 또한 구약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고, 할례를 고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우리가 보게 되듯이, 사도 바울은 평생을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사도 바울로부터 온 것이지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우두머리 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하러 갔습니까? 사실 그가 예루살렘에 없다고 해도 우두머리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15장에 이르면 베드로는 이미 교회 안에서 이인자로 밀려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사를 명확히 보지 못했고,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말씀하셨음에도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수많은 전통을 돌파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전통을 별로 지키지 않습니다. 전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통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이때 권위를 상실했고, 그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라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것이며, 결국 어디로 숨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으니 이는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닙니다.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혹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흥왕하려면 우리는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혹을 피해야 합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쓸 때의 주제는 바로 《많은 사람이 흥하고, 많은 사람이 넘어진다》였습니다. 복음의 중심이 예루살렘을 떠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천사에 대해 온갖 헛된 미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표적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고 그저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 안에서 수많은 표적이 나타나지만, 우리는 표적과 천사에 대한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기를 갈망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에 대한 미혹에 빠져 있어 베드로가 온 것을 보고도 분명 베드로의 사자나 천사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알고 보니 많은 이들이 천사를 연구하기는 좋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마다 수호신 같은 사자나 천사가 붙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본 적이 없으며, 사실 유대인들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베드로가 실제로 천사를 보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이것저것 짜맞추어 개인적인 경험들을 축적시켰고, 그것이 그들의 전통과 미혹, 신학 체계가 되어 버렸으니 이러한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가운데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천사가 하나씩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설령 천사에 대해 훤히 꿰뚫는다 한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흥왕하게 해야지, 내 곁에 천사가 흥왕하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떠한 천사나 별자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구원하실 때가 되면 보내실 것이고,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박해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박해가 임할 때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표적과 기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의 생각이 지혜로워져서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만드시는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전통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전통이 있고, 성공회는 성공회의 전통이 있어서 그런 것들은 건드릴 수도 없습니다. 가톨릭에는 가톨릭의 전통이 있고, 복음주의파에는 복음주의파의 전통이 있으며, 은사주의파에도 은사주의파의 전통이 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는 전통이 없습니다. 전통은 하나님의 행사를 가로막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말라
어떤 교회의 성도가 자기 목회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윗선에 연줄이 있으니 책임지겠다고, 우리 교회 위에는 보호막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라면 아마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 보호막은 당신 것보다 훨씬 크니 우리를 보호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사람의 권세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한 목회자가 어떤 가난한 청년을 대접했는데, 어느 고위 간부의 사위라는 말에 그 목회자는 혼이 쏙 빠져 자기가 대단한 연줄이라도 잡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 목회자는 본래 돈도 별로 없으면서 온종일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명품을 사주느라 많은 돈을 썼고, 성도들에게 그를 보호하게까지 했습니다.
저는 형편에 안 맞는 음식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물건은 사지 않으며,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으니 만사가 단순해집니다. 저는 누가 저를 보호해 줄 필요도 없고, 저 역시 다른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며,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 그런 것들을 맹신하지 않습니다. 지역에서 권세가 대단한 유명 인사가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제가 치유와 축사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안 갑니다! 설령 간다 해도 그의 권세 때문에는 가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하찮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권세를 좋아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도행전》 12:21-23)
왜 이런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을까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의 영토에서 양식을 얻고 있었지만, 헤롯 왕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헤롯 왕과 연줄을 맺고 관계를 회복하여 한마음으로 화친을 청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권세에 기대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야고보를 택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왜 후보에 들지도 못했을까요? 야고보가 이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기에 우두머리가 물러나면 야고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어쩌면 마리아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였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이 문제를 명확히 정리해 주셨지만,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사람에게 속한 수많은 논리 체계가 들어차 있었습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8-50)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셨지만, 베드로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를 다 잊어버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것만 기억했습니다. 그들을 잘 보살피지 않았다가는 훗날 예수님께 책망이라도 들을까 두려워했으니, 그들 속에는 사람에게 속한 온갖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1-23)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정감 있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훗날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하게 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일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인간적인 정과 세상의 인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깊이 해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이 60만 명이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으니 실로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원인은 모두 사람의 권세를 맹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천사에 대한 온갖 미혹에 빠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도 보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매우 가련한 지경에 이를 정도로 변방으로 밀려났으니, 전도자이면서도 전도할 대상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예루살렘 교회는 땡전 한 푼 없을 정도로 몹시 가난해졌습니다. 본래 재물의 법칙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법칙은 더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줄기 열정만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몸을 피한 결과 최고 지도자의 자리는 사라졌고, 교회는 갈수록 가난해졌습니다.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자니 너무 힘들고, 농사를 짓자니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으며, 양을 치는 것도 서툴렀습니다. 밥 먹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에베소에 가서 설교 한 번 하고 교회의 헌금을 조금 얻어 쓰거나, 내일은 고린도에 가서 얼마간 머물며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것을 내세워 바울이 세운 교회의 유명세에 편승해 푼돈을 버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초청하지 않으면 바울이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하는 것은 할례를 지키지 않지만 자기는 지키며, 할례를 받는 것이 안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거의 빗나간 길로 끌고 갈 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사도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이 진짜 사도라고 믿게 만들었고, 바울은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해 그가 좀 얻어먹고 마시게 두는 것은 별일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입니다. 저는 형제자매들에게 늘 말해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제 갈 길로 치우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2:24-25)
이후 바울은 각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늘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연보들을 총괄 관리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를 매우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헌금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안디옥이라는 그곳에서 흥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다시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습니다. 이어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온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실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저는 이전에 어떤 사역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단한 희생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큰 은혜이며, 헌신하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저는 늘 말합니다. ‘내가 감히 헌신할 자격이 있고,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지금까지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만약 사람이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 길을 결코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보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오직 사람의 생각만을 위하는 것뿐이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삶과 죽음이라는 이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살다 보면 결국 유골함에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고 마는 법인데, 꿰뚫어 볼 수 있든 없든 반드시 초탈하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사람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끼 못 먹으면 한 끼 굶으면 그만이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쉬워집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