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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사도행전 12장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더욱 널리 전파되다

2023-08-09 54,016 使徒行传 使徒行传第十二章 使徒行传12章 神掌权 看透生死 提高悟性 破除传统

相关经文

使徒行传12章-雅各被杀,彼得被囚
  • 1 那时,希律王下手苦害教会中几个人,
  • 2 用刀杀了约翰的哥哥雅各。
  • 3 他见犹太人喜欢这事,又去捉拿彼得。那时正是除酵的日子。
  • 4 希律拿了彼得,收在监里,交付四班兵丁看守,每班四个人,意思要在逾越节后把他提出来,当着百姓办他。
  • 5 于是彼得被囚在监里;教会却为他切切地祷告 神。
  • 6 希律将要提他出来的前一夜,彼得被两条铁链锁着,睡在两个兵丁当中;看守的人也在门外看守。
  • 7 忽然,有主的一个使者站在旁边,屋里有光照耀,天使拍彼得的肋旁,拍醒了他,说:“快快起来!”那铁链就从他手上脱落下来。
  • 8 天使对他说:“束上带子,穿上鞋。”他就那样做。天使又说:“披上外衣,跟着我来。”
  • 9 彼得就出来跟着他,不知道天使所做是真的,只当见了异象。
  • 10 过了第一层第二层监牢,就来到临街的铁门,那门自己开了。他们出来,走过一条街,天使便离开他去了。
  • 11 彼得醒悟过来,说:“我现在真知道主差遣他的使者,救我脱离希律的手和犹太百姓一切所盼望的。”
  • 12 想了一想,就往那称呼马可的约翰、他母亲马利亚家去,在那里有好些人聚集祷告。
  • 13 彼得敲外门,有一个使女,名叫罗大,出来探听,
  • 14 听得是彼得的声音,就欢喜的顾不得开门,跑进去告诉众人说:“彼得站在门外。”
  • 15 他们说:“你是疯了!”使女极力地说:“真是他!”他们说:“必是他的天使!”
  • 16 彼得不住地敲门。他们开了门,看见他,就甚惊奇。
  • 17 彼得摆手,不要他们作声,就告诉他们主怎样领他出监;又说:“你们把这事告诉雅各和众弟兄。”于是出去,往别处去了。
  • 18 到了天亮,兵丁扰乱得很,不知道彼得往哪里去了。
  • 19 希律找他,找不着,就审问看守的人,吩咐把他们拉去杀了。后来希律离开犹太,下凯撒利亚去,住在那里。
  • 20 希律恼怒推罗、西顿的人。他们那一带地方是从王的地土得粮,因此就托了王的内侍臣伯拉斯都的情,一心来求和。
  • 21 希律在所定的日子,穿上朝服,坐在位上,对他们讲论一番。
  • 22 百姓喊着说:“这是 神的声音,不是人的声音。”
  • 23 希律不归荣耀给 神,所以主的使者立刻罚他,他被虫所咬,气就绝了。
  • 24  神的道日见兴旺,越发广传。
  • 25 巴拿巴和扫罗办完了他们供给的事,就从耶路撒冷回来,带着称呼马可的约翰同去。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사도행전》 12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도 흥왕하게 된다는 것을 점차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일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칼에 맞아 죽고,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해지기 시작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현상을 보고 멍해진다면 깨달음의 분별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화인 사명 신학은 깨달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현상을 꿰뚫어 본질을 바라봅니다. 현상을 통해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수많은 일들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미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주관하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을까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또 어떻게 살해당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수많은 찌꺼기들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삶과 죽음이라는 이 문제를 명확히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본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도는 날로 흥왕하여 널리 퍼져가다》입니다.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온통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요한의 형제가 살해당한 것,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 그리고 베드로가 또 붙잡힌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 ‘그만두자! 이런 도는 더 이상 못 믿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환경에 부딪혔을 때 신앙의 기초가 견고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냈으면서도 하나님의 행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 사람들을 싫어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으면서도 끝내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며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사십 년 동안 내가 그 세대를 싫어하여 이르기를 "이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행사를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시편》 95:9-10)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라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사도행전》 12:1-5)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쉽게 멍해질 수 있으며, 이 본문을 이해하는 것도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맞아 죽은 후 많은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안디옥이라는 곳으로 갔고, 그곳은 흥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을 비롯한 다른 모든 방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베드로가 또 잡혔고,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일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무리를 이끌고 성전으로 가서 매일 카니발 축제처럼 지내니 너무 소란스러웠습니다! 박해를 당한 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돈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기에 이 무리는 몹시 게을러 보였고, 걸핏하면 성전에 들어가 기도만 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여전히 표적이 나타났고, 그 후 이 사람들은 다소 오만해졌습니다. 베드로가 대사도가 된 후,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신앙은 날로 쇠퇴해 갔고 돈도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해지기 시작했고, 기근이 들었으며, 경제 위기까지 겹친 데다 박해마저 바짝 뒤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이라는 곳은 날로 흥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행사를 보셨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박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박해마저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완전히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박해를 일으키셨는데도, 대사도 베드로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며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그 무리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으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신 후에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지역의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한곳에 머물며 몇 대를 그냥 눌러앉아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박해를 일으키셨지만, 사람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박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전 세계적으로 뚜렷한 흐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화인 교회가 흥왕하고 서양인의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화인들의 허리가 이전보다 꼿꼿해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흐름입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물론 장차 복음 전파의 사명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와 밥을 먹는데, 그가 제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동전을 50번 던졌는데 모두 앞면이 나왔다면 다음 번에는 앞면이 나올까, 뒷면이 나올까? 그 말을 듣고 저는 말문이 막힌 듯했습니다. ‘이미 50번이나 앞면이 나왔으니 다음에는 뒷면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사물을 볼 때는 흐름을 봐야 해.’ 그가 제게 해 준 이 말에 대해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다소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사물을 볼 때는 흐름을 봐야 한다’는 결론은 제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줄곧 자신들의 문제를 보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의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표적과 천사만을 좋아했고, 그런 것들이 특별히 좋다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날로 강성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도이며, 결코 빈 항아리에서 뱀을 꺼내거나 허공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식의 눈속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해야 하며, 깨달음 속에서 앞으로의 흐름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정리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로 흥왕해 갔지만, 결코 예루살렘이라는 이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대사도였음에도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은 사물의 법칙도 관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몇 번이고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셨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마케팅 전문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목회자를 세계적인 유명 목회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유명해지면 스타의 출연료처럼 강사료를 수천만 원씩 받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저는 깨달음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얄팍한 속임수는 제 앞에서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스타로 띄워준단 말입니까? 내가 그들을 훈련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표적이 나타나 귀머거리가 듣고 맹인이 보며 다리 저는 자가 걷는 일이 많다 하더라도, 제 눈에는 기껏해야 베드로 수준에 불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의 깨달음은 끊임없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깨달음의 성장을 위해, 특히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깨달음이 부족하면 걸핏하면 속아 넘어가고 맙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자신이 이전 교회에서 어떻게 자기 목회자를 보호했고, 그의 목회자가 당시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속았으며, 자기가 어떻게 앞장서서 그 사람들을 다 제압했는지를 말했습니다. 듣기에는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그의 보호가 별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지 못한다면,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는 꼴이니 이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토록 많은 박해를 겪었고, 본장에 이르러 또다시 붙잡혔습니다.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붙잡혔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제 생각에 베드로는 깨달음이 부족하여 잘못 짚었고, 엉뚱한 것들을 결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미혹에서 걸어 나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흥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흥왕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흥왕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물이 발전해 가는 흐름을 본다면 마땅히 그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역사에는 발전의 필연적 법칙이 있다’고 말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는 결코 변한 적이 없습니다!

본장은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여기에 머물지 말고 어서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을 깨닫는 데는 많은 뇌세포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듣기 거북한 표현을 쓰자면 발뒤꿈치로도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굳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녀석이 제법 고집이 세구나, 성질이 완고하군!’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헤롯 왕을 통해 베드로를 붙잡히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힌 후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사역을 적지 않게 했지만, 그때 아마도 자기가 겪은 일들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부정해져서 생긴 일이 아닌가 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해 버렸을 것입니다.

대사도인 베드로는 특히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는 크고 작은 베드로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적어도 세 번 이상 말씀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너무 힘들구나.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후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고,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대에 수많은 사람이 흥하고 수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사람이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고 관찰할 줄도 모르며,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비록 하나님께서 명백히 말씀해 주신다 해도 핵심을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전통적인 관념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사람의 생각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도 제한합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사도행전》 12:6-11)

베드로라는 사람은 참 흥미롭습니다. 감옥에서 이튿날 끌려 나가 죽게 생겼는데 천사를 보고도 환상을 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튿날 정신을 차려 이미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그가 생각한 것은 ‘천사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후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서도 그는 천사가 사람보다 더 큰 권능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천사 숭배 역사와 전통은 사물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제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천사라는 말만 들어도 대단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전통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자기를 옥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직접 보고는 천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천사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온통 자의적인 관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지 못했고, 이것이 바로 온 예루살렘 교회가 무너져 버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이었지만, 예루살렘에는 바리새파 제자들이 많았기에 돌아와서는 베드로에게 어떻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며 따져 물어 온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많은 개념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부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으며, 다 그가 스스로 지어낸 말입니다.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깨달음도 부족하면 제멋대로 엉뚱하게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스데반이 박해받는 것을 보고 머릿속에 온통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삶과 죽음조차도 꿰뚫어 보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베드로는 죽을 때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반문합니다. 사실 바로 매달리든 거꾸로 매달리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것이 안 된다고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조차 예수님을 본받을 수 없다고 여겼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이 가난해지고 박해를 받자 그저 헤롯 왕 같은 자들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주관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이르되 “이 말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사도행전》 12:12-17)

베드로는 옥에서 나온 후 마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누구입니까? 마가는 오순절에 그들과 함께 기도했던 사람이며, 그가 살던 장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려 했으나, 당시에 거기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가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천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베드로와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린 채 그저 천사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 아예 별자리 운세까지 갖다 붙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온 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야고보와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러 떠났습니다.

이때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두머리로서 마땅히 온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어떻게 옥에서 나왔는지만 야고보에게 전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관리권을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라는 이 인물 또한 구약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고, 할례를 고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우리가 보게 되듯이, 사도 바울은 평생을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사도 바울로부터 온 것이지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우두머리 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하러 갔습니까? 사실 그가 예루살렘에 없다고 해도 우두머리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15장에 이르면 베드로는 이미 교회 안에서 이인자로 밀려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사를 명확히 보지 못했고,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말씀하셨음에도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수많은 전통을 돌파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전통을 별로 지키지 않습니다. 전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통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이때 권위를 상실했고, 그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라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것이며, 결국 어디로 숨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으니 이는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닙니다.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혹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흥왕하려면 우리는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혹을 피해야 합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쓸 때의 주제는 바로 《많은 사람이 흥하고, 많은 사람이 넘어진다》였습니다. 복음의 중심이 예루살렘을 떠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천사에 대해 온갖 헛된 미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표적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고 그저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 안에서 수많은 표적이 나타나지만, 우리는 표적과 천사에 대한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기를 갈망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에 대한 미혹에 빠져 있어 베드로가 온 것을 보고도 분명 베드로의 사자나 천사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알고 보니 많은 이들이 천사를 연구하기는 좋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마다 수호신 같은 사자나 천사가 붙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본 적이 없으며, 사실 유대인들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베드로가 실제로 천사를 보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이것저것 짜맞추어 개인적인 경험들을 축적시켰고, 그것이 그들의 전통과 미혹, 신학 체계가 되어 버렸으니 이러한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가운데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천사가 하나씩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설령 천사에 대해 훤히 꿰뚫는다 한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흥왕하게 해야지, 내 곁에 천사가 흥왕하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떠한 천사나 별자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구원하실 때가 되면 보내실 것이고,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박해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박해가 임할 때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표적과 기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의 생각이 지혜로워져서 하나님의 행사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만드시는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전통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전통이 있고, 성공회는 성공회의 전통이 있어서 그런 것들은 건드릴 수도 없습니다. 가톨릭에는 가톨릭의 전통이 있고, 복음주의파에는 복음주의파의 전통이 있으며, 은사주의파에도 은사주의파의 전통이 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는 전통이 없습니다. 전통은 하나님의 행사를 가로막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말라

어떤 교회의 성도가 자기 목회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윗선에 연줄이 있으니 책임지겠다고, 우리 교회 위에는 보호막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라면 아마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 보호막은 당신 것보다 훨씬 크니 우리를 보호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사람의 권세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한 목회자가 어떤 가난한 청년을 대접했는데, 어느 고위 간부의 사위라는 말에 그 목회자는 혼이 쏙 빠져 자기가 대단한 연줄이라도 잡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 목회자는 본래 돈도 별로 없으면서 온종일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명품을 사주느라 많은 돈을 썼고, 성도들에게 그를 보호하게까지 했습니다.

저는 형편에 안 맞는 음식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물건은 사지 않으며,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으니 만사가 단순해집니다. 저는 누가 저를 보호해 줄 필요도 없고, 저 역시 다른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며,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 그런 것들을 맹신하지 않습니다. 지역에서 권세가 대단한 유명 인사가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제가 치유와 축사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안 갑니다! 설령 간다 해도 그의 권세 때문에는 가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하찮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권세를 좋아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도행전》 12:21-23)

왜 이런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을까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의 영토에서 양식을 얻고 있었지만, 헤롯 왕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헤롯 왕과 연줄을 맺고 관계를 회복하여 한마음으로 화친을 청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권세에 기대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야고보를 택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왜 후보에 들지도 못했을까요? 야고보가 이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기에 우두머리가 물러나면 야고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어쩌면 마리아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였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이 문제를 명확히 정리해 주셨지만,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사람에게 속한 수많은 논리 체계가 들어차 있었습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8-50)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셨지만, 베드로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를 다 잊어버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것만 기억했습니다. 그들을 잘 보살피지 않았다가는 훗날 예수님께 책망이라도 들을까 두려워했으니, 그들 속에는 사람에게 속한 온갖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1-23)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정감 있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훗날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하게 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일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인간적인 정과 세상의 인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깊이 해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권세를 맹신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이 60만 명이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으니 실로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원인은 모두 사람의 권세를 맹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천사에 대한 온갖 미혹에 빠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도 보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매우 가련한 지경에 이를 정도로 변방으로 밀려났으니, 전도자이면서도 전도할 대상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예루살렘 교회는 땡전 한 푼 없을 정도로 몹시 가난해졌습니다. 본래 재물의 법칙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법칙은 더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줄기 열정만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몸을 피한 결과 최고 지도자의 자리는 사라졌고, 교회는 갈수록 가난해졌습니다.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자니 너무 힘들고, 농사를 짓자니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으며, 양을 치는 것도 서툴렀습니다. 밥 먹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에베소에 가서 설교 한 번 하고 교회의 헌금을 조금 얻어 쓰거나, 내일은 고린도에 가서 얼마간 머물며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것을 내세워 바울이 세운 교회의 유명세에 편승해 푼돈을 버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초청하지 않으면 바울이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하는 것은 할례를 지키지 않지만 자기는 지키며, 할례를 받는 것이 안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거의 빗나간 길로 끌고 갈 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사도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이 진짜 사도라고 믿게 만들었고, 바울은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해 그가 좀 얻어먹고 마시게 두는 것은 별일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입니다. 저는 형제자매들에게 늘 말해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제 갈 길로 치우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2:24-25)

이후 바울은 각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늘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연보들을 총괄 관리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를 매우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헌금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안디옥이라는 그곳에서 흥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다시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습니다. 이어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온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실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저는 이전에 어떤 사역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단한 희생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큰 은혜이며, 헌신하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저는 늘 말합니다. ‘내가 감히 헌신할 자격이 있고,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지금까지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만약 사람이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 길을 결코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보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오직 사람의 생각만을 위하는 것뿐이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삶과 죽음이라는 이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살다 보면 결국 유골함에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고 마는 법인데, 꿰뚫어 볼 수 있든 없든 반드시 초탈하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사람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끼 못 먹으면 한 끼 굶으면 그만이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쉬워집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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