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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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2023-11-26 5,952 谨慎系列 祝福 咒诅 专心 侍奉神 倾向神 遭够了罪

《答疑解惑》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께 새로운 발견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설교 한 편마다 1%에서 5% 정도의 새로운 발견만 있어도 대단한 것입니다! 논문을 보더라도 대개 기존의 기초 위에서 1~2%의 혁신만 이루어내면 아주 훌륭한 논문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 박사나 석사 과정을 밟으신 분들이 계실 텐데, 논문을 쓴다는 것은 남의 것을 요약하고 그 위에 약간의 승화를 더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리라》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간증을 보면 어쩌다 가끔 나오는 간증조차도 “하나님이 좋은 의사를 붙여주셔서 나았다”는 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치유인지 의사의 치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참 동안 특효약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특효약에 대한 간증인지 하나님의 간증인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이게 도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큰 길을 돌아왔더군요. 이제야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마귀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사실 이번 설교는 축사(귀신 쫓음)에 관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비록 ‘축사’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축사 논문과도 같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몇 가지 기본 개념을 명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귀신의 합법적인 역사는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란 무엇일까요? 저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귀신이 합법적으로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그 결과는 같습니다. 하나님을 어기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이라는 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인간 평생에 걸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본 개념입니다.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귀신이 찾아오는데, 귀신도 참 말을 잘 듣습니다. 만약 귀신이 “나 가기 싫은데”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회의를 여십니다. “누가 갈래?” 어떤 귀신이 가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귀신을 보내십니다. 원래 이런 원리였던 것입니다. 제가 틀린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처럼 생각하며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실 거라 여기지만, 《성경》에서는 자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귀신을 보내시거나 귀신이 자원해서 찾아오고, 결국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다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피가 죄를 씻기시고 저주를 제거하시며, 그 저주가 예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참 불행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나님을 거역해서 저주가 3~4대까지 이릅니다. 조부모가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저주의 몫을 자손이 받고, 증조부모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끊임없이 가문의 저주를 끊는 기도를 하지만, 사실 잘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끊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저주를 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상의 저주는 차치하고라도, 본인이 스스로 받는 저주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찹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매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서서히 저주를 받으며 대충 사십시오. 그렇게 대충 살다 보면 대변도 안 나오고, 소변도 안 나오고, 밥도 안 넘어갈 것입니다. 거기서 더 대충 살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다리가 비틀리고, 허리가 굽고, 머리가 멍해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 때문일까요? 바로 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마치 벼랑 끝으로 모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천 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인자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귀신이 대등하게 대립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과 악령이 언뜻 대립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악령은 사실 하나님의 가장 기묘한 창조물 중 하나입니다. 악령뿐만 아니라 사람 역시 하나님의 가장 기묘한 창조물 중 하나이며, 그리하여 이 세상은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귀신이 대립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립할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귀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이 두 가지가 대립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면 자연스럽게 귀신과 대립하게 되고, 귀신의 형상을 나타내면 자연스럽게 귀신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다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귀신을 쫓아달라고 해서 오늘 쫓아내 주면, 내일 또 귀신을 불러들이고, 모레 다시 쫓아달라고 찾아옵니다. 사람을 참 지치게 합니다. 두세 시간씩 기도하는 것은 예사입니다. 저도 억울하고, 그 귀신도 억울합니다. 오직 본인만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기가 귀신을 불러들여 놓고 저를 찾아와 기도하게 만들어 저를 고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귀신 입장에서도 억울합니다. 귀신이 말하길, “저 사람 참 못됐네. 자기가 날 불러들여 놓고 왜 당신한테 날 때려달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할 일 없이 저더러 귀신과 싸우게 만듭니다. 오늘 귀신을 혼내주고, 내일 또 혼내주고, 얼마 지나면 또 혼내줘야 합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나중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축사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마가복음에서 이미 축사에 대해 아주 알기 쉽게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축사가 대단히 고차원적인 학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 제자들은 사실 엉망이었고 나중에도 엉망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려 하는데도 누가 더 큰지 다투며 “내가 좌의정이 되고, 네가 우의정이 되겠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며 어머니까지 데려와 예수님께 청탁했습니다. “장차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내 아들 하나는 좌의정, 하나는 우의정이 되게 해주십시오.”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과 2~3개월 정도, 아주 짧은 기간 훈련시키신 후 파송하여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 나중에 70인의 제자를 세우셨을 때도 짧은 훈련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훈련은 아주 단순했고 대단히 심오한 것이 없었습니다. 배낭도, 돈도, 옷도 챙기지 말고 길을 떠나 어느 집에 들어가든 너희를 영접하면 들어가 머물고,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훈련인가?’ 싶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이 축사 훈련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 보십시오. 왜 사도 바울은 축사를 강조하지 않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마귀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이처럼 단순한 원리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창립 역시 이 원리를 이어받아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이 화인 사명 신학은 은혜 신학입니까?” 제가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가요?”라고 되물었더니, 그분은 “화인 사명 신학은 은혜 신학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무슨 대가를 치른다는 말입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이 말하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어드리는 것 외에 더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뜨겁게 연애하는 것과 같아서 날마다 하나님을 뵙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 신학이 훈련하고자 하는 목표이며, 사람을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승리하는 제자가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길 원한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전심(집중)은 매우 중요한 자질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 제목에도 ‘전심’이라는 단어를 넣을까 하다가, 축사 시리즈 설교이니 넣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전심’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날마다 귀신에게 쫓기고, 귀신에게 짓밟히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고, 귀신에게 쫓기다 교회로 들어오게 됩니다. 교회에 들어와 보니 하나님이 참 좋으시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즉시 따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습니다. 제게 찾아와 “목사님, 저 너무 기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들 찾아와서 “목사님, 저 너무 괴로워요”라고 합니다. 제 직업도 참 묘합니다. 다들 힘들고 괴로운 일만 나누러 오지, 기쁜 일을 나누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기쁠 때는 자기들끼리 몰래 딩타이펑 만두를 먹으러 가면서 저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그동안의 미안함을 만회하겠다며 굳이 저를 데리고 딩타이펑에 가더군요. 기쁠 때는 저를 잊고 있다가, 괴로울 때만 저를 떠올립니다. 딩타이펑 만두를 먹을 때는 잊고 있다가, 배가 만두처럼 퉁퉁 부어오르고 고통스러울 때에야 저를 찾아옵니다. 제 일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틀림없이 머릿속에 더러운 생각이나 빗나간 생각이 가득해서 온갖 잡생각은 다 하면서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생각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두고 ‘전심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아스다롯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자기 아내만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를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온전하지 못하면 치명적이며, 반드시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반드시 괴로움을 겪게 되며, 귀신에게 농락당하고 짓밟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매를 버는 짓’이며, 승리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승리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마귀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 미련합니다. 머리를 어디에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미련한지 아십니까? 괴로울 때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서 질병과 온갖 고통에서 건져주시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편안해지고 나면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긴 줄 알고 또 귀신을 불러들여 다시 괴로워합니다. 괴로웠다가 나아지고, 나아졌다가 다시 괴로워지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잠깐 전심이었다가 다시 마음이 흩어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에 집중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전심으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나면 제게 확고한 논리가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당당하고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엔지니어가 되려면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며, 목사가 되려면 확실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러므로 이 태도가 핵심입니다!

어제도 한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며 찾아와 기도해 주었고, 그저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와서 기도해 주었으며, 그 엊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그 뼈속 깊은 곳에는 온통 이기심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나름의 논리를 대며 “목사님, 사실 목사님도 마음이 괴로우시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맞다, 나도 괴롭다. 하지만 너는 네 이기심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나는 너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괴로운 것이니 두 괴로움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제 마음이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미련할까요? 어찌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돌이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마귀의 손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못 고치겠어요”라고 합니다. 본인이 못 고친다고요? 하나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몇 번 더 호되게 맞고 나면 틀림없이 고쳐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선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신다.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음속으로 이것이 보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심’이라는 두 글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면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음란이 무엇입니까? 전심이 아닌 것을 음란이라고 합니다. 전심을 품지 않고 마음이 분산되어 이 여자도 좋아 보이고 저 여자도 좋아 보이지만, 다윗과 같은 팔자도 아닙니다. 다윗 왕이라면 권력과 재물이 있으니 다 취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여러분은 안 됩니다. ‘전심’과 ‘음란’은 서로 대립하는 두 단어입니다. 하나는 전심이고, 하나는 음란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차치하고, 당장 공부에 집중하는 것조차 해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은 다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공부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어디 있으며, 세상을 사랑할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자격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우선 여러분에게 집중하는 훈련부터 시켜야겠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시키는 일은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은 틈만 나면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한 자매님의 남편이 “당신 이 일 잘못 처리했잖아”라고 하니, 그 자매님은 “내가 저 일은 잘했잖아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남편이 너무 답답해서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박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일을 잘못 처리했을 때 올바른 반응은 무엇입니까? “제가 잘못 처리했네요, 어떻게 해야 맞게 하는 건가요?”라고 해야지, “저 일은 잘했잖아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는 “말투를 좀 상냥하게 할 수는 없어요? 표정이 왜 그렇게 험악해요?”라고 합니다. 일을 잘못 처리했는데 표정이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형제가 답답해서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형제는 똑똑해서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이마에 닿기 직전에 속도를 줄여 살짝 부딪히더군요. 참 영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가관입니다. 제가 “당신 이거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써놓은 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쾅쾅거리며 벽에 머리를 들이받더군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나중에 제가 가만히 살펴보니, 산둥 출신 사람은 진짜로 들이받고, 장쑤 출신 사람은 영리해서 머리를 들이받는 시늉만 하더군요. 하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일에는 진짜로 임해야 합니다. 일이 잘못 처리되었다면 올바른 모습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수없이 강조했습니다. 머리를 들이받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를 들이받는 것이 일 잘못 처리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머리를 들이받을까요?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심을 다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일이 잘못되었으면 바르게 고치고,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으면 올바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왜요? 제가 한 건 다 마음에 안 드세요?”라고 합니다. 잘못했으니 마음에 안 드는 것이지 잘했으면 왜 그러겠습니까? 잘못되었으면 고치면 그만이지, 왜 얼굴을 붉히고 눈을 흘기며 힘들어합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마음이 붕 떠서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흔들리면 담장 위의 풀과 무엇이 다릅니까? 마음이 분산되고 들떠서 배움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을 제대로 해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실패하고 내일도 실패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을 좀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어쩌면 이리도 어려울까요? 사실 편안해지는 것은 믿음으로 굳게 설 때 오는 것입니다!

요점을 잡지 못하고 툭하면 곁길로 새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동역자들을 훈련할 때 먼저 일할 때 집중하는 법부터 훈련합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 구실에 집중하겠습니까? 기껏해야 두 발 달린 짐승에 불과하지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사역은 괴로우면서도 기쁜 일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집중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도 일종의 타고난 성향이라 볼 수 있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셔도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산만하여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일할 때는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며, 주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집중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릴 적 일이 생각납니다. 부모님은 마작을 좋아하셨습니다. 겨울이면 문과 창문을 꽉 닫고, 각자 담배를 피우며 마작을 하셨습니다. 방은 좁고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을 것 같아, 저는 구석에 작은 의자를 놓고 숙제를 하곤 했습니다. 마작을 하던 어른들이 저를 쳐다보아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도 “이 녀석 참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저는 속으로 ‘당연한 소리를 하나’ 생각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것도 저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일찍부터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저는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창문 틈으로 텔레비전을 훔쳐보곤 했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저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일에만 전심을 다해 확실하게 끝마쳤습니다. 그것이 저의 모습이었고, 어릴 때부터 집중하던 사람이었기에 주님을 믿은 후에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산만하고 집중하지 못하면 고통스럽게 살며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산만해서 무슨 일을 해도 집중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간단합니다. 강제 노역장에 끌려가 고된 노동을 해보면 금방 고쳐집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매를 맞으니 바로 나아집니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육신이 너무 강하면 다듬어지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 아래 효자 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식을 오냐오냐 감싸기만 해서 훌륭하게 키워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순 살이 넘도록 감싸고 돌아서 아흔 살 노모가 먹여 살려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버릇없이 자란 것입니다. 이제라도 바로잡으려면 어릴 때 안 맞은 매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스스로 벽에 부딪히고 땅에 넘어지며 고통을 통해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부분이 놓임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겪고 즉시 돌이키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고치지 못합니다. 때로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것도 결국 자신의 선택입니다! 사람으로서 조금 부드러워지고 집중하는 것이 그리 어렵습니까? 부드러워지라고 하면 게으름에 부드러워지고, 집중하라고 하면 노는 데 집중하고 쓸데없는 짓에만 전심을 다하니 망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백절불굴(百折不屈)’과 ‘연전연패(連戰連敗)’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같은 글자라도 순서와 마음가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의 쓰레기를 치우시고, 우리가 소중하게 붙잡고 있던 헛된 것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어 번영의 날들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기에 반드시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반드시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결코 폐해지지 아니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향해 돌이키실 것이요,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치유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겪을 만큼 겪으셨습니까? 아직 덜 겪으셨다면 축하합니다. 계속 더 겪어보십시오. 괴로우십니까? 아직 극한에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 영적 원리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2. 본문 말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1-3)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의 백성이 주께로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의 백성이 우리 안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우리 안의 아스다롯을 제해 버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주께로 돌이켜 전심으로 주를 향하며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 오늘이 바로 주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치료하시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은 어떠합니까? 늙은 엘리의 두 망나니 아들이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언약궤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마치 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니거나 목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면 어디를 가든 승리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목에 한 치짜리 십자가를 걸든, 한 자짜리를 걸든, 키가 크다고 1미터짜리를 건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나타나려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메고 전장으로 나갔으나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신가? 하나님도 별수 없네. 자기 언약궤 하나도 지키지 못하시잖아.’ 누가 그렇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스스로를 능히 지키실 수 있으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다.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신전에 두고 이스라엘의 신도 별것 아니라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보니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이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다시 세워놓았더니 이튿날 또 엎드러졌고, 그들은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이것이 하나님과 언약궤로 인한 것임을 알지 못하자, 결국 블레셋 온 사람들에게 치질(독종)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십니까? 치질의 영을 보내시니 블레셋 사람들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이기고 그들의 신의 언약궤까지 빼앗아 왔지만 아무 소용없이 모두 치질에 걸려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람은 참 묘합니다. 대변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입니다. 밥을 못 먹는 것과 대변을 못 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합니까? 밥을 못 먹으면 링거라도 맞을 수 있지만, 대변을 못 보면 정말 큰일입니다! 작은 치질 하나로 블레셋 사람들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치질 하나로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블레셋 온 땅에 사람마다 치질이 걸려 배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옆집에 가서 “댁에도 치질 걸렸소?” 물으면 “우리 집도 걸려서 변기가 피바다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웃마다 온통 치질에 걸렸는데, 크기가 대추만 하거나 콩알만 하고 땅콩만 한 것들이 사람마다 돋아나 피를 쏟아내니 정말 죽을 지경이었고 끔찍했습니다!

작은 치질 하나로 혼비백산한 블레셋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물었습니다. 점을 쳐보니 “이스라엘의 신을 노엽게 했다! 이스라엘의 신은 참신이요 참으로 두려운 분이시니 어서 언약궤를 돌려보내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까요? 사람이 메고 갈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묘안을 내어 언약궤를 소달구지에 싣고 암소들이 스스로 이스라엘 땅을 향해 곧장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고, 그렇지 않고 딴 길로 가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금 쥐와 금 치질 형상을 달구지에 함께 실었습니다. 금으로 치질 모양을 만들었으니 보기에도 얼마나 흉측했겠습니까? 마침내 소달구지가 돌아와 기럇여아림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셨습니다.

그 무렵 늙은 엘리도 죽고 그의 아들들도 죽었으며,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말을 순순히 들었을 것 같습니까?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아무리 외쳐도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의 사역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엘리 시절에도 말을 듣지 않던 백성이 이제 와서 듣겠습니까?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20년 동안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갔으니 블레셋의 신들이 매우 강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의 신은 바로 이방 신 바알과 아스다롯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무능하여 언약궤조차 빼앗겼다고 여겼지만, 정작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신은 무력하다고 여겼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서로 상대방의 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니 계속 아스다롯을 섬겼고,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하나님도 언약궤도 소용없으니 우리도 이방 신과 아스다롯을 섬겨보자”고 한 것입니다. 아스다롯의 또 다른 이름은 아세라입니다. 그 지역에서 아스다롯은 사랑의 여신으로 불리며 가정을 몹시 중시하는 신이었습니다. 사실 중화권 교회의 ‘사모’ 중심 문화의 기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필 20년이 지난 후였을까요? 그 20년 동안 백성들은 이 이방 신들이 정말 효험이 있는지 거대한 실험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했습니다. 농사는 이스라엘이 짓고 수확은 블레셋이 빼앗아 갔으며, 날마다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스다롯과 바알 앞에 분향하며 이방 신들이 블레셋을 막아주기를 구했고, 블레셋 사람들 역시 아스다롯과 바알을 섬기며 이스라엘을 더 짓밟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스다롯과 바알이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당연히 원조이자 토박이인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경찰이 은행 강도를 잡게 해달라고 관우에게 빌고, 조폭은 강도질에 성공하게 해달라고 관우에게 비는 것과 같습니다. 관우가 누구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알 수 없는 노릇이며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20년간의 기나긴 실험 끝에 그들은 온갖 이방 신을 섬겨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고통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치질이 생겼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안 생겼겠습니까? 그들에게도 생겼고, 어쩌면 블레셋 사람들의 것보다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이리저리 방황하며 심한 고초를 겪고 질병과 재앙이 끊이지 않았으며 남들에게 짓밟히는 고단한 세월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무엘이 20년 동안 외쳐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 제가 설교할 때마다 매일같이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앞 구절만 말씀하셔도 뒤에 무슨 말씀 하실지 다 압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다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 표정을 보면 저도 거북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욱 역겨우실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어린 사무엘이 중년이 되기까지 20년을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제야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맞구나.” 여러분도 제가 설교할 때 ‘목사님 말씀에 일리가 있네’라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 20년 동안 집회를 열고 설교를 해도 아무도 듣지 않고 다들 아스다롯을 섬기러 갔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믿음을 20년 동안 지켜냈으니 실로 대단합니다! 20년 동안 설교를 해도 듣지 않던 백성들이 20년 만에 마침내 “그래, 우리가 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해보지 않았을까? 해볼 건 다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지난 20년간 고생만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보자”라고 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무슨 말을 외쳤을까요? “너희가 자초한 일이다!” 사무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20년 넘게 믿음을 굳게 지키며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마침내 백성들을 깨어나게 했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선지자는 듣기 싫은 소리를 자주 해야 합니다. “너희가 잘못 행하였으니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고난을 받아도 싸다!” 이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주의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굳게 선포하는 사람, 그가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0년 동안 사무엘의 잔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앞말만 들어도 뒷말을 줄줄 꿸 정도가 되었습니다.

왜 그들은 20년 만에 문득 깨어났을까요? 그 20년 사이에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이 그들이 당한 고난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떤 중대한 일이었을까요? 예컨대 이스라엘의 관원들, 족장들, 각 지파의 지도자들의 집안에 일제히 큰 재앙이 닥쳤다고 해봅시다.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너도나도 무슨 일인지 토론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사무엘도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무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번 시도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회의를 연 것은 마치 쭌이회의(遵義會議)와 같았습니다. 쭌이회의를 통해 마오쩌둥의 영도적 지위가 확립되었듯이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사무엘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너희는 고난을 겪을 만큼 겪지 않았느냐?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다면 이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너희 중의 이방 신들을 제하고 아스다롯을 제거하라.” 사무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온 세상이 취해 있을 때 오직 사무엘만이 홀로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5. 고난을 겪을 만큼 겪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고난을 덜 겪었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은 헛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다면 제 말을 반드시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만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어나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역사하시고 언제 역사하지 않으실까요? 고난을 겪을 만큼 겪고 죄악이 가득 찼을 때에야 비로소 역사하십니다. 사역을 하면서 저는 여러분이 고난을 끝까지 다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스스로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음을 일찍 깨닫는다면,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구원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 미련한 길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지 마십시오. 아무리 수천수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한들, 고난을 막아내지 못하는 핑계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늘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는가?” 우리 목회자들도 점차 이 원리를 깨달아 사무엘처럼 사역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날마다 물으십시오. “고난을 겪을 만큼 겪으셨습니까? 고난을 충분히 겪었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제거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겠습니까? 한번 시도라도 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복잡할 것 없이 몇 가지만 보면 됩니다. 재정적인 축복이 없다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틀림없고, 몸에 질병이 많다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속에 온통 이방 신들, 곧 돈, 직장, 가정, 개인의 안락한 삶 따위만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그저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살려는 안락한 삶(小日子)에 갇히는 것은 사람을 몹시 망가뜨립니다. 암도 그런 삶을 살다가 생기고, 고혈압도 그런 삶에서 오며, 다리가 비틀리고 허리가 굽는 것도 다 그런 삶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분은 “그럼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삶을 살 때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고난을 겪습니까? 눈에 보이는 금과 은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안에 온전한 마음을 둔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 번영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여러분의 기업이나 사업, 직업과 큰 상관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만 상관이 있습니다.

물론 블레셋 사람들은 아스다롯을 잘 섬기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블레셋 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 블레셋의 신까지 섬기려 한다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영적 음란이며, 패가망신하는 비참한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므로 영적 음란을 행해서는 안 되며, 이제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6.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다(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직 완전히 온 마음을 다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한번 시험해보고자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험을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나 자신에게 6개월 동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시간을 주겠다”, “3개월 동안 전심으로 사랑해 보겠다”, “한 달 동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고 효험이 있는지 보겠다”라고 결단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위대한 시험을 시작하여 이것이 과연 역사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고난을 겪을 만큼 겪어서 하나님께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배길 수 없습니다. 과거의 저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고 땅을 향해 외쳐도 막막하기만 하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찬물을 마셔도 체할 만큼 지독히도 운이 없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저를 축사 사역을 하는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축사하는 교회가 드물었습니다. 귀신에게 쫓기다시피 하여 제 발로 그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세상을 바라볼 때 공기오염 지수가 500에 달하듯 온 세상이 잿빛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흑백처럼 보였습니다. 흑백사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이 그러한 짙은 스모그에 갇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너무나 푸르고 구름은 하얗고 길가의 풀은 푸르며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 이곳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정말 정원 같은 도시였는데, 나는 줄곧 잿빛인 줄로만 알았구나!”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제가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경험한 것은 ‘이 하나님이 정말 나를 구원하시는 분인가?’를 확인하러 온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는 저의 구함과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간 첫날, 문을 나설 때 완전히 변화된 저를 보며 참으로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첫날 저를 데리고 무엇을 시켰는지 아십니까? 저를 작은 방에 가두어두고 방언 기도를 시켰습니다. 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침부터 오후 세 시 넘게까지 시달리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결국 몇 마디 흉내 내어 따라 했습니다. 저의 첫 방언 기도는 흉내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방언을 따라 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방언을 받았다!”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속으로는 ‘무슨 소리야, 흉내 낸 건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이 영적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억지로 강요당했던 경험 때문에 그 후로는 방언 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2년 후 성경을 통독하고 연구하면서 비로소 방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의 특징이 그렇듯 명명백백하게 이해한 것입니다. 제게 방언 기도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면 아주 명쾌할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사무엘이 선포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모하여 그분을 시험해보고자 한다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인지 알고자 한다면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3)

7.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

이 하나님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방 신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여전히 이방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두려 한다면 이 시험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순종하여 이방 신들을 없애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왜 놀라울까요? 그는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콕 집어 말했습니다. 이방 신들 중에서도 아스다롯이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아스다롯은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사랑의 여신)와 같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아스다롯은 태양신이자 ‘주(主)’라 불리는 바알의 누이이자 아내였습니다.

아스다롯이 전하는 사상은 바로 ‘개인의 안락한 삶과 가정의 행복’입니다. 아스다롯의 이름은 사랑의 여신이지만, 제가 말하는 거룩한 사랑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사랑을 좇다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데, 이것이 아스다롯의 역사입니다. 짝사랑 뒤에 역사하는 귀신도 아스다롯이고, 부부간의 부정 뒤에 역사하는 귀신도 아스다롯입니다. 오늘날 목사가 교회를 다스리고 사모가 목사를 다스리는 기이한 현상들도 이 아스다롯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스다롯은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사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교회가 지나치게 ‘가정 중심’으로만 흘러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스다롯이 주도하는 것은 온통 이러한 것들입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의 친척이 암에 걸려 저희가 함께 섬겨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역 후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났고, 저는 비행기를 타고 가 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정성을 다해 사역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아 제가 하는 사역을 본인도 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었고, 그 목사님은 교회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교회에는 영적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모와 자녀들이 결사반대하며 ‘가정 제단’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더 이상 사역을 추진하지 못하고 아내의 말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영어에 “Wife happy, life happy(아내가 행복해야 인생이 행복하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침투력이 매우 강합니다. 그 배후의 악령이 얼마나 강력하겠습니까? 그 배후의 악령이 바로 아스다롯, 곧 아세라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영에 사로잡히면 매우 비참해집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역사적으로 바알과 아스다롯의 논리는 매우 맹위를 떨쳤고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한때 이 사상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마음이 흩어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르다가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인터넷에서 이 설교를 듣고 번쩍 정신이 들어 이 영의 위험성을 깨닫는다면, 고난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완전히 제거하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을 극진히 아끼고, 일부일처로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 등은 듣기에는 참 좋아 보이지만 사람의 영혼을 깊이 부패시킬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저 자기 가정을 챙기며 안락하게 사는 것에만 매몰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사람이 온종일 자기 삶의 안락함에만 갇혀 있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살인이나 방화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명확합니다.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와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8.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험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검증하는 방법은 전심으로 그분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단 한 달이든, 6개월이든, 1년이든 결단해 보십시오.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오직 그분만을 섬기면 두 가지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육체의 건강과 재정의 축복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깊은 탄식을 느낍니다. 제가 직접 섬겨서 재정의 큰 돌파를 경험하고 육체의 질병에서 큰 해방을 얻은 사람들이, 그 후에 다시 전심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재앙의 굴레를 또 한 바퀴 돌고 싶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 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다 겪지 못한 채 비참하게 끝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오직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신뢰할 때 온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참으로 당당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시린 일이지만 너무나 적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전심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단 1년만이라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삶이 회복되고 세상을 사랑할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딴짓을 하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해 보고 나서 하십시오.

화인 사명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학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땀을 흘릴 수도 있으며,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께로 전심으로 돌아오지 않거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우리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왜 오늘날 많은 교회가 무기력합니까?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대신 의사만 소개해 줍니다. 세상의 과학은 발달했으나 신학은 너무나 낙후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사무엘을 본받아야 합니다. 20년이 걸리든, 또 다른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이 한 가지 곡조를 20년 동안 꿋꿋하게 불러야 합니다! 훗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깨어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료하시며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9. 결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며,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더욱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자기 논리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십시오. 무언가 말을 많이 했다면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앞으로는 제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점검하십시오. 이러쿵저러쿵 불평하고, 네가 어쨌느니 내가 어쨌느니 하며 말투와 표정과 몸짓으로 절망감을 드러내는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은 다 집어치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십시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며 인자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수없이 이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형제자매가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찬양 한 곡을 부르며 헌금 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만약 헌금의 의미를 잘 모르신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복을 쏟아붓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헌금은 대단히 큰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큰 은혜이며, 하나님을 가장 귀한 보배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 시간 다 함께 손을 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는 오직 전심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주께로 돌이킵니다. 오늘 제 안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제 안의 모든 아스다롯을 제해 버립니다. 하나님, 저는 오직 주님만을 존귀히 여기며 더 이상 안락한 소시민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진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돌이키오니 오늘부터 주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주의 은혜와 축복을 제 삶에 넘치도록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 나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옵소서. 내가 전심으로 주께 돌아와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주의 약속은 결코 폐해지지 아니하며 천 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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