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느헤미야》 6장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개념이 부각됩니다. 바로 일에 전심전력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반드시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반드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에 두려움이 있으면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부패와 무너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목표를 가로막을 수 없다”입니다.
지난 몇 장의 내용 돌아보기
《느헤미야》 1장에서 5장까지의 각 단락은 느헤미야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극복해 낸 고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을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표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내우외환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밖에는 원수들이 있었고, 안에는 다루기 힘든 백성들뿐만 아니라 원수와 내통하는 유대인 배신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온갖 문제에 직면해야 했기에 이 사역은 해내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어떤 때는 너무 지쳤다고 하소연하고, 어떤 때는 너무 가난해서 먹을 밥도 없으니 집안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씀드리자면, 보통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질려버려서 ‘그냥 때려치우자! 차라리 왕궁으로 돌아가자’ 하고 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일은 못 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속이 답답하고, 정말 골치 아픈 난장판이라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이러지 않았다면 성벽은 진작에 다 지어졌을 텐데, 느헤미야에게까지 차례가 왔겠습니까? 사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전에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학사(서기관)였기에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했고, 성벽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잇따라 닥쳐오는 내우외환을 모두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심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집중하는 성품이 있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곰곰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전심을 다하는 사람입니까? 전심으로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물러서게 됩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전략이 확실하며 방법이 올바르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모임을 핑계로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로막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내려가서 너희를 만나겠느냐?” 하매,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느헤미야》 6:1-4)
원수들은 성벽이 완성된 것을 보고 속이 몹시 뒤틀렸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 네 따위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여우가 올라가도 다 무너질 텐데 무슨 성벽을 짓는다는 거야?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왔어도 짓지 못했는데, 네가 온다고 지을 수 있겠어?’
‘우리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이 지역에 버티고 있는데, 이방인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너희 유대인들 내부에도 우리 사람들이 이미 다 침투해 있다! 제아무리 날고뛰는 벼슬아치라도 토착 세력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지. 네가 왕의 술 관원 출신으로 유다 총독이 되어 왔다고 해서 성벽을 다 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그러나 결국 느헤미야는 문짝을 다는 것 외에 성벽 전체를 완성해 냈습니다. 이번에는 원수들의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쓰라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밥이나 먹자며 모임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홍문연(살해하려는 덫)’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속으로 ‘너희가 나를 해치려는 게 뻔하지 않으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수들도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만 제거하면 많은 일이 쉽게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 몇 번이나 꾀했지만, 하나님께서 번번이 막아주셨습니다.
말씀드리자면, 느헤미야처럼 전심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 반드시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그의 주위에 진을 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임을 갖자고 했지만, 실상은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대단했습니다. 지금 큰 공사를 하느라 바쁜데, 너희와 회의하러 내려갈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산발랏 일당은 네 번이나 사람을 보내 느헤미야를 불러내려 했습니다. 만약 느헤미야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들을 거절하면 나중에 어쩌지?’ 하고 마음이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끝장입니다. 성벽을 짓기는커녕 문짝도 달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는 오늘날 이 성경 구절을 읽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목표가 분명하고 전략이 확실하며 방법이 올바라야 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일을 성사시키려면 이 ‘3+1’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사람의 일을 가로막을 때 가장 즐겨 쓰는 도구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방법은 매우 강력하지만, 결국 사람 내면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목숨을 내걸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가슴속 열정만 가지고 달려든다고 해서 일을 잘해낼 수 있겠습니까?
계획을 잘 세우고, 업무를 지혜롭게 분배하며, 백성과 무리를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빈곤 문제도 해결해 주어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거기에 더해 원수들이 주는 두려움까지 엄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우리 중에도 이것저것 두려워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반드시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두려움의 영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능력을 제로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두려움을 품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십시오. 아주 많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일이 성사될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포장하여 “저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조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내면에 두려움이 생깁니까? 사람 속에 지혜와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그저 몹시 강렬한 감정일 뿐이며, 겁쟁이의 반응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두려워하는 자들은 유황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씀합니다. 겁이 많은 것이 무슨 큰 죄냐고 묻겠지만, 겁이 많으면 유황 불못에 던져지며 마귀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원수들이 유언비어로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로막다
산발랏 일당이 네 번이나 느헤미야를 청했지만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산발랏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나 상대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내가 너희를 상대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너희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내가 완수해야 할 사역을 방해하려 드니 너희를 상대할 가치도 없다.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로 그의 종의 손에 봉하지 아니한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들의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들을 예루살렘에 세워 너를 가리켜 선포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제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우리와 서로 의논하자”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6:5-7)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합니까? 유다에 이미 선지자가 있어 “네가 왕이다”라고 선포했다고 모함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발랏이 유대인 선지자 하나를 매수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돈을 조금 쥐여주고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한다는 예언을 하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악합니까? 유언비어라는 것은 이토록 가증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들을 쉽게 믿지 마십시오. 잘 모르는 것은 그냥 흘려들으십시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만 안다고 해야 합니다. 헛소문은 너무나 가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움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헛소문을 믿기 좋아하고, 심지어 퍼뜨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편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편입니까?
사람이 분별력이 없으면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모른 채, 마귀에게 속했는지 하나님께 속했는지도 모호해지기 일쑤입니다.
원수들이 유언비어로 느헤미야의 사역을 막으려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겁을 주어 두렵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두려워했습니까? 그에게도 두려운 감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반역을 꾀한다는 상소문이 왕 앞에 눈송이처럼 빗발쳤을 것입니다.
왕이 누구에게서 온 편지냐고 물으니 산발랏에게서 온 것인데 느헤미야가 모반을 꾀한다고 합니다. 왕은 그럴 리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편지가 옵니다. 도비야에게서 온 것인데 역시 느헤미야가 반역한다고 합니다! 뒤이어 게셈에게서도 편지가 옵니다. 편지가 빗발치니 왕도 잠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너무나 그럴듯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유언비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들은 먼저 이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편지가 실제로 전달되었든 아니든 느헤미야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써서 무엇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것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디에 있든, 기업에서 일을 성사시키려고 해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느헤미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든 무엇을 하든, 일을 온전히 이루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이 수법이 통하지 않자 초조해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전심을 다하면 원수는 초조해지고, 당신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들이 퍼뜨리려던 두려움이 도리어 그들 자신에게 임하여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제 산발랏,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은 회의실 안을 서성이며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는 유다 사람들을 함부로 괴롭힐 수가 없겠구나.’
성벽이 세워졌으니 성에 들어가려 해도 온갖 검문을 받아야 하고, 통행증이 없으면 문밖에서 제지당할 판이었습니다.
전에는 밤에 나쁜 짓을 하려고 성안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제는 밤이 되면 성문이 닫힙니다. 당시에는 가로등도 없어 캄캄했습니다. 예전에는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드나들었지만 이제는 그 틈이 다 막혔으니, 그들이 어찌 애가 타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밥줄을 끊어놓은 격이었습니다. 그러자 산발랏은 또 다른 꾀를 냈습니다. ‘선지자를 시켜 느헤미야를 부른 뒤, 성전에 숨어야 한다고 부추기게 하자.’
원수들이 선지자를 통해 두려움을 퍼뜨려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로막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지자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얼마나 많은 선지자가 마귀에게 속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선지자가 많겠습니까, 마귀에게 속한 선지자가 많겠습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거짓 선지자가 허다했고, 참된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참된 선지자가 있었겠습니까? 거의 없었습니다. 만약 참으로 훌륭한 선지자들이 있었다면 성벽은 진작에 완공되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나 당시의 제사장, 대제사장 할 것 없이 모두 외적과 내통하며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성벽 건축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도 모자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리대금을 놓아 백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고, 백성의 자녀들을 노예나 재산처럼 팔아넘기는 짓을 일삼았습니다.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태를 보시고 결국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라 하면서 마귀의 짓거리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의 집에 가니 그가 두문불출하기로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것이니,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만나 외소(성소) 문을 닫고 숨자” 하매 (《느헤미야》 6:10)
이들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사실이긴 합니다. 그는 두문불출하며 “나는 선지자이니 나더러 성벽을 쌓으라고 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꼴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심을 다해야 하고, 반드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가장 큰 원수가 바로 예루살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예루살렘은 곧 교회를 예표합니다.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은 귀신 쫓는 데는 무능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내쫓는 데는 엄청난 열심을 냅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승승장구하지만, 참선지자가 와서 진실을 말하면 그들에게 배척당하고 맙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인간적인 무리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 온 한 자매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교회를 다닌 지 몇 년 만에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곳에서 들은 것들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교회 간판을 달았을 뿐, 듣는 이야기라고는 온통 두려움과 염려와 고통뿐이었습니다.
선지자가 “느헤미야여, 그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터이니 성전으로 숨으시오”라고 하자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성전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그의 뜻은 ‘내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거늘, 네깟 선지자가 조금 두려움을 준다고 해서 내가 성전으로 도망쳐 숨겠느냐? 너희 같은 무리와 어울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성벽을 쌓아야 하고,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문짝도 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이 있으면 치명적입니다. 툭하면 죽을까 봐 두려워하니 마귀가 거짓말을 퍼뜨리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두려움을 심어주는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자매가 “목자님, 저는 지난 수년간 늘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까?”라고 물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 악몽을 꾸고 교회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이 ‘와, 이거 큰일 났네. 이건 이상한 꿈(계시적인 꿈)이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꾼 것은 그저 악몽이었을 뿐인데, 목사가 그것을 특별한 이상이라고 말해 어린아이를 사시나무 떨듯 겁에 질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악몽을 자주 꿉니다. 그냥 무시해 버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것인데 그런 것을 왜 믿습니까?” 자매가 “정말인가요?”라고 묻기에 “정말입니다”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무력감 속에 살게 만드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떤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상담하러 왔는데, 목회자가 “당신은 원가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그렇게 겁주니, 그 자매는 ‘내가 원가정의 저주 속에 살고 있다니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다른 가정에 태어날 수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이는 영혼을 파멸시키는 짓입니다.
저는 온갖 부패와 무너짐이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목사님, 저는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납니다”라고 하니, 목사가 “와, 당신은 음란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 말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문자는 있을지언정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에게 음란의 영이 역사하여 거짓말을 심어준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자기 안의 귀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이 찾아올 때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며, 마귀는 사람 안에 거짓말을 퍼뜨리는 데 아주 능숙합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사람이 전심을 다하고, 비전을 품으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코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나누는 말씀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특히 전통 교회의 독에 깊이 물들었던 분들은 스스로를 정죄하고 무너뜨리기 쉽습니다. 거기서 해방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살면 결국 사로잡히고 맙니다.
원수는 선지자를 통해 두려움을 퍼뜨려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전략을 확실히 하며, 방법을 올바르게 하고,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원수들이 사회적 관계망을 이용해 두려움을 퍼뜨리고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로막다
어느 곳을 가든 사회적 인간관계는 지극히 복잡합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모두 현지의 토착 세력이었으며, 그들과 가문과 신분을 맞추어 통혼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들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들이 내 앞에서도 도비야의 선행을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편지를 보내어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6:17-19)
사회적 관계망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그 안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느헤미야는 누가 누구의 사위인지, 누가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굳이 들추어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들추어내 보았자 소용이 없었기에 현 상태를 유지하며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네가 도비야와 혼인하든 말든, 도비야를 위해 칭찬을 늘어놓든 말든, 내 속은 다 꿰뚫어 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느헤미야가 사역을 완수하는 과정이 쉬웠겠습니까? 배후의 인맥과 세력 침투가 매우 극심했습니다.
중국 역사에 왜구를 물리친 척계광이라는 영웅이 있습니다. 그를 발탁한 인물이 호종헌입니다. 왜구를 격퇴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현지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되어 있었고, 복건 연안에 왜구의 첩자가 수없이 깔려 있어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밝은 곳에서 날아오는 창은 피하기 쉬워도, 어둠 속에서 쏘는 암수는 막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악비가 밖에서 강적과 싸울 때, 진회는 황제 곁에서 그를 모함했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직면한 처지도 이와 똑같았습니다. 유다 사람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암몬 사람인지 겉으로는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다고 해서 다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 배신자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관계는 복잡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유익을 좇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비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성벽을 세우기까지,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9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왕은 느헤미야를 보내기 전에 에스라도 보냈습니다. 에스라도 왕의 조서를 가지고 왔지만, 토착 세력과 내부 깊숙이 침투한 자들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밑에 있는 유다 백성들이 산발랏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감히 그를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산발랏은 평생 그곳에 머물 자이지만, 느헤미야는 언제 다른 곳으로 발령 나 떠날지 모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떠나고 나면 그와 가깝게 지낸 자들은 보복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니 느헤미야의 입장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가 아랫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성벽을 끝내 완공했습니다.
엘룰월 이십오일에 성벽 역사가 쉰두 날 만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이 역사가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임을 앎이니라. (《느헤미야》 6:15-16)
성벽이 완성되자 원수들이 두려워하다
교회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두려움의 요소들이 침투해 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한 걸음씩 성장시켜 나가자 누가 두려워했습니까? 바로 원수와 마귀였습니다.
참 흥미로운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를 세울 때는 겉보기에 별 볼 일 없었습니다. 마귀는 “너희가 무슨 승리하는 교회를 세운단 말이냐?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 툭 차기만 해도 너희 교회는 무너질 것이다”라고 조롱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한 것은, 원수 마귀가 그렇게 얕잡아 보아준 덕분에 교회가 날마다 견고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먼저 잡담과 험담의 영을 이겼고, 분열의 영을 이겼으며, 온갖 악한 영들을 차례로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교회가 승리의 길을 걸어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많은 형제자매가 “나는 승리하는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승리하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비록 지금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 해도, 전심으로 달려가기를 힘쓴다면 반드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그것은 당신 개인을 건드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대적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영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마귀를 박멸할 것입니다. 마귀는 이 말을 듣고 ‘아, 이곳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 하고 낙담합니다. 마귀가 두려움에 떨게 되면 결국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위해 일하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느헤미야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에게는 원수가 어떤 두려움을 퍼뜨린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제가 왜 늘 여러분에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평생 무엇을 하든 끝을 맺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하다가도 중도에 포기하고 흐지부지 끝내버린다면, 당신은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음란의 영을 가진 사람은 집중하기 어렵고, 두려움의 영을 가진 사람은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습니다. 사실 두려움의 영은 아주 하찮은 영에 불과하며, 우리 내면의 헛된 느낌일 뿐입니다.
실제로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사람들이 헛소문을 퍼뜨릴 때 “그런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은 너희가 지어낸 거짓말일 뿐이다”라고 선포하면 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왕이 그 소문을 믿으면 어쩌지?’ 하고 염려합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주관하십니다!
핵심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원가정의 저주가 끊어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며, 무능함이 해결되고, 일을 이루지 못하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됩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정돈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은 반드시 여러분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목양이든 어떤 사역이든, 겉보기에 매우 거룩하고 영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혹은 성벽을 쌓거나 인테리어 공사를 책임지는 일일 수도 있으며, 공인회계사 시험, 운전면허 시험, 디자이너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일을 온전히 성사시키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자질이 바로 ‘전심을 다하는 집중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세상의 보응을 받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받습니다.
어느 쪽의 보상이 더 좋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얻는 열매가 가장 탁월하며, 그 일은 결코 중도에 흐지부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전심을 다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영적 음란이며, 몸은 일하고 있어도 생각이 딴 데로 새어 결국 일을 용두사미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면 결코 일을 흐지부지 끝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맡은 일이라면 중도에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수시로 여러분의 귀를 잡아당기며 다잡을 것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전심을 다하는 훈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경공부는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