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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창세기 21장 - 유업을 이을 자와 유업을 잇지 못할 자!

2023-02-03 21,257 创世记 创世记21章 创世记第二十一章 产业 献给神 像耶稣 神的应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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创世记21章-以撒出生
  • 1 耶和华按着先前的话眷顾撒拉,便照他所说的给撒拉成就。
  • 2 当亚伯拉罕年老的时候,撒拉怀了孕;到 神所说的日期,就给亚伯拉罕生了一个儿子。
  • 3 亚伯拉罕给撒拉所生的儿子起名叫以撒。
  • 4 以撒生下来第八日,亚伯拉罕照着 神所吩咐的,给以撒行了割礼。
  • 5 他儿子以撒生的时候,亚伯拉罕年一百岁。
  • 6 撒拉说:“ 神使我喜笑,凡听见的必与我一同喜笑”;
  • 7 又说:“谁能预先对亚伯拉罕说‘撒拉要乳养婴孩’呢?因为在他年老的时候,我给他生了一个儿子。”
  • 8 孩子渐长,就断了奶。以撒断奶的日子,亚伯拉罕设摆丰盛的筵席。
  • 9 当时,撒拉看见埃及人夏甲给亚伯拉罕所生的儿子戏笑,
  • 10 就对亚伯拉罕说:“你把这使女和她儿子赶出去!因为这使女的儿子不可与我的儿子以撒一同承受产业。”
  • 11 亚伯拉罕因他儿子的缘故很忧愁。
  • 12  神对亚伯拉罕说:“你不必为这童子和你的使女忧愁。凡撒拉对你说的话,你都该听从;因为从以撒生的,才要称为你的后裔。
  • 13 至于使女的儿子,我也必使他的后裔成立一国,因为他是你所生的。”
  • 14 亚伯拉罕清早起来,拿饼和一皮袋水,给了夏甲,搭在她的肩上,又把孩子交给她,打发她走。夏甲就走了,在别是巴的旷野走迷了路。
  • 15 皮袋的水用尽了,夏甲就把孩子撇在小树底下,
  • 16 自己走开约有一箭之远,相对而坐,说:“我不忍见孩子死”,就相对而坐,放声大哭。
  • 17  神听见童子的声音; 神的使者从天上呼叫夏甲说:“夏甲,你为何这样呢?不要害怕, 神已经听见童子的声音了。
  • 18 起来!把童子抱在怀中(怀:原文是手),我必使他的后裔成为大国。”
  • 19  神使夏甲的眼睛明亮,她就看见一口水井,便去将皮袋盛满了水,给童子喝。
  • 20  神保佑童子,他就渐长,住在旷野,成了弓箭手。
  • 21 他住在巴兰的旷野;他母亲从埃及地给他娶了一个妻子。
  • 22 当那时候,亚比米勒同他军长非各对亚伯拉罕说:“凡你所行的事都有 神的保佑。
  • 23 我愿你如今在这里指着 神对我起誓,不要欺负我与我的儿子,并我的子孙。我怎样厚待了你,你也要照样厚待我与你所寄居这地的民。”
  • 24 亚伯拉罕说:“我情愿起誓。”
  • 25 从前,亚比米勒的仆人霸占了一口水井,亚伯拉罕为这事指责亚比米勒。
  • 26 亚比米勒说:“谁做这事,我不知道,你也没有告诉我,今日我才听见了。”
  • 27 亚伯拉罕把羊和牛给了亚比米勒,二人就彼此立约。
  • 28 亚伯拉罕把七只母羊羔另放在一处。
  • 29 亚比米勒问亚伯拉罕说:“你把这七只母羊羔另放在一处,是什么意思呢?”
  • 30 他说:“你要从我手里受这七只母羊羔,作我挖这口井的证据。”
  • 31 所以他给那地方起名叫别是巴(就是盟誓的井的意思),因为他们二人在那里起了誓。
  • 32 他们在别是巴立了约,亚比米勒就同他军长非各起身回非利士地去了。
  • 33 亚伯拉罕在别是巴栽上一棵垂丝柳树,又在那里求告耶和华永生 神的名。
  • 34 亚伯拉罕在非利士人的地寄居了多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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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창세기》 21장을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1장의 주제는 여러분 모두 읽어 보셨을 텐데, 만약 아직 읽지 않으셨거나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이 본문을 꼼꼼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런 다음 주도적으로 본문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학습 방식을 갖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이번 장의 주제를 ‘기업을 상속받는 자와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로 정했습니다.

기업을 상속받는 자와 상속받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한 부류는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의 《갈라디아서》는 《창세기》 21장을 매우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는 《창세기》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데도 기업을 상속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여러분의 믿음이 능동적인 믿음인가, 아니면 수동적인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에서 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난 것이며, 행위에서 난 것은 행위로부터 난 것이라 부릅니다. 믿음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고, 특히 교회 안에서 여러 해를 보내다 보면 수많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는 겉보기에 매우 훌륭하고 사랑도 많아 보이는데, 어째서 암에 걸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일까요? 제가 말씀드리자면, 어떤 사람은 기업을 상속받는 자이고, 어떤 사람은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고, 어떤 목회자는 기업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기업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핵심은 그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여러분은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 안에서 가장 많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

여러분은 반드시 선택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사라와 하갈이라는 두 여인이 있고,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두 남자가 있으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성경》은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굳이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쪽을 선택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저로서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와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부류이고, 하나님께로부터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한 부류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가운데 혹시 이런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 저에게 “목사님, 저를 위해 축복해 주시고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서 축복을 얻으려 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 아십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세기》 12:3)

아브라함이 여러분을 축복해야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여러분을 저주해야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받는 축복을 저는 ‘간접적인 축복, 중고 축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기업을 상속받는 자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나는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 내 안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품겠다. 내 안에 사라와 같은 믿음을 품겠다. 내 안에서 하갈과 같은 종의 마인드를 철저히 근절하겠다. 내 안에서 아비멜렉과 같은 중고 마인드를 철저히 없애겠다”라는 굳은 결단을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는데, 직접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세상에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마다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이삭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두루 찾으셔도 겨우 한 사람밖에 찾지 못하시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약속을 힘입어 그리스도인이 되고, 약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행위를 의지하여 종노릇을 하면서도 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한 부류는 직접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한 부류는 나와 언약을 맺으려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제가 목사님의 교회 개척을 돕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저에게는 사람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돕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생님, 제가 선생님과 언약을 맺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나와 언약을 맺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비멜렉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모두 직접적인 하나님의 복을 온전히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브라함이 되기를 힘쓰고, 우리 안에 있는 종의 마인드를 능동적으로 철저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사람의 혈기로 난 자는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정을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 두 여자는 두 언약과 같습니다.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하갈이요, 다른 하나는 위에 있는 자유하는 예루살렘이니 곧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창세기》에서 비롯되었고, 사도 바울의 신학도 《창세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의 습관, 즉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수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에게 사역을 맡기는 것은 여러분을 세워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적어도 학습 능력을 조금이라도 키워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안 하려고 하니, 마치 제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설득까지 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수동적인 태도입니까? 사람이 보지 않으면 마치 종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일할 때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놀러 가고 땡땡이를 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사장이 있든 없든 성실하게 일합니다. 많은 사람이 꼭 종처럼 굴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과연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 돈이 부족하겠습니까? 약속으로 난 자에게는 어떤 좋은 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정으로 난 자는 자신의 두 손에 의지해야 하고 칼을 차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재물은 하나님의 약속을 힘입어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칼을 차고 여러분의 두 손을 의지하여 얻은 것입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은 바빠지기만 하면 하나님을 저만치 제쳐 두고, 상황이 조금만 나아지면 즉시 안락한 삶을 좇아 떠나버립니다. 이제는 말하기도 지칩니다. 말해 봐야 소용도 없으니, 차라리 입을 다물어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종의 몰골을 한 채,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줄을 도무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두 손을 의지하고 칼을 차고 살아간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고작 종의 신분을 얻을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따지며 “제가 목사님처럼 사역하지 않으면,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자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역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 속에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빠지기만 하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까? 요즘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참 많은데, 정작 하나님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마니 약속을 상속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도대체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 불릴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지 않은 자는 아브라함의 씨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세기》 21:10)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54:1)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을 힘입어 태어나며,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도무지 끌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이 붓고 침이 마르도록 기도를 해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기도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기도도 하나님의 선택을 바꿀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야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수 있고,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가 취하는 것은 저주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다

제가 다 명쾌하게 설명해 드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씀의 본뜻은 분명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는데, 이삭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는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세기》 21:1)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라에게 그 일을 행하셨을까요? 왜 다른 사람에게는 행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는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사라가 이름을 바꾸었던 사실을 아십니까? 그녀의 본래 이름은 사래였으나 사라로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으나 나중에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이며, 그녀는 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밖에서 양을 치고 돌아와 “사라, 사라!” 하고 부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 나이에 아들 하나 없으면서 열국의 어머니라니, 참 배짱도 좋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믿음이 나오는 거지?” 하며 비웃고 조롱거리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도 대단하지만, 이 부부의 금슬은 또 얼마나 좋습니까! 사라는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 돌아오셨어요!” 하고 목청을 높여 화답합니다. 주위 이웃들은 “열국의 아버지라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라며 수군거립니다. 이 부부의 호칭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이 늙은이야, 돌아왔어?”라며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프고, 평생 웬수처럼 지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라는 참으로 당찼습니다. “내가 열국의 어머니라는데 어쩔 건가? 나는 사라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포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처럼 “아이 창피해”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그런 이름을 준다고 해 보십시오. 길거리를 다니며 “열국의 어머니!”라고 불리면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나온 괴물이나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쳐다볼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아이를 낳은 것은 기적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아이를 낳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낳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은 평생 살면서 기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간증하는 것을 보고 제가 “어제 있었던 간증입니까?”라고 물었더니 20년 전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제는요?” 없다고 합니다. “지난주는요?” 없습니다. “지난달은요?” 없습니다. “작년은요?” 역시 없습니다. 20년 전 묵은 밥을 20년 동안 우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왜 없을까요? 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는 말씀이 《마가복음》에 있는데, 믿음이 없는데 어찌 표적이 따르겠습니까?

제 친구 하나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는 구절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교회 안내 데스크에 수북이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화를 내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친구가 “목사님, 성경 말씀을 인쇄해서 놓아둔 것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목사님은 “이 말씀은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경에 오직 《야고보서》 한 권만 있는 줄 알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 읽기만 좋아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당신에게 무슨 해라도 끼쳤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사람의 행적을 믿겠다는 말입니까?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대단히 많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어제 새벽 4시에도 전화가 걸려 왔고, 사흘 전 밤 새벽 3시에도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상대방이 “목사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하고 묻기에 제가 “당신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자꾸 제 전화를 기다리세요?”라고 묻길래 습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악귀는 종종 새벽 3시나 4시에 나와서 괴롭히는데, 제가 잠을 꼭 새벽 3시에 자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자지 않고 기다립니다. 마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짓밟기 위해,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얼른 받아 기도로 이끌어 주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당신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찾아온 그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받지 마십시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귀신도 이 소리를 들으면 “내가 한밤중에 활동하려는데 이 인간은 도무지 잠을 안 자네. 정말 골치 아프다!” 할 것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의 삶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써, 그의 삶에 기적이 성취되어 온 존재가 완전히 뒤바뀌는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기적을 참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가와 “목사님은 기적을 꽤나 추구하시네요”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도 한번 기적을 추구해 보십시오. 추구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믿음의 실천이며, 기업을 상속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실현되는 것이 부럽습니까? 보기에 배가 아픕니까? 그렇다면 집에 가서 열심히 씨름해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약속에서 난 자에게 어찌 기적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적이 따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도덕경》처럼 믿고, 아브라함을 노자처럼 믿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성경》의 하나님을 태상노군처럼 믿어 버립니다. 태상노군도 불로초 환약이라도 만드는데, 당신들이 믿는 방식에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입니다. 하갈과 같은 믿음은 믿음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다른 교회에 수년간 다니다가 병이 들어 우리에게 찾아오는 형제자매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왜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지 저는 참으로 이상할 따름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언젠가 제가 한 사람을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회자의 자녀였는데 암에 걸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회자이면서도 섬겨 주지 못해 제가 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껏해야 아비멜렉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아비멜렉이 되기도 싫고, 이스마엘이 되기도 싫습니다. 저는 이삭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암 환자를 섬기며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는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끝나자마자 그의 머릿속은 온통 대만식 어묵탕 생각뿐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가 치유받는 것을 보았으면 아브라함이 되고자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오는 자가 되고자 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가 여전히 아비멜렉 노릇을 하니, 그 아비멜렉조차 그를 칭찬할 지경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깊이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신분입니까, 아니면 종의 신분입니까? 약속을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도덕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기업을 상속받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목사님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기업을 상속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 가운데 있는 한 회계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째서 우리 중에 회계사가 이렇게 많을까요? 세어 보니 정말 많네요!”라고 했습니다. 왜 회계사가 그렇게 많을까요? 제가 깨달았습니다. 장차 기업을 상속받으면 돈을 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재물이 너무 많아 셀 사람이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회계사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관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관리하겠습니까? 이 복을 흘려보내며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어제 그분과 대화하면서 문득 아름다운 미래를 본 듯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미래는 장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상급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한 고을을 다스리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두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열 고을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고을을 다스리는 자들을 총괄하는 사람까지 세워 두셨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은퇴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아침에 커피 한 잔, 저녁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한 것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잠을 못 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너무나 광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며, 그리스도 예수 안은 곧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신학입니다. 우리는 결코 허황된 소리를 하지 않고, 반듯하고 온전하게 행합니다. 교회를 세우지 않아도 표적이 따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상속받고 기업을 상속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장 중요한 기업입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남몰래 살짝 웃었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웃었든 어쨌든 다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정말 웃었다” 하시니, 사라는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를 두고 따지지 않으시고, “어쨌든 내년 이맘때 내가 돌아오리니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

사라는 주인의 마인드를 가진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러한 마인드는 삶 속에서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사라는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놀렸을까요? 사라가 질투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라는 ‘이 여종의 아들은 결코 내 아들과 함께 기업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간파한 것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종의 아들일 뿐입니다. ‘나는 자유하는 여자이며, 내가 낳은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아들이다.’ 결국 사라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았습니다.

사라의 믿음에 대해 긴 설명이 없다고 해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자유하는 여자의 마인드를 품었으며, 결코 중고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이 하갈이라는 여인은 이전에 쫓겨났을 때 하나님을 경험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경험했습니다. 경험하고 돌아온 뒤 아이도 자라 열여섯, 열일곱 살쯤 되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무렵은 대략 세 살이었을 테니, 그때 이스마엘은 열여섯이나 열일곱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십수 년 동안 하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일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중 가장 놀라운 사건이 바로 사라가 아이를 낳은 일이었습니다.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과거에 온갖 노력을 다해도 안 되어 보는 사람이 다 애가 탈 지경이었고, 요즘 같으면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이를 낳았고, 3년을 길러 젖까지 뗐습니다. 그런데도 하갈은 여전히 영적으로 몽매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내면에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자유하는 여자의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갈에게 진정 사라와 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사라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든, 백 명이 더 있든, 만 명이 더 있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자리를 마련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 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까지 경험했으면서도, 또다시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십수 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던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여전히 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조금 올라가 아브라함의 첩이 되고 신분이 상승하자, 머릿속에는 온통 평생 먹고살 걱정이 해결되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내 인생은 이제 탄탄대로다. 노후 대책도 다 끝났다. 남편 재산의 한 몫은 틀림없이 내 아들 몫이다.’ 머릿속이 온통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스마엘과 무엇을 비웃었겠습니까? ‘네가 약속으로 났든 말든, 내가 너보다 형이고 장자다. 안주인이 낳았든 여종이 낳았든 내가 너보다 크다.’ 눈을 흘기며 득의양양해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그 눈빛 하나에 담긴 속셈이 너무나 뻔했습니다.

사라가 그것을 보고 ‘이 괘씸한 녀석,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흘겨? 당장 쫓아내 버리겠다’ 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오만한 눈빛을 보내지 않고 겸손하게 사람 노릇을 잘 배웠더라면, 사라도 이 일을 잊어버리고 쫓아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기고만장해지면 그 인생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비극입니다. 십수 년을 버텨 왔으니 사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사라가 이스마엘보다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싹싹하게 “아버지, 어머니”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만약 이스마엘이 “저는 동생과 기업을 다투지 않겠습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쫓겨났겠습니까? 그러나 그 오만한 눈빛 속에 담긴 야심이 너무 컸기에 결국 사라에게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사라가 본즉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세기》 21:9-10)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넘겨주고 내보내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마목 아래에 두며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살포시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창세기》 21:14-16)

어찌 이리도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까? 어떻게 살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온데간데없어졌단 말입니까?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한 것입니다. 제가 섬겨 본 수많은 사람 중에도 하갈 같은 사람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천지가 개벽할 만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내려놓아 버립니다. 목이 뻣뻣하게 굳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기도해 주니 곧바로 나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 질환이 수년 동안 낫지 않아 몹시 골치 아픈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뒤 교회에 기도하러 와서는 “선생님, 저는 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갈입니다! 아니, 하갈 축에도 못 낍니다. 차라리 ‘하을’이나 ‘하병’, ‘하정’이라고 하십시오. 갑을병정 할 때의 하을입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다시 기도해서 그 목의 통증이 돌아오게 해 드릴까요? 사흘 전에 목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다니요.” 정말 하갈 축에도 못 끼고 하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암으로 침상에 마비되어 누워 있던 폐암 환자가 있었는데, 3~4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도하자 침상에서 일어나 밭일을 하러 나가고 계단을 오르내릴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2주 만에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손을 써서 낫게 해 놓으면 또다시 육신을 따라 방황했습니다. 결국 1년을 더 살기는 했습니다. 저는 이런 ‘갑을병정’ 같은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이 세상에 사라와 같은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신 후에는 제발 하갈을 본받지 않는 습관을 들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갈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이제는 지혜가 생겨서, 사역을 마치고 나면 이 사람이 하갈인지 하정인지 속으로 가늠해 봅니다. 하갈이나 하정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사라는 소수이고, 대다수가 하갈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내팽개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직장, 사업, 이런저런 세상일에만 온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제 눈에는 참으로 기이하게 보입니다. 만약 예순 살이 되어 인생의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면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으니 축하할 일입니다. 만약 예순 살에 인생이 마이너스 바닥으로 떨어졌다면 더욱 축하할 일입니다. 스스로 뒤집을 힘이 없으니 기적을 의지하든 하나님을 의지하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라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좋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이삭이라는 아이는 자라면서 참으로 비범한 아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들었고,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믿음을 주입받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그저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라는 줄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이고, 육정으로 난 자는 육정이요, 성령으로 난 자는 영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늘 “나는 하나님께로서 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이삭이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미리 귀띔도 해주지 않고 모리아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며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속으로 ‘아들아, 네가 바로 그 어린 양이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뒤에야 비로소 패를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바로 하나님께 바쳐질 어린 양이다.”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말을 듣고 “이토록 귀한 일에 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좋습니다, 아버지. 저를 묶어 주십시오. 비록 육신이 요동칠지 모르지만 저는 진심으로 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바로 이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저에게도 이러한 담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삭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고자 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너의 생명을 내게 바치겠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시 저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관대 평생 꼬리를 내리고 죄인처럼 살아온 저 같은 자를 이토록 귀하게 여겨 주십니까?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제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를 원하오니, 주께서 거두고자 하시는 때에 언제든 거두어 주옵소서.”

사람들은 참으로 생각이 짧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자신을 내게 바치라”고 하시면, 집에 돌아가 부모님과 상의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상의하기 시작하면 그 귀한 기회는 날아가 버립니다. 이토록 복된 일을 두고 무엇을 망설이며 상의한단 말입니까? 사라와 하갈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도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이스마엘의 생각은 온통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할까에 쏠려 있었지만, 이삭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맺으신 언약을 이어받을까에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깁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이 없다면 삶은 헛되고 피곤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평생은 그저 공허함의 연속일 뿐이며, 참으로 고달픈 인생입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 저녁에 커피 한 잔 마시며 멍하니 앉아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저는 지금까지도 그런 삶을 이해할 수 없기에 늘 일하기를 기뻐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여러분을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삭이 되는 유익과 이스마엘이 되는 해악을 똑똑히 깨닫게 해 주는 일입니다.

이스마엘은 중고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서 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니 그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비록 이스마엘의 후손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것은 아브라함 때문이었으니 이를 ‘중고 축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1:12-13)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중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어쨌든 나는 죽어도 안 떠날 거야. 화인 사명 신학에 딱 달라붙어 있을 거야. 여기에 축복이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중고 축복을 바라는 태도입니다. 왜 스스로 이삭이 되려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스스로 복 덩어리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아들 노릇은 못 해도 손자 노릇이나 증손자 노릇이라도 해야지”라는 나약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나라에는 손자도 없고 증손자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머니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육신의 혈통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이스마엘은 어머니가 짊어졌던 물가죽 부대의 물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도 열여섯, 열일곱 살이나 먹어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우리 예전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둘이 함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비록 제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저는 오늘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지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모자가 모두 종의 마인드로 찌들어 있으니, 결국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샘물 하나를 보게 해 주셨을 뿐입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마목 아래에 두며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살포시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세기》 21:15-19)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중고 경험일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들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닙니다. 롯도 아브라함 덕분에 구원받았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 덕분에 은혜를 입었으니 다 중고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달랐습니다. 이삭은 단순히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임을 믿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사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메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품고 이 땅에 온 존재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인생은 그저 쓸쓸함과 무의미함 그 자체일 뿐입니다. 돈이 있어도 허무하고, 돈이 없어도 허무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제게 올 때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 또한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추구이며, 저의 간절한 열망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축복하고 섬기는 것은 모두 값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돈을 주어야만 섬겨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들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두말하지 않고 섬깁니다. 그러나 제가 거듭 당부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삭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고,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오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곧 참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육정으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저 또한 사역 중에 이런 상황을 자주 접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영토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비멜렉은 그 지역의 토착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이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아비멜렉 역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창세기》 21:22-24)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왜 이 대목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보기에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것을 본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저를 찾아와 “선생님, 선생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저를 위해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 둘이 언약을 맺읍시다. 내 후손이 선생님으로 인해 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당시 아비멜렉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모자란 것입니까? ‘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구나! 나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 저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좋다! 아브라함 2세가 되어라! 3세도 좋고 4세도 좋다!” 하시지 않겠습니까?

제 말의 요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어째서 나는 아브라함처럼 될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왜 아브라함을 찾아가 그와 언약을 맺으려 하는가? 왜 아브라함에게 나를 향해 맹세하라고 요구하는가? 차라리 하나님께서 천지를 두고 내게 맹세하시도록 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내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나를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이 되게 하시는 편이 얼마나 복된가!’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우둔하고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이들은 동의하지 않고 제가 늘 남을 비판만 한다고 여깁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교인’이라 불려야 마땅합니다. 약속으로 난 자가 아니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에게서 난 자도 아니고,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라야 참된 자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한 사람입니까? 절대로 아비멜렉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사도 바울도 아닌데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서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문제될 것 없다. 오히려 너희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되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며,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될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신학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한다더니, 감히 예수님을 닮으려 하느냐? 네 꼴을 보니 바삭바삭한 과자나 닮았다”라고 비아냥거리지 마십시오. 그런 소리에 개의치 마십시오. 이름 끝 글자 하나라도 닮고, 조금씩 닮아가다 보면 절반이라도 도달하지 않겠습니까? 아무것도 닮으려 하지 않는 자보다 훨씬 낫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라고 늘 생각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닮고자 품었던 최초의 열망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우울증에 눌린 자들, 온갖 질병에 사로잡힌 자들, 허리 디스크, 목 디스크, 척추관 협착증으로 고통받는 자들, 온갖 더러운 질병으로 더러운 진물이 흘러나와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자들을 고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해 주었는데 낫지 않으면, 나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좀 나았습니까?” 물었을 때, “선생님, 여전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체면을 차리느라 “선생님, 진실을 듣고 싶으세요, 듣기 좋은 말을 듣고 싶으세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당연히 진실을 들어야지,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여전합니다”라고 하면, 여전하니까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 한 번 얹으시면 나았지만, 저는 능력이 부족하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손을 얹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 번 해서 안 나으면 만 번이라도 손을 얹어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나중에는 어떤 사람이 제 기도에 질려 버려 “선생님! 다 나았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은 낫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 시간을 버텨 낼 끈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병에 걸릴 시간은 있으면서 치유받을 시간은 내지 못하니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병원에서 수개월 동안 고생하는 것은 참아내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몇 시간 씨름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자 했습니다. 언약을 맺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맹세해 주는 것도 문제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약 상대가 몇 명 더 늘어난들 어떻고 줄어든들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어찌 나처럼 직접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줄은 모르고 고작 나와 언약을 맺으려 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때때로 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생각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중 제 설교를 듣고도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 듣고 나서도 어리석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반드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이삭의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은 비교할 수 없이 복된 길입니다. 결코 아비멜렉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스마엘이 되어서도 안 되고, 훗날의 에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1장 본문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21:9 사라가 본즉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희롱하는지라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21: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21: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넘겨주고 내보내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마목 아래에 두며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살포시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1: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1: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1: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1: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1: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1: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1: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21: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21: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21: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21: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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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如夏花
两种基督徒:一种是凭着应许做基督徒,凭着应许做神的儿女;另一种基督徒是凭着行为做奴才,而且还做不好; 非常好非常犀利的分享。
撒姊妹
我当地教会的牧者告诉我 传福音的时候不能说一些神迹见证 我觉的 和不信的人说见证才更有力量正面神的存在 如果和老信徒说见证 会引发人的不满或者成为了荣耀自己
命定小助手
使徒行传1:7-9 - 7 耶稣对他们说,父凭着自己的权柄,所定的时候日期,不是你们可以知道的。8 但圣灵降临在你们身上,你们就必得着能力。并要在耶路撒冷,犹太全地,和撒玛利亚,直到地极,***作我的见证***。9 说了这话,他们正看的时候,他就被取上升,有一朵云彩把他接去,便看不见他了。
@撒姊妹: 我当地教会的牧者告诉我 传福音的时候不能说一些神迹见证 我觉的 和不信的人说见证才更有力量正面神的存在 如果和老信徒说见证 会引发人的不满或者成为了荣耀自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