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오늘 여러분과 나눌 아주 흥미로운 설교 제목은 <이가봇의 비극>입니다. 만약 ‘이가봇’이 무엇인지 잘 모르신다면 몇 마디를 더 덧붙여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남)의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가봇의 비극은 <사무엘상> 1장에서 4장까지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 능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많은 혼란만 가져왔습니다.
어릴 적 영화, 특히 서양 영화를 보면 예수님을 믿는 도사 같은 사람이 검은색 큰 가운을 입고 손에 십자가를 쥐고 귀신 들린 집에 들어가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십자가에 대단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제가 주님을 믿고 나서야 그것이 참 이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검은 가운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교회당 안에도 온통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효과가 있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겪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어떤 기업의 대표가 크리스천이었는데,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크리스천들을 불러 모아 회사에 와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중 어떤 이가 ‘영광의 회복’이라는 선지자적인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영광의 회복’이라고 하니 그 기업이 점점 더 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업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업보다 훨씬 더 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어보면 이스라엘도 멸망했고 유다도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지만, 6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전염병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점차 늙어 죽어 전부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비극을 모두 ‘이가봇의 비극’이라고 부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를 매우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백성 중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한 것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를 쳐서 죽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가봇’은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까? 늙은 엘리의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기 직전에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이 말은 엘리의 며느리가 한 말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단지 늙은 엘리의 가문이 저주를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줄곧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미신적인 착각을 품고 있었기에,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졌던 것입니다. 최근 제가 이 부분을 연구했고, 그 결과를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람은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한 채, 종교적인 의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손해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또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우리를 떠나며, 저주 또한 결코 비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아놓고 온갖 종교 의식을 행하며 모세의 놋뱀을 꺼내 오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온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비교적 일찍 깨달은 편입니다. 예전에는 큰 소리로 기도하면 능력이 있는 줄 알고 "마귀야 물러가라, 흑암의 세력을 끊노라" 하며 목이 쉴 때까지 외쳤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습니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영적인 어둠의 권세와 싸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고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비극 속에 살고, 저주 가운데 거하며, 전쟁에서 패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스스로 수치를 당하는 것은 모두 저주이며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눈곱만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털끝만큼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손실을 입은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서 이 모든 것을 정리했으니 오늘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우리가 패배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손해를 입은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도와드려야 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지각으로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곧 비극입니다.
최근 저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을 하나하나 밝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이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여전히 그 어리석음 속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을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화인 사명을 전통으로 만들지도 마십시오. 전통으로 만드는 것은 무익합니다. 기도 사역 중에 트림하는 사람이 나온다 해도, 제가 트림 현상을 화인 사명 신학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사람의 비극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착각에서 기인합니다. 오늘 여러분께 분명히 일깨워 드립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이전에 어떤 분들이 자신들의 예식적인 엄숙함을 과시하려고 제게 영상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웅장한 예배당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고, 그들이 세운 지도자는 이스라엘 사람 같은 복장에 번쩍이는 금색 띠를 어깨에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와 깃발을 들고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맞춰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보고 탄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탄식했을까요? 이런 겉치레는 구약 시대에도 수없이 행해졌지만, 그것은 결코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고, 우리의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그런 종교 의식을 행할까요?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려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는 이런 겉치레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엘리의 며느리처럼 저주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들 온 집안의 죽음과 비극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도 있고, 나답과 아비후를 쳐서 죽이실 수도 있으며, 언약궤를 멘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 스스로 지키실 수 있으므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이 장에서 빼앗긴 언약궤는 그 후 수십 년, 대략 7080년의 세월을 거치게 됩니다. 계산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때는 아직 사무엘이 전면에 등장하기 전이고 늙은 엘리가 다스리던 때에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낸 뒤 언약궤는 웃사의 집에 머물렀고, 사무엘이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다스렸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20년을 다스렸고, 사울이 왕이 되어 40년을 다스렸으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로도 78년이 지난 뒤에야 궤를 모셔왔으니 최소 70년의 세월입니다. 이 7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까? 승리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지 못했습니까? 훌륭하게 다스렸습니다. 그 중간에 사울도 언약궤를 가져다가 전쟁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며,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야지 종교적인 제사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인 제사장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2. 본문 말씀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말하니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둔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부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10-22)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저희가 늙은 엘리 집안의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러한 어리석고 무지한 사고방식을 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언제나 우리 가운데 머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희가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게 하시고, 다윗을 본받고, 사무엘을 본받고, 모세를 본받으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본받아 주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제사장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오늘 왜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할까요? 이것이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결코 무지함 속에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 저는 글자를 모릅니다"라고 하신다면 지금부터 배우십시오. 제가 가르쳐 드리거나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인생 일대의 비극이자 곧 이가봇의 비극입니다. 며느리는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는 사무엘의 출생을 기록하고, 2장과 3장에서는 늙은 엘리의 가문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그들이 저주 가운데 살게 될 것임을 경고하셨지만, 엘리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아들을 바로잡지 못했고, 자식들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이나 먹고 마시는 것, 자녀 교육이라면 아내가 맡아도 문제가 없겠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엘리는 여전히 사사의 직무를 맡고 있었으니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최고 지도자로서 공과 사는 엄연히 다른 법이며, 지도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가 자기네 집안 것인 줄 알고, 성전도 자기네 것인 줄 알며, 모든 일이 다 자기 집안일인 줄 착각하고 성전 제사에서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가져와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는데, 엘리의 두 아들은 솥에 든 고기를 갈고리로 낚아채 빼앗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고 도로 집어넣는 등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짓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오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모든 일이 뜻대로 술술 풀린다면 교회에 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믿으라고 해도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받아 사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때 비로소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리고 엘리에게 나아왔던 것입니다. 제사 드리러 온 백성들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망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침이 묻었으니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절대 기쁘게 받지 않으실 텐데.'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선지자가 찾아와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우쭐대며 생각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불에 타 죽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해도 아무 일 없지 않은가? 우리는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의 혼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불을 드려 즉시 타 죽었지만,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다른 불을 드려도 당장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지자가 와서 저주를 선포해도 "별일 없는데? 다 괜찮은데?"라고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하면 결국 죽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자주 신호위반을 하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한두 번은 사고가 안 나고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하며, 비극의 날은 반드시 오고 맙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홉니와 비느하스는 수만의 이스라엘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과 맞서 싸우러 나갔습니다. 출정할 때는 위풍당당하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참패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한 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크리스천인데 직장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당신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착각 속에 살지 마십시오.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우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쟁터에 나갔던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되지 마십시오. 출정할 때는 위풍당당했으나 전쟁터에서 순식간에 4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신 4천 구를 메어 나르는 데만 8천 명이 필요하니, 3만 명 중 순식간에 1만 2천 명이 빠져나간 셈입니다. 남은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느라 고역을 치렀습니다. 그러자 홉니와 비느하스는 머리를 굴려 대단히 무지하고 어리석은 꾀를 냈습니다. '우리가 힘이 부족한 것은 알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하나님을 도덕적으로 얽어맬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하나님, 주님의 언약궤를 모셔왔으니 어디 한번 어떻게 하시는지 봅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궤라는 물건에 얽매이실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께서 교회당 지붕 위의 십자가를 몹시 아끼실 것이라 착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 그런 물질에 얽매이셨습니까? 언약궤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십자가 조형물이겠습니까? 이것이 다 어리석음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두 형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오려고 했습니다. 집에서 언약궤를 지키고 있던 엘리는 사실 그 언약궤 덕분에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하고 헌금을 바치는 것이 다 엘리 집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여전히 언약궤로 돈을 벌고 있었기에 말했습니다. "얘들아, 언약궤를 가져가려고 하느냐? 대체 뭘 하려는 게냐?" 그러자 아들들은 "잔말 말고 내놓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엘리는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을 무서워했습니다. 대개 아버지가 아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먼저 아내를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아들까지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목회자들을 보았습니다. 결국 언약궤를 빼앗기듯 내어주었고 엘리는 막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 역시 이 일을 좋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타나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승리하게 하지 않으시면 주님의 언약궤가 망신을 당할 테니까.' 그녀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라는 물건에 집착하실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갔으나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생각했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용지물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드디어 열매를 맺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 집안에 임한 저주가 얼마나 깊었습니까! 그토록 깊은 저주 아래 있으면서도 감히 전쟁터에 나갔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전쟁에 나가 패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하나님을 억압하려 들다니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함의 극치였습니다. 언약궤로 하나님을 얽어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얽어맬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훈련하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후 이어지는 장들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의 엄청난 재앙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언약궤를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못 하시겠습니까? 홉니와 비느하스 따위가 하나님의 궤를 지켜주어야 하겠습니까? 전혀 필요 없습니다. 훗날 하나님의 언약궤는 돌아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의 집에 머물렀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웃사는 언약궤를 옮기려다 손을 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배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간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하나님의 영광은 털끝만큼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겨도 하나님의 영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유다가 멸망해도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합니다. 교회가 문을 닫아도, 예배당 위의 십자가가 철거되어도, 목회자가 암에 걸려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에는 티끌만 한 손상도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영화 속 인물처럼 십자가를 들이밀며 귀신을 쫓아내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든다고 귀신이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런 얄팍한 흉내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귀신에게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결국 전쟁터에서 한 군사가 도망쳐 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했습니다." 언약궤가 곧 엘리의 수입원이었기에 엘리는 오직 언약궤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고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엘리는 너무 비둔한 몸 때문에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며느리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무엇보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난산 끝에 아이를 낳고 숨을 거두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남)’이라 지었습니다. 4장 전체는 무지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엘리 본인부터 그의 아내, 두 아들,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엘리의 온 집안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던 것입니다!
5. 사람의 무지는 비극을 낳는다
사람의 무지는 반드시 비극을 부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열심히 훈련하고 있지만, 언제쯤 온전히 세워질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으며 그 훈련의 결과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왜 사람의 무지가 비극을 낳을까요? 지레짐작하는 착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전선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언약궤가 대신 싸워줄 것이라 믿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엘리의 집안은 저주 아래 살고 있었음에도 온 가족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는 이스라엘 전체의 최고 통치자였고, 그의 두 아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 역시 그런 대단한 가문에 시집온 인물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아프리카 작은 왕국의 왕자에게 시집간 것처럼 얼마나 기세등등했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송사가 생겼을 때 엘리 집안이나 홉니, 비느하스 가문, 혹은 비느하스 아내의 친정과 부딪히면 절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엘리 집안이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무슨 소용입니까? 엘리가 곧 율법이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곧 율법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이었으니 이스라엘 땅에서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산다고 저주를 피할 수 있습니까?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릅니다.
엘리는 58세에 통치를 시작하여 98세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40년을 통치했으니 얼마나 확고한 자리였겠습니까? 몇 년 못 가 쿠데타로 밀려나는 자들과는 달랐습니다. 40년이나 자리를 지켰으니 엘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고 계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불이 왜 안 떨어지지? 나답과 아비후는 재수가 없어서 즉사했나 보군. 하나님도 이런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모양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집안에 찾아와 저주를 선포했을 때도 그들은 '설마 그러겠어?'라고 넘겼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러실라고? 그렇게까지 엄격하시겠어? 나도 열심히 일하고 백성을 이끌고 전쟁에도 나가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궤를 얼마나 존중하는데! 전쟁에 졌을 때 하나님의 궤를 모셔올 정도였으니 내가 하나님을 크게 여기는 게 아니면 뭐겠어?' 그러나 이러한 무지한 생각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었고, 엘리 역시 죽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은 모두 사람의 무지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자신에게 실제가 되지 못하니 참으로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께 간곡히 당부합니다. 무지함 속에 살지 마십시오. 어리석음 속에 머물지 마십시오. 오늘 겪고 있는 비극은 과거의 무지함 때문이며, 장래의 비극은 오늘의 무지함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자만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때로 참으로 무지한 자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무지와 어리석음을 매우 경계하며, 제 안의 어리석음과 무지함 역시 경계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까지도 부지런히 주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나는 여전히 내가 부족하고 온전치 못하다고 느낀다"고 말하자 어떤 사람이 "목사님 스스로도 온전치 못하다고 느끼는데 우리가 어떻게 목사님을 따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따라가십시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는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랐습니다.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엄밀하게 대조하며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치열하게 살핍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세워가는 화인 사명 신학의 어떤 개념들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것입니다.
6.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물질적 상징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사무실에 불상을 모셔두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지만, 크리스천이 사무실에 십자가를 걸고 예수님의 형상을 둔다고 해서 사업이 절로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상은 사람을 종교적인 의식에 얽매이게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중심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상이 요구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메고 나가는 행동은 헛된 짓이며, 역사가 이를 증명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고, 수십 년 후 왕이 된 사울 역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져오려 했습니다. 이 모두가 무지함의 소치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적인 의식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주님의 충성된 제사장이 되는 것만이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업이 잘되는지 아닌지, 세상적인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늘 저주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이 저주 아래 있는지조차 모르고,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사람의 평생의 비극은 무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전쟁터에 들고 가거나 교회 안에서 온갖 종교 의식을 벌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찬 모임에 가보면 사람들이 일제히 통곡하고 웁니다. 저는 그들이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초상집에서 곡하는 사람들을 사다 놓은 것처럼 그들은 그것을 대단한 종교적 감동으로 여깁니다. 사역을 위해 방문했기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더니, 대다수가 병들어 있었습니다. 성찬 하나조차 이토록 무지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하나의 예식일 뿐인데, 어찌 그런 의식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중심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크게 우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울음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고 그분을 온전히 알아가야 합니다.
성찬을 맹신하여 우상화하는 자들이 많고, 모세가 들었던 놋뱀을 우상화했던 자들이 많았으며, 언약궤를 맹신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은 평생 언약궤에 의존하지 않았고, 언약궤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눈앞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갔고 엘리가 죽은 후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는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고 평생 하나님만을 섬기며 주님 앞에 합당하고 충성된 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기독교의 종교적 의식은 사람을 현혹하기 쉽습니다. 화려한 조명, 무대, 드럼, 음향 시스템 속에서 찬양하면 대단한 감동을 받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 귀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 보험이나 팔고, 다단계나 하고, 연애나 하려고 교회에 온다면 그것 자체가 비극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각을 일깨워 어리석음에서 건져내고자 합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를 비웃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지한 일들을 버리고 인생의 비극을 피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품고 자신을 온전히 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 무엇을 얻고자 함이겠습니까? 사람이 부족해서 머릿수를 채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산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홉니와 비느하스라 할지라도,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사사의 자리에 있었던 엘리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판의 날이 이르면 반드시 비극을 겪게 됩니다. 비극이 닥쳤을 때, 엘리는 죽기 직전 그 짧은 순간까지도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자였는지, 자신이 왜 죽는지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며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엘리의 며느리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했으나,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언젠가 반드시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둡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깨어나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수많은 서신서를 기록하며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걸어간 믿음의 길을 따르라고 권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아직 얼마나 많은 무지함이 남아 있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 선악을 분별하며 남을 판단하는 것, 트집 잡는 것 등이 모두 무지함입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높이 쳐든다 해도 소용없으니, 사람은 먼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8. 하나님의 행사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나타남을 보았고, 구원의 역사를 보았으며,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그분의 행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참으로 알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화인 사명 신학 안에서 기도할 때마다 온갖 질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도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계십니까? 더 이상 무지함 속에 머물지 마십시오. 결단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수많은 인생의 비극을 피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가봇의 비극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가봇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은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을 떠난 것입니다.
9. 결론
저는 천지를 불러 여러분 앞에서 증언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행사를 깨달아 종교적인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충성된 제사장이 되지 못하여 저주를 자초한 엘리 집안의 죄악을 철저히 끊어버리십시오. 그에게는 수천수만 가지 핑계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다면, 오늘 사무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찬송을 한 곡 부르며 오늘의 헌금을 준비하겠습니다. 헌금의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하신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헌금을 드리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손을 들고 저와 함께 선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시고, 친히 계시하셔서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엘리 집안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제가 스스로 빚어낸 비극에서 저를 건져내어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제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구하며, 주님을 더 알기를 간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오니 우리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것이 저의 부르짖음이며 간구입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요 사는 것이며, 우리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제 무지함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주님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종교적인 악습을 철저히 끊어버리며, 오직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만을 행하기로 결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