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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미가 6장 -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역사를 너희로 알게 하리라

2025-01-24 4,781 弥迦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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弥迦书-耶和华谴责以色列
  • 1 以色列人哪,当听耶和华的话!要起来向山岭争辩,使冈陵听你的话。
  • 2 山岭和地永久的根基啊,要听耶和华争辩的话!因为耶和华要与他的百姓争辩,与以色列争论。
  • 3 “我的百姓啊,我向你做了什么呢?我在什么事上使你厌烦?你可以对我证明。
  • 4 我曾将你从埃及地领出来,从作奴仆之家救赎你;我也差遣摩西、亚伦,和米利暗在你前面行。
  • 5 我的百姓啊,你们当追念摩押王巴勒所设的谋和比珥的儿子巴兰回答他的话,并你们从什亭到吉甲所遇见的事,好使你们知道耶和华公义的作为。”
  • 6 我朝见耶和华,在至高 神面前跪拜,当献上什么呢?岂可献一岁的牛犊为燔祭吗?
  • 7 耶和华岂喜悦千千的公羊,或是万万的油河吗?我岂可为自己的罪过献我的长子吗?为心中的罪恶献我身所生的吗?
  • 8 世人哪,耶和华已指示你何为善。他向你所要的是什么呢?只要你行公义,好怜悯,存谦卑的心,与你的 神同行。
  • 9 耶和华向这城呼叫,智慧人必敬畏他的名:“你们当听是谁派定刑杖的惩罚。
  • 10 恶人家中不仍有非义之财和可恶的小升斗吗?
  • 11 我若用不公道的天平和囊中诡诈的法码,岂可算为清洁呢?
  • 12 城里的富户满行强暴;其中的居民也说谎言,口中的舌头是诡诈的。
  • 13 因此,我击打你,使你的伤痕甚重,使你因你的罪恶荒凉。
  • 14 你要吃,却吃不饱;你的虚弱必显在你中间。你必挪去,却不得救护;所救护的,我必交给刀剑。
  • 15 你必撒种,却不得收割;踹橄榄,却不得油抹身;踹葡萄,却不得酒喝。
  • 16 因为你守暗利的恶规,行亚哈家一切所行的,顺从他们的计谋;因此,我必使你荒凉,使你的居民令人嗤笑,你们也必担当我民的羞辱。”

《答疑解惑》

서론

《미가서》는 소선지서로 불리지만 결코 작은 책이 아닙니다. 《미가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이 책은 선지서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저 역시 성경을 연구할 때 많은 애를 씁니다. 결코 머리를 한 번 굴려서 번뜩 떠오른 생각으로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아니며, 저 또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문제를 제대로 밝히 깨닫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난 장의 주제는 ‘이스라엘 통치자의 임하심과 행적’이었고, 이번 장의 주제는 ‘너희로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게 하심’입니다. 저는 이 주제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많은 공을 들인 끝에야 이 한 문장을 찾아냈습니다. 결코 어떤 일이든 즉흥적으로 대충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영이 내게 감동을 주셔서 단번에 알았다’며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훈련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믿음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을 훈련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인내하며 끝까지 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즉흥적으로 머리만 굴려 판단하는 나쁜 습관을 갖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엉덩이를 털고 그냥 떠나면 되겠습니까? 털고 떠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혼란

이스라엘 백성은 왜 혼란스러워했을까요?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왜입니까? 왜 이렇게 됩니까?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칩니까? 우리는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당신은 어리석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어리석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당신은 미련합니다”라고 하면 “저는 미련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당신은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에 갇혀 있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일들을 보면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일들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암에 걸리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삭, 야곱, 다윗도 암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암과 같은 질병은 결코 좋은 병이 아닙니다. 제가 《신명기》를 연구할 때 성경은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 더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섬겨온 사람들, 특히 신앙생활을 수십 년간 해온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목회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지혜를 배웠습니다. 본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지자가 입을 열기만 하면 듣기 싫은 말을 하며 “너희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며, 너희 원수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이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때로는 블레셋 사람을 일으키시고, 때로는 미디안 사람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이곳이 정말 우리의 약속의 땅인가? 이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려던 약속의 땅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말합니다. “어째서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일까? 나의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나의 기도는 들으시지 않는 것일까?” 선지자가 전하는 듣기 싫은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지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매우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지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니, 내게 남은 것은 회개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번거로워하며 짜증을 냅니다. “아이고, 하나님, 왜 이렇게 피곤합니까? 세상에, 당신처럼 주님을 믿으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갑니까?”

“남들은 예수 믿어도 이렇게 피곤하게 안 사는데, 저 블레셋 사람, 앗수르 사람, 바벨론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대합니까? 왜 그들은 다 잘 먹고 잘사는데, 어째서 나는 이 모양입니까?”라며 혼란스러워합니다. 툭하면 미디안 사람, 블레셋 사람, 암몬 사람의 손에 넘겨져 날마다 괴롭힘을 당하니,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게 하십니까? 눈이 머셨습니까?”라고 원망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까? 목회자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현상은 매우 보편적이며, 옛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 미가가 《미가서》 6장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통해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당신이 옳게 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나치게 독선적인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소와 양으로 훌륭한 제사를 드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경외하지 않게 됩니다. 단언컨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해치시는 분입니까?”

여러분, 저의 양육 방식이 매우 부드러울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의 양육은 뼈를 때리듯 가차 없으며, 사람의 어리석음을 다룰 때는 결코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역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저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도 왜 이토록 저를 수치스럽게 하시고 몰아붙이십니까? 도대체 저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사랑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기엔 내게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고, 사랑한다고 하기엔 나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시니 정말 괴롭고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치시려는 것인가, 구원하시려는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게 하려 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때 잘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에 관해서만 해도 혼란에 빠진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단체 대화방에 들어와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고, 사람들은 “기도하겠습니다, May the Lord heal you”라고 답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논리를 가지고 대화방에서 “목사님, 온 교회가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온 나라를 일으켜 함께 기도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줄 압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저는 난감해집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겉으로는 “온 교회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돌아서서는 “그만두어라” 하게 됩니다. 제 말에 상처받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그런 방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툭하면 내적 생명이 어쩌고 하는데, 내적 생명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것을 왜곡하여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혼란은 ‘자고함(독선)’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지 못하면 온 지구인이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기도할수록 하나님의 공의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큰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하기 귀찮아하셨다면 완전히 포기하셨겠지만,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그분의 백성과 변론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변론하시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미가서》 6:1-3)

왜 하나님께서 백성을 피곤하게 만드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의인데, 사람은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제가 양육하는 성도가 저와 실랑이를 벌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나를 이렇게 대합니까? 내가 당신을 도우려고 한 것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바로 《미가서》 6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목사님이 저를 멸시하고 무시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든 상황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저는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감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면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오늘은 안 하셨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럼 지난주에는 무슨 말을 했습니까?” 생각해보더니 역시 별말씀 안 하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감정이 자신의 거짓말에 속은 것 아닙니까? 제가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그 일에 대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실제로 잘못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인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놓고 지적조차 받지 않으려 합니까?” 사람이 참 우습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가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매번 화를 내고 억지를 부릴 때마다 목사님을 당해내지 못할까요? 목사님은 어째서 늘 옳으십니까?” 늘 옳은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단 한 푼이라도 이득을 취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먼저 드렸기에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보시고 건져내신 것입니까? 그런데 건져내고 보니 바보들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하시는구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왔단 말인가?”라고 불평합니다. 세상에, 저는 정말 기가 막히고 항복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의 재물을 취하여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셨겠습니까? 그들이 자유를 얻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그들에게 성취되기를 바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갑자기 멍청해지는 것일까요? 사람은 분별력을 잃었을 때 자신이 대단히 옳다고 착각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너무나 옳다고 여길 때야말로 가장 옳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말을 깊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천 번 만 번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이미 마귀의 궤계와 거짓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기에 너희가 그분을 피곤해합니까?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미가서》 6:4-5)

발람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영계에서 저주만 내리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발락은 저주를 퍼붓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고 화를 당해 스스로 멸망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발람은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이라 말씀하셨기에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곰곰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영적 원리입니다.

그 후 발람은 발락에게 한 가지 꾀를 내어주었습니다. 어떤 계략이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이 저주를 받게 할 수 있는가? 바로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악랄한 궤계였습니다. 마귀가 한 사람을 무너뜨리고자 할 때 그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시고, 저주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한 선지자가 저주하고 싶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발락 왕이 저주하고 싶다고 해서 저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면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 온갖 고통을 짊어지게 됩니다. 뇌경색, 뇌종양, 강직성 척추염, 류마티스 관절염이 찾아오고,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며, 잠도 이루지 못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닥치고 나면 몹시 당황하며 “아니,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도대체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이런 일은 참으로 기괴합니다. 때로 성도들을 섬기다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지만, 대놓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 일로 굳이 말다툼을 벌여서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그렇게 계속 사랑하십시오, 저주에 빠질 때까지 사랑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몸에 온갖 재앙을 달고 있으면서도, 제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그럼 어디서 왔단 말입니까? 목사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과 똑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와 똑같다니, 저는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다 통달했습니다”라고 하길래, “그럼 한번 시험해 봅시다” 하고 한마디를 건넸더니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앞에서는 결코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몸에 일어난 일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 없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두 가지 척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이고, 둘째는 질병입니다.

가난도 좋지 않고, 질병도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좋은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에 온전히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번성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깨닫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결코 실수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은 오직 우리 자신뿐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럽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신이 왜 그렇겠습니까?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변론하시어, 그들이 불의하므로 저주 속에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저주에서 벗어나 복된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도자라는 직분은 매우 위험한 직업입니다. 어떤 이는 “저는 너무 불행합니다. 아버지가 전도사입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결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저 육신의 안락한 삶만 추구하며 옛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저주가 임하면 마음속으로 여전히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공감되지 않습니까? “나는 선한 사람입니다. 살인도 안 했고, 방화도 안 했으며, 도둑질도 안 했습니다!”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선한 사람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도리에 불과합니다.

작년 이맘때 한 자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사역했던 자매였는데, 그녀는 제게 “저는 참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손으로 이마를 탁 쳤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고요? 참으로 선한 사람이라고요?’ 자기 어머니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풀지 못하면서 무슨 선한 사람입니까?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자아도취에 갇혀 지내다가 결국 암에 걸린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립니까? 어떤 사람이 소모성 질환이나 악성 질병에 걸립니까? 다들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며,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반면 저는 늘 ‘내가 어찌 이리 죄인인가’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제게 “당신은 참으로 죄인입니다. 말을 그렇게 독하게 하고, 툭하면 사람의 머리가 호두 알만 하고 마음 씀씀이가 땅콩 알만 하다고 하니, 당신이 저주를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하지만 제 말에는 선지자적인 면모가 분명히 있습니다.

비록 호두 알이니 땅콩 알이니 하는 표현은 선지자들이 쓰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당신과 변론하실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네가 정말 옳으냐? 네가 무슨 공의를 행하였느냐? 네가 무슨 긍휼을 베풀었느냐? 착한 일 한 가지 했다고 선한 사람이 된 줄 아느냐? 너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악을 행하지 않았느냐!”

우리로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게 하심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세기》 18:16-19)

아브라함 때부터 이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주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우리 삶에 성취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십니까? 어떤 이는 “목사님, 당연한 소리를 왜 하십니까? 꿈에서도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 땅에서 눈을 감고 둘러보아도 온통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따져 묻는다면,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제대로 알았다면 진작에 하나님을 경외했을 것입니다.

한 자매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안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이런 미련한 말을 들으면 뇌관이 터지듯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칩니다.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켠 것보다 더 아찔해집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누구를 섬겼습니까?” “없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누구를 축복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깁니까?” “목사님, 그래도 저는 기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성경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저는 자주 말합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까? 고작 그 사소한 일 몇 개 해놓고 대단하다고 여깁니까? 곧 위대한 지도자라도 될 기세군요.”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대단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당신의 삶에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그 권속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공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 삶에 온전히 성취되어야 마땅한데, 과연 그것이 다 성취되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사역하고 싶다고 하여 사역을 맡겨 놓으면,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머릿속에 온갖 더러운 것만 가득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 성취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변명하지 마십시오. 저와 말다툼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더 이상 변론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참으로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제 논리를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실수하지 않으며, 틀린 것은 오직 당신과 저뿐입니다. 때로는 많은 탄식이 나오고 회개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말주변이 이래서 전도사로 일하면서도 하루 종일 이런 거친 말을 쏟아내고는 돌아앉아 황급히 회개합니다. 남의 머릿속에 오물이 가득 찼다고 나무라면서, 내 머릿속의 오물은 어찌할 것인가를 돌아보며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긍휼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제가 성인군자인 줄 아십니까?

제 평생의 한 가지 소망은 지켜야 할 도를 끝까지 지키고, 싸워야 할 싸움을 이기며, 달려갈 길을 다 달린 후에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다소 자고한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제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꼭 얻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참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중보기도팀’이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보면서 참으로 기이한 기도를 목격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이러한 목회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결코 그런 중보기도팀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위해 중보기도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나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중보기도팀이라는 이름으로 어찌하여 이토록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만 모아놓았습니까?

어떤 청년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제 사무실에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건물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자였습니다. 제가 그를 섬겨 흑암의 결박에서 풀어주었더니, 제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목사님, 목회는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훈수를 두었습니다. 세상에, 만약 중보기도팀을 꾸린다면 그가 일등 멤버가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나를 바꾸려 하고, 기도를 통해 목사를 바꾸려 드니 얼마나 해괴한 짓입니까? 여러분이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게 되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서로 다투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성경 말씀을 상대방에게만 들이대며, 아내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남편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맞섭니다. 그 대화는 마치 만담을 하듯 하다가 결국에는 멱살잡이로 번지고 맙니다.

그분의 도를 지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 삶에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아멘.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십시오.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풍성히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에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성취를 원하십니까? 원한다면 아브라함을 본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사라고 착각했습니다. 기도해서 해결되지 않으면 양을 늘립니다. 1시간으로 부족하면 2시간, 2시간으로 안 되면 3시간을 합니다. 어떤 목사는 “이 귀신이 1시간 만에 나가지 않으면 3시간은 기도해야 하고, 3시간으로 안 되면 8시간을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몇 년 동안 기도를 쏟아부어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얼마 전 저희가 한 부부를 사역했습니다. 그들의 둘째 아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고 골수 이식까지 받은 상태였는데, 결국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의 설교를 꽤 오랫동안 들었던 부부였습니다. 사역자가 제게 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사역해야 합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첫째, 이 아이의 문제는 그 엄마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제 짐작이 그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사역자가 그 부부와 상담을 나누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매일 7시간씩 기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영적 원리를 늘 깊이 연구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둘째로, 그 악한 영은 아이의 특정한 혈 자리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니 몸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부모를 함께 인도하되, 부모가 반드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결코 제사나 기도의 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공의와 인자임을 알아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며, 잘못된 것은 오직 우리 자신입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것이요, 둘째는 그 혈 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수색해 보니 정말로 그런 자리가 있었고, 살짝만 건드려도 극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곳에 귀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치유 축사 사역에서는 이런 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했지만, 정확한 자리를 짚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머리에만 손을 얹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혀에 손을 얹어야 할 때도 있고, 눈에 얹어야 할 때도 있으며, 부위마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었건만,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만 드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서》 6:6-7)

혼란에 빠진 것 아닙니까? 양 한 마리를 바쳐서 안 되니 두 마리를 바치고, 두 마리로 안 되니 열 마리, 열 마리로 안 되니 백 마리, 급기야 수천 마리의 양을 다 바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안 되겠다, 내 아들을 바치자. 내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자’고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자기가 아브라함인 줄 알고 아들이 이삭인 줄 착각하여 아들을 바치려 하니, 도리어 아들에게 제압당하고 맙니다. ‘내 마음의 죄악을 위하여 내 몸에서 난 소생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첫째가 안 되면 둘째, 둘째가 안 되면 셋째를 바치려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을 상대로 서원 놀음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바치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신의 믿음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광주리째, 트럭째 쏟아부어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해야 합니다.

기도의 양만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망하게 되며, ‘나는 끊임없이 다루심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여길 때 비로소 바른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까요?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겪는 현상을 보고 판단해 보면 백발백중 들어맞습니다. 어떤 이는 “목사님, 아닙니다. 저는 욥입니다”라고 합니다. 세상에, 또 손으로 이마를 짚게 만듭니다. 또 한 명의 욥이 탄생했으니, 당신도 《욥기》를 한 권 써내지 그러십니까? 《욥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은 결국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처음에 자신이 의로운 욥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을 뿐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제 마음에는 깊은 감회가 솟구칩니다. 이런 말을 전하면 사람들은 “목사님은 왜 늘 남을 비판만 하십니까?”라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난감합니다. 말을 안 하자니 성도들이 배우지를 못하고, 말을 하자니 남을 정죄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는 뇌암에 걸린 목사를 사역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은 너무 해괴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매우 힘들게 섬겼다. 나는 일주일에 단 하루만 쉬고 일했기에 뇌종양에 걸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논리를 보십시오. 제 귀에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매주 하루를 쉬는 것으로 부족합니까? 사실 목회자들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많은 일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알던 한 목사가 있었는데, 그의 동생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형이 너무 부럽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형의 무엇이 부럽습니까?” “우리 형 직업이 최고입니다. 일주일에 딱 2시간만 일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오직 주일에만 잠깐 일하면서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연구 기관은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폐증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아이들의 학습 장애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이들의 몸속에 도사리고 있는 통제 불능의 악한 기운은 수시로 치고 올라오는데, 왜 저의 마음이 이토록 아프겠습니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지경입니다.

며칠 전 한 사역자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가운데 한 자매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처럼 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다가가 손을 얹고 꼬집어 주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한 소망입니까. 그러나 아직은 부족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적 난제를 연구해야 하는 연구 기관과 같습니다. 해방되어야 할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미 많은 해답을 찾아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우리는 또한 훈련 기관입니다. 개발해야 할 양육 콘텐츠들이 마치 거대한 산처럼 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역자들이 모두 일어나 나와 함께 콘텐츠를 개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실제적인 양육 사례를 축적할 수 없는가? 이 작은 머리통 하나로 감당하려니, 천천히 풀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몸속의 악한 기운이 치고 올라오는 것은 두통이 엄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몸에 이러한 질고와 연약함을 가진 자들은 제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할 때 눈물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이해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깊이 이해합니다. 마치 두통이 찾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두통을 좋아해서 앓습니까? 아닙니다. 악한 기운이 치고 올라올 때의 고통도 그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요 하나님을 섬기는 전도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모른다면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작은 처세술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나 같은 미천한 자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은 변함없이 실행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할 때 더 많은 사람을 축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더 많은 사람을 자유케 할 수 있음을 압니다. 성도 여러분,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제게 계시를 주셔서 여러분이 직면한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구하고 사모하여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져야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는 겨우 한 바가지의 물밖에 없으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저는 이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겪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비록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나의 하나님은 반드시 행하실 수 있기에, 언젠가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사 날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화인사명신학(華人命定神學)에는 ‘문제를 해결한다,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명확한 논리가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10년 전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10년 전에는 손도 대지 못했던 문제들을 이제는 단숨에 제압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산적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경외할 줄 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로 엄중합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문제는 우리 스스로 심어놓은 열매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매를 정하시고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오므리와 아합의 논리 체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므리는 반역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위를 찬탈했고, 그 뒤를 아합이 이었습니다. 그 가문은 장사하여 돈을 버는 데 매우 능했고, 남의 것을 빼앗고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모함하는 데 아주 탁월했습니다.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미가서》 6:10-12)

제사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온갖 불의한 재물을 긁어모으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며, 큰 저울추와 작은 저울추를 속여 쓰고 가증한 되를 사용해 놓고서 자선 사업을 벌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읍 주민들의 입에 담긴 혀 또한 궤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없는 서민이라고 해서 다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서민들은 ‘저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다치니 가만히 있자’ 하며 눈치를 살피고, 결국 온 성읍에는 강포가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토지와 건물을 사들이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후려치고,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철거해 버렸습니다. 그 시절의 부자들이라고 해서 편안했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고 참으로 가련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시는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시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주를 믿지 않지 않습니까?”라고 묻겠지만, 믿지 않는 자들도 심판하시며 믿는 자는 당연히 다루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몇 번 드리면 모든 문제가 무마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시면 그 상처가 심히 깊어집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혼란에 빠져 “왜 나를 치십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악을 행했는데도 멀쩡하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합니다. 당신이 심판의 줄 앞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또한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을 면밀히 관찰해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능의 팔이 온 세상의 공의를 굳게 붙들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를 행하시고 인자를 베푸십니다. 다만 악인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에 잠시 내버려 두실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돈을 벌어본들 무엇하겠습니까?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네 가운데에 쇠약함만 더할 것입니다. 많이 먹어도 몸은 오히려 극도로 쇠약해지니 기이하지 않습니까? 몸을 보신하겠다고 온갖 것을 챙겨 먹다가 도리어 수많은 병을 얻고, 칼과 재앙의 일들이 그 땅의 사람들에게 들이닥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조소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미가서》 6:14-16)

저처럼 소박하게 살아도 만족이 넘치는 삶이 있습니다. 저는 자주 ‘해피 아워(Happy Hour)’, 즉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갖습니다. 땅콩 몇 알에 통조림 하나 따서, 유통기한이 조금 지났든 어쨌든 그냥 맛있게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에 전할 설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보태겠습니다”, “저도 하나 보태겠습니다” 하며 보내는 해피 아워는 참으로 소박하지만 더없이 풍성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몸은 쇠약해지며, 온갖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이 천 년을 산들 참된 복락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얻는 것이라곤 수치요, 조소요, 황폐함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다가 황폐함을 당할 때 누구를 찾아가 하소연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니,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또한 먹어도 배부르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음식을 먹고 나면 위장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립니다. 너무 불러도 괴롭고, 안 먹으면 허기져 괴로우며, 먹으면 위장이 돌처럼 무거워지니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입니까?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과 변론하겠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십니까? 변론하고 자기 옳음을 증명해 본들 일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며,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관찰하고 배우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밝히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변론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애초에 변론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행하십니까?”라고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행하겠노라” 하시면 끝입니다.

저처럼 생각을 분명히 정리하십시오. 저는 전도자가 된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팔씨름으로 당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온 손으로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넘기려 해도 당해낼 수 없으니, 오직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변론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한낱 사람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주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온전히 아는 것뿐입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리석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며, 오직 명철한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복락이 제 삶에도 남김없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이가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하루에 한 끼만 드셔도 그렇게 든든하십니까?” 제가 간식을 챙겨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결코 율법적으로 경직되지 마십시오. 하루 한 끼 먹다가 배가 너무 고프면 초콜릿도 먹는 것입니다. 제가 하루 한 끼 먹는다는 말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마십시오. 하루 두 끼를 먹어도 괜찮습니다. 굶어 쓰러질 정도로 미련하게 굴지 말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활기차게 사역하십시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결코 어리석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한 끼를 먹든 두 끼를 먹든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행적을 밝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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