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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고린도전서 11장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2024-04-24 40,688 哥林多前书 哥林多前书 11章 哥林多前书第十一章 效法基督 人要有权柄的观念 效法传承主耶稣 主动省察自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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哥林多前书11章-礼拜时蒙头的问题
  • 1 你们该效法我,像我效法基督一样。
  • 2 我称赞你们,因你们凡事记念我,又坚守我所传给你们的。
  • 3 我愿意你们知道,基督是各人的头;男人是女人的头; 神是基督的头。
  • 4 凡男人祷告或是讲道(或译:说预言;下同),若蒙着头,就羞辱自己的头。
  • 5 凡女人祷告或是讲道,若不蒙着头,就羞辱自己的头,因为这就如同剃了头发一样。
  • 6 女人若不蒙着头,就该剪了头发;女人若以剪发、剃发为羞愧,就该蒙着头。
  • 7 男人本不该蒙着头,因为他是 神的形像和荣耀;但女人是男人的荣耀。
  • 8 起初,男人不是由女人而出,女人乃是由男人而出;
  • 9 并且男人不是为女人造的,女人乃是为男人造的。
  • 10 因此,女人为天使的缘故,应当在头上有服权柄的记号。
  • 11 然而照主的安排,女也不是无男,男也不是无女。
  • 12 因为女人原是由男人而出,男人也是由女人而出;但万有都是出乎 神。
  • 13 你们自己审察,女人祷告 神,不蒙着头是合宜的吗?
  • 14 你们的本性不也指示你们,男人若有长头发,便是他的羞辱吗?
  • 15 但女人有长头发,乃是她的荣耀,因为这头发是给她作盖头的。
  • 16 若有人想要辩驳,我们却没有这样的规矩, 神的众教会也是没有的。
  • 17 我现今吩咐你们的话,不是称赞你们;因为你们聚会不是受益,乃是招损。
  • 18 第一,我听说,你们聚会的时候彼此分门别类,我也稍微地信这话。
  • 19 在你们中间不免有分门结党的事,好叫那些有经验的人显明出来。
  • 20 你们聚会的时候,算不得吃主的晚餐;
  • 21 因为吃的时候,各人先吃自己的饭,甚至这个饥饿,那个酒醉。
  • 22 你们要吃喝,难道没有家吗?还是藐视 神的教会,叫那没有的羞愧呢?我向你们可怎么说呢?可因此称赞你们吗?我不称赞!
  • 23 我当日传给你们的,原是从主领受的,就是主耶稣被卖的那一夜,拿起饼来,
  • 24 祝谢了,就擘开,说:“这是我的身体,为你们舍(有古卷:擘开)的,你们应当如此行,为的是记念我。”
  • 25 饭后,也照样拿起杯来,说:“这杯是用我的血所立的新约,你们每逢喝的时候,要如此行,为的是记念我。”
  • 26 你们每逢吃这饼,喝这杯,是表明主的死,直等到他来。
  • 27 所以,无论何人,不按理吃主的饼,喝主的杯,就是干犯主的身、主的血了。
  • 28 人应当自己省察,然后吃这饼、喝这杯。
  • 29 因为人吃喝,若不分辨是主的身体,就是吃喝自己的罪了。
  • 30 因此,在你们中间有好些软弱的与患病的,死(原文是睡)的也不少。
  • 31 我们若是先分辨自己,就不至于受审。
  • 32 我们受审的时候,乃是被主惩治,免得我们和世人一同定罪。
  • 33 所以我弟兄们,你们聚会吃的时候,要彼此等待。
  • 34 若有人饥饿,可以在家里先吃,免得你们聚会,自己取罪。其余的事,我来的时候再安排。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1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방금 우리는 본문을 여러 번 함께 읽었는데, 여러분 모두 주제를 아주 잘 찾아내셨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바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입니다.

1. 본받음과 계승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평생 동안 수많은 것들을 배워서 습득한다는 점입니다. 어릴 때부터 글씨를 배우는 것을 포함해 모든 글자는 남에게서 배운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오탈자가 됩니다. 따라서 시험지에 자기가 직접 창작한 글자만 쓴다면 결코 시험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쓴 작문이 늘 낙제점을 받았는데, 제가 내려준 결론은 열심히 공부는 했지만 전부 자기 식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배운 것입니다. 수학은 수학 교과서에서 배우고, 글짓기는 사실상 자기가 배운 것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쓸 때 빠르고 수월하게 쓰는 것입니다. 천하의 글은 서로 통한다는 말처럼, 배운 것을 활용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글자를 재배열하고 조합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은 '본받음'과 '계승'이며, 우리 사역에서도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대체로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를 참 좋아해서, 오늘날 유행하는 기독교 신앙을 보면 바울 시대의 고린도 사람들보다도 더 기발한 온갖 기상천외한 발명품들이 넘쳐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주님을 올바르게 믿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데, 저의 대답은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부동산을 사거나 저 사업에 투자할 때 평안한 느낌이 든다는 식의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두 가지 일자리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묻거나, 형제와 유산 다툼을 하며 판결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저리 꺼져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저리 꺼져라"라는 말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제가 덧붙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 앞에 감히 나아가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 그런 호통을 들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11:1)

따라서 예수님을 닮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서는 본받음과 계승이 핵심인데, 우리가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같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세대에서 스스로 정통이라 자처하는 교회들은 정작 자신들을 전혀 예수님과 닮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두고 은사주의라고 말하는데, 병 고침과 축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릇된 인식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닮게 행하고 있는지만 보면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당하신 후 숨을 거두실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멸시하셨다면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다면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받고 계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본받음과 계승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만약 제가 귀곡자를 스승으로 모셨다면 손빈 같은 인물이 되었을 것이고, 석가모니를 따랐다면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본받음과 계승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아야 합니다. 누군가 석가모니를 믿는다면 석가모니를 잘 본받아야 하겠지요. 수학을 배운다면 수학책에서 제대로 배워야지, 제멋대로 지어내선 안 됩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가지고 제멋대로 엉뚱한 공식을 만들면 곤란해집니다.

수학뿐만 아니라 화학과 물리학도 모두 책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많은 것들에는 지식 체계가 존재하므로 제멋대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가장 기발하여, 오늘날의 기독교는 갈수록 예수님을 닮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새 시대의 기독교 변혁'이라는 주제로 일련의 특별 집회를 열었습니다. 여러분이 제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상관없지만, 본받음과 계승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울을 통해 주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바울을 따라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읽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이 바로 바울이 쓴 서신서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제가 《야고보서》를 비판하는지 묻습니다. 이 서신을 보면 야고보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을지라도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고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기회가 될 때 하나씩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웹사이트에 《야고보서》 성경공부 자료가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그는 본받지도 계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매일 성전에 무릎 꿇고 장시간 기도만 하신 적이 없으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동생을 본받을 것인지는 각자의 분별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야고보교를 믿을지 모르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제가 본받는 분은 사도 바울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라면 우리도 온 힘을 다해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지 않으신 일이라면 그만두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바로 본받음과 계승에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앞에서 가르치실 때 머릿속으로 온통 자기만의 생각만 하며 자기가 에디슨이라도 된 줄 착각합니다. 매일 바쁘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시험만 보면 낙제하니, 이야말로 천재적인 착각입니다. 에디슨은 GE(제너럴 일렉트릭)를 세웠는데, 자기가 에디슨인 줄 아는 사람은 엉뚱한 가전을 만들어 냉장고를 에어컨으로 쓰려다가 완전히 판을 어지럽혀 놓는 꼴입니다.

2. 권위의 개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린도전서》 11 : 3)

권위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는 여러분 위의 권위를 뜻합니다. 여러분 위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수많은 혼란이 일어나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요, 그리스도는 각 사람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은 권위가 하나의 사슬처럼 이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중간에 하나가 틀어지면, 예를 들어 남편이 믿지 않는다면 남편은 그 사슬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린도전서》 11 : 10)

남자, 여자, 그리고 권위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전에 제가 일할 때는 여성 직원을 부하로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형제들만 있는 것이 훨씬 좋았습니다. 형제들은 제게 문제를 덜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자매들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자매들이 가져오는 문제들이 감당하기 벅찼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일종의 치우침 같았는데, 교회를 개척할 때 많은 자매들이 찾아왔습니다. 이 자매들이 제게 참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는데, 이런 면에서 바울도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다 형제들이라면 얼마나 속이 편하겠습니까? 만나면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자매들은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자매들의 머리카락이 길어질수록 제 머리는 지끈거렸습니다.

성경에서 권위라는 개념을 바울이 이야기했는데, 그 역시 저처럼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험을 숱하게 겪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바울은 자매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특별히 언급했는데, 사실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있으면 머리 위에서 뭔가가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위에 권위가 있지' 하고 얼른 손으로 붙잡게 됩니다.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권위를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매들도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다 보니 제가 자신들의 권위자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나중에 저는 여성에게 권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구장님들께서는 자매들이 누가 자신의 권위자인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어떤 자매는 예전에 전화로 자기 교구장에게 누군가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의 사역을 통해 우울증에서 막 놓여났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자기 교구장더러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한단 말입니까? 우리 교회에는 그런 규례가 없습니다. 당시 저는 전화를 넘겨받아 그 자매를 호되게 꾸짖었는데, 그럼에도 자매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제 성격 같아서는 그런 사람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내버려 두었겠지만, 결국 가장 훌륭한 여성 교구장에게 보내어 제대로 훈련받고 다듬어지게 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의 권위자가 되기를 갈망해서가 아니라, 위에 권위가 없으면 사람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방자해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다가 수십만에서 수백만 위안의 사기를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문제이며, 물론 남성들에게도 남성들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제가 거칠게 표현하여 이런 자매들을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를 차별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남자 중에도 그런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뜻은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권위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요, 그리스도는 사람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지만, 그 남자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 질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린도전서》 11 : 10)

지난 세월 동안 남녀를 불문하고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입는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중에서도 여성이 더욱 심했습니다. 여성은 본래 비교적 연약하기 때문에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왜 바울이 '천사들로 말미암아'라고 언급했을까요? 여성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연약한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두려운 것은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약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는 자는 저주를 받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일쯤은 하나님께서 능히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천사조차 도울 수 없습니다. 또한 천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여러분을 지켜주는 선한 천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타락시키러 오는 천사인 '타락천사'도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두 천사가 따라붙어 한 쌍으로 옵니다. 여러분이 권위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수호천사는 매우 강력해져서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권위에 불순종하면 마귀에게서 온 타락천사가 비정상적으로 강력해져서 수호천사도 그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 이론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류씨의 가설'입니다.

권위는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하며, 남녀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받을 대상으로서 위의 권위가 있어야 하며, 제멋대로 지어내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의 권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권위자로 바꾸어도 괜찮으니 적합한 권위를 찾으십시오. 다만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형식주의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수건을 쓰는 것은 권위 아래 있다는 표식입니다. 오늘날에도 너울파가 있지만, 형식만 갖추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머리에 진짜 수건을 쓴다고 해서 권위의 개념이 생겼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이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도 여전히 제멋대로입니다. 뼛속에 있는 본질이 고쳐져야 하니, 여러분은 이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보더니 안식교를 세웠지만,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무익하며 형식에만 집착하다가는 사람을 망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개념을 깊이 묵상하기 시작하십시오. 수많은 성도들이 권위라는 개념 때문에 큰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자매의 남편이 불신자이면서 자매가 신앙생활 하는 것조차 막는다면, 그 남편에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요, 그리스도는 사람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질서의 사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남자는 머리에 쓰지 말고 여자는 써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단지 형식에 불과합니다.

점차 형식에서 벗어나 본질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권위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형제가 '누름의 원리'를 정리했는데, 눌러서 통제하지 못하면 축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제하려 할수록 더 통제가 안 되었습니다. 누름의 원리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누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사람에게 권위의 개념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권위의 개념이 없으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는데, 천사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징계하러 올 것입니다.

3. 변론하지 말라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1 : 16)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바울이 꽤 독선적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이른바 독재는 모세 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왜 십계명이 있어야 하는지 따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지킬 의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반포하신 것이기에 변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논쟁하고 변론해 봤자 패망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논쟁하지 마십시오. 마치 수학을 배우는 사람이 왜 피타고라스 정리가 있어야 하는지, 왜 a의 제곱 더하기 b의 제곱이 c의 제곱이어야 하고 a의 세제곱 더하기 b의 세제곱은 c의 세제곱이 될 수 없는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것은 본받음과 계승이 아닙니다.

본받고 계승하려면 변론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아직 변론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많은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가정에 자녀가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집에 두 아이가 있었는데, 한 아이는 군대에 다녀와서 의젓한 대장부가 되어 돌아왔고, 집에만 있던 아이와는 큰 차이가 났습니다. 두 형제 모두 괜찮은 아이들이었지만, 집에 있던 아이는 규율을 잘 지키지 않았고 군대에 간 아이는 지휘에 복종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군인은 상관과 변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 훈련에 있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에게 변론하도록 부추기면 무슨 창의성이 나올 줄 압니다. 사실 변론에서는 창의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창의성의 전제 조건은 규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창의성이 나오겠습니까?

먼저 본받음과 계승이 있어야 합니다. 글자조차도 남들이 쓰는 방식대로 써야지, 변론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토론회를 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나눈 권위에 대해서도 분명 이것저것 따지며 순종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등 온갖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은 변론하지 말고 순종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양 가사 중에 "바다가 흉용하고 파도가 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변론하는 법을 배우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리저리 말하다가 자기가 지어낸 변론의 논리에 스스로 얽매여 길을 잃게 됩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린도전서》 11 : 16 - 17)

교회 안에서의 변론은 아무런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변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언제 변론을 통해 일을 분명하게 정리한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행하라고 했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면 맹목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첫 글자를 배울 때부터 변론할 자격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면 이유를 묻지 않고 따르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 부리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붓글씨를 배울 때도 옛사람들이 붓을 쥐고 획을 긋는 방식을 그대로 배워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사사건건 변론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둔해집니다. 이럴 때는 변론하지 말고 먼저 계승하고 본받아야 하며, 그래야 점차 그 안의 깊은 오묘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흔히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닮는다고 하듯, 비뚤비뚤하고 둥글넓적하게 쓴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4. 분파와 당 짓는 분쟁은 본받음도 계승도 아니다

분파를 나누고 당을 지어 분쟁하는 것이 본받음도 계승도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결코 그런 방식을 만드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양쪽으로 갈라놓고 토론회를 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분파를 만들고 당 짓는 것은 본받음이 아닙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1 : 18 - 19)

예전에 싱가포르에 오신 한 유명 목사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분이 개척한 교회에 분쟁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 명의 사역자가 각자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싸움을 해결한 묘수는 세 사람을 갈라놓아 각각 교회를 하나씩 개척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파와 당 짓는 분쟁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영, 험담하게 만드는 영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매우 강력합니다. 과거에 저도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영과 수년간 싸웠습니다. 그 영은 사람을 몹시 지치게 만들며, 교회 안에서 분파와 당파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뱀을 보았는데, 각 머리마다 혀를 날름거리며 몹시 사나워 보였습니다. 저는 목소리가 변할 정도로 기도했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 더 힘이 날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저 자신의 담력을 키우기 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그 놈은 도망쳤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교회는 하나가 되었고, 목회 사역도 수월해졌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는 반드시 분파와 당 짓는 분쟁, 그리고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영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영을 이기기 전에는 반드시 험담하는 영을 먼저 이겨야 합니다. 이것들은 피해 갈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험담 배후의 악령에게 패배하거나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영 아래 굴복하고 맙니다. 꼬리를 무는 영적 전쟁은 칼과 그림자가 번뜩이듯 매우 치열하고 맹렬합니다.

그 유명 목사님이 세 사역자에게 각각 교회를 세우게 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영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역사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 그 목사님은 곳곳을 다니며 설교를 아주 잘하셨고 사람들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후에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곧이어 문제들도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방언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도를 기준으로 왼쪽은 방언 찬성파, 오른쪽은 반대파로 갈라졌으니, 머리가 둘이고 팔이 넷은 되어야 설교할 수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아침 예배는 방언 반대파가, 저녁 예배는 방언 찬성파가 드렸습니다. 이 방법은 겉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예수님을 본받고 계승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이런 교회를 돌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며 날마다 악령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저의 지혜로운 면을 본받아야 하는데, 바로 본받음과 계승을 배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는 사이비 종교라 생각하여 놀라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며, 갈 테면 어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만의 언어 스타일을 가미하기를 좋아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려 할 때 다른 교회들을 탐방하며 배웠으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속으로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에게 배워야 한단 말인가? 온갖 그릇된 방식들만 배웠기에, 결국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바울의 서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만큼 성경을 제대로 깊이 있게 공부하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세상에서 보배를 골라내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결코 쓰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여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이런 지혜와 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운 교회가 능력이 있고 축복을 받는 까닭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본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에 교회에 왔을 때는 절반은 예수님 같고 절반은 마귀 같은 두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60%는 예수님을 닮고 40%는 마귀를 닮게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을 걸을 때, 점점 더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분파를 나누고 당을 짓는 분쟁은 모두 사람을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흔히 말하듯 한 가족이 아니면 한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말처럼, 그렇지 않으면 원수지간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5. 성찬의 본래 의미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1 : 16 - 19)

바울이 이처럼 긴 단락을 써서 권위의 개념을 설명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변론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며, 분파를 짓고 당을 만들어 다투는 것 또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의 본래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지, 풍성한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을 큰 잔치로 여겨 배불리 먹은 이야기를 하자면 베드로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최후의 만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에 가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이 마가 다락방에서 열렸으며, 전속 요리사들이 차려준 산해진미가 얼마나 풍성했는지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고 열심히 선전했습니다. 전반부만 기억하고, 후반부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 : 23 - 26)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와서 당시의 성대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바울에게 속아 성찬 때 작은 떡과 작은 잔의 포도즙만 먹을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먼저 성찬 방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베드로의 경험이 틀림없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역사적 실증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나오는 구절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1 : 19)

여기서 그 누구의 경험이 베드로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찬을 먹기 위해 어떤 이들은 전날부터 밥을 굶고 와서 성찬을 호화로운 식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린도전서》 11 : 27 - 34)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전서》 11 : 21 - 22)

이렇게 보면, 결국 먹는 데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은 꼴이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도 제 돈과 노력을 들여 구운 닭, 구운 오리, 소고기 장조림 등을 대접하며 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만 가지고 와서 먹고는 남은 음식까지 싸 가려고 했습니다. 나중에야 이런 일들이 사람을 심히 타락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찬의 본래 의미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니, 여러분도 이와 같이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해야 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이와 같이 행하라'는 것은 누구의 떡이 더 큰지, 네 떡은 5전짜리고 내 것은 5모짜리인지 비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떡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저 그 떡 한 조각을 얻는 데만 목적이 있다면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예수님을 본받고 있으며, 몇 명이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찬을 받으면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써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때,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린도전서》 11 : 25)

여기서 '이와 같이 행하라'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며,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죽음조차 개의치 않는데, 제가 힘 좀 쓰고 피 좀 흘리는 것을 아까워하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저와 함께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으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가 부활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찬의 본래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얼마나 있습니까? 누군가 조금만 기분을 상하게 해도 안색이 굳어지거나, 선악을 분별하며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다른 사람을 양육하면서도 선악을 분별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본받는 것입니다. 성찬을 지키면서조차 경쟁하고 양보하지 않으며, 줄을 설 때도 남이 새치기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권위의 개념을 본받고,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으셨던 주 예수님을 본받으며,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를 이루고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며,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의 체면 따위는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6.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살피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 : 28 - 29)

성찬을 받는 것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성찬이 쉽게 형식화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살펴야 하며, 성찬을 받을 때는 더욱더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어느 부분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닮아가기 시작하며, 스스로 아직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능동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병이 있는 만큼 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전서》 11 : 30)

사람은 병에 걸렸을 때 더욱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평소에 자신을 살피지 않다가 병이 들었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의 길을 향해 내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1 : 31 - 32)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 변명하는 시간은 많으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자신을 자주 살피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어디가 주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면 진작에 성장했을 것입니다. 직장을 잃고 병이 찾아오며 거의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불 가운데서 겨우 끄집어낸 나무막대기와 같을 뿐입니다.

아직 주 예수님을 본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다시 본받기를 시작하십시오. 이미 본받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스스로를 조정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며, 하나님께는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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