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말이 맞을까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이어서 『베드로전서』 5장, 곧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참을 생각했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베드로의 말이 맞을까요?”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즉, 우리가 수많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우리가 한 말이 맞을까? 우리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좋은 습관입니다.
비단 '베드로의 말이 맞을까?'뿐만 아니라, '이 목사님의 말이 맞을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 말씀하신 그 내용이 맞습니까?”라고 질문한다고 해서 제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화내지 않습니다. 제 도량이 그렇게 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진리를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며, 저 또한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또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추구하기를 권면합니다. 특히 최근에 제가 전한 설교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인가요? 이러한 고난에 영광이 있습니까?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전서』 5:1)
베드로는 왜 이 책을 썼을까요? 『베드로전서』는 자신과 함께 장로 된 자들에게 권면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2절 말씀은 일단 두고 다음 질문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어떤 고난일까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베드로가 겪은 고난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이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 충만’이라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설교 한 편을 하니 수천 명이 주님을 믿었고, 나중에 또 한 번 전하니 또 수천 명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설교 한 편으로 수천 명이 주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가 수천 명을 전도한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후 일의 전개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이후 상황의 전개는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자신의 재산을 팔고 다 함께 먹으며, 온종일 떡을 떼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출근은 하는 건가, 일은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그저 밥만 먹으며 교회를 식당처럼 만들었고, 게다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사람은 많이 먹고, 어떤 사람은 적게 먹었으며, 어떤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적게 했기 때문입니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까?
이후 일곱 집사를 세웠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사도인데, 식탁 봉사를 맡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중에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는 등 좋은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교회를 세운 방식이 과연 옳았을까요? 베드로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누가 박해한 것입니까? 귀신이 박해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박해하신 것입니까? 이후에 전개된 역사가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런 꼴로 만들 수 있습니까? 교회가 먹고 마시러 오는 곳입니까? 교회가 모든 물건을 통용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까?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이 박해가 시작되자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후 어떤 무리는 안디옥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자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고, 베드로는 천사의 인도로 빠져나와 그들이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겪은 박해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매우 기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더 이상 우두머리가 아니게 되었고, 교회의 수장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이 일의 이면에 도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 그가 체포되었을까요? 왜 그는 2인자로 물러났을까요? 그 진짜 이유는 우리도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라는 또 다른 사람을 택하셨고, 바울을 일으켜 세우사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는 베드로가 세운 교회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예루살렘 교회 모델이 있고, 안디옥 교회 모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세운 교회로, 유무상통하며 먹고 마시는 구조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훗날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방으로 다니며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혼란과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베드로가 겪은 이 박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면 귀신에게서 온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점점 더 부패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는 것에 무슨 간증거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고난을 겪은 것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사실 이후에 베드로는 여러 교회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이 일이 다소 기묘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바울이 쓴 서신들은 베드로를 낮추어 평가하는 뉘앙스가 매우 짙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외식했던 일 등인데, 어쨌든 바울의 눈에 베드로는 온통 어지럽히기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가 생겨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 갔습니까? 당신은 유대인의 사도가 아닙니까? 고린도 교회에는 왜 간 것입니까? 그들은 분업을 잘해 두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가고,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말입니다.
그러나 훗날 유대인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다 무너졌고, 베드로는 갈 곳이 없어 수입도 끊기고 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여전히 베드로의 이러한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남이 세운 교회에 가서 설교 한 편 하고, 그 교회가 주는 사랑의 헌금을 좀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겪었습니까? 고난을 겪었습니다. 힘들었습니까? 힘들었습니다. 왜입니까? 온종일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인 바울이 세운 교회에 초청받아 가서 설교 한 편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양육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가 설교 한 편으로 끝나는 곳입니까?
이것이 무슨 고난입니까? 훗날 베드로가 고난을 겪었습니까?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의 간증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연구하고, 구약과 신약 성경을 연구하며, 구원에 대한 제 나름의 관점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도 베드로를 꽤나 낮추어 평가합니다. 그에게 영생에 대한 추구가 없었을까요? 그는 영생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행한 것이 옳았습니까? 그는 결코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의 많은 형제자매들도 베드로와 닮아서, 몸에 베드로와 같은 기질이 배어 있어 결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이렇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 동안 무엇이 성장했습니까? 작년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재작년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지난 2년 동안 무엇이 성장했습니까? 여러분이 한 모든 일이 다 맞았습니까?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깨달아야 성장의 포인트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올해가 작년 같고, 작년이 재작년 같고, 재작년이 3년 전 같고, 3년 전이 까마득한 옛날과 똑같다면 어떻게 성장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잘못 행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성장의 개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는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를 바라보았는데, 그 나중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죽은 후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누릴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다 망해 버렸고, 양육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육은 형편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가진 실력이 그 정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영광이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교회를 망쳐 놓았는데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박해를 허락하셔서 예루살렘 교회가 해체된 것입니다. 다들 일은 하지 않고, 유무상통하며 함께 먹고 마시기만 했으니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까? 언제 그렇게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듣기 거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좀 어리석었고 머리에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훗날 어떤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공산주의라는 것을 발명했는데, 모든 물건을 함께 쓰는 유무상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시대에도 망했는데,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유무상통이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망합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일을 잘못해 놓고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저는 참으로 기이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묻지 않으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여러분, 깨달으셨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만약 여러분이 항상 자신이 온전히 옳다고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베드로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양육이란 무엇인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베드로전서』 5:2-4)
베드로의 양육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베드로가 무엇을 양육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양육이 어떠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훌륭한 양육이 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내 아들’이라 부른 마가는 베드로를 따르다가 점점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르긴 했어도 사실 양쪽을 오갔습니다. 베드로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자니 마음에 걸리고, 체면을 세워주자니 그 수준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시겠지만, 마가는 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정규 교육 과정을 잘 밟은 사람이었으며, 이후 베드로의 비서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베드로의 설교를 마가의 손을 거쳐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베드로의 양육은 매우 엉망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양육의 개념이 없었고, 제대로 양육하지도 않았으며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는 바나바에게 갔고, 나중에는 바울에게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이 마가를 다시 훈련시켜 그 몸에 배어 있던 허황된 논리들을 하나하나 꺾어놓았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가르쳐 놓은 사람을 바울 곁으로 데려와 다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마가가 처음에 바울을 따라나섰다가, 바울이 이후에 다시는 그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입니다. 왜였겠습니까? 온몸에 문제투성이였고 베드로에게서 배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다루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훗날 마가가 깊이 회개한 후에야 바울이 그를 다시 받아들였는데, 바로 그런 관계였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2-3)
베드로가 말한 이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본을 보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고난의 본입니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고난의 신학이 이렇게 나온 것 아닙니까? 고난의 본일 뿐, 양육이라는 사역을 올바르게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가르침 속에는 뉘앙스가 좀 담겨 있는데, 그 마음가짐을 자세히 읽어보면 마치 하나님께 위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듯한 태도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여전히 고난받는 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도와드리러 왔다면서, 마치 하나님께 대단한 기여라도 하는 척하는 태도입니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5:4)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보면, 그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합당한 섬김)니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제 관점은 무엇입니까? 섬김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오면 어째서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이 관점에는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양육 가운데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며, 이것은 고역이 아닙니다.
사실 베드로에게는 '공은 없어도 수고는 했다'는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한 가지 관점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떨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수고만 한 것'을 인정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실컷 헛수고만 했다면, 제가 아직 책임을 묻지 않은 것뿐이지 않습니까? 일을 했다 하면 틀리고, 틀리는 일에만 능숙하여 몹시 힘들게 일했다면, 그 뒷수습을 제가 다 해야 하니 저는 더 힘들어집니다. 베드로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러면서 스스로 고생했다고 여깁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헌신입니까? 그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는 지역 교회에서 작은 공동체를 양육하는 분들이 많고, 우리의 콘텐츠가 많은 작은 교회들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 고난을 겪습니까? 하나님을 도우려 드는데 어찌 고난을 겪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매우 고달프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육은 희생이 아니라 얻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 교회의 소그룹 목회자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어떤 교회들의 소그룹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도우러 왔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번아웃(burn out)되고 심령이 바짝 말라버렸습니다.
양육하면서 심령이 마를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몹시 고달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목사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필사적으로 기도하는데, 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힘겨루기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일하셔야 하는지 훈수라도 두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내 뜻대로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늘 이렇듯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습니다. 이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내가 올바르게 양육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장황하게 기록된 이 내용들을 보며,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일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한 젊은 중학교 교장이 있었는데, 우리 사역자 중 한 사람이 “선생님, 저 교장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 말씀과 똑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가르칠 줄도 모르면서 부지런하기만 하여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죽어라 일하는 교사입니다. 그것이 맞습니까? 해야 할 일이 어디 그렇게 많습니까? 저는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잘못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배운다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자세히 연구해 보면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잡기만 해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다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으며 잘못된 방식으로만 지극히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죽어라 그렇게만 매달린다면, 완전히 바보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교장 선생님도 “제발 부탁이니, 가르칠 줄 모르면 그렇게 부지런 떨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해 놓고도 부지런함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정말 골치 아픕니다.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성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은혜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뇌암에 걸렸습니다. 제가 그분께 “왜 이런 병에 걸리셨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제가 목회하느라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고생스럽게 일해서 뇌암에 걸렸다면, 일을 잘못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게 오면 제 동역자들은 기본적으로 저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어떤 이가 “선생님, 제가 이렇게 수고했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일을 잘못해 놓고 아직 내가 문책하지도 않았는데, 대단한 공헌이라도 한 줄 아십니까? 대단한 부패와 파괴를 저질러 놓았는데도 아직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인도를 받는 우리 소그룹 목회자들과 사역 동역자들 중에는 정신없이 허겁지겁 쫓기며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쫓기듯이 일하면서 몰래 제게 숨기고 있다면 저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사람이 그렇게 넋이 나가 일하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하고 여유롭게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까? 해야 할 일이 어디 그렇게 많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여러분이 제게 자주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만약 “선생님, 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틀렸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반대로 “선생님, 제가 한 것 좀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하며 잘했다고 생각하여 제 앞에 와서 뽐내려 한다면, 제가 짚어내는 문제점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빗나간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한 방식이 제가 3년 전에 했던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년 전의 제 방식은 틀린 것이었고, 영적 높이가 부족했으나 저는 성장했습니다.
양육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양육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천해 보고 이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안 뒤에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지, 베드로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교회도 다 무너뜨리고, 자기가 양육하던 사람들도 다 바울에게로 가버렸는데, 그러고도 사방에 편지를 써서 “너희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제가 베드로를 본받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양육이란 사람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더욱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왜 가치일까요? 가치라는 것이 꼭 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태복음』 25:21)
여러분 알아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제게 맡겨진 은화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화라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고 비가 새는 집에 사는데도 제가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가난한 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사람이 가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은화가 아니라 돌덩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돌덩이를 제게 맡기셨으니, 제가 여러분을 은화로 변화시켜 드려야 하고, 은화는 다시 금덩이로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가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성장의 간증을 나누는 것을 듣는 것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 간증을 듣고 나면, 딘타이펑 만두를 사주지 않아도 되고 선물을 가져다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장하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이전에는 우울증에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우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넘치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기초생활수급자로 근근이 버티는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이 사역은 말할 수 없는 만족과 큰 기쁨을 줍니다. 저처럼 양육하는 사람이 어떻게 번아웃이 오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타버리겠습니까? 저는 날마다 기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만약 우리 소그룹 목회자가 쩔쩔매며 섬기고 있다면, 저는 먼저 그가 쩔쩔매는 문제부터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쩔쩔매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대단한 헌신이라도 한 줄 착각할 텐데, 그러면 완전히 다 빗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저 자신도 쩔쩔매며 결국 뇌암에 걸린다면 전부 엉망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고난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본 장 4절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무엇인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전서』 5:5-6)
이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젊은 자가 나이 든 자에게 순종하라니, 왜입니까? 나이 든 사람이 소금을 더 많이 먹어봐서 그렇습니까? 만약 이 가르침대로라면 디모데는 어떻게 사역을 하겠습니까? 디모데가 사역하려 하면 “베드로가 방금 말했듯이 젊은 자는 나이 든 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나는 일흔 살이고 너는 열일곱 살이니 네가 내게 순종해야 한다”라고 할 것입니다. 일흔 살 먹고 소금을 많이 먹었다 한들 글자는 몇 자나 알며 진리는 얼마나 압니까? 디모데가 베드로의 말을 들었다면 기가 막혀 멍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말씀에 어폐가 있지 않습니까?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나이가 어리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영적 높이가 낮은 자가 영적 높이가 높은 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난장판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많고 수염이 덥수룩하여 마르크스처럼 생겼다고 해서 순종해야 합니까? 그 사람을 따라 교회를 함께 말아먹으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또 서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세상에나, 그러면 어머니가 딸에게 순종하고 딸도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하니, 딸이 어머니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서로 순종하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가르침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입니까? 딸이 철이 없어 어릴 때 좀 매를 대어 육신을 다루려 하면, 딸이 “엄마는 겸손하지 않아요. 원래 엄마가 나한테 순종해야 하잖아요”라고 대듭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리둥절해집니다. 왜입니까? 『베드로전서』에 “서로 순종하라, 하나님은 교만한 엄마를 대적하시니 좀 겸손해질 수 없느냐”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나,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란 말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관계는 전도될 수 없으며, 권위는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이고 엄마는 엄마입니다. 엄마는 엄마 다워야 하고 아이는 아이 다워야 합니다. “엄마 왜 날 때려?” 하면 “내가 널 때린 게 어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엄마들은 아이와 자꾸 논리적으로 따지려 하다가 결국 스스로 궁지에 몰립니다. 그러면 아이가 『베드로전서』를 읽고는 요구하기를 “엄마는 절대 겸손한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할 수 없어? 왜 날 때려?”라며 모든 질서가 무너져 버립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교회를 망쳐 놓았습니까? 바로 이런 식의 논리로 망친 것입니다. 그는 결코 스스로에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을까?'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교회를 세우라 하시며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리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세웠습니까? 난장판으로 세웠고, 겸손과 순종 모두 잘못 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매우 겸손하다고 착각합니다. 왜입니까? 서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교회의 이러한 관계들이 온통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알던 어떤 아주 무례한 교인은 담임목사 방으로 쳐들어가 담임목사를 삿대질하며 호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담임목사는 대단히 지혜로웠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호원을 불러 끌어내려 했겠지만, 담임목사는 “안 됩니다, 그가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가 이 일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끌어내면 더 큰 분란을 만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담임목사가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써 겨우 그 소란을 일단락지었습니다. 세상에나, 다행히도 저는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겸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6-7)
제가 만약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 목회를 한다면 양육을 잘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기력하게 있으면서 제 책임을 하나님께 다 떠넘겨야 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주 익숙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다른 여러 교회를 거쳐 오셨다면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하나님께서 또 일을 맡기시면 또다시 하나님께 떠넘긴다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복종할 것이니 내 책임마저 다 주께 맡긴다”고 한다면, 그것이 늙은 엘리 제사장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들들이 악행을 저질러도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닙니까? 반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잘못했을 때 사무엘은 엄히 다스렸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다스렸는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겠지만, 사무엘이 어찌 다스리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순종은 하나님의 도(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장을 꼭 기록해 두십시오. 여러분은 제게 도전해도 되고, 제게 순종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도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은 사람을 믿거나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도에 순종하는 것이고,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어떤 이는 “에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까?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해”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의 방식대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누가 자기 아내를 버릴 수 있으며, 누가 자기 자녀를 버리고, 누가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세상에나, 그것이 어째서 불가능합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어떤 사본에는 '아내나'가 추가되어 있음)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9:29)
이것이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버린 것입니까?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혼란은 이 『베드로전서』를 쓸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그는 거룩함을 구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구하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베드로와 같은 부류입니다.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아이구, 자매님, 제가 틀렸고 자매님이 맞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 겸손을 떠는 것일 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8-10)
이 말씀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천사도 대단하고 마귀도 대단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게다가 행간을 보면 고난이 마귀로부터 온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저의 분석과 정리 과정을 통해 볼 때, 베드로의 고난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고자 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귀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제가 가서 그를 좀 쳐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허락하셔야만 마귀가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마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마귀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마귀를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구약 성경을 보면 여러분이 독사와 사자를 짓밟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사자가 강합니까, 사람이 강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독사와 사자를 짓밟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도 편차가 있었고, 마귀에 대한 인식에도 편차가 있었습니다.
사실 태초의 마귀는 “아담아, 널 물어 죽이겠다! 하와야, 널 물어 죽이겠다!” 하며 울부짖는 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귀신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머리가 없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흰 옷을 보더라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뭐 그리 무섭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저는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귀신을 무서워해서 뭐 하겠습니까? 귀신은 내가 살아있을 때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죽어서 나를 어쩌겠습니까? 그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귀신에 대해 매우 터무니없는 오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어둠 속에서 뛰어가는데, 검은 옷만 입어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강도나 칼 든 자를 조심해야지, 그런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 훨씬 무서운 일입니다.
강시가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마귀의 첫 번째 거짓말이 바로 “마귀는 우는 사자 같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위력은 그가 퍼뜨리는 거짓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동물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독사가 되어 아담과 하와를 물어 죽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가서 좀 먹어봐, 아주 좋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 먹고 나니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육신에 속해 있고 세상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귀신은 그만큼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바로 이런 논리입니다.
사람 내면의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고난에 대해 첫째, 마귀는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는 사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말 무서운 것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둘째, 고통과 고난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사람의 육신적인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사람이 주님을 믿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과정은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에 속할수록 그만큼 고통스러우며, 이러한 고통에는 영광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할수록 그만큼 고통스러우며, 이 고통에는 아무런 영광이 없습니다. 귀신에게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제가 귀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 말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다소 위로와 믿음을 주기 위함일 수 있으나, 우리는 서서히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과 귀신을 불러들이는 것은 동일한 일입니다.
베드로의 고통은 우는 사자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온 것입니까?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세우지 않았고, 제대로 성장하지도 양육하지도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안에는 잘못된 논리가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교회를 무너뜨렸지만 공은 없어도 수고는 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수고한 것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여겼으나,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결국 베드로는 불 속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처럼 하마터면 타버릴 뻔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저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데서 오는 것이지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육신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인데,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육신을 쳐서 죽인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기뻐하며, 그것은 고통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전에 신앙생활을 매우 힘들게 여겼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몹시 괴롭게 하면서도 스스로 영광스럽다고 여깁니다. 사실은 생각의 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고통 또한 마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울이 고통스러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셨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귀가 강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강하신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온통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초월해 계시며, 마귀가 하나님보다 강한 것이 아닙니다. 이 논리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바로잡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전서』 5:8-9)
무엇을 깨어 경계해야 합니까? 사실 우리는 때로 귀신을 지나치게 크게 부풀립니다. 자신의 육신에 속한 논리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전력을 다해 깨뜨리기만 하면 마귀는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 은혜를 증명하였는가?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전서』 5:12)
베드로는 왜 이 편지를 썼을까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까?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바울이 쓴 서신의 어조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를 권면하고, 이 은혜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참된 은혜입니까? 베드로가 쓴 것은 고난받는 은혜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고난의 신학은 교회 안에서 매우 성행하고 있지만, 많은 고난은 사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요셉과 같은 그릇을 가지지 못했고, 요셉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갔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곳에서 죽도록 괴로워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죽도록 괴로워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저는 이 점을 깊이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가 “선생님, 저는 너무 힘듭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왜 힘듭니까?” 하고 물으니, “다들 저와 유산을 다투는데, 저는 너무 적게 챙겼고 그들은 너무 많이 챙겼습니다. 됐습니다, 제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듣기에는 참으로 해괴합니다. 여러분도 그 뉘앙스가 느껴지십니까? 몹시 고통스러워하는데 왜입니까?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해 고통스럽고, 얻지 말아야 할 것도 얻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선생님, 저 요즘 너무 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하니 “제게 돈을 보내주던 형님이 이제 저를 상대도 안 해줍니다”라고 합니다. 온통 이런 일들뿐입니다. “너희를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이것이 무슨 은혜입니까? 고난받는 은혜입니까? 사실 우리가 겪는 많은 고난에는 영광이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령을 힘입어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쓴 글을 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듭니다. 감히 그의 말이 틀렸다고 단정 짓지는 못하지만, “그의 말이 맞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논쟁하려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약간의 여지를 둔 것은, 그가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그의 내용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에 휘둘려 갈팡질팡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겪는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이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일을 엉망으로 망쳐놓고도 ‘내가 수고가 많았다, 공은 없어도 수고는 했다’고 여깁니까? 수고한 것은 치지 않습니다! “수고한 것을 쳐주지 않는다니, 그 말을 들으니 정죄감을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믿음을 무너뜨리셨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있는 거짓된 믿음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