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为什么拔示巴这个女人没有被神责备?
我给大家一个基本原则,神没有批判的人,我们别去批判。我给大家举个例子:雅各到了他舅舅拉班家,那他做了什么事呢?他把他舅舅拉班的羊,用一种很诡异的方法夺来的。神没有责备他,而且神还帮助他,这事超出了我们的想象。
雅各有没有骗他的哥哥以扫?有!有没有骗他的爸爸以撒?也有!因为以撒问他:你是以扫吗?雅各说:我是以扫。这不是瞪眼说瞎话吗?听了就不是那么上道。但是《圣经》里从耶稣到使徒保罗,再从摩西一直到撒母耳,以赛亚,没有人批评这件事。我们的神被称作为亚伯拉罕的神,以撒的神,雅各的神。
后来神也没有批评拔示巴,所以我很少批评拔示巴。但是如果你的家庭被拔示巴破坏了,你可能会恨死这个拔示巴。因为拔示巴这样的女人害死了自己的老公,又跟大卫混在一起。但是我们要知道神没有责备她,也就是说从某种程度上神认同拔示巴,因为神没有把这件事当回事。
我教大家一个最基本的原则:神不责备的,我们别去责备;神没有批评的,我们别去批评。神为什么就没有责备拔示巴呢?这件事可能超出了我们的想象,因为拔示巴在某种程度上可能像他玛。
有的人说:你怎么会有这样的理由来推论呢?因为拔示巴出现在耶稣基督的家谱里。那是怎么出现的呢?是大卫从乌利亚的妻子拔示巴生所罗门,你不觉得这件事奇怪吗?后来写《马太福音》的马太也没有批评拔示巴,这不是很说明问题吗?马太非但没有批评过拔示巴,还把她写到耶稣基督的家谱里了。
《圣经》里有几个人,大家要特别地注意。喇合,路得,他玛,还有拔示巴,后来包括耶稣肉身的妈妈玛利亚,这些都是了不得的女性。为什么呢?因为她们里面有一种命定、有一种渴望。而且这种渴望、这种命定,让她们迈出了、跨越了道德的底线。我想可能很多人不一定能接受这类的事,所以咱们一点一点地琢磨。我觉得在某种程度上《圣经》肯定了拔示巴的做法,她在那个年代做出一件缺德的事,但她却没有被神责备,这件事超越了我们的想象!他玛所做的,我们也很难想象。
Q2:老师,您过去经常说钱财都是不义的,比如导游可以带游客购物,但是现在又说资本没有良心,没有道德,我有些疑惑和矛盾。
你觉得我讲的自相矛盾了是吧?资本害人害在哪呢?它把人整到贫穷里去了。不是因为这些资本家缺钱,反倒是因为他们有钱,而导游只是打一份工而已。我说资本没有良心,因为资本不但把人家的给剥夺过来,甚至还把人逼到倾家荡产,甚至还有自杀的。
资本这东西比导游带来的问题更深远。咱们当中的人可能有不认同我说的,可能有相当多的人觉得资本是好的。当然了,资本这东西还是挺值得探讨的。我想我说的也不一定正确,也有一些资本是有良心的。但是有良心的资本可能管理的也不太持久。请大家原谅我粗浅的认识。
Q3:老师,魔鬼引诱人是获得了神的许可,试探的过程都跟《约伯记》里记载的一样吗?神把《约伯记》放在《圣经》里,是不是就是想让我们明白灵界的事,让我们能够抵挡得住魔鬼的试探?
《约伯记》其实是神给我们一种属天的智慧,让我们知道,我们肉眼看约伯经历的这件事会很困惑。《约伯记》给了我们很合理的解释,实际上就是撒旦和神之间,在属灵的世界里的一种较量。这种较量的结果,就是约伯开始遭受世上的一些患难。约伯遭受完了以后,最后神加倍的祝福约伯,原来有八千头羊,后来有一万六千了;以前有四千头骆驼,后来变成八千头了。不是因为约伯有很大的得胜,是因为约伯以前是风闻有神,而现在是亲眼看见神,他开始对神有更深的了解。我们明白在灵界里跟魔鬼较量,就是对属灵的世界有更深的理解,这也是神让我们更多寻求的缘故。
Q4:老师,人身上的疾病都是自己过去所种的结果,为此要付上代价,因为这是神的审判,那还有必要医病祷告吗?
如果大卫没有经历过这么多神的恩典,那他所做的这件事,神给他的审判会不会是同样的审判呢?应该不是。因为神给他恩典的前提是:如果我给你的还不够,我可以加倍地给你,但是你不要干这种缺德事。所以说你过去不认识神的时候,你身上的罪是耶稣基督为你承担。但是如果你认识了神,然后你再去做这些事,尤其是神祝福了你很多,那就麻烦了!
我们当中的弟兄姐妹一有问题就祷告,病还是得医治的,为什么呢?因为我们在无知的情况下做了那些事。但是我们不能再继续这么无知了,如果明白了这个原则以后,还要顺着感觉走,那你一定会付上代价。最后我们还得像大卫一样,不断的为那个孩子病得医治祷告寻求神,那是对神的信心!但是如果神不医治,那就认了吧。
人活着就要相信神是使我们得胜的神、神是医治我们的神。但是问题来了,神在大卫家里的宣判是什么呢?我必兴起祸患攻击你!这祸患包括他的王位被押沙龙篡夺了,很多的事都是一脉相承的。所以说人身上有疾病,如果还是在一个寻求和认识神的过程中,最好相信神是医治你的神。
Q5:老师,治死肉体的恶行靠悟性,大卫此时顺着感觉走,是此时他的悟性不通吗?
你的问题问的挺好,我好像一下子都答不上来了。大卫顺着感觉走,这个时候是他的悟性没起作用。大家可得知道,就这么一小段时间,他的悟性失灵了,就是人失控了,结果顺着感觉走了。那这种感觉会强烈到什么程度呢?强烈到他自己都控制不住。
但事实上一个人的感觉是通过悟性来管理的,如果一个人的悟性常常在管理着自己,那就好办了。最怕的是什么呢?最怕的就是悟性突然失灵了,就在这个时候脑袋不能思索了。有一个很脏的词叫做用下半身思考,听起来是一个很恶心的词,所以悟性就不通了。我鼓励大家要常常管理好自己,要知道自己所做的都是要付代价的。
Q6:老师,神给大卫那么多女人,他还贪婪人的妻子,如果他跟神要,神还是会给他吗?
那当然,神肯定会给他的,但是神会用祂的办法给大卫,神的名就不会被亵渎。
Q7:老师,我常常跌倒,常常悔改,现在开始有得胜的苗头了。神是不是知道我在努力得胜?
神当然知道!所以说我鼓励大家要相信神,神是使我们得胜的神。有时候你的牧者把你修理了一顿,那本身也是对你最好的激励。别给自己找借口:哎呀,我现在挺不错的。你的牧者一说你,你就说:你应该看到我的进步。其实看到或者看不到又有什么用呢?
你自己要开始说:我要再加把劲!但是你非得讲:你怎么看不到我的进步呢?好像人家非得要看到你的进步似得。你自己认为的进步跟你牧者在你身上的判断,可能还不太一样呢?你说:我已经用了我所有的力气了!你的牧者说:我怎么觉得你只用了一小半呢?
Q8:老师,我信主已经十四年了,一直还在欠账,不知道是哪方面的原因?
人心里贫穷,本身就招贫穷的辖制。怎么样才能拥有富有的心态呢?如果我们的眼睛一直盯在所欠的债上,我们就很需要钱,满脑子里都是钱,越这么想就越穷,越穷就越这么想。我为你祷告也不好使。这个本身就是悟性上不通的缘故,就是我们对钱和事物没有一个清晰的认识。
我们做事总想抓住一个机会,总想着一下子赚到一大笔钱,然后把欠债还上。人就是不想脚踏实地,不想一件事一件事的去做,就想着突然间就蒙神的恩典,想着一下子就翻转了。财务不翻转,其实是一个很清晰的证明,就是我们骨子里的东西还是很脏的。我把这事扣在你头上,你也不用气馁,因为气馁不是解决问题的办法。除非我们开始好好的去调整和改变自己,因为神不会搞错,鬼也不会搞错。
Q9:老师,悟性通透就不会被控制,但有时候也会跌倒,感觉来了的时候要如何抵挡呢?
悟性好也会跌倒,那咱就不要悟性了吗?如果悟性不好,那得跌倒多少次?我们都要好好的提升自己的悟性,就会对我们所经营、所管理的事物有很清晰的认识。如果我们不认识就瞎整,瞎整完了以后,累得够呛,时间也花了,我们还是没整明白,也没时间把悟性整通,那不是更糟了吗?
要怎么去抵挡感觉呢?要明白感觉到底是什么,比如当人家冒犯了我们,我们就会有被冒犯的感觉。如果我们认为被冒犯是很正常的,人家看不起我也没关系。昨天就有这么一段对话,我说:你这么看得多low啊!他给我来了一句:我没那么low啊!然后他反过来说:你这么看也很low啊!我说:我好像比这个还low呢?我一说:你不行。你说:我在别的地方还行呢!结果状况变得更糟了。
如果你说:我看你像条狗。我说:你可真抬举我,我就是一泡狗屎。对方反倒没处下手了。这就是悟性!人的感觉是什么呢?人家一说你是条狗,你马上回应说:我不是。那你是什么呢?怎么也得整只猫吧?这就叫悟性不好。人悟性不好,里面的感觉就会常常来,而且会把感觉越弄越糟。
像我这种人,感觉是很少来的。人家瞪我一眼,我就觉得人家应该瞪我;人家吐我一口吐沫,我觉得正常!我哪有什么感觉?如果你的反应是:你不能吐我,那不就麻烦了吗?所以人的感觉跟悟性紧密相关!如果你觉得自己不能被冒犯,那么一被冒犯就会难受,如果你认为自己可以被冒犯,冒犯了也没关系,就是觉得自己像一泡狗屎,人家看不起自己也很正常。
很多东西都是跟悟性紧密相关,人悟性通透的时候,那个感觉就不会有。当然了,有一些我们在悟性上还没有整明白的,这些事要早点跟神说,求神加倍的给我们。有的人越是卑微就越好强,而有的人越是有本事,反而越不好强。
我鼓励大家,别把自己看的那么重要。如果把自己看的很重要,这些不好的感觉就会常常来。如果把自己看成狗屎,所有的事都是恩典,那不就没事了吗?有的时候我跟人说:你看你这有问题。人家说:我那儿挺好的。我说:好傻啊。结果人家听完后连晚饭也吃不下去了。如果人的悟性够好,他就不会这样去思考,也不是带着这套逻辑。
我希望大家都能够得着喜乐,开始做一个喜乐,智慧,聪明的人。
서론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무엘하》의 이 본문 속에서 귀신을 보았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귀신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귀신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귀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전설에 나오는 유령처럼, 머리도 없이 흰 옷자락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보기에 아주 무서운 모습일까요? 저는 사람들이 종종 어느 장소에서 무언가를 보고 너무 무서워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정말 그렇게 생겼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분야를 연구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연구해서 얻은 결론은 귀신은 그리 무섭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사실 공포 영화를 보면 귀신에 대한 묘사는 다 이렇습니다. 시퍼런 얼굴에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귀신이 정말 그렇게 생겼을까요? 사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모습일 뿐이며, 사람이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제가 연구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결코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귀신은 영화 《화피》에 나오는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말도 천사보다 더 달콤하게 합니다. 만약 귀신이 겉보기에 무섭게 생겼다면 그것은 귀신답지 못한 것입니다. 보통 귀신은 무슨 일을 할까요? 바로 사람을 미혹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일단 미혹되면 귀신은 곁에 서서 비웃고, 사람은 스스로 패망의 길로 걸어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묘사하는 귀신은 다 무섭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의 모습도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귀신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하는데, 죽는다고 해서 우리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머릿속으로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5남매 중에는 겁이 많은 아이도 있었고, 담대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출근하셔야 하고 할 일도 많으셔서 우리 5남매를 집에 두고 문을 잠근 채 나가셨습니다. 이 5남매 중 겁이 많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쉿, 들어봐!”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는데, 덜컥,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나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봐! 귀신인가? 귀신이다! 너무 무서워서 5명의 아이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스스로를 겁준 것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사물의 본질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저는 시체를 보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바로 마귀가 뿌리는 거짓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 어릴 적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 소리는 사실 영계에서 온 것입니다. 겁 많은 아이가 모두에게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스스로 상상해 낸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고, 5남매는 거기서 벌벌 떨었습니다. 누군가가 “쉿! 무슨 소리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세계의 일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통해 사람을 속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몸에 온갖 감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 통증, 가려움, 답답함, 낙심 등 이러한 것들은 다 귀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매우 교묘하여 아주 기이한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머리가 아픈 것은 그 사람이 정말 머리가 아프기를 원해서일까요? 사람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머리가 아픈 것은 두통의 영이 왔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의 영이 온 것이고, 마음의 얽매임과 번민은 번민의 영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느낌들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믿게 하려고 쏘아대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는 또 성적 충동이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성적 충동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성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매우 강렬한 성적 충동이 찾아오는 것, 이것은 대단히 영적인 일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다윗에게 일어났을까요? 다윗은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잠을 자다가 깨어났습니다. 그가 일어난 후, 내면의 감각이 통제되지 않더니 갑자기 아주 강렬한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마침 그때 밧세바가 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가릴 생각도 없이 그대로 목욕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배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의 일이 우리의 세상일을 결정한다
이 말을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일을 결정합니다. 그 사람이 불운하든, 복을 받든, 순탄하든, 순탄하지 않든 많은 일들이 영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꼭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늘 이유를 찾습니다. ‘이것은 사고였어, 저것은 우연이었어, 이것은 어쩌다 일어난 일이야.’ 하지만 사실은 영적인 세계의 일이 세상에서의 우리 일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본다면, 다윗이 해 질 녘까지 자다 일어나 보니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귀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는 데 혈안이 되어 하나님 앞을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가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주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니 그가 당연히 주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이냐?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사탄이 말합니다. “제가 그를 한번 시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참 난처하셨습니다. 사탄이 시험해보지 못하게 하면 다윗이 견뎌낼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시험하게 했다가 견뎌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마땅히 견뎌낼 것이라 믿기로 하시고, 마음속으로 ‘다윗에게 행운이 있기를!’ 하고 바라셨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탄은 하나님께로부터 허락을 받아 한 편의 소동을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밧세바가 뜰에서 목욕을 하게 만들고, 동시에 밧세바의 뇌리에 일련의 생각을 불어넣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의 머릿속에 쏘아 넣는 거짓말은 USB에서 하드디스크로 복사하는 것만큼이나 빠릅니다. 특히 요즘 기술은 M2까지 발전하여 1초에 7GB씩 복사될 정도로 엄청나게 빠릅니다.
마귀의 메시지가 순식간에 밧세바의 머릿속에 들어갔고, 밧세바는 그럴듯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윗 곁에서 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 다윗이 오후 네 시에 일어났으니, 오늘도 대략 오후 네 시쯤일 거야. 이 시간에 맞춰 목욕하러 가야지.’ 귀신이 어떻게 연출하는지 보이십니까? 이토록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다윗은 전날 밤 내면에 일어난 강렬한 감각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주 늦게서야 잠이 들었고, 오후 네 시까지 푹 잤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절묘합니까? 그가 옥상에 올라와 바라보니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이 보였고, 그러자 그 감각은 더욱더 강렬해졌습니다. 이 감각이 귀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알아보아라. 저 여인이 누구 집 여인이냐? 가서 데려오너라.” 옛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격’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이렇게 행하자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은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크게 모독할 기회를 얻게 하였습니다. 이 장의 주제는 바로 《원수에게 크게 모독할 기회를 주다》입니다. 다윗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의기양양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말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주께서 기뻐하시던 다윗입니다!” 결국 사탄은 모독할 기회를 얻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평생에, 당신이 자신의 감각에 순종할 때마다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고, 하나님의 영에 순종할 때마다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감각에 순종하다가, 마침 그때 그토록 절묘한 순간을 만나 감각을 통제하지 못한다면—다윗과 같은 영적인 고수라 할지라도 감각을 통제하는 문제에서 한순간에 어리석어질 수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족이 천추의 한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육체는 영계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 안에 시기심이 있다면, 그 느낌은 분명히 귀신에게서 온 것이며 당신의 육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몸에 감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대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원치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평생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셔서 주님 앞에 열납되게 하옵소서.”
다행히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각과 느낌은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영계로부터 사람 안에 생겨난 이러한 감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이 됩니다! 성령은 악령과 다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정욕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의 악행을 죽이는 것은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지각(깨달음)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지각이 분명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엉망이 됩니다. 지각이 분명하지만 능력이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능력을 더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느낌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느낌을 따라가는 것은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자매 여러분, 경쟁하는 마음이 듭니까? 듭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듭니까? 듭니다. 남과 비교하고 이기려는 승부욕이 듭니까? 다 듭니다. 이러한 감각들은 사람이 육에 속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감각에 순종할 때마다 원수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기회를 내어주게 됩니다. 느낌을 따라가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에서는 느낌을 영적인 세계의 일로 규정합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화인명정신학에서는 때로 어떤 것들까지도 다 느낌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당신은 “마음에 평안이 느껴져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안을 느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합도 전장에 나갈 때 마음에 평안을 느꼈지만, 나가자마자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독 느낌을 좋아하지만, 느낌이라는 것은 참으로 부패하고 너무나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느낌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느낌을 믿는 것을 거의 혐오할 정도입니다. 왜일까요? 느낌은 영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느낌은 육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지혜와 총명(지각)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느낌을 따라갈 때도 우리 안에 양심은 남아 있어 옳고 그름을 분명히 판단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것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느낌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을 따라가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영계의 일이 세상일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우리가 걷다 보니 지금과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과거에 심은 것을 지금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금부터 축복의 씨앗을 심고, 성령을 따라 씨를 뿌린다면 장차 반드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느낌을 따라 씨를 뿌리지 마십시오. 느낌을 따라 씨를 뿌리면 그 느낌이 당신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 또한 매우 영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암몬 사람의 칼을 빌려 우리아를 죽이고는, 아무도 모르게 계획이 아주 치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과 귀신 앞에서는 완전히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여전히 의기양양해하며 우리아가 죽었으니 그의 아내를 데려와 아내로 삼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녀가 독신이 되었고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나단이 찾아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에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사무엘하》 12:1-6)
다윗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안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다윗이 “허, 그거 아주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면 양심마저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양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때 다윗의 양심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양심은 개에게 먹여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아직 양심이 남아 있는 것을 보시고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양육하는 사람이 양심조차 없어서, 남의 것을 빼앗고 우리아까지 죽여놓고도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 안에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이것 빼앗아 먹고 저것 빼앗아 먹으면 어때’라고 여긴다면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는 참으로 비극적이며, 자본이라는 것도 꽤 가증스럽습니다. 자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자본을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수많은 대리인을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정부의 절반 이상이 이러한 부자들의 대리인이 되어 오직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자본가가 언제 백성을 돌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 세상 재산의 98%가 2%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면 백성들은 비참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사람들의 양심이 완전히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벌지 않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여기며, 부도덕한 일을 도덕적인 것으로 둔갑시킵니다. 자본가들이 조금 덜 벌고 백성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이란 대단히 강력하고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론적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다윗이 ‘내가 왕인데 어린양 한 마리 빼앗은 게 무슨 문제인가? 백성들을 좁은 닭장 같은 집에 살게 한들 무슨 문제인가? 내가 집값을 올린 게 무슨 문제인가? 그렇게 높이지 않으면 오히려 부도덕한 것이지’라고 생각했다면 다윗은 구제불능이었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지식을 가져야 하며, 온종일 남의 말만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게으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윗에게 양심마저 없었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고, 나단의 사명도 그것으로 종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원수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짓밟혀 완전히 파멸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안목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면, 돈은 매우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람 속에 아직 양심이 남아 있는가? 양심이 남아 있다면 기회가 있지만, 양심이 없다면 기회는 없습니다. 다윗 안에는 아직 약간의 양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사무엘하》 12:5-6)
나단은 다윗의 반응을 보고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 다음 단계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사무엘하》 12:7-9)
다윗에게는 아직 양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남아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회개해도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수 앞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독을 받으시게 하여 체면을 완전히 깎아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언제나 풍성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지 않아 우리가 땡전 한 푼 없이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방탕하게 행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행하기를 원치 않으시며, 우리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7-8)
이 말씀의 의미는 ‘만약 네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다면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첩을 하나 더 두고 싶다고 말했다면, 내가 진작에 배나 더 주었을 것이다. 아내가 하나 더 필요하거나 둘 더 필요하다고 했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하나님께 구했어야지, 결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10)
한순간의 실족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당신이 다윗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칼이 당신의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손에서 수많은 좋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입고 나서도 마귀를 따라갑니다. 마귀가 한번 시험해보니 완전히 쓸모없는 자라 마귀조차 멸시하며 ‘너는 너무 형편없어서 점수를 줄 가치도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는 쓸모없는 자니 셈에 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에게서 마귀의 시험이 성공했을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에게서 정말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대단히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대적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더군요. 그래도 저는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여전히 자멸의 길을 가며 다른 이들과만 어울렸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느낌을 따라가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감각과 느낌이 너무 강렬하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당신의 느낌 중 많은 것들이 당신을 파멸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농락당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까지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암에 걸리기 쉬운 성격을 가진 분들은 조심하십시오. 암이 자라난 후에야 그것이 무서운 줄 알고 그제서야 “하나님, 저를 고쳐주소서!” 하고 부르짖지 마십시오. 칼이 집안에서 떠나지 않고 심판이 이미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때는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고 경외하며 더 이상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자매들은 참 엉뚱하게도 《성경》을 상고하면서 일부일처제 논쟁으로 빠져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여러 아내를 두었고, 그가 더 원했다면 하나님께서 몇 명을 더 주셔도 상관없었습니다. 다만 은밀하게 도둑질하듯 남의 남편을 몰래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는 파렴치한 짓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네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다면, 하나님께서 진작에 배나 더 주셨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넘어져서 몰래 악을 행하고 빗나간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크게 모독할 기회를 얻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배나 더 주었으리라.” 때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우리 형제자매들이 부유할 때 기쁜 마음과 즐거운 뜻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그것은 다 주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더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원수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제 마음도 답답하지만, 하나님의 답답하심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두자니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유하게 해 주자니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원수를 섬기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길을 좀 터드릴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어찌해야 할지 모를 지경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하나님, 주께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본래 지혜가 있으시지만, 지혜가 있으셔도 참으로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지난 세월 교회에서 사역하며 제 마음에도 많은 탄식이 있었습니다. 듣기 거북한 말일지 모르지만, 때로는 마음이 굳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미련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유하게 하시면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가난하게 하시면 돈을 사랑하니 참으로 다루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도 앉기 쉽지 않은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8)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에게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지혜를 뛰어넘는 일이라 우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평생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 역시 어느 날 제 느낌을 따라가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갑절로 더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제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면 원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족했을 때, 회개하더라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
다윗은 당시 아주 잠깐 자신의 감각에 순종하여 그 일을 저질렀고, 결국 점점 더 빗나가 우리아를 죽이고 사람의 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넘어지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당신이 넘어질 때마다 당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씩 모독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언제 넘어지든, 언제 함부로 말하든, 언제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든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이 행한 일로 인해 모독을 받게 됩니다. 사람은 그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때로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당신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 아무리 권면해도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느낌을 따라 실족하는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괜찮아요, 회개하면 되죠”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회개할지라도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사무엘하》 12:13-14)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사무엘하》 12:11-12)
사람도 모르고 귀신도 모를 것이라거나, 하나님도 모르고 귀신도 모를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악을 행하자 보응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 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훗날 수많은 재앙을 겪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 왜 그러시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받게 했기 때문에 그러한 재앙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는 씨앗을 계속해서 심지 마십시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회개했을지라도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자신의 마음과 감각을 철저히 다스려 더 이상 정욕을 따라 썩어질 것을 거두지 말고 성령을 따라 영생을 거두십시오.
다윗이 치른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은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기도할 필요도 없었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일들 중에는 기도해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자기가 심은 것을 자기가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명명백백하게 설명하면서도, 정작 자기 차례가 되면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란 본래 그렇습니다. 자기 일이 되면 왜 이토록 깨닫지 못할까요? 다윗은 그것이 남의 일인 줄 알고 “그는 마땅히 네 배나 갚아야 하며, 이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았을 때 멍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을 오직 남에게만 들이대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양심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어야 했습니다.
한 부부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은 제 단점을 볼 때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제 장점을 볼 때는 축소경을 들이댑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요술 왜곡 거울로 보지 않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축소해서 보면 최소한 왜곡되지는 않지만, 왜곡 거울로 보면 흉측하게 비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부는 서로를 그렇게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현미경 파는 사람만 돈을 벌었으니, 이런 일을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넘어지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결코 양심을 남에게만 쓰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몇 가지를 나누었습니까? 첫째, 영계의 일이 세상일을 결정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귀신은 하나님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둘째,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없는 자는 셈에 넣지 않으며, 누구도 그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풍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풍성함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넷째, 네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다면 하나님께서 배나 더 주셨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다섯째, 실족했을 때 회개하더라도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실족하여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난 후의 일입니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사무엘하》 12:15-16)
매우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바닥은 타일이나 대리석이 아니었고 아마 나무 바닥도 아닌 단단하게 다져진 흙바닥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앉았다가, 누웠다가, 무릎을 꿇었다가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아이를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종들을 보내 아이가 나았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닷새째 되던 날, 다윗은 너무나 다급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느라 땅바닥의 흙이 진흙탕이 될 정도였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아이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매달렸습니다.
신하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다윗에게 감히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수군거리며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신하들이 대답했습니다. “죽었나이다.” 그러자 다윗은 곧 일어나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워있던 바닥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이가 죽자 오히려 일어나 기뻐하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는 매우 흥미로워서 신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의 사고 체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사무엘하》 12:21-23)
이것이 바로 다윗 내면에 있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포하신 심판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칼이 그의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집안에서 재앙을 일으켜 그를 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이가 죽어가자 다윗은 그곳에서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으니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죽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니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는 다윗의 뼛속에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명명백백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나 역시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한다.’ 사람이 생사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것은 무너지며,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위, 가정, 생사를 모두 초월하여 꿰뚫어 보았고,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깊이로 많은 것들을 통찰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온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일의 결과는 본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받게 만든 것이었지만, 다윗은 전세를 역전시켜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금 높임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로 인해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다윗은 사람의 생사를 초월하여 보았고, 훗날 다윗은 또 다른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아도 죽었고,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서 잉태되었던 첫 번째 아이도 죽었습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일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훗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에게 또 다른 아이를 주셨고, 하나님께서도 그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설령 실족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모독받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심은 것을 지금 거두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저지른 일은 결코 옳지 않았지만, 그 결말은 매우 좋았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솔로몬이라는 아이를 또 낳아주었습니다. 훗날 다윗과 함께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요압이 군대를 이끌고 암몬 사람의 왕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요압은 홀로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고 다윗을 불러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하여 암몬 사람의 왕도를 점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왕관, 즉 금 30킬로그램이 넘는 왕관을 빼앗아 다윗에게 씌워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30킬로그램이 넘는 모자를 쓴 것은 마치 형벌을 받는 것과 같았습니다. 누가 이렇게 무거운 모자를 쓰겠습니까? 손에 50킬로그램짜리 큰 칼까지 쥔다면 목이 얼마나 굵어야 그런 모자를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영광일까요? 《수호전》에 나오는 목에 차는 칼(목가)도 이처럼 무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발이 부서질 정도입니다.
다윗은 승리하였고, 암몬 사람들은 다 다윗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십시오. 내일 또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 우리 내면의 감각을 새롭게 대적하십시오. 우리 가운데 넘어진 자가 없겠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비록 심판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의 주제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려줍니다. 원수에게 하나님을 크게 모독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이것은 영적인 통찰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우리로 인해 늘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갑절로 더해지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