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答疑引言
大家好!我把《使徒行传》第一章、第二章的历史又挖了一遍,把整个信仰的误区又给大家梳理了一遍。我可能不一定整的那么好,但是我已经尽很大的努力了,最后得出来的结论就是要在悟性上满心认识神!这事是确定的。大家要逐渐的从懒惰的状态里头走出来,无论你做什么,悟性上一定要通透。
悟性要怎么样才能通呢?就是要做了才知道这东西做的到底对还是不对,然后咱就赶紧调整,把它做对。我不像一些人,做对了或者做错了都不知道,比如建立的是一间不像耶稣基督的教会,没有神的荣耀。那在干什么呢?我整个俱乐部或者校友会多好啊!我挑选几个校友会的领导,吃喝玩乐也挺好。既然建立了一间教会,既然建立了一家企业,那咱们就把这个东西给吃透,把它的经典给整清楚。
Q1:圣灵充满才是开始,很多教会都没有圣灵充满,那不就是连开始都没有吗?
你讲对了。耶稣说:你们什么也别干,单单地等候圣灵降在你们身上,然后你们才出去传福音。但是很多人连开始都没有,连门都还没开。我这样说可能会冒犯很多人,但是我为什么这么说呢?因为这是耶稣基督的吩咐!耶稣基督的吩咐很简单,耶稣说:你们什么也不要干,就在耶路撒冷等候,只等到圣灵降临在你们身上,你们才能得着能力。
耶稣说的这事,人有没有照着做呢?没有!那这些教会在做什么呢?他们为什么论证了半天耶稣基督是主,但是耶稣基督的话却不听。我怎么想也没想明白,很多人整完了以后把教会搞得乌烟瘴气,还在那争斗。我也不知道该怎么说了,我看这样的教会就算了吧!
我宁可去做管道工,通一通别人家的下水道。我一天整两个下水道,一个两、三百,整俩就四五百。我养活自己不成问题,一个月整个一万八千。我是一个牧师,我不整那些乌烟瘴气的东西。
所以说他们都没开始,我也不知道他们要干什么。这些人整的还挺兴奋的,他们的确也是得到众民的喜爱,然后在家中掰饼,存着欢喜诚实的心用饭,在一起赞美神。后来吸引来的人越来越多,来的是饭桶也没关系。没有圣灵充满怎么治死肉体的恶习?教会里都是一群狼虫虎豹、牛鬼蛇神,还有牧师被会友告上法庭的,什么事都有!更不用说医病赶鬼了,连能力都没有还赶什么鬼呢?咱们干的要像耶稣才行。
Q2:老师,传统教会都在吃吃喝喝,他们认为是在联络感情,一有事就要通过聚餐来商量,怎么看待这种做法?
这种做法不用问我怎么看,你要问耶稣怎么看?耶稣没干过的,他们干一堆,那就干吧!我们看不看都没关系,我们只看自己整的对还是没整对。
Q3:老师,跟过耶稣的门徒们为什么就没有认识主的呢?当初耶稣呼召他们的时候,他们都是撇下一切来跟随主的,他们怎么就没有明白呢?
特别好的一个问题。彼得在面对耶稣的时候,耶稣说:你叫彼得,我要我的教会建造在磐石上,阴间的权势不能胜过他。我要把天国的钥匙给你。结果彼得转过身来就跟耶稣说:主啊!你不能去受死埋葬,也不能第三天从死里复活。耶稣转过身来,对他说:撒但,退我后面去吧!说的什么意思呢?是不是撒但住在彼得里面呢?其实说的就是他体贴人的意思,不体贴神的意思。
耶稣的那些门徒都是撇下一切跟随主的,怎么就没有明白的呢?他们虽然跟着耶稣,但人的意思还是在他们里面占了一个上风。耶稣对他们说:圣灵要降在你们身上,你们就必得着能力,然后为主耶稣做见证。做什么见证呢?第一、做医病赶鬼的见证,从神那里得着能力。第二、做治死肉体邪情私欲的见证,就是我们里面的逻辑体系要彻底地改变。
当时门徒们怎么就撇下一切跟随主的呢?他们还以为是跟着陈胜吴广打天下呢!还以为跟着耶稣打天下恢复以色列国,然后等耶稣做了以色列的皇帝,他们还能在皇帝面前混个一官半职的。那些跟着洪秀全、跟着刘邦打天下的人也是这么想的,跟着刘备得三分天下的也是这么想的,那是真的撇下,也真的是很厉害。
所以门徒们在耶稣复活升天的时候,就问耶稣说:主啊!你复兴以色列国是在这个时候吗?你看,耶稣都从死里复活了,他们还在想人那点屁事呢!是因为他们整个人都被活着这点事占据了!大家一定要知道人与生俱来的或是天然的看法,没一样是有用的。所有的东西都要经过学习,要了解神怎么说,然后才知道什么是有用的。
Q4:老师,怎么对付像彼得一样的装假?脚踏实地去做事呢?
一个人对自己所做的事必须精通,如果业务不精通,你就会玩假的。如果你对你所干的活是非常清楚,能讲得明明白白,你用得着作假吗?如果你要建立教会,你一定要对建立教会的东西很清楚;如果你做一个会计,你一定要对会计很清楚;如果你做一个律师,你一定要对律师的业务很清楚。如果你不清楚怎么办?你就会忽悠,玩假的!为什么呢?因为爱面子。
彼得戴着一个大使徒的帽子,却还没弄清楚就瞎干。干完了以后,人家说:你没干对。彼得就说:我们亲爱的弟兄保罗,他所写的书信,有一些难懂的,如果你们强解就自取沉沦、自取灭亡。原来是因为保罗的书信里头说:彼得玩假,爱面子。所以彼得给自己整了一大堆遮羞布,说:你们不能强解,人总是有软弱的。彼得还不如说他自己当时脑子混乱了,后来又悔改了。
Q5:老师,有一个姐妹说她在祷告时能看见异像,也能和神对话,自认为这是被圣灵充满了,是怎么回事呢?
这灵界的东西还真说不准是谁给她看的,算命先生也挺准的。没有被圣灵充满,被邪灵充满也够厉害的。所以说不管看见什么异象,别追求这个东西。如果你要追求的话,就追求不断地在肉体上对付自己的邪情私欲。
Q6:布永康在非洲布道和彼得的布道有什么区别?
没有带着一个牧养的心态去建立耶稣基督的教会,就好比是一个嫖客,只谈恋爱不结婚,和耍流氓没什么两样。那我是不是在说布永康呢?不是!但是他有没有牧养呢?没有!那你让我怎么说?我们得知道神的心意到底是什么?神的心意是建立祂荣耀的教会!
建立了一个布道团,那是个什么玩意儿,我到现在也不理解。布永康和彼得干的那玩意儿我也不太理解,但是你问我了不了解耶稣基督的心意,那我绝对了解。耶稣基督的心意就是建造耶稣基督的身体,建造神荣耀的教会,人被神的灵充满,让神的灵得着满足。你问我布永康和彼得干的是不是神让他们干的?我也不知道。人有自己的干法,但如果要让我干的话,我一定要干到神的心意里去。至于布永康和彼得所做的是不是神的心意,我真的觉着不是。
Q7:老师,为什么彼得跟耶稣在一起,却如此的体贴肉体,看不透神的心意呢?是因为他们一开始跟随耶稣动机和心态就不对吗?
这个彼得跟耶稣在一起,并不代表他对付肉体对付的那么透彻。一个属肉体的人,里面天然的东西不讨神的喜悦。意思就是说你开始选择了跟随耶稣,但是和你能不能够一生一世跟随耶稣、效法耶稣是两回事。哪怕是海誓山盟跟随耶稣,那也没有用!我们还是脚踏实地的对付自己的肉体吧。
人里面有一套自己天生的认知,那个东西就是人的逻辑体系,这个逻辑体系在人的里面扮演了一个重要的角色,就是撒但在人身上运作。魔鬼常常欺骗人,不是用刀逼着你去杀人,是用一个谎言就把你干掉,我们不能再活在谎言里面。那些把耶稣钉十字架的人,他们还以为是在侍奉神呢。
Q8:老师,我的孩子在上幼儿园,六一儿童节表演节目时穿的衣服上有龙的图案,我就把它丢了,老师要求上学时还要穿上,这是宗教吗?
不宗教。你就告诉老师衣服坏了。
Q9:老师,在我以前的教会里,他们教导的是:先要认罪悔改,然后圣灵才能充满,这里面有误区吗?
这里面缺少的是悟性上满心认识神。光有圣灵充满能够解决什么问题?解决了圣灵充满,但是却不能解决人在悟性上的问题。人要在悟性上满心认识神,人要寻求,神才能带领。人不去读神的话,然后就靠圣灵充满,邪灵要忽悠你的话,也够你受的。
Q10:老师,圣灵充满就得着能力,这个能力是治死肉体恶行的能力吗?
那当然。如果你读《罗马书》和《加拉太书》,你就会知道圣灵的工作就是治死肉体的邪情私欲。在这个过程当中,圣灵会给你能力,会有神迹奇事随着,但是也不能取代你治死肉体的恶行。
Q11:老师,圣灵充满得着能力,为主作见证,但传统教会没有圣灵充满,也有一些见证,这是怎么回事?是因为信心吗?
我要反问你,庙里还有见证呢。庙里的见证比传统教会的见证还要多。灵界是真实的,不要以为那个东西不合乎《圣经》,就不能够产生一些见证,不是这样的,肯定还会有一些。那些见证是迷惑人的,所以人就觉着很困惑:这个教会没有圣灵充满,怎么也有见证呢?有困惑那就对了,魔鬼的目的就是让人困惑。
Q12:老师,我总觉着爱神不够,如何更专心地爱神?
《圣经》说:爱神就谨守遵行祂的命令。怎么去遵行祂的命令?那你就先去读《圣经》,读了就去落实,这就叫做专心爱神。
Q13:老师,圣灵充满跟追求圣灵有什么区别?
追求圣灵就是追求圣灵充满,所以圣灵充满和追求圣灵充满是一回事。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전하는 내용이 전통 교회의 목회자들이 전하는 내용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신학적 논리라는 매우 중요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를 보면, 사람들은 쉽게 베드로가 잘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왜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엉망이 되고, 점점 더 무너져서 결국에는 완전히 형편없어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신학과 대조해 보면, 누가가 은밀한 의도를 품고 《사도행전》을 기록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칫 잘못 보면 그가 베드로를 칭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주의해야 합니다. 이 장은 사실 《성령 충만으로부터 시작하다》를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 안에서 성령 충만은 단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성령 충만을 일종의 신비주의처럼 전하면서, 마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미 거듭나 구원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제가 깊이 연구해 본 후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치 초등학교에 갓 입학 등록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 후 간신히 졸업한다 해도 고등학교가 있고, 대입 시험을 치러야 하며, 아직 직장에 취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막상 직장에 들어가 보니 그 세월 동안 배운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실제 업무를 해 보니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단지 초등학교 입학 등록 정도로만 묘사할 수 있을 뿐이며,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누가는 어떤 관점을 나타내려 했는가
《사도행전》은 누가가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던 기간에 기록한 것으로, 당시 바울의 신학 체계는 이미 완전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보내졌을 때, 그가 세운 교회와 그의 전체 신학 체계는 이미 완숙한 단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는 모두 아주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때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나타내고자 했던 관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전서》의 몇몇 구절에는 게바, 곧 훗날의 베드로와 아볼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어떻게 혼란을 일으켰는지를 묘사합니다. 누가가 이 역사를 기록할 당시의 상황에 따라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 이후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 나간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교회가 사도 바울의 시대로 발전해 가면서, 사도 베드로는 사역을 하면 할수록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런 설 자리가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기업에서 일할 때, 일하면 할수록 결국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일을 꽤 잘하는 편이라, 사장이 맡긴 일이라면 반드시 성사시켜 냅니다. 주변 환경이 어떠하든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끝마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외곽의 아주 변두리에 있었을지라도, 일하다 보면 점점 중심에 가까워지고,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중앙에 서 있게 됩니다. 저는 교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을 할 때도 이렇게 해왔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요란하게 시작했지만 결과는 미미했습니다. 그는 본래 이방인의 사도였으나, 나중에 이방인 교회는 그와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종종 문제를 일으키러 다녔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가서도 그렇고,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한가하게 외식(위선)을 떨기도 하면서, 일하면 할수록 결국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잘못 행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며, 처음부터 많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은 이러한 일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사도 바울이 아주 미미한 시작에서 출발하여 점차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결국 신약 《성경》 전체가 거의 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바울은 참으로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살면서 누가와 같은 《사도행전》을 쓰려 했다면, 이 베드로를 어떻게 묘사했겠습니까? 먼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따라 묘사해야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이르러 누가가 《사도행전》을 쓸 때 이미 답은 명확했습니다. 베드로가 잘못했다는 것이며, 누가는 베드로가 어떻게 한 걸음씩 그토록 황량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사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지난번 성경공부 때 어떤 분이 “설마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잘못 기록되지 않았으며, 《성경》을 읽을 때 결코 잘못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저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시대 속에서 한때 매우 위세를 떨쳤던 인물, 마치 항우처럼 결국 오강에서 자결했던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이전에 항우가 행했던 많은 일, 예를 들어 홍문연 같은 곳에서도 그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누가가 나타내고자 한 관점은 베드로가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이어서 잘못 위에 잘못을 더하여 털끝만 한 차이가 천 리의 오차를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누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관점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결코 이 일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누가는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가 이 구절을 기록했을 때는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지 약 3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는 이 길을 이미 20여 년 동안 걸어왔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초창기 성황을 사실 그대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한 걸음씩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그 원인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결코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결말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행전》 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이 말씀은 매우 분명하게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 하셨으며, 권능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논술에 따르면 성령 강림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성령이 사람에게 임할 때, 육신은 사실 여전히 살아있고 오히려 시퍼렇게 살아서 날뜁니다. 우리 중 몇몇 교구장님들은 육신을 아무리 누르려 해도 눌러지지 않고, 죽이려 해도 죽지 않습니다. 오늘 간신히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 놓으면 내일 다시 살아나서, 매일 죽음에서 부활하는 놀이를 하듯 육신이 날마다 부활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입니까?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 때도 사람의 육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며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자신을 바쳐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도무지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참으로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육신에 속한 악한 행실을 죽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잠시 후 제 육신이 다시 살아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방언 기도는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며, 마음(지각)에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이 방면에서 단순한 균형이 아니라 온전함을 추구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권능을 얻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힘써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발을 땅에 딛고 착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착실하게 일하기는 싫고 그저 신나게 놀기만 원하는데, 그것도 괜찮습니다. 놀려면 아주 제대로, 죽어라 노십시오. 그 후로는 저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저 역시 여러분을 상대하기 귀찮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상대하는 순간 속이 괴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게 하려는 것이지, 원숭이 같은 꼴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 기도와 성령 충만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도 사도 바울이 전도하러 나갈 때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지금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로서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는도다.” 바울이 그곳에 갔을 때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교회를 세우고 떠난 후에도, 고린도 교회는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2-14)
바울이 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것을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여러분이 실제적인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해 보아야만 당신이 겉치레를 하고 있는지 거짓을 행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허풍이나 떨고 사기를 치려 한다면 바로 저라는 쇠판을 걷어차게 되어 더 이상 사기를 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가히 ‘허풍 방지 핫라인’의 창시자라 할 만합니다. 서른 몇 살 때 제 직급의 동료들이 회의 때마다 사장을 속여 넘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사장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직원들이 저를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바쁘다고 말하기만 해도 저는 무언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들을 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단지 시작일 뿐인데, 베드로는 성령 충만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했으니 이것이 착각입니다. 이번 장에서 저는 베드로가 빠졌던 몇 가지 함정을 하나씩 분석하여 여러분이 그곳에 빠지지 않도록 돕고자 합니다. 저는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인지 보십시오. 베드로가 처음에는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그에게 기회를 주셨으니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함정: 예언, 환상, 그리고 꿈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5-13)
베드로가 나서자 모두가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하고 있었고, 겉보기에는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어떤 이는 앞뒤로 흔들리고 쓰러지고 비틀거리는 등 온갖 모습이 다 있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이어 베드로가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17-21)
여기에 예언, 환상, 꿈이 등장합니다. 과거 제가 지역 교회에서 구역장을 맡고 있을 때, 그 목사님은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우리 구역의 한 구역원은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한번은 돈을 빌려 목사님을 따라 대만까지 환상을 보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돈만 다 날리고 환상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며 제게 울며 하소연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관절염으로 온몸이 아픈 사람이 저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했고, 결국 관절염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영문도 모른 채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알아보니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어떤 선지자가 저를 조심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선지자라면 왜 진작 그의 관절염을 고쳐주지 못했을까요? 제가 기도해 주어 고쳐놓았더니 도로 가서 선지자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환상, 예언, 꿈, 성령 충만이 신비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환상은 더 터무니없어서, 온갖 난잡하고 어지러운 일들이 다 환상과 꿈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비전(환상)이 필요하며, 우리도 매주일 우리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훗날 제가 발견한 것은, 교회 안에서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고 꿈을 꾸는 일로 인해 온통 난장판이 되는 일이 너무나 많았고 베드로 역시 거의 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예언, 환상, 꿈,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것을 결코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추구하려거든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오로지 환상과 꿈만 좇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면, 차라리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단이 은사주의 교회가 이런 난잡한 짓을 벌인다고 비판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의 치유와 축사는 많은 은사주의 교회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복음주의 교회도 우리만큼 《성경》을 명확하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예언이나 환상, 꿈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며, 온전히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닮지 않는다면 이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표적을 행하여 큰 권능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둘째, 제자들을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언과 환상, 꿈과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으면 거듭나 구원받은 것이라는 말을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듭나 구원받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고, 어떻게 보아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이므로 먼저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육신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육신의 악한 습관을 죽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죽일 수 있는 권능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죽였다가도 다시 살아나는데,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논조는 훗날 많은 농촌 교회를 세우는 이들의 함정이 되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영이 중국 땅에 운행하시며 수많은 마을에 교회가 생겨났고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베드로가 빠졌던 함정에 빠졌고, 특히 은사주의 계열의 교회들은 결국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면 마치 다단계 판매장 같은 느낌을 줍니다.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 충만을 신비주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접해본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 구원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베드로의 논리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구원관은 사도 바울의 구원관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구약》의 말씀과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들리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평생에 걸친 일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셔서 우리가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무슨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긴 과정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합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저를 노방전도에 초청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틈타 우리 동역자들을 데리고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를 초청한 분이 제게 작은 종이쪽지 한 장을 주었는데, 그 임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영접 기도를 시키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후 그는 저에게 몇 명이 ‘salvation(구원)’을 얻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두 명이요”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구원관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서신에서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구원에 가까운 줄 아노라”고 말합니다. 이 구원의 과정은 매우 길고, 육신의 악한 행실과 정욕을 죽여가는 과정은 몹시 고통스러우며, 마침내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예수님을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라는 기준으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함정: 구원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이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을 받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거듭나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며,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거듭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합니다. 거듭나 구원받았다는 이 개념은 매우 큰 미혹이며, 우리 안에서는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종 몇 년 몇 월에 아무개가 거듭나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구원관은 그들의 구원관과 도무지 조화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관념은 자신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비록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나쁜 짓을 일삼고는 죄를 짓자마자 회개하고, 나가서 또다시 죄를 짓는 식으로 끝없이 반복하며 뒹굽니다. 믿지 않는 어떤 친구가 제게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불교도들보다도 경건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반박할 줄 알았겠지만, 저의 대답은 “네 말이 전적으로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장황하게 설교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것처럼 보였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많은 영역이 ‘자신의 텃밭’으로 남아 있었고 자신을 위해 남겨둔 것들이어서 하나님을 그다지 닮지 않았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어디를 가나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권능을 얻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는 대략 열흘 안팎의 차이가 있어, 사람들이 아직 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베드로가 한 편의 설교를 하자 사람들은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7-38)
베드로는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듣고 마음에 찔려 충동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40-41)
누가는 매우 풍자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날에 제자(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더해졌다고 했는데, 이 삼천 명이 진정한 제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신도라고 부르기조차 마땅치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자의 기준을 얼마나 끌어내린 것입니까? 누가는 당시 그들이 한 말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마음에 찔려 세례를 받으면 곧 제자가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제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세례를 받은 이들도, 제 곁에서 수년 동안 훈련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제자답지 않아 보입니다.
수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 그들의 육신을 꺾도록 도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주 예수님을 위하여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전토나 집을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당시에 어떻게 단번에 삼천 명의 제자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기준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엉망인 교회를 세울 바에는 차라리 세우지 않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의 논리를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코 쓸모없는 인간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철저해져서,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을 드리고 싶어도 자격이 안 되면 받지 않습니다. 헌금을 낸다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믿는다면 베드로의 제자나 되러 가십시오. 제 제자도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 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기준은 매우 높습니다. 삼천 명의 제자라는 숫자는 제가 교회를 세울 때 감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께 오직 120명의 정예 용사만을 구했습니다. 해마다 구하고 또 구했지만, 3,000명은 고사하고 이 120명을 채우는 것조차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훗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 명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제자가 되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의 말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점점 더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에는 80만 명 규모의 교회도 있고, 10만 명 규모의 교회도 있으며, 140개국에 지교회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지교회에서 사람들을 한국으로 파견하여, 각국 지교회에서 온 30만 명이 자국의 국기를 흔들며 마치 올림픽을 방불케 합니다. 그 목사님은 참으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타이틀 따위는 원치 않으며, 오직 사도 바울의 논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할 뿐입니다. 사실 교회를 세우든 기업을 일구든, 엉망인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기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갈수록 더 망가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이 창업하거나 좋은 기업에 들어가려 한다면, 결코 베드로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비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고 나서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So what)?”라고 한다면, 증명하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에 따르면 그것은 다 헛짓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지만, 베드로와 달리 곧바로 그 수천 명을 체질하여 보배를 가려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진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지만, 그들은 도무지 듣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는 ‘구원에 가까움’과 ‘푯대를 향해 힘써 달음질함’입니다. 베드로, 아볼로, 세례 요한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데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님으로 모셨기에 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증명을 하든 하지 않든 삶에 변화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모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삶으로 살아내며,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저는 일찍이 한 원로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립과 자생, 철저한 훈련, 기도, 성경공부를 배웠고, 이러한 일들을 제가 가장 훌륭하게 실천해 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며, 저는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도 베드로가 함정에 빠졌던 사실을 여러분에게 강론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제가 사도 바울의 신학을 아주 명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신학입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곧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을 뜻한다고 결코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째 함정: 떡을 떼며, 기도하며, 밥을 먹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46)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다 함께 모여 밥을 먹었는데, 이것이 제자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밥벌레를 키우는 것입니까? 겉보기에는 참 즐겁게 먹고 날마다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 누가가 이를 기록해 놓으니 많은 사람이 이것이 참 좋은 줄 알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방식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집단 배급 방식(大鍋飯)은 게으름뱅이만 양산할 뿐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게을러서 일은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배설할 줄만 안다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해야 마땅했다면 예수님께서 진작 그렇게 하셨을 것이지, 굳이 베드로처럼 인민공사나 배급제를 창안하여 게으름뱅이 무리를 키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행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그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관철했습니다. 베드로가 고안해 낸 것들은 매우 기이합니다. 어떤 이들은 밭과 재산을 팔아 모든 물건을 통용하며 그 안에서 먹기만 하고, 아무런 가치도 창출하지 않으면서 먹는 것만 즐기고 신나게 놀아났습니다.
얼마 전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제가 사람들을 몰아붙여 일하게 만드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해야만 기쁨이 있고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세뇌당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일하기는 싫고 놀기만 좋아해서, 놀 때는 신나지만 일하라고 다그치면 괴로워지니 결국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데리고 먹고 마시고 노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베드로가 세운 교회를 찾아가시고, 다시는 우리 교회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것은 저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저를 찾아와서 놀아달라거나 함께 놀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이곳에 와서 놀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일정을 잡으십시오. 저를 찾아오려는 사람은 사전에 자신이 오는 목적과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를 제게 설명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배울 생각이 없다면 알아서 호텔에 묵으시고, 서로 모른 척합시다. 관광하러 오는 것이라면 이곳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오직 일하기에만 적합한 곳입니다.
이러한 떡을 뗌과 기도가 하나의 함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는 이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직접 드러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여기까지 읽고 이것이 꽤 좋은 일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함정을 따라 행하여, 예언이든 꿈이든 환상이든 구원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든 앞다투어 모방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교회가 기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흠뻑 빠져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매우 보편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그렇게 해보았지만 결국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7)
누가는 당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을 사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교회는 바리새인들로 가득 차고 파벌 싸움으로 얼룩져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육신을 다루려 하자, 사람들은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습니다. 먹고 마실 때는 모두가 기뻐하다가도, 일하라고 하면 모두가 얼굴을 찌푸리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교회의 웹사이트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왜 교회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스스로 만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먹고 마시고 놀기 좋아하던 사람들이 마침 그 목사님 교회로 몰려갔는데, 저는 그런 교회를 가리켜 ‘육신을 위하는 목사가 죽어라 육신만 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끄는 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함정이 가져오는 해악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합니다.
소위 구원이라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일 뿐, 진정한 구원과는 십만 팔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육신을 꺾으려 들면 즉시 이를 드러냅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는 만능이지만, 일하고 가치를 창출하고 사람을 훈련하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훗날 《갈라디아서》는 베드로가 외식(위선)했다고 언급하는데, 그는 평생 가짜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 왔을 때, 저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짜로 나온다면 저 역시 가짜로 대할 것입니다.
저 역시 “자매님,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속으로는 쓰레기 취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 있는 동역자라면, 저는 언제 참말을 하고 언제 말을 아껴야 하는지도 가르칠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이리 떼와 족제비 같은 자들을 목양하라니, 저를 정말 바보로 아십니까?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다 보면 양의 가죽을 쓴 늑대가 금방 눈에 띕니다. 이곳에 와서 저를 속이려 해도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매일 찾아와 할렐루야를 외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 운운하며 밥을 먹는 척 저를 속이려 해도, 저는 반드시 여러분을 진정한 사역의 현장으로 밀어 넣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을 읽을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읽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사복음서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제대로 실천해 보고 베드로의 행적과 대조해 보면,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 클럽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실질적인 일을 하도록 밀어붙이고 사역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사람을 목양하는 학습 능력과 실제적인 업무 능력을 훈련합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자격조차 없을지라도 동일하게 훈련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며, 반드시 지각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 같은 공부의 고수(학패)가 세우는 교회는 공부 못하는 자(학저)가 세우는 교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모든 문제를 명확히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주 분명하게 밝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구속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은 앞으로의 날들 속에서 기독교에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며, 신앙 속에 낀 쓰레기들을 말끔히 제거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아니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변혁이 지금은 비록 작은 불씨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작은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울 수 있습니다. 이 불길은 반드시 타오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제가 말한 바를 따라, 이 본문이 사도 베드로 일행이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임을 아십시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 고안해 낸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육신을 위하는 사람은 반드시 육신을 위하는 교회를 세울 것이고, 육신을 꺾어 다루는 목사는 반드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뜻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제 육신의 취향대로라면 저도 이렇게 하지 않겠지만, 저는 이미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역사를 파헤쳐 드러냄으로써, 여러분이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굳은 결단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걸어간 그 길을 가십시오. 우리가 사도 바울을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매우 명확하고 직설적입니다. 제가 명확하게 전했으니 여러분도 분명하게 알아들으셨기를 바랍니다. 이 거룩의 길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힘써 달음질하는 이 길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