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아래 내용은 생방송 기록에 근거한 요약입니다.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으면 녹음 내용을 기준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제: 거센 풍랑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계속해서 평안과 안정을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정말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는지는 광풍과 폭우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제목은 사람이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굳게 붙들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도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을 굳게 붙들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내용입니다. 똑같은 한 가지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 있고, 저주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한 가지 축복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 수 있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을 치며 매우 고생했고,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야곱이 이전에 아버지와 형을 속인 데서 비롯된 저주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요셉이 이전에 교만하고 함부로 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광풍과 폭우, 거센 풍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헤아릴 것인지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볼 때는 그 일들 가운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는다면 반성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인가?’ 사명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이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광풍과 폭우, 거센 풍랑 가운데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환난을 겪을 때 그것이 어떤 영이나 어떤 저주로 인해 생겼는지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깊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싹트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선한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모독했고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지만, 재앙을 겪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 안의 상태이지, 하나의 이론이 아닙니다. 다시 이 소망을 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합시다!
본문: 《사도행전》 27:20-25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계속 몰아치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희망이 다 사라졌더라. 여러 날 동안 사람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더니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손상과 손해를 면하였을 것이나, 이제 내가 여러분을 권하노니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해 있고 또한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행전》 27:20-25)
기도
우리 안에서 거의 꺼져 가는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하게 하시고, 폭풍 가운데서도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소서. 하나님, 주님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셔서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얻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게 하소서. 우리가 주께로 돌이킬 때 주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아멘!
본문의 배경
바울이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 항로를 벗어났습니다. 당시 바울은 죄수였고,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베드로와 충돌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바울은 많은 헌금을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야고보와 그 일행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성전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고 다른 사람의 서원을 위해 비용을 내라고 권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말대로 행했지만 성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2년 동안 갇혀 있었고, 여러 총독을 거쳤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배를 타고 그레데 섬을 지나던 중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 이미 절망한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모두를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하자 모두가 힘을 얻었고, 마침내 정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도행전》 27장 참조)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믿음이 세워졌고, 더 이상 허둥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재난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난 가운데서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폭풍 가운데서 마침내 구원을 받았고, 섬에 도착한 후 뱀에게 물렸지만 살아남았으며, 섬의 지도자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배신당하여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여러분이 사명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없는 사람이라면, 광풍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시작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선하다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 폭풍을 겪고 있고, 구원받을 소망마저 사라졌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에 휩싸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 개념은 《창세기》 1장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앞으로 겪게 될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지, 그 일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엘리와 사울에게 경고하신 것은 사실 판결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제때 돌이키기만 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은 장차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도 바울에게 그곳에 가면 결박이 있을 것이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이 성령의 일깨우심보다 앞섰고, 그는 완고하게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결국 붙잡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지체되기는 했지만 바울은 결국 로마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지체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일로 인해 폭풍을 겪게 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큰 능력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은 선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잘못했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바꿀 수 없는 일을 탓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미래의 일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광풍과 폭우 가운데 있지만 소망을 품고 계속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것인지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일도 우리의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간 것이 잘못이었는지, 성령을 거역한 것인지에 얽매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안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옳게 했는가,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신학적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믿기로 선택하면 우리 안의 느낌이 훨씬 좋아집니다. 그러나 제가 다음으로 말씀드릴 내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라
바울에게는 사명이 있었기에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마음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바울 시대보다 훨씬 발전했지만, 우리가 재난을 만나면 여전히 허둥대며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어떤 일도 좋은 일로 변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는 안 되었을지라도, 그는 사명을 품고 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뜨거웠고, 몇 명이라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도를 믿고 순수한 복음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체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 일을 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봅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다면 아무리 많은 광풍과 폭우를 겪고 목숨을 건진다 해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옳은 일을 했든 잘못한 일을 했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뜨겁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들이 무엇인가 잘못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바울로 인해 배에 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섬에 도착한 후 바울이 뱀에게 물렸지만 아무 일도 없자 섬 주민들은 그를 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섬의 지도자의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바울이 기도하자 나았고, 다른 병자들도 바울이 기도하여 나았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바울은 이 섬 주민들을 치료할 때 먼저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방법은 먼저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 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며 어머니와 작별했고, 고난과 가난을 겪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직접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하나님을 경험할 기회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야곱처럼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어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고자 했습니다.
저주받은 사람도 많은 폭풍을 겪고, 사명이 있는 사람도 똑같이 많은 폭풍을 겪습니다. 폭풍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말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결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원숭이 한 마리보다도 못하게 살아갑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자신이 살아가는 결말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선을 찾아 도를 배우러 다녔고, 마침내 한 스승을 찾아 영생의 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손오공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폭풍을 겪고도 자신의 결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여전히 세상에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손오공은 당승을 따라 경전을 가지러 가며 81가지의 환난을 겪고, 가는 곳마다 요괴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사명이 있는 원숭이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과도 매우 비슷합니다. 오늘은 귀신 하나를 쫓아내고, 내일은 또 다른 귀신을 쫓아내며, 날마다 사명의 길을 걷습니다. 사명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떤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도,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갔을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81가지의 환난을 겪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킵니다. 이 믿음으로 하늘의 보물을 받아 누리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냅니다. 어떤 폭풍도 사명이 있는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손오공의 지식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하늘의 보물을 어떻게 받아 누리는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손오공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오공의 돼지 같은 동료가 되지 마십시오.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흩어져 짐을 나누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명을 굳게 지키기 시작하십시오. 어떤 폭풍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옛 관념을 가지고 바울과 같은 사람을 보며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명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세상의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을 가볍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적어도 손오공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헛되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사명을 품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시다.
하나님을 경험하라
사람이 멋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람은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 광풍과 폭우가 우리의 저주 때문이든, 잘못된 선택 때문이든, 우리의 사명 때문이든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폭풍과 재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시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 우리가 직접 주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일을 겪은 후에는 “하나님을 경험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한 젊은 연인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순히 돈을 내놓았고, 마지막에는 강도에게 차비 15위안을 달라고 대담하게 부탁했습니다. 강도는 그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전도서》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도서》 7:1-2) 이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일 뿐이며, 하나님이 매우 필요하고, 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즐겁게 지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꿈을 추구하지 말고, 이 바른길, 곧 사명의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분명히 알고,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헛된 일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십시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전 7:8)고 했습니다. 바울처럼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거의 꺼져 가는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도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합시다.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꿈을 계속 추구하지 마십시오. 직장과 삶의 작은 일들이 하나님을 구하는 우리의 시간을 빼앗도록 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험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습니까?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드릴 기회가 몇 번이나 있습니까? 바람이 잔잔하고 평온할 때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풍과 폭우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고, 광풍과 폭우 가운데 하나님을 다시 경험합니다. 진실하게 회개하고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합시다!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온라인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번 제목은 《평안하고 안정될 때 힘을 얻는다》였습니다. 사람은 언제 진정한 평안과 안정을 나타냅니까? 바로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입니다. 사실 오늘 제가 전하려던 제목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유라굴로의 폭풍》이었지만, 나중에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라》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제목이 특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믿음을 실제로 세우고,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굳게 붙들도록 격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도 우리가 정말 평안하고 안정될 수 있는지는 우리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를 살펴보면서 저는 늘 매우 흥미로운 관념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똑같은 재앙도 저주로 인해 생긴 것일 수 있고, 사명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좋은 일도 축복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 있고, 축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보세요, 저 사람은 또 저주를 받았어요”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매우 치명적인 신학적 관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지만, 결국 지팡이 하나를 짚고 강제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14년 동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외삼촌을 위해 양을 쳤습니다. 그 후에도 또 여러 해 동안 외삼촌을 위해 양을 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이 일을 해석합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념은 매우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열일곱 살에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그러자 많은 신학자들이 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너무 교만했어. 꿈을 꾸고 이상과 꿈을 가진 것은 좋지만, 말하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교만하게 굴었으니 결국 이집트에 팔려 간 것 아니야?” 그들은 이것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이르러서는 사도 바울이 겪은 일들이 많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는 막대기로 맞고, 채찍질을 당하고, 돌에 맞고, 배를 탔다가 배가 파선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습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교만합니까! 그가 쓴 《갈라디아서》를 보세요. 글 곳곳에서 교만함이 드러나잖아요. 그렇게 죄를 지으니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말을 했고,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을 위해 힘들게 변론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자신의 사도 됨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말씀은 이 일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자세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는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한 가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사건 자체를 보지 말고, 그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겪은 뒤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그와 함께하시며 그가 하는 일을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어떤 형제자매들은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이 이런 일을 겪은 것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을 잃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평생 어떤 일을 겪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로 돌이키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이키십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로 돌이키든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실제로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며 좋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더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 나는 사명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오늘부터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로 돌이키실 것입니다. 핵심은 사물의 현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은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까? 광풍과 폭우와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언제 보았습니까?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잘되고 편안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겪는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사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일이 선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일이 저주 때문인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인지, 내 안에 정욕의 영이나 게으름의 영이 있기 때문인지, 어떤 영 때문인지, 우리 가문에 어떤 저주가 있기 때문인지를 분별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우리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기 시작해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치유를 받은 많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깊이 일으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든 닥치지 않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싹트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선하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말하는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은 저주이고 저것은 저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주 가운데 살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치유와 해방을 얻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또한 사명이 있는 많은 사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마음 깊은 곳의 갈망에 다시 불을 붙이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하기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말씀을 전하는 목적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매우 어리석고 혼탁했을 때 하나님을 모독했고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앙을 겪게 된 것은 깨어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하든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는 우리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단번에 어두운 골짜기로 차 버리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도록 돌아오게 하십니다.
저는 사명이 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이론은 거의 말하지 않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생겨나는 하나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런 소망이 다시 생기게 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든 마음 깊은 곳에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합시다. 저는 성경의 이야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계속 몰아치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희망이 다 사라졌더라. 여러 날 동안 사람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더니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손상과 손해를 면하였을 것이나, 이제 내가 여러분을 권하노니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해 있고 또한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릴 것이라.” (《사도행전》 27:20-25)
기도
주 예수님, 오늘 우리의 안에, 거의 꺼져 가는 소망에 불을 붙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과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 우리 안의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소서. 주님은 본래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주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일하셔서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아무리 크고 폭풍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오늘 주님 앞에서 주께 부르짖기 원합니다. 폭풍 가운데서 주님을 직접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가 사명을 얻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주께로 돌이키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이키시고, 우리로 주님을 경험하게 하실 것을 알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도 이 내용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광풍과 큰 파도에 몰아쳤고, 그 바람의 이름은 유라굴로였습니다. 이 배는 작은 배가 아니라 큰 배였고, 배에는 모두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매우 큰 배였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한 백부장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이 죄수들을 호송하게 했습니다. 그 죄수들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로 끌려가 로마 황제 가이사의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 제국은 법으로 다스리는 국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 지방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가지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려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체포되어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로 호송되었을까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를 비롯한 많은 서신을 썼는데, 대부분 체포되기 전 이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 그는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의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 교회를 제외한 모든 이방인 교회는 사도 바울의 관할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자주 머물던 교회들, 곧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 등에 찾아와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서신에는 그들을 보낸 사람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서신 곳곳에서 사도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여러분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라면 바울의 서신을 읽고 마음이 상당히 격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당시 매우 가난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에서 많은 헌금을 거두어 예루살렘에 전달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하러 간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헌금했을 때 매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그들이 너에 대하여 들었도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이라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여 편지하였느니라 하거늘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결례 기간이 만료되기까지 머물더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사람이라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일제히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즉시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사도행전》 21:17-32)
제가 이렇게 긴 내용을 읽어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중에 바울은 체포되었습니다. 누가 바울을 붙잡았습니까? 누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매우 굳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었다면 마음이 매우 괴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이 복음의 진리를 힘써 지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갔습니까? 사실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성령께서 거듭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참된 복음을 믿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존경할 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자기 민족의 형제자매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참된 도를 믿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바꾸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구약의 모세 율법을 지키자 큰 능력이 있는 복음이 능력 없는 복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행한 일들은 모두 큰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신 일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큰 능력이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이 가져온 헌금으로 인해 변화되고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다행히 예루살렘을 지키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바울을 구해 냈습니다. 그 후 심문을 받고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감옥에 갇혔지만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이 계속 교체되었고, 바울은 그곳에서 여러 해를 지냈습니다. 원래 심문한 후 풀어 주려고 했지만,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뒤를 이어 지방 장관이 되면서 바울의 사건을 다시 꺼냈습니다. 바울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말했고, 로마 황제에게 가서 자신을 변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배를 탔고, 그 배에서 유라굴로의 폭풍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9장부터 2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조금 이해하셨습니까? 저는 먼저 평가하지 않고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한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날 희망마저 잃었습니다. 배가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이리저리 떠밀리고,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구원받을 희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언제 큰 풍랑에 휩쓸려 바다에 빠져 모두 죽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자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목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니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손상과 손해를 면하였을 것이나 이제 내가 여러분을 권하노니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해 있고 또한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릴 것이라 하더라.” (《사도행전》 27:21-26)
사람들은 바울의 권면을 듣고 음식을 조금 먹었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실제로 한 섬에 부딪혔고, 모두 해변으로 올라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더니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사도행전》 28:8-10)
사도 바울이 지나간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사도 바울은 정말 불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바울은 누구에게 배신당했습니까?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였습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조금만 판단해도 여러 흔적을 볼 수 있지만, 오늘 저는 이 일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광풍과 폭우 가운데 있을 때, 여러분이 사명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명이 없고 매우 불운한 사람이라면, 그때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평안하고 안정될 때 힘을 얻는다》의 내용에 이어 말씀드립니다. 허둥대지 마십시오. 허둥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선하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겪고 있든 그 일이 여러분의 저주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사명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가 저주 때문인지, 사명이 있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핵심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여기기를 권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인생의 폭풍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원받을 희망조차 거의 사라진 일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광풍과 큰 파도에 몰아치는 배에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지고, 아무런 반전의 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서야 사람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광풍과 폭우를 겪기 전에는 누구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농부조차 자신이 매우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공원에서 시정 관리에 대해 아주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농부였고, 다시 알아보니 아마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농부가 시정 관리에 대해 말한들, 시장도 아닌데 무엇을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신학적 관념은 《창세기》 1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통해 여러분이 깨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저주를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깨어난다면, ‘내가 복음을 잘못 전해서 저주를 받은 것인가? 복음을 잘못 믿어서 저주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무엇 때문인가?’라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 자신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방식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런 일을 겪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 사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겪게 될 일 가운데 돌이키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울 왕 이전에는 늙은 엘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선지자를 보내 알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께서는 늘 경고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옳았습니까, 잘못이었습니까?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거듭 바울을 막으시며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드시 가려고 했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 선지자는 허리띠로 자신의 손을 묶고 바울 앞에 와서,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바울은 성격이 매우 완고했습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며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 순종한 것입니까? 성령께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거역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참된 도로 돌아와 모세의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도 믿고 모세의 율법도 지켰습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복음을 능력 없는 복음으로 믿게 됩니다. 사람이 능력 없는 복음을 믿으면 그것을 모를까요?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었고, 그 결과 체포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거듭 그를 막으셨지만 막지 못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바울을 향해 가지신 계획은 그가 로마에 갈 기회를 얻어 로마의 교회를 방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일 전에 《로마서》를 썼고, 《로마서》를 다 쓴 후 그 편지를 로마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 체포되어 몇 년 동안 지체되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호송되었고, 가는 길에 폭풍을 만났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일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여러분이 사도 바울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 후회스럽다! 내가 왜 예루살렘에 갔을까? 내가 왜 성령을 거역했을까? 내가 목적을 이루었나? 내가 원했던 결과를 얻었나?” 아닙니다. 아무 결과도 없었습니다. 그저 재난을 거듭 겪었고, 배를 타고 광풍과 폭우에 몰아쳤으며, 바울을 포함한 배 안의 277명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아, 정말 후회스럽다!”라고 한다면 모든 일을 선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을 거역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배를 타고 이런 재난을 만났지만 여전히 이 일이 선하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일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가장 귀한 점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리면 이전에 옳게 했든 잘못했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에 잘못했더라도 사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서 “나는 죄인이고 죽어 마땅하다”고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저는 “나는 죄인이고 죽어 마땅하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이 한 일 때문에 더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 일로 인해 어떤 일을 겪을 수는 있고, 그것이 폭풍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었겠습니까?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키고, 성령의 큰 능력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큰 소망을 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잘못했거나 잘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선합니다. 여러분, 잘못 이해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잘못을 저지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광풍과 폭우 가운데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본 후에도 모든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큰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탓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과거의 일은 바꿀 수 없지만, 미래의 일은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여러 해를 지체했고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을 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광풍과 폭우 가운데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일이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것인지 해석하려 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습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옳게 했는지 잘못했는지, 예루살렘에 가야 했는지, 성령의 인도를 거역했는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밤중에 바울 앞에 서서 배 안의 모든 사람을 바울에게 주셨다고 말했고, 바울이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로마 제국의 황제 가이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듣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이 옳든 잘못되었든 하나님의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했든 잘못했든 어떤 일을 겪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낡은 신학적 관념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사람을 속였기 때문에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라반이 그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으며, 이런 일을 겪었다는 식의 해석은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 안에서 큰 소망을 다시 회복합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일들이 선하다고 보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과거에 이런저런 일을 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이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믿기로 선택한다면 적어도 마음의 느낌은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이제 다음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내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라
사도 바울이 배 위에서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모두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과 로마 병사들 모두 마음속으로 죽게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비행기에서 모두에게 작은 철제 상자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유서를 쓰라고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바다 한가운데서 어디로 찾고 어디로 보내겠습니까?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비행기를 타다가 갑자기 와이파이를 켜 주며 가족에게 빨리 유서를 남기라고 한다면 매우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 편리해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허둥댑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바다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276명은 276가정과 그 주변의 친족들이었고, 이 사람들이 죽으면 많은 가정이 인생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배에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어떤 재앙도 좋은 일로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는 안 되었지만, 예루살렘에 갈 때에도 사명을 품고 갔습니다. 그의 안에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참된 도를 믿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하여 그곳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순수한 복음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명이 있는 사람인지 다시 점검하기 시작합시다. 사람이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다면, 아무리 많은 광풍과 폭우를 겪어도 그 폭풍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 사명을 얻고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권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옳게 했든 잘못했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지만 참된 지식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유대교 안에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 유대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선택받아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유라굴로의 폭풍 가운데서 배에 탄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얻었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은 바울이 겪은 일을 통해 바울과 함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섬에 도착한 후 독사에게 물렸지만 바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섬 주민들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섬의 지도자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렸지만 바울의 섬김을 통해 나았고, 섬의 다른 병자들도 와서 모두 치유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과 함께하면 어디에 가든 사람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저는 바울이 섬에서 이 병자들을 치료한 일을 보며 놀랐습니다. 바울이 병자들을 위해 먼저 우상을 제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먼저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씩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렸는지 여부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을 다시 살펴봅시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 지팡이 하나를 짚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이었습니까?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후에는 품삯을 열 번이나 부당하게 빼앗겼습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양을 치며 바람을 맞고 이슬을 맞았습니다. 낮에는 해가 내리쬐고 밤에는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작은 우리에서 지냈고, 늑대가 오면 쫓아내야 했으며 사자가 오면 사자를 쫓아내야 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외삼촌 라반을 위해 양을 쳤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겪은 모든 일 가운데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직접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든 사람의 일생에는 하나님을 경험할 기회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야곱처럼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얻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얻고 싶어 했고, 그 후 이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명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많은 일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사람도 많은 폭풍을 겪고, 사명이 있는 사람도 역시 많은 폭풍을 겪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명이 있는 사람은 먼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원숭이 한 마리보다도 못하게 살아갑니다. 옛날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원숭이가 있었습니다. 그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가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원숭이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원숭이는 울었습니다.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왜 우느냐고 묻자, 이 원숭이는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불로장생의 약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는 나가서 도를 배우고 매우 뛰어난 스승인 보리조사를 찾아갔습니다. 그에게서 도를 배운 후 《서유기》의 손오공이 되었습니다. 제가 많은 사람이 이 원숭이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손오공이라는 원숭이에게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풍을 겪고도 여전히 소망을 기업과 사업과 직장과 이런 세상일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이것이 비극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런 일을 볼 때 저 원숭이보다 나아야 합니다. 원숭이도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이 어떻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영생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일은 모두 작은 일입니다. 손오공은 당승을 따라 서천으로 경전을 가지러 가며 81가지의 환난을 겪었지만, 도를 이루어 영생을 얻는 꿈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승은이 그린 손오공을 어느 정도 높이 평가합니다. 손오공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81가지의 환난을 겪고, 화염산을 지나고, 반사동을 지나며, 하나씩 하나씩 가는 곳마다 요괴를 물리쳤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리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는 길마다 요괴를 물리치고, 오늘은 귀신 하나를 쫓고 내일은 또 귀신 하나를 쫓으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요괴를 물리치면서 사명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정말 이해하고 있습니까? 손오공은 81가지의 환난을 겪으며 자신이 말하는 도를 이루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한 사람에게 사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광풍과 폭우를 겪을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도, 요셉이 노예로 팔려 이집트에 갔을 때도,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 가운데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81가지의 환난을 겪는다 해도, 우리는 매번의 어려움 가운데 하늘과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들고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받아 누리며, 그 보물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요괴를 물리치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합니다.
아무리 큰 폭풍을 겪고, 아무리 큰 곤경을 겪고, 아무리 큰 방해를 받아도 사명이 있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든 손오공의 깨달음을 뛰어넘기를 권합니다. 절대로 손오공의 돼지 같은 동료가 되지 마십시오. 손오공의 일행에는 저팔계라는 돼지 같은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만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스승님이 붙잡혔으니 우리 흩어집시다! 당신은 화과산으로 돌아가고 나는 고노장으로 돌아갈게요.” 그곳에는 옛 연인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폭풍을 만나고 어려움을 겪어도 재산을 나누고 헤어지려고 합니다. “스승님이 사위가 되려 하네. 스승님이 반사동에 붙잡혔네. 스승님이 이런저런 일을 당했네. 스승님이 위험에 빠졌네. 스승님이 찜통 안에 갇혔네.” 서천으로 경전을 가지러 가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흩어지자고 합니다. 오늘 절대로 돼지 같은 동료가 되지 마십시오. 사명을 굳게 지키기 시작하십시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떤 폭풍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도 모두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 섬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와, 이 사람은 신의 사람이구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을 옛 신학적 관념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셨고, 그곳은 매우 길고 깊은 동굴과 같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명이 있기에 굳게 지킬 수 있고, 사명이 있기에 왜 살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을 가볍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다시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적어도 손오공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왜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면, 우리가 헛되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사명을 얻으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라
여러분은 멋진 삶을 살고 싶습니까? 멋진 삶을 살고 싶다면 평생 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람은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 광풍과 폭우가 우리의 저주 때문이든, 우리가 어떤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든, 정말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이든, 인생의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인생의 굴곡 가운데서, 인생의 81가지 환난 가운데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하기 시작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시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제가 직접 주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겪는 사람들, 곧 사명이 없는 사람들이 “아, 내가 하나님을 경험했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한 젊은이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다가 한밤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흥미로운 간증을 했습니다. 당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사명도 없었습니다. 한 연인이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겼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 그는 그때의 일을 간증했습니다. 강도가 돈을 요구하자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강도에게 작은 부탁을 했습니다. “돈을 조금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집에 택시를 타고 가야 합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얼마가 필요한데?” 그가 대답했습니다. “15위안이요.” 그러자 강도가 말했습니다. “여기 있다!” 그리고 강도는 그들을 해치지 않고 떠났습니다. 대화도 꽤 잘 되었습니다. 오늘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그런 상황에서 제 마음속으로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고 사명을 얻었습니다. 사명을 얻은 후에도 때로는 작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제가 단체 대화방에서 그를 보았는데, 방금 과제를 다 썼지만 저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컴퓨터가 고장 나 과제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폭풍이 사라지고 바람이 잔잔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과제를 왜 쓰겠습니까? 과제를 써야 한다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그 일을 미루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신나게 놀았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전도서》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도서》 7:1-2)
이해하셨습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늘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도 늘 알아야 합니다. 즐겁게 놀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혼란에 빠지지 마십시오. 어느 날 비행기를 탔는데 그 비행기가 사라질지, 어느 날 배를 탔는데 그 배가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명이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하기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인색하지 않으시고 자주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데, 경험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경험한 후에도 계속 세상에 속한 꿈을 추구하며 화과산의 원숭이로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도를 이루는 길을 걷기 시작하겠습니까? 물론 제가 사용한 이 표현은 중국인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일도 하나님을 경험한다면, 정말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모른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모르는 척하고 내일도 모르는 척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헛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이 인생의 굴곡을 겪고 있고 인생의 폭풍을 겪고 있다면, 오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십시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느니라.” 이해하셨습니까? 오늘부터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고 사명을 얻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입니까! 우리 안에서 거의 꺼져 가는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고, 우리 안에서 거의 꺼져 가는 믿음에도 다시 불을 붙입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십시오. 이런 일은 매우 많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한 번, 또 한 번 경험하고도 여전히 세상에 속한 꿈을 추구하는 것을 보며 매우 안타깝습니다. 제가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잘 풀어놓으십시오”라고 말하면 “시간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왜 시간이 없습니까? 시간이 모두 일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특히 《레위기》를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안식해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얼마 전 한 형제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작은 어두운 방에 갇혔고, 아마 두들겨 맞은 것 같았습니다. 뼈가 부러졌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창문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그는 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지혜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잠시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틈을 타서 그 안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빠져나온 것은 빠져나온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마귀의 지배에서 빠져나왔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험할 기회가 얼마나 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번이나 진정으로 사명을 얻고 많은 것을 분명히 보며, 시간을 내어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이 말은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바람이 잔잔하고 평온할 때,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듯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풍과 폭우 가운데서 우리가 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진실하게 회개합시다. 어떤 상황에 있든 진실하게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 소망, 사랑 시리즈 설교입니다. 제가 이렇게 나누는 것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다시 불붙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