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大家好,今天讲的《提摩太前书》第五章,中间多多少少加了点料,叫做“提摩太外传”。我就在想这个“提摩太外传”,将来有可能考虑写本书。那有没有可能写一本“彼得外传”啊?绝对有可能。那有没有可能写点其他人的外传啊?绝对有可能。我应该是比较擅长编故事,一方面是突出这解经,让大家容易理解。另外一方面呢,故事也好听啊。
Q1:老师,“有些人的罪是明显的,如同先到审判案前;有些人的罪是随后跟了去的。这样,善行也有明显的,那不明显的也不能隐藏”。这句话是什么意思啊?
有一些罪是明显的,什么意思呢?就是他已经做出来了,这是我的解释。比如说,有一个牧师在台上讲道,讲得眉飞色舞,然后有一个姐妹,带着一个十岁的孩子进到教会,说:叫爸爸。这一叫爸爸,坏了。那之前是不明显的,现在是明显的。一明显的怎么办?就先受审判啊。
那有些人的罪是后来才显露出来的,《圣经》上原文是说有些人的罪是随后跟了去的。那这个跟了去的有两层意思:他犯了一个明显的罪,他就带来了另外一个罪。比如说,我撒了一个小谎,然后人家问我的时候,我就用一个中谎遮着小谎,人家再问我那个中谎的时候,我就用一个大谎遮着一个中谎,这是一种。那还有另外一个意思:有些人的罪是跟了去的。比如说,有个人一看别人犯这个罪,结果没事儿,挺好啊。他就想着:那我也犯一个。这就是跟了去的,当然我对希腊文也没那个造诣啊,就原谅我。我就透过这原汁原味的,跟大家稍微说一下。
后面还有一句话,善行也是明显的,就算不明显也不能隐藏。这话的意思很深,我告诉你,耶稣被立,有一个叫做西缅的先知,一看到耶稣,刚刚个把月大的小婴儿,挺乖的一个小孩,很水灵。马利亚抱着这小孩进到圣殿,有一个老先知叫西缅,一直等待看见救世主来到,他一看到耶稣,在马利亚的怀里,就说了一个预言:这孩子被立,很多人兴起,很多人跌倒,要把人心里的隐情显露出来。
我问你,教会在治理上,你隐藏的是不好干的。在教会里如果有神同在,你藏不住。整吧整吧就整出来了,藏不住,所以因为神的灵运行在教会当中,你要想隐藏是很难的。
我给大家再举个例子,我就琢磨着让这个弟兄做一个小牧者,我不吱声,我先不说,在心里想着想着,下个礼拜这个弟兄就出了一点事。一看,哎呀,还不适合做小牧者,听明白了吗?那或者是出了一点事儿,他比较适合做小牧者,他里面的隐情就被神显露出来。所以说保罗告诉提摩太:其实你别在那思虑那么重,你想整明白,你也整不明白啊,你还是好好的信靠神吧!
Q2:老师,“控告长老的呈子,非有两三个见证就不要收”。两三个见证就不要收,是什么意思?
如果就一个人控告就算了,就那一个人控告,好像非得要处理似的,好像是个真事儿,那就麻烦了。
我给大家举个例子,有个人就在底下传一个谣言。传一个什么谣言呢?说他女儿被谁谁非礼了。你说我受理还是不受理啊?我不受理这种屁事儿。有见证吗?有见证人吗?没有啊。那你怎么整啊?你整不了。反正我就觉得这事儿不妥当。那是不是诬告?有可能啊。是不是真的非礼?有可能啊。那你怎么着?那如果旁边有两个人说:我看见了。那你就好好受理这非礼案。
那还有呢,有一些人说:非礼了。我说哪年?他们说:十年前。你说你认不认?你说你怎么整?十年前,我说:当时我在教会里,你怎么没跟我说呢?那怎么十年以后才说呢?啊,十年以后才想起来说,因为过去那些年憋着。为啥呢?因为十年后,这个长老得罪他了,就想捅一把,编造的故事是不是啊?不能这么讲。
Q3:老师,我就是思虑过重,尤其想管一些不该管的事儿。其实我知道那不是我的责任,我也没有权柄,但是就是放在心里,想帮人家处理,该怎么办?
该怎么办?不办。我这么简短的回答可能会冒犯你,记住啊,我们做事儿得知道我们的责任。你所负责的事儿好好做,不该你负责的事儿,你不要去乱做。好不好啊?我们得聪明啊。
你看有的人啊,他负责党支部,他就开了一个党支部的会议。啥毛病?啥毛病没有,传达一下精神,正常。可是有一天,你不负责党支部了,你又把人招到党支部来了。我问你会怎么样?就挨抓了。谁知道你成立的是个啥党啊?听明白了吗?你还党支部开会。记住,管不该管的事儿是一种恶习;管不该管的事儿是一种越权。越权最先的先例叫做撒但。
你说:老师,我好心。好心就可以越权了?教会里喜欢越权的人是很多的。越权一定受该受的审判,听明白了吗?比如说,你要不要管神管的事儿啊?有的人带祷告团队,天天在那儿拼命祷告:神啊,改变我们的牧师,改变我们的牧师。神说:我改变是照着你的意思改变他,还是照着我的意思改变他呀?你看看这事儿,是你该管的吗?结果祷告祷告得癌症了。牧师还没得癌症,他先得了,那就是越权。你你对神的管理不满意啊?你要不满意,那你就慢慢不满意吧。
Q4:老师,长老是什么意思?执事和长老有啥区别?
教会里这个长老是一个非常很诡异的定义。有的教会是长老治理,有的教会是监督治理。长老是啥呢?长老就是教会的领袖,如果说这个人是这个教会的长老,有相当大的可能,他就是那个最大的,负责这个教会的。这是一种解释。另外一种解释,这个人是教会的长老。为啥?因为大家尊荣他,给他一个长老的名号。因为他挺老,所以叫长老啊,但这是笑话啊。那其实这是一个极其混乱的定义,但是总归长老就是一个教会里面的领袖。
那到了现在,长老就奇怪了,什么叫做长老呢?不服侍只管奉献,在教会里头有个职份,但却不去服侍,奉献比较多,有钱。后来人们给他起了个名儿,叫长老。这种长老我们不太要。
那执事是啥呢?执事也是教会里极其混乱的一个名词。你说是今天的意思还是那个年代的意思?在我们今天来说,我的解释就是小牧者,执事就是小牧者,负责一摊儿的牧养。那现在有的教会的执事是啥呢?执事就是不在教会里担任牧养的责任,但是却做教会的治理,所以叫执事会。
你问咱们教会有没有执事会?有!咱们所有的小牧者就是执事会,或者说牧者就是执事会。我们不觉着在教会里应该有一种人不服侍,却有权力。牧者不是这些执事们请来的雇工。当然,教会走下去会怎样我也不知道,愿神怜悯。所以大家别把这些名词整乱。保罗那个年代,长老和执事有一种定义。今天这个年代,长老和执事那是个极其混乱的定义,我们没有这玩意儿。
Q5:老师,如果教会的牧者或者长老治理教会,出了问题,弄得乌烟瘴气,比如牧师会有灵命没有成长,不发热心。这样的教会应该留下来还是离开?
我看,早点离开是非之地啊。当然,你的判断准不准,那我就不知道了。如果真的是你说的这样,那是一个扯淡的教会,神不在,鬼倒在。我想啊,不是所有的教会都有神同在,很多教会是鬼同在。为啥?人把鬼邀请到教会里来治理教会,所以这个教会里面勾心斗角,鸡飞狗跳,龙争虎斗。大家都搞得乌烟瘴气。
Q6:老师,"不要在别人的罪上有份儿",是什么意思?
比如说,我是个省长,我提拔你做市长,结果市长贪腐了。我问你,我有没有份儿?我有份儿。如果我是个市长,我提拔一个人做县长,这个县长贪腐了,我有没有份儿?我有份儿,因为我没管好。那我如果是个县长,我提拔了一个科长,结果这科长贪腐了,我有没有份儿?我有份儿。所以罪,它不是别的。任命错了人,其实他是个恶人,你肯定有份儿的。
Q7:老师,“人若不看顾亲属就违背了真道,比不信的人还不好,不看顾自己家里的人更是如此”,这句话是什么意思?
有人说:“弟兄,我好爱你”。嘴巴上说,那回家一看,哎哟,在家里头,那爱谁啊?后来你一问:她家里的孩子和家里的老公,说:“你妈妈爱你们吗”?她孩子说:“拉倒吧”。问他老公,说:“你老婆爱你吗”?她老公说:“哎呀,拉倒吧”。你问他:“那这个春节你要不要跟她一起过”?他说:“哎呀,不要不要”。那会怎么样啊?比如她妈妈她都不照顾,她能照顾谁呢?跟她有关系的她都不照顾,她会在教会里照顾陌生人?你不觉得是个很奇怪的现象吗?
咱们大家琢磨一下,就是自己家里的事儿,眼前的人她不管,她管老远的人,这就是我特别信不过的。比如说,就在你身边有一个病人很需要照顾,就在你身边,就是你自己的家人,你不照顾,但是在教会装得很属灵。这个教会跑到哪去了?跑到大凉山去了,跑到大凉山去干啥去了?到那儿照顾陌生人,不觉得奇怪吗?
人不去管眼前的人,反而管大老远的人,尤其是现在的教会可奇怪了。比如说,短期宣教,大家知道咱们教会没有什么短期宣教。那短期宣教是啥呢?组织一群人到马来西亚,找一个教会到那里去服侍。怎么服侍呢?到台上演个节目,演得还不怎么样,大家也不爱看,还不如郭德纲的相声。那叫服侍啊?然后到那儿去,就奇怪了。有人说真话了,那是旅游去了,所以那叫短宣。我就觉得身边的人不服侍,能服侍天涯海角,怪了事儿了,你以为神会欣赏这个?神不欣赏。
愿神祝福大家!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어서 《디모데전서》 5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사실이 있는데, 디모데라는 사람에게 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말한 이런 일들을 보면, 디모데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일을 아주 잘 처리했다면 바울이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면 상사가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여기가 틀렸다, 저기가 틀렸다, 여길 조심해라, 저길 조심해라’ 하겠습니까?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일을 잘하면 굳이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 곁에 있는 동역자들을 보면, 그들의 문제는 고쳐질 때까지 매일 말하고, 매달 말하고, 매년 말합니다. 그러니 훗날 제가 천국에 가서 디모데를 만나면 큰일입니다. 그가 ‘아니, 왜 그러셨어요? 디모데전서 공부할 때 왜 자꾸 저를 헐뜯으셨습니까?’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헐뜯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안 좋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 사람을 자꾸 안 좋게 말한다는 것인데, 사실 저는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본문에 근거해서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할 일 없이 한가해서 이런 글을 썼겠습니까?
그런데 왜 디모데에게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들까요?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사회생활도 거의 해보지 않았고 직장 생활도 겪어보지 않은 채 곧바로 나와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사역에 나온 뒤의 일들을 보면서 제가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단순하고 명백한 일들을 디모데가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왜 위장병이 있었을까요? 위장병은 생각이 너무 많고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위장이 안 좋고, 위장이 안 좋은 사람은 생각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트레스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디모데전서》가 쓰이기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디모데전서》를 쓸 때는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였으니, 《고린도전서》와는 꽤 세월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 시절 바울이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내 문제를 처리하게 했는데,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디모데가 에베소로 갔는데, 거기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썩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디모데전서》 5장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를 다스리는 문제에 있어서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듣자 하니 지혜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 지혜 없음은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요? 디모데가 사회생활에서 이런저런 연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교회 치리의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앞선 장들에서 바울은 ‘할 줄 모르면 함부로 손대지 말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내가 가서 도와주고 함께 처리할 테니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디모데전서》를 이렇게 읽으니 그 맛과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목양 관계는 깨끗해야 한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디모데전서》 5:1-2)
바울이 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을까요? 관계가 다소 느끼하고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깨끗하지 못했을까요? 이 사람이 불미스럽거나 문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관계 처리가 매우 부적절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지 보십시오. ‘늙은이를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후배이니, 내가 후배로서 어르신을 권면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양 관계는 깨끗해야지, 처음부터 관계의 본질이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즉, 관계의 선을 정확하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까요? 디모데가 너무 미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일부 초보 목회자들이 미숙해서 권위를 세우려고 폼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노인을 권면하면서 ‘어디 감히? 어? 내가 디모데야!’라고 해버리면 끝장입니다. 왜 폼을 잡고 권위를 내세울까요? 미숙하고 노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권면할 때 관계를 망쳐서는 안 됩니다. 관계를 망치고 나면 그 노인은 덕을 세우기는커녕 당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노인들은 아버지처럼 대하고, 젊은이들은 형제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맛이 느껴지십니까? 그리고 나이 든 여인에게는 어머니처럼 대하고, 젊은 여인에게는 자매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에는 디모데가 이런 문제들을 처리할 때 매끄럽지 못했다는 문제가 은연중에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노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런 관계를 다루는 데는 상당한 노련함이 필요합니다.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아주 골치 아파집니다.
예를 들어 제 어머니의 경우, 저는 어머니가 저와 함께 선악을 분별하는(识别善恶) 상태에 빠지도록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마귀가 어머니에게 이런 거짓말을 퍼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먼저 그 거짓말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니 어머니 앞에서 폼을 잡거나 권위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어르신을 대할 때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중년층을 대할 때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왜일까요? 폼을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나 소년을 대할 때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상대에 맞는 합당한 태도로 말을 건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초보 목회자 훈련 때 말씀드리는 것인데, 다른 성도님들은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초보 목회자들에게는 목양하는 법을 가르치며, 목양 관계를 맺는 법, 상대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쓰는 법, 처신을 지혜롭게 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노인을 권면할 때 아버지처럼 대한다고 해봅시다. 어르신을 친아버지처럼 대한다면 어떤 언어를 쓰겠습니까? 아주 반듯하고 깨끗하며, 공경하는 태도로 전하니 효과가 있습니다. 젊은이에게는 형제처럼 대합니다.
여러분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비록 고학력 지식인이지만, 저를 보면 일종의 의리와 화끈함(江湖의 맛)이 묻어납니다. ‘의리와 화끈함’이란 무엇입니까? 형님 동생 하며 친구를 위해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정도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좋아집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까요? 치러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이런 결단과 약간의 의협심 있는 태도가 없다면 감당할 수 없으며, 폼을 잡고 목에 힘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가 권위만 내세운다고 생각하신다면 완전히 오해하신 것입니다. 훗날 우리가 갑작스레 만났을 때, 여러분이 저를 얕보고 교회를 떠난다 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의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관계를 너무 딱딱하고 차갑게 맺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난 수년간 목에 힘만 주는 목사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은 저렇게 하나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제가 목양하는 초보 목회자들이나 우리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저 역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관계를 먼저 잘 맺으십시오. 관계도 없는데 무슨 대화를 하겠습니까? 관계를 맺을 줄도 모르면서 무슨 목양을 하겠습니까?”
저에게는 한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새신자가 오면 5분 안에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그 5분 동안 맺은 관계를 바탕으로 목양을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를 깨끗한 관계, 순결한 관계라고 할까요?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말하듯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까’만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더럽고 불결한 거래에 불과합니다. 제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가 추잡한 관계일 수 없고, 제 형제와 맺는 관계가 추잡한 관계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젊은 여자를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쉬울까요? 어렵습니다! 디모데는 아주 잘생기고 점잖은 미남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깁니다. 젊은 여인을 목양한다고 할 때, 만약 상대가 윙크를 날리고 호감을 표시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디모데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눈짓으로 정을 보내는데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하니, ‘온전히 깨끗함으로 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가 참으로 깊습니다.
제 생각에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 ‘스승님, 그 자매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라며 편지를 썼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유혹을 보내오는 것이지요. 그러자 바울은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한 것입니다. 자매에게 하듯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런 이성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목사가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이 사람은 제 자매입니다”라고 하듯 그런 자매를 뜻한다면 큰일입니다. 무엇을 소개하는 것입니까? 주 안에서의 형제자매를 뜻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목양 관계입니다. 오늘 주제가 목양 전반은 아니지만, 《디모데전서》는 사실 바울이 그에게 목양하는 법을 가르치는 서신입니다. 관계를 맺되 깨끗한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부 문제를 처리할 때는 유연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부인지 아닌지 잘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 제가 어릴 적에는 동네에 과부가 있으면 속담에 “과부 집 문 앞에는 시비가 많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 과부 집 문 앞에는 말이 많을까요? 속담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과부에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문제가 많을까요? 과부의 문제는 반드시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요? 정욕과 관련이 있습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디모데전서》 5:3)
‘참 과부’란 무엇입니까? 과부로서 정결을 지키는 자가 진짜 참 과부입니다. 가짜 과부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과부라 하면서 뒤로는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디모데전서》 5:4-6)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디모데가 있는 교회로 수많은 과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에서 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디모데가 거기 있을 때 바울이 왜 과부 처리 문제를 언급했을까요? 디모데가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넘쳤지만 지혜가 없었습니다. 밖에서는 ‘저 교회에서 과부들에게 구제금을 준다더라, 돈을 받을 수 있다더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자 향락을 좋아하는 과부들까지 교회로 몰려와 먹고 마시고 놀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향락을 좋아하는 과부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전서》 5:7-16)
제가 긴 구절을 읽었는데, ‘디모데 외전’을 좀 듣고 싶으십니까? 좋습니다. 젊은 과부가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이 과부들이 진짜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믿으러 왔다면 문제가 쉬웠을 것입니다. 왜 교회에 왔을까요? 바울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디모데가 이 과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 분명합니다. 왜 문을 활짝 열어주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의자가 가득 차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면 밥을 주고, 말동무가 생겨 시간을 때울 수 있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과부들이 일하러 갈 곳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혼율이 60%에 달해 과부라는 개념조차 희미해진 시대지만, 당시에는 남편이 죽었거나 혼자가 되었을 때 할 일이 없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과부’라는 단어가 흔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일자리는 없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으며, 집에 돈은 조금 있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웠습니다. ‘교회에 가니 참 좋다, 수다 떨 사람도 있고 시간도 잘 간다’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지혜가 없어서 ‘오라, 너희가 다 구원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니, 할 일 없이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는 과부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 과부들이 바글거리게 되었습니다. 과부 문제는 에베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막 세워졌을 때도 잡음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전에 대만의 한 자매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알을 낳는 사람은 없고 똥 싸는 사람만 가득하다’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디모데에게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아도 오늘날 교회들이 어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까? 교회에 시간 때우러 오는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어떤 과부 한 명이 있었는데, 어떻게 교회에 왔을까요? 예전에 우리 교회에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왔다가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떠나서 동성애를 하다가 상대에게 버림받고 과부 아닌 과부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아이고, 괴로워라. 오늘도 괴롭고 내일도 괴롭다’며 힘들어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맞아들인 후 한 목회자를 배정해 섬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기 와서 장난치고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헛소리를 하면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목회자가 밤 12시에 그 사람 전화를 받고 끝없이 수다를 떨어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상한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즉시 그 목회자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놀아나지 마십시오. 밤에 잠이 안 와서 무료로 말동무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러 온 것입니까, 당신을 데리고 노는 것입니까?” 제가 꿰뚫어 보자 그 배후의 귀신도 기겁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십니까? 과제를 주어 읽게 하고, 다 읽고 노트를 정리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어디 한번 놀아보라는 식이었지요. 노트를 제출하라고 하자마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왜 첫날부터 콘텐츠를 축적해왔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가 101과정을 만들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101과정은 거름망입니다. 왜 사라졌을까요? 걸러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일 없이 당신과 잡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컴퓨터와 대화하십시오! 101과정으로 훈련받아야지, 가짜로 믿는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101과정뿐 아니라 102과정, 004과정, 003과정 등 모든 것이 거름망입니다. 거르면 거를수록 세밀하게 분별되니, 제게 와서 헛소리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디모데를 본받지 마십시오. 디모데는 이 과부들에게 시달리다가 위장병까지 얻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가 없는 것 아닙니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아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무한 루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바울이 보니 디모데가 60세 과부, 70세 과부, 20세 과부, 30세 과부들에게 온종일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동성애 과부까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디모데는 온종일 시달리느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이쪽도 처리해야 하고 저쪽도 처리해야 하는데, 일꾼이 부족하니 서둘러 안수하고 대충 넘어가며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과부들의 말상대를 해주었습니다. 디모데가 제 밑에 있었다면 아주 호되게 훈련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한 이 말들은 제가 우리 초보 목회자들에게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무슨 목양입니까? 그 관계가 어떻게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과부들이 말도 잘하고, 소란도 피우고, 애교도 떨고, 개그맨처럼 말을 청산유수로 잘한다고 해봅시다. 아주 대단합니다. 그 방면에는 전문가들입니다. 디모데는 청중이 되어 ‘아, 말씀 잘하시네요’ 하다가 대화에 휘말려 완전히 끝장나고 맙니다.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 배후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게으르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것이 그들의 특기입니다. 교회를 목양하는 우리가 잡담 실력으로는 결코 그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는 카카오톡이나 전화가 없었으니 과부가 디모데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온돌방에 앉아 디모데는 아랫목에, 과부는 윗목에 2미터쯤 떨어져 앉아 이야기하다가 점점 선을 넘습니다. 방 한가운데로 다가오더니 나중에는 얼굴을 마주 댈 정도로 가까워집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골치 아픈 일입니까? 할 일이 없으니 그러는 것입니다!
결국 디모데는 한두 번 농락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면서 교회에서 돈까지 받아 갔습니다. 콧물,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을 절대 쉽게 믿지 마십시오. 제 앞에 와서 눈물 콧물 쏟는 사람은 경계 대상입니다. 왜 웁니까? 화인 사명 신학(华人命定神学)은 눈물을 믿지 않고 성장을 믿습니다. 저리 가서 제대로 성장하십시오. 그렇게 못나게 굴지 말고 왜 웁니까? 억울합니까? 어디가 억울한지 말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선악을 분별하는(识别善恶)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왜 웁니까? 아직도 억울합니까? 내가 섬겨주었는데도 그렇게 행동하니 억울한 건 나인데, 당신이 왜 억울합니까? 그래서 교회는 거르고 또 거르는 것입니다. 억울해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당신에게 해를 입혔습니까? 누가 당신 돈을 떼먹었습니까? 아무도 그러지 않았는데 왜 웁니까? 교회 돈을 타가면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명부에 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을 주기 위함인데, 나이가 반드시 60세는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 59.5세는 어떻게 합니까? 생일까지 반년 남았다고 거짓으로 타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59세고 내가 60세입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십시오. 위조한 것 아닙니까?” 돈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은 최악의 방법입니다. 과부뿐만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은 매우 나쁜 방법이라는 사실을 저는 깊이 배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하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5:17-18)
디모데는 돈을 과부들에게 다 주어버렸습니다. 밖에는 과부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디모데의 시간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도 못했습니다. 과부들과 무슨 온전한 관계가 되겠습니까?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디모데가 그렇게 존경했겠습니까? 아마 안 했을 것입니다. 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하지 못했을까요? 시간마저 과부들에게 다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화인 사명 신학에서는 섬기는 자가 중심이 되고 섬기지 않는 자는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섬기는 자가 결코 고용된 사람이 아닙니다. 장로라고 해서 무조건 배나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이기 때문에 배나 존경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외전’을 더 말씀드리자면, 바울이 왜 앞에서는 과부를 말하고 뒤에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를 말했을까요? 교회를 잘 다스리는 어떤 장로들이 그 과부들을 교회 문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는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저리 가십시오. 각자 소책자 한 권씩 가져가서 집에서 공부하고 내일 노트를 가져오십시오.” 다음 날 보니 문 앞에 줄 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 아닙니까? 배나 존경받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디모데는 어떻게 대했습니까? 디모데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과부들을 다 내쫓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해 디모데는 그 장로들이 잘못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이 없습니까? 이 과부들이 우리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데요?’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맞아떨어집니다. 디모데는 모든 것을 거꾸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훗날 천국에서 디모데를 만나면 그가 무안해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그럴듯하고 위대해 보이던 이미지를 제가 낱낱이 파헤쳐 놓았으니 말입니다. 디모데가 교회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다고 절대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혜가 없으면 교회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매우 다루기 힘들며, 교회 안의 문제는 치명적입니다. 왜일까요? 단호하지 못하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못 하지만, 사랑이 있다 해도 육신을 따르는 그 체질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제가 섬기다 보면 사람들이 저를 더 이상 찾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물론 제 시간도 절약되고 쓸데없는 잡담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섬기다 보면 떠나는 사람이 생기는데, 떠나는 것이 잘된 일입니다. 섬기면서 붙잡아 두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디모데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는 배나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교회에는 조정되어야 할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해서, 쓸데없는 말을 지어내고 남의 일에 참견하며 게으른 과부들까지 다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구원받는다면 해가 서쪽에서 뜰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쉽게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참 변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자신이 변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변했는지 저에게 설명해 보십시오. “관우 앞에서 칼을 휘두르지 말라”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제 앞에서 재주를 부려보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서 전도만 일등이라니, 그런 법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복음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게으르기가 짝이 없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진정으로 변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진작에 변했습니다. 변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천 마디 만 마디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저도 입 아프게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제가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저는 “군대가 들이닥치면 다 통제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미얀마 북부 같은 험지에 보내지기만 해도 군소리 없이 다 고쳐질 것입니다. 노예근성 아닙니까? 목에 칼이 들어오면 다 고분고분해집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회가 조폭이나 악패 노릇을 할 수도 없고, 군대나 나치 수용소처럼 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저는 차라리 그런 자들 앞에 무서운 환경이 닥치기를 바랄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귀신이 찾아오면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단번에 해결됩니다. 고치고 싶어 할까요? 고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환경이 좋아지면 또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잘 다스린다’는 이 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교회를 잘 다스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없는 소리나 하고 헛짓하는 자들은 다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제게 와서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디모데가 아니라 바울입니다. 딴마음을 품고 놀아보려 한다면 단단히 바위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우리 중에도 게으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제게서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목사에게는 이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라야지, 말로만 수고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복음 전하는 일만 맡고 가르치는 일은 맡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슨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헛소리나 하는 과부 무리를 잔뜩 데려와 놓고 대단한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가르치는 건 누가 합니까? 제가 해야 합니까?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장로라고 해서 무조건 배나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릴 줄 아는 장로’라야 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 같은 장로는 그만두는 편이 낫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다 말아먹고, 재산을 팔아 유무상통하는 것만 알다가 게으름뱅이 무리와 짐승 같은 자들만 키워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제가 그 진실을 짚어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세운 그 가르침과 논리 체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것도 ‘디모데 외전’입니다. 디모데에게 ‘이 장로는 이래서 나쁘고 저 장로는 저래서 나쁘다’는 고발이 빗발쳤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어떤 장로가 나쁜 장로입니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책망한 장로가 나쁘다고 지목당합니다. 장로에 대한 고발장에는 거짓으로 꾸며낸 것도 있고,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어 온갖 것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주로 고발당합니까? 바로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입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이 형제, 저 자매를 볼 때마다 녹음기 틀듯 “평안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만 반복하면 아무도 고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와서 “교회에 구제금을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할 때, 접수하는 사람이 “네네, 등록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태워 보내면 아무 일도 없고 돈을 받아 기쁘게 돌아가니 고발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구제금을 받으러 와서 “저는 과부입니다”라고 하기에 “나이가 몇입니까?” 물었더니 “서른 살쯤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일이나 하십시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고발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디모데는 지혜가 참으로 부족해서 교회가 늘 사랑만 넘치기를 바랐습니다. 과부에게 돈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고발장이 들어왔을까요?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초보 목회자들을 목양하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사람이 왜 저러지? 사랑이 없나?” 하고 참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제 일이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어떤 초보 목회자가 어떤 상태인지는 제가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많은 일을 다소 혼란스럽게 처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디모데가 연약했기 때문입니다. 왜 연약했을까요? 깨달음(悟性, 영적 지각력)이 그리 밝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깨달음이 뛰어난 디모데였다면 성경에 디모데가 쓴 서신서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디모데가 쓴 서신서는 없으며, 디모데는 그런 글을 쓸 줄도 몰랐습니다. 교회 역사 전체에서 디모데가 남긴 뚜렷한 공헌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공헌하고 축적하며 기록을 남긴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가 대단히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연약함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그를 쓰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으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누구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겨질 수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5:20-25)
디모데가 겁이 많고 연약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디모데가 강단이 있었다면 진작에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범죄한 자를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으라고 했는데, 디모데에게 그런 담력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해야 그에게 담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이 말씀들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이 뉘앙스가 읽혀지십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끌어오고 천사들까지 끌어와 디모데에게 담력을 실어주려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장로를 고발하는 자들, 트집 잡는 자들, 문제의 과부들과 허탄한 신화를 지어내는 늙은 부녀들, 그리고 거짓말하고 외식하며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며 ‘범죄한 자를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으라’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시여, 제게 무슨 용기를 주신다 해도 저는 모든 사람 앞에 서서 이것이 죄라고 말할 담력이 없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너는 너무 육신적이고, 너무 선악을 분별하는구나!’라고 책망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무슨 담력이 있었겠습니까? 왜 담력이 없었을까요? 뼛속까지 연약했기 때문이고, 연약함은 사실 깨달음(悟性)이 부족한 데서 옵니다. 깨달음이 없는데 어떻게 담력이 생기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 깨달음이 있어야 할까요? 지각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책망한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책망해도 교회는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람이 떠날까 봐 두렵습니까? 그렇다고 기어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의 특징은 체면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단을 포대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 하! 우리의 강단은 포대입니다. 범죄한 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포탄을 날리는 전자포(레일건)와 같아서 반동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책망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죄가 창궐하기 시작하면 홍수처럼 범람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건축하고 다스리는 일에서는 결코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타협하면 큰일이 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이렇게 풀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 강의를 검색해 보십시오. 우리처럼 강해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 엉터리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너만 옳으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문해력만 있어도 본문을 제대로 읽어보면 이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범죄한 자에게는 타협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타협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의 체면을 봐주게 됩니다. 왜 체면을 봐줄까요?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편견이 생깁니까? 불공평하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입이 너무 거칠어서 죄라고 지적했다가는 나를 할퀴러 올 텐데, 손톱도 뾰족하게 깎아두었더라. 죄라고 말했다가는 말벌집을 쑤시는 격이 될 텐데’ 하는 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편견을 가져서도 안 되고, 불공평하게 행해서도 안 됩니다.
왜 불공평하게 행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에 다니는 한 자매가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회사에 암사자 같은 여직원이 있는데 사장님도 그 사람 앞에서는 쩔쩔맵니다.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그 사람이 사고를 쳐도 아무도 말을 못 합니다. 건드리면 쏘아붙이니까요.”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골치 아픈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누구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디모데는 분명 안수를 잘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왜 이런 말을 썼겠습니까? 무슨 안수였을까요? 안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을 받게 하는 안수입니다. 이것은 권위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손을 얹어 직분을 임명하고 초보 목회자나 목회자로 세우는 안수입니다. 사람을 잘못 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앞선 장들에서 감독이나 장로, 집사를 세울 때 조심하라고 하며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귀가 얇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노인이나 할머니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덜컥 안수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 짐작이긴 하지만, 안수를 경솔히 하지 말라는 것은 조급하게 행하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고 잘 시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잘 시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서두르면 다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검증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지 말며,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해야지 함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다스리는 데는 참으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의 리더를 세우는 문제, 과부들을 다루는 문제, 죄를 처리하는 문제 모두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경직되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 쓰라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문제 삼는데, 오늘 제가 조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앞서 다룬 안수 문제는 성령을 받게 하는 안수가 아니라, 리더를 임명하고 직무와 책임을 맡기는 안수를 뜻합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전서》 5:23)
이번에는 무슨 문제일까요? 많은 사람이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 기도해 주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기도해 주었겠지만, 디모데는 생각이 너무 많고 지혜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위장병이 다시 도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도집니다! 그러므로 많은 문제는 깨달음(悟性)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의 깨달음이 트이고 생각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려면 세월이 한참 걸릴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소화가 안 되고, 생각이 너무 많으며, 처리할 문제는 첩첩산중이라 허둥지둥대다 보니 위장이 쑤시고 아픈 것입니다. 그가 《디모데전서》를 읽고 다음 날 위장병이 도지면 어떡하겠습니까? 속이 쓰리고 괴로운데 어쩌겠습니까? 포도주를 조금 마시는 것, 이것이 바로 유연함입니다. ‘병이 났을 때 귀신 쫓는 기도가 소용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디모데의 지각과 깨달음이 온전히 통하지 못해 자꾸 마귀의 거짓말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예수를 믿고 예수께 속했는데 왜 아직도 귀신이 들립니까?’라고 썼더군요. 왜 안 들리겠습니까? 당신의 그 깨달음 수준으로 볼 때 당신 내면의 어느 부분이 진정으로 예수께 속해 있습니까? 갓 믿었다고 해서 모든 영역이 예수께 속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땅이 수두룩합니다.
경직되지 말고 술을 조금 쓰십시오. 왜 술을 쓰라고 했을까요? 독주는 때로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물론 술에 취해 방탕한 것은 좋지 않지만, 약으로 조금 쓰는 것은 분명 유익합니다. 저는 사실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실사구시(实事求是)’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구체적인 실제 상황에 맞추어 문제를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술을 조금 쓰는 것이 효과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사구시입니다.
예를 들어 심장병이 완치된 한 형제가 있었는데, 한 달 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제가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을까요, 술을 조금 마시게 했을까요? 한번 맞춰보십시오. 아마 틀리실 것입니다. 저는 술을 조금 마시라고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이틀 뒤에 기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제가 시도해 보았고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장이 불편할 때 술을 조금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도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감염이 잘 안 되었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걸렸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마시고 나면 속이 화끈거리고 열이 나서 답답할 수 있지만, 술을 마시면 당연히 그런 느낌이 듭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을 뿐입니다. 경직되지 마십시오. 실제로는 꽤 유익합니다.
제가 혈자리를 짚으며 기도할 때 짚지 않고 기도할 때보다 효과가 훨씬 좋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는가? 안 짚고 기도하면 역사가 안 일어나는가?’라고 묻습니다. 성경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했는데, 어디에 얹느냐가 바로 실력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감사하게도,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잘 낫지 않던 까다로운 환자들의 특정 혈자리를 누르자 귀신이 즉시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급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사람이 유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융통성 없이 미련해져서는 안 됩니다. 믿다 믿다 디모데처럼 지혜가 결핍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요? 제 생각에 디모데가 ‘나는 예수를 믿으니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고집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누이부터 올케까지 온 가족이 질병에 걸린 가정이 있었습니다. 쌍둥이 시누이는 우울증에 걸려 있었는데, 올케의 병이 낫자 온 가족을 차에 태우고 10시간 넘게 운전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찾아왔으니 식당에 데려가 밥을 먹이고 숙소를 잡아준 뒤 병을 다루려고 백주(고량주)를 한 병 시켰습니다. 겨울이었으니까요. 그랬더니 ‘우리 장로님이 계셨으면 큰일 날 일’이라며 온 가족이 기겁했습니다. 아니, 당신들의 장로가 예수님보다 높습니까? 예수님도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술을 전혀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술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경직된 것이 너무 많고, 벗어버려야 할 가식과 위선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드셨습니까, 안 드셨습니까? 드셨습니다. 취하셨습니까?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디모데는 마셨습니까? 안 마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한 것입니다. 술을 조금도 입에 대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의 핵심은 교회를 다스리는 문제, 특히 복잡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말씀을 드렸는데, 천국에 있는 디모데가 듣고 저를 탓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