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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베드로후서 2장 -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을 주의하라

2026-03-25 1,094 彼得后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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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得后书-假先知和假师傅
  • 1 从前在百姓中有假先知起来,将来在你们中间也必有假师傅,私自引进陷害人的异端,连买他们的主他们也不承认,自取速速地灭亡。
  • 2 将有许多人随从他们邪淫的行为,便叫真道因他们的缘故被毁谤。
  • 3 他们因有贪心,要用捏造的言语在你们身上取利。他们的刑罚,自古以来并不迟延;他们的灭亡也必速速来到(原文是也不打盹)。
  • 4 就是天使犯了罪, 神也没有宽容,曾把他们丢在地狱,交在黑暗坑中,等候审判。
  • 5  神也没有宽容上古的世代,曾叫洪水临到那不敬虔的世代,却保护了传义道的挪亚一家八口。
  • 6 又判定所多玛、蛾摩拉,将二城倾覆,焚烧成灰,作为后世不敬虔人的鉴戒;
  • 7 只搭救了那常为恶人淫行忧伤的义人罗得。(
  • 8 因为那义人住在他们中间,看见听见他们不法的事,他的义心就天天伤痛。)
  • 9 主知道搭救敬虔的人脱离试探,把不义的人留在刑罚之下,等候审判的日子。
  • 10 那些随肉身、纵污秽的情欲、轻慢主治之人的,更是如此。他们胆大任性,毁谤在尊位的,也不知惧怕。
  • 11 就是天使,虽然力量权能更大,还不用毁谤的话在主面前告他们。
  • 12 但这些人好像没有灵性,生来就是畜类,以备捉拿宰杀的。他们毁谤所不晓得的事,正在败坏人的时候,自己必遭遇败坏。
  • 13 行的不义,就得了不义的工价。这些人喜爱白昼宴乐,他们已被玷污,又有瑕疵,正与你们一同坐席,就以自己的诡诈为快乐。
  • 14 他们满眼是淫色(原文是淫妇),止不住犯罪,引诱那心不坚固的人,心中习惯了贪婪,正是被咒诅的种类。
  • 15 他们离弃正路,就走差了,随从比珥之子巴兰的路。巴兰就是那贪爱不义之工价的先知,
  • 16 他却为自己的过犯受了责备;那不能说话的驴以人言拦阻先知的狂妄。
  • 17 这些人是无水的井,是狂风催逼的雾气,有墨黑的幽暗为他们存留。
  • 18 他们说虚妄矜夸的大话,用肉身的情欲和邪淫的事引诱那些刚才脱离妄行的人。
  • 19 他们应许人得以自由,自己却作败坏的奴仆,因为人被谁制伏就是谁的奴仆。
  • 20 倘若他们因认识主救主耶稣基督,得以脱离世上的污秽,后来又在其中被缠住、制伏,他们末后的景况就比先前更不好了。
  • 21 他们晓得义路,竟背弃了传给他们的圣命,倒不如不晓得为妙。
  • 22 俗语说得真不错:狗所吐的,它转过来又吃;猪洗净了又回到泥里去滚;这话在他们身上正合适。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드로후서> 2장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의 성경 읽는 방법, 예를 들어 주제 찾기와 같은 방식을 터득하셨다면, 베드로가 쓴 글은 주제를 찾기가 유난히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 어렵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아 얼핏 번지르르하고 멋진 말을 잔뜩 쏟아낸 것 같지만 주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논제라면, 그의 논점은 매우 어지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채팅창에 “선생님, 베드로가 우리더러 자기 자신을 조심하라고 한 것 아닌가요?”라고 적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로 베드로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을 조심하라

베드로는 형제자매들에게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을 조심하고 이단을 조심하라고 훈계하려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이 정통에 서 있다고 확신하고,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해 보면, 베드로는 자신이 정말로 정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틀렸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는 무엇이 이단인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무엇이 거짓 선지자이자 거짓 선생인지 너희에게 알려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논리 자체가 문제입니다. 시작부터 자신은 이단이 아니며 정통이라고 전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매우 위험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회개하고 주를 위해 순교하려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의 글을 읽고 나서 혼란스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정리해 드릴 텐데, 다 듣고 나면 “아, 정말 그렇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저 자신도 진리를 다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어떤 이는 “스스로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느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여러분, 결코 제 말을 맹종하지 마십시오. 제 말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함께 탐구하고, 함께 신앙의 체계를 구축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창세기>부터 <모세오경>, 그리고 이후 선지자들의 글과 사복음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베드로와 바울의 서신에 이르기까지 전부 정리하고 나서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체계가 구축되어 결코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서 우리가 그토록 진지하게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이유이며, 바로 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함입니다.

이단이 찾아와 우리를 미혹하고 어지럽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 이해력과 분별력이 열려 있느냐 막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조심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조심해야 합니까? 최고의 조심은 계속해서 탐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누가 여러분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속이지 못합니다. 저를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를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제 얼굴이 진리를 대표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고, 온전한 신앙의 체계를 바르게 세워 나가십시오.

베드로가 한 말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드리는 이유는 무턱대고 맹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에게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당신이 옳게 해석한 것이 맞느냐?”라고 묻습니다. 저는 다 맞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읽느냐, 이해하지 못하고 읽느냐입니다. 많은 사람이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읽으면서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질문해 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면 솔직하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는 경고하고 훈계하려 하지만, 그 훈계의 내용이 매우 어수선합니다.

무엇이 이단입니까? 이단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는 너무나 피상적입니다. 진짜 지폐와 위조지폐를 나란히 두면 육안으로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쉽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볼펜으로 100위안짜리 지폐를 그려서 진짜 돈 옆에 둔다면, 그것을 위조지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것은 위조지폐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위조지폐란 무엇입니까? 진짜 지폐와 똑같이 생겨야 위조지폐인 것입니다. 볼펜으로 대충 그린 돈을 은행 창구나 ATM에 넣으려 하면, 은행 직원이 당장 내던져버리지 않겠습니까?

음란한 행위를 따르는 것이 이단인가?

소돔과 고모라가 이단입니까? 거기에는 이단이고 정통이고 할 것조차 없습니다. 분별할 필요도, 조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천사 둘을 끌어내려 했고, 그 음란함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단이라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애초에 그런 범주에 들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서 날 때부터 축생 같고 눈에는 음란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에 왔는데 눈에 음란함이 가득한 사람이 있다면 못 알아보겠습니까? 눈빛으로 추파를 던지는데 그것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단입니까? 이것은 이단의 범주에도 들지 않는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가르침이 뒤엉켜 있으니 당연히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베드로후서> 2:2)

기독교라는 큰 환경 속에서 많은 곳이 이단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몰몬교도 이단이라 하고, 여호와의 증인도 이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몰몬교 사람들을 접해 보았을 때, 그들이 주님을 믿는 모습은 참으로 생명력이 넘쳐 보였습니다. 그들에게서 음란함이나 눈짓으로 유혹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들 반듯한 군자 같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전능하신하나님교회가 올린 간증을 보아도 음란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그런 사악하고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음행을 저지르며,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 <베드로후서>의 논리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기어이 그 레위인의 첩을 끌어내어 온 성읍 사람이 윤간하게 한 사건이 이단입니까? 그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논점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집니다. 그는 이런 명백한 일들, 교회 안은 고사하고 교회 밖 정상적인 도덕 범주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끌어다 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도대체 무엇을 논하고 있는 것이며,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입니까? 이런 자들이 거짓 선생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합니다. 볼펜으로 그린 100위안짜리 가짜 돈처럼, 보기만 해도 '이게 무슨 거짓 선생인가, 선생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 압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 거짓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며 겉으로는 매우 그럴듯하고 거룩한 척하는 모습을 지닙니다. 음란한 행위를 따르는 것은 애초에 그런 논의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탐심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이단인가?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3)

그런 것을 이단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바로 드러납니다. 제가 보아온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곳들이나 스스로 정통이라 자처하는 교회들을 보면, 그들이 행하는 자선 활동은 우리가 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어 대만의 재난 지역에서 불교계의 기부금이 기독교계의 헌금보다 더 많았는데, 그것이 탐심으로 이득을 취한 것입니까? 말이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단은 그렇게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따르는 행위나 탐심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문제이며, 바로 여기에 베드로 논술의 맹점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불교도들의 마음은 꽤나 선량합니다. 사심이 없을까요? 기독교인이든 누구든 사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처리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면, 불교도들이 표면적으로 탐심을 품고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인 탐욕과 착취는 애초에 교리적 범주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천사들이 지옥에 던져지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베드로후서> 2:4)

이 구절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천사가 범죄하여 지옥에 던져졌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횡행하고 있습니까? 만약 지옥에 갇혀 봉인되었다면, 이 땅에 귀신이 어디 있고 타락한 천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없어야 맞지 않습니까.

후에 연구하면서 저는 천사들이 범죄하고 타락한 뒤 어디에 거하는지 발견했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에 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심마(마음의 마귀)'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거합니까, 사람의 마음에 거합니까? <베드로후서>의 신학 체계는 지극히 혼란스럽습니다. 베드로의 머리는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머리를 굴려 써낸 것 같습니다. 순두부만큼의 알맹이라도 있었다면 칭찬이라도 해 주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심판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천사라니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심판하십니까? 심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으며, 거기에는 타락한 천사들도 포함됩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무슨 일을 합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데, 바로 쓰레기를 치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천사들의 일입니다. 베드로의 논리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는데, 듣기에 지극히 혼란스럽습니다. 이 천사들에게는 애초에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타락한 천사들을 지으시고, 사람과 온갖 나무와 수많은 것들을 만드셨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작용하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택하여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보배를 가려내는 곳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마태복음> 13:47-48)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가 이런 내용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들은 예수님께서 거의 말씀하지 않으신 것들이며, 예수님이 이런 내용을 가르치신 적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천사가 나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노아 시대에 이단이 있었는가?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베드로후서> 2:5)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이단을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내용은 매우 기이합니다. 홍수가 경건하지 않은 시대에 임했다고 하지만, 그 시대는 물질적 욕망이 넘쳐나고 폭력이 가득한 시대였지, 무슨 경건하냐 경건하지 않으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런데 '의의 도를 전파하는 노아의 여덟 식구를 보호하셨다'고 말합니다.

묻겠습니다. 노아가 그 시대에 무엇을 전했단 말입니까? 의의 도를 전파했다고요? 노아 가족은 그저 서둘러 목숨을 건져 피하기에 바빴습니다. 의의 도를 전파했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논조는 사실 대단히 이상한 논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신학 체계를 이어받아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노아가 의의 도를 전파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노아는 매일 방주를 지었을 뿐이며, 보러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마는 식이었습니다. 노아 시대는 이단과 무관하고,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시대는 명백히 폭력으로 가득 찬 시대였으며, 의의 도와도 별다른 상관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가 이단의 문제였는가?

노아 시대가 이단의 문제였습니까?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의 문제였습니까?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대학 입학시험 작문 제목이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거짓 선생을 조심하라, 이단을 조심하라”였다면, 베드로의 글은 분명 낙제점이었을 것입니다. 거창하게 장황하게 썼지만, 조금만 분석해 보면 전부 엉뚱한 이야기들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단과 무관하며, 오히려 당시의 롯에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베드로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것입니까? 배운 것도 없고 식견도 없이 그저 글자만 잔뜩 늘어놓은 격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면서 이단을 조심하라는 문제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가르칩니다.

노아 시대도 이단의 문제가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 시대도 이단의 문제가 아닌데, 베드로가 참으로 학문과 식견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는 지식인도 교양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수식어만 잔뜩 늘어놓았지, 핵심이 무엇인지도 모를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그가 형제자매들에게 이단과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고 훈계하려 했다 하더라도, 그의 논술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천사들을 끌어내 강간하려 했던 시대이자 동성애가 횡행하던 시대로서,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온갖 음란물이 넘쳐나지만,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나 소돔과 고모라로 여행을 가면 성읍의 남녀노소가 다 몰려와 몹쓸 짓을 하려 했습니다. 그 추악함과 온갖 역겨운 짓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단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 이단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슬람교, 도교, 불교에서도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종교와 무관한 곳에서나 일어나는 추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름진 땅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반면 롯은 기름진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 돈을 벌러 소돔으로 갔으며,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은 머리가 굳어버린 것입니까?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망쳐놓고, 바울이 세운 교회로 가서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헌금을 좀 챙겨야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며, 결국 자유 순회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결론을 얻었습니까? 롯이 소돔에 복음을 전하러 갔단 말입니까? 악인들의 음란한 행실 때문에 근심했다는 말을 어디서 찾아낸 것입니까? 저는 왜 읽지 못했겠습니까? <창세기>에서는 그런 뉘앙스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처럼 읽어내셨다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기꺼이 겸손하게 배우겠습니다. 롯은 결코 의인이라 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성경> 원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해 내셨다고 되어 있지, 롯이 의인이어서 구원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무슨 의인이란 말입니까?

오직 롯 자신만이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는가, 이 음란한 곳에서도 여전히 처녀로 지키지 않았는가' 하며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곳이 음란하다고 느꼈다면 애초에 그곳에 왜 갔습니까? 게다가 거기서 뒹굴며 성문 어귀를 지키는 자리까지 꿰차고 앉았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의 신학 체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을 뿐 의인이 아니며, 사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돈을 위해 살았습니다.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이 이단과 무슨 상관인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겨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간사한 꾀로 즐겨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베드로후서> 2:10-14)

오늘날 이단 안에서도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말들에 현혹되어 어리둥절해하기 일쑤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사람이 <성경>을 어설프게 읽고는, 둥글게 둘러앉아 한 마디씩 기도할 때, 세상에나! 그 문구들이야말로 베드로에게서 물려받은 나쁜 습관이었습니다. 지극히 화려한 거창한 명사들을 써가며 기도하는데,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누가 더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나 경쟁하는 것이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도 없는 헛소리입니다! 한 시간 동안 기도하면서 한 마디도 겹치지 않게 하니 대단해 보입니까? 여러분도 틀림없이 보셨을 것입니다.

천사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졌는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천사가 대단하다'는 논리 체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다른 모든 것은 천사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하늘의 개, 하늘의 고양이, 하늘의 말,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이 땅의 많은 것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본떠 창조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곤충 중 쇠똥구리가 이 땅에 있다면 영계인 하늘에도 쇠똥구리가 있습니다. 땅에 족제비가 있다면 하늘에는 족제비의 영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땅의 다른 동물들은 하늘의 동물, 즉 하늘의 천사들을 본떠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사람이 존귀합니까, 동물이 존귀합니까? 사람이 존귀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천사는 동물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왜 천사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까? 묻겠습니다, 사람이 대단합니까, 천사가 대단합니까? 천사는 섬기는 영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입니다. 바울은 천사가 우리의 부림을 받는 존재이며, 심부름하고 일하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전체 신학 체계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체계입니다. 그는 천사가 더 큰 힘과 권능을 가졌음에도 주 앞에서 비방하는 말로 고발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가 직접 보았습니까? 그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설교하기를 “천 명 중 아흔아홉 명은 지옥에 가고, 단 한 사람만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셨습니까?”라고 묻자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함부로 지어내어 말합니까? 베드로가 말한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베드로후서>를 쓸 때 제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당신이 직접 보았소? 그걸 어떻게 아시오?” 베드로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글을 썼습니까?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이런 이단을 만들어내려는 것입니까? 저는 근거 없이 함부로 지어내는 소리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제가 목양하는 사람들 중에도 베드로의 성격을 뚜렷하게 가진 이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베드로의 성격은 앞뒤 안 가리고 함부로 지어내어 말하기를 좋아하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함부로 지어내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남자든 여자든 베드로와 같은 나쁜 습관이 있다면 철저히 고치십시오. 모든 것에 있어서 자신이 배우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 더 큰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누가 더 큽니까? 성령님이 더 크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발람이 이단과 무슨 상관인가?

발람은 이단과 눈곱만큼의 상관도 없습니다. 발람은 점쟁이에 불과했으며, 하나님의 도를 전파하는 자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가 선지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사 선지자적 예언의 말을 조금 하게 하셨을 뿐, 그것은 이단과 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의 입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뿐입니다. 성령이 사울에게 임하여 예언하게 하셨던 것처럼, 그것이 이단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언할 줄 아는 사람들을 대단히 숭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몇 마디 말씀을 전하신 것일 뿐, 당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이단과 상관이 없으며, 그는 몇 마디 예언을 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발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실은 형편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형제자매들은 예언 몇 마디 한다고 해서 대단해진 줄 착각하며 이런 것들을 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예언과 환상을 숭상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예언 저런 예언을 할 시간에 집에 가서 <성경>이나 더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 태도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제가 여러분이 점쟁이식 선지자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것(설교)을 좋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머리만 즉흥적으로 굴려 입을 열어 예언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대단해 보입니까? 저는 전혀 대단하게 보지 않으며,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어떤 이가 “선생님, 제가 일자리 세 곳의 제안을 받았는데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봐주십시오”라고 하면, 제가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이걸 골라라! 내가 환상을 보았다”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신의 나쁜 습관을 철저히 다루고 자신을 잘 빚어가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점을 치려 합니까? 차라리 사주팔자를 보지 그렇습니까? AI 사주풀이가 아주 잘 맞더군요. 저도 시험해 보았으니 여러분도 맞나 안 맞나 시험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까? 살아내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발람은 대단한 선지자였을지 모르나 사실은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참 선지자였지 거짓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주신 바를 진실로 말했기에 진짜 선지자였지만,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쫓는다면 저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예언 따위나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차라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꿰뚫어 보고 아브라함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신학은 깨달음이 매우 뛰어난 신학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영적 은사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그들의 결말이 좋지 못한 것을 보았기에 저는 몹시 조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온전히 깨달아 <성경>에 부합하는 신학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분석해 보니, 베드로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신학 체계 밖에 있으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고 베드로 자신이 지어낸 것들이었습니다. 만약 이단을 논한다면, 저는 오히려 베드로에게 이단의 혐의가 있다고 봅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21)

만약 그들이 의의 도를 알았다면 의의 길을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이 길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당연히 갈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엄청난 이득입니다. 이 길을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갔다가 결국 속아 넘어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기당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은혜가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을 진정으로 알고 우리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안다면, 그까짓 쥐꼬리만 한 이익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리겠습니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알고 있었다고 여깁니다.

제가 길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습니다만, 사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쓴 글은 대구법과 수사법은 아주 잘 썼을지 몰라도 내용은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론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의 신학은 혼란스러운 신학입니다. 겉보기에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해서 현혹되지 마십시오. 실제로는 주제와 내용이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저더러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고, 거짓 선생을 조심하며, 이단을 조심하라는 주제로 설교하라 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할 것이고, 거짓 선생들은 반드시 음행을 피하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참과 거짓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참과 거짓은 그가 전하는 가르침이 실제로 능력이 나타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성령을 힘입어 육체의 행실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죽어서 천국 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점차 깨달아 가십시오. 사명신학은 베드로가 가르친 것과 야고보가 가르친 것을 명확히 걸러낼 수 있으며, 이는 대단한 신학 체계입니다. 오늘날 가장 결핍된 것은 온전한 신학 체계입니다. 만약 온전한 신학 체계를 세울 수 있다면, 베드로가 한 말이나 야고보가 한 말이 마냥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이며, 사실 여러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한계를 꿰뚫어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조심하십시오. 겉보기에만 거창하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경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다시 서서 <성경>에 부합하는 신학 체계를 새롭게 구축합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아야 하고, 자신이 믿는 바가 진정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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