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어서 《느헤미야》 10장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우리가 언약을 세우고 맹세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번거롭다고 느껴질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하느라 바쁩니다! 게다가 십일조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훨씬 더 번거롭고 골치 아픈 일입니다!
만약 똥도 안 나오고 오줌도 안 나오는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생각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이번 장의 주제는 “우리가 언약을 세우고 맹세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저는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어째서 굳이 언약을 세우고 맹세까지 해야 합니까?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않기 위해 굳이 언약을 맺고 맹세까지 해야 한다면, 제 생각에는 그냥 관두는 게 낫습니다! 만약 저더러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언약을 세우고 맹세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말자고 하라고 한다면, 저는 딱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리 가라!” 톈진 말로는 이렇고, 동북 방언으로는 “집어치워라!”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무엇이 더 중하고 무엇이 덜 중한지를 모르는 것을 보면 탄식이 나옵니다! 정말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이런 일에 무슨 언약을 세우고 저주하며 맹세할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참으로 의아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늘 이 일이 수지맞지 않는 일(손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며 이토록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해야만 하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한번은 제가 싱가포르에서 아흔 살 되신 어르신 한 분을 모시고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운전석에 앉고 그분이 조수석에 앉았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나한테 유익한 일인데, 왜 당신이 나를 설득해야 합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유익한 일인데, 왜 굳이 제가 여러분을 설득해야 할까요?
그것은 사실 여러분이 아직 똥도 안 나오고, 오줌도 안 나오고,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숨도 못 쉬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계에 이르러서야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저리 가라!”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저를 매우 의아하게 만듭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사실 저도 여러분께 되묻고 싶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또 왜 이렇게 했을까요? 느헤미야는 똑똑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수지맞는 일(유익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한 이 일은, 사실 해봤자 헛수고였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서명하고 날인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했다 할지라도, 제 생각에는 “저리 가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저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오. 저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 싫은 분은 “저리 가십시오.”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십시오. 여러분이 가지 않으면 제가 가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는 사람은 이쪽으로 오고, 하나님을 섬기기 싫은 사람은 저쪽으로 가십시오! 저는 그런 교회를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오.
사실 저는 사역할 때마다 자주 탄식합니다. 대소변을 못 가리고, 밥을 못 먹고, 호흡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사역할 때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사역해 준 것을 얼른 기록해 두어라. 네가 회복되었을 때 당시에 겪었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평생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면, 아무런 영광도 없는 이런 고통을 겪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데 얼마나 큰 고생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이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서명하고 날인할 필요도 없이 이것이 수지맞는 일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두리안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리안이 냄새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향긋하다고 합니다. 향긋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두리안 과육을 먹고, 냄새난다고 느끼는 사람은 차라리 껍질이나 먹으십시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언약을 맺고 맹세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후 이 사람들이 성전을 버렸을까요? 버렸습니다! 언약을 맺고 맹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리안 껍질을 먹는 사람이나 언약을 맺고 맹세하는 법입니다.
언약에 서명한 사람들
당시 느헤미야는 자신이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하여 이 언약서를 작성했고, 원하는 사람들은 서명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서명한 자들은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서명했으니 그는 자원하는 마음이었겠지만, 제사장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 바스훌 등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자원하여 서명하기를 원했다면 이전의 그런 비극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작에 뭘 하고 있었습니까? 이전에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기 원했던 자들입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언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훗날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을 버렸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말라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까지 약 430여 년 동안,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과 이야기하다가 여러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책망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분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입을 닫아버렸는데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결국 “저리 가라”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패역하고 배은망덕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제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같은 형제자매들이 있기에 저는 하나님과 억지로 언약을 맺을 필요가 없으며,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저주하며 맹세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이 이것이 유익하고 수지맞는 일임을 알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 어찌 그리 어렵겠습니까?
이번 장에 서명한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이름은 알지만 저는 그들을 모릅니다. 느헤미야는 서명하게 하면 동의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문화대혁명 시절로 돌아가서 여러분에게 서명하라고 한다면 감히 서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명하지 않으면 타도당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군중 운동이라는 것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며, 결국 강요에 의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득실 계산을 잘하시기를 간곡히 권면합니다. 만약 수지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관두십시오. 만약 정말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제대로 섬기십시오.
오래전에 저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울 때 찬양을 부르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면 다들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진절머리 나게 보았습니다. 저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며,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느끼셨습니까? 화인 사명 신학에 오시면 저는 여러분과 감정 놀음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감동받고 눈물 흘리며 맹세하는 등의 일은 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진행했을 때 서명하지 않으면 망신을 당하니, 그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감동을 크게 받는 것도 별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낱 느낌에 불과하며 감정의 배설일 뿐입니다. 그가 정말 회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집어치우십시오! 저는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보았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유익한 것은 형제자매들이 지각(명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손익을 따져보십시오. 이것이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저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함께 굳건히 세워가십시오. 만약 수지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서명하고 날인할 필요도 없고, 눈물 흘리며 저주로 맹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이 분명해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지금은 다 건강하고 좋을지라도, 언제 대소변을 못 가리고, 숨을 못 쉬며,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영적 세계는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영적 세계를 아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세계는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귀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하늘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땅을 쳐도 반응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말하듯 골방에 숨어 기도하고 하나님과 친밀해지겠다고 해봤자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에서 섬김은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입었으니 제가 여러분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저 또한 은혜를 입었으니 여러분이 제게 감사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노자가 왜 《도덕경》을 썼겠습니까? 자기가 원해서 쓴 것입니다! 여러분, 알아들으셨습니까? “내가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선택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위해 죽고,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니, 바로 내가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을 종이 위에 쓰지 말고 마음 판에 새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에 대해 매우 명확한 인식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이러한 귀신들은 본래부터 우리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해 여러분을 괴롭히러 오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여러분을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저를 괴롭히지 않으셨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니 저주 아래 살지 말고 축복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저는 느헤미야와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았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예를 들어 헌금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분이 저더러 헌금하라고 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제가 배운 한 가지 교훈은, 결코 여러분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헌금은 여러분 자신에게 수지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난 왜 이게 이득인지 모르겠지?”라고 한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병원에 돈을 바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참으로 탄식하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손익 계산을 잘하셔야 하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저에게 체면을 차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 체면을 세워준다 한들 저는 그런 체면을 바라지도 않으니, 깨닫지 못하겠다면 “저리 가십시오!”
나머지 백성들이 귀족 형제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함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우리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느헤미야》 10:28-31)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나서 이것이 참으로 사람을 잡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백성들이 저주하고 맹세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7년마다 1년씩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을 여러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미국의 농부든 중국의 농부든, 그들에게 7년마다 반드시 1년을 쉬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려 병원에 가도 치료할 방법이 없다면 그냥 포기할 것입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눈을 뒤집고 온몸을 떨며 침을 흘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원에 모셔가야지요! 병원에 안 모셔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래도 저래도 다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보고 소통이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나를 위하여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전토와 집을 버리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 “집어치우십시오, 그게 어떻게 말이 됩니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머릿속에 쓰레기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으로 유익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제칠년에 땅을 쉬게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 몇 마디 말씀 외에도 사람들에게는 믿지 못하는 말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와 너무나 강하게 충돌합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결국 “하나님, 저리 가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다 재앙을 만나 똥도 안 나오고, 오줌도 안 나오고, 밥도 못 먹고, 숨도 못 쉬며,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를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진짜로 “저리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면의 논리 체계는 너무나 강고합니다. 제가 매일 겪는 것이 바로 이런 일들입니다. 저는 사역할 때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무너뜨려 주고자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만약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악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7년째에도 농사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귀신 하나를 보내어 여러분을 치실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말라기가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 가운데 살아서 거두어들인 것을 하나님께서 불어 날려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거둘 때는 다 좋아 보였는데 나중에는 왜 다 썩어버렸을까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저는 자기 성격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제가 말하면 백발백중 들어맞는데, 육에 속한 사람들의 죄와 그들 몸에 붙은 귀신을 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지혜와 명철이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걸핏하면 아프고, 이쪽이 안 좋았다가 저쪽이 안 좋아지는 등 늘 어딘가 고장이 납니다. 그러면 저는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의 한 자매님이 저를 위해 쓴 찬양이 있는데, 바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라는 곡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것이 수지맞는 일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제칠년에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엄청난 지혜입니다. 이 밭은 내년에 쉬고 저 밭은 내후년에 쉬는 식으로 돌아가며 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을 한꺼번에 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한 해 동안 무엇을 먹고 마실까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먹여 살리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섯째 날에 평소의 두 배에 달하는 만나를 거두었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장담하건대, 사람이 자신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모르면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의 생명이며,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 귀신의 말은 영이요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체 어느 쪽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한 율례와 규례, 통혼의 금지, 안식일, 안식년 등은 세상의 논리에는 전혀 맞지 않게 들립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자기 손으로 벌어 자기를 먹여 살리며, 모든 돈은 자기가 한 푼 두 푼 모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먹여 살리신다고 믿는다면,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한 자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지금부터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 ‘당연하고 지극히 합리적’으로 들리는 그 생각들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 육신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하면 온갖 재앙과 패망을 면할 수 있고, 여러분을 치러 오는 원수들을 피할 수 있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과 대소변도 못 가리는 고통의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험하고서도 다시 돌아서서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탄식이 나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말씀이 너무나 많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모든 문제는 영적 세계의 문제이고,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게 주신 권세를 힘입어 지금까지 사역해 올 수 있었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그날까지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갈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입고 그분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핵심 이익이며, 이것이 저의 추구이자 생명이며, 저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주하며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유익하고 수지맞는 길을 가겠다고 굳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결코 근시안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목이 짧으면 저주로 맹세하고 서명하고 날인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바치기로 규례를 정함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느헤미야》 10:32-33)
묻겠습니다. 헌금하려 할 때 주머니에 돈이 없거나 몹시 가난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규례를 정했다는 것은 일종의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매년 각 사람마다 삼분의 일 세겔을 바치는 것입니다. 만약 한 달 월급이 일 세겔이라면 십분의 일 이상을 드리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없어도 바쳐야 할까요? 여기서 바로 갈등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한순간에 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조금씩 돈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생기기 시작할 때 마땅히 바쳐야 할 은을 신속히 드리십시오. 그러면 남은 것이 축복을 받습니다.
규례대로 드려야 할 것을 돈이 있을 때 드리지 않다가 돈이 없을 때 억지로 내놓으려 하면, 마치 돼지를 잡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본인이 바로 그 돼지가 되어 돼지 잡듯 꽥꽥 비명을 지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마음에 그런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조만간 가난해지고, 마음에 부유함이 있는 사람은 결국 부유해집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결과는 그 사람 마음의 반영일 뿐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보기에 저 사람은 아주 잘 사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빚이 어디서부터 닥쳐올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손익 계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예를 들어 남들은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우고 본인도 잘 사는데, 어떤 사람은 본인은 잘 사는 것 같아도 자녀가 엉망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게 고모들이 몇 분 계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외아들로서 매우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셨고, 어머니 역시 매우 효성스러운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제 고모는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셨을 때 돈을 아끼려고만 했습니다.
훗날 그 고모는 저희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올케가 키운 아들은 저렇게 훌륭한데, 우리 집 아들들을 보면 마약에, 도박에, 도박 빚만 잔뜩 졌으니 어쩌면 좋아.” 자기가 심은 것을 자기가 거두지 않으면 누가 거두겠습니까? 그 시절에 대체 무엇을 하셨습니까?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참으로 복이 있으신 분입니다! 매일 저희 할아버지를 돌보셨는데, 이 시대에 그렇게 지혜로운 며느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할아버지께서 반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어머니는 대소변을 다 받아내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셨으니, 얼마나 수지맞는 일입니까?
당시 어머니는 이런 손익을 계산하지 않으셨지만,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것이 큰 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한순간에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며, 낳은 자녀들도 다 빚을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제비 뽑아 나무를 바칠 족속을 정함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 족속대로 정한 기한에 매년 우리 하나님의 전에 나무를 가져다가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느헤미야》 10:34)
제단에 쓸 장작을 마련하는 일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에도 땔감이 필요하고 다른 집에도 땔감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장작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가스나 전기가 필요합니다. 요즘 제단에는 가스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밸브만 돌리면 불이 붙고, 용광로에 전원만 넣으면 타오릅니다. 요즘은 인프라가 워낙 좋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겨울에 장작이 필요 없는 집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저희 어릴 때만 해도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수돗물은 정말 위대한 발명인데, 지금 여러분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2,600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규례를 정하고 제비를 뽑아 장작을 예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번거롭습니까? 정말 번거롭습니다. ‘우리 집에도 땔감이 없는데?’ 하던 시절이니 그때는 에너지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에너지, 시간, 돈, 희귀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그 장작 몇 개가 부족해서 그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나무를 바치려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시며 그의 아들이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그때부터 금을 모으기 시작하여 금 3,000달란트를 모았습니다. 1달란트가 약 90kg이니 3,000달란트는 금 270톤에 달합니다. 자원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 270톤의 금으로 벽을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벽을 알루미늄 합금 패널로 마감한 것이 아니라 순금으로 마감했으니 그 화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돈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윗은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무거운 말씀입니다. 이번 주일에 저는 여러분에게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270톤의 금을 준비했습니다. 그 많은 금으로 무엇을 한들 못 하겠습니까? 지하철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지하철을 놓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실크로드를 개척한들 어찌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그 무엇에 투자한다 해도 하나님의 성전에 투자하는 것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우리의 시간, 자원, 돈, 금과 은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핵심 이익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생각이 흔들려서는 안 되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손익을 분명히 계산해야 합니다.
다윗의 그 270톤의 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온 이스라엘 백성이 5,000달란트의 금을 바쳤는데, 다윗 한 사람이 3,000달란트의 금을 바쳤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에게 270톤의 금을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광산에서 직접 캐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떻게 주셨을까요? 주변 이방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셔서 그들의 보물창고에서 금을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길을 가다가 발로 차고 파헤치기만 해도 금이 쏟아져 나와 그것들을 다 싣고 왔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벌어들인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부터 마지막까지, 그리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270톤의 금이 생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것과 처음 난 것을 바치기로 규례를 정함
처음 익은 것과 처음 난 것은 모두 최고의 상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시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논리이지만, 바칠지 말지는 여러분의 선택과 복에 달려 있습니다.
한 해 농사를 지어 갓 수확한 곡식은 보기에도 참으로 좋고 알곡이 꽉 차 있어 밥을 지으면 구수한 향이 진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바쳐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제사장이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늘 최고의 것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속으로 ‘가장 좋은 것은 제사장이 다 먹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훗날 그들은 헌물을 드리지 않았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굶주려 일하러 떠났으며,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해졌고 사람들은 성전을 버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치려 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신을 바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큰 복입니다. 처음 익은 것과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십일조 헌금의 규례
어떤 사람은 “아이고, 나는 1년에 10달란트밖에 못 버는데, 규례대로 1년에 은 삼분의 일 세겔을 내라더니 또 십일조를 내라고 하네. 이미 삼분의 일 세겔을 냈는데 왜 또 십일조가 나오는 거지? 헌금할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결코 손대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익은 것과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 진멸될 물건(바쳐진 물건)이 되어 여러분 또한 그것들과 함께 진멸당하게 됩니다.
저는 이 일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가 왜 기꺼이 드리고자 할까요?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저는 사람이기에 평생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시면 바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인 걸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힘으로 언제 대소변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조차 결정할 수 없는데, 이 돈을 쥐고 있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합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저는 당신의 백성이며, 저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의 일은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제게 하나님이 계시면 귀신이 저를 해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게 하나님이 없으면 귀신이 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귀신을 보내실 것입니다. 십일조를 아껴서 무엇 하겠습니까? 십분의 일을 아끼려다 십분의 십을 다 날려버린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훗날 제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했을 때—사실 저의 헌금은 십일조를 훨씬 뛰어넘습니다만—제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면했는지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원래 10원이 있었는데 십일조를 드리고 나면 9원이 남습니다. 그런데 그 남은 9원이 원래의 10원보다 더 많아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10년의 세월 동안 제 연봉은 10배로 뛰었고 진정한 재정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돈은 정말 중요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나중에 저는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는데 제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가 왜 돈보다 값진 존재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대단히 존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면의 논리 체계를 새롭게 정리하십시오. 여러분이 돈을 사랑하여 남은 9원이 불어나기만을 바란다면, 불어나지 않을 때 화가 치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헌금을 드릴 때 그것이 불어날지 몰랐지만, 나중에 실제로 불어났고 그것도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본말을 전도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핵심 이익은 하나님이지, 그 9원이 불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석류나무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골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거제물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임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느헤미야》 10:37-39)
이 구절을 듣고 나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을 빼앗아가시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돈을 주시는 것 같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돈을 빼앗아가신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마십시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지키시며 돌보셔서 약탈당하는 고통을 겪지 않게 하시려는 것임을 안다면 헌금하십시오.
난징 대학살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바칠 필요가 없었으니 죽어서도 바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묻겠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서 손해 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게 “목사님, 더 이상 헌금하지 마십시오”라고 한다면 저는 거절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투자이며, 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으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세속적인 삶에만 매몰되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만 빠지면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게 됩니다. 세상 삶이 하나님과 돈을 다투기 때문이며, 헌금할 때마다 마치 돼지를 잡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합니다. 사람이 바로 그 돼지, 어쩌면 ‘동방의 돼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헌금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절대 헌금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헌금하고 나서 저도 마음이 불편하고 여러분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안다면 돈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은 사람에게 돈이 부족하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돈 이야기만 나오면 감정이 상합니다.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역자가 가난한 이유는 십일조 헌금을 이야기하는 것이 돈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져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저 돈을 가져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돈은 그중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헌금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물질조차 헌신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으며, 가는 길 내내 대단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시원하고 유쾌한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에 이를 것이니, 가장 기본이 되는 시작이 바로 헌금입니다.
이번 성경공부의 주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굳이 필요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헌금도 크게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충분히 오래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충분히 오래 살다 보면 그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라이브 방송 채팅창에 “제가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한 자매님이 계셨는데, 십수 년 동안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않더니 지금은 치료비로 엄청난 돈을 쓰고 계십니다”라고 글을 올리셨습니다. 쓰라고 하십시오! 그것은 밑 빠진 독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핵심 이익에 도전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멘! 이번 성경공부는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