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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유다서 요약

2026-04-15 1,126 犹大书

유다, 야고보, 베드로는 모두 스스로 진리를 소유했다고 여겼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다, 베드로, 야고보의 신학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유다서》의 요약인데 왜 유다, 베드로, 야고보의 신학 사상을 다루는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야고보, 베드로 이 세 형제는 예루살렘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첫날부터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교회를 식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헌금하고 나서는 온종일 일도 안 하고 모여서 떡만 떼고 있었으니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것도 큰 떡을 떼며 다들 밥이나 먹으러 갔으니 교회를 식당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야고보, 유다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이 교회를 망쳐 놓았다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고, 교회가 무너졌다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이렇게 저렇게 잘못해서 그리되었다며 후대를 위한 교훈 하나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러한 독이 그 어떤 독보다 지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이 올바른 태도인지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태도는 ‘내가 끊임없이 구하고, 끊임없이 탐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구하지도 않고 탐구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절대적인 진리를 가졌다고 착각하여 이 사람은 이단이다, 저 사람은 이단이다 판단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실 때 땅에 찾는 자가 있는지, 깨닫는 자가 있는지 보시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저는 끊임없이 찾고 구했기에, 유다든 야고보든 베드로든 그들이 말하는 것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후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 그들이 말하는 논리가 사도 바울이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논리와 같은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논술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경건해야 하는지 가르치려 했으며, 어떻게 겸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할 때 모나지 않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려 했습니다. 이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신학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읽어보신 분이라면 그들이 화려한 어휘들을 잔뜩 쌓아 올려서 본질과 상관없는 문제를 논술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제가 가끔 풍자 섞인 말을 하곤 하는데, 이 사람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것 같습니다. 그들이 쓴 글들을 보면 장황하게 한참을 논술했는데, 문장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별문제가 없지만 정작 자신들이 논술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무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이 겸손입니까? 겸손이란 끊임없이 구하고 탐구하는 태도입니다. 곧 ‘나는 진리를 다 소유하지 못했기에 계속 구한다’는 자세입니다. 스스로 다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비극 아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보십시오. 이 시대에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다시 “몇 년도에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2012년에 거듭나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2014년에 거듭나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며칠 전 한 친구를 만났는데, 예전에 헤어진 후 같은 직장에서 일하지 않게 된 친구였습니다. 나중에 주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친구 말이 자기네 소그룹에 70대 어르신 한 분이 계시는데 자기 관점과 다르면 몹시 분노하며 이단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비일비재합니다. 다들 자기가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태도는 힘써 추구하는 것이며, ‘나는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망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에 대학 입시를 치를 때는 대략 3~4% 정도만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지방 사립대까지 다 합쳐도 겨우 4%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1년을 준비해도 떨어지고, 또 1년을 해도 떨어지고, 그다음 해에도 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나 다 알아, 몇 년을 공부했는데 내가 모르겠어?” 하지만 시험만 보면 떨어지고 성적은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대학 낙오자’라고 불렀는데, 걸러지고 체로 쳐져서 빠져나간 사람을 뜻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올바른 학습 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낙오자’, 예수 그리스도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낙오되면 큰일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야고보, 베드로 같은 사람들은 낙오자가 아니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런 면이 다분히 있어 보입니다.

유다, 야고보, 베드로는 높은 지위를 몹시 중시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높은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왜 그들이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글을 썼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사도요, 둘째 사도요, 셋째 사도요, 교회의 장로라는 직분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는 신분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를 망쳐 놓은 뒤에 아래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손가락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처럼 야고보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고 말한다면, 야고보는 분명 기분이 몹시 상했을 것입니다. “내가 대사도인데 너희가 감히 나를 비방해? 비방하는 것은 곧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훼방하는 것이다”라며 지위와 신분을 몹시 따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면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어찌하겠습니까?

유다와 베드로가 쓴 글을 보십시오. 사탄에게 말하고 마귀에게 말하면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가 말하는 방식은 조금 거칠어서 “사탄아 물러가라! 마귀야 떠나가라!”라고 합니다.

도대체 뭘 쓴 것입니까? 마귀가 어떻게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저처럼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귀신이 그렇게 악랄해서 사람을 망가뜨리고 온갖 질병을 일으켰는데,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과를 씻어냈음에도 그 놈들은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거기 대고 “나가 주시겠습니까? 이곳은 이미 예수님께 속했으니 주께서 당신을 꾸짖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사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귀인데도 존중해 주어야 합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천사까지 끌어들이지는 않았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비방하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이르러 제 차례가 되었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 결코 저를 황제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비방하려면 하십시오. 저는 한 줌의 개똥과 같아서,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바로 지위와 헛된 자존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당신이 5년 전에 설교한 것과 지금 설교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제가 변명할 줄 알았겠지만, 저는 5년 전의 말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틀렸으면 틀린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빠르게 성장하여 5년 만에 과거의 주장을 뒤엎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5년 전에는 틀렸지만 지금은 성장했고, 여전히 힘써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질문했던 사람이 화가 나서 “이 친구, 참 질문에 꿈쩍도 안 하네”라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어떤 놈입니까? 저는 개똥 같은 놈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지위를 중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니, 왜 내 말을 안 듣습니까? 내가 당신의 영적 부모입니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해괴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어떤 교회들의 치리 체계를 보면 ‘영적 부모’ 개념을 밀어붙여서 소그룹 리더가 영적 부모라고 합니다. 제가 있던 시절에도 영적 부모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무조건 그 사람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사람더러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하는 셈이었지만, 저는 굳이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경공부 시간에 엉터리 소리를 늘어놓아도 저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저 역시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래에서 조용히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저는 제 설교 원고를 성경책 여백에 적곤 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의 겸손이든 교만이든 다 자신들의 높은 지위에 도전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식당으로 전락하고 이방인을 목양하는 직분을 잃어버렸는데, 그 높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마음에는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의 논리가 맞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들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혀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신학 체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올바른 것은 사람을 영화롭게 하거나 그들이 말하는 체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저 역시 여러분에게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으니 내게 와서 얼른 보충수업을 받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노트 필기는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성경공부 할 때는 헛소리나 늘어놓으면서 아랫사람더러 순종하라고 하니 도대체 무엇에 순종하라는 말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제발 조심하여 스스로 우매해지지 마십시오.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영광을 돌리려면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적 부모라는 개념은 매우 사특합니다.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만약 어느 날 제가 여러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면, 그때는 제가 야고보, 베드로, 유다처럼 변한 줄 아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순종하든 안 하든, 저는 제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보통 실력 있는 사람은 체면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 와서 우매해지지 않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왜 멍청해져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런 체계가 사람을 우매하게 만드는 데는 아주 사특한 힘이 있습니다.

유다, 야고보, 베드로가 바라본 인생관은 한낱 헛된 안개에 불과했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도 사람이 사는 것이 헛되다고 설교하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제가 말하는 ‘헛됨’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헛되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한 말이나 베드로가 한 말을 보면 다 이런 뉘앙스가 묻어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으로 먹고살았는데, 그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더 먹이시든 덜 먹이시든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돈을 좀 벌겠다고 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비즈니스하여 돈을 버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 문제 없지 않습니까? 일은 안 하고 앉아서 갉아먹기만 하니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을 완전히 거덜 내 버렸고, 그래 놓고는 ‘인생은 한낱 안개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는 것이 없다면, 이런 말은 불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헛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더라도 창의성을 발휘한다면 사회의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많은 성도가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문제를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제 능력이 부족하지만,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다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계를 잘하는 분이 있다면, 부족한 회계 담당자가 그분에게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으르고 문제가 있다면 호되게 훈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빚어내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은 가만히 앉아서 축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십시오. 야고보는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무릎에 굳은살이 박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의 방식은 마치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과 비슷합니다. 대승불교든 소승불교든 불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고행하고 수행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면은 따져서 남들이 이렇궁저렇궁 말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면서, 정작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인생은 한낱 안개일 뿐이라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유다, 야고보, 베드로는 교회관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꼭 알아야 합니다. 일단 개인적인 수행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유다, 야고보, 베드로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이 개인 수행의 논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관’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권세: 원문은 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6:18-19)

교회관의 부재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바로 ‘목양’의 부재입니다. 그러므로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은 본질적으로 목양의 신학입니다. 교회를 세워서 무엇을 합니까? 목양해야 합니다. 목양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스님으로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참 좋지 않습니까? 누가 이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잘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 안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예’가 되며, 다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토록 풍성한데 어떻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만사 다 초탈하여 스님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무릎에 굳은살이나 박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굳은살을 잘라내어 한약재로 쓸 수 있습니까? 자기가 지공(濟公) 스님이라도 되는 줄 압니까? 목에서 때를 밀어 뭉쳐서 남에게 약이라고 먹일 셈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세울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경 전체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훗날 사도 요한에 이르러서—유다, 야고보, 베드로 외에 요한이라는 절친한 동역자가 있었는데, 요한은 베드로 일행보다 수십 년을 더 오래 살았고 나이도 대여섯 살 더 젊었습니다.

이 늙은 요한은 사실 처음부터 베드로와 야고보 일행의 방식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다 세상을 떠난 후, 노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승리하는 교회’에 대한 계시를 보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승리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쇠락해 가는 전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승리하는 교회의 계시를 매우 체계적으로 다시 서술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수행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들을 비교하여 설명해 드리고 있는데, 오늘 다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경 구절을 일일이 다 찾아볼 시간이 없으므로 몇 가지 핵심만 뽑아서 말씀드리니 여러분이 직접 성경을 찾아보십시오. 교회관이 결여된 것은 인생의 비극입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반드시 승리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제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분들 중에는 사역자나 교회를 이끄는 리더들이 많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비록 서너 명, 대여섯 명, 혹은 열두 명을 인도하더라도 여러분은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성도들을 잘 목양해야 하며, 반드시 승리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교회가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울 때는 반드시 승리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승리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우면 됩니다. 반석 위에 세웠는데 어찌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하도록 예정하셨으니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부유함에 대해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분석하면서, 야고보가 어떻게 이런 편견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부에 대해 매우 깊은 편견을 가지고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모두가 거부(巨富)였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것이 왜 영적이지 않은 것이며, 가난한 것이 어찌하여 영적인 것이 됩니까?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자기 체면을 지키기를 좋아해서 자기가 가난해지면 반드시 가난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저는 가난을 몹시 증오하며 결코 가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난한 형제자매가 있으면 제 마음에 늘 큰 부담으로 남습니다.

우리 소그룹 사역자들은 저와 마음을 같이해 주어야 합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난한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찢어지게 가난해 본 사람이라면 가난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압니다. 제가 전에 매우 가난한 어떤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그분은 60세였는데 십 대 초반의 자녀를 하나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가 십 대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았는지 아십니까?

집 한 칸 없이 셋방을 전전했고, 교회 재정은 늘 바닥이 나서 몹시 힘겹게 살았습니다. 제가 “집을 한 채 장만하셔야지요. 3, 4선 도시는 집값도 얼마 안 하니 비싸지도 않습니다”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체면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너무 가난해서 영적인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가난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영적이라면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자기 체면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을 탓하지 않습니다. 저라도 그들의 처지였다면 제 체면을 아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알량한 체면을 아끼지 않기에 가난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교회의 재정을 탕진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 교회는 매우 부유했지만, 수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날마다 먹이기만 했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당 15위안, 20위안짜리 국수 한 그릇이라 쳐도 3천 명, 5천 명이 날마다 그렇게 먹어대면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교회가 온통 그런 일에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회가 가난해진 뒤에 부유함에 대해 자기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부자는 영적이지 않고, 가난한 자가 영적이다’라는 것이 바로 야고보의 논리였습니다. 물론 제 말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적혀 있느냐?”라고 따진다면, 그런 구절은 없습니다. 야고보나 베드로가 그렇게 대놓고 쓸 리는 만무하며, 제가 그들의 속내를 파헤친 것입니다. 그가 왜 부를 싫어했는지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부자는 세속적이고 가난한 자라야 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역자를 관찰해 보니, 유독 야고보서를 즐겨 설교하는 사람들은 다 가난했습니다. 입만 열면 야고보서를 인용하는데, 그들도 야고보서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자신도 명확히 쓰지 못했고 그들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써먹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노릇 아닙니까?

유다, 야고보, 베드로의 신학은 실행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제가 왜 이 세 사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까요? 여러분, 제게 조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발끈하지 마십시오. 저는 사실 그들을 매우 존중합니다. 어떻게 존중하느냐 하면, 그들이 쓴 말씀을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쳤기 때문입니다. 화인명정신학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으면 그대로 행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행해지지 않아서 저는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이것이 행해지지 않습니까?” 이제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행하라는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걸 어떻게 행합니까?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부터 행할 수가 없어서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너는 내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내가 행한 것처럼 너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니 저도 또 다른 천지를 창조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때 내 영이 그곳에 운행하게 하고, 네 입을 열어 소망을 선포하면 빛이 있게 된다.” 아! 이 말씀이 제 눈을 번쩍 뜨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내가 행한 대로 너도 행해야 한다. 내가 한 것처럼 너도 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기쁘고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사무실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보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그날 성도들과 함께 창세기 1장을 공부하는데 다들 감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해석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으니 우리도 각기 종류대로 질서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서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그렇게 기도해도 도무지 실행할 길이 없었습니다. 장담하건대 저는 야고보서를 1,000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결코 1,000번 이하로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우 진지했고, 사실 야고보와 베드로를 깊이 존중했기에 그대로 행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실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계시를 받고 나니, 야고보와 베드로와 유다를 호되게 꾸짖으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비판하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성경에 수록된 책인데 저를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따져보니 그들 자신도 그렇게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행하며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글자도 쓸 줄 몰랐는데 무엇을 행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역할 수 있는 3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말년까지 글을 쓸 줄 몰라 실라와 마가를 비서로 두어야 했습니다.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들도 행하지 못하면서 글을 써놓고 남더러 행하라고 하니 완전히 꼬여버린 것입니다. 글 전체의 논리가 엉망진창입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삶에 적용하고 실행하기를 좋아하는데, 도무지 실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N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부자를 혐오하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감히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전혀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이해가 되십니까? 믿음이 겨자씨만 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살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로는 의심이 전혀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를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높여 놓으면 누가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자리에 누워 꼼짝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는데 그가 무엇을 행할 수 있습니까? 행위를 보인 후에야 치유를 받아야 합니까?

이러한 말들은 사람의 믿음을 심각하게 무너뜨립니다. 제가 왜 이런 말들이 사람을 망친다고 하겠습니까?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 믿음이 숨이 턱에 닿을 듯 희미하더라도 살아있는 믿음이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제 믿음이 꺼져갈 듯 희미했을 때,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게 그토록 큰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가 벼랑 끝에서 몸부림치며 미래를 보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을 섬길 때 바라는 것은 오직 여러분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야고보의 요구보다 훨씬 낮으면서도 동시에 훨씬 높습니다. 왜 훨씬 낮습니까? 들어가는 문턱은 매우 낮지만, 성장해 가는 길은 매우 길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처음부터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며 몰아붙일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는 못 했고, 이삭과 야곱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행하겠습니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제가 말씀을 읽고 이러한 감동과 계시를 받은 후, 야고보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의 아우였을지라도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다, 야고보, 베드로의 신학적 논리는 극도로 혼란스럽습니다

이 세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어떤 문장을 들었을 때 ‘이 말 참 멋지다, 듣기에 참 그럴듯하다’ 싶으면 가져다 씁니다. 어떤 식입니까?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또는 더러움)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다서 1:12-13)

듣기에는 ‘와, 표현이 참 아름답다!’ 싶지 않습니까? 하지만 논리가 엉망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저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유다는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다 해놓고도 정작 본론의 주제를 논증하지 못했습니다. 책을 쓰든 글을 쓰든 중심 논점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첫째, 둘째, 셋째의 논거가 있어서 자신의 논점이 타당함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 야고보, 베드로 이 세 사람은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본문과 상관도 없고 듣기에만 화려한 미사여구들을 닥치는 대로 나열해 놓았습니다. 논리가 엉망진창인데 본인들만 모릅니다. 야고보가 쓴 글은 사실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의식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갈라디아서를 읽고 나서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야고보서》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두 글을 대조해 보면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논리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성경공부 강해를 다시 꼼꼼히 보시면 정말로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제를 논증하지도 못하면서 바다의 거친 물결이니,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만 늘어놓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으니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머리가 맑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야고보, 베드로, 유다 이 세 사람을 묶어서 말씀드렸지만, 결코 그들을 억울하게 모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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