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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시편 51장 -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2025-09-07 1,617 诗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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诗篇-求主赦免
  • 1  神啊,求你按你的慈爱怜恤我!按你丰盛的慈悲涂抹我的过犯!
  • 2 求你将我的罪孽洗除净尽,并洁除我的罪!
  • 3 因为,我知道我的过犯;我的罪常在我面前。
  • 4 我向你犯罪,惟独得罪了你;在你眼前行了这恶,以致你责备我的时候显为公义,判断我的时候显为清正。
  • 5 我是在罪孽里生的,在我母亲怀胎的时候就有了罪。
  • 6 你所喜爱的是内里诚实;你在我隐密处,必使我得智慧。
  • 7 求你用牛膝草洁净我,我就干净;求你洗涤我,我就比雪更白。
  • 8 求你使我得听欢喜快乐的声音,使你所压伤的骨头可以踊跃。
  • 9 求你掩面不看我的罪,涂抹我一切的罪孽。
  • 10  神啊,求你为我造清洁的心,使我里面重新有正直(或译:坚定)的灵。
  • 11 不要丢弃我,使我离开你的面;不要从我收回你的圣灵。
  • 12 求你使我仍得救恩之乐,赐我乐意的灵扶持我,
  • 13 我就把你的道指教有过犯的人,罪人必归顺你。
  • 14  神啊,你是拯救我的 神;求你救我脱离流人血的罪!我的舌头就高声歌唱你的公义。
  • 15 主啊,求你使我嘴唇张开,我的口便传扬赞美你的话!
  • 16 你本不喜爱祭物,若喜爱,我就献上;燔祭,你也不喜悦。
  • 17  神所要的祭就是忧伤的灵; 神啊,忧伤痛悔的心,你必不轻看。
  • 18 求你随你的美意善待锡安,建造耶路撒冷的城墙。
  • 19 那时,你必喜爱公义的祭和燔祭并全牲的燔祭;那时,人必将公牛献在你坛上。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 제목은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입니다. 이 설교는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느낀 지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하고 통회함이 없으니,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리더부터 동역자까지, 동역자부터 목회자까지, 목회자부터 소그룹 목자까지, 소그룹 목자부터 형제자매에 이르기까지 다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나 이 정도면 꽤 괜찮지’ 하고 느끼게 되고, 그러고 나면 일이 터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에게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흡족해하고 달콤함에 젖어 있다면 이건 정말 큰일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태도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태도를 보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실 때도 태도를 보고 택하십니다.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도 태도를 보고 뽑으며, 태도가 많은 일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크게 개의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외모가 잘생겼는지 예쁜지도 상관하지 않으시며, 무슨 ‘키 크고 잘생긴 부자’나 ‘피부 하얗고 예쁜 부자’ 같은 것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작은 죄를 지었든 큰 죄를 지었든 그것을 따지시기보다 당신의 태도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야기를 해보자면, 다윗은 남의 손을 빌려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강제로 빼앗아 아내로 삼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밧세바가 그로 인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돌아와 아내와 잠자리를 갖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어째서 다윗을 이렇게 닮았지?’ 하고 다들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아는 피부가 가무잡잡한 편이고, 다윗은 희고 뽀얀 편인데, ‘어이쿠, 어째 자랄수록 다윗을 닮아가지?’ 다행히 그 시절에는 유전자 친자 확인 검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으니, 이야기대로라면 이제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침대에 누워 눈만 감으면, 우르르 귀신 떼가 몰려와 “다윗, 너 정말 악하구나!” 하고, 또 우르르 귀신 떼가 와서 “네가 우리아를 죽였잖아! 네가 밧세바를 취했잖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합창단처럼 파트별로 나뉘어 다윗이 지은 죄를 찬양하듯 떠들어댔고, 귀신들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이때 다윗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떼를 지은 귀신들이 보이고 수많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윗, 넌 구제불능이야. 넌 형편없어. 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제가 묻겠습니다. 다윗이 “나는 참소를 거부한다, 저주를 끊어낸다, 물러가라!” 하고 외쳤을까요? 소용없고 먹히지 않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피 흘린 죄를 범하면 귀신은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 태도는 바로 ‘내가 회개하겠다, 내가 고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쳤을 뿐만 아니라 시편 51편까지 썼습니다. 우리 설교의 제목이 바로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입니다. ‘내가 고치겠다’, 이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단순히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에 귀신이 온종일 그를 괴롭혀서 사울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다윗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만약 이때 다윗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고 나면, 자기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저에게 몇 번이고 거듭해서 변명합니다. 사실 그 사람은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아이고, 듣는 제가 다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뭘 변명합니까? 변명한다고 해서 당신의 잘못이 정당화됩니까?

만약 다윗이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즉 평범하고 어리석은 지구인들의 방식대로 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실 제 탓만은 아니잖아요. 그 여자가 대낮에 거기서 목욕하면서 저한테 보여줬잖아요. 보고 나니 제가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날 제가 양고기탕을 한 그릇 마셨는데 구기자까지 들어있었거든요. 아이고, 그건 도저히 주체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 데려왔고 동침했는데, 그러고 나서 임신을 한 겁니다. 안 그랬으면 제가 어찌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겠습니까? 제 잘못이 아닙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께 그렇게 말했다면 끝장났을 것입니다. 다윗은 틀림없이 사울의 병, 즉 정신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데려온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정신병의 영이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정신병이나 우울증은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질병입니다. 아십니까?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골반이 아프거나 무릎이 아프거나 목뼈가 아프거나 두통이 있는 그런 육체적 통증이 아닙니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그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귀신이 찾아왔는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왜 귀신이 왔을까요? 다윗이 죄를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허물을 지워주실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시편 51편을 써서 천하에 공개하고 온 백성이 읽고 배우게 했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다윗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내 어리석음을 온 나라 백성에게 알려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그리고 상하고 통회함이 얼마나 보배로운지를 온 백성이 알게 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고 나서야 이런 습관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때 비로소 생긴 습관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내가 잘못했다. 이건 내 잘못이니 바르게 바로잡아야겠다’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이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저지르는 일은 참 많은데, 상하고 통회함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상하고 통회함에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매긴다면, 1단계 통회, 2단계 통회, 3단계 통회, 10단계 통회 중 당신은 몇 단계의 상하고 통회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기를 당했을 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듭니까? 사기당한 돈만 생각하느라 상하고 통회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이고, 그 사기꾼 놈 죽도록 밉다!’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어릴 때부터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훈련되었는지 아십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세 살 때 고집불통이면 커서 반드시 어리석어집니다. 세 살 때부터 조율할 줄 알고, 어릴 때부터 어떻게든 바르게 바로잡는 법을 배웠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다윗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다윗이 왜 어릴 때부터 회개하고 끊임없이 조율하는 태도를 가졌는지 제가 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건대, 이것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전에 어떻게 훈련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일 아닙니까?

저도 어릴 때 이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 안에는 그런 옹고집이 없었습니다. 고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별의별 고집쟁이가 다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운전하면서 계속 앞으로 가면 바다에 빠지는데, “어라, 어제도 여기 지나갔는데 누가 다리를 부쉈지?”라고 말합니다. 다리가 철거되었다고 탓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정말 이렇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일을 제대로 바로잡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잘 안 풀리면 끝까지 붙잡고 씨름해서 기어코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훗날 말씀드리지만, 어른이 된 후 많은 일에서 고생을 훨씬 덜 했습니다.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라, 일이 왜 이렇게 엉뚱하게 됐지? 헐어내고 다시 하자!’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고, 코드가 왜 이따위로 엉망이지? 싹 지우고 다시 짜자!’

고치기를 거부한 채 원래의 엉망인 코드 위에 덧대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잘못되었는데 위에 덧붙여 봐야 소용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해서 결국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대학 가서 뭐 하려고?’ 물으면, ‘아니요, 난 그냥 대학 갈 거예요’라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와서 일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학 과제야 돈을 주고 남에게 써달라고 할 수 있다 칩시다. 졸업하고 출근하면 누가 일을 대신해 줍니까? 제 표현대로라면, 월급 1만 위안 받으면서 2만 위안짜리 사람을 사서 일시키면 매달 1만 위안씩 손해를 보는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돈만 많고 멍청한’ 짓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릴 때부터 기초를 잘 닦아야 하고, 잘못되었으면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무엇에 대해 상하고 통회했는지 아십니까? 우리아를 죽이기 전, 그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잤습니다. 왜 마음이 그렇게 편안했을까요? 자신이 너무나 잘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평온하고, 주변 열국을 다 굴복시켰으며, 나에게는 최강의 군대와 최고의 원수, 최고의 대장과 중장과 소장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밤에 술도 한잔하고 푹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보고는, 9시에도 더 자고, 10시에도 더 자고, 오후 2시에도 더 자다가 4시에 일어났습니다. 아이고,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고는 옥상 테라스로 나가 기지개를 켜다가 눈을 번쩍 떴는데, 희미하게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또렷해졌습니다. 바로 자기 집 옆집이었습니다.

다윗은 평생 몇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딱 한 번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던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제 짐작에 소년 다윗은 17세가 아니라 11~12세 때부터 양을 쳤을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제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치다가 서당 앞을 지나가는데, 훈장님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남들은 교실에서 배우는데 자기는 소를 쳐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당 밖 문턱에 쪼그려 앉아 몇 마디 엿들었다는 이야기였는데, 당시 아버지는 저희 자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다윗도 1112세에 양을 쳤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1112세 된 아이가 허리에 낫 한 자루 차고 양을 치러 갔는데, 늑대가 나타나면 그 어린아이가 늑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양이 늑대에게 물려갔을 때 다윗이 어땠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11~12세짜리 아이는 분명 코를 훌쩍이며 울었을 것입니다. 콧물 눈물 범벅이 되어 무엇을 했을까요?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자기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윗 외전’입니다. 그가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셔서 돌팔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줄이 있고 양가죽 조각이 달린 돌팔매를 뚝딱 만들고는 돌 하나를 주웠습니다. 힘껏 휘둘렀더니 휙 하고 날아갔습니다. 늑대가 나타났을 때만 돌을 던졌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무에 망고가 몇 개 열렸는데, 사과든 키위든 상관없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돌을 쥐고 휙 던집니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새총으로 새를 맞추던 것과 같습니다. 그 새는 작은 사과만 합니다. 휙 던졌는데 빗나갔습니다. 빗나가서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휙 던져 다시 오른쪽으로 조율합니다. 몇 번이나 연습해야 했겠습니까? 이 과정을 ‘상하고 통회함’이라고 부릅니다. 맞추지 못했다고 포기해야 합니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연습합니다! 왼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으로 조율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조율합니다. 위로 빗나가면 아래로 조율하고, 아래로 빗나가면 위로 조율합니다.

나중에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가 하면, 백발백중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고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형제자매들처럼 잘못해놓고도 ‘에라 모르겠다’, 일처리를 엉망진창으로 얼굴 찌푸려지게, 질질 흘리며 대충대충 해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손해배상 청구 안 당하면 다행입니다.

무엇을 고침이라고 합니까? 왼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으로 맞추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맞추는 것이 고침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이것이 고침입니다. 일을 형편없이 엉망으로 해놓고도 ‘원래 이런 거지’ 하고 맙니까? 고쳤습니까? 안 고치면 다음번에도 또 엉망진창일 뿐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계속 조율하고 바로잡아 나갔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훈련한 뒤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늑대가 어린 양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다윗의 돌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겠습니까? 늑대는 맞아 죽었습니다. 입에 어린 양을 물고 있었는데 돌이 양을 맞췄겠습니까, 늑대를 맞췄겠습니까? 늑대를 맞췄습니다. 흑곰이든 불곰이든 사자든 호랑이든 그 어떤 짐승이든 그는 다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그 시대 최첨단 무기가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전쟁을 보면 미사일이 수천 킬로미터, 수백 킬로미터를 날아갑니다. 사람 하나 보내서 버튼만 누르면 끝나는 줄 아십니까? 그 시절에도 초장거리, 요즈음 말로 ‘가시거리 밖’ 타격이 필요했는데 당시 다윗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콧물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겨우 11~12세 아이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평생을 쓸 실력을 길러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혼자 양을 치면서 ‘흥, 형들은 다 집에 편히 있잖아. 형들이 나만 괴롭히고 혼자 양 치라고 보냈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도,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양을 잘 쳐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양도 제대로 못 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양을 얼마나 잘 쳤습니까? 온 천하에 야곱보다 양을 더 잘 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사람들은 일을 대충 장난처럼 하지 않습니다. 일을 잘못했으면 고치고, 제대로 안 된 것은 바로잡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바로잡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기를 원한다면, 실수 속에서 끊임없이 피드백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되었구나’ 하고 피드백하고, ‘저것이 잘못되었구나’ 하고 정리해서 바로잡는 것, 이것을 ‘고침’이라고 합니다.

‘이거 잘못해서 난 망했어’, 다음번에 또 잘못해서 ‘또 망했어’, 또 잘못해서 ‘또 망했어’ 하며 계속 틀리기만 하면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안 되지 않겠습니까? 손만 대면 그르칩니다. 말을 해줘도 듣지 않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도 행하지 않고, 행해도 또 틀리고, 틀려도 고치지 않고, 고치라 하면 불복하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의 내면에 수많은 음성이 없었겠습니까? 고달플 때 내면에서 ‘포기해라’, ‘아버지는 날 사랑하지 않아’, ‘형들이 다 날 괴롭혀’ 같은 수많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윗은 그런 음성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에 순종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11~12세 아이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향해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드러워야 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훗날 다윗이 택함을 받게 되었을 때 사무엘이 찾아왔습니다. 사무엘은 그 시대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 최고 영적 지도자가 집에 찾아왔는데, 다윗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은 다 모였고, 겉보기에 이 사람도 괜찮고 저 사람도 괜찮아 보였지만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 다 아니라고 하실까요?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네게 다른 아들들이 더 있느냐?” “막내아들이 하나 있는데 양을 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를 데려오라.” 데려오자마자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가 잘났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늘 남들이 나를 섭섭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양을 치며 사자와 맹수와 늑대를 상대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품을 훈련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택함받는 것은, 아직 택함받기 전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알고, 적어도 겸손히 뉘우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하며, 자신이 자주 실수하고 잘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늘 자기는 잘하고 있고 다 남의 탓이라고 여깁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업가를 만났는데, 그 집 아들은 마흔이 넘도록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이 쓰기만 했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아버지가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다며 당당하게 떠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평생 돈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아이고, 저는 늘 개탄스럽습니다.

다윗이 택함을 받아 훗날의 다윗 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어릴 때 진정으로 배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1~12세에 소 치고 양 치러 갔는데 학교 갈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 치고 양 치면서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훗날 다윗은 시인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다윗이 썼는데, 대부분 독학으로 익힌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고치겠다.’ 당신이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면 ‘내가 잘못 짰으니 고치겠다. 이 프로그램을 바로잡겠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잘못 처리했으니 고치겠다.’ 말씀드리건대, 사람은 이것저것 관찰할 줄 알아야 하며, 지식이란 사실 스스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많은 경우 본말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왜 전도되었을까요?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외 교사를 붙여봐야 결국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은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워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왜 ‘학습’이라고 하겠습니까? ‘열심히 배우고 날마다 향상하라’고 하지 ‘열심히 가르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강의를 잘 들으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배웠습니다. 여건이 되든 안 되든 사람은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지금까지 오면서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온갖 굴곡을 겪으며 구르고 깨지면서 배웠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어깨너머로 몰래 훔쳐보며 배웠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직장에서 누가 친절히 가르쳐주려 하겠습니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누가 거저 가르쳐주겠습니까? 다 스스로 험난한 길을 부딪치며 배운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풀자면 들려줄 이야기가 아주 많고, 여러분에게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영어도 안 되고 내용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했지만, 저는 배울 줄 알았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이런 태도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것이며, 이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잘못했으면 고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모르면 배우고, 잘못했으면 고치면 됩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일에 이르러 죄를 짓고 온종일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 되었을 때, 그는 “이건 안 된다. 더 이상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이러다간 큰일 난다. 난 정신병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남의 여자를 빼앗았다는 것을 온 나라 백성에게 알리겠다”라고 했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내가 고치겠다!’ 이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때로는 이런 말을 꺼낼 때 마음이 좀 쓰라립니다. 제가 동역자들에게 말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왜 어리석게 굴었는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딱 한마디입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게 틀린 거군요. 그럼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바른 것은 저것이다.”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저는 시간을 들여 가르칠 수도 있고, 힘을 들여 시범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배우려는 태도가 없고 고치려는 태도가 없으면 무슨 짓을 해도 안 됩니다.

당신이 어리석습니까?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아, 제가 어리석군요.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까?”라는 반응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절더러 어리석다고요? 그래요, 난 어리석은 인간이에요. 우리 자매 둘 다 멍청한 인간들이에요”라고 반응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잘못을 지적한 게 틀렸습니까? 지적을 받고도 안 고칩니까? 말을 해줘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것은 태도가 올바른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잘못했으면 고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체면은 푼돈의 가치도 없습니다. 다윗이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죽였을 때, 그가 우쭐대며 으스대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과거부터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일부터 훗날 군사를 이끌고 싸우며 천부장이 되기까지—처음에는 자기 혼자뿐인 1부장이었고, 그다음은 십부장, 백부장, 그리고 천부장이 되어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습니다. 이 중 미리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다 나중에 배운 것 아닙니까? 골리앗을 죽인 것도 어릴 때 연습했던 그 돌팔매 덕분이었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백전백승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복된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우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제가 묻겠습니다. 작년에 성장하셨습니까? 재작년에 성장하셨습니까? 지난 5년 동안 성장하셨습니까? 여전히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아닙니까? 무엇이 성장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무슨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성장이 있겠습니까?

훗날 다윗은 사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사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면 지참금을 내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 200명의 양피, 즉 생식기 표피였습니다. 아이고, 이것은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사울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옳았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우리는 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이후 다윗이 쫓겨 다닐 때도 늘 잘못을 고치려는 태도를 지녔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쓴 시편들을 함께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사람이 겪는 고난의 상태를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몸부림과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곳을 자신의 최고의 배움터이자 최고의 교실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인생 실전 대학이 아니라 도망치고 쫓기는 도피 대학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하나님, 언제 저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몸부림, 괴로움, 절망, 낙심, 염려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욕이라도 한마디 튀어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정말 한마디 내뱉고 싶다가도,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다윗이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을 때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불평도 없었고 남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 당시에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을 뿐입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그의 옷자락을 베고 나서 마음에 찔려 후회했습니다. 다윗의 평생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이것도 내가 잘못했다, 저것도 내가 잘못했다, 잘못한 것은 전부 바로잡자!’ 바로 이런 논리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 됩니다. 훗날 다윗은 아비가일의 남편이자 구두쇠인 나발을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그러나 문득 깨닫고는 “내가 고치겠다. 내 잘못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마디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했으면 고치는 것입니다. ‘어제 밤새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구나. 내가 고치겠다, 상하고 통회하며 고치겠다. 내 안이 너무나 더럽습니다. 하나님,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우리 평생에 조율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으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조율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바로잡으려는 태도를 갖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늘 깊은 갈망이 있는데,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아플 때 제게 전화하면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이 참 기쁩니다. 그것이 저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치고 변화되어 복을 받는 것이 저에게는 더 큰 기쁨이며, 여러분의 축복 간증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윗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당신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이 바로 다윗입니다. 당신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축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저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옵소서.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게 하시고, 자신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고집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늘 죄를 범하면서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간구하오니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나의 허물을 보게 하시며,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하나님, 입을 열어 “내가 잘못했습니다, 고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태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이루어, 주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주께서 기뻐하셨다면 내가 진작 드렸을 것이나, 내가 드릴 것은 오직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뿐입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형상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이제 저를 바로잡으시고 조율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영원토록 나를 구원하실 줄 믿으며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님이 필요합니다. 평생토록 주님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은 사실 다윗의 깊은 성찰과 반성입니다. 반성문을 쓸 줄 모른다면 다윗이 쓴 것이야말로 표준적인 반성문입니다. 그가 무엇을 반성했을까요? 자기가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나서 마음이 괴로워 반성한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아이고, 저들이 다 나를 참소하네’라고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참소당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으며, 우리아가 이혼도 안 했는데 남의 아내와 아이까지 가졌으니, 자기가 생각해도 천벌 받을 짓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고, 참소하네! 난 참소를 듣지 않겠다, 너희의 저주를 끊어낸다, 참소를 대적한다!’ 다 쓸데없는 헛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참소를 대적한다’는 식의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참소당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대적하고 끊어낸단 말입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왜일까요? 눈앞의 귀신들이 온종일 그에게 달라붙어 괴롭히고 마음을 극도로 어지럽히며 괴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참소하는 영을 꾸짖으며 물러가라고 해봐야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통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이고, 그게 아니라 이렇고 저래서 그랬습니다” 하며 자기가 죄지은 것이 당연하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변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조율해야 합니다. 변명하지 마십시오. 틈만 나면 이리저리 변명하느라 제 마음까지 심란하게 만듭니다. 변명하는 당신 자신도 괴롭지 않습니까? 그러니 태도를 바로잡으십시오. “내가 잘못했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사실 당신이 잘못한 게 어디 한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윗보다 훨씬 더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고치면 되지, 따지거나 변명하지 마십시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인식입니다. ‘하나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행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성찰도 기록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죄악 중에 출생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습니까? ‘죄가 내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내가 이 죄를 여러 번 다스렸으나 이번에는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마귀의 억압이 떠오릅니다. ‘아니야, 난 왕인데 온 백성 앞에 확성기를 틀고 비굴하게 알릴 수는 없어. [나는 다윗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 죄를 지었다! 남의 아내를 훔쳤고 남의 남편을 죽였으며, 지금 그 아내의 뱃속에 든 아이는 내 아이다]라고 말이야.’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스럽습니까? 그걸 어떻게 입 밖으로 내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드러내고 나면 큰 망신인데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다윗이 도덕적으로 매우 고결한 척하는 이미지를 꾸며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진실한 태도가 모든 태도 가운데 가장 좋은 태도입니다. 말씀드리건대 하나님 앞에 나와 간구하려거든 말을 지어내지 마십시오. 면접 볼 때는 지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소용없고 숨겨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은 훤히 다 아십니다. “꼬리만 살짝 들어 올려도 무슨 짓을 할지 다 안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살인하고 피를 흘렸으며, 남의 아내를 빼앗고 간음을 저질러 아이까지 낳는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하나뿐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시며, 결단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를 잘 따르십시오. ‘통회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만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 일을 내가 잘못 처리했으니, 나 자신을 엄격히 쳐서 복종시키고 고치겠다!’ 세상의 모든 뛰어난 인물들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대단한 과학자든 물리학자든 마찬가지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위성을 쏘아 올릴 때 얼마나 많은 기술적 세부 사항을 수정했겠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완고함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선해 보여도 당신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회개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처럼 ‘내가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고치겠습니다’ 입으로만 반복하고 정작 고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죄인임을 알고, 이 일이 잘못되었으면 이 일에서 고치고, 저 일이 잘못되었으면 저 일에서 고치며, 한 가지씩 차근차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이 말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며, 날 때부터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스스로 무능함을 알아야 하며, 부족함을 안다면 더 이상 죄인의 생각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생각을 고집해 봐야 점점 나빠질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날 때부터 귀신을 끌어당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귀신을 부르는 존재로 태어났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귀신을 끌어당기는 그 방식을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로 바꾸어야 합니다. 고치는 것은 이토록 단순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이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고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도 날 때부터 의인이 아니라 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죄인이 어릴 적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부터 11~12세에 양을 치기까지, 그가 배운 것이 아니며 조율해낸 것이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그 내면에 장착된 논리 체계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습니까?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며 복종시켰습니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고, 육신을 따르는 생각을 처리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모든 것을 후천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배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논리 체계도 다 배워서 얻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비로소 배우고 조율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편 51:1-4)

주님의 판단이 당신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죄인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저 역시 가끔 여러분에게 “어리석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리석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냥 어리석은 채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저주하는 것을 끊어내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끊어낸단 말입니까? 끊어내 봐야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자신의 허물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죄가 늘 우리 앞에 있고 귀신이 수시로 우리에게 달라붙습니다. 귀신이 달라붙어 있는데 어찌 사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닭 한 마리 바치겠습니다, 오리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삶은 돼지를 바치겠습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다른 헛된 짓을 하지 마십시오. 오직 이것만 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늘 잘못을 저지릅니다. 거의 모든 일에서 실수투성이입니다. 고치겠습니다. 하나님, 바른 것이 무엇인지 제게 알려주옵소서.”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복잡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참으로 사람이 평생 살면서 제대로 올바르게 해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4-17)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사람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저 꽤 괜찮지요?”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망하게 됩니다. 제가 조언을 하나 드릴 테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하루 지나면서 늘 자신의 영적 상태가 괜찮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곧 일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뜻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다윗이 시편 51편을 쓰기 전까지는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그가 자랑할 만한 것은 아주 많았습니다. ‘내가 골리앗을 죽였으니 난 참 위대하지 않은가? 양을 칠 때도 사자나 맹수에게 양을 빼앗기지 않았으니 난 대단해. 지금 이스라엘을 이끌며 왕이 되었고, 도망자 시절에도 큰 죄를 짓지 않았어.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 내가 손만 대면 원수들은 다 패배하고 말지. 난 역시 꽤 괜찮아.’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니까!’ 그렇게 기쁨에 젖어 다음 날 해 질 녘까지 늘어지게 잤습니다. 그리고 해 질 녘에 한 여인의 알몸이 눈앞에 드러나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가 여겼던 ‘괜찮은 자신’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깨달았으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마음속에는 늘 근심과 긴장이 가득 차 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구나. 하나님, 교회가 이 단계에 이르러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교회가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아직 바로잡지 못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제 마음은 어떻게든 일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와서 “당신 이거 아직 제대로 안 됐네요”라고 하면, “내가 바로잡지 못한 곳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래서 지금 열심히 바로잡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 태도가 중화권 교회 신학의 핵심 정수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화려하고 빛나는 이력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이력서를 쓴다면 눈부신 이력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증명합니까? 오직 한 가지, 과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중심의 진실함입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시편 51:6)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속임수를 쓰지 마십시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잔꾀 부리지 말고 오직 중심이 진실해야 합니다. 일은 일이고 이는 이입니다. 저지른 일에 대해 더 이상 변명하지 말고, “내가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주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며 내면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과거에 잘한 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왜 어리석어질까요? 남편이 “당신 이거 잘못했잖아”라고 하면, “난 저건 잘했잖아!”라고 받아칩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어리석어지지 않겠습니까? 변명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내가 잘못했네, 내가 틀렸어, 잘못 이해했어.” 사실 과거에도 자주 오해하고 틀렸으니, 자주 잘못 이해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저 죄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평생 살면서 병에 걸리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상하고 통회함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입니다. 살면서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미련한 것입니다. 늘 일을 그르치고 결과물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미련한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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