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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디모데전서 3장 -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알라

2025-10-22 15,086 提摩太前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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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摩太前书03章-监督的资格
  • 1 “人若想要得监督的职分,就是羡慕善工。”这话是可信的。
  • 2 作监督的,必须无可指责,只作一个妇人的丈夫,有节制,自守,端正,乐意接待远人,善于教导;
  • 3 不因酒滋事,不打人,只要温和,不争竞,不贪财;
  • 4 好好管理自己的家,使儿女凡事端庄顺服(或译:端端庄庄地使儿女顺服)。
  • 5 人若不知道管理自己的家,焉能照管 神的教会呢?
  • 6 初入教的不可作监督,恐怕他自高自大,就落在魔鬼所受的刑罚里。
  • 7 监督也必须在教外有好名声,恐怕被人毁谤,落在魔鬼的网罗里。
  • 8 作执事的,也是如此:必须端庄,不一口两舌,不好喝酒,不贪不义之财;
  • 9 要存清洁的良心,固守真道的奥秘。
  • 10 这等人也要先受试验,若没有可责之处,然后叫他们作执事。
  • 11 女执事(原文是女人)也是如此:必须端庄,不说谗言,有节制,凡事忠心。
  • 12 执事只要作一个妇人的丈夫,好好管理儿女和自己的家。
  • 13 因为善作执事的,自己就得到美好的地步,并且在基督耶稣里的真道上大有胆量。
  • 14 我指望快到你那里去,所以先将这些事写给你。
  • 15 倘若我耽延日久,你也可以知道在 神的家中当怎样行。这家就是永生 神的教会,真理的柱石和根基。
  • 16 大哉,敬虔的奥秘,无人不以为然!就是 神在肉身显现,被圣灵称义(或译:在灵性称义),被天使看见,被传于外邦,被世人信服,被接在荣耀里。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어서 디모데전서 3장을 나누겠습니다. 3장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지 아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주제는 제가 말한 것과 같네요”라고 하더군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성장하면서 점점 더 주제를 잘 파악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디모데가 에베소라는 지역에 있을 때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개척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들에 갑자기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새로 개척된 교회여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를 세워야 하거나, 아니면 이미 목회자—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감독—가 있어서 그 감독을 도와 교회를 치리할 몇몇 집사를 찾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젊었기에 사람들을 선택할 때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엇이 혼란스러웠을까요? 이 사람도 괜찮아 보이고 저 사람도 괜찮아 보이는데 누구를 뽑아야 할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둘 다 괜찮아서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제기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아는 것’, 이 일의 근본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디모데전서 3:14-15)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매우 중대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치리가 참으로 깊고도 깊은 배움과 분별의 영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에서 사람들을 택하고 검증하라고 맡긴 사역이었습니다. 누가 교회의 감독이 될 수 있는지, 누가 교회의 집사가 될 수 있는지, 이미 감독이 있는 교회라면 어떻게 집사들을 세워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치리하는 사람을 선택할 때, 여러분의 육신의 눈으로 뽑아낼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다 좋아 보이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내면 깊은 곳의 동기가 옳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왜 옳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을 얻어 혜택을 누리려 하고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이다’라는 이 개념을 먼저 확고히 세우고 나서 다른 것을 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는 곧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엄숙한 일입니다. 그것은 경건의 진리이자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기록할 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며 깊이 감탄했던 것입니다. 어째서 여기서 갑자기 감정을 쏟아내며 감탄하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만 하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교회가 모든 문제의 기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란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왜 어떤 교회는 치유와 축사에 능력이 나타나고, 어떤 교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한쪽은 하나님의 집이지만, 다른 쪽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은 교회 아닌가요?”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아 보입니다. 교회의 간판만 걸어놓았다고 해서 다 교회이겠습니까?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저곳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거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고, 저곳에서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시고, 교회 가운데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며, 천사들에게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듣기에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십니까? 어떤 곳은 천사들이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이곳은 천사들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천사들에게 보이고, 이방에 전파되며, 세상 사람들에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능력 없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 것,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 되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은 대단히 엄중한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치리자를 세우는 일, 목회자를 뽑든 소그룹 리더를 뽑든 집사를 뽑든 매우 엄숙한 일이며,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대목에서 불현듯 감탄한 이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집은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의미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교회가 참으로 엄중한 주제임을 묵상해야 합니다. 만약 더럽고 추한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를 교회의 감독이나 집사로 세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세웠을까요? 헌금을 많이 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교회는 비참해질 것입니다.

저는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헌금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돈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거룩함을 지키고 경건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인할 수 없는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울 때 이런 식으로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나 자매가 목회자와 갈등을 빚고 떠났는데, 그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도를 넘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는 동역자들을 데리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 사과하며, 조상님 모시듯 굽신거리며 다시 데려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런 사람을 다시 데려오려고 할까요? 교회가 사람이 아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헌금이 없고, 헌금이 없으면 교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보십시오. 이것이 어찌 경건의 비밀이겠습니까? 이는 더럽고 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우려면 거룩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 있으려면 요구되는 기준이 많습니다. 교회가 헌금만 중요하게 여기면 거룩함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교회가 돈을 중요하게 여기면 마귀의 올무에 걸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결코 더럽고 부정한 것을 하나님의 집에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럼 섬겨주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그를 섬기는 것은 그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러 왔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허튼소리를 하고 험담을 일삼으며 보험을 팔거나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일이나 하고 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이는 대단히 엄중한 주제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혹은 영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교회를 세우되 거룩하지 않은 교회를 세운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문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설령 문책하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의 영은 그곳에 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교회의 치리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치리에 대해 말할 때, 주님을 믿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는 이미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마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과 같은 진리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이르기까지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요구 조건이므로 거듭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치리에는 두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감독이고, 다음은 교회의 집사입니다. 훗날 교회 안에서 이 집사의 직분을 어떻게 규정해 버렸습니까? 집사를 일종의 재정적 후원자로 여겨,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당신이 와서 집사를 하시오. 직분을 주어 모두가 당신을 존경하게 해 주겠소”라고 세웠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든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감독은 가장 많이 섬기는 자이며, 그보다 조금 덜 섬기는 자가 집사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들이 집사와 감독의 개념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보아온 교회들에서 집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좀 있고 돈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돈과 지위가 있으니 헌금도 많이 하고, 그래서 집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집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집사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의 수많은 상황에 대해 예전에도 의아하게 생각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마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제가 아는 한 많은 교회들이—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옳게 하든 그르게 하든, 본인들이 맞다고 여기든 틀리다고 여기든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섬기지도 않으면서 헌금만 많이 내는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이 많으면서 섬기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감독이나 목회자 등을 다 고용된 피고용인처럼 취급하고, 교회의 집사회가 이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많이 섬기는 자가 집사이고, 더 많이 섬기는 자가 감독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목회자를 청빙하고, 정작 섬기는 사람에게는 발언권이 없고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 발언권이 있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하지 않는 사람이 “왜 일을 그렇게 합니까?”라며 이래라저래라 지적하고, 일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지적을 당하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사실상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회사를 세운다면 자본을 투자한 사람이 결정권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경건의 기준을 따라 교회를 치리하며 감독을 세우고 집사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기본 기준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처럼 믿음이 있어야 하며,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단순히 신자냐 비신자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중에서 감독을 택하고 집사들을 택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독과 집사를 뽑을 때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감독과 집사의 기준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 요구되는 추가적인 기준입니다. 만약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한 아내의 남편이고, 다른 사람은 첩을 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당연히 한 아내의 남편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디모데전서 3:1-4)

그러므로 이 일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조금 까다로울 수 있지만, 저는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점은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성도여야 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선별하는 것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인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다 집사가 되고 감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늘날 중혼죄를 지으면 집에 있을 수도 없고 감옥에 가야 합니다. 중혼죄에 해당하니까요. 이것이 교회의 치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목양을 하는 자들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감독은 교구장이고 집사는 소그룹 리더, 즉 소목자입니다. 본래 이런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준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소목자라면 이것이 여러분의 기준이고, 교구장이라면 이것이 여러분의 기준입니다.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힘써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다 도달한 후에야 직분을 맡아야 할까요, 아니면 직분을 감당하면서 도달해 가는 것일까요? 저는 맡아서 감당할 때 도달하게 된다고 봅니다. 직원 채용에 대해 제게 물으신다면, 저는 제 요구 기준의 50% 정도만 만족하는 사람을 채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머지 50%는 어떻게 채울까요? 일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그의 성장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감당해 나가면서 도달하는 것이지, 기준에 못 미친다고 해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닙니다. 기준을 낮추었는데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또 낮춘다면 망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어찌 경건의 비밀이겠습니까? 그것은 타락의 비밀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준은 바꿀 수 없습니다.

감독과 집사를 세우는 기준과 요구 사항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디모데전서 3:1)

첫째,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되고자 하거나 교구장이 되고자 한다면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지 않으면 목양이 괴로움이 됩니다. “아이고, 맙소사.” 왜 자원해야 할까요? 자원하지 않는데 감독으로 세워놓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새벽 3시에 전화가 와서 “목자님, 배가 너무 아파요”라고 하는데, “배 아프면 혼자 바람 잡고 기도나 하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왜 나를 찾아와요? 나는 잠도 안 잡니까?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라고 할 거라면, 자원하지 않는다면 이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선한 일이므로 자원하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 모두가 제가 일찍이 섬겼던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그들을 섬겼습니다. 새벽 3시에 전화를 하든 4시에 전화를 하든, 어떤 때는 정말 아찔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모든 영적 전쟁을 치러오면서, 저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헤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길 때 늘 이 말을 했습니다. “내가 오늘 너를 어떻게 섬겼는지 보았느냐, 훗날 너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 저는 많은 공을 들였고,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풍성한 열매를 맺어 수많은 영적 자녀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선한 일입니다. 감독의 직분을 감당하려면, 예를 들어 새벽 2시에 누가 전화를 걸어오더라도 섬겨야 합니다. 숨이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섬기지 않는다면, 숨이 끊어진 후에 무엇을 섬기겠습니까? 우리 안의 많은 소목자들을 볼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습니다. 한 소목자는 “새벽 3시에 암 환자 장폐색으로 장이 막혀 통증이 심해질 때가 많으니, 아프면 언제든 전화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새벽 4시에 전화가 왔을 때 그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1시간 동안 사역하고 나니 아침 5시가 되었고, 정돈하고 일어나 소그룹 기도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경건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며, 천사들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일이 천사들에게 보였겠습니까? 보였습니다. 천사들이 어찌 보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곳에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여 1시간 만에 그 사람이 자유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임하여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본문은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바울이 기준을 조금 낮추어 준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서신서에서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처럼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권리가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너희도 나 바울처럼 아무런 얽매임 없이 독신으로 살아라”라고 했다면, 그 시대에 그런 사람을 찾기란 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내의 남편’인 사람을 찾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사람을 택할 때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바울 사도님, 모든 기준에 다 부합하는데 독신을 지키며 결혼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다면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그 사람을 뽑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감독이나 목회자, 교구장으로 세울 만한 후보들을 보니 아내가 하나인 사람, 둘인 사람, 셋인 사람, 넷인 사람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아내가 넷인 사람이 “나는 왜 안 됩니까? 야곱도 네 아내를 두었는데 왜 나는 안 됩니까?”라고 한다면, 그 이면에 담긴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를 넷이나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된다면 많은 자매들이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될 텐데, 며칠 지나 또 첩을 들이고 얼마 후 또 첩을 들인다면 그런 사람이 감독이 되었을 때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아브라함, 야곱, 다윗, 모세는 모두 아내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굳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바울의 뜻은 아내를 두려거든 한 사람만 두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됨으로써, 그의 마음 중심의 핵심 가치와 추구, 가치 체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진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면 얽매이는 짐이 적을수록 좋고, 아예 없다면 더욱 좋은 법입니다.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어 온종일 처첩들의 암투를 정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에서 암투극이 벌어지고 악독한 여인들이 얽혀 있다면 무슨 시간으로 교회를 세우겠습니까? 집안의 첩들 목양하기에도 벅찰 것이며, 그것은 정욕에 불과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잘 다스리며, 잘 가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치리하는 신앙입니다.

감독과 집사를 택하는 기준에서 바울은 남성을 기준으로 언급했습니다. 물론 여성을 감독으로 세우는 것에 있어서는, 에베소 지역에서 당시 자원한 자매들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매가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디모데가 처한 상황에 자매 후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매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겨 감독이 되고 교구장이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경건의 비밀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내면의 핵심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핵심 가치가 재물에 있다면 감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심의 추구가 오직 섬김에 있고 잘 다스리는 역량이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린다는 말씀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이전 장을 보면 디모데는 이성 교제에 있어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여자친구에게 휘둘릴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독을 세울 때 디모데에게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남편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아내가 한 번 소리를 지르면 집안의 기둥이 흔들릴 지경인데, 사모가 소리를 지르면 목사가 가슴을 떨고 집안이 흔들린다면 그것을 어찌 치리라 하겠습니까? 그것은 다스림이 아닙니다.

저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목회자들을 참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 집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타협으로 집을 다스리려 합니다. 타협이 문제를 해결합니까?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반드시 가정을 희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가족이 “나랑 밥 먹어야지, 쇼핑하러 가야지, 장 보러 가야지”라고 하는데, 쇼핑을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성도가 고열로 앓고 있거나 숨이 넘어가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려놓겠습니까, 내려놓지 않겠습니까? 가정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 잘 다스리는 것입니까, 못 다스리는 것입니까?

특히 여성의 권리가 강조되는 이 시대에 많은 남편들이 문제를 피하고 가정의 다툼을 면하고자 타협을 택합니다. 물론 우리 자매님들도 사역을 하려 할 때 가정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습니까? 타협하는 것이 집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집안일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게으르게 굴면서 입으로만 ‘할렐루야’를 외친다면 보는 사람마다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실하게 일하여 가정의 재정을 든든히 뒷받침한다면 가정에서의 위상도 자연히 높아질 것이며, 거기에 가르치기를 잘하는 역량이 더해져야 합니다.

제 설명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왜 이렇게 썼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요즘 자녀가 부모 말을 잘 들으면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할 만큼, 자녀에게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어서 말을 듣게 하는 것이 결코 부모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집사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디모데전서 3:8-13)

이것이 감독과 집사를 세우는 기준과 요구 사항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가 도달해야 할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핵심어가 있습니다. 첫째, ‘먼저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독은 집사 중에서 세워지며, 집사도 먼저 시험을 거치고 감독 역시 먼저 시험을 거칩니다. 우리 중에서도 ‘저 사람을 소목자로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여 본색이 드러나고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며 아직 합당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시험해 보았을 때 무너져 버린다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가야 합니다.

감독을 세우든 집사를 세우든, 이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필연적인 경로이며 끊임없이 시험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교회의 발전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베드로가 설교 한 번에 5천 명이 주를 믿고, 간증 몇 마디에 3천 명이 주를 믿게 되었던 역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좋기만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는 화인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관점이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목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목양하겠습니까? 갑자기 5천 명이 몰려오면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 많은 감독과 집사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찾을 수 없으니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에게 지혜가 부족하여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헌금을 관리하다 보니, 결국 공짜로 밥만 얻어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도리어 불평불만만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복을 받도록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 수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이 과하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소목자와 교구장을 철저하고 세밀하게 검증해야 하며, 대충 세워놓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베드로가 세웠던 일곱 집사 중에도 빗나간 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니골라였습니다. 니골라는 훗날 ‘니골라당’이라는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니골라당’은 바로 베드로 시절에 세워진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식을 관리하기 위해 집사를 세웠지만,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구제나 배식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밥을 먹여주고,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목양을 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려 할 때 담력이 없다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안에서 유력한 누군가가 소리를 높였을 때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버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리를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경건의 비밀이라 하겠습니까? 그것이 천사들에게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마귀에게나 보일 것입니다. 만국에 전파되고, 세상에 믿어지며, 영광 가운데 들림을 받는 역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믿는 데 담력이 없으면 끝까지 걸어가기 어렵습니다. 쉽게 사람에게 휘둘리고 위협당하게 됩니다. 담력이 필수적입니다.

세 번째 핵심은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내이고, 둘째는 충성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faithful’이라는 단어는 충성스러움과 함께 인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러한 핵심 요소들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진리를 굳게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한 목사가 페이스북에 금실 좋은 부부의 다정한 사진들을 가득 올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대여섯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빠라고 불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목사는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 도시의 유명한 목사들이 목회자 조사단을 꾸려 그 교회에 와서 이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다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 아니었습니까? 사실은 뒤틀린 관계였고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많은 것들이 참된 경건이 아니라 겉치레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핵심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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