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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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의 말씀 시리즈】01: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24-10-13 7,255 传道者的言语系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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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전도자의 언어》라는 새로운 시리즈 설교를 시작합니다. 전도자의 언어란 무엇일까요? 바로 전도자가 전하는 말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전할 도(道)가 없다면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가장 뛰어난 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언어입니다. 헛되고 헛됨이 없다면 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이 주제를 전하려고 할까요? 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의 자리로 이끌고 싶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님들이 너무나 고달프게 사는 것을 봅니다. 많은 분들이 질병, 빚, 가난, 그리고 다툼과 갈등,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해 정말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내가 전도자로서 언제쯤 형제자매들을 이 고통 가운데서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형제자매님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역시 똑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치유와 축사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정말 많은 열매를 맺어왔습니다. 겸손하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들은 암이든 우울증이든 상관없이 모든 질병이 치유받았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해결되는데, 가장 두려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도자의 언어》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으로, 제목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을 받는 핵심 열쇠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이 내일부터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며, 여러분도 그것을 바라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축복을 받고,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두 가지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끊임없이 깊이 탐구하고 연구하느라 몸이 지칠 정도였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도 쉼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제가 줄곧 연구하는 이유는,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최근 연구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이제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형제자매님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쓸데없는 말씀 길게 하지 마세요, 통화료도 비싼데요. 그냥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알려주세요. 헛되고 헛되다는 말 그만하시고요, 저는 마음을 비울 수가 없어요.” 좋습니다, 오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도 통화료가 비싸다는 것을 압니다. 저 역시 군더더기 없이 짧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바라본 대로 바라보고,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행하고, 아브라함이 믿은 대로 믿으십시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은 우리를 위해 축복받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목사님, 저는 성경 읽을 시간이 없어요. 아브라함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없고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다면 그냥 그렇게 사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플 시간은 있으면서 치유받을 시간은 없고, 저주받을 시간은 있으면서 축복받을 시간은 없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무엇을 믿었을까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동생을 몹시 아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동생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굳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생을 몹시 사랑했는데 동생이 죽자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동생의 일생을 직접 지켜보았습니다. 동생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동생의 일생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정말 헛되구나.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구나. 그의 사랑도, 그의 미움도 모두 함께 관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째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가? 한 세대가 오고 한 세대가 가도 땅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르는구나.’

알고 보니 그의 동생은 죽기 전까지도 투자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투자하고 저것에 투자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알까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롯이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롯이 투자에 아주 밝은 사람임을 봅니다. 얼마나 안목이 있었습니까? 소돔에까지 투자했으니 말입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적인 사랑과 미움, 세상의 지혜, 경쟁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경쟁하고 어떻게 사업을 잘 운영할까만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세상의 일들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빚까지 지고 있다면 더욱 찾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종일 빚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작은 일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축복을 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학 입시도 스트레스, 대학 생활도 스트레스, 취업도 스트레스, 직장 생활도 스트레스, 연구를 해도 스트레스, 모든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차라리 이름을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구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우리를 위해 축복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단번에 이 모든 문제가 명쾌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브라함이 축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헛되고 헛됨’을 깨달은 것이 핵심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전도서》가 내용상 《창세기》보다 앞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비록 기록된 시기는 《창세기》 이후이지만 말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 낳은 후에 몇 년을 살다가 죽었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 계속 나옵니다. 모두가 죽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왜 기록했을까요?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때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진지하게 일합니다. 두 노인이 일자리 하나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 참 묘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창세기》 11장에도 누가 누구를 낳고, 살다가 결국 죽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고, 너무 집착하며, 이 헛된 것들을 꽉 쥐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괴롭게 살며, 병들고, 돈을 빌리고, 빚을 지고, 빚을 갚고, 병을 치료하느라 보기만 해도 피곤한 삶을 삽니다. 참으로 이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믿으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된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그렇게 가르치시면 우리가 다 의욕을 잃고 누워버릴까 봐 염려되지 않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아브라함이 열어놓은 이 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왜일까요? 《전도서》는 전도자의 언어이며, 평생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특성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인정하여 무슨 일을 겪든지 초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에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아주 잘 감당했습니다.

모든 것을 헛되고 헛되다고 바라보는 이런 사람을 속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 씨, 여기 아주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저에게 100만 원을 투자하시면 연말에 300만 원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그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여러분이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속일 수 없습니다. 이런 노인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결코 쓸데없는 말이 아닙니다. 통화료를 조금 쓰더라도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바로 이 점 때문에 《전도서》를 설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됨을 전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이 마음에 와닿으십니까? 저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수많은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주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이득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자세히 관찰해 보니 바로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나서 이 하나님이 참으로 위대하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훗날 《전도서》를 읽으며 ‘일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해도, 그가 행하는 행동 속에 일종의 경외함이 담겨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저는 어머니를 참 존경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 어머니 같은 며느리를 찾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할아버지가 60세가 넘으셨을 때, 가난하고 비참한 지경에 처해 계시던 저희 집에 시집오셨습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뵈니 거지처럼 옷이 너무나 지저분했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들여 할아버지의 옷을 전부 새것으로 깨끗하게 바꾸어드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간호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6개월 동안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처녀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당시 인민폐 2천 위안을 빌리셨는데, 당시로서는 평생 갚기 힘들 만큼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일로 인해 알 수 없는 큰 축복을 받게 되셨습니다. 바로 이듬해에 제가 태어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이발사를 불러 할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가서 머리를 깎아드리며 모든 장례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마무리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머니께서 복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듬해에 저를 낳으셨으니까요. 만약 제가 없었다면 어머니는 훨씬 더 고생하셨을 것입니다. 저라는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나중에 보니, 세상에는 이것이 복인 줄도 모르고 시부모님과의 관계를 늘 긴장 상태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또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계시는데, 겉보기에는 썩 똑똑해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얼떨결에 집을 팔았는데, 아주 높은 가격에 매도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님의 남편이 외도를 하여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남편의 부모님, 즉 아이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여든, 아흔의 고령이 되셨는데도 자매님이 여전히 찾아가 돌보아드렸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까?’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조금 어리숙해 보이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이런 사람은 까닭 없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손대는 일마다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면 어김없이 친정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있거나, 시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관계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불통하지 않고 누가 불통하겠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님들은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조금 어수룩한 자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자매가 섬기던 사람 중 우울증 병력이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섬김을 맡겼는데, 얼마 동안 섬기더니 결국 그 사람의 우울증이 재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둘러 사역을 넘겨받아 섬기면서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내가 또 다른 우울증 환자를 맡기면, 자매님이 또 그 사람 우울증 재발하게 만들 것 같네요.” 그러자 자매는 “아니에요, 저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째서 안 그럴 수 있죠? 어디서 잘못했고 어디서 잘했는지 정리해 보았나요?” 자매는 “안 그래요, 어쨌든 저는 안 그래요”라고만 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자매는 친정어머니 댁에 갔습니다. 그리고 2~3일 만에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는 가방을 챙겨 집을 뛰쳐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자매님, 다음에 우울증 환자를 만나면 반드시 잘 섬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친정어머니와의 관계도 이 지경으로 만드는데, 도대체 누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자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짜증이 가득 차올랐으며,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막무가내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머니도 자매가 태어났을 때 어쩌자고 이런 자식을 낳았을까 생각하셨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자매가 어찌 불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 일이 꼬일 수밖에 없고, 좋은 패를 쥐고도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릴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머니의 집이 탐이 나서 어떻게든 그 집을 차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집을 차지하기도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내에게 그 집에서 눌러앉아 버티라고 일러두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시부모든 친부모든 불효하는 사람들은 정말 치명적인 문제를 겪게 됩니다.

어떤 자매는 남편에게 “여보, 나는 당신 어머니를 내 친어머니처럼 생각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당신은 친어머니하고도 그렇게 지내면서 내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여긴다고? 제발 그만둬”라고 했습니다. 자기 어머니와도 곱게 말을 섞지 못하고, 평생 안 보고 살거나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이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결국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저는 이 법칙에 따라 사람들을 관찰하며 하나씩 대입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추적해 보면 어김없이 불효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효자, 효녀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집착하고, 너무 진지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만약 살아가는 것이 모두 헛되고 헛되다면, 어머니의 집을 탐내겠습니까? 살아가는 것이 모두 헛되고 헛되다면, 어머니와 치고받고 싸우겠습니까? 집착하겠습니까? 관계가 그렇게 나빠지겠습니까? 여전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나중에 보니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럴듯한 논리가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은 부모를 공경하는 신학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떨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떨고 계십니까? 스스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효자라고 인정하셔야 비로소 효자인 것입니다. 부모를 상대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악한 일입니다. 부모를 향해 선악을 분별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 자매님이 오셨는데, 17세에 병이 생겨 지금 30대가 되기까지 평생 돈을 빌려 병을 치료하고 아파하는 삶을 반복해 왔습니다.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나쁜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영역 밖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인생은 너무나 고달픕니다.

이전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27~28세 된 딸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내 딸이 어쩌다 암에 걸렸을까? 불꽃 같은 뜨거운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는데.” 이 말을 들어보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결국 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죽은 후 그는 헛됨을 깨달았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살아가는 일에 집착하고, 여전히 너무 진지하게 살아가며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저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왜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깊이 관찰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개미 떼가 작은 벌레 한 마리를 굴 속으로 끌고 가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어 보이던지요. 저는 ‘이 개미들도 살다가 결국 죽을 텐데, 벌레를 끌고 가면서도 어쩌면 저렇게 진지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깊은 탄식과 함께 ‘나도 저 개미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나중에 늑대 무리가 짐승의 사체를 두고 서로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싸우는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어찌나 진지하게 싸우던지, 하지만 결국 그들도 다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개미 떼든 늑대 무리든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며, 살다가 죽는 것, 이것이 바로 헛됨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와서 계속 다투고 싸우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고 맙니다.

전도자의 언어를 귀담아들으십시오. 축복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 저주 가운데 살면서 축복받기만을 조급해하던 사람들은 모두 알아야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이 바로 축복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해 아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며, 일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까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조차 주관할 수 없으며, 알지 못하는 영계의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유명 인사가 넘어져 병원에서 8일 동안 버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형제의 어머니는 폐에 음영이 발견되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서둘러 가서 뵈어라. 섬길 수 있는 대로 섬기고, 어머니께 반드시 영계의 비밀을 전해 드려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귀신도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해 드려라.”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영계의 일이야말로 진짜 실체이며 세상의 일은 허상이고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영계에 대해 인간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영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영계의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미신이라고 치부합니다. 폐에 음영까지 생긴 마당에 어찌 이리 교만할 수 있습니까? 모르는 것이 그렇게 많으면서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형제에게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영적인 실체에 대해 잘 설명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영계야말로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전도서》를 썼습니다. 이 전도자는 평생 인생의 가장 높은 정점에 올랐고, 왕이 되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헛되고 헛되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도 그렇게 고백했는데, 평범한 백성인 우리가 솔로몬의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부터 새로운 습관을 기르십시오. 누가 높은 사람이고 누가 낮은 사람인지 분별하고, 자신이 얼마나 낮은 위치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

이번 본문 말씀은 《전도서》 1장 1절부터 2절까지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겠지만, 다음 주에도 《전도서》를 설교할 것이며, 우리는 《전도서》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2)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솔로몬이 전한 헛되고 헛됨의 의미를 깨닫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의 논리 체계를 깨달아 아브라함이 어떻게 축복의 길로 들어섰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아브라함이 걸어간 그 축복의 길을 따라 힘차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보좌 높이까지 끌어올려 만물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귀한 보배로 삼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헛된 평생의 날 동안 주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솔로몬의 일생은 대단히 화려했습니다. 형제님들이라면 분명 부러워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수없이 많이 두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구하는 대로 다 얻었고, 재물도, 사람도, 권세도,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여러분, 그가 헛되고 헛됨을 깨달은 후에 아내들을 많이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먼저 수많은 아내를 얻어보고 난 후에야,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일생을 총결산했는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하신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솔로몬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가 한 말이나 그가 내린 판결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친어머니는 자기 아이라고 하고, 가짜 어머니도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솔로몬 앞에 와서 판결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넘쳐서 그 아이를 반으로 갈라 한 사람에게 반씩 나누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친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황급히 “차라리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고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했고, 가짜 어머니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단번에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채고 가짜 어머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금을 싣고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솔로몬을 만나려면 막대한 예물을 가지고 가야 했으며, 그것도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 몇 마디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해 엄청난 양의 금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과 들을 귀만 가지고 오면 됩니다. 제가 여기서 헛되고 헛됨을 전하고 있는데, 속으로 ‘내일 당장 방세를 내야 하는데, 내 빚은 누가 갚아주나? 무슨 헛되고 헛되다는 소리람’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은 모든 것을 다 가져본 사람입니다. 다 가져본 사람만이 그것을 다 누린 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압니다. 여러분은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마윈이 무대에서 강연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는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러자 청중 한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마윈 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돈 버는 법이나 알려주세요.” 마윈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오직 돈 버는 방법만 생각하니, 마윈의 이야기와는 전혀 핀트가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3천 년 전의 솔로몬은 왕이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지혜로 충만했던 사람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헛되고 헛되다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도서》의 마지막 결론은 ‘일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마윈이 돈에 관심이 없다고 한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91위안을 벌던 때였습니다. 알리바바를 창업했을 때가 아니라, 교사로서 91위안을 벌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자전거 한 대를 샀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돈을 모아 자전거 한 대나 손목시계 하나를 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기쁨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것들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만물이 피곤하도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일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서 1:4-17)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마음에 와닿으셨습니까? 아직 깨닫지 못하셨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합니다.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 회사는 996(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근무)이다, 007이다, 저 회사는 세뇌를 시킨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이야기를 꺼내면,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동남아의 무한경쟁 끝판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일을 하지 않으면 대단히 괴롭습니다. 사람은 수고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매일 놀기만 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실컷 놀고 나면 공허함만 남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제 친구 중에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내를 데리고 자주 가서 여럿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온갖 이별과 만남의 슬픈 노래를 부르고,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별 노래를 부르며 당시에는 아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헛됨(虚空)’이 아니라 ‘공허함(空虚)’이었습니다. 그 기분은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실컷 놀았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몹시 괴로웠던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매일 일하며, 일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겁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은 저에게 정말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어떤 은혜일까요? 바로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평생 수고하는데,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유익은 바로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것 자체, 일하는 것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일을 하면 실제로 돈을 벌게 되고, 일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를 창출합니다. 가난한 것보다는 부유한 것이 낫고, 돈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목적은 돈 때문이 아니라, 수고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쁨 때문입니다. 인생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모두 그렇게 일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라고 하거나, 야곱이 “스트레스 때문에 미치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도 지극히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저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일하다 보면 고통을 잊었으며 일하는 중에 기쁨을 누렸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참으로 큰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뿐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도 늘 즐거웠습니다. 시험에서 몇 등을 하든 부모님은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늘 “얘야, 너무 무리해서 몸 상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1등이나 2등을 해도 크게 기뻐 뛰지 않고 그저 담담했고, 20등 밖으로 밀려나도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대로 지냈습니다. 저의 마음가짐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성적 따위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꼈고 어떤 결과를 얻든 다 좋았습니다.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한 후에도 저는 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스트레스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전혀 없습니다. 파김치가 될 정도로 지쳐도 스트레스가 있을까요? 여전히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녹초가 되었는데 어떻게 스트레스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그저 일에만 전념할 뿐이며, 일에 몰입하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그리고 바쁜 하루를 마치고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채 다 함께 야식을 먹으러 가서, 개구리죽 한 상에 궁보 개구리 요리, 생강 파 개구리 요리를 곁들여 먹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한전석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인생의 낙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고 중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전도자로 부르신 것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도(道)를 정말 잘 전할 자신이 있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수고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유익은 바로 수고하는 가운데 밥맛이 꿀맛 같고, 잠을 달게 자며, 가끔 술 한 잔 기울이는 그 소박한 기쁨에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라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해는 떴다가 다시 지고, 원래 솟았던 그곳, 곧 이 땅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데 사람은 사라진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구 소유권이 있는 집을 샀지만 집은 그대로 있고 사람은 떠났으니, 그 문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의 높은 관점에 서서 인생이라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영원의 영역으로 올라가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다보면, 4천 년 전의 아브라함이 보이고, 3천 년 전의 솔로몬이 보이며, 2천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보이고, 오늘날의 제 모습까지 보입니다. 이렇게 내려다보면 단번에 깨닫게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문제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아주 작아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눈앞의 작은 일에만 얽매여 문제를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태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영원 속에 서서,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여러분이 겪는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만이 참된 것이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수고하면서도 기뻐하지 못하는데, 오직 돈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피땀 흘려 돈을 조금 모았고,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가 되었으며 집도 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돈을 가지고 주식 투자를 했다가 전 재산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주식을 하지 않고 계속 일하면서 차곡차곡 모아두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매님은 하룻밤 사이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집 한 채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하나 키웠더니, 그 아들이 빚을 져서 집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이리저리 부대끼다 보니 집마저 날아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찾아와 “목사님, 제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어쩌긴 뭘 어쩝니까? 애초에 욕심부려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수습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그 당시에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겠습니까?” 자매는 “저는 그저 주식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을 뿐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주식을 배우려다가 돈을 다 날렸군요.” 이제 와서 보니 스트레스가 태산 같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원의 관점에 서 보십시오. 500년 전에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고, 1천 년 전에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50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 전, 300년 전, 200년 전에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과거의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세월이 흘러갈 때까지 말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빚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집이 문제가 됩니까?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제발 일을 벌여 자초하지 마십시오. 기어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야겠습니까? 평생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제 손으로 다 날려버리고 맙니다. 사람은 돈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사람이 천 년을 산다 한들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평생을 갈등과 번민 속에 살아갑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 때문에 번민하고, 일할 때는 직장 때문에 번민하고, 빚을 졌을 때는 빚 때문에 번민합니다. 차라리 이름을 ‘번민’이라고 바꾸십시오. 이 씨면 ‘이 번민’, 유 씨면 ‘유 번민’, 왕 씨면 ‘왕 번민’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힙니다.

사람이 살면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들 때문에 여러분 평생의 기쁨을 망쳐버리지 마십시오. 장담하건대, 저는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제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성씨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이름은 중요합니다. 온통 갈등과 번뇌뿐이라면, 세상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전도자의 언어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어떤 자매님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합니다. 《전도서》를 읽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전도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놀랍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전도서》를 읽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성경을 다 읽고, 제가 설교를 다 끝내도 여전히 삶은 엉망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문제는 아주 사소한 문제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그 어떤 일도 여러분 안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은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려 하심인데, 여러분 스스로 수많은 잔꾀를 내고, 수많은 번뇌를 찾아내며,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면 자업자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책에도 이 수많은 갈등과 고뇌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굴원의 한 맺힌 번민 하나만 기록해도 우리가 단오절을 기념하기에 충분한데,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쓴다면 매일매일이 단오절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한 짐, 내일도 한 짐, 일 년 열두 달 내내 번민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굴원은 결국 그 번민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란다면 굴원처럼 살아야겠지만, 사실 그런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굴원이 조금만 일찍 《전도서》를 들었더라면 전도자가 되었을 텐데, 멱라수에 뛰어들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랬다면 단오절 같은 명절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인생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중국인들 중에는 인생을 달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그저 헛된 오명으로 끝나고 맙니다. 저는 이런 집착이 너무나 허망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실로 헛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훗날 누군가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당신을 기억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공명과 부귀영화를 좇지만, 실상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제갈량은 한실을 부흥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소망을 품고 살다가 지쳐 죽었습니다. 평생 참으로 고달프게 살았습니다. 그것 역시 수고 속의 고난이었으며, 그 수고 중에 기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왕조가 바뀌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진시황은 점술가를 찾아가 자신의 후손이 몇 대까지 황제 자리를 이어갈지 점을 쳐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진 2세에 이르러 그의 아들 대에서 망해버렸으니, 고작 1대로 끝난 셈입니다. 저는 참으로 깊은 탄식을 느낍니다. 인생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내가 죽어도 이 땅의 일들은 그대로 남아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전도서》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었다면, 결코 만대에 걸친 영원한 기업 따위를 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얼마나 훌륭하게 말했습니까? “내가 지혜로 얻은 모든 것을 장차 누구에게 물려주겠는가?” 결국 르호보암 같은 어리석은 자식에게 돌아갔으니, 실로 허무한 일입니다. 웅장한 궁궐을 지은 것도 부질없었고, 거룩한 성전을 지었으나 훗날 황폐해져 아무도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주를 받아 궁궐도, 성전도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겪게 하신 것은 극심한 노고이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 법칙을 설계해 두셨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극심한 노고를 겪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거짓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극심한 수고를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토록 많은 고난을 겪게 하신 이유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토록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아등바등 집착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빚더미에 앉아 백모녀의 비극적인 처지가 되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인생을 꿰뚫어 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밑바닥에 있을수록 더 고생하면서도 더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기이하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극심한 노고를 겪게 하신 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아브라함 시대에는 오직 아브라함 한 사람뿐이었고, 이삭의 시대에는 오직 이삭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세상에 집착하며 그저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그렇게 아등바등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방심하면 순식간에 이러한 세상의 논리 체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자식을 키울 때, 자기 자식이 출세하지 못하거나 똑똑하지 않고 뛰어나지 못하면 남 앞에 데리고 나가는 것조차 부끄러워합니다. 스스로 사서 기쁨을 잃어버리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생 자랑하는 것들이란 고작 슬픔과 수고로움뿐입니다. 사실 즐겁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으며 누가 더 잘났는지, 누구 아들이 더 유능한지 비교하고, 아들이 변변치 못하면 창피해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평생 헛됨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비극입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이 세상에는 구부러진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부러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불공평과 불의를 허용하셨습니다. 어떤 재판은 잘못 판결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부러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을 억지로 펴서 곧게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부러지게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머리가 문틈에 끼어 둔해진 것 같습니다. 사실 문틈에 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집게에 집혀서 분별력을 잃은 것입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계속 헛된 집착을 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서 우리마저 덩달아 집착에 빠져듭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곧게 펴보겠다고 매달리지만, 평생 가도 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왕조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힘으로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습니다. ‘반청복명(청을 멸하고 명을 회복함)’을 이루었습니까? 못 이루었습니다. ‘한실 부흥’을 이루었습니까? 못 이루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이러했고 왕조의 교체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갈량도 마지막에는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것은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은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왕처럼 구부러진 족속이 됩니다. 날 때부터 고집불통이 되어, 기어이 홍해 바다 밑바닥에 수장되고 나서야 끝이 납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왜일까요? 아는 것이 많을수록 번민과 고통만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곧게 펴보려고 발버둥 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억지로 펴려 해도 펴지지 않으며, 가난한 전도자를 부유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 지식이 매우 유용하다고 착각하여 밤낮을 잊고 공부하지만, 결국 지혜와 광기와 미련함 모두가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짓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까?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하고,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된 날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마지막 결론은 ‘일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핵심을 붙잡으셨습니까? 핵심을 깨달았으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들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세월은 여러분을 숨 막히게 짓누를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헛된 것임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발견하고 그분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복되고 좋은 일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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