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가 당신의 안목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요한계시록 4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심오한 장입니다. 이 장의 주제를 제가 여러 번 정리해 보았는데, 지난번에 전할 때는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였습니다. 이번에는 이 주제를 ‘하나님 보좌의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로 바꾸었습니다.
높이가 사람의 안목을 결정합니다. 사람이 왜 많은 혼란을 겪을까요? 사람의 높이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높이에 서 있으면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합니까? 고생하고, 고통받고, 참으로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저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어떤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느낌이 찾아오면 온몸을 덮치는 허무함이 순식간에 사람을 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데, 그 기분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너무 현실에만 얽매여 힘을 팍팍 주며 살아가면 사실 더 고통스럽습니다. 나중에 제가 깨달은 것은, 많은 일들을 자신을 하나님의 보좌 높이까지 끌어올려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장의 제목이 바로 ‘하나님 보좌의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입니다.
사도 요한도 사실 수많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구하고 난 뒤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그런 혼란들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신 듯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높이로 들어가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영원하신 분의 높이에서 바라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그러고 나서 고작 70년, 80년에 불과하고 어떤 사람은 30세, 40세에 죽고 마는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결론을 얻게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서 다시 바라보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저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질문에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높이가 사람의 안목을 결정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것을 기록해 놓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다 읽고 나서 여러분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의 설명을 참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을 때 네 생물을 보았는지,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말해봤자 무엇에 쓰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사도 바울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일을 훨씬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 요한을 이 높이까지 끌어올리셨는지, 그리고 요한은 왜 그것을 보고 기록했는지 저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저 역시 요한이 무엇을 보았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해 우리는 다시 조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을 조정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참으로 현실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한들 너희는 내가 진짜로 본 것인지 가짜로 본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가 이것을 보았네 저것을 보았네 하며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 요한에게는 유대인 특유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이 이런 것들을 보았고, 요한도 보았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게 하셨기에 그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혼란스러워하지 마시고 이것 하나만 요약해 붙잡으십시오. 바로 ‘높이가 사람의 안목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요한이 기록한 환상들이 여러분에게도 혼란을 주고 저에게도 혼란을 주며, 대체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을 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일곱 교회에 대해 쓸 때는 그래도 우리가 읽고 이해할 만했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4:1)
사도 요한은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 하늘의 문이 열렸을까요?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은 구함에서 비롯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요한이 무엇을 구했는지는 유대인의 구함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는 밧모섬에 머물며 많은 혼란 속에서 이것들을 구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보고, 교회의 온갖 천태만상을 보며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끝이 없었습니다. 이쪽에서는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나오고, 영지주의가 나오고, 온갖 다른 주의들이 판을 쳤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비슷합니다. 한쪽에서는 은사주의라 하고, 한쪽에서는 복음주의라 하고, 장로교라 하고, 감리교라 하고, 성공회라 하고, 가톨릭이라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나면 멍해지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니, 내가 너를 하늘로 데려와서 다시 보게 해 주마’ 하신 것입니다. 하늘로 데려오셨다고 해서 그의 의문들에 일일이 답해 주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높이에 서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일을 요한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요한의 혼란이 해결되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그를 하늘로 들어가게 하셨고, 요한은 그 내용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사실 바울도 이런 것들을 보았지만 기록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기록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기록했습니다.
기록된 후,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구했던 것과 같은 식의 환상을 굳이 애써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타난 일, 분명한 일은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요, 은밀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요한계시록 4장에서 요한이 이것들을 기록해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보좌의 높이에 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는 하늘의 이 모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이 광경을 보고 저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여러분을 속이려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네 생물이 매일 끊임없이 거기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것이 소음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밤낮 쉬지 않고 말합니다. 요한이 본 것이 밤낮 쉬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그가 밤낮 쉬지 않는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잠깐 보고 내려왔을 텐데 말입니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까요? 아마 요한은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가서 날마다 거기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고만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참으로 아리송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24장로가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이 일만 하고 있다는 것일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설령 진짜 그렇다 해도 그런 것이니 우리가 어쩔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온종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소리만 듣고 계시고, 우리는 땅에 엎드려 있으며, 24장로가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분을 경배하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끝없이 무한 루프를 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닐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단순히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적인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계시가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를 뒤엎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네 생물이든 24장로든 어떤 모습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의 뜻은 처음부터 결코 변하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온 땅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창조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속성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자 요한은 영계로 들어가 영계의 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이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장차 일어날 일들을 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장차 일어날 일은 요한계시록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사자들과 함께 오시고 우리가 하늘로 끌어올려져(휴거되어) 하나님을 만나며, 이후 이 땅에 내려와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며 이 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논리가 맞습니다.
요한계시록 후반부에 기록된 것과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올라오라’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높이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고, 장래의 일을 너에게 계시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높이에 서서 하나님의 계획의 높이에 서게 되면, 수많은 혼란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 밖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 모든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창세기, 전도서를 한데 엮어 바라볼 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 없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참으로 헛되고 헛된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이 사실 무지하여 어릴 때부터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곤 그저 먹고사는 일뿐입니다. 이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 밖에 있으니 고생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겪어온 그 고생들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오늘날 형제자매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면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길을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이후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고,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 안에 그분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구원받고 천국으로 관광이나 가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에 장차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장차 일어날 일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을 바라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더 이상 혼란이 없습니다. 창세기와 신명기를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놀랍고 오묘한 말씀들이 단번에 하나의 체계로 잡히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이 높이에 이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분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전체 가치관이 단번에 바뀌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의 개별적인 질문들을 일일이 풀어주신 것이 아니었지만, 요한이 이곳에 올라와 이것들을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우리 안에 본래 있던 고정관념들이 산산이 부서진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고향에 사는 분이라 직접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천사의 계시를 받아 ‘가족들에게 너를 묻지도 말고 화장하지도 말라고 해라,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숨이 끊어졌지만 몸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가족들은 기다렸고, 많은 형제자매들도 곁을 둘러싸고 지켰습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많은 것을 보았다며 제게도 몇 가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오지 그러셨어요?” 했더니 가져올 수도 없고 찍을 수도 없었으며 핸드폰을 두고 갔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사흘째 되는 날 정말로 살아났고, 살아난 후에도 참으로 신기한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도 신기했고 그의 경험도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람이 지각과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은 흐지부지 지나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요한처럼 되지는 못하겠지만,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이 높이로 올라오게 하셨는데, 그가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다
많은 분들이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그대로 살아갑니다. 정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들에 호기심을 품고 빠져드는 상태에 빠지지 마십시오.
본문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보좌를 살펴봅시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요한계시록을 전하는 것은 그 사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제가 증명하고 싶은 한 가지는, 그가 죽어 사흘 동안 하늘에 가서 은밀한 일들을 보았다는 식의 이야기나, 『5일 반 동안의 천국 여행』 같은 책들에 대해 저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거나 환상을 보겠다며 쫓아다니는 것을 별로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표적이나 확증을 구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좇다가 심하게 미혹당하고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베풀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요한은 영계로 들어갔고, 영계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베풀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이란 무슨 뜻입니까?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는 영계 안에 있으며, 하늘이 곧 영계입니다. 마귀의 영계와 하늘의 영계는 같은 차원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마귀의 영계는 하나님의 영계보다 훨씬 낮은 차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았고, 이것은 우리가 늘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계의 일이 이 땅의 일을 결정합니다. 영계의 일, 특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계가 땅의 일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밀한 말을 들었으나 너희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해본들 요한이 보고 기록한 것을 두고 ‘이런 것을 써서 뭐 하려고 했을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역시 그가 왜 이것을 썼는지 다 알지는 못합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요한계시록》 4:6-8)
제가 여러분께 세세하게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붙잡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온몸에 눈이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소의 관점으로 보든, 사람의 관점으로 보든, 독수리의 관점으로 보든, 사자의 관점으로 보든, 온몸 안팎에 눈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사자, 소, 사람, 독수리가 받치고 있고 온몸에 눈이 가득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안목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목이 하나님 보좌의 높이에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보좌 아래의 이 네 생물을 통해 무엇을 요약할 수 있습니까? 네 생물의 온몸에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안목이란 실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에는 아주 명쾌한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영계 안에서 이미 이 땅의 일들을 다 정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는 창세 전에 이미 다 정해졌으니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눈을 가지게 되면, 이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네 생물의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아래, 보좌보다 아주 조금 낮은 높이에 있습니다. 그 높이에서 바라볼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보시는지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신학을 공부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라고 했더니, 그가 “왜 중도에 그만두셨습니까? 참 아깝네요”라고 하더군요. 아깝긴 무엇이 아깝습니까? 제가 돈을 내고 수업을 듣고 시간을 쏟으며 일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비가 정말 비쌌습니다.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신학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이 사안을 어떻게 보시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하길 “내가 예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하더군요. 기가 막혀 숨이 턱 막힐 뻔했습니다.
제가 신학을 배우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사물을 어떻게 보시는지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공부를 마치고 나서 하나님과 같은 안목, 적어도 이 네 생물과 같은 안목이라도 얻고자 했는데, 네 생물의 안목도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도 모른다면 대체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배운 것들이 다 쓰레기 같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조차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저 보좌일 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보시는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날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과연 무엇인가?’
오늘날까지도 많은 저주받은 자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착각하며, 저주 속에서 인내를 훈련한다면서 저주 속의 인내로 자신을 극도로 완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왕의 완악함과 같습니다.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합니까? 거기에는 영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생물의 안목도 없고,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는 이 고백을 온전히 깨달아 요약해 낼 수 있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교수를 만났으니 집어치우자 싶었습니다. 무엇을 더 배우겠습니까? 지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 논문 따위를 써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신학교를 졸업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배웠다는 점입니다.
그 후 어느 목회자분을 만나 물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셨습니까?” “네, 했습니다.” “그럼 신학 공부가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아니요, 쓸모없었습니다.” “그럼 진짜 유용한 것들은 배우셨습니까?” “안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확신했습니다. ‘그만두자!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하나님 보좌의 높이까지 끌어올리자.’
그래서 여러분께 내려놓으라고 말씀드립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면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할까요? 하나님의 보좌에 서서 보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너무나 진지하고 지나치게 힘을 주며 살아가다가, 힘을 너무 과하게 주는 바람에 온갖 병에 걸려 고통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인도할 때마다 매번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고 저도 말하기가 지칠 지경입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렇게 아등바등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아등바등합니다! 암 환자를 돌보면서도 그렇게 아등바등합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평생을 그렇게 억울하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돈을 사랑합니까? 안목이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조금만 생겨도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립니다. 제가 “얼마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저 백만 위안 남짓인데, 재테크를 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재테크를 안 하기만 해도 이미 60%는 앞서는 것입니다. 재테크를 한다고 뛰어들었다가 호구처럼 털리는 사람이 바로 재테크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서 저는 우리 사역자들에게 아주 상식 밖의 요구를 합니다. 왜 상식 밖일까요? 교회는 돈을 쌓아두지 않고, 재테크를 하지 않으며, 교회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형제자매들을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이끌고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하는 일만 합니다.
재물이란 한낱 노잣돈 종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이여!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외치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무엇을 염려합니까? 우울증이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보좌로 삼으십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찬양할 때 알게 됩니다.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 24장로가 보좌 앞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목을 높여 수많은 혼란을 해결하십시오. 모든 혼란은 그분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어떤 성도들은 제게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라고 합니다. 다 듣고 나서 저는 “그런 쓸데없는 소릴 내게 왜 합니까? 헛소문이나 퍼뜨리는 것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온갖 하찮고 비열한 소리들입니다. 제가 의지하는 분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못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시시콜콜한 사소한 일들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사라졌습니다. 제 높이가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는 문제를 볼 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보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다
세상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보좌를 보셨습니까?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보았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우리 가운데 날마다 이것 걱정, 저것 걱정하는 것은 삶에 너무 힘을 주고 진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등바등 진지하게 살아도 결국 죽습니다. 사람의 안목으로 보면 ‘50세에 죽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겠지만, 사실 그는 예수님보다 20년은 더 살았는데 무엇이 안타깝습니까? 어떤 사람은 60세까지 살면서 ‘난 절대 죽으면 안 돼, 악착같이 살아야 해’라고 합니다.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도 악착같이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때로는 참으로 답답합니다.
제가 기도를 인도할 때마다, 형제자매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를 1만 6천 석짜리 대형 교회로 짓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 의자에 사람이 가득 찬 것을 보는 것도 아니며, 교회가 화려하게 인테리어 된 것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보며, 그분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기를 원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여러분께 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저의 신학 체계 안에서 돈이란 노잣돈 종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을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준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데 그것들이 왜 필요합니까? 그러므로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리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앙망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사모하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안목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 높이에 서서 바라보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참으로 역겹고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늙은 노인이 뼈 빠지게 고생만 할 뿐, 나라를 더 위대하게 만들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오늘날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정치 체계 속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무궁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영원 속의 안목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보좌 높이를 가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십시오.
24장로를 보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 24장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모릅니다. 요한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흰옷을 입은 24장로를 보았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장로’라는 명칭에 대해 저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대체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초대교회의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자신도 장로였습니다. 저는 그런 장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24장로가 12사도에 12지파를 더한 것인지 무엇인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한 가지만 주목하면 됩니다. 그들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흰옷을 입은 채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그 높이까지 올라간다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장로의 자리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장로는 이 땅의 그런 장로가 아닙니다.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이들은 바로 ‘승리하는 백성’입니다. 승리란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알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도 여러분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얩복 나루를 건너려 할 때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다가 하나님에 의해 땅에 짓눌렸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사자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훗날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승리입니까? 하나님의 사자에게 땅에 짓눌려 다리까지 절게 되었는데 이겼다니요?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분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에서가 야곱 앞에 왔을 때 죽이려던 생각도 잊고, 왜 왔는지조차 잊은 채 목을 끌어안고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알 때, 여러분은 금관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진 흰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굴복하는 모든 자가 금관을 얻고 흰옷을 입게 됩니다. 24명인지 25명인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 곧 ‘승리의 신학 체계’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창조되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모른다면 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좁은 형편에 갇혀 너무나 비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 높이에 이르면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지어졌음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하나님 보좌의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네 생물을 보았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으며, 24장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24장로가 “만물이 주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도 하나님이 지으셨을까요? 사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 왜 사탄을 만드셨습니까?” 하고 의아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해서다”라고 하십니다. 오늘날까지 세상 어둠의 주관자 노릇을 하는 이 타락한 천사들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왜 지으셨을까요?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도 참으로 훌륭하게 지으셨습니다. 지금은 동산 중앙에 나무 한 그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길 양옆에 온통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 열매는 보기에 너무 탐스럽고 먹으면 지혜롭게 할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바구니째 따먹으며 오늘날까지 먹어대다 스스로를 극심한 고통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실로 위대하여 사탄도 지으시고, 타락한 천사들도 지으시고, 사람도 지으셨습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데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바로 승리하는 사람이 실로 아름답습니다.
제가 한 말씀 드리면 많은 분들이 제가 좀 교만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과거에 눈물과 땀이 있었고 힘들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승리하며 걸어온 지금 참으로 좋습니다. 지금은 마귀가 없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영적 전쟁이라는 선별 메커니즘을 통해 보배들을 걸러내어,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저는 그저 천국에만 들어가면 됩니다. 청소부라도 괜찮고 면류관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천국에는 그런 일자리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청소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귀신을 쫓아낼 때 어떤 귀신에게 “너는 누구냐?” 물었더니 “나는 ‘유래유거(왔다리갔다리)’다”라고 하더군요. 《서유기》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다른 귀신에게 “너는 누구냐?” 하니 “나는 ‘래래거거(오락가락)’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서유기》에 나오는 졸개 귀신들의 이름이 실제로 존재하더군요. 참 신기했습니다. 이런 귀신들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귀신들이 없다면 어떻게 승리하는 자들을 선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목회자로 사역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좋습니다. 얼마 전에는 귀신들 이름이 참 우스웠는데, ‘번보얼바’와 ‘바보얼번’이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만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알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뜻 안에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승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 경기에 참여하여 승리하든지, 아니면 탈락하든지 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이 여러분을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내나 자녀나 부모나 전토나 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며, 그리할 때 현세에서 백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곧 ‘승리’임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 신학이 승리의 신학인 이유입니다.
오늘날 형제자매들이 너무 아등바등 살아가며 세상의 하찮은 일들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힘을 뺍니다. 관 속에 눕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여러분의 사랑도 미움도 다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얻은 우리 안의 은혜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겨내십시오. 아주 단순합니다.
더 이상의 혼란은 없다
오늘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다시 읽을 때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 하는 함정에 빠지면 금세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관점을 따라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면 더 이상 혼란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혼란스러우십니까? 우리 가운데 혼란이 남아 있습니까? 더 이상 혼란은 없습니다.
혼란스러운 이유는 우리 내면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따른다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혼란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바로 ‘높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높이가 충분하다면, 어제부터 오늘까지 울상을 지으며 살아왔다 할지라도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가 제가 드리는 이 말을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는 너무나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지으신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바쁘게 쫓아다니다가 온몸에 병만 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영계가 아닌 하나님의 영계, 곧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서 다시 바라본다면 수많은 문제들이 술술 풀리고 더 이상 집착하며 아등바등하지 않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 어떤 자매가 고향 집에 내려갔는데, 대야에 때가 가득 끼어 도저히 쓸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설 명절에 고향에 가서 집 안 청소를 싹 해놓고 온 참 착한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가 얼마나 영적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리 영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상을 깔끔하게 정돈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인 5월에 다시 가보니 대야에 또 때가 가득 끼어 있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대야 하나 깨끗이 씻지 않을 정도로 게을렀던 것입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대야가 그렇든 무슨 일을 그렇게 하든, 화장실에 다녀와서 뒤를 덜 닦았어도 그 사람들은 오늘까지 잘 살아왔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죽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치워주려고 해봤자 끝이 없습니다.” 자매가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라고 하더군요.
그저 “맞네요”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쯤 인생을 명확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트집 잡고 내일은 저것을 꼬투리 잡으며 날마다 남의 허물만 들추어내는 사람이 된다면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기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직도 혼란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이제부터 자신을 거룩한 번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나타내며 마귀를 발아래 짓밟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으려야 안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일터에 여전히 스트레스가 있습니까? 사라집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까? 없어집니다. 마음속에 짜증이 남아 있습니까? 사라집니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는 태도가 남아 있습니까? 없어집니다. 아무런 중압감 없이 살아가면서도 주께 하듯 모든 일에 성심을 다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셨습니까? 아직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 서지 못하셨다면, 여러분 앞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문이 열려 여러분이 그곳으로 올라가 장차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장차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바라볼 때 세상의 이런 일들은 모두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장차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되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만물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 마음이 문득 활짝 열리고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참으로 평안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붙들고 있는 것은 제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인데 제가 긴장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뒤에 이것을 누구에게 물려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