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말라기》 1장을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임했다.” 이 말씀은 훗날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권이며, 말라기 역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는 어떤 배경 속에서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을 위해 당시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북이스라엘로 후에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했고, 다른 하나는 남유다로 후에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킬 당시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70년 후에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왕국은 왜 멸망했을까요? 이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헌금을 드리는 태도가 매우 악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멸망한 지 70년이 지난 후 다니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을 기억하고 금식하며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그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지 70년 후에 다니엘은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을 택하셨고,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 포로민들의 태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각자 자기 집만 돌보고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황폐하게 내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와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결과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황폐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스룹바벨이 성전 재건을 완수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성전을 지었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조차 매우 번거롭게 여겼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 역시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내면에 이런 태도가 있다면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결국 깊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들은 그 기회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번번이 놓쳤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기 안위와 소소한 일상만을 챙기는 삶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남에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오직 자기 먹고사는 일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이것저것 골라내다가 결국 흠 있는 양 한 마리를 골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좋은 양은 어디에 두었을까요? 자기들을 위해 남겨 두었습니다. 때로 집에 손님이 오면 조금 더 좋은 양을 골라 대접하면서도, 하나님께 드릴 때는 아무 양이나 대충 집어서 바쳤습니다.
《창세기》 4장에도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내며, 잘못된 헌금의 태도는 깊은 저주를 불러옵니다.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약 80~9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느헤미야라는 선지자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성경》에서 《느헤미야기》가 비교적 앞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그 연대가 훨씬 앞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말라기 시대의 인물로, 하나님의 성전과 성벽이 여전히 무너져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졌던 것입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단 52일 만에 성벽을 수축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수년 동안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스룹바벨부터 느헤미야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70~80년이 흘렀지만,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한결같았고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스룹바벨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안위만 챙기는 삶을 살았고, 말라기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러했습니다!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때부터 말라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 번도 온전히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리다가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은 삶의 방식을 고수했으니, 인간의 좁은 안목이란 참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더는 하실 말씀이 없으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할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렸기에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가 언급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헌금’입니다. 사실 헌금을 드리는 태도는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습니다. 헌금의 태도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며, 한 사람의 핵심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음으로 인해 그 은혜가 우리 이방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말라기가 활동했던 연대를 간략히 소개해 드렸는데,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로 대표되는 출애굽 사건은 약 3,500년 전의 일이고, 3,000년 전인 기원전 1000년경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6002,700년 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무렵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했습니다. 약 2,5002,600년 전에는 남유다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약 2,400년 전이 바로 말라기 시대로, 이 인물들과 연대는 이러한 흐름을 거쳐 왔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세워져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대략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의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란 참으로 기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보십시오, 본래라면 교통사고를 당해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는데, 우리는 ‘원래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작은 일상에 취해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일상에만 매몰되다 보면 점점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고, 모든 것이 자기 공로이며 한 푼 한 푼 다 자기가 힘들게 번 돈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속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흔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경험한 모든 일을 기록해 두고 자주 들여다보고 넘겨보며 잊지 않도록 하라고 늘 당부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귀신에 의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귀신에게 휘둘리기 전에는 반드시 기억력에 문제가 생겨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잊어버리고 큰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에서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이 겉보기에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에서가 겪은 모든 일은 본래 우리가 겪었어야 할 일들입니다. 본래 우리는 에서와 같은 처지여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시고 그의 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겨주신 것을 보십시오. 그들이 재건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라.” 이것이 바로 그 논리입니다.
본래 여러분 자신이 에서의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에서를 그렇게 대하시든, 누구를 그렇게 대하시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깊은 감회에 젖곤 합니다! 최근 관찰해 보니, 우리 중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자매님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그 남편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십시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의 믿지 않는 남편은 사기를 당해 20여만 위안을 날렸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의 믿지 않는 남편은 10만 위안의 대출을 받았는데 물건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깨닫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에서의 길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대우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다가 스스로 저주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모든 돈을 자기가 피땀 흘려 번 것이라 생각하며, 힘들게 번 돈을 헌금으로 바치면 얼마나 아깝고 고통스러운지 모른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혔습니까? 흠 있는 양 한 마리 드린 게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주의 사랑을 받은 것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논리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학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나 말라기 시대에 이르러 그들은 모조리 잊어버렸습니다. 말라기 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불과 80~90년, 아니 한 해만 지나도 다 잊어버렸고 그 결과 헌금하는 태도가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한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헌금에 대한 태도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실제 돈이기 때문이며, 자기가 땀 흘려 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헌금을 드린 후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미 많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본래 우리에게 임했어야 할 재앙을 하나님께서 면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저는 깊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며칠 전 우리 중 한 자매님의 남편이 운전을 하다가 쾅 하고 사람을 쳤습니다. 아이 둘 중 한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듣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집니다! 사람은 재앙과 내일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알지 못합니다. 참으로 고달픈 인생입니다!
세상의 재앙이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다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찌하겠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기 아까워하고 흠 있는 것만 바쳐 왔다면, 차라리 헌금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라며 의아해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6)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자들이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다니요? 이러한 처지에 놓여 사는 인생이란 참으로 비극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혔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 1:7-8)
사람이 이토록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헌금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가장 중요한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태도가 바르지 않다면 헌금을 드리지 마십시오. 그러나 잘못된 태도를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을 대단히 번거롭게 여깁니다. 사실 하나님께 우리의 헌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이론적 기초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저 먹고사는 일상만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 일상에 방해가 된다고 느끼면 반드시 이러한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핵심 이익과 충돌하는 순간 온갖 의문과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사명 밖에는 축복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삶에 방해된다고 느껴지는 모든 순간이 의문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귀찮게 느껴지겠습니까!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이미 저주를 받아 온종일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목회자에게 전화를 걸고, 목회자가 기도를 해 주어 두려움이 사라지면 곧바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렇게 계속 살아보십시오! 저는 이러한 성도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본성이란 이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핵심 요구가 있습니다. 놀러 다니고 여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재미가 그리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기도는 너무 귀찮고 ‘두려움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없을 때 실컷 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찾아오면 다시 교회를 떠올리고, 두려움이 가시면 또다시 밖으로 놀러 나갑니다. 인간이란 본래 이렇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긴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핵심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노는 데 방해가 되었거나 돈 버는 데 방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같은 사람들은 노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돈 버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근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변을 관찰해 보면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내일이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머지않아 우리 역시 그 길을 걷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잘 지내는 것 같지만 내일이면 우울증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고통을 겪고, 투신자살을 하거나 빚더미에 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비극이 존재하며, 다만 그것이 어느 날 누구에게 닥칠지 모를 뿐입니다.
우리에 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크신 왕이시고, 크고 두려우시며 영광이 충만하신 분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바른 태도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까지 관여하실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일을 주관하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백성들은 자기 소변을 마시고 자기 대변을 먹을 정도로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광경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비극 그 자체입니다.
사람이 평소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인생이 그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재앙과 저주뿐만 아니라 축복 역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 여호와의 성전에 영원히 거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날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제가 제 미래를 무엇 하나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미래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주님을 올바르게 믿고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살아가는 길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제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십일조는 세전 기준입니까, 세후 기준입니까? 퇴직연금 공제액도 십일조에 포함해야 합니까? 공제 전입니까, 후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헌금의 참된 유익을 맛본 후로는 언제나 세전 기준으로 드렸고 퇴직연금까지 전부 포함해서 드렸습니다. 그것들 역시 제 계좌로 들어오는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유익한 일에 구태여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남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제가 어떤 처지에서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난 후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저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당시 저는 투신자살하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방바닥에 벽 모서리를 그려놓고 그곳이 옥상이라 상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십시오. 십수 층까지 갈 것도 없이 5~6층만 되어도 삶을 끝내기에 충분합니다. 살아갈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날부터 제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대단한 암 치료나 천문학적인 빚의 탕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일자리를 하나 주신 것, 그처럼 단순하고 작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생토록 그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오직 은혜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저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이방인에게 임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 역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면 돈이나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의 우환을 담당하시고 죄악을 짊어지시며 수많은 재앙을 제하여 주셨으니,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일생을 평안하게 걸어오며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시편》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좋습니까!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고 마침내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믿겠습니까?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찾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을 때 그들의 삶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징집령으로 느헤미야가 잠시 조정으로 돌아갔다가 2~3년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무너져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서를 예로 들어 저주를 설명하시다
사실 저는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저주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난 후로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만을 원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저의 저주를 거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저는 죄인이었고 말로 다할 수 없이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저는 아침에 일어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 겨우 숨을 돌리고 안정을 찾으려 하면 곧 내려야 했고, 또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실로 걸어 들어갈 때쯤이면 탈진 직전이 되곤 했습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두 다리에 납덩이를 매단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야 저주받은 자의 몸에 귀신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걷기조차 힘들다면 기도하십시오. 귀신을 쫓아내면 온몸이 가벼워집니다. 여든이 넘으신 제 어머니를 보십시오. 젊은이처럼 바람을 가르며 가볍게 걸으십니다. 그러나 때로 귀신이 찾아오면 일어서지도 못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매우 무거워하시는데, 저는 그 느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나면 어머니는 다시 가뿐하게 걸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걸을 때 곰이나 대형 유인원처럼 두 다리를 몹시 무겁게 끌며 걷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가뿐하게 걷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예로 들어 저주를 설명하셨는데,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말라기》 1:2-4)
이 구절을 읽으면 주님을 믿지 않던 옛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도 살아가기는 했습니다. 삼시 세끼 밥 먹고 자고 출근도 했지만, 너무나 피곤하고 고달팠습니다! 저는 우리 중 마음이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는 분들도 이러한 느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죽어라 일해도 한순간에 무너져 원점으로 돌아가고, 열심히 일할수록 다 날아가 버려 헛수고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어떻게 잘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에서일까요? 에서는 자기 두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남긴 것은 한 줌의 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의 힘으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결코 믿지 마십시오. 사람이 언제 하늘을 이긴 적이 있습니까? 인간이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칠 때 쓰나미가 닥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뉴스에서 해변가의 집들이 성냥갑처럼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무섭지 않습니까?
인간이 언제 쓰나미를 이기고 지진을 이겨 보았습니까? 분화구 위에 앉아 보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연과 재앙을 이기지 못하므로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에서는 오직 자기 손으로 운명을 만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불가능했습니다.
때때로 저는 참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저 역시 지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며, 가장 엄격한 공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제 자신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 제 자신을 의지했다가 투신자살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자신을 의지하고 싶고 자신이 꽤 대단하다고 느낀다면, 어디 한번 의지해 보십시오.
하지만 머리가 둔한 사람일수록 유독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봅니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아는 사람일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사건이 설명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서 사랑하셨는가?”였고, 하나님의 대답은 “에서를 보라”였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만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분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대조해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저주 아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우울증을 앓던 사람이 어릴 때는 작은 우울증, 자라서는 큰 우울증, 늙어서는 노년기 우울증을 겪는다면 이것이 저주가 아니겠습니까? 어릴 때 가난에 찌들었던 자가 자라서도 빈곤하고 늙어서도 극빈자로 산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살다 보면 재앙이 닥치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이 없습니다.
훗날 저는 에서에게 ‘라오마(老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오마에 속한 사람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고 육신의 생각을 따릅니다. 라오마는 결코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단물을 조금 맛보여 준다고 해서 당신을 잘 돌보아 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마음, 거기에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까지 이 세 가지 낡은 요소가 가득하다면 그것이 바로 라오마이며, 에돔이자 에서의 삶입니다. 일하면 일할수록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예로 드신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헌금을 드리기는 했으나, 오직 썩고 흠 있는 것만 골라 드렸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믿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작하는 밭이나 집에서 기르는 소와 양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밭을 너무나 맹신했고, 자기 가축들을 지나치게 신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돼지고기는 먹지 않았을지언정, 그들이 믿었던 것은 ‘내 땅 한 마지기, 소 두 마리, 처자식과 따뜻한 방 한 칸’과 같은 안일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읽는 《말라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으며, 저주도 믿지 않고 축복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삼가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도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믿지 않은 채 자기 방식대로만 산다면 끝장입니다.
자신을 의지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의 한계를 압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보십시오. 시험해 보면 즉시 역사하며 귀한 보물을 얻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며 걷다 보면 어느새 불신앙으로 빠져듭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살아가다 보면 점점 불신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제가 먼 길을 찾아가 심방하고 권면했음에도 바뀌었을까요?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라오마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다가, 나중에 여행을 다닐 때만 신바람을 냅니다. 우리 중에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단호히 말씀드리건대 주님을 믿지 마시고 당신의 핵심 요구인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나 열심히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요구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라오마의 먹고 놀자는 체계를 품은 채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이어갈 수도 없으며, 주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노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보람되고 바른 일을 행하기를 힘쓰는 분들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실재하는지를 명백히 증명해 줍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저는 이제 사람의 상태와 생각을 조금만 들어보아도 그것이 라오마의 영인지, 에서의 운명인지를 점쟁이보다 더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닙니다, 저는 이스라엘입니다”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이요, 학개 시대의 이스라엘이며,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에 불과하니 그저 행운을 빌어줄 뿐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는 인간의 불신앙은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직장이나 사업,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임하다
왜 말라기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3 곱하기 8은 24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아니요, 3 곱하기 8은 23입니다”라고 우긴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계산기를 가져와 “보십시오, 3 곱하기 8은 24이지 않습니까”라고 보여주어도 “계산기가 고장 났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부터 말라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완고하게 굴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동일한 믿음, 동일한 추구, 동일한 성정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 성정이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뜻을 이룰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자라야 참 이스라엘이라 불립니다. 육신에 속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영적 후손과 무관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이방인에게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중에는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 없을까요? 아주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두루 찾으실 때 참으로 안타깝게도 보배 같은 자들은 극히 적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보배라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스라엘의 불신을 통해 거울삼아 교훈을 얻으시기를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음으로 인해 원가지인 그들이 꺾이고 우리 같은 자들이 참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본래 우리는 참포도나무가 아니라 나중에 접붙여진 자들이니, 우리마저 믿지 않는다면 더욱 아낌없이 꺾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것은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우리가 매우 위대한 실험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을 드릴 때 결코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어떤 실험을 해 보았을까요? 일반적인 교회는 기껏해야 주일 예배 한 번, 소그룹 모임 한 번,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기도회에 그마저도 듬성듬성 모입니다.
처음에는 저희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매주 성경공부를 두 번 더 늘렸고, 기도회를 한 번 더 추가했으며, 소그룹 모임과 교구 모임을 더 늘렸습니다. 그렇다고 돈 버는 일에 지장이 생겼습니까? 만약 돈 버는 데 지장이 있다면 가서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이로 인해 수많은 재앙과 질병을 면하게 되었다고 담대히 말씀드립니다.
제게 묻는다면, 이처럼 유익한 일에 구태여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을 의지해 살아가다가 결국 ‘헝다(Evergrande)’처럼 파탄 나고 사람 꼴도 귀신 꼴도 아닌 비참한 지경에 이른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투신자살을 하거나 감옥에 갇히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며 온갖 재앙을 당했습니다. 돈이 약속했던 것들은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제게 약속하신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다면 저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돈만 많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시고 지키시어 주님을 대면하는 그날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더욱 풍성히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으며, 이것이 우리의 추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정돈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습니까? 돈은 재앙과 질병을 막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바입니다. 말씀을 깨달았으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걷지 말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본받아 온전히 승리해야 합니다. 아멘!
이번 성경공부는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