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볼 질문
-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 당신의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서론
이 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일어난 한 사건, 곧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입니다. 이 장의 앞부분 대부분을 살펴보면, 이 장의 주제를 죽은 사람의 부활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아는 것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늙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은 사실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살아 있는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어떤 곳에 가까이 갔는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나”라는 말씀이 보인다면, 그곳에서 한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서는 이 말씀이 사용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이것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반드시 매우 비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좋은 친구였는데,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기 동생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보게 하시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게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계시면 나사로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사실 이 말에는 원망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주님을 오시라고 했는데도 오지 않으시고, 거기서 며칠이나 더 머무르셨으니 도대체 무엇을 하신 것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11:25-27)
주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곁에 이르러 무덤을 열게 하신 다음 잠시 기도하시자,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사실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면, 이 일이 사실일 경우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생사에 관한 모든 관념을 다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생명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날 때부터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날 때부터 맹인이 보게 되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생사(生死)를 꿰뚫어 보고 자유 가운데 살기
이 이야기는 생사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을 보여 줍니다. 생사에 대한 사람의 관점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생사를 대할 때 매우 무력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사람이 생사를 대하는 관점이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당신의 생명이 그분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언제 태어날지 결정할 수 없고 언제 죽을지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주 고민에 빠지고, 있지도 않은 일이나 사소한 일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생과 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당신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억압을 받는 것은 생사를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생과 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자유 가운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이 자유로운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것을 보실 때 그것이 좋다고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서 오는 억압은 모두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생과 사에 대해 자유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자유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돈이 당신을 억압할 수 없고, 인간관계도 당신을 억압할 수 없으며, 부모도 당신을 억압할 수 없고, 자녀도 당신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도 당신의 삶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좋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왜 꼭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나무를 만드셔야 했습니까? 사람이 그것을 먹고, 먹은 후에 죽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권이 없는 꼭두각시 무리를 만드실 수는 없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를 가진 것을 좋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에 대해 연구해 보면 자유를 매우 높은 위치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를 인권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나중에 나는 자유 또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유를 잃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영적인 억압입니다. 돈 때문에 자유를 잃는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돈에게 억압받지 마십시오. 어떤 것이든, 일이 당신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면 일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자유로운 상태는 매우 아름다운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합시다. “나는 대학 입시를 치러야 하니 반드시 잘 봐야 해!” 그가 대학 입시라는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꿰뚫어 본 사람은 아주 홀가분하게 시험을 보러 갔다가 아주 홀가분하게 돌아옵니다.
매년 중국의 대학 입시 기간은 사실 사망률이 비교적 높은 시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이 대학 입시를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과 사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그 상태는 매우 이상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괴물처럼 보고, 그들도 우리를 괴물처럼 봅니다. 우리는 생사에 관한 일과 많은 일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고, 대학 입시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으며, 공부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일을 열심히 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왜 사람이 생사의 일을 꿰뚫어 보면 자유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을 꿰뚫어 본 후에는 당신의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이 말씀을 읽으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살아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의하시는 방식은 당신과 나의 방식과 다릅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한 정의를 세상 사람들의 상태에 머물러 두면 사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의 정의가 옳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정의가 옳습니까? 의학적 관점에서 한 사람의 죽음은 심장이 뛰기를 멈추고 뇌세포의 활동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이 정의하는 죽음과 성경이 정의하는 죽음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단절된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로 가시기 전에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나타내려 하셨던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후 나사로를 부르시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몸을 감싸고 있던 수의도 풀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상적인 생명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오늘 당신이 인생의 생사에 대해 가진 관점과 예수님께서 생사를 바라보시는 관점은 도대체 얼마나 다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지 완전히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죽으면 얼마나 아깝습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열 살에 죽는 것과 스무 살에 죽는 것, 서른 살에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쉰 살에 죽는 것, 예순 살에 죽는 것, 일흔 살에 죽는 것, 여든 살에 죽는 것도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언제 죽든 사실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을 하신 후,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그 동료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16)
도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까? 사실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1-24)
사람이 생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해 이 몇 절의 말씀을 다시 자세히 읽어 봅시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라.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요한복음》 11:31-38)
사람이 생과 사에 대해 충분히 깊이 알지 못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비통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특별히 비통해하셨습니까? 그들은 생과 사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누워 있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슬피 울었고, 예수님도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 피상적이기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 뛰지 않고, 머리가 움직이지 않으며,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고 무엇을 마셔도 맛이 없으며, 두 다리를 뻗고 두 눈을 감으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실제로 사람의 영이 죽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단절되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면 그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멸시하실 수 있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늙은 요한이 생과 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바울이 인생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베드로가 생과 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를 계승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생과 사를 바라보시는 관점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일부 형제자매들은 암 환자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생과 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암 환자들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나는 분명히 여러분이 그 사람의 몸이 치료받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면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사실 육체의 죽음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껏해야 먼 길을 떠나 여행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점차 예수님과 같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것이 더욱 건강하게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죽음을 보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여기지만, 주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영 안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 안에서 부활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나사로의 영이 그의 몸을 떠났고 그의 육신은 무덤에 놓여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후 나사로의 영을 영적 세계에서 다시 불러내어 그의 몸 안에 넣으시자, 그 사람 전체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과학에 부합합니까? 과학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매우 실제적인 일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설날에 아이들 여러 명이 함께 카드놀이를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몇 푼의 잔돈을 가지고 카드놀이를 했는데, 몇 푼도 아주 큰돈이었습니다. 네 명의 아이가 그곳에서 카드놀이를 했는데, 그중 한 아이가 계속 졌습니다. 그래서 향 두 개에 불을 붙여 좌종 양쪽에 꽂아 놓고 무엇인가를 향해 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에 절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고는 “하늘의 신령이시여, 땅의 신령이시여” 하며 그곳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네 아이는 성인 여인 한 명이 작은 귀신들을 무리 지어 데리고 와서 “이 네 아이가 우리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러 온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우리는 당신들과 카드놀이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손을 한 번 휘둘렀고, 작은 귀신들이 네 아이를 묶어 들고 가 버렸습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이웃 사람들이 네 아이가 모두 기절하여 숨도 쉬지 못한 채 땅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은 침술용 침으로 아이들의 인중을 찔렀고, 한참 지나자 아이들이 천천히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후 아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귀신들이 아이들을 데려간 뒤 곧 강을 건너려 하자, 작은 귀신들이 아이들을 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돌아왔고, 그들의 영혼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은 죽음
오늘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당시에는 사실 문화대혁명 기간이었지만,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농촌 곳곳에서 계속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영적인 생명을 살 것인지 육신에 속한 생명을 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생명에 대해 알아야 하며, 더 이상 육신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생사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울며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생과 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강렬하지만, 그가 구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도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상태에 있다면, 실제로는 생과 사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과 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담담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담담하게 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사실 죽음을 담담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생과 사를 그렇게 분명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사람을 보내 나사로의 병이 치료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사로가 나흘 후에 죽음에서 부활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은 나사로를 볼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영혼이 반드시 데려감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몸 안에 거하는 데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적인 일을 이해하면 영적인 일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영적인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육신에 속한 일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신에 속한 일을 추구하면 반드시 죽고 지옥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은 죽음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과 사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면 “아침에 나가 운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유익합니까?
영계의 일은 영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운동을 통해 1분 더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을 안다면 육신에 속한 행동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영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생과 사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과 사가 영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면 모든 질병도 영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관점에서 나와 논쟁하며 말합니다. “모든 병이 귀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이단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사람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생겼고, 그 결과 반드시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아담은 구백 년 넘게 살았지만, 구백 년을 사는 것도 결국 반드시 죽게 되는 하나의 과정,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질병의 배후에 영적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일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속였고, 사람이 그 열매를 먹자 죽음이 인류의 영 안으로 들어왔으며,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합니다. 모든 일은 영적인 것이며, 생사와 질병도 모두 영적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고, 여러분의 영이 다시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밖에 나가 산책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매우 고집 센 노인이십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광장무에 참여하지 마세요. 그 좀비 춤도 추지 마세요.”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몸을 단련하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가고 싶으면 가세요!” 그런데 사흘을 가더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운동하면 몸이 더 건강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결과 어머니는 많은 죽음의 영에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여 죽음의 영을 쫓아냈고, 호흡이 좋아져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몇 번이나 죽었을지 정말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마작을 해야 해. 머리를 써야 하니까. 그래야 노인성 치매를 피할 수 있어.” 이것은 모두 육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노인성 치매는 악한 영입니다. 이 악한 영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노인성 치매가 발전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육신을 따릅니다. “나는 늙었고 병이 날 거야. 병원에 가야 해. 병원에 가려면 돈이 필요해. 돈이 없으면 내 생명을 지킬 수 없어.” 그러다가 돈을 사랑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노인성 치매에 걸립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과정은 모두 이렇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 노인성 치매에 걸릴지 말지만을 결정할 뿐 생사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생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가 우리의 행동 방식을 결정합니다. 만일 생사에 대한 관점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관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슬피 울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왜 나는 죽도록 일해야 하는가? 나는 살아야 하니까.” 사실 죽도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습니다. “정말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도록 일한 적이 없지만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나는 쉰다섯 살까지 살았고, 여러분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왜 죽도록 일합니까? 육신의 관점으로 생명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을 예배할 시간이 없습니까? 바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죽도록 바쁘게 사십시오. 내가 권합니다. 마음껏 바쁘게 사십시오. 죽을 때까지 바쁘게 사십시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 생명은 모두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간증들을 듣든 직접 경험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생사에 관한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생사에 대한 관념이 모두 뒤집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려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평생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했든 한 가지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죽을 때가 오면 내가 당신을 계속 살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당신과 나의 생사의 때가 이미 정해져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려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제라도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이므로 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이 일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25)
무엇을 걱정합니까? 어떤 사람이 강렬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병원에 있든 교회에 있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제 이렇게 결단할 수 없습니까? “나는 이런 일들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도하고 치료받으면 됩니다.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예수님께서 담담하게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셋째 날에 부활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셋째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이 땅에서만 살아 있는 길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병이 치료되는 길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살아 있을 때 이미 영생 안에 있으며 영생의 일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죽음입니까? 육체는 죽어도 영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고 무엇을 마셔도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먹고 마십니다. 우리의 영은 여전히 살아 있고, 더욱 잘 살아 있습니다.
생사를 담담하게 대하기
육신의 제한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자신이 생명의 주님이며 죽음에서 부활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기적도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합니다. 곧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63)**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육신이 무익하다면 그것을 보존하려고 무엇을 합니까? 죽든 살든 무조건 보존하려 한다면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모두 불러 모아 “다들 돈이 얼마나 있느냐?”라고 묻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을 내라! 가장 좋은 약을 사야 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약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약이 어디 있습니까? 가장 좋은 약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우리 가운데 몸에 암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치료받기를 원할 때 가장 좋은 치료는 생사를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생사를 꿰뚫어 보면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세상에서 매일을 살아갈 수 있고,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가 큰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나중에 나는 생사에 관한 일을 꿰뚫어 본 사람들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특징은 전날 밤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리를 땅에서 침대로 올려놓고 침대에 누웠을 때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보다 더 좋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게 예수님을 위해 죽을 기회를 주신다면,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혹은 귀신을 쫓아내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면, 여러분은 나를 위해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정말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겠습니까? 생사에 관한 일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담담하게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까? 생사에 관한 일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구름 속과 안개 속에서, 어지럽고 흐릿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겠습니까? 생사의 일은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나오게 하실 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1:41-42)
이 말씀을 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사람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것이 그의 육체를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으로써 당신과 나 안에 있는 생사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주님께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41-42).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자세히 나누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항상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작은 믿음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에 관한 일을 꿰뚫어 보고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압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항상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게 “왜 우리 가운데 기적과 이적이 그렇게 많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이끄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더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삶에 싫증 난 사람들, 생사를 꿰뚫어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도 하늘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고 저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기껏해야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생사에 관한 일을 꿰뚫어 보기를 선택할 수 있고, 자신 안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가서 나사로를 살려라”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오늘 가서 나사로가 살아났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내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셨으니 내가 감사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꼭두각시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자신의 믿음이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어떤 상황도 뒤집을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생사를 모두 꿰뚫어 본다면 정말 생사를 중요하게 여기겠습니까?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가운데 신약성경에 묘사된 바울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숨이 끊어진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 다시 숨을 쉬게 하는 일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생사에 관한 일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살아 내라고 촉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사란 무엇인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아는 사람이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반드시 더 잘 살아갑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나중에 나사로가 다시 죽은 이유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63). 육신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지 말고 영 안에서 추구해야 합니다.
연예계의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합니다. 마흔이나 쉰 살이 되면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이 부분 저 부분이 딱딱하게 굳어 그 모습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결국 그들의 육체도 제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영입니다. 이것은 영생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에도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탄식하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이 생과 사가 도대체 무엇인지 당신과 내가 알도록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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