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입니다. 이것은 중화권 사명 신학의 매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구성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이 논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중요할까요? 교회 안에서 흔히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하면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귀신처럼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게 된 이유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죽은 뒤의 문제만 해결하려 하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저는 산 자의 하나님을 찾고자 하며, 죽어서 천국만 보내주는 하나님을 찾고 싶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한 도시에 갔을 때, 그곳의 한 부동산 사업가가 저를 자신의 온천 별장에 초대하여 머물게 해주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대우를 잘 받고, 저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이런 은혜를 자주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참 귀하게 여겨주는데, 사실 제가 대접해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밥을 먹던 중에 그분이 제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하시기를, 1,000명 중에 999명은 지옥에 가고 1명만 천국에 간다고, 천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천분의 일입니까, 아니면 999명 중 하나입니까?” 그는 분명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담아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건 말이죠, 저도 가본 적이 없어서 모릅니다. 갔다가 못 돌아오면 어떡합니까?” 저는 솔직한 사람이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다음에 그 목사님을 다시 만나면, 천국에 가봤냐고 물어보세요.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말하는 건 엉터리 아닙니까?”
저는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자 그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물었습니다. “그럼 천분의 이입니까, 천분의 오입니까, 아니면 백분의 일입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그런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답을 말씀드릴 테니, 동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닮으면 예수님께로 가고, 살아있을 때 귀신을 닮으면 귀신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그런 말씀은 난생처음 들어봅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이곳에 처음 와서 제 설교를 듣는 분이라면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세상의 대다수 교회는 제가 전하는 이런 말씀을 전하지 않으며, 그들의 전체 논리 체계와 저의 논리 체계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참 좋은 답이네요.” 제가 말했습니다. “형제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를 아시지요? 맹인 몇 명이 코끼리를 만지는데, 다리를 만져본 사람은 끌어안고서 ‘나무 같다’고 하고, 꼬리를 잡은 사람은 ‘밧줄 같다’고 하며,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하고, 상아를 만진 사람은 ‘막대기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 맹인들이 대단하게도 한자리에 모여 논쟁을 벌입니다. 코끼리는 이렇다, 저렇다 하며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참 흥미롭기도 하지만, 다들 참 제멋대로입니다.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믿을 때도 이와 비슷한 혼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같다’, ‘예수님은 막대기 같다’ 하며 온갖 소리가 다 나옵니다. 눈이 먼 것이지요.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보면, 아, 이전에 내가 알던 지식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기존의 틀대로 이해하니, 천차만별의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침례교, 장로교 저마다 자기 식대로 이해합니다. 제가 교회를 세우고 전체 신학 체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한 것이 바로 ‘사명 신학’이 된 것입니다. 체계가 없으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됩니다.
사람들은 천국 이야기만 나오면, ‘죽어서 천국 간다’거나 ‘지옥 간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정말 알고나 하는 말일까요? 가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땅에서의 삶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차피 죽으면 천국 가는데 뭐’라고 하는데, 정말 갈 수 있을까요? 천국에 온통 그런 사람들뿐이라면 저는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들으면 또 삶을 너무 힘들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두고 “저는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에게 맡기셨는데, 당신은 다시 하나님께 맡기니, 그렇게 서로 떠넘기기만 할 셈입니까?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니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데, 이 역시 장님 코끼리 만지기 아닙니까? 사람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면, 성장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요즘 너무 괴롭습니다. 목사님이 성장하라고 하시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아예 성장하지 마세요. 성장이 저주가 될 바에야 무슨 성장을 합니까?” 체계가 없고, 문맥을 무시한 채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이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장을 가로막고, 체계를 세우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다리를 만졌으면 더 위로, 다른 곳으로 만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벅지에서 멈춰 서서 ‘이건 나무다’라고만 할 게 아니라 계속 만져보아야 전체 체계가 잡히는 것입니다. 참 게으릅니다. 허벅지를 만졌다고 평생 그 다리만 붙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어떤 사람은 평생 코끼리 코만 만집니다. 그나마 그것은 낫습니다. 평생 코끼리 엉덩이만 만지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러면서 지적도 못 하게 합니다. 제가 “당신 지금 코끼리 엉덩이 만지고 있는 겁니다”라고 하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체계가 없으면서도 말을 못 꺼내게 하고, 한마디 하면 “목사님 말씀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반응만 보입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제 말 때문에 모르게 된 것이 아니라, 계속 더 깊이 탐구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체계를 잡으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생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하며, 반드시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이 일 저 일 손대 보지만, 하나도 제대로 못 하니 결국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이 누구일까요? 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입니다. 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양육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생 장님 코끼리 만지듯 눈먼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평생 눈이 먼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화권 사명 신학에 와서 제가 체계를 세우라고 하면 어떻게 세우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여전히 자기만의 논리 체계대로 행하며 평생 코끼리 엉덩이만 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중 어떤 분은 분명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바로 그 아무것도 못 이룬 사람이구나. 망했다, 목사님이 또 나를 지적하시는구나. 목사님 때문에 죽겠습니다, 내 믿음을 다 깎아내리시네요.” 제가 깎아내린 것입니까? 원래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평생 코끼리 일부만 만지작거리며 아무것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를 제대로 파고들어 분명하게 끝장을 내야 합니다. 한 분야를 맡았으면 확실하게 끌어올려야 하고, 그렇게 정복해 보면 그 분야를 배우는 법칙을 추상화하여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일을 맡아도 그 법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단 한 가지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장님 코끼리 만지듯 배워서는 안 됩니다. 사명 신학의 기초적인 핵심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물론 ‘효도’라는 단어도 잘못 해석하면 엉망이 되기 십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는 누구를 위해 쓰였습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죽은 뒤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삭, 야곱, 요셉 모두 그들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는 산 자들을 위해 기록되었고, 축복과 저주도 산 자들을 향해 선포된 것입니다. 죽은 뒤에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제게는 독특한 성격이 하나 있는데, 요즘 가끔 ‘이 성격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떨 때는 정말 이것도 하나님의 정하심인가 싶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걸 다 배워서 안 것은 아니니까요. 저희 집은 공간이 좁았는데, 마작 테이블 하나 펴고 담배를 피워대면 그 좁은 곳에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너무 추우니 어디 피할 곳도 없이 다들 방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밖은 영하 30도, 방 안은 영상 20도로 50도의 온도 차가 나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니 머리가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동북 지역에 뇌혈관, 심혈관 질환이 유독 많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만, 어른들이 한쪽에서 마작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작은 의자 하나를 찾아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뉘 집에서 이런 신기하고 기특한 아이를 길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마작을 하던 동네 어르신도 “이 꼬마 녀석 보게, 참 신기하네” 하셨습니다. 학생일 때는 모범생이 되어야 합니다.
훗날 90년대에 고객센터 업무를 맡았을 때, 저는 고객 서비스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고객 서비스를 완전히 연구하여 마스터했습니다. 그 후 네트워크 분야를 맡았을 때는 네트워크를 완벽히 꿰뚫었고, 서버를 다룰 때는 서버를 완전히 마스터했으며, 소프트웨어를 다룰 때는 소프트웨어를 확실히 통달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시작해서는 목양을 완전히 꿰뚫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결국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왜 배움을 즐기게 될까요? 배움의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될까요? 그 분야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본 뒤 돌아보면, ‘아, 고객 서비스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제게 고객 서비스에 대해 듣고자 하신다면 아주 조리 있게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저는 영어도 잘 못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려면 영어를 해야 하는데, 상대방 말은 안 들리고 제가 하는 말은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빠르게 배웠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핵심 문제를 금방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언어를 배웠는지 아십니까? 어린아이가 언어를 배우듯이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방법을 몰라서 헤맵니다. 오늘날 많은 성인들이 언어를 배울 때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발음 기호나 철자 암기 같은 방식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순서를 정립했습니다. 저의 영어 학습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아이 하나를 입양해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입을 열자 중국어를 너무나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그 아이가 처음부터 병음을 배웠을까요? 아닙니다. 글자부터 배웠을까요? 아닙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처음부터 글자나 발음 기호부터 가르치면 멘붕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듣기’를 배우고, 그다음 ‘말하기’를 배우고, 그다음 ‘읽기’, 마지막으로 ‘쓰기’를 배웠습니다. 한의학에서 망문문절(望聞問切)로 증상을 변증하여 치료하는 원리나, 동양화의 고습농담(枯濕濃淡)처럼 이는 고도로 요약된 원리입니다. 오늘날 갓 태어난 아기에게 병음부터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배웁니다. 그 흑인 아이가 왜 중국어를 잘했을까요? 듣고, 말하고, 읽고,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영어 실력도 빠르게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영어 학습법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가 영어로 창세기를 강의하는 것을 듣고 1장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난생처음 들어봅니다.” 우리처럼 창세기를 풀어내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은 강의를 들은 후 영어권 친구들을 다 데리고 와서 듣게 했습니다. 제 영어 강의가 꽤 훌륭했기에 그분은 매우 흥분했습니다. 이처럼 일 속에서 법칙을 정리해 내야 합니다. 여러분도 다 들으신 후에 곰곰이 묵상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구원하시고, 여전히 치유하시며, 구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단, 이 체계는 이전의 옛 기초 위에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질의응답 시간이 있어서 어떤 질문이든 할 수는 있지만, 모든 질문에 다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아이의 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어를 배울 때도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2년만 지나면 아이들의 언어 실력은 술술 트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집 아이는 5살인데도 말을 못 한다고 따지는데,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듣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배워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세상의 체계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는 안 되며,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왜 언어를 그렇게 빨리 배울까요? 아이는 백지상태이기에 올바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왜 언어 배우기를 그렇게 힘들어할까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믿는 데 둔할까요?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고 자기 안에 옛 틀을 그대로 쥐고 있다면 어떻게 변화되겠습니까?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목사님 말씀 때문에 머리가 멍해져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 안의 그 틀을 무너뜨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완고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세상의 논리 체계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뒤섞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한 단어로 규정하신다면 바로 ‘영적 간음’입니다.
그러므로 완고한 사람은 부드러워져야 하며,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홍해에 길이 열릴 수 있습니까? 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사막에 강을 내실 수 있으며,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실 수 있고, 우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산 자의 삶은 하늘이 먹이시는 것인데, 무엇을 그리 조급해하십니까?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참 단순한 일인데, 사람들은 조급해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살리십니다. 못 믿겠으면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어제 제가 말레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레이 사람들은 참 대단합니다. 인생을 참 여유롭게 즐길 줄 압니다. 싱가포르에 오신 성도님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보면, 말레이 사람들은 서너 명씩 모여서 아주 소박하게 피크닉을 즐기는데, 정말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화인(중국인)들처럼 쓸 시간도 없으면서 기를 쓰고 돈만 벌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다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화인들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평생 기쁘게 살면 기쁜 인생이요, 평생 고생만 하면 고생스러운 인생이며, 평생 근심하며 살면 근심 가득한 인생이요, 평생 염려하며 살면 염려 가득한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돈 쓸 시간이 생길 때쯤이면 이미 관 속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오늘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을 비웁니다. 죽게 생겼으니 마음을 비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중요하지 않고, 저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받고 다시 살아나면 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중요해지고, 저것도 중요해집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정말 답답해 죽겠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해 죽을병에 걸렸다가, 죽게 생기니 그제야 비우고, 비우니까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나니 또 집착합니다. 도대체 몇 번을 그렇게 맴돌며 고생할 작정입니까?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논리 체계가 사람의 논리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논리 체계라면 과거에 잘못되었던 것이 무엇을 경험한들 다시 올바르게 바뀌기 어렵습니다.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니가 참 대단해 보였고, 어머니 곁에 있으면 그렇게 안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지역에 경제개발구역이나 신도시를 개발하려면 먼저 그 땅의 옛 건물들을 다 철거해야 합니다. 그 위에 누더기처럼 기워봤자 낡은 농가 주택들뿐이고, 골목길은 좁아서 소방차도 못 들어가고 자전거만 겨우 지나다니는데, 철거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 허물어야 합니다. 인테리어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테리어는 기존 것을 싹 뜯어고쳐야 제대로 작업할 수 있지, 낡은 것 위에 덧칠만 해서는 도무지 답이 안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최선임을 알지 못해 끊임없이 낡은 것 위에 기워 붙이기만 합니다. 기초 자체가 무너진 터인데 그 위에 무엇을 짓겠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30년, 40년, 50년, 60년을 살아오면서 줄곧 낡고 잘못된 학습 방식을 써왔으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그 잘못된 방식을 붙들고 옛 틀 위에 덧대기만 합니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깨달았다면 주님께 감사할 일이고,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 당신의 팔자입니다. 저도 참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고치지 않으니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옛것, 옛 고정관념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 안에 있는 옛것을 허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 아십니까? 제가 여기서 겨우 허물어 놓으면 집에 가서 다시 주워 모으고, 제가 허물면 여러분은 다시 줍습니다. 제가 해독제를 주면 여러분은 저쪽에서 독약을 마시고 있으니, 이것이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살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일이든 맡기만 하면 확실하게 해내고, 모든 일을 능히 해내자.” 이것저것 손대며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말 큰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충분히 허물었습니까? 아직 부족합니다. 충분히 허물지 않으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조차 왜곡되게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회사를 세우고 상장시키겠다고요? 어디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상장은커녕 상장 폐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우리 안의 육적인 느낌은 틀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 내게 비염이 있지만, 하나님은 사막에 강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다. 과거에 내가 잘못 접근했으니 오늘은 제대로 바로잡자. 나의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왜 치유를 받지 못했을까요? 접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무줄을 콘센트에 꽂으면 전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고무줄에 전기가 흐를 수 있습니까?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을 아무리 잘 맞춰도 고무줄은 부도체라 전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고무줄을 전선에 꽂는 것은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연결하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계시는데, 우리 중화권 사명 신학을 한국어로 번역하셨습니다. 그 자매님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논리 체계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그 옛 논리 체계를 허물어뜨렸더니, 결국 한국어 번역 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분의 연세가 몇 살인 줄 아십니까? 60세가 넘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30세이든, 40세이든, 50세, 60세, 70세, 80세, 90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지금도 사막에 강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내실 수 있으며,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반드시 치유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허물어야 할 것은 과감히 허물고 다시 건축하여, 심령 안에 영광스러운 소망을 품기 시작하십시오. 이제 소망이 생기셨습니까? 살아가는 것이 참 단순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갈 때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2. 본문 말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2:23-32)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모든 근심과 염려를 제하여 주시고, 우리 안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깨끗이 제거하여 주옵소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나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은 여전히 치료하시며,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언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안의 모든 염려와 근심과 세상의 논리 체계들을 다 끊어버리고 버릴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본문의 배경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만약 세상의 논리를 따라 자신의 두 손과 칼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저주를 받으면 무엇을 해도 되지 않으니 몹시 고달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믿음의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조급해지면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홍해를 가르지도 않으셨는데 먼저 뛰어들면 반드시 빠져 죽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실력을 제대로 키우라고 말씀드리면 또 조급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특별한 기술을 쌓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말레이 사람들은 해변에서 날마다 피크닉을 즐기면서도 아주 잘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말레이 사람들의 신이 대단한 건가요?”라고 묻는데,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말레이 사람들도 주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마태는 무엇을 기록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천국의 개념을 가르치셨더니 사람들은 이를 오해하여 전부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천국은 이 땅에 임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 이야기만 나오면 ‘죽어서는 천국, 살아서는 고통스러운 이 세상’으로 치부해 버리니 다 엉망이 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천국 잔치의 비유를 통해 은혜를 누리고 먹고 마시는 것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께서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으며 늘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국의 개념은 있었지만, 동시에 세상적인 고민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왜였을까요? 가이사(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는 로마인이고, 바리새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왜 식민지가 되었는지, 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혼란스럽고 마음속에 늘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니, 말씀을 듣고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속으로 ‘천국이 그렇게 좋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왜 이런가?’ 생각하며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을 다스리고 억압하는 식민 지배 체제 속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혼란 속에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 속이 장님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천국을 단편적으로만 만져보았기에 천국에 대한 온갖 의문과 오해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창세기조차 갈피를 못 잡고 읽는데 요한계시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사야서나 에스겔서를 안 읽어 보았겠습니까? 다 읽었지만 읽고 나면 멍해졌습니다. 이는 우리 가운데 대학 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해도 또 떨어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잘못 배워서 혼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어설픈 상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태복음 22:17-22)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돈을 종종 ‘불의한 재물’에 비유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전히 저에게 이 돈, 저 돈 따지며 남의 것을 탐내는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돈을 절대적인 금은보화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진짜 금은보화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불의한 재물일 뿐입니다. 돈으로 대단한 것들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돈으로 당신의 생명이나 구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의 체계는 천국의 체계였으며,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논리 체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돈이란 무엇일까요? 돈은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입니다. 돈이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인데 왜 예수님은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로 비유하셨을까요?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돈이 헛된 것일지라도 사람은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탈세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데 씁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생각이 마비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하늘나라의 체계를 세워야만 모든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 논리 체계를 새것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면 맞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왜 혼란스러울까요? 애초에 기초가 없고 체계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중화권 사명 신학에 오셨다면 다시 철거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버리고,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뒤이어 사두개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천국에 대해 극도로 무지했고, 체계가 없었기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마태복음 22:23-28)
이들의 논리 체계를 보십시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들은 부활이라는 사실 자체를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던 난제를 들고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이 말씀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어떤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주님을 믿고 나서 이렇게 재수가 없고 꼬일까요? 왜 이렇습니까?” 제가 답합니다. “당신이 잘못 믿었고, 엉뚱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매우 강력합니다. 저는 이 말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사기를 당했다면 당신이 잘못 판단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나마 미얀마 북부로 끌려가지 않고 국경 근처에 머문 것만도 다행입니다. 왜 잘못되었을까요?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근본 기초부터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2:29-32)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셨습니까?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본 전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3 곱하기 8이 27이라고 우기며 찾아온 사람에게는 “계산이 틀렸다”고 말해주면 그만이지, 다른 설명을 해보았자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기본 체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활 후의 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논리 체계를 억지로 부활의 세계에 꿰맞추려 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하고,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하셨습니까? 문이 잠겨있는데도 벽을 통과하여 들어오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벽을 뚫고 지나가시면서도 만져보면 분명한 육체가 있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몸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신령한 세계를 우리는 오늘날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 만져보고 알겠습니까? 그저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큰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함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행하는 표적들을 여러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예배 때 제가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우리 예배는 참 독특합니다. 사람 한 명과 찬양 한 곡으로 수많은 비용을 절감합니다. 제가 그렇게 바꾼 것은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논리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밴드를 데리고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성가대를 데리고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바울은 무엇을 하러 다녔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은 성가대, 악단, 무대, 조명, 음향 장비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그런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바울의 시대에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낡은 틀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만 새로운 기초를 세울 수 있고,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숲속에만 갇혀 있으면 산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됩니다. 왜 혼란스러울까요? 틀을 깨지 않았으니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핵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경과 창세기가 전하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논리를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죽었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 우리 논리 체계의 시금석임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바리새인처럼 살아서는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며, 사두개인처럼 죽은 뒤의 문제에만 집착하여 ‘살아서 아내가 여럿이었는데 죽어서는 누구와 묻혀야 하나?’ 따위의 고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인간이 쓸데없이 집착하는 문제일 뿐,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진리를 함부로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초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해 되물었습니다.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20:42-44)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님이시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잘못된 논리 체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멍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때문에 멍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평생을 혼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이 새롭게 변화될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논리 체계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새롭게 다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천국은 실재하며, 지옥도 실재합니다
천국은 실재하며, 지옥도 실재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배운 것이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다 배워서 안 것입니다. 천국은 실재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좋은 것들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아 누리는 천국의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약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어떤 명약보다 낫습니다. 밥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습니다. 돈처럼 쓸 수 있습니까? 돈보다 훨씬 낫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의 문제까지도 완벽히 해결해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천국의 것이 참으로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낫는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천국의 은혜가 여러분 위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오늘 제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여러분에게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어떤 분은 “왜요, 일찍 죽고 싶으신가요?”라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로 일찍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죽었다’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보지도 않고 천국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천국의 온갖 좋은 것들이 지금 이곳에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이 내게 임하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이 실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어찌 가짜일 수 있겠습니까?
천국이 실재함을 믿지 않는다면 헛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이 실재함을 믿지 않는다면 역시 헛되게 믿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큰 능력을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됩니다. “저는 머리가 나쁩니다”라고 하십니까? 지혜롭게 변할 것입니다. “저는 가난합니다”라고 하십니까? 부유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질병이 많습니다”라고 하십니까? 건강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원하십니까? 원해야지요, 왜 마다하겠습니까?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화권 사명 신학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이를 위해 살며, 이를 위해 태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안의 혼란을 다 허물어뜨리십시오
사람들은 왜 혼란을 겪을까요? 마음 안이 너무 지저분하고, 온갖 것이 뒤섞인 잡탕찌개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마구 섞여 있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동북 지역의 무쇠솥 잡탕 요리를 드셔보셨습니까? 요즘 아주 유행인데, 온갖 재료를 한 솥에 다 때려 넣습니다. 그 솥 안은 그야말로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한데 엉켜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그 혼란의 솥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 제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억누를 수 없는 괴로움, 주체할 수 없는 근심과 염려, 사기꾼의 말 한마디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다 무엇 때문일까요? 속안에 세상의 논리 체계가 여전히 남아있고, 아직 허물어야 할 것들을 충분히 허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이 온갖 두부, 선지, 대창, 곱창, 물고기가 마구 뒤섞인 찌개와 같아서, 먹고 싶은 대로 다 집어넣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속이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오늘 갑자기 혼란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혼란스러웠던 것이며, 원래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니 핑계 대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충분히 깨부수지 않았고, 아직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체계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결코 세울 수 없으며, 고생만 진탕 하다가 결국 새롭게 세울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그 혼탁한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그들은 “아니, 이게 무슨 놀라운 보물 같은 역사인가!”라고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말도 안 돼, 가짜야, 원래 안 죽었던 거야”라며 헛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기적을 거듭해서 보고 하나님을 경험할지라도, 옛 논리 체계를 허물지 않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옛 논리 체계가 여전히 당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옛 틀을 허물지 않는다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치매나 전혀 존엄성이 없는 비참한 삶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허물어진 바탕 위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새로운 논리 체계를 세워야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탁월한 인물들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로 행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적인 찌꺼기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헛된 방식들은 이미 철저히 깨어져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7.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우리에게 온전한 푯대를 세워주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날마다 쳇바퀴 도는 삶에 빠져서 굵은 금목걸이에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하루 세 끼 양꼬치에 맥주 두 병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그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양꼬치에 맥주 마시는 게 그리 좋습니까? 무엇이 좋다는 말입니까?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 그것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변비로 고생하며 대변을 못 봐도 인간은 해결하지 못하고, 대변이 새어 나와도 해결하지 못하며, 요실금으로 소변이 새어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배길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가 결국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수단들을 철저히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막에 강을 내실 수 있습니까?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실 수 있습니까?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바꾸실 수 있습니까?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깟 비염, 팔꿈치 통증, 엉덩이 통증, 다리 통증 따위가 당신을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전화가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발을 삐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밤중에 발을 삐다니 어디 도둑질이라도 하러 갔었습니까?” 물었더니 “아닙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삐끗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확인해 보니 발목에 주먹만 한 혹이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제가 10분 동안 기도를 인도했더니 금세 펄펄 뛰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참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세월 동안 제가 행한 표적과 기사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한번은 기도를 인도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절뚝거리며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찬양을 멈추고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즉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제가 찬양을 인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도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풀어놓는 예배입니다! 또 다른 날은 한 자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며 테이블 밑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제가 “왜 그럽니까? 생리통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쑥스러워서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기에,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한 뒤 기도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완전히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십시오. 제 말투가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데, 능치 못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눈을 뜨고,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걸어 다닙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사소한 문제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8. 아브라함의 하나님
창세기를 우리만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이 걸어간 방식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부유했지만, 삶의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가졌고 당시 매우 유명한 족장이었으며, 거느린 하인만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행렬은 당당했고 수많은 재산과 집을 소유했지만, 그는 삶의 덧없음을 느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의 삶이 너무 재미있고 만족스럽다면 당신은 아직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이 헛됨을 깨닫고 영원한 영광을 구하는 사람, 그 사람의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게 참 의미가 없다”고 하자, 그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왜 의미가 없어요? 당신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영생이 없잖아.” 아브라함의 신앙의 출발점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손오공이 불로영생을 찾아 나섰던 것 못지않게 대단한 출발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자칫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며,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온전히 알고자 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이런 갈망이 없다면 도대체 교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나 좀 받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받고 나면 좋지요”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찾아와서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물으면 “운전면허 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운전면허증 따기 전에 인생을 살아가는 자격증부터 따십시오.” 인생을 사는 자격이 없으면 큰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구했던 것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다 보면 아브라함을 닮기는커녕 라멕이나 가인 같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인생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아브라함은 바로 그 영적인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있는 동안 영원하고 썩지 않을 영광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그런 것 안 구합니다”라고 합니다. 삼촌이 안 구하면 숙모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삼촌과 숙모가 구하면 당신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참 어리석습니다.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세상에서 돈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해 부자의 느낌이 뭔지도 모르면서 영원한 영광을 구한다고 하니, 차라리 월급이나 더 구하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월급 이삼백만 원 받아가지고는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해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면서, 영원한 영광이 밥 먹여 주냐고 투덜댑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도 없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은 채, 그저 먹고 마시고 돈 벌고 고생하다가 멸망하는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9. 이삭의 하나님
이삭은 아브라함처럼 온갖 고생을 하며 방황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걸어왔던 치열한 믿음의 여정을 이삭에게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느냐? 너는 이렇게 태어났단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아, 제가 그렇게 태어났군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녀군요.” 아브라함이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가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헤맬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영광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고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릴 때부터 이삭을 훈련시켰기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어깨를 딛고 한 걸음 더 높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 안에 세상의 논리 체계가 여전히 남아있겠습니까? 거의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 깨끗이 허물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이란다.” 이삭이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삭은 참으로 철이 든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키우며 기뻐서 말했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귀한 아들을 얻었을까, 이 아이는 어쩜 이리도 신령할까?” 왜 그랬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해결된 일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묵묵히 모리아산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번제물이란다, 네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으니 어쩌겠느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결국 이삭은 기꺼이 자신을 제단 위에 바쳤고, 그 후로 이삭의 평생은 평안하고 견고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구하고 무슨 논리를 따지겠습니까? 더 이상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초로 시작하여, 이삭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십시오. 이삭은 참으로 대단하여 평생토록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으니, 이것이 바로 ‘이삭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시니,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고 이삭처럼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오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바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다시 살리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읽고도 깨닫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는 온전히 깨달았습니까?
10. 야곱의 하나님
야곱은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야곱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야곱의 내면에는 아브라함의 가르침과 이삭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야곱에게 전해준 가르침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 후에 네 아버지가 태어났으며, 태어난 네 아버지를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바쳤는지 아느냐…” 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말씀을 들으며 마음속에 깊은 갈망이 일어나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반면 야곱의 형 에서는 말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게 밥을 먹여줘, 돈을 벌어다 줘?” 하며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칼만 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손자를 품에 안고 있었지만 결국 한 아이만 남았고, 다른 한 아이는 무예를 닦고 활을 쏘러 나갔습니다. 과녁의 10점 만점을 백발백중 맞힌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푯대를 맞히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감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삭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손자 또한 마음속에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가야 했고, 마침내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이삭이 낳은 아들 야곱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비록 차남으로 태어나 장자가 아니었고,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쟁취해 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태어난 서열을 뒤바꿀 수 있습니까? 뒤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 안의 믿음은 모든 것을 뒤바꿀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고향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야곱의 때에 이르러서는 고향으로 당당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승리의 증표였습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까? 돌아갔습니다. 왜 이삭은 돌아가지 못했을까요? 그의 믿음의 수준은 아직 이삭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출생의 서열마저 뒤바꿀 만큼 이삭을 뛰어넘고 아브라함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비염 따위가 무슨 대수입니까? 다리 통증 따위가 무슨 대수입니까? 건초염 따위가 무슨 대수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며 지극히 사소한 일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니, 나는 아브라함의 길, 이삭의 길, 야곱의 길을 걸어가리라. 아멘!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반드시 치유받고, 반드시 일어나 쓰임 받을 것이다. 내 평생 아브라함을 본받고, 이삭을 본받으며, 야곱을 본받으리니, 내 안에는 불가능이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도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대에 우리를 일으켜 주옵소서! 수많은 아브라함들을 일으켜 주시고, 수많은 이삭들을 일으켜 주시며, 수많은 야곱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가 바로 이 세대의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입니다.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겠사오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를 지으신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결단코 멈추지 않겠나이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땀을 흘릴 수도 있으며, 심지어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내 심령은 오직 나의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 삶에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리니, 이것이 나의 사명이요, 내가 이를 위해 태어났으며,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사오니, 내 평생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겠나이다. 아멘!
찬양 한 곡을 부르며 오늘 헌금을 준비하겠습니다. 과거에 이 찬양을 부를 때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개척 초기에 교회를 세워갈 때 앞이 캄캄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나의 구속주가 살아계시며 그분이 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요 나의 유일한 푯대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따르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찬양만 부르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씨를 뿌렸고, 수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으니, 그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까지 전진합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한 놀랍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반드시 그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멀고 험난한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 수많은 사람의 축복이 되었듯이, 오늘 여러분 또한 미래에 수많은 영혼의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단순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나는 이 세대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되기를 원하며, 나아가 이 세대의 요셉이 되기를 결단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가 이 세대의 축복이 되게 하시고, 이 세대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목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기꺼이 드리오니, 하나님이여, 나의 헌신을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참으로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주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뵈올 그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영광스러운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