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표적 시리즈》의 마지막 강의인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를 나누겠습니다. 요 며칠간 저는 사무실 안을 서성이며 오갔는데, 어떤 분이 “선생님, 우울증 오셨어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생각하는 중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턱을 괴고 서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을 아시지요? 제가 며칠 동안 그 생각하는 사람처럼 지냈는데, 조각가가 저를 모델로 삼았다면 정말 훌륭한 모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며칠 동안 그렇게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을 묵상했을까요? 바로 ‘믿음(信)’이라는 글자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제가 예수님을 믿은 지 수많은 해가 지났지만, 이 믿음의 ‘믿는다’는 말을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정말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제가 “예수님의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니, 여러분도 이런 혼란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돌아가서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믿나요?” 그러면 상대방은 틀림없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하니 쳐다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믿냐고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지 좀 알려주실래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도 차라리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무엇을 믿는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 영생을 얻었습니까? “얻었겠지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요 며칠 이런 문제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에 저는 ‘믿음은 선택이다’라고 가르쳤고, 꽤 명확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因信称义)’도 결국 이 ‘믿음’이라는 글자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신칭의를 이야기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바로 《로마서》 10장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많은 사람을 보면 전혀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압니다! 예수님, 제가 주님을 알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아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모르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한 나라의 국가 원수를 국민은 다 알고 있지만, 그 원수가 여러분을 압니까? 전혀 모릅니다. 수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은 기껏해야 수백 개에 불과한데 어떻게 여러분을 알겠습니까?
그들이 “주님, 제가 주님을 압니다”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알아도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모르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믿었습니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 같은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다’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믿습니다, 믿는다고요!”라고 하지만 주 예수님은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서로 다툰다고 무슨 결론이 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문제를 함께 풀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생각하는(착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꽤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제가 손가락 하나를 펴며 “손가락이 몇 개입니까?” 물으면 “하나입니다” 합니다. 다시 두 개를 펴고 “몇 개입니까?” 하면 “두 개요” 합니다. 참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손가락 두 개인 것을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입니까? 겨우 손가락 두 개 아는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지역의 최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최고 부자가 되는 사람은 겨우 한두 명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이 ‘착각’이라는 것은 사람을 망치며, 아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표적이 따르지만,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표적이 따르지 않습니다. 이 ‘착각’에 대해 말하자면, 앞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일을 꽤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제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집에서 일을 하면서 자기가 완벽하게 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일까요? 전에는 할 때마다 틀렸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 없는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돌아와서 보니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해놓았습니다.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 온통 문제투성이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일한 것일까요? 그는 제가 돌아오면 칭찬해 줄 줄 알았겠지만, 돌아와서 보니 온통 문제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자주 마주합니다. 한번은 제가 몇 달 동안 외지에 있다가 돌아왔는데, 화장실에 물때와 찌든 때가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청소했길래 이럴까요? 때라는 것이 하루이틀 만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몇 달 동안 청소를 제대로 안 해야 그렇게 때가 낍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님, 저는 청소할 때마다 정말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며 닦았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제가 “이것 보십시오, 여기도 때가 끼었고 저기도 때입니다”라고 하니, 그가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 눈에는 때가 보이는데 제 눈에는 왜 안 보일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꼭 핥아봐야 때인 줄 압니까?”라고 했습니다.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는 칭찬받을 줄 알았다가 온통 때뿐인 것을 지적당하자 저에게 ‘결벽증이 있다’는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많은 사람이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때를 남겨둘 수 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지만 대학에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쏟아부어도 결과가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온몸에 병이 들고 빚더미에 앉는다면 그것이 좋은 것입니까? 소용없습니다. 그들이 정말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문제를 보지 못하는 분들은 서서히 훈련을 받으십시오.
어떤 사람은 대학 입시를 몇 년 동안 치릅니다. 대화를 나눠보면 다 아는 것 같고, 본인도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시험만 보면 떨어집니다. 참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가 제게 말하기를 “제가 몇 년을 공부해서 다 아는데, 왜 시험만 치면 점수가 안 나올까요?”라고 합니다.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힐끗 보시며 속으로 ‘깨닫기는 뭘 깨달아,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가끔 제가 동역자들과 문제를 논의할 때, 어떤 동역자가 자기가 양육하는 사람이 이렇고 저렇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탄식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만약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절대로 “깨달았습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흘겨보시며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깨달았다는 거냐” 하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주 예수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 모르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때가 낀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보신다면 속히 바로잡으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만약 주 예수님께서 “너희가 믿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절대로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은 “믿기는 뭘 믿느냐, 사랑하기는 뭘 사랑하느냐, 깨닫기는 뭘 깨달았느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제가 제 특유의 어조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베드로가 양을 먹였습니까? 먹이지 않았습니다. 양을 먹이지도 않으면서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주 예수님께서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했는데, 이때 베드로의 말투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왜 자꾸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까? 사랑에 굶주리셨나?’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끝없이 사랑해요. 주님을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끝없이 사랑해요”라고 한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양을 쳤습니까? 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쳤습니까? 나중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서인 마가를 바울에게로 보내버렸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의 비서가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비서이자 대필자였는데, 《마가복음》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마가가 베드로의 비서로 따르면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육을 하다 보니 결국 마가를 바울에게로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비서가 필요 없어서 스스로 비서 역할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육을 잘했다면 그 사람이 떠났겠습니까? 날마다 베드로를 따르다 보니 툭하면 외식(가식)하는 모습을 보였고, 마가가 보기에 ‘이게 대체 뭔가? 내가 당신을 따라다니며 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었던 것입니다. 양육하지 않았고, 결국 끝까지 양육하지 못했으니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까? 모릅니다. 이 일이 베드로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제가 베드로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의 솔직한 성격을 꽤 좋아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가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으며 주를 위해 죽을지언정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입으로만 말하는 것은 찻주전자는 다 깨지고 주둥이만 남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두어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말하기는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까?” “왜 그렇게 물으십니까?” 입으로 하는 말은 누가 못 하겠습니까? 사기꾼의 입이 가장 말을 잘하며, 그 깨진 주전자 주둥이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참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합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와 식사를 했는데, 그 형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저의 기를 꺾으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요즘 선생님 설교는 별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드디어 듣기 싫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가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님이 앞 구절을 말씀하시면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다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참 대단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행하는 것을 당신이 행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행했습니까?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을 때 제자들은 억울해했습니다. “우리가 믿는데 주 예수님은 왜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주님, 제가 믿지 않는다면 여기에 왜 왔겠습니까?” 분명히 주 예수님과 말다툼을 벌였을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믿는다는 증거를 천 가지 만 가지도 댈 수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주님을 따랐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밑에서 지켜보았으며, 장사되셨을 때 슬피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믿지 않는다고 하시니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완악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자신이 믿지 않음을 인정하면 완악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다고 책망을 받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 주 예수님은 이것을 마음의 완악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해도 똑같이 평가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이 여러분을 모르신다면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는 믿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이것이 기준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10장 10절을 인용하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그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빠뜨렸습니다. 마음으로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마르틴 루터에게는 표적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가톨릭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가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서는 축사마저 사라졌습니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루터교회에 가보면 바로 마르틴 루터의 방식을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인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는 말씀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능력 있는 복음을 능력 없는 복음으로 믿는 이런 상황이 많으니, 참으로 대단하게도 복음을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신칭의가 아닙니다. 주제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입니다. 여러분이 믿으면 이 능력이 여러분 위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데 있어, 입술만의 믿음은 소용없고 마음으로 믿는 것만이 유효합니다. 믿고 나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불가능’이라는 세 글자가 없으며,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믿음만이 유효합니다.
제가 분명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표적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여러분이 병들었을 때 기도를 통해 치유받았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사모님이 제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입안에 땅콩만 한 구내염이 스무 개도 넘게 나서 입을 벌리면 온통 하얀 점투성이였습니다. 보기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입안에 하나만 나도 몹시 아픈데, 입안 가득 났으니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모님은 기도회 참석자들에게 “나는 로마서를 다 암송할 수 있는데 당신도 할 수 있나요?”라며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제발 그만두십시오. 입안 가득 구내염이 난 것이 바로 당신의 믿음의 상태인데, 로마서를 암송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수준의 믿음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101과정》인 ‘구도자에서 신자로’가 있습니다. 개정 2판 《101과정》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매우 중요한 뼈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102과정》인 ‘치유와 축사의 이론적 기초’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마귀보다 1분만 더 버티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는, 오직 그 ‘1분 더 버티는 것’만 붙잡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1분’에 얽매여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저는 마귀보다 2분 더 버텼습니다”라고 하더군요. 1분이든 2분이든, 《102과정》 ‘치유와 축사의 이론적 기초’ 앞에 승리하는 교회를 다룬 《101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승리하는 교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국 열쇠를 그분의 교회에 주실 것이며,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와 축사의 기초입니다. 영적 고지를 오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1분을 더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고지에 오르는 이유는 마귀를 이기지 못해 마귀에게 짓밟히며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삶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바꾸어 영적 고지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영적 전쟁의 파괴력은 영적 높이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의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6:17-18)
제가 묻겠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었는데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낫지 않는다면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기초는 바로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되어야 하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굳게 섰으며, 하나님의 기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은 우리뿐이지 하나님은 틀리지 않으시며, 심지어 귀신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부활을 진실로 믿는다면, 대학 입시나 취업이나 재정 문제 같은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여전히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병든 사람을 보는 것도 사소한 일이며, 돈 문제 역시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이 구절은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며, 요단강을 가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비극은 사람의 불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이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릴 수 없고, 억압과 굴레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믿는데 왜 안 될까요?”라고 묻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요? 잘못 믿은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바로 ‘교회관’ 하나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나도 교회관이 있는데 왜 안 됩니까?”라고 한다면, 그것은 높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관점만 있을 뿐 손에 열쇠가 없습니다. 열쇠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문을 여는 것입니다.
화인사명신학(华人命定神学)은 지금도 여전히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으며, 영적 법칙과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잡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럼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라고 되묻겠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믿기만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는 표적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신혼기(밀월기)’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남편과의 신혼여행처럼 여겨서, 남편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듯 하나님에 대한 감정도 식어 신혼기가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신혼기’ 같은 논리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분이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설명은 간단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면 젖을 주지만, 스무 살 먹은 녀석이 울면 뺨을 한 대 때립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장난감 주세요, 젖 주세요” 하면 미련하다고 뺨을 맞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 집에서 “엄마, 꽈배기 먹고 싶어요” 하면, 집이 그렇게 가난한데 꽈배기를 먹으면 다음 달에 온 가족이 굶어야 하니 뺨을 한 번 꼬집으며 “이게 꽈배기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데, 계속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겨자씨만 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우해 주시는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넘쳐흘렀던 것이 아니라, 시작할 때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그 겨자씨를 밥솥에 넣고 끓여서 밥알로 만들어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표적이 나타나겠습니까? 표적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이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겨자씨 하나였다면 나중에는 백 개가 되고, 만 개가 되어 그 겨자씨가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각이 아직 깨이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시지만, 계속해서 깨닫지 못하면 징계의 매로 채우십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지각이 깨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채우시지만, 끝까지 깨닫지 못하면 매로 다스리십니다.
화인사명신학은 배우고 성장하는 신학입니다. 은혜가 점점 더 많아질수록 더욱 주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지각(깨달음) 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바로 화인사명신학입니다. 만약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 저처럼 즉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어느 부분을 바르게 맞추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으십시오. “나는 이미 화인사명신학의 모든 비밀을 통달했다”라며 완악하게 굴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습니까?
설령 여러분이 화인사명신학의 모든 것을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추구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가득할 것입니다. 만족하지 마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추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쉼 없이 흘러넘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매가 온 땅에 가득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면 하나님의 징계도 따르는 법입니다. 어떤 이는 막힌 것을 뚫는 데 관장약을 쓰자고 하지만, 차라리 징계의 매가 낫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지각 안에서 두려움을 돌파하십시오. 억압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지각 안에서 억압을 뚫고 나오십시오. 병든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지각 안에서 질병 배후의 영을 이겨내십시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지각 안에서 가난의 영을 돌파하고 승리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본 사람들도 믿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본 사람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뛰어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을 믿었고, 사람이 한 줌의 재가 되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 그의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고 하늘의 별과 같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지 못했음에도 믿었으니, 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느낌이나 판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벽을 하나 세울 때 사람의 눈은 정확하지 않아서 똑바르게 세운 것 같아도 다 짓고 나면 삐뚤어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의 마음이 기울어져 있고 눈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레이저 수평기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느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늘에 굳게 서 있으며 그것이 참된 기준입니다. 주 예수님의 판단을 신뢰하십시오.
본문 말씀
이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16장 14절부터 20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아멘 (마가복음 16:14-20)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이 하늘에 영원히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두 주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제하여 주시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늘 일깨워 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대로 믿는 법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위에 주님의 은혜를 나타내사 지각 안에서 주님의 계시를 풍성히 받게 하옵소서. 지각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시고, 지각 안에서 온전하고 충만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능력 위에 세워지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게 하시며, 깨달음과 지각에 기초한 믿음이 되게 하사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옵소서. 우리 내면에 있는 불신앙을 늘 인식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바로잡아 우리 안의 느낌과 스스로 옳다 여기는 교만을 제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끊임없이 자라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말씀을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대략 500명이었습니다. 주님은 500명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남아 기다린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120명이었습니다. 나머지 38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바쁜 일 하러 갔을까요? “주님,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러 가겠습니다.” 성령이 임하지도 않았고 권능을 받지도 못했는데 무슨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능력이 없는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현장에는 겨우 120명만 남았으니, 제가 다 예수님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는데, 또다시 완악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글자를 보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도 흘려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한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최소 세 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장사되었다가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귀에 솜방망이를 틀어막은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죽임을 당하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말이 많아 결국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좋은 소식을 나쁜 소식으로 잘못 알아들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열한 제자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믿음이 없고 완악하다고 꾸짖으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괴한 일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것만 세 번이지,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서른 번도 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주의 우편에, 누가 주의 좌편에 앉을 것인가? 당신이 좌의정 하고 내가 우의정 하겠다” 하며 다투었습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비켜라, 내가 좌의정이다” 하면 또 다른 사람이 “내가 우의정이다” 하며 그 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귀가 완전히 막혀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틈에 머리가 끼기라도 한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었을 때, 당국에서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때 몇몇 여인들이 있었는데, 여인들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제자들이 여인들보다 못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왜일까요? 여인들은 논리를 따르기보다 표적을 더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공학자 같은 뇌 구조를 가져서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 된다”라며 머뭇거립니다.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결국 예수님께 “너희가 믿음이 없다”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왜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까? 우리는 믿습니다”라며 예수님과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비유로 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참 이상하구나. 내가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하면 너희는 믿는다고 우기는데, 왜 나와 다투느냐?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하면 ‘제가 왜 믿지 못했을까요?’라고 해야 맞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난 수년간의 사역 속에서 제가 양육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줄 때마다, 제가 지적하면 그들은 저와 논쟁하려 들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다툼을 벌이니 제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직 한마디 말만 듣고 싶다. 그 말만 들으면 화내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겠다.”
그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묻기에 저는 “오직 ‘아, 제가 잘못했군요. 바른 것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이 한마디만 듣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저는 수없이 화를 내고 건물 전체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야만 그들의 완악함을 겨우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직접 훈련받지 않으신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소리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직 그만한 분량이 되지 않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매는 제가 어떤 형제자매는 늘 호되게 훈련하면서 왜 다른 사람은 훈련하지 않는지 의아해합니다. 이미 거쳐 갔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훈련할 때는 잠시 다른 사람을 내려놓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사람을 다 훈련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도 분량이 있으니 하나씩 순서대로 다룹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각개격파(分而克之)입니다. 한꺼번에 묶어서 해결하지 않고 한 사람씩 해결해 나갑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마침내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갈 수 있겠습니까? 감기 배후에 있는 악한 영 하나 쫓아내지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한 교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참 희한하게도 교인이 아프면 의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뜩이나 돈이 없는데 돈을 다 의사에게 갖다 바치니 더 가난해졌습니다. 교회에서 의사에게 환자를 연결해 주는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그때 저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느낌에 불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느낌을 깨부수십시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체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중 한두 마디만 믿고 모든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추구함도 없고 철저함도 없이 자기 느낌대로 대충 행하면서 “아, 나 주님 믿고 구원받았다”라고 합니다. 믿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믿음을 반드시 명확하게 전해야겠습니다.
너희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20)
예수 그리스도의 논리 체계를 온전히 계승한 사람은 아마도 바울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순전한 복음을 지켜냈습니다. 이 순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믿음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고 구약성경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고 영생을 추구하며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을 바라는 자는 모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병원을 믿고, 예순 살 이전에 번 돈을 예순 살 이후에 다 병원에 갖다 바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20)
화인사명신학은 이 말씀들을 읽고 실제 삶에 적용했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믿으면 얻게 됩니다. 영생을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썩지 아니할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가겠습니까?
화인사명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초기 개척 시절, 저는 형제자매들이 병들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쉬워졌지만, 초기에 이 길을 개척할 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제 느낌을 믿지 않았습니다.
너희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게 하라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과 신학 체계 속에서 우리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며 종이로 된 영어 성경 한 권을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었고, 중국어 성경은 세 권을 닳도록 읽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보니 성경이 닳지는 않고 폰이 고장 나면 바꿉니다.
그 시절 성경을 읽다가 어느 날 문득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래서 전자 성경을 열고 ‘모든 말씀’을 검색해 보았는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모세오경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모든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었지, 한 구절만 떼어낸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주님의 그 모든 말씀을 제가 죽을 때까지 잘라내고 분석해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말씀을 다 지킵니까?”라며 괴로워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방대합니다. 독서 앱에 있는 책 수십 권을 읽는 것조차 버거운데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말씀’이란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의 온전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온전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모두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그 체계 안에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일단 온전한 체계를 세우고 나면 쉬워집니다. 창세기를 읽어도 이 체계 안에 있고, 신명기를 읽어도, 사무엘기를 읽어도 이 체계 안에 있습니다. 체계를 세워 정리하면 각기 그 종류대로 분류되며, 하나님의 진리는 크고 작은 진리들이 맞물린 온전한 체계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모든 말씀’의 비밀이 풀렸습니다. 로마서 한 권을 외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성경의 모든 말씀을 외우라고 한다면 평생 가도 끝내지 못할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온전한 체계였습니다. 그리하여 화인사명신학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화하여 온전한 하나의 체계로 정리해 냈습니다. 왜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입니까? 교회는 영적 전쟁을 치르는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의 모형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출애굽 당시 《출애굽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41)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며 남루한 옷을 입고 거지 떼와 같았던 그 무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당시의 사진이 있다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수만 리 대장정을 거친 것처럼 얼굴이 야위고 초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해 결코 문맥을 무시하고 단편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마귀보다 1분을 더 버티든 2분을 더 버티든,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축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음부의 권세인데, 이것은 다루기 쉽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질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음부의 권세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인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용입니다. 용의 영은 음부의 권세와 확연히 다릅니다. 이 타락한 천사들은 뱀의 간계, 곧 교활함과 계략과 거짓말로 사람을 속입니다.
기도할 때 질병이 쉽게 낫는 이유는 질병이 음부의 권세와 관련되어 있어서 음부의 권세를 제압하면 병이 낫기 때문입니다. 반면 뱀은 거짓말과 관련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늘 거짓말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천국의 열쇠는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치유와 축사의 기초는 바로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너희 믿음이 지각(깨달음)에 기초한 믿음이 되게 하라
믿음은 선택이지만,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믿기로 선택했는데 그 믿음이 미신일 수도 있습니다. 절에 가서 향을 피우며 자녀가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미신에는 지각과 깨달음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각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각 안에서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왜 지각이 필요할까요? 지각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영적 법칙을 아는 것이며, 깨달음 안에서 영적 법칙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저와 같은 전공을 했던 후배 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찾아와서 함께 식사하며 제가 하는 사역을 나누어 주었더니 아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두 사람 모두 집안의 어르신들이 치매를 앓으셨더군요. 그런 후배들에게 제가 “예수 믿는 건 간단합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으세요”라고 했다면 곤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믿음은 대부분 영적 법칙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역사를 증거합니다. 이 표적들의 배후에는 모두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지각 안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믿음이겠습니까? 지각이 없는 믿음은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믿음이 없다”라고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며 의아해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머물며 기다리라고 하셨을 때 380명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령을 기다리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우리에게 권능이 없단 말인가?” 다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가끔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한숨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각 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단순한 선택 그 이상입니다. 처음에는 선택이지만, 나중에도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행한다면 처음에는 은혜를 주시다가도 나중에는 매를 드십니다. “선생님,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과의 신혼기가 끝나서 그렇습니까?” 지금은 매를 맞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지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시는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를 예로 들면, 말씀을 깊이 읽고 세밀히 관찰할 때 축복과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부모의 집을 탐내며 평생 저주 속에서 산다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십계명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멈추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성별을 차별하는 뜻은 아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수다스러운 동네 아낙네처럼 굴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이렇다 저렇다 헛된 말을 늘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옛날에 마당에 둘러앉아 노인들이며 사람들이 모여 이웃집의 온갖 사생활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어내어 떠들던 것처럼, 문 앞에 앉아 해바라기씨나 까먹으며 헛소리만 늘어놓고 지각은 꽉 막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막히면 관장약이라도 쓰지만, 뇌가 막히고 지각이 막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머릿속에 관장약을 부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화인사명신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믿음 안에서 평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 안타까울까요? 머리가 도무지 깨이지 않고 막혀 있으니 답답한 것입니다. 정 안 되면 집 문을 바꿔보라고 할 판입니다. 문틈에 머리가 끼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을 바꿔도 여전히 끼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화인사명신학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어떻게 사람들의 지각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며, 어떻게 지혜로워지고 바르게 배울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종의 영적 연구 기관이자 훈련 기관으로서 사람들을 온전히 세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곳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생님,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해야지, 멍하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각 안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야 합니다.
늘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
이 말씀은 반드시 화인사명신학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늘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이 완악하다고 꾸짖으셨습니까? 틀렸으면서도 자신이 틀린 줄 모르고 말다툼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너희 앞에 앉아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니 너희는 나와 말다툼을 하려 드는구나. 너희 마음이 참으로 완악하구나.’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아, 우리가 믿음이 없었던 것이군요”라고 인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믿습니다, 믿는다고요!”라고 우기지만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 부드러워져 “아, 내가 이렇게 행한 것이 틀렸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인사명신학의 가장 황금 같은 법칙은 늘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직 지극히 제한적이기에, 실천해 보고 결과가 바르지 않으면 신속히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계속 수정해 나아가며 결코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의 대변자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며, 스스로를 진리 그 자체로 착각합니다. 제 그리스도인 친구 몇 명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암은 저주라고 알려주려 했지만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주라니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그대로 받으십시오. 고통스럽게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늘 자신이 잘못되었을 수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바로잡을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고 우기지만 주님을 믿는 열매와 표적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 믿는 게 다 이런 거지 별수 있나?”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흔한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몇 분이시냐?” 같은 말은 하지 않고 다들 “예수님을 닮아가겠다”라고 고백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은 “예수님을 닮는다고요? 제정신입니까? 어떻게 감히 예수님처럼 되려 합니까?”라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모르십니까? 어떤 신학교 교수는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예수님도 아닌데요”라고 합니다. 신학교 문틈에 머리가 끼어 비뚤어진 생각입니다.
세상의 문틈에는 머리가 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생각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지혜롭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결코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며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어떤 이들은 “당신들의 화인사명신학은 은혜복음이군요”라고 합니다. 저는 “화인사명신학도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다 옳지 않을 수 있다고 늘 말합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도 다 옳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으니 말씀을 깊이 구하십시오. 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 줌으로써 여러분이 듣고 “아, 내가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겠구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스스로 옳다 여기지 말며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야겠구나”라고 깨닫게 도울 뿐입니다. 여러분이 마침내 깨달았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십시오. 찾아보시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도의 초보를 버리고 힘써 온전한 데로 나아가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지금은 믿음을 전하고 있지만 소망과 사랑은 아직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며 사랑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의 성장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고집을 부리며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줄어들고 징계의 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들 “젖을 주세요” 하다가 뺨을 한 대 맞고 맙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매가 온 땅에 임하더라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매를 맞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조차 은혜입니다.
어찌하여 힘써 추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발로 차시기 전에 속히 돌이켜 힘써 온전함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성장하는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때로는 걷어차서라도 여러분을 축복 속으로 밀어 넣겠다고 양육을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장하며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추구한다면 매를 맞겠습니까? 아닙니다.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의 보물로 여기십시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시오.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고, 주님은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세계를 뒤흔들며 원수를 짓밟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크게 흥분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예전에는 “우리가 의학의 한계를 극복했다”라며 모든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