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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데살로니가전서 4장 - 너희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지 알아야 하리라

2025-05-28 3,016 帖撒罗尼迦前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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帖撒罗尼迦前书04章-神所悦纳的生活
  • 1 弟兄们,我还有话说:我们靠着主耶稣求你们,劝你们,你们既然受了我们的教训,知道该怎样行可以讨 神的喜悦,就要照你们现在所行的更加勉励。
  • 2 你们原晓得,我们凭主耶稣传给你们什么命令。
  • 3  神的旨意就是要你们成为圣洁,远避淫行;
  • 4 要你们各人晓得怎样用圣洁、尊贵守着自己的身体,
  • 5 不放纵私欲的邪情,像那不认识 神的外邦人。
  • 6 不要一个人在这事上越分,欺负他的弟兄;因为这一类的事,主必报应,正如我预先对你们说过、又切切嘱咐你们的。
  • 7  神召我们,本不是要我们沾染污秽,乃是要我们成为圣洁。
  • 8 所以,那弃绝的,不是弃绝人,乃是弃绝那赐圣灵给你们的 神。
  • 9 论到弟兄们相爱,不用人写信给你们;因为你们自己蒙了 神的教训,叫你们彼此相爱。
  • 10 你们向马其顿全地的众弟兄固然是这样行,但我劝弟兄们要更加勉励。
  • 11 又要立志作安静人,办自己的事,亲手做工,正如我们从前所吩咐你们的,
  • 12 叫你们可以向外人行事端正,自己也就没有什么缺乏了。
  • 13 论到睡了的人,我们不愿意弟兄们不知道,恐怕你们忧伤,像那些没有指望的人一样。
  • 14 我们若信耶稣死而复活了,那已经在耶稣里睡了的人, 神也必将他们与耶稣一同带来。
  • 15 我们现在照主的话告诉你们一件事:我们这活着还存留到主降临的人,断不能在那已经睡了的人之先。
  • 16 因为主必亲自从天降临,有呼叫的声音和天使长的声音,又有 神的号吹响;那在基督里死了的人必先复活。
  • 17 以后我们这活着还存留的人必和他们一同被提到云里,在空中与主相遇。这样,我们就要和主永远同在。
  • 18 所以,你们当用这些话彼此劝慰。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앞 장들에서는 듣기 좋은 말들을 다 했고, 이제 진짜 핵심 내용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끝으로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

4장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너희는 어떻게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입니다. 사실 그들은 주님을 믿은 지 겨우 2주밖에 되지 않았고, 다들 매우 흥분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는 어리둥절한 채로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있었지만, 많은 일에 있어서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 결과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와 그들이 제기한 질문들을 바울에게 가져왔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질문했던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주님을 믿었고,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주 비슷합니다. 마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이미 주님을 믿었어." 그리고 나서는요? 교회 안에서 이상야릇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신학 체계에는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줄곧 힘써 좇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너희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아느냐? 어떻게 행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느냐? 너희는 지금 행하고 있는 방향대로 더욱 힘써야 한다. 너희는 아직 한참 멀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충격을 줄까 봐, 앞에서는 먼저 밑밥을 깔아두고 뒤에서 진짜 핵심을 꺼낸 것입니다. "너희는 아직 한참 멀었다." 제 설명이 사실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막 주님을 믿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기에는 분명 아직 한참 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더욱 힘쓸 것을 권면하다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난 후에는 골치 아픈 일이 생깁니다. 왜 골치 아파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자면, 주님을 믿자마자 귀신이 찾아옵니다. 이전에는 귀신이 없었을까요? 이전에도 귀신이 있었지만, 이전의 귀신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패할 대로 이미 다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순간, 귀신은 신이 납니다. 왜일까요? 이 세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마귀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무너뜨리면, 돌아가서 상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보상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당신이 주님을 믿은 것을 보고 "아, 네가 구원받으려 하는구나" 하며 당신을 무너뜨리러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은 후에 귀신을 끌어들이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왜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믿은 후에 둔해지고 어리석어지며, 주님을 믿은 후에 쉽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지켜주실 수 있지만, 당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실 수는 없습니다.

귀신이 퍼뜨리는 첫 번째 거짓말은 "너희는 이미 주님을 믿었고,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 손 놓고 편히 누워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안주하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추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추구하기를 멈추기만 하면 큰일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듭니까?"라고 말하겠지만, 마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까? 제가 묻겠습니다.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온다면, 장담하건대 당신은 정말 빠르게 달릴 것입니다. 빠르게 달리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한참 멉니다. 제가 여러분의 적극성을 꺾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믿은 후에 안주하는 것이 훌륭한 선택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믿은 후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힘써 추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힘듭니까? 힘듭니다. 하지만 마귀의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가볍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으면서 잘못된 복음을 믿는 것은 비극입니다.

거룩함에 이르고 음행을 멀리하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하기를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전서》 4:2-7)

육체는 무익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행위를 근본으로 삼지 않지만, 반드시 행위 중심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이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화인 사명 신학은 사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신학이라는 점입니다. 살아 있을 때 존귀함을 살아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모습을 살아내는 것이지, 결코 걸인 같은 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었다 하더라도 사실 거룩함과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대장정의 길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존귀한 모습을 살아내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 머릿속에는 찌꺼기와 쓰레기가 여전히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니 육체는 무익하다고 생각하며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도덕적 기준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형상이 이를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저는 형제자매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아직 거리가 멉니다. 힘써 추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배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대로 생각하는 것들 중에 쓰레기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툭하면 뼈가 부러지고, 툭하면 이런 병, 저런 병에 걸립니다.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머릿속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도대체 언제 끝이 나는가?"라고 말하겠지만, 주님의 얼굴을 뵐 때가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대충대충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배우고,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며, 성령의 권능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고난을 덜 겪을 수 있습니다. 결코 제멋대로 함부로 행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사실 살아가는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가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잘 살 수 없습니다. 마귀가 거짓말을 하나 던지면 그 거짓말을 따라가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온갖 핑계를 찾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신학이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신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복음이며,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육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르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므로, 하나님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지식과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때마다 영 안에서 정결함을 얻게 됩니다.

제가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 어떤 목회자가 감옥에 다녀온 목회자에 대해 논평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근 그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그 논평이 참 흥미롭고 예리했습니다. 인터뷰 전체에서 회개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심지어 "아, 나는 이미 그들을 용서했습니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사실 당신이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마치 누가 당신에게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그를 용서한다, 나는 그 사람과 똑같이 굴지 않겠다, 나는 그와 선악을 분별하지 않겠다." 이런 말은 듣기에는 자기가 매우 훌륭하고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정결하게 할 때,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대단하고 위대한 사람인 양 "내가 그를 용서한다" 따위의 말을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나는 이 부분이 아직 부족합니다, 저 부분이 아직 부족합니다, 여길 고쳐야 하고 저길 고쳐야 합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주의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오직 자신에게 여전히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고 인정할 자격 하나뿐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남의 허물은 아주 똑똑히 보면서, 자신의 허물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고 음행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은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적하지 말고, 남을 못마땅하게 보지도 말고, 오직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보며 자신에게만 지적하십시오.

스스로에게 지적하는 것, 그것이 거룩함의 길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내게 무슨 문제가 더 있는지 좀 봐줄래?" 하고 부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상대방이 말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 속에서 남의 흠을 들추어내며, 자기는 매우 훌륭한 사람인 양 "내가 그를 용서하고 품어준다"라고 드러내곤 합니다. 듣기에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와 선악을 분별하지 않겠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제가 끊임없이 요구하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이 모양인데, 주님을 믿은 지 2주 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타고난 본성대로 스스로 옳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형제를 괴롭히지 말라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6)

여러분, 어떤 뉘앙스인지 감이 오십니까? 직장에서는 사장이던 사람이 교회에 와서도 사장 티를 벗지 못하고 "이것을 여기로 옮겨라, 저것을 저기로 옮겨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장의 태도가 아주 짙습니다. 또 어떤 일반인이 주님을 믿고 그의 직원도 주님을 믿었는데, 사장이 형제의 임금을 삭감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가 교회에 와서 "보세요, 저 사람이 내 월급을 깎았습니다" 하고 하소연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 주지만, 회사로 돌아가면 호되게 당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치리해야 할지 몰라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바울이여, 우리 가운데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이 일에 분수를 넘어 자신의 분수를 벗어나 형제를 괴롭히지 말라'고 쓴 것입니다. 혹은 교회 안에 두 형제가 유산 분배가 불공평하다고 교회에서 멱살잡이하며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고 나면 바로 거룩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믿고 나면 남을 괴롭히지 않게 됩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주님을 믿었을 때, 교회 안에서 이런 기괴한 현상들을 보며 정말 탄식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구원받은 상태라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을 결코 믿지 않으며, 아직 한참 멀었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조금만 권면해도 격하게 반응하며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의 저주를 거부합니다, 끊어버리겠습니다! 당신의 말이 내게 가져온 저주를 끊어버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입니다.

교회에는 본성상 어지럽고 탁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조금 자랑삼아 말씀드리자면, 제가 당시에 교회 안의 이런 어지러운 일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내가 교회를 세운다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겠다. 교회는 반드시 거룩해야 하고, 이러한 악행들을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자랑삼아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이런 부분들을 아주 많이 다루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잡담하고 헛소리하고 물건 팔고 장사하고 남을 괴롭히고 사기 치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보응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이 아주 많으니 여기서 다단계 판매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장사하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건대 주님께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인한 분쟁을 거부하며, 교회 안에서 이것저것 매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우리가 수년 동안 사역하며 수많은 문제들을 처리해 왔기에 비로소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 제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 코로나를 앓으면서도 휴대폰을 볼 수 있었는데 단체방에서 어떤 목사님도 코로나에 걸렸다가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분이 코로나 이후의 소회라며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 그는 교회 안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가득하다고 썼습니다. 저는 '그들의 교회에 치열한 암투가 가득하다니, 그 교회는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닌가? 왜 자기가 세운 것에 만족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다 읽고 나니 그의 글 속에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읽혀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틀 뒤에 다시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복음을 믿고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데살로니가전서》 4:9-10)

바울이 점잖고 완곡하게 썼지만, 그 뜻은 '너희가 아직 충분히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기준을 높여야지 하나님의 요구를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중에 보니 버린 자마다 모두 얻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얼핏 헛된 구호 같고, 실천하기에는 또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요구는 아주 단순합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면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당신이 남을 괴롭힐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상대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루시며, 반드시 훈계하십니다. 징계하셔야 할 때 하나님은 결코 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축복하심에 있어서도 결코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또 어떤 자매는 복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제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을 살펴보았을 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속히 복 받는 길로 가십시오"라고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속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절대 없었습니다. 남의 흠을 잡을 때는 일당백이었지만, 자신의 흠을 찾을 때는 둘을 합쳐도 하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이고, 그 사람의 말하는 스타일과 태도는 안팎으로 마치 남들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자기에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제가 예전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 손해였다고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사랑함을 통해 얻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받는 축복이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뛰어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만 있다면, 비록 우리의 지각 속에서 우리가 온전히 행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지라도, 우리 안의 육체의 악행을 처리해 나간다면 복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렵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갉아먹던 삶에 마침표를 찍으십시오.

사람이 믿지 않아도, 장담하건대 주님은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저는 사람이 참으로 자주 어리석어진다고 느낍니다. 사람이 지혜롭다면 '이렇게 행하는 것이 유익하고, 저렇게 행하는 것이 손해다'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줄다리기 게임을 하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발 하나님과 게임하려 하지 마시고, 가장 큰 계명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손으로 일하라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11-12)

사도 바울의 신학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는 자기 손으로 일하는 것이며, 사도 바울 자신 또한 친히 손으로 일했습니다. 교회 안에 가장 많은 부류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나는 것, 땅을 기는 것, 바다를 헤엄치는 것 등 모르는 것이 없는 전문가처럼 굽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켜보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이것 좀 봐라, 저것 좀 봐라, 가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라" 지시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마음대로 해라"라고 합니다. 왜 절대로 손수 일하지 않을까요? 입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입만 현란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손수 일하지 않고 밖에서도 일하지 않으니,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난해지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나는 가난해서 남은 것이라곤 영적인 은혜뿐입니다"라고 합니다. 듣기만 해도 기괴하지 않습니까?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은 후에 입만 놀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반드시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는 이전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사실 이런 상황을 아주 많이 봅니다.

한번은 어느 지역에 갔을 때 친구가 현지 교회의 목회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몰고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15~17세쯤 되는 아이들이 몇 명 나왔습니다. 제가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 아이들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여기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회적 무능력자들을 훈련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것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결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바울의 신학 체계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망쳐놓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예전 교회 목사가 일하지 말라고, 일하지 말라고 권면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손가락만 빨고 삽니까? 목사가 먹여 살릴 것입니까? "일하지 말고 와서 하나님을 섬기라. 일하면서 어떻게 섬기느냐"라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손수 일했으며, 어디를 가든지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 일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동역자들까지 부양했습니다.

그래야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할 수 있습니다. 등 뒤에 날개만 안 달렸지 마치 천사인 양, 어디를 가든지 "아이쿠, 거룩(Holy), 거룩" 하는 꼴로 살지 마십시오. 그야말로 종교적인 냄새만 풀풀 풍기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을 자기 손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양육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끝장납니다. 제가 별명을 하나 붙여주자면 '득득이'입니다. 왜 득득이일까요? 베드로를 말합니다.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만을 업으로 삼다가 결국 교회를 완전히 주저앉히고 말았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혼자서 탁발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손으로 일하십시오. 손수 일하는 과정 속에서 일을 성사시키십시오. 친히 일하는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우리를 따라올 때 이단으로 빠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살아내면 빗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고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라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주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가장 큰 보상은 바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소망 안에서 서로를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바울이여, 우리 교회에 한 형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엉엉 울며 몹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했는데 왜 응답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기도는 모두 역사하지만, 죽을 때가 이르면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즉, 사람의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이 몸을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돌아온 후에 육신 안에 머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며, 영이 몸을 떠났을 때 매우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였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의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그가 죽었으니 나쁜 일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세상의 수고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몇 년을 살지 정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소망을 품지 말고 영원한 소망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죄를 짓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기에, 장차 죽은 우리의 육신은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다 흙이 되고 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고 하겠지만, 당신 몸의 원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영혼은 땅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 요소이며,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곧 장차 어느 날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우리의 몸이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와 부활한 자들이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영원 안에 소망을 품는다면, 이 세상에서 헛된 길을 걷지 않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전에 알렉산더라고 불리는 마게도냐 사람이 있었는데, 기원전 330여 년경의 일입니다. 그는 스무 살에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켰고,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했으며 그의 영토는 인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나이는 겨우 32세였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의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소망을 이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곳이 당신의 스트레스와 압박이 됩니다. 그러나 소망을 하늘에 둔다면 그것은 결코 압박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압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은 우리의 소망이 아니며, 이 땅에서의 소망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반응이 어떠한지 시험해보는 작은 테스트일 뿐입니다. 결코 이 땅의 일들을 너무 무겁게 여기지 마십시오. 언젠가 이 땅의 일들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섬긴 사역의 열매는 우리와 함께 영원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고 우리의 미래를 이 영원한 소망에 닻을 내리며, 장차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망에 닻을 내리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시며 그것이 당신에게 압박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매우 단순한 것이 됩니다.

갑자기 어떤 프로젝트가 닥치면 신경을 곤두세우며 압박감에 짓눌립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압박감이 너무 커서 32세에 죽고 만 것입니다. 소망을 영원에 둡시다. 살아가는 동안 겪는 사소한 일들은 모두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을 홀대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몇몇 잡귀들을 보내어 당신을 괴롭히실 텐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중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깊이 돌이켜 반성하고, 가난 속에 사는 사람은 깊이 돌이켜 반성하여 머릿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십시오. 알렉산더 대왕처럼 헛된 것을 진짜 실체인 양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이 죽으면 그 무엇도 자신과 상관없게 됩니다. 설령 이집트까지 쳐들어가고 인도까지 쳐들어가며 나라들을 차례로 멸망시켜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한들,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알아야 할 바입니다. 어떻게 행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어떻게 행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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