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推荐评论
命定神学 关闭
【설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025-08-10 2,664 有福系列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시간에는 이어서 《시편》 32편을 나누겠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저주와 축복은 영원한 두 가지 주제입니다. 《신약》에는 저주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저주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잘못 믿고 잘못 전하면 그는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직접 찾아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축복과 저주는 《성경》에서 매우 영원한 의미를 지닌 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와 축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듭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면 반드시 축복을 받고, 지켜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선생님, 저는 삼가 지켜 행할 수가 없어요." "그래, 지켜 행하지 못한다고?" "아이고, 그럼 너무 두려워요." 두려워해야 마땅합니다. 온종일 지켜 행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시편》 32편 말씀은 바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는 것"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묘하게도 스스로를 꽤 괜찮다고 여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면 존재감마저 사라져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김으로써 살아갈 소망과 용기를 얻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를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당신이 본래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은 본래 죄인이었지만,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실 뿐입니다. 사실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나 형통함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며 목회자에게 대들고, 영적 리더에게도 대듭니다. 아이고 맙소사, 스스로 대단히 훌륭하다고 여기며 심지어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집니다.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큰 악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죄인임을 잊고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의인이라 칭해주셨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귀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문제가 터지고 일이 형통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이런 경험을 가장 뼈저리게 했을까요? 제가 가장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늘 관찰하고 배우며 정리하여 결론을 얻어야 합니다. 지각(悟性)이 통달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은혜를 받았을 뿐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길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이제 《시편》 1편을 쓴 다윗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그가 어떻게 썼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바로 이 시를 쓴 사람이 다윗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왜 《시편》 32편을 쓰게 되었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동안 삶이 안락해져서 그는 더 이상 전선에 나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월도 평안해졌고, 직접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울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경제가 발전하고 민생이 크게 개선되자, 자신의 통치 업적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고 작은 회의를 열 때마다 아랫사람들이 칭송하고,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여전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며 마음이 흐뭇해지기 시작했고, 아래에서는 공덕을 찬양하며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곁에 아부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아부를 들으니 참 기분이 좋았지요. 그리고는 기타 연주자들을 모아놓고 "다윗 왕이시여, 마이크를 잡고 《시편》 1편을 노래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곡까지 붙여서 노래를 부르며 "아, 내가 쓴 이 시편이 정말 좋구나" 하고 스스로 정말 잘 썼다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신이 찾아왔습니다. 스스로 매우 영광스럽다고 여겨 심지어 자기 이름을 다윗 영광, 영광 다윗이라 부를 정도가 되니 귀신이 온 것입니다.

다윗은 며칠 전 밤에 가볍게 술 한잔을 걸치며 측근 몇 명을 불러 꼬치구이를 시켜놓았습니다. 네 잔 내 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마오타이 한 상자를 다 비우고, 맥주 세 상자를 더 가져오게 해 꼬치구이를 몇 판이나 먹었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논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다가 만취할 때까지 마셨습니다. 저는 지금 《시편》 32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며 중간중간 다윗이 쓴 시가들을 불렀습니다. 와, 얼마나 유쾌합니까. 인생이 이럴 수 있다니 다 하나님의 은혜라며 자고 일어났더니 오후였습니다. 깨어나 보니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해는 어디 갔지? 어제 아침 일어났을 때는 동쪽에서 떴는데, 어라, 왜 서쪽에서 해가 보이지?' 사실 해가 거의 뉘엿뉘엿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눈을 비볐습니다.

잠옷을 걸친 채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옥상 테라스로 나갔습니다. 그 당시 가장 높은 옥상은 대략 2층 높이의 옥상이었습니다. 멀리 내려다보는데 이게 우연일까요? 밧세바라는 한 젊은 여인이 다윗의 집 근처 마당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휴, 정말이지 완벽한 각도였습니다. 젊은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다윗이 보았는데, 상상이 되십니까? 맙소사! 그 목욕하는 모습에 여호와의 율법이 남아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오직 육체의 반응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제 마신 마오타이가 혈기를 왕성하게 돋우었는지 몸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라 하더니, 세상에, 정말로 그녀를 데려왔습니다.

밧세바는 왜 거기서 목욕을 했을까요?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밧세바라는 여인은 남편이 전선에 나가 싸우고 있으니 욕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녀는 다윗이 그 테라스에 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언제쯤 내가 여기서 목욕하는 걸 봐줄까?'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딱 맞아떨어졌을까요? 그 결과 다윗의 머릿속에는 밧세바가 목욕하던 모습만 가득 찼습니다. 요즘 시대로 치면 남의 목욕을 훔쳐본 사건이니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을 일입니다. 결국 그녀를 데려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신을 해버렸습니다. 단 한 번에 임신이 된 것입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자, 여러분이 그에게 묘책을 좀 내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이때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을까요? 그 율법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임신해 버린 일을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임신을 했으니 어찌합니까? 그래서 전선에서 그녀의 남편을 불러들였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가 아내와 동침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 그렇게 아이가 태어나면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아 당신에게 아이가 생겼소' 하려고 아주 치밀하게 꾀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아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다윗의 집 문간에 앉아 잠을 잤습니다. 다윗은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이를 어쩐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아, 우리아여, 참으로 충성스럽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구나"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아를 다시 전선으로 돌려보내면서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가 전장에서 전사하도록 손을 썼습니다. 이것이 간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배후에는 귀신이 연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편을 쓸 때 머릿속으로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복이 있습니까? 복이 다 사라졌습니다. 오직 밧세바 뱃속에 있는 그 사생아 생각과 이 부끄러운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 하는 생각뿐인데 어디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너무나 괴로운데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 하니, 신하와 백성들은 '다윗 왕에게 무슨 일이 있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계신가 보다. 다윗 왕이시여, 어찌하여 기쁨이 없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아, 묻지 마라, 묻지 말고 물러가라!' 주야로 묵상한 것이 우리아를 제거할 간계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우리아가 죽임을 당하고 밧세바가 아이를 낳은 후, 그 아이가 죽기까지의 전 기간 동안 다윗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평생 이토록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습니다. 죄를 자복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자복하지 않자니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지혜로웠을까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내가 귀신에게 이렇게 농락당할 수는 없다. 내게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할 뿐만 아니라 《시편》 32편을 쓰겠습니다. 저의 이 부끄러운 일을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내어 보여주겠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무엇이 복인지 아십니까? 돈이 많은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탁 트이고 시원한 것입니다. 술을 마셔서 시원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안하고 시원한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것, 이 사람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32편은 다윗이 극심한 고통의 세월을 겪은 후 마침내 그 도리를 깨달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할지라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고함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절대로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을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의인이라 생각하며,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때로는 그것이 진짜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전혀 진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주 예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말 중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어가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믿고 사역하면서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신앙의 길을 더 걸어가면서 큰 죄인이 되었고, 마침내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기게 되는 법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욥을 예로 듭니다. 나중에 제가 연구하여 깨달은 것인데, 욥은 당시에 스스로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온종일 '나는 의인이다, 우스 땅에 있는 의인이 바로 나 욥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재감이 가득 차서 그 기분을 몹시 즐겼고, 속으로 스스로가 대단히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보고 '어라? 네가 정말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는 하나님께 가서 고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과 딱 맞다. 가서 그를 한번 쳐보아라' 하신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욥기》를 읽어보십시오. 문맥을 끊어서 읽지 말고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며 읽어보면, 욥이 스스로를 괜찮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작 고난을 겪었어야 마땅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과 변론했습니다. 하나님과 논쟁하며 온갖 부적절한 말들을 쏟아냈고, 자기가 매우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시자 그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화를 보면 욥이 스스로를 꽤 괜찮다고 여겼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중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과거에 알았던 사람들, 제가 섬겼던 사람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는데도 여전히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암에 걸렸는데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십시오. 더 이상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섬겼던 많은 암 환자들 중 결국 세상을 떠난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암 환자가 이미 상태가 위중한데도 자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 귀신이 와서 죽을 때까지 괴롭힙니다. 차라리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욥이 진짜 의인이었습니까? 그가 어디 의인입니까?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겨주셨을 뿐입니다. 다윗이 의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의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실 뿐입니다.

주님을 수년 동안 믿고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한 분이 마음에 깊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신명기》 28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101 과정》에서 축복과 저주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저는 자주 어깁니다. 그럼 저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이렇게 깊은 혼란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사람을 참 답답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했고, 저는 그녀의 그런 혼란 때문에 답답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죄인이며 이미 수많은 저주를 겪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런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귀신이 사람 안에서 권세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사람 안에서 왕 노릇 하니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온갖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죄인이고 《신명기》 28장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의 몸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의 역사는 불법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매듭을 풀어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죄인이면 귀신이 합법적으로 당신을 괴롭힙니다. 그러면 어찌 되겠습니까? 귀신이 괴롭히니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죄를 더 지으니 귀신이 더 괴롭히게 되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이 매듭을 풀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잘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이 은혜를 덧입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지켜 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결코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과 관련하여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령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길지라도, 자신이 여전히 죄인임을 알아야 하며 온전함에 이르도록 힘써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재갈과 굴레로 제어해야만 길들여지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악인은 반드시 많은 고통을 겪게 됨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한다면 악인입니다. "선생님, 저 정말 너무 괴로워요" 한다면 아주 큰 악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게임을 하거나 소설을 읽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면 헷갈릴 일이 있겠습니까? 결코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소설을 읽거나 게임을 할 때면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망가지며 악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악이 가려지지 않았는데 어찌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

이제 《시편》 32편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을 펴주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무겁게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편》 32:1-11)**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지 보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하옵소서. 주의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덮으사, 주의 눈앞에 의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주님 앞에서 구원의 기쁨을 다시 얻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을 의지하여 이 흑암의 권세를 이기고, 나를 지으신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앞서 이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당시에는 아주 통쾌하고 좋았을 것입니다. 쾌락이 있었을까요? 있었지요, 엄청나게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온 고통은 그 쾌락보다 열 배는 더 괴로웠습니다. 그가 그 짓을 저지른 후 귀신이 사람에게 단단히 달라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귀신의 생각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끌려가며, 가면 갈수록 더 괴롭고 고통이 깊어집니다.

많은 이들이 돈을 벌고 또 벌어 사업을 키우고 번창시키려 하다가 결국 뛰어내려 목숨을 끊습니다. 결말이 감옥에 가거나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영상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지난 얼마 동안 민간 기업가 5명이 투신자살했다는 통계였습니다. 민간 기업가들이 돈을 벌었고, 그중에는 우리가 다 아는 브랜드의 대표도 투신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을 벌고 벌다가 무엇이 되었습니까? 고통을 벌어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벌다 보니 어느새 악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오(리하오)라는 사람이 한 말 중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 중에 선한 사람은 없다. 선한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어릴 때부터 독하고 못되지 않으면 어떻게 위로 올라가겠는가? 못돼야만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사람의 배후에는 인생의 풍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함과 타락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 논리를 알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투신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으로는 그것이 왜 그런지 알아야 합니다. 다윗도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지만, 감사하게도 뛰어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건물이 높지 않아 뛰어내려 봐야 다리만 부러질 뿐 다른 일은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은 2층짜리였으니까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지혜롭게도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왜일까요? 원래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는데, 이제 죄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죄 하나를 더 자복하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 사람의 눈으로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사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도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 있는 자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습니까? 죄를 자복했기에 사함을 받았고, 인정했기에 덮어지고 도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한 일입니다. 정직한 마음만 있으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선생님, 너무 혼란스러워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니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이 일을 겪은 후에 《시편》 32편을 썼고, 이 경험은 다윗에게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그 마음속의 고통은 여러분이나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극도로 괴롭힌 것입니다.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하면 사람은 몹시 괴롭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귀신은 반드시 사람 안에 거하며, 허물이 사함받지 못하고 죄악이 가려지지 않았기에 귀신이 합법적으로 우리를 사정없이 짓밟는 것입니다.

욥이 겪은 그 고난들도 귀신이 한 짓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욥이 회개했기에 회복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그 하찮은 자존심을 버리십시오. 그깟 자존심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기록하여 우리 후대가 본받을 수 있는 모범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다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제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세상의 한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이 평생 겪는 고통의 정도는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고 완고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은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져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세월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잘못을 짚어주고 살짝 일깨워주려 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제게 달려들어 말다툼을 하고 싸우려 듭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더 많은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매우 위대한 성품입니다. 결코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자기 확신에만 사로잡히면 망가집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늘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을 덜 겪게 됩니다.

유덕화가 주연한 《강호》라는 홍콩 드라마가 있는데 보신 적이 있습니까? 광둥어로 된 작품인데, 저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싱가포르의 한 장관이 회의 중에 유덕화의 대사를 인용해 광둥어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사는 이렇습니다. "말해도 안 듣고, 들려줘도 못 알아듣고, 알아들어도 행하지 않고, 행해도 틀리게 행하고, 틀려놓고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고도 고치지 않고, 고치면서도 불복하니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광둥어로 들으면 맛깔나지만 이렇게 번역해도 꽤 와닿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완고함입니다. 엉덩이를 한 대 차야 겨우 한 걸음 떼는 격입니다. 완고한 사람은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 고집불통을 어떤 이들은 좋은 성격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은 고통만 더할 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성품입니다.

제 예전 직장 상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며느리나 여자친구를 찾을 때는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을 찾아야지, 절대로 마음이 완고한 사람을 찾지 말라고요.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본인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우리 가운데 아들의 배필을 간절히 구하는 자매님들이 계시다면 잘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고통이 더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져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들을 수 있는 말씀은 듣고, 들었으면 깨닫고, 깨달았으면 행하고, 행할 때는 틀리지 않게 행하십시오. 틀렸다면 속히 인정하고, 인정했으면 속히 고치십시오. 그리고 고집 센 당나귀처럼 속으로 불복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노새나 말처럼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잡아끌어야 겨우 따르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입에 쇠 재갈을 물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 말이 아니라 다윗이 한 말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기도한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괴롭고 너무 힘듭니다. 홍수에 휩쓸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 우리에게 기도할 자격이 남아 있을 때 속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 앞에 죄를 자복하고 "내가 여호와께 내 허물을 자복하리라" 해야지,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노아의 방주를 가리킵니다. 노아가 호랑이, 늑대, 사자, 코끼리 등 온갖 짐승들을 짝지어 방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행렬이 끝없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그 시절에도 기술이 발달하여 라이브 방송이라도 하듯 온 세상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노아네 집에서 뭘 하는 거지?" "홍수가 올 것이니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홍수가 온다니 사람들은 하늘이 이렇게 가문데 무슨 홍수가 오느냐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홍수가 나기까지 7일이 남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부드럽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밖의 사람들은 "홍수는 무슨 홍수냐"며 여전히 비웃고 있었습니다. 땅의 사람들에게는 7일의 유예가 남아 있었고, 노아는 방주 안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습니다. 아직 물이 차지 않았다고 해서 노아의 가족들이 어리석게 "홍수도 안 오는데 밖에 나가서 마트도 다녀오고, 주문한 배달 음식이 방주 문 앞에 왔으니 문을 열어야겠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문이 한 번 닫히면 나갈 수도 없고, 밖의 사람이 들어올 수도 없으며 안의 사람도 나갈 수 없습니다. 결국 7일 후 콸콸 홍수가 닥쳤고, 밖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소용없이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수가 닥치고 나서야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홍수가 닥치기 전에, 아직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있을 때 즉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도를 떠올리고 회개하려 한다는 사실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이런 완고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고통을 덜 겪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완고하게 고집부리다가 문이 닫히면 어디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 문 열어주세요!" 해봤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면 끝장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 안에 숨는다

《시편》 32편 7절 말씀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면 귀신이 틈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귀신이 죽을 때까지 괴롭힙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 밖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신처이십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 숨었기에 귀신이 그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윗의 기록은 매우 명확하며 복잡하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혼자 음모와 간계를 꾸미지 마십시오. 다윗이 계략을 써서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그 마음속의 고통은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무겁게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이 사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하나님의 손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귀신 몇을 보내어 무겁게 짓누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의 고통은 무엇을 먹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 고통이 닥칠 때의 괴로움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도 그 고통이 극에 달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려움입니다. '장사가 잘될 때는 쓸 만한 직원이 없고, 직원을 구해놓으니 장사가 안 된다. 아이고 맙소사, 너무 힘들다. 은행 대출은 갚아야 하고 월급날은 다가온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그들의 괴로움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이 형제들은 어쩌나, 못난 내가 죽으면 누가 이들을 책임지나' 하며 그런 걱정까지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 숨어 있는 편이 훨씬 편안합니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짐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압박감을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스로를 의지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손에 짓눌려 견디다 못해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지혜로웠습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기도할 수 있을 때 속히 하나님을 찾고, 회개할 수 있을 때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 안에 숨었습니다. 바깥세상은 살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저에게 묻는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귀신이 당신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어떻게 그 안에 숨을 수 있습니까?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말해도 안 듣고, 들어도 모르고, 알아도 안 하고, 해도 틀리고, 틀려도 인정 안 하고, 인정해도 안 고치고, 고쳐도 불복하고는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는 그 대사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손에 계속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숨어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밖으로 나오면 어쩌겠습니까? 저는 밖으로 나가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는 고난을 덜 받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은 매우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그렇다면 복 있는 자는 고통을 덜 겪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몹시 힘들게 하는 일들은 다 좋지 않은 것이며 치명적인 것입니다. 특히 질병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경험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리면 내 몸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질병이 결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환난과 고통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우리를 환난에서 보호하십니다. 악인은 많은 고통을 겪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환난과 고통을 덜 겪고 하나님 밖에서는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복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속히 '내가 잘못되었구나'를 깨달으면 끝날 일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질병을 고난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질병은 사실 고난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몹시 고생하다가 병에 걸렸는데, 심지어 목회자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거기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그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더 많이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잘못했음을 많이 인정할수록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다 틀렸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체면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체면 따위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틀렸으면 '아, 내가 틀렸구나' 인정하고 바로잡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때 그분을 찾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 숨어 있어야지 함부로 밖으로 나와 서성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고난을 덜 겪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평생 겪을 고생을 참 많이 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복된 일입니다. 저는 참으로 복이 많습니다. 제 어머니는 점쟁이에게 찾아가 사주를 보며 자식들의 운명을 묻곤 하셨습니다. 어느 점쟁이를 찾아가도 "이 집 아이는 참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제 이름을 '유유복(刘有福)'이라 지었어야 할 판입니다. 마음이 완고하지 않으니 그 많은 고생을 덜 겪을 수 있었고,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도 고생을 덜 겪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형제자매들이 너무 많은 고생을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많은 고난을 겪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복 있는 자는 고난을 덜 겪습니다. 욥이 진작 겸손해져서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며 자고하지 않았다면 사탄의 타깃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공연히 그런 고생을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늘 은혜와 복을 받았다고 여기면 마음에 고통도 없을 것이고, 뛰어내릴 일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복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마땅히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신다

복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마땅히 갈 길을 지시해 주십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어, 그거 틀렸다, 그러면 안 된다"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고해지면 망합니다. "네가 틀렸어"라고 하면 "저리 가!" 하고 맞받아칩니다. 그래서 사람끼리도 말문이 막힐 때가 많은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면박을 당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취되어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심해라, 요즘 눈을 함부로 굴리지 마라" 하셨을 텐데 굳이 보려 했고, 보고 나니 하나님의 훈계가 생각이나 났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마땅히 갈 길을 지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지점에 이를 때마다 하나님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제게 경고하시며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신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길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어서 교회를 부양하겠다는 생각을 저라고 안 해봤겠습니까?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것은 바른 길이가 아니다. 나는 너희의 부양이 필요 없다. 네가 힘들게 돈을 벌어 교회를 먹여 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며 귀신을 쫓아낼 때도 함정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초기의 사역 방식일 뿐 계속 그 방식만 고수하며 지각(悟性)의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언젠가는 효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히 방향을 바꾸었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갈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최근에도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또다시 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복 있는 우리들은 마음이 부드러워 말과 노새처럼 재갈을 물려야만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며, 끊임없이 영적 진리의 고봉을 향해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우리를 주목하여 훈계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저는 제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늘 '내가 틀렸을 수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주 회개하니 참으로 좋습니다!

여러분도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순간 정욕에 이끌려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욕이 다윗의 정욕과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그 정욕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록 정욕의 구덩이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늘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죄인이었고 오늘 또 하나의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결코 세상의 것들로 인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있는 자로 삼아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관심을
关闭
暂无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