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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시편 25장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2025-09-14 1,467 诗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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诗篇-求主指引保护
  • 1 耶和华啊,我的心仰望你。
  • 2 我的 神啊,我素来倚靠你;求你不要叫我羞愧,不要叫我的仇敌向我夸胜。
  • 3 凡等候你的必不羞愧;惟有那无故行奸诈的必要羞愧。
  • 4 耶和华啊,求你将你的道指示我,将你的路教训我!
  • 5 求你以你的真理引导我,教训我,因为你是救我的 神。我终日等候你。
  • 6 耶和华啊,求你记念你的怜悯和慈爱,因为这是亘古以来所常有的。
  • 7 求你不要记念我幼年的罪愆和我的过犯;耶和华啊,求你因你的恩惠,按你的慈爱记念我。
  • 8 耶和华是良善正直的,所以他必指示罪人走正路。
  • 9 他必按公平引领谦卑人,将他的道教训他们。
  • 10 凡遵守他的约和他法度的人,耶和华都以慈爱诚实待他。
  • 11 耶和华啊,求你因你的名赦免我的罪,因为我的罪重大。
  • 12 谁敬畏耶和华,耶和华必指示他当选择的道路。
  • 13 他必安然居住;他的后裔必承受地土。
  • 14 耶和华与敬畏他的人亲密;他必将自己的约指示他们。
  • 15 我的眼目时常仰望耶和华,因为他必将我的脚从网里拉出来。
  • 16 求你转向我,怜恤我,因为我是孤独困苦。
  • 17 我心里的愁苦甚多,求你救我脱离我的祸患。
  • 18 求你看顾我的困苦,我的艰难,赦免我一切的罪。
  • 19 求你察看我的仇敌,因为他们人多,并且痛痛地恨我。
  • 20 求你保护我的性命,搭救我,使我不致羞愧,因为我投靠你。
  • 21 愿纯全、正直保守我,因为我等候你。
  • 22  神啊,求你救赎以色列脱离他一切的愁苦。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여러분과 함께 참으로 귀한 말씀인 《시편》 25편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편의 어떤 점이 좋을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사실 이 말씀은 《잠언》에도 나오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편 25편은 그리 유명한 편은 아닙니다. 시편 16편, 23편, 그리고 1편 같은 시들은 매우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 주에는 덜 유명하지만 아주 훌륭하고 매우 중요한 시편을 나눕니다. 왜일까요? 바로 ‘자기 느낌에 취해 있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그 교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며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길을 가다 보면 결국 사단이 납니다. 사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전진할지 후퇴할지 선택하며 걷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도 적지 않게 먹었습니다. ‘아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게 다 자기가 걸어온 길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묻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공부를 제대로 안 했는데 2학년 공부가 됩니까? 2학년 때 안 했는데 3학년 과정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못 하고 중학교에 가면, 앉아 있어도 남들은 다 알아듣는데 자기만 아무것도 모릅니다. 선생님 말씀이 외계어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갑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니 그렇다 칩시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멍하니 있다가 졸업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아, 난 왜 이 꼴이 되었을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기를 당하는 것도 사실 약간의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남들이 “나한테 100만 원을 주면 연말에 300만 원으로 불려 줄게”라고 하니, 연말이 되었을 때 30만 원도, 3만 원도 없고 원금 100만 원마저 날아가 버립니다. 당시에는 그 300만 원만 바라보지 않았습니까? 주식 투자를 하다가 파산하고 무너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 때문에 비참한 지경에 이른 사람이 많습니다. 다들 장밋빛 소망을 품고 선택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비극입니다. 일생이 후회로 가득 찹니다. 사실 매번 선택할 때는 자신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은 내비게이션에 GPS 신호가 끊긴 것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 신호가 끊겨 바다로 안내하는데, 차를 바다로 몰고 가면서도 그것이 길인 줄 압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신호 끊긴 내비게이션처럼 엉뚱한 길로 갑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며,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을 하니 저도 약간의 자부심이 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도 아주 조금은 경외함이 있습니다. 물론 다 온전히 경외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주제입니다.

시편 25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우리에게 참으로 훌륭한 설명과 본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시편 25편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시편 25편 말씀은 성경에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다 쓰여 있는데, 내가 직접 읽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직접 읽으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겪었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아이를 가르치는데 아이가 너무 둔한 것입니다. “내가 공부할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둔한 아이를 낳았을까?” 여러분, 이런 말을 하면 아이가 더 둔해질까요, 더 똑똑해질까요? 당연히 더 둔해집니다.

“아이고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이렇게 경외하는데 왜 이런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까?” 이것이 경외함일까요? 다윗에게 비추어 보면 경외함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주 묻습니다. 미국에서 목사 같지 않은 어떤 목사가 설교할 때 땅콩만 한 쇠구슬 총알이 날아와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그럴까?” 하고 묻습니다. 왜 물으면 안 될까요? 절대로 “왜”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람의 생사가 하나님 앞에 있지 않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묻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처럼, 이 세상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아벨이 죽임당한 것이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벨 역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거울삼아 보면 무엇이 경외함인지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 다윗에 대해 나눴고, 이번 주에도 계속해서 다윗에 대해 나눕니다. 그는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았으니, 자기가 상하고 통회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일도 훌륭히 잘 해내어 성과도 좋았고, 능력도 탁월하며 처세도 일 처리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상사이자 그의 왕이 그를 죽이려 쫓아다니며 목숨을 노렸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회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그런데 다윗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바로 ‘경외함’이라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과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가 일을 얼마나 잘했는데 왜 왕이 저를 이렇게 대합니까?” 세상에,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따진다면 큰일 납니다. 인생에서 일을 겪어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마땅히 택할 길을 지시해 주실 것이며, 그 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겪는 일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천재(天災)이고, 다른 하나는 인화(人禍)입니다. 천재와 인화 중, 천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화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은 죄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보험을 들 때 천재지변은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보험에서 천재지변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어로 천재지변을 ‘Act of God’(하나님의 행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를 천재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천재인화가 닥쳤을 때 우리 내면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13년 동안 쫓겨 다녔고, 훗날 압살롬에게 쫓겨 왕위에서 물러나 대략 18년 동안 숨어 지내며 도망쳤습니다. 요셉이 겪은 일도 실로 불가항력적인 천재와 같았습니다. 요셉이 스스로 “나를 묶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주십시오. 내가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겠습니다”라고 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절대로 요셉을 그런 식으로 본받아서 “나는 내 믿음을 훈련하기 위해 가장 척박한 곳으로 가겠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믿음이라면 차라리 좋은 환경에서 믿음을 훈련하십시오. 좋은 환경에서도 훈련이 안 되는데, 이집트에 팔려 가면 평생 노예 노릇만 하다 끝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은 여러분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외에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입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쫓기며, 이리저리 숨어 다니고 떠돌며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려 13년입니다. 13년의 세월 동안 형제자매 여러분,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땅을 원망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자책했습니다. 왜일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탓하려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아를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등 큰 죄를 지었을 때만 상하고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죄인이며, 우리가 겪는 일 중에 마땅히 겪을 만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천재라면, 하나님께서 훗날 여러분을 이집트의 총리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자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일들이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그 자업자득조차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온전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다윗에게서 배웁니다. 여러분도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경외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직 이럴 때에만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날들을 크게 줄여 주십니다. 이 고난의 날들이 마침내 지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날을 크게 줄여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셉과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면, 그 13년은 26년이 되었을 것이고, 26년은 52년이 되었을 것이며, 52년은 104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감옥에서 뼈를 묻고 평생 노예로 썩었을 텐데,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러니 경외함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공로는 없어도 수고는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집니다. 그러나 헛수고는 쳐주지 않습니다. 일하면서 물건을 망쳐 놓고 재료를 버려 놓았는데, 나무라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아닙니까? 다윗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사람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신은 죄인이 아니니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다 일을 겪으면 억울해하며 하나님이 불공평하시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사석에서나 공개적으로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저는 예전에 한 자매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님은 전도사였는데, 나중에 암에 걸려 배가 큰 혹처럼 부풀어 올라 매우 끔찍했습니다. 흔히 뱃속에 악한 생각이 가득하면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여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내가 주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경외하고 사랑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며 날마다 “왜?”라는 원망 속에 살다가 결국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재앙을 부르는 매우 악한 습관이며,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분의 딸이 지금 우리 공동체에 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되신 모습을 보며 분명히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입니다. 암에 걸렸는데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늘을 탓하고 땅을 탓하며 자기는 탓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색채만 가득하고 위선이 심했습니다. 위선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병문안을 오면 갑자기 기운을 차려 훌륭한 간증을 늘어놓으며 이것저것 이야기했지만 다 거짓이었습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은 재미있는 이야기 구조는 아니지만 아주 본질적이고 강력한 진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 전심으로 사랑해, 하나님을 경외해”라고 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시면 큰일 납니다. 다윗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누명을 쓰고 쫓겼지만, 여전히 회개하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 하고 망쳐 놓고도 지적받으면 억울해하는 어떤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다윗은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죄를 인정했는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과는 천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예전에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 돈도 쓰고 헌신도 하면서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이 닥쳐 멀쩡하던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자기가 괜찮은 줄 알고 “나는 욥이라고 말할 배짱은 없다”라고 했는데, 보십시오, 여전히 자신이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나중에야 욥도 대단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욥이라 할지라도 대단할 게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후 저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입에서 원망의 말이 나오지 않게 했고, 하나님께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한 번 원망하면 13년이 26년이 되고, 또 물으면 26년이 52년이 되며, 또 물으면 52년이 지나 인생이 끝나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날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있었기에,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마땅히 선택해야 할 길을 가르쳐 달라고 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어떻게 그런 지혜가 생겼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가득 찬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인 가운데서 저를 구원하시고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결코 안 됩니다. 지난 수년간의 사역의 길에서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고, 억울함을 겪고, 반발에 부딪히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제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비록 부족할지라도 이런 일들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양들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위탁하신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 입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늘도 땅도 탓하지 않고, 다만 제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을 충분히 경외하지 못했음을 탓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팔은 안으로 굽고 다리를 이길 수 없지만, 제 다리도 하나님의 새끼손가락 하나 이기지 못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제 다리도 하나님의 새끼손가락을 이기지 못하는데 제가 무엇을 고집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하나님! 주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저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반드시 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 한마디를 듣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직 이것 하나만을 바라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치 않고 오직 이것만을 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역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참으로 고됩니다. 다윗도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위험, 수많은 대적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몸과 마음이 몹시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앙망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외함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런 사람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주의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편》 25:1-22)

기도

하나님,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 다윗이 처했던 것과 같은 힘겨운 환경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다윗과 같은 마음을 주셔서, 다윗을 본받아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가 크오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을 덮으사, 주님 앞에서 다시 얼굴을 들게 하옵소서. 원수들을 향해 승리를 선포하게 하시고,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옵소서. 주 앞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입어 정직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사실 이 본문 말씀은 사울에게 쫓길 때 쓰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쓰인 시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는 17~18세 정도의 아주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 쫓길 때 다윗은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후,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했을 때입니다. 또 다른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이 일은 분명 그가 왕위에 오른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과거 다윗에게 징계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윗을 몹시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위에 있으면서 원한을 산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의 상황으로 보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군대와 군사권이 모두 압살롬의 손에 넘어가자, 다윗은 몇몇 호위병만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당시의 환경이 얼마나 혹독했겠습니까?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묘사해 드리겠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주변 나라 중에 그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다 다윗에게 패배했던 나라들이라, 그는 주변 모든 나라의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윗에게 정복당한 적국이었는데 갈 수 있었겠습니까?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땅에 머물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땅도 다 압살롬의 손에 넘어갔으니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러분이 다윗의 처지였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갈 곳이 전혀 없는데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잔꾀나 악한 꾀를 쓰려 해도, “하나님,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라고 하였으니 편법을 쓸 수도 없고,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변 나라들은 다 그에게 패배한 적국들이라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네 아들이 반역했는데 내게로 도망쳐 오다니, 내 손에 죽어 봐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이때 다윗도 나이가 들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늙었습니다. 묻겠습니다. 무슨 소망이 남아 있습니까? 절망뿐이며 너무나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외롭고 괴로우며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재앙이었습니다. 언제 곁에 있던 호위병이 그의 목을 베어 압살롬에게 바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 호위병도 의심스럽고 저 호위병도 의심스러워 마음은 몹시 괴롭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의 곤고와 환난을 돌아보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생명을 지켜 나를 건져 주소서.”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기도를 마친 후,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이 말은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도망칠 때 부하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고통과 수치를 보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실지 모른다.”

다윗이 다행히 이런 사람이었기에, 훗날 압살롬이 죽임을 당하고 그는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다윗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하였나이다

늘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어떻게 이런 비참한 처지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사실 하나님을 늘 의지하는 사람도 이런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처지에서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제가 늘 주를 의지했는데 왜 이런 일이 제게 닥치게 하십니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제가 주를 의지했는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끝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앞길을 인도해 주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이 구절은 “하나님, 저한테 설명 좀 해 보십시오. 왜 저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무슨 근거로 이러십니까?”라고 따지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망합니다. 그것은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우러러보는 것도 아닙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닥친 것은 우리 죄 때문이며 마땅히 당할 일입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미래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늘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내가 늘 주를 의지하였나이다

절대로 다시는 “왜”냐고 묻지 마십시오. 절대로 하나님의 면전에 대고 “왜”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원망의 말을 뱉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말을 뱉는다면 하나님께서는 황당하고 어리석은 길을 지시하셔서 계속 그 길을 걷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13년도, 26년도, 52년도 아닌 인생이 완전히 끝장나는 길입니다.

제가 만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전도사님이 30대에 암에 걸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분은 다윗과 같은 지혜가 없어서 늘 “왜?”라고 묻기를 좋아했습니다. “아, 왜 하필 나인가?” 의사가 “치료율 60%인 약이 있습니다. 열 명 중 여섯 명은 효과를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빌려 그 약을 썼습니다. “하나님, 왜 저는 효과가 없는 40%에 속합니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나중에 의사가 “더 비싼 약이 있는데, 효과가 90%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다 써서 그 약을 썼는데, 그분은 나머지 10%에 들어갔습니다. 왜일까요? “왜?”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왜 암에 걸렸는가?”를 물었을 때 40%로 들어갔고, 40% 안에서 또 “왜?”라고 묻다가 10%로 떨어졌습니다. “왜?”를 연발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옳게 행했든 틀리게 행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여러분의 입으로 원망을 쏟아내며 하나님을 탓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찾아왔을 때 신선처럼 거룩한 척하지 마십시오.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 낫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어떤 일이 닥치거든 이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절대로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한낱 죄인에 불과함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참으로 큰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일을 겪을 때 다윗을 본받는 새로운 습관을 기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소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칠 때는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아무런 길이 없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교훈’이란 가르침과 훈계입니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갈 길이 막막할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해도 “왜”를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곧 나의 길이시요, 하나님이 곧 나의 미래시요, 하나님이 곧 나의 진리시요, 하나님이 곧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을 탓하십시오.

앞길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가 되십니다. 예전에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고된 세월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작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미래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앞이 캄캄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언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13년의 고난을 주지 않으셨고, 26년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6년만을 주셨고, 6년이 지난 후 이 재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치유와 축사(치유와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에 부합하는 치유 축사 이론을 확립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있어서는 사명 신학(명정 신학)의 성경공부 체계를 세웠습니다. 주를 의지하는 길, 교회를 세우는 길에서 사명 신학을 창립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교회의 신학입니다. 힘겨운 길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험난한 처지 속에서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매우 비참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이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 천재인화 속에서 인화도 회개해야 하지만 천재 역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행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시며 불로 단련하셔서 그분의 의로운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느 선지자가 제게 말해 주었듯,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어두운 날들에 가장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25:4-5)

저는 조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저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한입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조급한 사람이라면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시절 저는 성경을 한 권 한 권 깊이 연구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비록 일생이 길지 않더라도 성경을 한 권씩 다 상고하여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공부하겠다는 비전이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러, 우리는 성경의 대부분을 한 번씩 뗐고 어떤 책은 여러 번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는 다섯 번이나 통독하고 나눴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감사와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소서

우리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골탕 먹이시는 분이 아님을 언제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라고 따지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전에는 하나님께 구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도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곤고함을 돌아보아 달라고 구하십시오. 병 고침을 달라고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치유는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일어나는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며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에는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겪는 이 고난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참으로 귀한 노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그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분의 고백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작은 의자에 앉아 오전 내내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오후 내내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밤에도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오전 내내, 오후 내내 긍휼을 구하셨습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참된 지혜요 총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훗날 우리가 세운 사명 신학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학입니다. 승리하는 신학은 영적 세계에서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원수를 끊임없이 결박하고 노략하는 것으로, 귀신들을 향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하나님, 우리가 인화든 천재든 재앙을 만났을 때, 그것이 주께로부터 왔든 제 잘못이든 주님의 인자와 긍휼을 기억하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주님은 은혜가 넘치시고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올바르게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내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주의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소서 (시편 25: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시편 25:11)

과거에 지은 죄가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악이 심히 크고 무거운데, 우리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길 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큰일 나며 또 다른 재앙을 부르게 됩니다. 우리의 허물이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절대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가 늘 우리 앞에 있어, 자칫하면 죄를 따라가기 일쑤입니다. 죄를 따라가다 보면 미혹당하고, 손해를 보며, 하나님께로부터 참으로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편 25:18)

알아들으셨습니까?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여전히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때조차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상하고 통회하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하나님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원망하면 13년, 또 원망하면 26년, 또 원망하면 52년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므로 명철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곤고함을 돌아보소서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편 25:16-18)

이 시는 압살롬이 다윗을 추격할 때 쓰였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할 때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그를 저주했습니다. 다윗의 부하가 “내가 저자의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하자 다윗은 “그를 내버려 두라”고 제지했습니다. 다윗의 부하 중에는 무예가 뛰어난 용사들이 많았지만, 다윗은 “죽이지 마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곤고함을 보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지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곤고함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겠습니까? 다 느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우리의 곤고함이 그분께도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며 자비가 넘치셔서 우리의 허물을 사해 주십니다. 그분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저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저의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얼마나 많은 재앙을 겪었을 것이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곤고함과 환난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찌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이 저를 거스르고 따지며 대들 때, 마음은 무척 쓰라리지만 그 또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겪는 일을 보시고 저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로 저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발을 샀다고 해서 제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잠잠히 인내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논리를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기쁨의 영생의 길을 달려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때로 곤고함과 근심과 환난을 겪을 때 우리의 영혼은 더욱 흥왕해지고 깨어나게 됩니다. 대적이 아무리 많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지금 곤고함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많을 줄 압니다. 바로 이 설교가 여러분을 위해 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곤고함과 마음의 근심을 돌아보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금 우리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지켜 주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시편 25:19-20)

묻겠습니다. 다윗의 주변에 그의 목을 베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면서 가만히 보니 미래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 내 인생이 이 늙은 다윗 손에서 끝나겠구나. 차라리 다윗의 목을 베어 저 새파란 압살롬에게 바치고 한자리 얻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중에도 다윗은 믿음이 있었지만, 그 부하들에게까지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늙었고, 아들 압살롬이 왕위를 차지했으니 압살롬 편에 붙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압살롬이 통치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깊은 밤, 다윗이 지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사울이 잠들었을 때 다윗이 곁에 서서 사울의 목을 벨 수 있었지만 베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윗이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부하가 칼을 쥐고 곁에 서 있는데, 다윗이 잠에서 깨어 “네가 무엇을 하려느냐?” 하자 “왕을 지키려 합니다”라고 둘러댑니다. “나를 지키는 자가 칼을 그렇게 겨누느냐?” 얼마나 무섭고 섬뜩한 상황입니까?

“하나님, 나를 지켜 주소서.” 다윗의 목을 베려 칼을 든 자가 누구인지 저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런 자가 분명히 있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의 목 하나에 평생의 부귀영화가 걸려 있지 않았습니까? 다윗을 따르는 데 무슨 미래가 보이겠습니까?

물론 다윗은 담대히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은 그 말을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칼을 쥐고 다윗 곁으로 다가갔던 경호원이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다가갈 수 없고, 물러서려 해도 움직일 수 없으며, 접근하려 하면 보이지 않는 능력에 튕겨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천군 천사가 그를 둘러 진 치고 있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아, 건드릴 수가 없구나.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죽기 살기로 다윗을 따라야겠다. 그래야 훗날 작은 벼슬이라도 얻지 않겠는가.’

하나님, 주를 경외하오니 내가 택할 길을 가르치소서

이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보기에 길처럼 보이는 곳은 참된 길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에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다스리실 때까지 이끄십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주의 손에 있으며, 주께 생명의 말씀과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미래가 있으며, 단순한 미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사 평생 주님의 길을 따라 걷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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