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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요나 4장 -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2024-10-23 4,370 约拿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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约拿书04章-约拿的忿怒和 神的怜悯
  • 1 这事约拿大大不悦,且甚发怒,
  • 2 就祷告耶和华说:“耶和华啊,我在本国的时候岂不是这样说吗?我知道你是有恩典、有怜悯的 神,不轻易发怒,有丰盛的慈爱,并且后悔不降所说的灾,所以我急速逃往他施去。
  • 3 耶和华啊,现在求你取我的命吧!因为我死了比活着还好。”
  • 4 耶和华说:“你这样发怒合乎理吗?”
  • 5 于是约拿出城,坐在城的东边,在那里为自己搭了一座棚,坐在棚的荫下,要看看那城究竟如何。
  • 6 耶和华 神安排一棵蓖麻,使其发生高过约拿,影儿遮盖他的头,救他脱离苦楚;约拿因这棵蓖麻大大喜乐。
  • 7 次日黎明, 神却安排一条虫子咬这蓖麻,以致枯槁。
  • 8 日头出来的时候, 神安排炎热的东风,日头曝晒约拿的头,使他发昏,他就为自己求死,说:“我死了比活着还好!”
  • 9  神对约拿说:“你因这棵蓖麻发怒合乎理吗?”他说:“我发怒以至于死,都合乎理!”
  • 10 耶和华说:“这蓖麻不是你栽种的,也不是你培养的;一夜发生,一夜干死,你尚且爱惜;
  • 11 何况这尼尼微大城,其中不能分辨左手右手的有十二万多人,并有许多牲畜,我岂能不爱惜呢?”

안녕하세요 여러분, 《요나서》의 마지막 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바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1. 요나가 믿은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서》 4:2)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요나는 왜 다시스로 도망쳤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요나가 다시스에 가서 예언을 선포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가 선포한 예언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회개에 따라 뜻을 돌이키신다면 참 곤란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속으로 ‘아이고, 내가 하나님께 농락당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니느웨 사람들이 실제로 회개했고, 회개하고 나자 큰일이 났습니다. 요나가 믿었던 하나님은 정말로 그런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신경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신경 씁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람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제가 요나였다면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제가 요나보다 나을 것은 별로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내 생명을 살려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풍성하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자, 하나님은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한 후 또다시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며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사람 안에 있는 그 완고하고 미련한 고집을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에 다행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사람을 짓밟아 죽이셨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 한두 번의 일입니까? 죄를 짓고 또 짓고, 범죄하고 또 범죄하며, 은혜를 받고 나서는 뒤돌아서서 곧바로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느낍니다! 저 역시 깊이 탄식하게 됩니다. 때로는 저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어째서 이렇게 풍성한 은혜가 있으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그토록 풍성한 은혜가 있었기에 제가 하나님의 손에 짓밟혀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짓밟아 죽이고자 하신다면 개미 한 마리를 짓밟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제 머릿속에는 한 가지 매우 지혜로운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제가 아주 비참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을 만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도 불행하고 곤고한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할 뿐,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잊어버립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을 찾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너무나 지혜로웠다고 봅니다. 먼저 그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생각이었는지 말씀드린 후, 그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저는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그분은 매우 능력 있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먹여 살리셔야 합니다. 둘째, 그분은 나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온몸에 근육이 가득하고 가슴부터 등까지 갈치 문신이 줄줄이 새겨진 조폭 두목을 찾아갔다고 해봅시다. 좌청룡 우백호 문신을 보면 누구나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런 자를 찾아간다면 호랑이 굴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저는 크고 두려우실 만큼 위대한 능력을 지니셨으면서도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교회에 처음 갔을 때, 그곳에서 부르던 찬양들—하나님의 풍성한 인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능력—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기도하듯 존귀와 능력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제가 찾던 분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그렇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쉽게 저버린다 해도, 그분은 여러분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며, 쉽게 분노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그곳에서 여러분이 회개하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2. 요나가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다

여호와여 이제 구하건대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서》 4:3)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습니다. 우리 중에 이런 사람이 없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이미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는데 어떻게 또 이러는 것입니까? ‘나를 배 밖으로 던지시오, 차라리 죽어버리겠습니다’ 하더니 결국 죽지 않자 또다시 성질을 부립니다. 요나의 이런 성격은 참 묘합니다. 걸핏하면 죽겠다고 하지만 결국 죽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차에서 멀쩡히 걸어 나온 뒤 ‘내가 왜 한 번에 죽지 않았을까?’라고 말합니다. 틈만 나면 죽고 싶다고 하지만 결국 죽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나가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께는 여전히 긍휼과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곧바로 죽게 내버려 두실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처음 얻었던 직장의 사장님은 참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삼형제가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날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있기는 한 거냐? 하나님이 있다면 벼락을 쳐서 나를 죽여봐라!” 여러분, 하나님 노릇 하기도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성미였다면 “벼락 맞아 봐라! 죽고 싶다고 했지? 자, 죽음을 주마”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꼴을 참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몹시 불쾌해하고 분노하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놀리시는 것입니까? 틀림없이 저를 골탕 먹이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선지자인데, 제가 한 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게 생겼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요나가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죽기를 구하며 “차라리 죽겠습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살면서 수많은 불행을 겪고, 사람들에게 속고 시달리다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왜 저를 막아서지 않으셨습니까?” 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남편을 잘못 만나 가정폭력을 당하면서 “하나님,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왜 저를 말리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짝이라고 확신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자매는 꿈도 꾸고 환상도 보고 목사님의 확증까지 받았다며 “하나님,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때는 마음이 참 평안했고 확증도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입니까?”라고 따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묻지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참 모순적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여러분 자신이 내린 선택인데, 애초에 무엇을 하다가 이제 와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이 죽기를 구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호흡이 여전히 붙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죽기를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두지 않으신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큽니까! 이것이 요나가 첫 번째로 죽기를 구했으나 죽지 않은 장면입니다.

3. 요나가 두 번째로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다

죽기를 구한 것이 세 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장에서 바다에 던져졌던 것까지 포함하면 정말로 세 번입니다. 세 번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세 번이나 죽기를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나가 분노하며 첫 번째로 죽기를 구하자, 하나님은 참으로 인내하시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서》 4:4)

요나는 하나님께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쳐다본 것입니다. 그 무시하는 눈빛을 아십니까? 저는 그런 눈빛을 자주 봅니다. 사람들이 저를 대할 때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그럽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서》 4:5)

요나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선포한 말이 이루어지도록 계속 기도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테니까.’ 그래서 초막을 짓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요나는 그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 했습니다. ‘하나님, 혹시라도 재앙을 내려 저들을 멸망시켜 주옵소서.’

우리 중에 이렇게 기도하는 분은 없습니까? 나를 속이고, 해치고, 이용해 먹고, 상처를 준 원수를 향해 “하나님! 저들을 멸망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멸하지 않으시니 기진맥진해집니다. 요나는 ‘내가 기도가 부족했나 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서 이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봐야겠다. 마귀보다 1분만 더 버티며 기도해서 내가 선포한 말을 이루어내야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한지라 (《요나서》 4:6-8)

요나는 박넝쿨이 벌레에 물려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또다시 완고한 고집이 발동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고집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적지 않으니, 절대로 요나를 본받지 마십시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나의 머리에 햇볕이 내리쬐자, 하나님은 적외선과 자외선 등 햇빛의 위력을 총동원하여 열 배나 더 강하게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돋보기를 햇빛에 비추면 종이를 태울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돋보기 초점을 맞추면 태양열로 종이를 태울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공중에 돋보기를 하나 가져다 두고 요나를 비추신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요나의 머리에 불이 붙어 타 죽지 않도록 조심하시면서, 그저 뜨겁게만 만드셨습니다. 그 뜨거움에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또다시 죽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이처럼 굴어도 하나님께는 여전히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태양을 내리쬐어 요나가 또다시 죽기를 구했는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왜 이토록 죽기를 좋아했을까요? 아마도 요나는 어릴 적 자라면서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아 죽기를 구하는 습관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차라리 죽자,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는 세상만사를 꿰뚫어 본 듯 세상의 모든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지만, 자신의 선지자 직분만큼은 대단히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이 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럼 죽어버리겠다’는 식이었습니다. 요나는 속으로 ‘니느웨에 재앙이 내리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왜 햇빛까지 내리쬐어 나를 괴롭히는가?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죽을지언정 자기 안의 논리와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만의 논리에서 벗어나기를 인도하고자 하셨고, 그에게 여전히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장의 주제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인 이유입니다. 만약 저더러 하나님 노릇을 하라고 했다면 괘씸해서 진작에 처치해 버렸을 텐데, 그 심정이 상상이 되십니까? ‘네가 나를 무시해? 내가 너 따위를 신경 쓸 것 같아? 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네깟 놈 죽는 게 대수겠어? 소원대로 해주마.’ 저승사자 같은 것을 보내서 단숨에 데려가 죽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입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제 생각과 논리를 절대적으로 고집하지 않으며, 제가 선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4. 요나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시며 그의 생각을 바꾸어 주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요나서》 4:9)

저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요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을 봅니다. 정말 똑같습니다. 자기 논리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제가 아무리 일깨워 주어도 소용이 없고 기어코 멸망의 길로 걸어 들어갑니다. 축복의 길로 가자고 하면 싫다고 합니다. ‘어떻게 복을 누리며 살겠습니까? 나는 내 옳음을 주장하렵니다. 내가 옳아서 죽음에 이를지라도 내 말이 맞습니다. 옳으면 천하를 다니고, 그르면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실을 보면 옳다고 우기다가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사람은 꼭 이렇게 고집을 부립니다. 자기 안의 그 ‘옳음(논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망가졌는지 아십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기 옳음을 따지는 사람은 다 어리석습니다. 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 어리석을까요? 그가 주장하는 옳음이란 결국 자신을 해치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따질 논리가 없다면 괴로울 일이 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예를 들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며느리가 늘 자신에게는 옳음이 없다고 여긴다면, 시어머니를 상대로 선악을 분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게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형제자매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직접 말하지는 않고 속으로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너무 죄송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죄송하다면 저와 왜 다투고 대립하겠습니까? 다른 형제자매들은 그 말을 곧이듣고 “목사님, 그 사람을 더 이상 나무라지 마세요. 목사님께 너무 죄송해하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죄송하다고요? 그렇다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혹이라도 나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미안해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자기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잘못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생명조차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겨루어 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가 무엇 때문에 오기를 부리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니느웨가 재앙을 당하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고,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 일본군과 같은 원수였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목사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멸망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지 마십시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그 재앙이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요나가 신경 쓴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자기 민족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재앙을 받기만을 바랐는데, 그것이 합당합니까? 죽기까지 화를 내도 합당하다니, 그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은혜도 없고 긍휼도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华人命定神学)은 비록 이름에 ‘화인(중화권)’이 들어가 있지만, 중화권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온 땅의 만민에게 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하나님께 이 사람을 멸하고 저 사람을 멸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축복하시고 저 사람도 축복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나에게 “네가 이렇게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여러 번 물으셨겠습니까? 깨우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도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그 생각이 합당합니까?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그 논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속인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하나님이 저 사기꾼들을 저주하셨으면 좋겠다’고 바라겠지만, 아무 소용없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시는 분도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회개하는 마음을 품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성내는 것이 옳습니까? 결코 옳지 않습니다.

5.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우리 중에는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된 형제자매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미 벗어나 회복된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벗어났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을 따르며, 선악을 분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을 멸하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십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고 나서 하나님을 잔혹한 분으로 결론지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시며, 여러분과 저의 생명을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나처럼 자기 논리만 고집한다고 해서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며, 니느웨 사람들처럼 잔인하다고 해서 무조건 멸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잔혹한 고통을 가했던 이방 민족들조차 그들이 회개했을 때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도리가 아닌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은 매우 잔인하여 경쟁 상대가 있으면 죽을 때까지 짓밟으려 합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보아도 상대를 완전히 매장시키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며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회개는 언제나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은혜와 긍휼이 충만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죽었을지 모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장은 마침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60만 명을 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참고 또 참으셨으나, 그들 스스로가 기어코 죽음의 길로 파고들어 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인을 즐기시는 분임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기를 바라셨고, 애굽 사람들도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실 수는 있지만, 바로 스스로 완악해지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어리석게 굴지 말고, 그렇게 완악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살 길이 열립니다. 사실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도 뒤돌아서서 하나님을 모른 체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셨는데도 뒤돌아서서 하나님을 하찮게 여깁니다.

예전에 전신 마비로 자리에 누워 공장 운영도 파탄 난 분이 계셨는데, 한 친구의 인도로 우리 모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신 후 함께 기도해 주었더니, 침상에서 일어나 수년 동안 앓던 마비 증세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자마자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그런 자인 줄 모르셨겠습니까?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왜 고쳐주셨을까요? 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아끼셨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그분과 계속 함께 기도하고자 했으나, 그 사람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과 한가하게 신앙생활이나 하겠습니까? 사업해서 돈을 벌어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은 매우 흔합니다. 우울증을 앓다가 우리와 함께 기도하여 나았는데, 결국 자기 사업에 바빠서 다시 돈을 벌러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은 그 병이 다시 도져서 고통당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하게 몰아세워도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우리는 이 기회를 굳게 붙잡아야 하며,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번이나 죽기를 구했던 요나에게도 이토록 인내하셨고,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찌 우리가 경외하고 예배해야 할 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총명함과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복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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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米
约拿书 第四章,查经分享,音频放错了。音频是弥迦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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