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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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2023-02-12 9,857 智慧与悟性系列 悔改 知识 发酵 感染力 付代价 行神迹

《答疑解惑》

1. 서론

  1. 사람이 지혜로워지려면 반드시 자신이 바로잡지 못했음을 알아야 하고, 틀렸다면 구해야 하며,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고 겉으로는 매우 영적으로 보였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2. 본문 말씀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5-12)

3. 기도

4. 본문 배경

  1. 바리새인들은 말은 매우 잘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시인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대가를 치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2. 사람 안의 가치 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대가를 치르기 어렵습니다. 만약 사람 안에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가 담겨 있다면 해낼 수 있습니다.

5. 바리새인의 특징

  1. 특징 1: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2. 특징 2: 겉치레를 좋아하고, 겉모습만 꾸미기를 좋아한다.
  3. 특징 3: 사람을 끌어들여 입교시키기를 좋아하는데, 곧 눈먼 인도자들이다.

6. 회개가 근본이다

  1. 회개가 근본이며, 고치려면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하듯 철저히 고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날 때부터 자리 잡은 논리 체계가 골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7. 종교적 행위를 조심하라

  1. 많은 사람이 금식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눈멂과 무지일 뿐입니다.
  2. 종교적 행위를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

8.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한다

  1.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시고, 자비를 원하시며, 제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1.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함께 새로워져야 하며, 낡은 가죽 부대를 새 가죽 부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새 부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할 때 터지게 하되 심하게 터지게 만들 것입니다.
  2. 옛것을 고수하지 말고,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핵심 단어

  1. 하나님의 뜻
  2. 종교적 행위
  3. 회개가 근본이다
  4.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부인함
  5.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
  6. 새 포도주와 새 부대
  7. 사람의 논리 체계
  8.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9. 바리새인의 누룩
  10. 바리새인의 특징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다시 논문 한 편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논문은 제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오늘 나눌 주제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 나눌 주제는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제 안에는 매우 큰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매우 놀랍게 발견한 사실은, 그들이 성경을 읽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고요? 율법을 지키다가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고요?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자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전하시는 설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맞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에게 자주 가르칩니다. 만약 성도들을 가르칠 때 누군가 여러분에게 “나는 유 목사님의 설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맞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 제 권면을 꼭 들으십시오. 반드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또 그렇게 말하거든 이렇게 전하십시오. “유 목사님 본인도 자기가 말한 것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어떤 분이 제게 댓글을 남겼습니다. “당신 자신도 자기가 전하는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다고요? 내게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만한 그런 능력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에서는 우리가 늘 온전히 바르게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늘 전심으로 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전하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내용도, 제가 지난 1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비로소 아주 작은 일부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논리를 아시겠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늘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늘 그 자리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다 맞게 깨달았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지극히 자만하여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하나님조차 손을 대실 수 없을 지경인데, 하물며 여러분과 저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사람이 지혜로워지려면 반드시 자신이 온전히 바로잡지 못했음을 알아야 하고,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어디가 맞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그가 다 맞게 말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에 동의합니까? 어떤 사람은 “유 목사님, 저는 목사님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만두십시오. 나와 같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차라리 예수님과 같아지십시오. 저와 같다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파고들어 간다면, 이 일은 참으로 곤란해질 것입니다. 제가 던지는 질문들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단점이 하나 있는데, 꽤 심각한 단점입니다. 그 심각한 단점이란 바로 근본까지 파고들어 묻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설교를 듣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라고 하기에 제가 “어느 편 설교가 좋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빤히 쳐다보며 한참 동안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아, 저는 당나라 시와 송나라 사를 참 좋아합니다.” “자, 그럼 한 편 외워 보십시오. 어떤 작품입니까?” 외우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터무니없는 헛소리 아닙니까? “선생님, 저는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제목이 무엇입니까? 어떤 책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아, 무슨 무슨 책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럼 거기서 무슨 말을 하던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면접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와서 제 앞에서 아는 체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와야 합니다. 왜일까요? 저는 젊었을 때부터 남에게 속는 것을 유난히 싫어해서 수십 년 동안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법을 연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이 다 함께 사장을 속이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아휴,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사장을 속이는 방식은 너무나 터무니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황하게 늘어놓은 PPT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PPT를 50여 장, 100여 장씩 가져와서 제게 한 장씩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됐습니다, 됐어요”라고 합니다. 제가 주재하는 회의라면 저는 “됐습니다, 제게 이런 것 보여 주지 마십시오. 당신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는 것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아, 당신의 방식은 일론 머스크와 좀 비슷하네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머스크에게 배운 것인지, 그가 저에게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PPT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근 류창둥(刘强东)도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온갖 거창한 전문 용어로 PPT만 잔뜩 만들어 오는데, 결국 돌려 말하지 말고 무슨 문제를 말하려는 것인지, 어떤 문제에 부딪혔는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말하십시오. 속이지 말고 몇 마디로 끝냅시다.” 타오바오에서 산 PPT 템플릿 잔뜩 가져오지 말고, 인터넷에서 ChatGPT에 물어보고—여러분 ChatGPT 아시지요—그런 것들을 가져다가 복사해서 붙여넣고 저에게 읽어 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겠지요. 제 템플릿이 여러분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어제도 2GB짜리 PPT 템플릿을 샀습니다. 제게는 차고 넘칩니다. 하나씩 뜯어보면 “보십시오, 이거 거기서 베낀 것 아닙니까? 복사해서 붙여넣은 걸 왜 저한테 줍니까?” 2GB PPT 템플릿이 고작 8위안입니다.

어제 제가 한 자매님의 업무 보고서 수정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 업무 보고서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고급 관리직이 되면 사장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장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보고서는 단순 노무자라면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매가 업무 보고를 해야 한다며 제게 어찌해야 할지 묻길래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 사장이 PPT를 좋아합니까?” “네, 좋아합니다.” “그럼 PPT 템플릿을 하나 찾으십시오. 사장이 무슨 색을 좋아합니까? 주황색을 좋아합니까? 그럼 주황색 템플릿으로 만드십시오. 주황색 템플릿으로 하되, 색상을 절대 잘못 쓰면 안 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PPT를 다룰 때 제 방식을 따르려면 완전히 흑백으로 하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색상을 절대 틀리지 않는 PPT를 만들어야 합니다. 왜일까요? 예를 들어 싱텔(Singtel)은 빨간색인데, 경쟁사인 스타허브(StarHub)는 초록색입니다. 그런데 사장 앞에서 덜컥 색상을 잘못 쓰면 앞으로 큰일 납니다. 초록색을 쓰면 끝장입니다. 낭패를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곤란해집니다! 그러므로 절대 색상을 잘못 쓰면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도록 그냥 흑백으로 합니다. 왜일까요? 트집 잡힐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색상을 잘못 썼다가는 시작부터 망치게 되니, 차라리 제 흑백이 낫습니다. 비록 흑백이지만 제 안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부 제 손으로 직접 만든 것입니다. 제 콘텐츠는 PPT에서 짜깁기해 낸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스로 연구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 인공지능이 얼마나 뜨거운지 아십니까? 인공지능 열풍이 대단합니다! 많은 사람이 유행에 편승하기를 좋아합니다. 아시지요? 유행 편승 말입니다. 입만 열면 ChatGPT, OpenCV, 인공지능, 자연어 처리 등을 들먹이는데, 정말 제대로 알고나 있습니까?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5G니,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온통 이런 용어들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마케팅을 하는 중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마케팅을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케팅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똑같은 것도 전문성이 될 수 있고, 똑같은 것도 속임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겉치레를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다가는 큰 코 다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사장을 속이던 수법을 그대로 가져와 하나님을 상대로 장난을 칩니다. 도를 넘지 마십시오. 도가 지나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며칠 전 누군가 제게 “선생님, ‘탈구(脫扣)’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십니까? 체인이 벗겨져 낭패를 본다는 뜻입니다. 도를 넘지 마십시오. 도를 넘으면 골치 아파집니다. 여러분의 사장은 교수일 수도 있고 기업가일 수도 있으니 속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그가 전지전능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장은 속일 수 있고, 사장은 당신의 PPT 템플릿이 돈 주고 산 것인지, 당신의 논문이 ChatGPT가 쓴 것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려 하고, 하나님께 사기라도 칠 듯이 구는 것을 보며 몹시 놀라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 목사님, 제가 하는 것의 90%는 목사님과 똑같습니다.” 제게 와서 그렇게 말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나머지 10%는 무엇입니까? 그 수치는 어떻게 계산한 것입니까?” 따져 물으면 버텨내지 못합니다. 전부 주먹구구식으로 지어낸 말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지어내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는데, 이것을 가리켜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옳습니다.” 어휴, 정작 저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어찌 압니까? 제가 거듭 강조하지만, 제가 전하는 말이 반드시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영원히 굳게 서 있습니다. 절대 남이 씹어 준 밥만 받아먹으려 하지 마십시오. 제 설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여러분 자신이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항상 옳게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줄곧 여겼다면 화인명정신학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화인명정신학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체면이 깎이지 않습니까? 만약 이 말이 인터넷에 퍼지면 어쩌려고 그럽니까?”라고 합니다. 인터넷에 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일입니다. 널리 퍼져서 그 사람이 반드시 다 맞지는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제가 그따위 체면을 챙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 동안 제게 가장 큰 의문이었던 것은 ‘왜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바리새인이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바리새인은 성경 읽기, 기도하기, 영적인 일들을 적지 않게 행했고, 금식 기도와 모임도 열심히 했지만 결국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내 앞에서 그런 수작 부리지 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짓을 하다가 나중에는 나까지 십자가에 못 박을 셈입니까? 그러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다가도 바리새인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라 할지라도 이 관문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바리새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다가 큰 낭패를 보지 않을 수 있는지가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제 믿음과 바리새인의 믿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저는 바리새인이 되지 않으려고 각별히 주의합니다. 훗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들은 얼마나 믿음이 넘쳤습니까? 여러분, 그들이 얼마나 당당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보셨습니까? 그 확신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엄청난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사람을 보았다면, 감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다리 저는 사람을 걷게 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며,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런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믿음이 커야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제가 만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역시 그만큼이나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확신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아,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는 이미 주님을 믿었으니 당연히 구원받았지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면 제게 화를 냅니다. “어째서 안 보인다는 겁니까?” 제게 화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사두개인의 누룩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나누고, 잠시 후에 사두개인에 대해서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조금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나누고자 합니다. 비록 작은 깨달음이라도 좋습니다! 깨달은 만큼 전할 터이니, 제가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리새인의 이 누룩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5절부터 12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훌륭한 말씀이므로,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점차 깨달아 가며 깊이 묵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2. 본문 말씀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5-12)

3.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셔서 주님의 길을 본받아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에 대해 더 분명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주님의 뜻을 붙잡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길이 아무리 행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가장 귀한 보배이시니,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우리의 생명을 대가로 바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를 도우사 입술로는 주님을 섬기나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에서 건져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판에 새겨 주시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이 세상에서 주님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나의 하나님! 저를 인도하사 평생토록 인도해 주시고, 사람의 논리 체계와 마귀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게 하사, 단지 입술로만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시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을 뵙는 그날까지 제 평생을 끊임없이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에는 매우 기이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의 흐름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이 매우 대단히 중요한 말씀임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16장은 깊이 묵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두 가지 나라, 두 가지 가치 체계, 두 가지 추구》라는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체를 강해한 성경공부 책으로, 책이 너무 두꺼워져서 상·하 두 권으로 묶어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마태복음 전체를 매우 깊이 있게 요약했는데, 그 요약이란 바로 두 가지 나라, 두 가지 가치 체계, 두 가지 서로 다른 추구라는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 나라의 가치 체계를 품은 채 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 한다면, 여러분은 매국노이거나 반역자이거나 첩자이거나 이중간첩일 뿐입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 아십니까? 이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다룹니다. 그들은 “표적을 하나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표적을 행하시는데, 왜 하필 여기에 와서 또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매우 교활하여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당신은 선한 선생님이십니다”라고 떠봅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합니다! 왜 이들이 표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들은 또 한 번 해보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시자 그들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이 계산이 어떻게 된 거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면, 떡 일곱 개로는 7천 명을 먹여야 맞지 않나? 비율이 안 맞잖아! 그의 표적에는 문제가 있어.’ 여러분, 사람들이 사소한 꼬투리를 잡기 좋아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딱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고는 예수님께 표적을 또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표적은 마술처럼 장난삼아 노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와 여행을 갔을 때 심심풀이로 마술을 보여 주며 흥을 돋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며, 떡을 위해 오신 분도 아닙니다. 오늘 떡 하나 만들고, 내일 떡 하나 만들고, 모레 또 떡을 만들 바에야 차라리 떡집을 차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누군가는 예수님께 “예수님, 이 떡 참 맛있네요. 사업 계획서를 쓰면 투자할 사람이 줄을 설 것입니다”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두 가지 논리 모두 떡집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떡집 사장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소스 사업을 하거나, 간장과 양념을 더하고 오리 껍질을 곁들여 북경오리 구이를 파는 편이 나을 뻔했습니다. 벽에 걸린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고 아이에게 “이분이 누구니?” 하고 물었을 때 “요리사요”라고 대답하는 격입니다. 거기에 패키지 상품으로 상장시키고 지분 구조를 설계하여 적은 자본으로 거대한 상업 제국을 일으킨다면 참으로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행하셨는데, 날씨의 색깔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표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별하지 못합니까? 이 표적들을 행하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와!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참된 보배로구나! 떡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짜 보배이시구나!”라고 고백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양식이시며,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구하지도 않은 채 그저 셈만 하고 있었습니다.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였으니 떡 열네 개로는 8천 명을 먹여야지.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였는데 왜 일곱 개로는 4천 명뿐인가?’ 이런 쓸데없는 계산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계산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일까요? 사람들이 구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표적임을 분별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치유를 받는 목적은 단지 낫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 예수님이 참 보배이시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배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올바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상고하지 않고 그저 “표적을 하나 더 보여 주십시오. 떡을 한 번 더 만들어 보시지요”라고만 합니다. 양념까지 곁들여 달라는 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바로 그들의 가르침, 즉 그들의 교훈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매우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오늘날 교회에 가서 들어보십시오.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러시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끝장입니다. 그들의 생각 수준이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준은 떡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반죽조차 부풀지 않은 떡의 높이에 불과했습니다.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끙끙 앓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너희마저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너희 역시 흐리멍덩하구나. 너희 눈에 보이는 떡이나 바리새인들 눈에 보이는 떡이나 매한가지니, 차라리 그 떡으로 얼굴을 덮어 버리는 게 낫겠다.’ 눈이 가려져 머릿속에 온통 떡 생각뿐입니다. ‘이 떡이 맛있다, 저 떡이 맛있다.’

만약 산시(陕西)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양고기 포모(泡馍)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 이 떡 참 좋은데 양고기 좀 더 넣어 주실 수 없나요? 파도 좀 썰어 넣고 양념장을 쳐서 푹 끓여내면 근사한 양고기탕이 될 텐데요.” 여러분, 저도 양고기 포모를 참 좋아합니다. 맛있지 않습니까! 저도 바리새인처럼 머릿속이 온통 양고기 포모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온통 떡 생각뿐이니, 말만 꺼내면 엉뚱하게 알아듣고 머릿속이 온통 떡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이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교훈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경계하라고 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겉으로 듣기에는 참으로 그럴듯하고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입으로 말하기는 참으로 쉽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렐루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만난 많은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할렐루야”를 외칠 때면 사람이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우렁차게 변하는 것을 보며 저는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달라질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달라지고 사람도 달라지며 우렁차게 변합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5분, 10분, 3일이나 5일만 연습하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정의를 설명하신 뒤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자 베드로는 우쭐해졌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 장 학생, 일어나서 대답해 봐” 해서 대답했더니 “와, 아주 잘 맞혔다!” 하며 칭찬해 주자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으쓱해져 칭찬 스티커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이런 인정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방금 전까지 신이 나 있던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해 놓고 말입니다. 말하기는 쉬우나 생사를 초월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아십니까? 사기꾼보다 더 그럴듯하게 말을 잘합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은 전부 입술의 기술에 불과합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입으로는 “아,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기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기는커녕, 가진 가산을 다 팔아 주님을 따르라고만 해도 죽을 만큼 힘들어합니다. 오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내려놓으면 다 무너집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어느 날 진짜로 내려놓아도 무너지지 않는데 말입니다. 제 말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입술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는 쉬우나, 오늘날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명의 대가를 치르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머릿속에 사람의 논리 체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끝이다. 절대 죽으면 안 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촛불 꺼지듯 끝장이다.’ 그래서 제가 사람이 죽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니, 여러분은 제가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 사람은 남이 죽었는데도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다’며 저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늘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도 죽지 못했는데, 죽기 싫어하던 사람은 제게 인사 한마디 없이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뜻은, 사람 내면의 가치 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힘들지요?” 당신 안에 사람의 가치 체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을 행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안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논리 체계가 담겨 있다면,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의 내면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앞서 마태가 기록한 이 본문은 참으로 은밀하면서도 수준 높게 기록되었습니다. 마태가 이 글을 쓸 당시 베드로가 아직 살아 있었기에,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며 찾아올까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낮에 켕기는 짓을 하지 않으면 밤중에 베드로가 문을 두드려도 두렵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 구절을 써놓고 나서 베드로가 진짜 찾아와 “당신, 무슨 뜻으로 이렇게 썼소? 말해 보시오, 무슨 뜻이오?”라고 묻는다면 마태는 “별 뜻 없습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했을 뿐입니다. 먼저 당신을 칭찬하지 않았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당신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으니, 당근을 준 뒤에 뺨을 호되게 때린 격이지요. 그러니 저도 특별히 덧붙인 말은 없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가치 체계가 여전히 떡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죽는 단계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높이는 어느 수준입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닌 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죽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제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농담하는 줄로 여기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생사에 대한 관점 자체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리라” 하실 때 “와, 좋습니다, 예수님!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군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이것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복된 길임을 안다면 어찌 갈등하겠습니까? 여러분, 어찌 번민하겠습니까? 사람이 더 이상 아등바등 갈등하지 않고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게 살겠습니까?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하겠습니까? 기꺼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아닙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4-26)

이 논리는 더없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읽고도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서서히 고쳐 나가십시오. 조금씩 고쳐서 바르게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복입니다.

이생의 차원에서 영생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면, 인간이 세운 의료 체계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치유의 체계를 존귀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역에서 치유와 축사가 왜 강력하게 일어나는지 점차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치유 체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배경입니다.

결국 본문 전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수제자이자 맏형 격인 인물을 통해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험해 보니 입으로 떠드는 실력은 대단했지만, 진검승부를 벌여야 할 순간에는 어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거듭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두어라. 오늘 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사람의 논리 체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의 누룩과 교훈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나 좋고 쉽습니까? 세상에서는 말로 때우기가 참으로 수월합니다.

어느 코미디언의 콩트 중에 참으로 재미있고 와닿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1억이 있다면 기부하겠습니까?” “1억이 있다면 당연히 기부하지요.” “그럼 10억이 있다면 기부하겠습니까?” “당연히 10억을 기부하지요.” “그럼 당신 차부터 먼저 기부하십시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세워둔 차를 돌아보며 “그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1억도 기부한다면서 왜 차 한 대는 안 됩니까?” “차는 진짜로 내게 있지만, 1억은 없으니까요.” 장난치는 것입니까? 차는 실제로 가지고 있지만, 1억은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억이 있든 100억이 있든 1000억이 있든 다 기부하겠다고 입으로는 쉽게 떠벌립니다. 어차피 없으니까요. 허풍 떠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 풍조가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입술로는 참으로 그럴듯하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합니까?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다 무너집니다. 실제로 가진 것이 없으니 쉽게 떠드는 베드로의 모습은 ‘1억 기부’를 외치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바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5. 바리새인의 특징

바리새인의 특징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을 펴서 제 설교를 들으면서 빠르게 훑어보십시오. 마태복음 23장 서두에서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23:2-3)

이미 본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모습이 가득합니다.

어떤 형제가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다들 “형제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Brother, I will pray for you)”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 달 뒤 암이 악화되어 다시 만났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네, 그럼요(Oh, YES)”라고 대답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얼굴빛만 봐도 기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기도하셨습니까?” “그날 당신이 물어본 날 기도했습니다.” 메신저 대화방에 “주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May the Lord heal you!)”라는 글 한 줄 남기는 것으로 끝냅니다. 이런 식으로 때우니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 형제를 위해 철저하게 사역했습니다. 틈만 나면 그를 데리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처에 다니며 제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듣기에도 참 민망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형제에게 “이제 빈둥거리지 마십시오. 단체 대화방에 타오바오에서 산 PPT 템플릿 마냥 인터넷 어디선가 긁어온 글들을 복사해서 붙여넣는 짓은 그만하십시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며 대가를 치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와의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를 진심으로 품었지만, 그는 거짓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아무리 밖으로 돌아다니며 “어느 목사님이 어떻더라” 하고 떠들어대도, 정작 자신은 제가 가르친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의 첫 번째 특징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두 번째 특징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영적인 척 꾸미며, 경문 띠를 넓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랍비(선생님)’라 칭함 받기를 좋아합니다. 겉치레만 좋아하다 보니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오면 도망쳐 버립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와 매우 닮지 않았습니까? 명예만 좇고 겉모습만 꾸미는 것, 이것이 바리새인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바리새인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끌어들여 입교시키고는 결국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교파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대조해 보면 90%는 일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들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16절, 17절, 19절, 24절, 26절에서 계속해서 ‘눈먼 인도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눈먼 인도자들, 무지한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날마다 겉치레만 일삼고 내면에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링 위에 올라가면 상대의 주먹 한 방에 즉각 바닥에 쓰러집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떱니다. 결국 그들은 ‘눈먼 인도자’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참으로 흥미로운 분들이 있어 오늘 제가 조금 바로잡고자 합니다. 여러분, 제가 바로잡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부디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배움과 무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심각한 오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공부를 강조하시는데, 사람이 지식을 얻게 되면 교만해지지 않습니까?” 지식을 얻으면 교만해진다고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입니까? 저는 그런 해괴한 논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사람이 배워서 지식을 얻어 눈먼 상태를 벗어나면 교만해지고, 결국 조심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식이 아닌 허세나 부리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깊고 탁월한 사람이 거만하게 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어설프게 아는 자, 무지한 자가 오만방자하게 굽니다. 무지한 자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리새인이 되었습니까?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참된 보배이심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사건의 본질을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조금만 깊이 질문해 보아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데, 머릿속에 온통 사람의 논리만 가득 차 있으니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화인명정신학이 왜 배움을 강조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무지해집니다. 무지해지면 눈먼 자가 되고, 눈먼 자가 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을 너무 많이 읽어서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된 것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깨달아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소매에 성구함이나 달고 다녔을 뿐 실제로 말씀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장에 책을 가득 꽂아두었지만 제대로 읽었습니까? 겉치레로 진열만 해두었을 뿐 내면의 논리 체계는 엉망진창입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배움의 중요성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근본까지 파고들며 공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야 바리새인이 되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척하며 주먹구구식으로 지어내 말하면 결국 무지한 맹인이 되고 맙니다. 무지하고 눈먼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헛소리나 늘어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을 공부한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어떻게 배우는지 아십니까? 교수님이 졸업할 때까지 설교 52편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1년이 52주이니 52편만 준비하면 평생 목회 현장에서 적당히 버티며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적당히 버틴다고요? 그렇게 때우다가는 큰 탈이 납니다. 무지한 상태로 하나님을 섬기려 드는 자가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아는 사람은 결코 무지한 자가 될 수 없지만, 자칫 바리새인이 될 위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무지하여 눈먼 자는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아도 영원히 ‘떡’만 볼 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깨달으셨습니까?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라고 시인할지라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때가 오면 “그리 마옵소서”라며 물러서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걸어갈 때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총명함으로 하나님을 충만히 알아가야 하며, 주님을 위해 생명을 대가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우리는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제 안에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방심하면 금세 물들고 맙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조금만 묻어도 온 덩이에 퍼져 부풀어 오르고 머릿속을 온통 잠식해 버립니다. 결국 겉만 부푼 찐빵처럼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제 자신을 경계합니다.

6. 회개가 근본이다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전에 잘못 살았다면 지금 고치면 됩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바리새인이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요한이 그들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3:7-9)

알아들으셨습니까? 회개가 근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를 단지 ‘주님을 영접할 때 단 한 번 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후로는 전혀 자신을 고치지 않는데,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회개는 평생토록 자신을 고쳐 나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의 골수 깊이 새겨진 옛 습관들은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겪어야만 고쳐질 수 있습니다. 제 안의 결점들도 뼈를 깎는 아픔 없이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해서만 고쳐질 수 있습니다. 회개는 평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 안에는 처음에 세상의 논리가 100% 차 있다가, 90%로 줄고, 80%로 줄어들면서 하나님의 논리가 그 자리를 채워가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잃어버린 땅을 끊임없이 수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온 영과 온몸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뼛속 깊이 박힌 체계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역자들에게 자주 직언합니다. “당신의 문제는 골수 깊이 박혀 있습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선생님, 왜 제게 믿음을 심어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 상태에서 헛된 확신만 더해지면 어디로 빗나갈지 모르는데 어떻게 무조건적인 지지만 보내겠습니까? 믿음은 그렇게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히 회개하지 못했음을 직시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 안의 옛 논리 체계는 골수 깊이 박혀 있어 실로 뼈를 깎아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표적을 보고 하나님을 경험했으면서도 삶이 변했습니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질병이 다시 재발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왜 목사님의 기도가 효력이 없지요?” “어찌 효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입만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 주님이 당신의 삶을 다스리려 하시면 ‘그건 안 됩니다’라며 물러서지 않습니까?” 입만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조금 고쳤다고 끝난 것이 아니며 갈 길이 멉니다. 또 조금 고쳤다 해도 여전히 멀었습니다. 끊임없이 고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태도가 발라야 합니다. 뼛속 깊은 옛 체계를 뜯어고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요단강까지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영적인 체험을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며 자기 자랑거리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행위를 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7. 종교적 행위를 조심하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둘 다 금식 기도를 자주 행했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태복음 9:14)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자주 금식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마저 이상하게 여기며 “우리는 자주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금식 기도 자체를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했다며 제게 자랑했습니다. 열흘째 되던 날 제가 “눈앞에 별이 보입니까?” 하니 “안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스무 날째 되던 날 “대낮에도 별이 보입니까?” 하니 “아직 안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루에 한 끼씩 밥을 챙겨 먹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씩 먹는 것을 어찌 금식 기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죽지 않고 멀쩡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세 끼 죽을 챙겨 먹는 것을 금식 기도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무릎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꿇어앉아 기도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눈멂과 무지일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다이어트에 불과합니다. 다이어트하는 것을 금식 기도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목회자 앞에서는 체면을 세우고, 살이 빠지니 친구들 앞에서도 뽐내려는 것 아닙니까? 겉으로 말하기는 참 그럴듯합니다. 남에게 과시하는 헛된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본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

8.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긍휼을 베푸셨습니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2)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며 깨끗이 나았습니다!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화인명정신학의 치유와 축사 사역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질병의 억압에서 온전히 자유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질병의 결박에서 풀려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보배이시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가장 복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붙잡으십시오. 어떤 교회들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자매가 극심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이 교회 저 교회 견학만 시키고 정작 그녀의 문제는 전혀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는 치유와 축사를 해주지 않고 오직 외부인들에게만 해주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긍휼입니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성도에게 “그럼 교회를 탈퇴한 뒤에 외부인 신분으로 다시 찾아가 보십시오. ‘이제 교인이 아니니 저를 위해 치유 축사 기도를 해 주십시오’라고 해보십시오”라고 조언해 준 적도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 중풍병자, 죽었던 야이로의 딸…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유받는 역사,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본질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행하는 금식이나 무의미한 종교적 행위들을 멈추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의 실체를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의 온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원리입니다.

9.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이 말씀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겉치레 금식을 즐겼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16-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며,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는데도 우리의 내면이 여전히 낡은 부대로 남아 있어 하나님과 함께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결국 심하게 찢어지고 완전히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믿고 나서도 온갖 문제에 부딪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부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옛 세상의 논리 체계를 고수하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극심한 파괴와 혼란이 일어납니다.

오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새 부대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큰 혼란과 심각한 파괴를 일으킬 것입니다. 가치관이 곧 누룩입니다. 바리새인의 가르침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탈을 쓰고 있지만 본질은 세상의 논리 체계에 불과하며, 이것은 온갖 변질과 타락을 낳습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 구원받지 못했다’ 하는 식의 허황된 확신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런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날마다 빚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새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새 가죽 부대로 변하여 날마다 새로워질 때 터지지 않고 보전됩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십시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고 경계하는 길입니다. 이 누룩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거짓된 논리 체계가 우리를 잠식하여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찬양 한 장을 부르고 헌금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헌금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시고 최고의 자리에 앉으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판에 새겨져야 합니다. 헌금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이 본질입니다. 물질의 헌금은 그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달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자가 되십시오. 물질뿐 아니라 온 생명을 주님께 바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평생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시간 다 함께 손을 들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올려드립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제 마음판에 깊이 새겨 주시고, 주님의 뜻이 제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저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맡기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것이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선택임을 압니다. 오늘 저의 헌신을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제 자신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오니 주님의 소유 삼아 주시고, 주님 앞에 손을 들고 온전히 굴복하오니 온 맘 다해 주님만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시대에 저를 일으키사 주님의 영광을 온 땅에 나타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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