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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사도행전 17장 -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

2023-09-13 44,516 使徒行传 使徒行传第十七章 使徒行传17章 以信心为本 信靠神的大能 不要与人辩论 神迹奇事随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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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徒行传17章-帖撒罗尼迦的骚动
  • 1 保罗和西拉经过暗妃波里、亚波罗尼亚,来到帖撒罗尼迦,在那里有犹太人的会堂。
  • 2 保罗照他素常的规矩进去,一连三个安息日,本着圣经与他们辩论,
  • 3 讲解陈明基督必须受害,从死里复活;又说:“我所传与你们的这位耶稣就是基督。”
  • 4 他们中间有些人听了劝,就附从保罗和西拉,并有许多虔敬的希腊人,尊贵的妇女也不少。
  • 5 但那不信的犹太人心里嫉妒,招聚了些市井匪类,搭伙成群,耸动合城的人闯进耶孙的家,要将保罗、西拉带到百姓那里。
  • 6 找不着他们,就把耶孙和几个弟兄拉到地方官那里,喊叫说:“那搅乱天下的也到这里来了,
  • 7 耶孙收留他们。这些人都违背凯撒的命令,说另有一个王耶稣。”
  • 8 众人和地方官听见这话,就惊慌了;
  • 9 于是取了耶孙和其余之人的保状,就释放了他们。
  • 10 弟兄们随即在夜间打发保罗和西拉往庇哩亚去。二人到了,就进入犹太人的会堂。
  • 11 这地方的人贤于帖撒罗尼迦的人,甘心领受这道,天天考查圣经,要晓得这道是与不是。
  • 12 所以他们中间多有相信的,又有希腊尊贵的妇女,男子也不少。
  • 13 但帖撒罗尼迦的犹太人知道保罗又在庇哩亚传 神的道,也就往那里去,耸动搅扰众人。
  • 14 当时弟兄们便打发保罗往海边去,西拉和提摩太仍住在庇哩亚。
  • 15 送保罗的人带他到了雅典,既领了保罗的命,叫西拉和提摩太速速到他这里来,就回去了。
  • 16 保罗在雅典等候他们的时候,看见满城都是偶像,就心里着急;
  • 17 于是在会堂里与犹太人和虔敬的人,并每日在市上所遇见的人,辩论。
  • 18 还有以彼古罗和斯多亚两门的学士,与他争论。有的说:“这胡言乱语的要说什么?”有的说:“他似乎是传说外邦鬼神的。”这话是因保罗传讲耶稣与复活的道。
  • 19 他们就把他带到亚略·巴古,说:“你所讲的这新道,我们也可以知道吗?
  • 20 因为你有些奇怪的事传到我们耳中,我们愿意知道这些事是什么意思。”(
  • 21 雅典人和住在那里的客人都不顾别的事,只将新闻说说听听。)
  • 22 保罗站在亚略·巴古当中,说:“众位雅典人哪,我看你们凡事很敬畏鬼神。
  • 23 我游行的时候,观看你们所敬拜的,遇见一座坛,上面写着‘未识之神’。你们所不认识而敬拜的,我现在告诉你们。
  • 24 创造宇宙和其中万物的 神,既是天地的主,就不住人手所造的殿,
  • 25 也不用人手服侍,好像缺少什么;自己倒将生命、气息、万物,赐给万人。
  • 26 他从一本(本:有古卷是血脉)造出万族的人,住在全地上,并且预先定准他们的年限和所住的疆界,
  • 27 要叫他们寻求 神,或者可以揣摩而得,其实他离我们各人不远;
  • 28 我们生活、动作、存留,都在乎他。就如你们作诗的,有人说:‘我们也是他所生的。’
  • 29 我们既是 神所生的,就不当以为 神的神性像人用手艺、心思所雕刻的金、银、石。
  • 30 世人蒙昧无知的时候, 神并不监察,如今却吩咐各处的人都要悔改。
  • 31 因为他已经定了日子,要藉着他所设立的人按公义审判天下,并且叫他从死里复活,给万人作可信的凭据。”
  • 32 众人听见从死里复活的话,就有讥诮他的;又有人说:“我们再听你讲这个吧!”
  • 33 于是保罗从他们当中出去了。
  • 34 但有几个人贴近他,信了主,其中有亚略·巴古的官丢尼修,并一个妇人,名叫大马哩,还有别人一同信从。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17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도행전》도 벌써 절반을 넘겼고, 남은 부분은 더욱 빠르게 배워나갈 것입니다. 3시간 동안 기차를 탈 때, 첫 한 시간이 가장 느리게 가고, 1시간 반이 지나고 나면 남은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평생 70, 80세를 살면서 전반부의 날들은 하루가 더디게 가더니, 후반부의 절반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갑니다. 어릴 때는 시간이 참 더디게 가서 다들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그 일 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왜 아직도 설날이 안 오나' 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7장을 읽어보면, 누가는 자신의 견해를 결코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가 나쁘다거나 저기가 아주 좋다는 식으로 자기 관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훗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역사가가 되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고,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썼듯이 그들은 모두 역사가에 속합니다. 누가도 사마천과 대략 비슷한 시대의 역사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논설문이 되어 버립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제멋대로 허튼소리를 해서는 안 되고, 은연중에 자신의 관점을 녹여 넣을 뿐입니다. 누가 역시 은근하게 자신의 관점을 담아냈습니다. 역사가들에게는 대체로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신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행간에 그 관점이 묻어난다는 점입니다. 사마천도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전하는 핵심은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것은 다 잘 못해도 공부는 제법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결국 누가의 관점을 찾아냈습니다. 여러분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이 점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변론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본래 변론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원해서요!" 어떤 사람이 "왜 카레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그 답 역시 "좋아서요!"입니다. 이런 것에는 특별한 '왜'가 없습니다. '왜'를 따지기 시작하면 복잡해집니다. 그저 "내가 원해서요"라고 하면 수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과 변론하지 마십시오. 한참을 변론해 봤자 믿음만 사라질 뿐입니다. 변론을 다 끝낸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서 섬기게 하신 것입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왜 하나님을 섬깁니까?"라고 묻습니다. 저의 대답은 여전히 "내가 원해서요!"입니다. 이 "내가 원해서요"라는 한마디에 사람들은 속이 터져서 어찌할 바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천금을 주고도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은 못 산다'고 하는데, 누가 상관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마작을 하기를 원하고, 저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과 비난을 쏟아내기를 원하지만, 저는 사람을 세워주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길을 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리저리 변론하며 진을 빼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으므로, 우리는 절대로 사람과 변론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한참을 씨름하며 변론을 마쳐도 상대방이 믿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잘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상대가 누구이든, 설령 여러분의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론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증명하려 해도 상대방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온 힘을 다해 설명해도 상대방은 다 듣고 나서 무심하게 "그건 순전히 우연이지, 다 어쩌다 맞은 거야"라고 한마디 던질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과 변론하지 마십시오. 그저 "나도 그냥 덮어놓고 믿는 거야. 너도 그냥 덮어놓고 안 믿는 거고"라고 해버리면 끝납니다. 이래나 저래나 따지지 않고 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내 쪽이 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에 가봤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하십시오. 얼마나 솔직합니까! 사람은 일단 거기에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농담조로 "내가 송나라에서 시간여행을 해서 왔다"고 하면, '타임슬립'이라는 말은 오히려 다들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바울은 뛰어난 변론가였다

바울은 변론 훈련을 받았습니다. 만약 중고등학생 토론대회에 나갔다면 분명 상을 탔을 것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들은 모두 인재들이었습니다. 마치 양전닝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양전닝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다면 단번에 막강한 인맥이 생깁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고 하면 양전닝 교수가 배출한 박사들처럼 대단한 것입니다! 양전닝 교수의 제자들은 아무나 뽑히지 않으며, 모두 백 명 중 하나 꼴로 뽑힌 인재들입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면 절대로 엉터리 지도교수를 만나면 안 되고, 하려면 훌륭한 지도교수를 따라야 합니다. 박사 과정의 경우, '명망 있는 스승 밑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는 점도 있지만, 핵심은 명망 있는 스승의 인맥 네트워크가 매우 강력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이라는 훌륭한 차에 올라탄 셈이니, 이 관계는 아주 든든합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 훗날 주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의 언변은 일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글이 거침없이 유려하여, 제가 전하는 말씀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때로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파하기 때문이더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사도행전》 17 : 16 - 19)

그러나 바울은 참으로 뛰어난 변론가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아레오바고 사람들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레오바고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레오바고에 가서 강연할 수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레오바고는 오늘날의 TED와 같아서, TED 무대에 올라 강연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대단한 능력자들입니다. 그 강단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강단에 선 것은, 송메이링이 미국 의회에 서서 영어로 연설했던 것처럼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 우리 같은 소시민은 올라서기도 전에 쫓겨났을 것입니다. 연설하는 사람의 신발끈을 묶어주는 일조차 시켜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사도행전》 17 : 19 - 22)

바울은 참으로 훌륭한 설교를 한 편 전했지만, 이는 소 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소 귀에 경을 읽어도 소는 알아듣고 발길질을 하거나 땅을 파고 귀를 흔들기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설교한 결과는 소 귀에 경 읽기보다 더 나빴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울은 달변가였고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과 변론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 : 2)

바울은 변론을 좋아했지만, 이리저리 변론해도 그와 함께 변론하던 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론을 듣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믿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사실 "내가 원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아래의 성경 구절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태하여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 : 23 - 31)

우리처럼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참 좋다고 느끼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여전히 다소 심오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듣고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제게 묻는다면, 만약 제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고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여겼을 것이며, 죽은 사람의 부활까지 들먹이니 본 적도 없어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달변가였지만, 훗날 바울서신에서 디모데에게 변론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변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잘 절제하지 못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습관이 하나 있는데, 사람이 많아지면 쉴 새 없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며칠 동안 겹치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변론의 재능은 아레오바고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훈련받은 것이었기에, 흥이 오르면 사람들과 변론하곤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변론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사실 그는 변론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한 모든 것은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온종일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자신이 온전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증명하는 것이 낫습니다. 온종일 자신에게 날개가 돋아 천사라도 된 양 붕 떠서 지낼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변론하는 일은 우리에게 맞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가말리엘 밑에서 훈련받지도 않았습니다.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변론할 때 저는 그저 찬물을 끼얹거나 태클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강단에 서서 큰 소리로 "천 명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천국에 가고, 999명은 지옥에 갑니다!"라고 외칠 때, 저는 아래에서 손을 들고 질문할 뿐입니다. "선생님, 거기에 가보셨습니까? 가보지도 않으셨으면서 어떻게 아십니까?" 이러면 끝장입니다. 그 강사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집니다. 저는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에 헛점을 짚어내는 것만 할 줄 압니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면 그냥 그만두는 게 낫습니다. 허황된 이론을 늘어놓는 것은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논쟁하는 데 있어서 저는 정말 젬병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주님을 믿고 나서 엄청 재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에게 잘못 믿었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그럼 당신은 제대로 믿었단 말이오?"라고 한다면, 저 역시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행해본 것이고,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직접 해보지 않은 것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믿음의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논쟁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을 굴복시키려 하지도 않고 변론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훗날 바울은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증명했습니까? 바울은 표적과 기사의 따름으로 자신이 전한 도를 확증했습니다.

수년 전에는 저도 예수님을 별로 닮지 못했고, 왜 이 말씀이 증명되지 않는지 하나님께 계속 묻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표적과 기사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만약 증명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역 초기에 저는 허리 통증이나 어깨 통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기도하면 즉시 나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10분 동안 기도해도 낫지 않으면 계속해서 기도해야 했습니다. 환자가 포기하지 않는 한, 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상대방이 저를 째려보며 눈총을 주어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낫기를 원한다면 계속하는 것이고, 아픈 것은 그의 몸이지 제 몸이 아닌데 제가 왜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상대방도 제 체면을 봐주느라 참았는지, 10분에 낫지 않던 것이 20분 뒤에 낫고, 20분에 안 낫던 것이 30분 뒤에 나았습니다. 30분 뒤에도 안 낫던 사람도 1시간 뒤에는 나았습니다. 나중에 저를 째려보던 사람이 다 낫고 나서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론으로 우리가 전하는 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증명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전원에 연결된 구리선과 같아서 전구에 불이 들어오게 합니다. 만약 고무줄로 전구를 전원에 연결한다면, 스위치를 아무리 힘껏 누르고 내년까지 꿇어앉아 기도한다 해도 전구에 불은 켜지지 않습니다. 고무줄이 전기를 통하게 할 수 없듯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이 전한 모든 것은 믿음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길고 유려하게 한바탕 설교했을 때,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이 믿게 되었고, 믿고 난 뒤 아주 온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화인 사명 신학에 와서 저의 설교를 듣고 '이 친구의 말은 너무 촌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변론도 할 줄 모르고, 바울처럼 가말리엘의 수업을 듣지도 못했으며, 상대를 논박하여 굴복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헛점을 짚고 몇 마디 딴지를 걸 줄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결코 반박할 수 없는데, 바로 제가 행한 일들은 그 누구도 논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재주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지만, 제가 행한 것을 여러분이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제가 집을 리모델링하여 호텔보다 더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무엇을 반박하겠습니까? 인테리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저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지 여러분의 마음에 들 필요는 없습니다. 또 DJI 드론을 만들어 실제로 날아다니는데 무엇을 반박하겠습니까? 화웨이가 자율주행 버전 원지에 M7을 개발하여 손을 핸들에 얹기만 해도 스스로 운전합니다. 천 킬로미터를 가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추월하든 말든 알아서 다 제어해 줍니다. 제 말은, 이미 만들어 낸 결과물이 있는데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변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골치 아픈 일입니다. 어떤 사람의 허리 통증을 제가 기도로 고쳐주었는데, 그 옆에서 허리가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일은 불가능해!"라고 말합니다. 저는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 참으로 어리석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서 이미 일어났는데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매우 놀라며 "허리 통증이 기도만으로 낫다니, 정말 대단하다! 나도 다음에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반응해야 마땅합니다. 믿음이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믿음이 없으면 쓸모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만약 스스로 믿음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자신의 뺨을 몇 대 때리면서 "왜 나에게 믿음이 없을까?"라고 반문해 보십시오. 자신의 믿음을 세우기 시작하십시오. 믿음이 없으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쓸모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아시겠습니까? 절대로 변론하지 마십시오.

제가 '3×8=23'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는데, 다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멱살을 잡고 사또 앞에 끌려왔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녀석이 삼팔은 이십삼이라고 우깁니다. 제가 삼팔은 이십사라고 알려주었는데도 끝까지 삼팔은 이십삼이라고 고집합니다." 사또가 듣고 상황을 파악하더니, '3×8=23'이라고 주장한 사람을 그냥 놓아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평생을 '3×8=23'의 세계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또는 돌아서서 '3×8=24'라고 옳게 주장한 사람을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곤장을 쳤습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너무 억울해하며 "계산기로 두드려도 삼팔은 이십사인데, 왜 저를 때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또가 말하기를, "네가 삼팔은 이십삼이라고 우기는 자와 진지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려 들었으니, 저 정신 나간 사람이나 치매 환자와 다를 바 없는 자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 매를 맞고 이제 정신이 좀 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삼팔은 이십이라거나 삼팔은 이십일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자들과 시시비비를 따지려 든다면 매를 자청하는 꼴입니다. 이제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미친 사람과 다투어서 무슨 결과를 얻겠습니까?

그러니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굳이 따지려 들지 마십시오. 누군가 "왜 주님을 믿느냐?"라고 묻거든, 자신이 머리가 둔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들처럼 똑똑한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지만, 나 같은 사람은 마음이 연약하여 기댈 곳을 찾을 뿐이라고 하십시오. "당신들은 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만, 나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대단해지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어머니 배 속에서 스스로 기어 나와 제 발로 화장터까지 걸어가서 스스로 유골함에 들어갈 수 있는 대단한 분들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자리를 피하십시오. 매 맞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헛점을 찌르고 찬물 끼얹는 말밖에 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은 참으로 대단하지만, 저는 부족하여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변론은 믿음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더 낭비하다가는 사또에게 끌려가 매나 맞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름

믿음은 믿음에서 시작되고, 불신은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에 믿지 않으면 불신의 길을 걷게 되고, 믿으면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처음부터 믿기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 : 17)

이 말씀은 바울이 한 말이며, 그가 훗날 사역의 세월을 보내며 결론지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셔서 여러분의 믿음이 비록 지극히 작을지라도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며, 그 믿음이 조금 더 자라면 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해도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그 누가 태산 기슭에서부터 3보 1배, 5보 1배를 하며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태산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갈 만큼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겉보기에는 믿음이 아주 커 보여도 정성이 부족하다 하여, 태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불행한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십니까? 바로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하시며, 믿음을 조금씩 자라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발을 들였을 때의 믿음이란, 그저 위급할 때 예수님의 발이라도 붙잡고 당시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여 직장이나 하나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제가 예수님을 믿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저 하나님이란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고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저의 믿음을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고 해준다면 그것은 엄청난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며, 걸어가다 보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처음에 교회에 들어왔을 때 믿음이 크지 않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정성이 부족해서라면, 대체 언제라야 충분히 정성스러워지겠습니까? 어떤 종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만, 우리가 믿는 이 도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변론하는 것은 믿음을 줄 수 없으며, 이것저것 캐묻는 것은 사유와 변증의 길로 가는 것이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 자매와 식사를 했는데, 그 자매가 꽤나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기적을 강력하게 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자 저를 찾아와 기도를 받았고 병이 나았습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람이 기도받고 나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자매의 믿음은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붙든 데 있었습니다. 실명 위기에 처했던 어떤 사람도 이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고 저에게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손을 통해 행하신 표적과 기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어느 것 하나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결코 처음부터 태산 같을 수 없으며, 만두만 한 크기의 믿음을 갖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산은 고사하고 찐만두만 한 믿음도 없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에서 깨알이나 녹두만 한 믿음으로, 다시 만두만 한 믿음으로 자라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고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만 한 믿음에서 시작해도 확실히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 믿음의 길이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대답은 분명히 '이 길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선택했으며, 수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믿음이 매우 커졌습니다. 처음 주님을 믿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하십시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 : 2)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 중에 믿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세 안식일 동안 머물렀으니 채 3주일도 머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몇몇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읍장들 앞에 끌고 가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사도행전》 17 : 5 - 9)

그 무리 가운데 야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믿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함께 모임을 가짐으로써 가정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훗날 누군가의 고발로 관청에서는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관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정치범들인데, 그들이 또 다른 왕을 세우려 한다고 걱정하여 야손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숨겨서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야손은 붙잡힌 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떠난 후에도 마음이 안절부절못하며, 야손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지 줄곧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이 그곳에 불과 몇 주 머물렀는데 그 사람이 관청에 붙잡혀 벌금도 물고 여러 복잡한 일들이 생겼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가장 염려했습니다. 바울은 즉시 디모데와 실라를 보내어 상황을 살펴보게 했고, 그 결과 기록된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사실 야손에게는 믿지 않을 핑계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하기에 야손이 믿었더니 이렇게나 많은 환난이 닥쳤으니 얼마나 재수가 없습니까! 자기는 붙잡혔는데 바울은 꽁무니를 빼고 도망쳤으니, 야손을 대신해 나서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과 실라가 너무 야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야손은 실족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관청에서도 그를 어쩌지 못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야손이 마주한 이깟 작은 일쯤은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능히 해결해 주시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뒷이야기는 제가 상상해서 지어낸 이야기이니 여러분은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 관청에서는 야손이 전과도 없고 평범하며 선량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서로 알게 되고 친분도 쌓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훗날 야손이 관원들에게 왜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까지 와서 야손을 고발하고 현지 사람들을 선동해 고발했는지, 그리고 자기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사도행전》 17:10 - 15)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야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어느 날 우리가 야손처럼 불려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심문을 받는다면, 저는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바울은 누구인지, 그가 우리 집에 와서 병든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었더니 순식간에 나았다는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마침 관원의 집에도 사경을 헤매는 아이가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울을 불러올 수 있겠소?"라고 묻는다면, 저는 "저도 할 줄 압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이를 위해 기도하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이러면 그 누구도 그를 고발해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관원에게도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신묘막측하시며, 그렇기에 오늘날 '신'이라는 글자가 널리 쓰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다

방금 말씀드린 야손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디모데와 실라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야손 일행이 어찌 되었는지 살펴보게 했을 때, 형제자매들의 믿음이 모두 견고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더 위대한 일,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바라보며, 언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까 고대하고 있었고, 이 세상 삶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수많은 이야기와 간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의 간증들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수준도 제법 닿아 있는 편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욱 힘써 좇아가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비록 아주 작은 믿음일지라도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 믿으면 더 큰 믿음이 생기는 것이니, 한곳에 멈추어 서 있지 마십시오. 만약 믿음을 실천하는 어느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더 이상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자리에 정체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것이 왜 그리 좋은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풀어놓을 수 있으며,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야손 일가족의 믿음은 불과 보름 만에 죽순이 비 온 뒤 솟아나듯 급속히 성장했으니, 바울은 괜한 걱정을 했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대신해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일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절름발이가 걷고, 맹인이 보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결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고 온 땅에 모든 족속을 지으사 하나님을 찾게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찾고 더듬어 발견함으로써 지극히 큰 은혜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며, 우리의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달리는 트랙을 바꾸었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한 길을 걸었으니 멸망의 길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영생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미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논리 체계는 더 이상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길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자매님이 다른 교회의 동역자로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그녀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훗날 그녀가 우리 교회에 와서 기도를 받았는데, 그 자매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자매가 저를 찾아와 말하기를, 당시 자기를 섬겨주었던 사람은 우리 공동체에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말단 목회자였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녀의 아이는 벌써 대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힘차게 달려갈 때 표적과 기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표적과 기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며, 그 믿음이 처음부터 그리 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면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고 인생이 찬란하게 빛나기를 원한다면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예전에 못했던 것은 과거의 일일 뿐, 이제는 믿음이 있습니다. 전에 한 자매를 섬긴 적이 있는데, 그녀는 평생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중간만 가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이전부터 중간만 가려 했기에 쓸모없는 인생으로 살았던 것이다. 탁월함을 추구해야 겨우 중간이라도 갈 수 있으니 믿음을 끌어올려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믿음을 풀어놓는 일에 있어 저는 확실한 전문가입니다. 지금 그 자매는 아주 번창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밖에서 최고경영자급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저를 찾아오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저는 밑바닥 인생에서 혼자 역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하여 밑바닥 인생들을 역전시키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밑바닥에 머물지 말고 믿음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예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안 되던 것들이 이제는 다 됩니다. 예전에 두려워하던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바울이 전한 도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기에, 그가 아레오바고에서 이리저리 변론한 것은 별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행전》 17 : 34)

알고 보니 만민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를 믿고 의지할 무리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사람들을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믿음 있는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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