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以斯拉祷告认罪哭泣,俯伏在神殿前的时候,有以色列中的男女孩童聚集到以斯拉那里,成了大会,众民无不痛哭。老师,以色列中的男女孩童聚集到以斯拉那里,这里的记载很特别,神要告诉我们什么?为什么是孩童?
其实以斯拉写的应该不是孩童,写的是那些对神还有热情的人。以斯拉讲的是那些在学校里的孩子,我猜应该是学校里的大孩子。你想想看,每一场的运动从大学开始,比如五四运动,因为人随着年龄的增加,岁数越来越大,越来越世俗,越来越奸滑。
学生的心是比较单纯的,别看娶外邦女子做妻子的这些人,其实他们在神学院里,在以色列的学校里教的还是《圣经》那些话。在学校里学的《圣经》这些话,他们就说以斯拉讲的是对的,我们的确是犯罪了。但是他们真的经历过啥吗?也没经历过啥,就很单纯地相信摩西所写的,相信《旧约》里那些话。
那这个事儿就很有意思,人不过日子不知柴米油盐醋,过着过着,就越来越远离神。但是这些年轻孩子不知道他们家的钱是怎么来的,就是觉得神的话是这么说的,很单纯,所以就把这些孩子给吸引来了。
以斯拉一边哭泣一边祷告,这些孩子们也哭泣也祷告。其中就在他所受教育的地方,也是一个被殖民的地,是一个二等公民的地方。非常辛苦,父母也辛苦,经常被人家压迫,因此他们才有那股宗教热情。
Q2:老师,旧约神不允许以色列人娶外邦的妻,我们现在和不信主的人结婚,神为什么不管了呢?问题在哪里?
简单,信主的人比不信的更糟。我们当中一些姐妹跟我说,老师,我谈恋爱了。我说,那你男朋友是个什么样的人呢?她说人挺好,那我也觉得挺好。我不太问信主不信主,你知道为啥吗?后来我发现很多信主的人还不如那些不信主的人。
信主的人只是去教会,说我信主了,真的信主吗?不知道,真的不知道。如果你要能嫁给一个真的信主的男朋友,那我当然双手赞成了。只不过是挂了一个基督徒的牌子你就嫁给他呀?那这样的悲剧还是蛮多的。
我们当中有一个姐妹,教会牧师又看异象又做异梦的,然后把她给忽悠了,忽悠她嫁给他们教会的一个弟兄。可那个教会的弟兄是个嫖妓的人,你觉得好啊?那个教会弟兄的父母还是个传道人,所以这哪是神撮合的呀。
如果你要嫁的这个人挺本分,人也还可以,挺好,财务状况各方面都挺健康,愿意嫁就嫁吧,或许他里头有一颗寻求的心,如果没有我也不大在乎。但这跟以斯拉记这件事可不一样,《以斯拉记》讲的事是以色列人为了利益而联姻,那是相当讨神愤怒的,它不是一个单纯的嫁和娶。
如果是单纯的嫁和娶,我想可能神也没那么在乎,但是这个事是相当可恶的。可能我不一定回答得对,但是我不觉得他说他是基督徒,你就得直接嫁给他,一定要好好考察。
Q3:神才是我们的避难所,不是我们的家,也不是我们银行里的存款,但是人总是不信,这是为什么呢?
人有一套东西叫做三观,人生观、世界观、价值观。那如果这三观和神所要给我们的那三观不一样,那就没法整了。比如说世界是什么?我告诉你,属灵的世界决定了物质的世界。但是如果人家说哪有灵界?就是物质,我就是一块肉,死了以后吹灯拔蜡,活着时候赶紧享受,这就是人生观。
你对世界的看法,它是怎么组成的,决定了你的人生观。像我说属灵的世界可厉害了,这世界是神掌管的呀,这世界不要讨神的愤怒。这是对世界的一种观念,你看见了吗?没看见,那就是个观念嘛,是不是?想法就是一个观念。
如果你的人生观就不在什么灵界不灵界上,就看得见钱,见人就问人家,最近在哪里发财呢?听明白了吗?那其实是不知道灵界里的这些事儿,决定了我们在这世上的事儿。如果我们是个蒙福的人,你能缺钱吗?灵界的事决定了我们世上活着这点事儿,人活着所有的事儿都是个属灵的事儿。
你说是这么回事儿吗?这就是人对灵界的认识不足啊,对贫穷怎么来的不清楚,对富有是怎么回事儿不清楚,看得眼花缭乱,哎呀,我就特别感慨,我们现在再回去看什么恒大呀,恒大要破产了,什么万达呀?这都是当年很牛的企业,红的发紫啊,牛的厉害啊。
那现在啊,其实我告诉你,就是被灵界里的东西耍了,咱们当中还有一些姐弟兄姐妹啊,其实他们都认识认识海航的老板,那海航老板跳楼自杀了啊,至于怎么跳下去的,咱也不知道啊,后来海航爆雷了,难道就在我们这个时代是那么回事儿吗?这个我们不知道啊。
Q4:老师说能娶外邦女子是什么意思呢?就是别影响我们侍奉神就行了是么?
怎么能不影响呢,肯定会影响,我说能娶,是让你别限制在基督徒当中,扩大你的范围好好找一个。别整一个回来和你华山论剑,就算是个基督徒也不好整,指定很辛苦。如果你非要找一个,就扩大范围好好找一个。
以前有一个女孩在咱们当中,整天梦想找一个白马王子,但咱们教会小,人数少,找到的概率也小。所以我不能把她留这,那多自私,所以我鼓励她去万人会,因为她心在那里啊。咱们这网络教会,相互看不见的,网恋也不合适啊。
Q5:老师,我们做祭司和先知究竟是为了自己还是为了神呢?应该一开始是为了自己不与世人一样,被神降灾祸遭罪,后来是为了神愿意做祭司做先知,为使人悔改归回转向神,是这样么?
生命的成长是一点一点的,你对事物的判断不可能超越你的认知,所以神也给我们铺了一条路,一个台阶一个台阶往上迈,没有一开始就让你把最宝贵的献给神。像亚伯拉罕,带他到迦南地带,然后折腾折腾折腾,等到儿子以撒长到三十来岁的时候要献给神了。所以人属灵的生命,是一点一点成长的,那这一点一点的成长,最开始是给你的恩典,为的是引导你悔改。
我再说一遍,一开始不是因为你够好,但是因为你在寻求,你不想活在那种痛苦当中,不想活在咒诅当中。所以神就拯救我们,祂拯救我们一天一天地成长。那要不要就停在那儿呢?活得挺好,日子也挺好,什么都挺好,财务也挺好,过日子吧,过吧。
人们因为对事物的认知很浅显,不知道那个地方不能久待,久待了会怎么样?久待了以后就会被败坏。我们里面还有很多东西没有收回来归向神,很多东西是讨神愤怒的,很多的垃圾要去清理。所以要不断地突破认知,等你突破认知,认知到像亚伯拉罕献以撒的这个层次,就很好啊。如果你突破到像以撒将自己献上的层次,那更好,很多问题就迎刃而解。
Q6:老师,我知道要在神面前时刻战兢,但是我有时间就被手机浪费了,很懊悔,以后怎么办才能不再犯同样的错误?
其实你除了刷手机也没别的正事干,比如说,你有一个孩子要喂奶,你喂奶的时间不会刷手机的呀,是不是?你不可能说为了刷手机忘了给孩子喂奶了,没有这回事。
那因为没有太多事干,刷就刷吧。那如果有什么事干怎么办?咱就多做一些,多安排一些事。比如说我自己,如果不是礼拜三查经,礼拜五查经,那礼拜三礼拜五我好像也没干啥,然后也没事,时间也没了。
那为啥?反正没啥事看会儿电视,没啥事刷会儿手机。如果说我有这个软件要写,装修要做,设计要整,还有这个神学的课程要开发,然后这个课程那个课程一大堆,我没时间扯犊子呀,是不是?
我们当中的弟兄姐妹,我给你出个主意,人哪,没什么事干就刷刷手机,很正常,打打游戏我也懒得管。为什么懒得管?因为你没正事可干。如果给你个建议的话,就建议你能够做点正经事,多干点正经事。你是个老师,能不能够再多教点补习?政府不让,但还是有很多渠道的。有北大清华的,被请到家里去做保姆,那是保姆吗?是到他家里给孩子做补习。
那我们是个老师,但是这老师做得怎么样?做得很烂,能不能提升自己?那你提升了以后能不能够去创造价值?这个世界永远需要很厉害的人。如果我们不厉害,我们也不去装备,每天刷手机,把自己刷得傻不拉几的,创造价值没有,被骗倒是有,闲着没事跟朋友扯淡也有。所以我建议大家多干点正经事,然后剩下的时间你再刷手机填满,我不怪你。
Q7:重生得救的基督徒应该已经是神的儿女了,神还会对他们发烈怒吗?
什么叫重生得救?你肯定解释不通。你以为是“啪”一下子就重生得救,我这里面没有“啪”就重生得救的逻辑啊。一个小孩刚生出来,然后就是神的儿女了吗?那长着长着就越来越浑,得救了吗?没有啊。因为一个人重生得救不是一下子的事,是一生的事。
因为我们里面还有很多未得之地没有献给神,没有属神的。一个人如果汗毛曾经立过,有一股电流通过,曾经经历一个很美好的见证,那其实什么也不是。只有一个就是不断的在认识神的路上成长,竭力认识神。我问你一下子就“啪”重生得救,他认识神吗?
以前我在当地教会里头就看到很多这种重生得救了,然后好像就没事了,哪有这回事啊。看着还是那么烂嘛,你自己看看周围的人是不是这么个情况。所以重生得救这个逻辑就本身就是一个非常荒谬的逻辑。
在咱们教会不太讲重生得救,因为重生得救仅仅是个开始。因为我观察了这么多的基督徒,发现竭力追求才是关键。一个人一生在信心里面不断地实践,不断地探索,不断地认识神,才是关键。重生的人应该说是神的儿女了,没有这回事。
《使徒行传》里头有一个尼哥拉,后来成了尼哥拉党,专门败坏,是不是?那重生了吗?重生了。得救了吗?没得救啊。所以说我们这种重生得救的观念是以前那种完全说不通的逻辑,我不是强压给你,你可以自己去推敲,我鼓励你好好地去探索。
有人说重生得救以后就不会丧失救恩了,我就觉得这事有问题。比如过了红海,然后倒闭在旷野,你说他是重生得救还是没得救,到底是咋回事呢?所以千万别相信那种什么一次得救永远得救,没有这玩意儿,那东西就是骗人的,根本就没有落地的可能性。
Q8:老师,我以前做错了什么事,神的愤怒临到,每天很难受,现在很后悔,开始悔改,神会撤回愤怒吗?
当然会。当我们回转向神,神就回转向我们。这是《玛拉基书》写的。我们的神有丰富的恩典和怜悯,不是神要灭掉以色列人,是神要拯救他们。为什么派以斯拉这么费劲、这么大费周章,就是不希望以色列人被毁灭。如果神真的发怒的话,没有恩典、没有怜悯,早就灭绝了。如果没有神的恩典和怜悯,我们这些人也早就灭绝了,神的恩典是要引领我们悔改。
关键是你像不像耶稣基督。别以为汗毛立起来,过了一把电,然后圣灵充满,手也抖、身体也抖,就觉得自己重生得救了,这是很荒谬的。看一下自己有多少像耶稣基督,就是包括我们里面的逻辑体系,有多少是合乎神的逻辑。
Q9:老师,我天天打嗝不停,这个咋解决?
别解决。如果不打嗝,那些肮脏就会留在你体内,你肯定会生重病。这个嗝是咋回事?就是人身体里的邪灵不断地在里面释放肮脏。如果这些东西能排出来并不代表这鬼出去了。那什么时候鬼才完全地出去?就是我们里面开始把被魔鬼占据的地方全都夺过来归向神。
记住把我们里面夺过来归向神。就是我们里面如果有10%的地方归向神了,还有90%要夺过来,那些地方都是属鬼的,那些地方都是我们里面属世界的,或者是我们在悟性上不认识神的地方。
那怎么办?一点一点夺过来。你如果真的是100%地夺过来归向神,那你里面就没有产生这些肮脏污秽的东西了,就没有打嗝、吐痰这些东西。我带人祷告的时候,一祷告俩小时的时候,我也打嗝,我也里面有肮脏啊,因为我在不断地收复失地。所以我不想告诉大家我是圣洁的榜样,不是这么回事。我也是在不断地探索、不断地寻求、不断地竭力追求进到完全。
Q10:老师,未得之地要怎么整?
什么叫做未得之地?就是不属于神的地方。在我们心思意念的深处,还有一块一块一块装的都是垃圾,都是属世界逻辑体系的地方。可能有一部分属于神了,那怎么整?在悟性上认识神。记住一定要在悟性上认识神,真理才能够使我们得自由。
重生得救仅仅是开始寻求真理。这一块我悟性上认识了,那一块我悟性上认识了,我就得着了。我给大家举个例子,有一些弟兄姐妹可能还是个牧者,或者是个小牧者,遇到一个事他就忌讳,遇到事他就开始有点小抓狂。
就是因为悟性不通,因为悟性通了,就没有机会抓狂这事了,你有解决的办法了,我知道这事怎么整。但如果不知道这事怎么整,那就需要真理。神是我们的智慧,神是我们的知识,认识至圣者就是聪明,一定要在悟性上突破。
悟性上的突破是至关重要的,千万不要以为我已经重生得救了,就好像挺伟大似的。不是那么伟大,你不知道的东西有很多。千万别做彼得这样的人,彼得是悟性不太通的人。就算神给他再多恩典和启示,他自己不想下功夫,谁都不能帮着他。
未得之地是悟性上的收回来,比如以前混乱的现在没有混乱了,以前做事做得很磨叽的现在没有磨叽了。因为神是个很有智慧、很有知识的神。这一路都是在悟性上不断地突破,在悟性上满心认识神,在悟性上有充足的信心,这都是效法保罗的神学。
本周的答疑解惑到此结束,愿神祝福大家。
에스라가 기도하고 죄를 자복하며 울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이어서 《에스라》 10장, 즉 마지막 장을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주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다”입니다.
에스라는 기도하고, 죄를 자복하고, 통곡하며 포로 된 자들의 귀환을 이끌었습니다. 그 당시로부터 약 70~80년 전에 스룹바벨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성벽은 겨우 그 정도만 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성전도 지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안 지어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학개,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 레위인들, 그리고 그 아래의 백성들은 돌아온 후에 그곳 현지의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심각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큰 진노를 발하실 일인가요? 에스라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죄를 자복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까지 있습니까?” 지금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굳이 이럴 것까지 있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이 문제의 핵심은 에스라의 눈에는 장차 그 사람들에게 임할 재앙이 똑똑히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재앙이 귀신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실 귀신은 결코 우리 재앙의 근원이 아니며, 모든 재앙의 근원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살 만한 죄를 범한 것을 보았지만, 그 사람들은 도리어 “이게 뭐가 문제냐? 괜찮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다시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에스라를 택하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시어 에스라의 애통한 호곡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잘 살고 있으니 내일도 잘 살 것이고, 모레도 계속 잘 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러나 에스라는 보았고, 하나님께서도 보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어 그들에게 작은 소망이라도 남겨 두셨습니다. 에스라가 돌아와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상태를 보았을 때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시려는 것이었구나.’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안목이 매우 짧습니다.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재앙이 과거에 우리가 자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그 더럽고 누추한 세상적인 논리 체계는 반드시 사람에게 재앙을 빚어내며, 그것은 조만의 문제일 뿐입니다.
만약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디를 가나 불쌍한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논리로, 인과관계로 본다면 억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제가 일대일로 사역할 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합니다. “당신 꼴좋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자업자득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한 자매가 갑자기 한 형제에게 반해서 마음속으로 ‘와,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삶에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백마 탄 왕자”가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점 왜 잿빛으로 변했을까요? 원래 잿빛이었던 것에 색을 칠한 “백마 탄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매에게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매는 저에게 “선생님, 제가 상처를 입었어요. 그 사람이 저에게 다 상처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가버렸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형제도 처음에는 그녀가 유리구두를 신은 백설공주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볼수록 늙은 할머니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깥의 다른 여자는 볼수록 백설공주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이란 이렇습니다. 지금은 당신을 보며 좋아하지만, 다른 날에는 누구를 보고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왜 볼수록 못나 보일까요? 사람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스스로 찾아 헤매서 데려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까?
사람의 일생은 다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지만, 사람은 심을 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역할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발뒤꿈치로 척 봐도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훤히 보이기 때문에 매우 괴롭습니다. 성경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10:1)
그래도 다행히 분별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 중에 분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재앙을 내리고 끝내셨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하나님, 차라리 질질 끌지 마시고 화끈하게 끝내버리시죠”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에스라》 10:6)
지금까지도 여전히 “다 괜찮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사람이 심은 것은 거둘 때가 되면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 논리는 당신에게만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인데, 왜 굳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려 합니까?
알아야 할 것은, 만약 당신에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다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고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자기 욕심을 따른다면, 장담하건대 재앙은 단지 잠시 미뤄졌을 뿐입니다.
며칠 전, 한 형제의 부모님이 제게 찾아오셨을 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십니까?” 그분들은 “모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대변을 볼 수 있을지 소변을 볼 수 있을지는 여러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숨을 쉴 수 있을지 밥을 먹을 수 있을지도 여러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에게 예도 들어 드렸습니다. 약 1~2년 전, 한 형제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벌리지 못해 알약조차 넣지 못하고 미음만 겨우 드셨습니다. 이 의사는 헛소리하고 저 의사도 헛소리만 했는데, 치아가 마치 용접된 것처럼 벌어지지 않아 펜치로도 억지로 벌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제가 기도해서 나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에 그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입이 안 벌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항문이 막히는 것까지, 어느 하나만 막혀도 사람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정작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만큼이라도 깨닫기를 바라며 말씀드릴 뿐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떱니까? 지금 잘 살고 있으니 내일도 잘 살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요?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 아내를 몇 명 얻었을 뿐이잖아요. 라합도 이스라엘 사람에게 시집갔잖아요! 그녀도 이방 여인이 아니었나요? 룻도 이스라엘 사람의 이방인 아내였는데 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았습니까?”
이치는 그렇게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라합과 룻은 육신은 이방인이었지만 마음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몸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내면은 이방인이었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귀신과 저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온갖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오랜 시간 탐구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이러한 재앙이 없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위해 일정한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어야 한다”는 이 말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오래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떠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에스라》 10:2)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 10:3)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에스라》 10:4-5)
여기서 말씀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더라도 그녀가 진정 라합이나 룻 같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왜 아내를 맞이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왔고, 나중에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온종일 어떻게 하면 사업을 더 크게 확장할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장사를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이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안의 사업이 대단히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 집안끼리 사돈을 맺어 당신 딸을 우리 집에 시집보내는 게 어떻겠소?”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경유착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사장은 일종의 정치적 직책으로 그 지역을 다스렸고, 사마리아 며느리와 사돈 어르신들은 제사장이 관할하는 이 땅에 들어와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며, 결국 번 돈은 자기 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이었고, 돈을 자기 손에 그러모으는 것은 부패입니다. 사돈에게 장사할 땅을 떼어주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어차피 누구에게 주든 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없고 오직 돈 버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돈도 돈을 벌고, 이렇게 하면 너도 이득이고 나도 이득이니, 이것을 가리켜 이권 결탁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과장”의 아들이 “과장”의 딸과 결혼하고, “국장”의 아들이 “국장”의 딸과 결혼하거나, “과장”이 수억 원대 재산을 가진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국장”이 수백억 원대 재산을 가진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 가문과 대제사장 가문끼리도 당연히 정략결혼으로 격을 맞추었겠지요! 결국 이 사람들은 세상의 이런 하찮은 일들을 위해 살았던 것인데, 죽을 때가 되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 깨닫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권문세가의 삶 치고 파란만장한 사연이 없는 집안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합니다! 머릿속에 온통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이곳으로 보내셨을 때, 그가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은 전부 토착 유력자들, 즉 만만찮은 토호들이었습니다! 다들 대단한 세력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밥줄을 끊는 결정을 내린다면 내일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내일 당장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모를 수도 있고, 콘크리트 바닥 기초 밑에 묻혀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해야 했던 이 일은 실로 매우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스가냐를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 시대에 그는 상당한 담력과 뜻을 품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에스라에게 “당신이 힘써 행하소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냐는 여히엘의 아들이었는데, 여히엘 역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히엘은 이방인 첩을 얻어 사업도 번창시켰는데, 이를 보면 스가냐가 대의를 위해 혈육의 정까지 끊어내려 한 것 아닙니까?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도울 사람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떤다면 그렇게 많은 재앙을 겪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그토록 많이 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재앙은 귀신과 큰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귀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귀신이 와서 당신을 괴롭힐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면 귀신이 어떻게 함부로 오겠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귀신이 와서 당신을 괴롭히려 해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합니다.
에스라가 내린 힘겨운 결정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에스라》 10:7)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 교훈을 얻었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교훈을 얻었습니다! 돼지 쥐엄열매를 먹어 보았습니까? 먹어 보았습니다! 이제 풀려나 돌아왔는데, 뭐라고 말합니까?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정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추방하리라 (《에스라》 10:8)
즉, 우리는 스룹바벨이나 에스라가 데려온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자들이니, 만약 오지 않으면 모임에서 출교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에스라》 10:9)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에스라》 10:10-11)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끝낼 일이 아니오니 (《에스라》 10:12-13)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정한 기한에 각 성읍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에스라》 10:14)
이것은 참으로 힘겨운 결정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스라가 그들을 다 불러 모았는데, 그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무더기로 있었습니다. 그중에 머릿속에 비뚤어진 생각을 품고 있는 자는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역시 수없이 많았습니다. 장가들지 못한 사람들은 자격이 안 되어서 못 했을 뿐, 이방 아내를 맞이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삼 일 내에 오지 않으면 모임에서 출교하겠다는 힘겨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이런 어려운 결정을 내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에스라가 돈을 더 많이 벌게 하려고 그런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힘겨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하게도 저와 저의 동역자들은 정말로 이런 힘겨운 환경 속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재앙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많은 교회가 사람의 기호에 맞추어 교회를 운영하는데, 그러면 사람은 콘서트장처럼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목회자는 기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마음에 참으로 많은 탄식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면 힘겨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높은 기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 에스라가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이 이방인 아내들을 내보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는 경우는 또 어떡합니까? 자식도 버리라는 말입니까? 대를 이어야 하는데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것 아닙니까? 비록 에스라가 행한 것은 이 한 가지 일뿐이었지만 실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으며, 그럼에도 사람들의 내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탄식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돌이킬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제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암 환자인 한 자매를 섬겼는데, 장이 막혀서 인공항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그것은 사람이 겪을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언제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머릿속에는 여전히 세상적인 논리가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단 한 번의 재앙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직면한 사람들의 방해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에스라》 10:15)
그들에게 반대할 자격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는 뜻이며 훼방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화된 사회였고 모든 사람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고라의 반역 무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려 한다면 선거에서 분명 낙선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삶을 살며 돈을 벌고 사업을 크게 확장하려는 생각은 세상 기준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나중에 이 일을 가로막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들의 최후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면, 어떻게 감히 그분의 진노를 살 배짱이 있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언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될지는 여러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재앙을 해결할 수 없으며, 대변을 보지 못해 인공항문을 만들어 배출한다 한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그렇게 자신만만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번다고 해서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 안에서 성실히 일하고 하나님을 맨 뒷전으로 밀어내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싱가포르는 다 좋아 보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명절이나 자녀들의 방학 시즌만 되면 현지 교회들은 텅텅 비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여행도 못 갑니까?”라고 합니다.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행을 가서도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듣기에 거북하겠지만, 그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당장은 다 좋아 보여도 재앙이 닥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에는 결코 좋지 못할 것입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명단
10장 18절부터 44절까지는 길고 긴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것을 왜 적어 놓았을까요? 이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둔 것이 문제가 있었을까요?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않으시려고 에스라를 보내 먼저 이 일들을 처리하게 하셨지만, 이는 겉모습만 처리했을 뿐 내면은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었습니다. 엘람 자손 중에는 여히엘이 있었고, 스가냐의 아버지 이름도 여히엘이었습니다.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히 대조할 수 없으나 동일 인물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들을 제거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제거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직 의식주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왜 그렇게 가난한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한번 꼽아 보십시오. 누가 가난했습니까?
포로로 잡혀갔다 할지라도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지 못하셨겠습니까? 살리셨습니다! 문제는 우리 머릿속에 쓸데없는 세상적 고집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가난의 패배주의가 너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잠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했을 뿐이다
이 운동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잠시 떠나게 했다는 점,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에스라가 울부짖으며 운동을 주도하고 그 사람들을 갈라놓았지만, 이 운동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10년 혹은 20년이 지나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 이르렀을 때 말라기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십일조와 봉헌물을 떼어먹으며, 제사장들은 저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얼마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입니까! 결국 말라기 시대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외면하셨고, 선지자도 끊어졌으며, 그다음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났습니까? 사람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음에 경외함이 없고 뼛속까지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10장은 《에스라》의 마지막 장입니다. 에스라는 더 이상 써 내려가지 못하고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저는 에스라가 이야기를 더 이어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부분에는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아주 조금 나오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즉 스룹바벨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과 함께하셨는지를 기록하다가 여기서 끝을 맺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 장을 더 쓴다면 에스라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가 잠시 떠났을 뿐, 너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너희 안의 논리 체계는 변하지 않았다! 너희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마음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다 괜찮지 않은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이 좋습니까?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태도를 지켜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어떤 이는 “에스라가 참 절망스러웠겠다”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참으로 절망적이라고 느낍니다. 스룹바벨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이 흘렀습니까? 성전은 여전히 황폐하고 사람들의 눈은 오직 돈에만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돈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한 자매는 남편과 이혼할 때 받은 수억 원의 돈을 쥐고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했습니다. 돈이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형제자매들이 재앙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모습을 뻔히 바라보아야 하고, 때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느라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야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와서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 왜 그렇게 많은 암과 재앙이 있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승리하는 교회가 무조건적인 도피성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번 성경공부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