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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베드로전서 1장 - 시련 가운데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

2026-02-04 1,517 彼得前书

相关经文

彼得前书-问候
  • 1 耶稣基督的使徒彼得写信给那分散在本都、加拉太、加帕多家、亚细亚、庇推尼寄居的,
  • 2 就是照父 神的先见被拣选,藉着圣灵得成圣洁,以致顺服耶稣基督,又蒙他血所洒的人。愿恩惠、平安多多地加给你们。
  • 3 愿颂赞归与我们主耶稣基督的父 神!他曾照自己的大怜悯,藉耶稣基督从死里复活,重生了我们,叫我们有活泼的盼望,
  • 4 可以得着不能朽坏、不能玷污、不能衰残、为你们存留在天上的基业。
  • 5 你们这因信蒙 神能力保守的人,必能得着所预备、到末世要显现的救恩。
  • 6 因此,你们是大有喜乐;但如今,在百般的试炼中暂时忧愁,
  • 7 叫你们的信心既被试验,就比那被火试验仍然能坏的金子更显宝贵,可以在耶稣基督显现的时候得着称赞、荣耀、尊贵。
  • 8 你们虽然没有见过他,却是爱他;如今虽不得看见,却因信他就有说不出来、满有荣光的大喜乐;
  • 9 并且得着你们信心的果效,就是灵魂的救恩。
  • 10 论到这救恩,那预先说你们要得恩典的众先知早已详细地寻求考察,
  • 11 就是考察在他们心里基督的灵,预先证明基督受苦难,后来得荣耀,是指着什么时候,并怎样的时候。
  • 12 他们得了启示,知道他们所传讲(原文是服侍)的一切事,不是为自己,乃是为你们。那靠着从天上差来的圣灵传福音给你们的人,现在将这些事报给你们;天使也愿意详细察看这些事。
  • 13 所以要约束你们的心(原文是束上你们心中的腰),谨慎自守,专心盼望耶稣基督显现的时候所带来给你们的恩。
  • 14 你们既作顺命的儿女,就不要效法从前蒙昧无知的时候那放纵私欲的样子。
  • 15 那召你们的既是圣洁,你们在一切所行的事上也要圣洁。
  • 16 因为经上记着说:“你们要圣洁,因为我是圣洁的。”
  • 17 你们既称那不偏待人、按各人行为审判人的主为父,就当存敬畏的心度你们在世寄居的日子,
  • 18 知道你们得赎,脱去你们祖宗所传流虚妄的行为,不是凭着能坏的金银等物,
  • 19 乃是凭着基督的宝血,如同无瑕疵、无玷污的羔羊之血。
  • 20 基督在创世以前是预先被 神知道的,却在这末世才为你们显现。
  • 21 你们也因着他,信那叫他从死里复活、又给他荣耀的 神,叫你们的信心和盼望都在于 神。
  • 22 你们既因顺从真理,洁净了自己的心,以致爱弟兄没有虚假,就当从心里(从心里:有古卷是从清洁的心)彼此切实相爱。
  • 23 你们蒙了重生,不是由于能坏的种子,乃是由于不能坏的种子,是藉着 神活泼常存的道。
  • 24 因为:“凡有血气的,尽都如草;他的美荣都像草上的花。草必枯干,花必凋谢;
  • 25 惟有主的道是永存的。”所传给你们的福音就是这道。

서론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베드로전서>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성경공부하면서 저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한 말을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 분석해 본다면, 아마도 시련 가운데서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는 것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어떤 환경에서 쓰였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던 환경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겪은 박해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습니다.

첫째, 베드로라는 사람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거친 사람이었고, 무언가를 묘사할 때 다소 두서가 없었습니다. 그는 배운 사람이 아니라 거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쓸 때도 그가 구술하고 서기가 대필해 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대략 몇 년경에 쓰였을까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3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30여 년이면 베드로가 조금만 정성을 기울여 고기 잡던 그 능력을 다 쏟아부었다면 박사 학위도 몇 개는 땄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글을 쓸 줄 몰라 남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사실 제게는 작은 편견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30여 년 동안 글 하나 제대로 못 배우고 남에게 대필을 맡겨 구술하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글을 쓸 줄 몰랐다면 글을 읽을 줄은 알았을까요? 저는 그가 글자도 잘 몰랐을 것이라 의심합니다. 그렇다면 그 세월 동안 어떻게 책을 읽고, 어떻게 성장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도를 알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저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지 않았습니까?

제 부모님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네 살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저희 아버지는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한 분은 아버지가 없고 한 분은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왜 저를 공부시키려 하셨을까요? 집이 가난했음에도 저를 공부시키셨습니다. 다행히 그 시절에는 공부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았고 조금만 노력하면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소를 치셨습니다. 아홉 살짜리 아이, 지금 학교에 있는 아홉 살짜리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작습니까? 다들 꼬마들입니다. 소를 치면서 서당 앞을 지나갈 때 훈장님이 안에서 가르치고 계시면, 창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 들을 수 있는 만큼 들으셨습니다. 나중에 문맹 퇴치 운동 때 글자를 몇 개 익히셔서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쓰셨는데, 이것이 저희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글을 쓰지 못했을까요? 사실 베드로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표현한 글은 읽기가 힘듭니다. 비록 제가 <베드로전서>를 읽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그 뜻은 파악했습니다. 베드로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시련 가운데서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0년의 시간 동안 주님을 믿는 사람이 글을 배울 수 없었을까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배우지 못했을까요? 베드로는 참 특이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실천한다면 당장 배워도 잘 배울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의 주제는 시련 가운데서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비해 베드로는 학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배움이 없는 사람일수록 거창한 용어를 쓰기 좋아합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설명하여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수준 높은 일입니다. 반대로 복잡한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그리 많은 학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온갖 거창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거창한 용어를 쓰며 그것이 매우 대단하고 고상하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데, 이러한 풍조는 여러 시대에 존재해 왔습니다.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고 소박하여 거창한 용어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거창한 용어들 중에 명확히 설명된 것이 있습니까? 어느 하나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고, 전하는 내용도 삶에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쓴 이 <베드로전서>는 불교와 더 비슷합니다. 거창한 용어들은 화려하게 늘어놓았지만,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말이 맞느냐 틀리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가 틀렸다고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역시 하늘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얻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제 생각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의 불교화, 대승불교화를 시작한 시조와 같습니다. 그와 야고보 두 사람 모두 거창한 용어를 쓰기 좋아합니다. 이런 거창한 용어에는 거룩하게 됨, 거듭남, 소망, 구원, 기쁨 등 온갖 것들이 포함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같은 구절도 있는데, 금이 불로 시험받는다고 없어집니까? 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처럼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이라든가 천사들도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천사라니요? 천사가 이런 것을 살펴본다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저는 천사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문밖을 나섰는데 새똥 한 바가지가 어떤 사람 머리 위로 떨어졌을 때, 저는 "이 사람 참 운이 좋네"라고 말했습니다.

농담 삼아 덧붙이자면, 이런 거창한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글은 다 읽고 나서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행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야고보든 베드로든 이런 사람들은 아주 거창한 말을 하기 좋아합니다. 저는 투박하고 알기 쉬운 말을 좋아하며, 이런 거창한 말이나 용어를 늘어놓는 것을 싫어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된 것" 등 온통 이런 내용뿐이라 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솔직히 항복을 선언해야겠습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제대로 알고 썼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제가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그가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거창한 단어들로 가득 찬 글은, 특히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사람들이 쓴 글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온통 거창한 용어투성이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얻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1:3-4 )

하늘의 소망은 저도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단어들을 나열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런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라 온갖 해석이 난무합니다.

제가 주님을 믿어 온 수십 년 동안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첫 번째 신기한 일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은 현상으로 해석하며 이를 거듭남이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남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날 갑자기 성령이 임하셔서 제가 쓰러졌다가 일어났는데,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어보면 이런 단어들과 이야기들이 넘쳐납니다. 그 당시 저는 곰곰이 생각하며 책을 많이 읽다가 신비주의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듭남이란 무슨 뜻일까요? 세상에 속한 자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아주 단순한 논리 체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리고 뒤이어 하늘의 소망이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등의 말을 과연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어떻게 해석해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한 이래로 약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사실 명확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해석이 제각각이다 보니 신학 체계가 매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특히 성경에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야고보서>, <유다서>가 더해지면서, 그들은 유독 천사를 좋아하여 천사를 들먹이며 아주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하늘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일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나는 하늘의 소망이 있으니 속세를 초탈하여 출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이는 "나는 하늘의 소망이 있으니 오로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화인 사명 신학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있지만,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며 작은 일에 충성하고 큰일에도 충성한다.' 양을 치는 자라면 양을 잘 치고, 종이라면 종의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으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우실 수 없겠습니까? 도우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늘 거창한 용어들을 늘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일부 형제자매 여러분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입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냐고 물으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나는 사명을 얻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청소하는 일을 하는데, 남의 집 청소를 어떻게 해 놓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 청소를 하러 갔는데, 고객이 참 점잖게도 회사에 전화를 걸어 "혹시 다른 사람을 보내서 저희 집 대청소를 다시 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석진 곳은 전혀 청소하지 않고 겉만 대충 닦아 놓았으니 정밀 청소를 다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탈했는데 뭘 그렇게 깨끗하게 치우냐? 나에겐 하늘의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운데 학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일을 구체화하고, 배움이 없는 사람일수록 구호만 외치기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이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성문에 이렇게 씁니다. "오늘 목사님의 성경공부 강의가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키다

당시 베드로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고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매우 가혹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사실 박해받는 기독교 가운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박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우리는 박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셨을까요? 베드로는 몇 차례 박해를 겪었는데, 첫 번째 박해는 <사도행전> 11장과 12장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식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식당은 참 흥미롭게도 '부자들의 재산을 털어먹는 식당' 같았습니다. 모두가 부동산을 팔아 그 돈을 베드로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그 많은 돈을 보고 "우리 다 같이 먹자" 하다가 교회를 말아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녀석들이 내 교회를 식당으로 만들었고, 게다가 식당에서 누구는 많이 먹고 누구는 적게 먹는다고 끊임없이 다투는구나' 하셔서 일곱 집사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것이니 식당 관리는 내 일이 아니다. 내가 맡을 수 없으니 일곱 집사를 찾아 맡기라"고 했습니다. 최고 책임자로서 교회의 발전 방향을 잡지 않고 교회를 식당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어 교회를 핍박하게 하셨고, 그 핍박에 누가 동참했습니까? 바울이 동참하여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베드로의 신학 체계 전체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의 신학 체계는 그의 글에 그대로 드러나며, 이는 제가 공연히 그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베드로가 쓴 글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쓴 글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베드로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깊었습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아 사도 베드로가 붙잡혔고,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교회의 수장 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었으며 그 후로는 더 이상 수장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어찌할 수 없어 교회를 핍박하시자 교회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신학 체계에서도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식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세운 안디옥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킨다는 것에서, 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믿음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신이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드로가 시련 가운데 지킨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믿음이란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말을 잘못된 곳에 적용하여 해석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어 매우 고생스럽고 청빈하게 살면서 자신이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것은 박해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쓴 많은 글은 정말로 사람들을 오도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려 저를 찾아왔을 때, 제가 이 암은 저주라고 말하자 그는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0년 전에 암에 걸렸는데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굳게 견디며 자신이 욥인 줄 압니다. 사실 욥의 이야기는 반년 만에 역전되었습니다. 그는 암에 걸린 지 10년이나 되었고, 나중에는 아내까지 암에 걸렸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왔을 때 부부 모두 암 환자였고 아이는 겨우 십 대였는데도, 자신들이 욥이라 생각하며 매우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사람이 완고한 데에 큰 믿음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같은 박해의 환경 속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있었고, 베드로는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설명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베드로든 야고보든 어릴 때부터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릴 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입증하려 할 때 "천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천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천사는 새똥입니까, 천사입니까? 우리가 천사를 이야기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처럼 설명할 수도 없는 천사를 들먹이며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키라는 베드로의 이 주제 자체는 맞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는 지식이 부족하여 이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다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을 다 읽고 나면 다소 어리둥절해집니다. 이 말은 언제 쓰는 말일까요? 제가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는 특정한 상황, 즉 제가 섬기는 사람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었든, 상황을 보니 곧 숨을 거둘 것 같을 때입니다. 서구권에서는 이를 호스피스(임종 돌봄)라고 부르는데, 저의 임종 돌봄 사역은 꽤 괜찮은 편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로하며, 그가 죽기 전에 너무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죽을 때 눈을 부릅뜨고 극심하게 발버둥 치며 죽는 모습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제가 어릴 적 이웃집에 암에 걸린 50대 분이 계셨는데,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오싹할 정도였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본 자녀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겠습니까? 너무나 비참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때에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의 구원관과 사도 베드로의 구원관은 차이가 너무나 큽니다. 우리가 계승한 것은 사도 바울의 구원관이며, 베드로의 구원관은 명확히 설명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의 구원관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구원은 무엇일까요? 호스피스 사역에서 말하는 그런 구원일까요? 사람이 죽어갈 때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도 다소 난해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10-12 )

다 읽고 나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있는 것 같다가도 읽다 보면 멍해집니다. 그리고 시련 가운데 크게 기뻐하고,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된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저주 가운데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으면 꽤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다면 저는 정말 감탄할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의 수많은 교파에서 전하는 설교 수준이 대략 이 <베드로전서>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구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결국 영혼에 대해서만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거룩할지어다

거룩해야 한다는 말이 맞습니까?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너희는 거룩할지어다"라고 했는데, 오늘 제가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함입니다.

무엇이든 여호와께 속하면 거룩해지므로, 구약의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이마에 달아야 했습니다. 즉 한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 때 비로소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후에도 세상의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겠습니까?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마에 인두로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하더라도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다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5-16 )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성결하게 구별되는 것, 이것을 거룩하게 됨이라 합니다. 목욕을 한다고 거룩해집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순식간에 대승불교처럼 변해 버리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러한 단어들을 나열하여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거룩해져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전서》 1:19-20 )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저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러한 표현들을 나열하여 거창하고 대단하게 보이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함께 세미나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못 알아들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 꼼꼼히 정리하고 필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있던 사람이 함께 나오면서 "목사님 말씀이 정말 은혜롭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당신이 알아듣기나 한 건가? 나도 못 알아듣고 당신도 못 알아들었는데 은혜롭다니? 나는 당신이 알아들은 줄 알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화법을 몹시 싫어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알아듣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다 대단하단 말입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면 '강사가 제대로 설명을 못 했구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가 알아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어떤 고대 사본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베드로가 쓴 이런 글들은 글자 하나하나는 다 알겠지만, 베드로가 진정 무엇을 말하려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십중팔구 베드로는 글을 쓸 줄 몰랐기에 글을 깊이 다듬거나 성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글을 쓰지 못하니 오로지 귀로 듣는 것에만 의존했는데, 온전히 듣기만 하는 것에 의존한 글이 신뢰할 만하겠습니까?

그가 바울의 설교를 좀 더 많이 들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읽지 못하니 이쪽에서 조금 듣고 저쪽에서 조금 들어서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단어도 좋아 보여 넣고 저 단어도 좋아 보여 넣었을 뿐, 개념이 무엇인지 논리가 이어지는지는 상관없이 그저 매우 웅장한 한 편의 산문으로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은 성령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지, 형식을 차리거나 이것저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할머니를 부축해 길을 건너 드린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억울한 일에 휘말려선 안 됩니다.

너희는 다 복음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

듣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 거듭남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베드로에게 "거듭남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역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논리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앞에서 육체를 처리하고 육에 속한 악한 행실을 다루어,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여 거룩함에 이르고 선악을 분별하는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듭남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쓴 것은 경전일지 모르고 제가 말하는 것은 강론에 불과하지만,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러한 공허한 탁상공론을 멀리해야 합니다.

이 글은 사람을 오도하기 매우 쉬운 글이다

첫째, 이 글은 사람을 오도하기 매우 쉬운 글입니다. 저는 그저 이 거창한 용어들을 명확히 설명했을 뿐이며, 그렇게 읽으면 꽤 괜찮습니다. 천사들이 이런 일들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등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천사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독교인이 사진 한 장 찍힌 것을 두고 신비화합니다. 동말레이시아의 한 교회에서 찍은 사진에 공중에 수많은 천사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찍혔다는데, 저는 사진을 인화할 때 빛이 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천사를 숭상하고 신비주의를 숭상하며 이런 것을 말해야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사람들을 오도하기 매우 쉽습니다.

둘째, 교회관이 결여되어 있으며 교회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뜻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교회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세워진 적이 없으며, 베드로의 교회관은 매우 박약합니다. 그가 편지를 쓴 대상들은 사실 그가 세운 교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등의 교회는 베드로가 이리저리 순회하며 이곳에서 설교 한 편 하고 떠나고 저곳에서 설교 한 편 하고 떠났던 곳들입니다.

그가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쓸 때, 그의 가장 훌륭한 서기였던 마가는 이미 그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그가 전하는 내용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왜일까요? 교회관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교회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는 교회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조금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러한 말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매우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이로 인해 불교화, 대승불교화의 시대로 접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무릎 꿇고 하루에 다섯 시간씩 기도만 하다가 찢어지게 가난해집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의 어머니는 매일 교회에서 대여섯 시간씩 기도하여 무릎에 굳은살이 박여 마치 늙은 낙타 무릎처럼 되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는 빚을 잔뜩 져 놓고는 자기 딸의 이름으로 고리대금을 빌려 빚을 갚으라고 강요했는데,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런 기도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결여된 것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넷째는 천사를 숭상한 것이고, 다섯째는 온갖 거창한 용어들을 잔뜩 늘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전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비록 거창한 용어들이지만 베드로가 한 말 자체는 옳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하나하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풀어낸 것입니다. 사실 저의 전체 설교는 <베드로전서>에 대한 의문을 풀고 명확한 설명을 전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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