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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撒母耳记下14章-约押设法让押沙龙回来
  • 1 洗鲁雅的儿子约押,知道王心里想念押沙龙,
  • 2 就打发人往提哥亚去,从那里叫了一个聪明的妇人来,对她说:“请你假装居丧的,穿上孝衣,不要用膏抹身,要装作为死者许久悲哀的妇人;
  • 3 进去见王,对王如此如此说。”于是约押将当说的话教导了妇人。
  • 4 提哥亚妇人到王面前,伏地叩拜,说:“王啊,求你拯救!”
  • 5 王问她说:“你有什么事呢?”回答说:“婢女实在是寡妇,我丈夫死了。
  • 6 我有两个儿子,一日在田间争斗,没有人解劝,这个就打死那个。
  • 7 现在全家的人都起来攻击婢女,说:‘你将那打死兄弟的交出来,我们好治死他,偿他打死兄弟的命,灭绝那承受家业的。’这样,他们要将我剩下的炭火灭尽,不与我丈夫留名留后在世上。”
  • 8 王对妇人说:“你回家去吧!我必为你下令。”
  • 9 提哥亚妇人又对王说:“我主我王,愿这罪归我和我父家,与王和王的位无干。”
  • 10 王说:“凡难为你的,你就带他到我这里来,他必不再搅扰你。”
  • 11 妇人说:“愿王记念耶和华你的 神,不许报血仇的人施行灭绝,恐怕他们灭绝我的儿子。”王说:“我指着永生的耶和华起誓:你的儿子连一根头发也不致落在地上。”
  • 12 妇人说:“求我主我王容婢女再说一句话。”王说:“你说吧!”
  • 13 妇人说:“王为何也起意要害 神的民呢?王不使那逃亡的人回来,王的这话就是自证己错了!
  • 14 我们都是必死的,如同水泼在地上,不能收回。 神并不夺取人的性命,乃设法使逃亡的人不致成为赶出、回不来的。
  • 15 我来将这话告诉我主我王,是因百姓使我惧怕。婢女想,不如将这话告诉王,或者王成就婢女所求的。
  • 16 人要将我和我儿子从 神的地业上一同除灭,王必应允救我脱离他的手。
  • 17 婢女又想,我主我王的话必安慰我;因为我主我王能辨别是非,如同 神的使者一样。惟愿耶和华你的 神与你同在!”
  • 18 王对妇人说:“我要问你一句话,你一点不要瞒我。”妇人说:“愿我主我王说。”
  • 19 王说:“你这些话莫非是约押的主意吗?”妇人说:“我敢在我主我王面前起誓:王的话正对,不偏左右,是王的仆人约押吩咐我的,这些话是他教导我的。
  • 20 王的仆人约押如此行,为要挽回这事。我主的智慧却如 神使者的智慧,能知世上一切事。”
  • 21 王对约押说:“我应允你这事。你可以去,把那少年人押沙龙带回来。”
  • 22 约押就面伏于地叩拜,祝谢于王,又说:“王既应允仆人所求的,仆人今日知道在我主我王眼前蒙恩了。”
  • 23 于是约押起身往基述去,将押沙龙带回耶路撒冷。
  • 24 王说:“使他回自己家里去,不要见我的面。”押沙龙就回自己家里去,没有见王的面。
  • 25 以色列全地之中,无人像押沙龙那样俊美,得人的称赞,从脚底到头顶毫无瑕疵。
  • 26 他的头发甚重,每到年底剪发一次;所剪下来的,按王的平称一称,重二百舍客勒。
  • 27 押沙龙生了三个儿子,一个女儿。女儿名叫他玛,是个容貌俊美的女子。
  • 28 押沙龙住在耶路撒冷足有二年,没有见王的面。
  • 29 押沙龙打发人去叫约押来,要托他去见王,约押却不肯来。第二次打发人去叫他,他仍不肯来。
  • 30 所以押沙龙对仆人说:“你们看,约押有一块田,与我的田相近,其中有大麦,你们去放火烧了。”押沙龙的仆人就去放火烧了那田。
  • 31 于是约押起来,到了押沙龙家里,问他说:“你的仆人为何放火烧了我的田呢?”
  • 32 押沙龙回答约押说:“我打发人去请你来,好托你去见王,替我说:‘我为何从基述回来呢?不如仍在那里。’现在要许我见王的面;我若有罪,任凭王杀我就是了。”
  • 33 于是约押去见王,将这话奏告王,王便叫押沙龙来。押沙龙来见王,在王面前俯伏于地,王就与押沙龙亲嘴。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사무엘하》 1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압살롬이 피를 흘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미 큰아들 암논을 잃었는데, 이제 또 다른 아들 압살롬마저 잃어야 할까요? 아들 하나를 잃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두 아들을 다 잃는 것이 낫습니까?

사실 이치는 매우 간단합니다. 당연히 아들 하나만 잃는 편이 낫습니다. 때때로 우리 머릿속의 논리는 매우 혼란스러워서,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 하십니다. 비록 때로는 하나님께서 몇 사람 죽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본심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라》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예수님, 그리고 이후의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 제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고 나서 오히려 바보가 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은 후 경직되고 융통성이 없어지며 지혜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그런 환경 속에서 주님을 믿었지만 그들처럼 경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은 후 점점 더 어리석어지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교조적으로 조문만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쓰신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사람들은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 하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악을 분별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어리석어지고, 육신을 따르는 방식으로 읽어도 어리석어지며,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읽으면 더더욱 어리석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프로그래밍을 배울 때 몹시 힘들어하고, 어떤 사람은 일을 배울 때 매우 힘들어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생각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만일 뿐이며, 이는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유독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질문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성찬을 지켜야 합니까? 왜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까?" 저는 하나님께 이런 어리석은 질문들을 수없이 늘어놓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회사를 경영할 때, 그리스도인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을 가장 꺼렸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다음 지원자에게 묻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면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초기에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채용했던 적이 있는데, 그 그리스도인이 일하는 방식 때문에 수년간 속이 답답하고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을 하러 와서 우리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의 상사가 저를 찾아와 말하기를, "사장님, 채용하신 직원에 대해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고 있고, 채용된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다 보니 문제를 일으킬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저는 편하게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사람이 규칙대로 일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직원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에는 작업 표준 규정이 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는데, 왜 이 작업 표준 규정대로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제가 왜 이것대로 해야 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직무이며, 회사에서 그 일을 요구했다면 당연히 요구에 따라 성실히 일해야지, 왜냐고 따져 물을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독 이런 함정에 잘 빠지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맹목적인 자부심을 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누구의 자녀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요압, 드고아 여인, 압살롬, 다윗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기 전, 원래 있던 교회에서 그러한 훈련과 가르침을 받았지만,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 사람들을 양육하기 시작했을 때는 저만의 확고한 논리 체계에 따라 목회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가이드가 예전에 이런 식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여행사에서는 가이드에게 관광객들을 기념품 가게로 데려가 온갖 옥, 보석 등을 사게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커서 그들에게 사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관광객들에게 이것이 여행사가 돈을 버는 방식이라고 솔직히 말해 버립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이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데 당신은 사장의 뒤통수를 치고 있으니,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당신의 급여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상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모두 불의한 재물인데, 그는 이 문제를 지나치게 무겁게 여긴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제 입장을 짐작하실 수 있을 텐데, 제 입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청지기가 해고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습니까?" 10만 원을 빚진 자에게는 장부를 관리하는 권한을 이용해 5만 원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당신은 우리 주인에게 곡식을 얼마나 빚졌습니까?" 100석을 빚진 자에게는 80석이나 40석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향해 지혜로운 청지기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인정하실 수 있는지 매우 놀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도 충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전에 저도 이 문제를 연구할 때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충한 일인가!' 그러나 나중에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러한 세상 재물은 모두 불의한 재물이며, 우리가 종이돈(가짜 돈)을 보듯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이돈을 한 묶음 더 주든 덜 주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종이돈을 얼마나 빚졌습니까? 두 묶음 빚졌으니 한 묶음으로 깎아 줍시다"라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주인에게 종이돈 몇 상자를 빚졌습니까? 열 상자를 다섯 상자로 칩시다"라고 해도 아무도 이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혜의 안목을 가지고 요압의 지혜, 드고아 여인의 지혜, 다윗과 압살롬의 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가 압살롬의 지혜를 갖추기를 간절히 바라고, 요압의 지혜를 갖추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드고아 여인의 지혜를 갖추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제자매들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람이 어리석은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사무엘하》 14장을 전하면서 여러분에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라고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요압의 지혜

요압은 일을 매우 잘 처리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하루이틀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그가 처음에 다윗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청년은 이미 대단히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다윗이라는 유망주에게 베팅할 줄 알았습니다. 요압과 그의 아우 아비새는 다윗의 군대에서 원수급의 직책에 있었으니, 틀림없이 매우 총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 참 악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압만큼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저는 오히려 여러분을 축하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며, 종교적인 사람들은 제게 "이 사람 참 못됐다! 어떻게 요압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며 낙인을 찍을 것입니다. 제가 인정하는 것은 요압의 지혜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압의 위치에서 "왕이시여,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너무 부도덕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면 큰 곤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요압이 다윗에게 귀순했을 때, 그는 이미 매우 영리한 사람이어서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낯빛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으며, 요압의 마음속은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요압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것을 본 요압은 이마를 찌푸리며 지혜를 짜내었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전의 두통거리가 아니라, 상전의 진통제였습니다. 상전의 진통제가 되는 것과 상전의 두통거리가 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일을 하면서 상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제가 일할 때 왜 영리했겠습니까? 저는 온종일 '내 상사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여러분의 급여는 분명 매우 빠르게 오를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틀렸거나 요압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여러분 자신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 동역자들에게 묻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총명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여러분이 돌보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먼저 여러분 자신이 총명해져야 여러분이 돌보는 사람들도 총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배울 줄 모른다면, 어떻게 양육하는 사람들이 배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먼저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 혼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하지 못합니다. 저는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들이 손을 대기만 하면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군요!" 그렇다면 그냥 여러분 뜻대로 하십시오! 제 마음도 다 압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어리석으려면 계속 어리석어지고, 미련하려면 계속 미련해질 수밖에요. 사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똑똑해지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리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지, 그저 자기의 작은 생각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요압은 일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가장 먼저 다윗의 유익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요압은 장자인 암논이 죽었으니 이제 둘째 차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둘째인 길르압의 꼴을 보니, 그의 어머니 밑에서 거의 출가하여 중이 될 정도로 길러져서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기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아들들을 다 불러 모아 일을 상의해도 길르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너 무엇을 먹고 싶으냐,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길르압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길르압은 대략 이런 성품이었는데, 사실 이것도 대단한 것이며 일종의 지혜로서 많은 재앙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요압이 상황을 보니, 왕위는 틀림없이 압살롬에게 돌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장인 댁에 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아들을 몹시 그리워하면서도 돌아오게 할 수 없었는데, 압살롬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다윗이 공평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압은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들이 다른 사람의 아들을 죽였다면 그 목숨으로 갚게 하여 각 집안에서 아들 하나씩 잃는 것이 공평하겠지만, 자기 아들이 자기의 또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그 아들로 하여금 다른 아들의 목숨을 대신 갚게 하여 두 아들을 다 죽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게 퇴로(명분)를 열어 주고자 했습니다. 다윗이 진퇴양난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영리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내가 드고아 여인을 한 사람 찾아 이야기를 하나 꾸며서 다윗에게 두 아들을 다 잃는 것보다 아들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다윗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요압은 다윗과 여러 해를 함께하면서 다윗의 일 처리 스타일을 깊이 알고 있었고, 다윗의 판단 기준과 경중을 알고 있었으며, 어느 쪽이 더 중대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요압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머리에 맥을 짚을 줄 알아야지, 결코 어리석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요압은 이야기를 꾸며내어 한 편의 연극을 연출했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훗날 왕이 된다면 요압의 원수 자리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고, 이 일은 다윗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압살롬에게도 은혜를 입히며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남는 장사였기에, 요압은 이 일을 결행하기로 했습니다.

훗날 암논이 죽고, 길르압은 늘 자리에서 "아, 예!"라고만 할 뿐이었으며, 셋째 압살롬도 죽자 넷째 아도니야에게 차례가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요압은 아도니야에게 베팅했으나 잘못된 베팅이었습니다. 요압에게 지혜가 있었지만 어리석은 부분도 있었으니, 우리가 배울 것은 그의 지혜로운 부분이지 결코 그의 어리석은 부분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제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저는 뛰어난 사람들을 몹시 존경합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주석에 대해 저는 존경해 마지않는데, 그는 절대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신중국을 세운 원로들 역시 하나같이 비범하고 총명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덩샤오핑 역시 말과 행동에 있어 절대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은 분별하여 피해야 합니다. 그들은 일의 본질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평생 《성경》 한 권만 읽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바보가 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요압이 직장 생활을 할 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상전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자신의 장래를 위해 길을 닦을 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그는 알았고,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혹시 저를 오해하여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전 교회 목사님들은 그런 악한 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 목사는 본받을 대상으로 삼는가?"라고 생각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지혜로워지는 법을 배워 가면 됩니다.

드고아 여인의 지혜

요압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여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여러분은 말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알고 싶다면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들은 대단히 똑똑하고 모두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합니다. 얼마 전 저는 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났는데, 그의 형이 집을 한 채 지었으나 무허가 불법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불법 건축물은 철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고 일을 처리하여, 결국 철거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제가 보았을 때는 틀림없이 철거될 줄 알았습니다. 헛돈을 들여 지었을 뿐만 아니라 허물어야 하고 쓰레기까지 치워야 하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그가 철거하지 않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이 드고아 여인 역시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드고아 여인이 왕께 나아갈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사무엘하》 14:4)

왕은 구원하고 돕는 일을 좋아합니다. 영웅은 미인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참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쳐죽인지라 (《사무엘하》 14:5-6)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의 생각대로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다윗이여, 왜 그녀에게 어머니로서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하면 대개 어머니가 잘못 가르친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드고아 여인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유기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사무엘하》 14:7)

여러분,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그를 죽여야 마땅합니까, 죽이지 말아야 합니까? 사실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다윗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이 여인의 두 아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이 여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내가 그의 피를 찾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고아 여인의 이 아들이 저 아들을 쳐죽인 것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것이며, 그 땅을 더럽히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그 지역이 저주를 받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안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남은 아들을 반드시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여인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았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사무엘하》 14:8-11)

만약 곁에 있던 신하들이 "왕이시여, 어찌 그렇게 판결하십니까?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과연 모세의 율법에 부합합니까, 부합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합니까, 부합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자, 아무도 감히 다윗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남의 일을 판단할 때는 매우 명철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우리아를 죽이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했을 때, 나단이 와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그럴 수 없다"며 분노했던 사람입니다.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내 주 왕께 한 말씀을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처럼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사무엘하》 14:12-13)

여인은 다윗에게 명분과 퇴로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남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머리가 맑았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드고아 여인은 대단히 지혜로웠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사무엘하》 14:14)

우리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이며, 단지 언제 집행되느냐의 차이일 뿐, 결국 죽을 운명이며 조금 더 사느냐 덜 사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겠습니까?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마련하사 쫓겨난 자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기를 원하시지 죽기를 원치 않으시며,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길은 모두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며, 사람의 목숨은 땅에 쏟아진 물과 같아서 한번 쏟아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드고아 여인의 논증은 보통 사람의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나라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한 이유는,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 하나가 더 사는데 왜 죽이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이 땅 위에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유예 상태에 있는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려 하심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아들이 다른 사람의 아들을 죽여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만약 아들을 잃은 집안에서 가해자의 아들을 위해 탄원해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효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 가정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쳐죽였다면, 큰아들마저 죽여야 하겠습니까? 아들 하나만 죽는 편이 낫습니다.

드고아 여인의 말을 차근차근 읽어 보면, 그녀의 논리 전개가 대단히 정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막혀 있었습니다. 비록 이 계책은 요압이 낸 것이지만, 만약 드고아 여인이 길르압처럼 그저 "아, 예"라고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일이 틀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고아 여인은 말을 아주 명확하게 풀어냈고, 자신의 가상 이야기를 들어 다윗의 얽힌 매듭을 풀어 주었습니다.

다윗의 지혜

죽음에 대한 다윗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땅에 물을 쏟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암논은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압살롬은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마저 죽게 내버려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대단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진심으로 압살롬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했습니다. 압살롬이 대단히 총명하고 외모도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도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왕위를 압살롬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압살롬은 총명이 지나쳐 도를 넘었습니다. 지진이 났을 때 어떤 사람이 십몇 층, 이십몇 층에서 온 힘을 다해 아래로 내달리다, 지나치게 영악하여 지하층까지 내달려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큰일 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겠습니까? 지진인데 말입니다! 지상 1층에 도달했으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면 이렇게 됩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듣자마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드고아 여인이 집안일을 이야기하자마자 다윗은 그녀를 위해 판결을 내려 주며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생사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생사를 꿰뚫어 보면 생사에 대해 매우 명확한 시각을 갖게 되고, 명확한 시각이 생기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시지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지만, 살아 있을 때는 회개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보잘것없는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 왜 저 인간을 쳐서 죽이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어리석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고자 하시는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저 사람이 나를 너무 심하게 괴롭히니, 하나님께서 저자를 쳐죽여 주셨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집행해 주시기를 구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공의대로만 심판하신다면, 우리의 수준으로는 여러분이나 저나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다윗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윗의 지혜가 보이십니까? 그는 듣자마자 곧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이니, 남에게 공의와 율법만을 강요하지 말고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열 번, 스무 번을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면 정말 속이 터져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고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돌립니다. 가끔씩 화를 내며 한마디 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바르게 돌려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를 죽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고비를 넘겼습니다. 비록 그 일로 인해 칼이 그의 집에서 영영 떠나지 않게 되었으나,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다윗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지혜

이번 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며칠씩 묵상하며 배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인물도 대단한데, 그의 지혜는 어디서 나타납니까? 요압이 그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저희가 살던 시대에는 품속에서 마오 주석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만 꺼내 보여도 온 천하를 활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오 주석을 직접 만났다. 사진이 있으니 확실한 증거다"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면한 것과 대면하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양전닝(C. N. Yang) 박사가 마오 주석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양전닝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압살롬이 왕을 만나는 것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왕과의 관계에서 조금의 차이가 아니라 십만 팔천 리의 차이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을 뵙고 싶었지만 다윗은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이 보고 싶었지만, 그가 예루살렘에 와 있음에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 함께 식사 한 끼 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습니까?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그를 만나 주지 않았을까요?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사무엘하》 14:24)

여러분,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한 가지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너는 살인자이며,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줄 착각하지 말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돌아오게는 했지만, 자신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윗 역시 압살롬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나 주지 않았고, 압살롬이 먼저 적극적으로 자기를 찾아오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비범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목회자들처럼 일을 어설프게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다윗 왕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그 역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책을 궁리하여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데려왔지만 왕을 뵙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합니까? 당신이 나를 대신해 왕궁에 들어가 왕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내가 왕을 뵙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전하며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왕께서 나를 만나 주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내가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일도 요압이 분명 압살롬에게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요압과 압살롬이 그술에서 돌아올 때 이틀 길을 동행했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을 것입니다. "이보게! 내가 어떻게 자네를 데리러 올 수 있었는지 아는가?" 압살롬이 "모릅니다"라고 하자, 요압은 "내가 드고아 여인을 하나 섭외해서 왕께 어떻게 말할지 다 코치해 주었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당신 참 똑똑하군요!"라고 하자, 요압은 "당연하지. 내가 왕을 모시고 수많은 세월 생사를 넘나들며 천하를 평정했는데, 자네 이 작은 일 하나 처리 못 하겠는가? 하지만 자네 내 은혜를 잊지 말게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요압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압살롬은 요압에게 "내가 훗날 왕이 되면 반드시 당신의 은혜를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길을 오며 마오타이주를 몇 병이나 비웠을지도 모릅니다.

압살롬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루하루 기다렸습니다. 요압을 오라고 불러도 요압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똑똑한 자들이라 거드름을 피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묘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요압의 밭이 압살롬의 밭 곁에 붙어 있었기에, 그는 종들을 시켜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만약 요압이 와서 "왜 내 밭을 태웠느냐?"라고 따지면 압살롬은 "실수로 태웠습니다"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미사일이 남의 대사관에 떨어졌는데도 "아이쿠, 조준을 잘못했네"라고 발뺌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일이 다 이렇습니다.

압살롬은 고의로 불을 질렀고 아주 정확하게 태웠지만, 겉으로는 "실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오지 않으니 밭을 태운 것이고, 그래도 안 오면 또 한 필지를 태울 것이다'라는 속셈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이 찾아와 왜 밭을 태웠느냐고 따졌습니다. 압살롬이 말했습니다. "누가 오지 말라고 했습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훗날 내가 왕이 되면 당신 몫을 챙겨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시치미를 떼고 딴청을 피웁니까? 내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모릅니까?" 결국 요압은 두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요압, 드고아 여인, 다윗, 압살롬 같은 인물들이 지닌 이러한 기지와 담력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우리처럼 외골수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그 한 가닥 융통성마저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합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방책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방책이 있으면 일이 쉬워집니다! 밭 하나 태우고 얼마 배상해 주면 그만입니다. 결국 요압은 배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배상은 무슨 배상인가? 탔으면 탄 거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 요압은 왕을 알현하러 들어갔습니다. 왕궁의 계단 하나하나에는 고도의 외교적 수사가 얽혀 있어, 우리의 사소한 일상과는 다릅니다. 왕실과 궁중의 일에는 사소한 일이 없으며, 외교에는 작은 일이 없고 모두 중대한 일이기에 어느 하나도 빈틈없이 정교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사무엘하》 14:33)

이제 압살롬의 손에 확실한 패가 쥐어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았느냐? 너희들 다 조심해라! 내가 왕과 독대했다." 첫째는 죽었고, 둘째는 멍청하며, 셋째가 바로 압살롬 자신이었습니다. 다윗 왕 다음은 셋째인 그였으니, 아랫사람들은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보니 그는 차기 왕, 즉 후계자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압살롬은 지나치게 똑똑하여 단숨에 지하층까지 내달려 버렸습니다. 마치 지진이 났을 때 수십 층 건물에서 무작정 지하층으로 내달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과거 린뱌오가 성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 더 기다리다가는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오 주석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지혜가 있든 그 부분을 배워야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 평생에 커다란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만약 대단한 능력자 집안에서 태어나 주변에 지혜로운 사람들을 붙여 주었더라면 저의 학습 능력으로 보아 엄청나게 빨리 배웠을 것이고 지혜가 탁월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사람들의 환경에서 자랐다면 분명 지혜가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온갖 고생을 하고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기어 나와 지금의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사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제게 부어 주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융통성 없는 외골수가 되거나 그나마 있는 분별력마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기를 쓰고 뛰어난 고수들에게서 배워야 하며, 언제나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에 안주하지 말고 반드시 다른 사람의 탁월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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