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弥迦书》的第一章第十节我没读懂,第十节内容是:"不要在迦特报告这事儿,总不要哭泣。我在伯亚弗拉滚于灰尘之中。"请问是什么意思?
不好意思我也没读懂,但是我大概给你点线索,有的人说你这还读不懂?那个字我是读懂了,但是这句话意思我没读懂,你得原谅我呀,也许下一轮咱们再查《弥迦书》的时候就懂了。
为什么不要在迦特报告这事儿呢?这个字面解释是因为人听不进去,你在迦特讲可能迦特人拿石头打揍你,我们实在不明白他为什么不要在迦特。但是有一件事儿我们可以读明白,就是他很痛苦,他在伯亚弗拉滚于灰尘之中,披麻蒙灰的那像啥呢?像死了爹一样。
为什么说总不要哭泣呢?是说他不要哭泣还是说迦特人不要哭泣?应该是迦特人不要哭泣,至于这个迦特人发生了啥事,我们实在不知道。但报告的这事儿肯定不是个好消息,因为人都喜欢平安。你知道耶稣也是这么讲,想要平安但是灾祸突然来到,有多少基督徒是经历过想要平安但是灾祸突然间临到的?做先知不容易。
Q2:老师,神的公义具体指什么?与人常说的公义区别在哪里?
相信神的话、照着神的话行就叫做公义,不是照着人的公义没有用,人的公义说起来那可没完了,平时要多琢磨。
Q3:老师,神的逻辑与人的逻辑是否相互背驰?
那当然了,神的逻辑和人的逻辑那绝对是背驰的,你得知道一件事儿,就是体贴人的意思是撒但,那是最厉害的。如果有人体贴你的意思,你一定要知道撒但来了。你比如说彼得,耶稣说我要到耶路撒冷受死,第三天复活,彼得说:这事万万不能临到你身上,他不知道这事是个好事,他以为是个坏事。
耶稣被钉十字架,第三天从死里复活,我问你是好事还是坏事?是好事,有一些教会在守圣餐的时候,我也不知道他们在哭啥?好像死了爹似的,当然了,如果是感谢神的眼泪OK,可他们就好像是个坏事,也有可能他们也觉得这是好事只是表现不一样,但是我就觉得这是一个值得庆祝的事,但是在人的逻辑里头这不是好事。
所以耶稣就转过身来说:撒旦,退到我后面去吧,为啥?因为你只体贴人的意思,不体贴神的意思,所以人的意思和神的意思经常是相反的。你比如说人会体贴肉体,但是神体贴我们的灵,这完全不一样。那神认为你少吃一顿两顿没啥了不起,那你要是少吃一两顿你爸你妈都着了急了,就是人在乎的东西很邪性。
前几天我刚刚服侍了一个妈妈的女儿,后来我发现问题就是吃多了,一吃多她不就病了吗?那还有的人我说他吃多了跟我翻脸的,他就说:那咋的,我就吃那点还不行?我是为他好,但是人家听不进去,后来神一管教多好,吃多了以后什么撒尿拉屎的这些毛病都冒出来了。我告诉她们是吃多了的问题,这两天她们就少吃了,然后就好多了。
人的逻辑和神的逻辑完全相反,一个属肉体的人体贴肉体的事儿,属灵的人体贴属灵的事儿,今天咱们要开始重新调整。其实我告诉你,我们应该效法耶稣的死,我常常鼓励大家把生死看透,但看透的有几个呢?其实很少,我常常鼓励大家把活着这点小事儿看明白,哎总看不明白。
整天纠结的那些事儿,哎呦,一会儿工作了,一会儿又是工作了,工作完了又开始纠结老婆了,有的人纠结的是啥呢?纠结的是绿帽子,反正纠结啥的事都有,纠结工作的、绿帽子红帽子的、吃的、喝的,反正属肉体的人就是这样。
那你如果用属神的逻辑看,哎呀这些事儿都不是事。今天呢就开始重新调整我们的想法,人一旦属肉体的过日子,他肯定是离神的愤怒不远了。弟兄姐妹别忘了神常常见证我们的不是,就如同耶稣一样,耶稣说:把人心里的隐情显露出来。
这次的答疑就到这儿,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미가서》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미가서》는 매우 독특한 책이라 여러분도 읽기 어렵고 저도 읽기 어렵습니다. 오늘 나눌 1장의 주제는 《만민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의 잘못을 증언하시리라》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몇 글자를 줄여서 제목을 잡았는데, 원문은 이렇습니다. “만민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에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칭찬하지 않으실까요? 사실 우리 사람에게는 정말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사람은 늘 ‘나 좀 칭찬해 줘,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봐줘’ 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전히 형편없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은 흔히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나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끝장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실 우리를 거의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진노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혜이며, 하나님은 늘 우리를 참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고자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의 기이한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주 여호와께서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멈추어 서지 말고 힘써 추구하며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가서》 개요
《미가서》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며, 그중에는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가서》 4:1-2)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이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야 한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마지막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어나 이 산으로 모여들게 될 것인데, 이 산이 바로 진리의 산입니다. 오늘날 화인 사명 신학이 진리의 산을 오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나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 6:8)
이 두 구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며, 모두 미가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는 이루어 드렸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직 아슬아슬합니다. 적어도 제 자신부터가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미가는 어떤 상황 속에서 《미가서》를 썼을까요? 히스기야라는 꽤 훌륭한 왕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히스기야 왕이 재위하던 시절이 바로 미가가 이 미가서를 기록하던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좋은 왕이었는데, 하나님은 왜 그를 칭찬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선지자 미가를 통해 너희의 잘못을 증언하겠다고 하셨을까요? 그 시대에는 아무리 훌륭한 히스기야 왕이라 할지라도 유다 온 나라의 문화를 바꾸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다라는 나라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옆에 있던 이스라엘 왕국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이때 이미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가서》가 기록된 시점이 멸망 전인지 후인지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지만, 멸망해 가는 과정 중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지만, 유다 온 나라는 백성들이 타락해 있었기에 히스기야 같은 왕 한 사람으로서는 그 모든 문제를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 나라의 부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오직 이익만을 좇았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나라에서 미가가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공의를 행하지 않고, 인자를 사랑하지 않으며, 겸손한 마음을 품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옆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나라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을 일으키셨는데, 그들은 지극히 강성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유다 나라에 미리 경고하셨고, 유다 나라는 앗수르 제국에 의해 거의 멸망할 뻔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거의 죽을 뻔하고, 거의 망할 뻔하며 여러 가지 일을 겪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에 경고를 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심해라, 옆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를 보았느냐? 너희가 보았다면, 그것이 바로 너희의 결말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익만을 좇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오늘날을 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라이브 방송에서 한 그리스도인이 돈을 너무 벌고 싶어 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않자, 성경책을 척 꺼내 들면서 ‘내가 이걸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당신들을 속이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사기꾼일 뿐입니다.
앞으로 누군가가 ‘나를 믿어 달라’며 십자가를 척 꺼내 보여도, 제발 믿지 마십시오. 들으셨습니까? 관우 상을 꺼내 들어도 믿지 말고, 보살 상을 꺼내 들어도 믿지 마십시오. 유다 나라가 이랬습니다. ‘나 이거 믿는 사람이야’ 해놓고 결국 처참하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오직 이익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나 그 세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 백 년 전부터 이 유다 나라에 경고하셨는데, 결국 백 년 후에 바벨론 왕국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점입니다. 그때 바벨론이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어서 유다 나라까지 멸망시켰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어디까지 쳐들어왔었습니까? 이미 라기스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라기스는 한 지역인데, 눈앞에서 예루살렘을 집어삼키려던 찰나에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유다 나라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유다 나라가 그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또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앙을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미리 일깨워 주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이 이렇습니다. 어떻게 더 일깨워 주어야 합니까? 이따금 허리가 아프고, 이따금 배가 아픈 것으로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경고하셨습니다. 이따금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우며, 눈이 흐릿해지고, 혈당이 떨어지거나 오르고, 혈압이 오르거나 내리는 것으로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주 경고하시지만 사람들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제가 섬겼던 사람들 중에도 “좀 나아지셨습니까?” 하면 “좀 나아졌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미가서》인데, “시간이 없어요, 《미가서》를 들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여호와께서 내 잘못을 증언하시는 것을 들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좀 칭찬해 주시기를 바라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미가서》의 개요는 우리에게 훌륭한 경고를 줍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하지 말고, 오늘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쉰, 예순이 되어 빚더미에 올라앉고 나서는 저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왜 저를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셨을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남 탓을 참 잘하시는군요. 이 책임을 어떻게 하나님께 돌립니까?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당신이 걸어온 것 아닙니까? 사기당한 것도 당신 스스로 당하겠다고 따라간 것 아닙니까? 제가 예전에 그건 사기라고 권면했는데, 왜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의 평생이 이렇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기 전에는 돌아설 줄 모르고,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으신데,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만민 가운데 우리 같은 작은 백성도 포함됩니까? 우리는 만민 가운데 있는 백성 중 하나입니다. 만민이 다 들어야 한다면, 우리 백성들도 들어야 합니다.
선지자 미가가 본 환상
선지자 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늘 나쁜 소식만 전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참 묘해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입만 열면 자기가 본 환상을 말하고, 받은 묵시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와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광경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답답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왜 굳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가?’ 너무 답답하셔서 보좌에서 일어나 성전에서 나와 땅의 높은 곳에 서신 것입니다. 땅의 높은 곳에 서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분의 진노를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진노하셨습니다. 이 진노는 그 시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백 년 후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이 환상을 보고 마음속으로 극심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의 백성이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산들이 갈라지고 녹아내리는 것이 마치 불 앞의 밀초 같았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예루살렘의 온 대지가 밀초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본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의 죄과 때문입니다. 무슨 죄과입니까? 공의를 행하지 않고, 인자를 사랑하지 않으며, 겸손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며, 오직 명예와 이익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예와 이익을 좇는 것이 지극히 정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디가 흥미로울까요? 미가가 이 환상을 보았을 때 사마리아, 곧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그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조금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의 형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관계는 중국 본토와 대만, 혹은 남북한과 비슷합니다. 원래 한 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사마리아에 아주 훌륭한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 이름이 사마리아였습니다. 사마리아 성을 건설한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이 아합은 꽤 대단해서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고 경제도 매우 발전시켰으며, 그 영향은 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은 꽤 유능했습니다. 왜 유능했을까요? 사람의 이기심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이용할 줄 모르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중국 속담에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이기심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경영할 수 없고 국가라는 기계를 작동시킬 수 없습니다. 누가 공짜로 일해 주겠습니까?
아합은 사람의 이기심을 이용해 공의를 행하지 않고, 인자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습니다. 경제는 극도로 발전했지만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임했습니다. 그나마 유다라는 나라는 형편이 좀 나았는데, 미가는 환상 속에서 이러한 결말을 보았고, 또한 이런 일이 유다에도 임할 것을 보았습니다.
선지자가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다
미가는 유다 나라를 몹시 사랑했고, 예루살렘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읍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산들이 갈라지고 여러 산이 그분의 발아래서 녹아내리니 마음이 너무나 아팠던 것입니다. ‘아, 사람이 어찌하여 이 헛되고 헛된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오늘 저도 여기서 외치고 있습니다. 다행히 발성 연습을 해 두어서 소리를 질러도 목이 쉬지 않지만, 어떤 분들은 목이 다 쉬도록 외칩니다.
제가 여기서 외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야 하나님을 경외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겪어야 회개하시겠습니까?” 제 마음은 늘 안타깝습니다. 형제자매들이 타락 속에서 망해 가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유다 나라의 많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고,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답답한 마음에 성전에서 나와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과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선지자는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며 통곡하고 애통해했습니다. 신발만 벗은 것이 아니라 옷까지 다 벗은 채로 통곡하며 뛰어다녔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그랬겠습니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 아빠, 길거리에 어떤 사람이 발가벗고 뛰어다녀요”라고 하니, 아빠가 “상관하지 마라, 미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격입니다. 그가 미쳤습니까? 미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미가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벗은 몸으로 뛰어다니는 방식을 종종 사용하셨습니다. 선지자의 마음에 있던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알몸으로 뛰어다녔겠습니까? 묻겠습니다. 고급 백화점이나 빌딩에서 갑자기 어떤 여자가 알몸으로 튀어나왔다면,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그렇겠습니까?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그런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행히 그 시절에는 길거리에서 그렇게 뛰어다녀도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맨발과 벗은 몸으로 며칠을 뛰어다니다가, 나중에 다시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니 종업원이 “어라, 며칠 전에 발가벗고 뛰어다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요? 오늘은 웬일로 옷을 입으셨어요?”라고 하는 꼴입니다. 선지자는 이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당신에게는 안 팝니다. 국수 한 그릇 주세요. 없어요, 우리는 미친 사람에게는 안 팝니다”라며 모두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그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평안을 외쳤습니다. 교회 안에서 줄곧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치다가 결국 암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교회에서 줄곧 평안만을 외치다가 속이 곪아 터져 암에 걸려 온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암에 걸린 것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평안해졌습니까? 진작에 주 여호와께서 너희의 잘못을 증언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평안하다고 말하던 자들은 다 헛소리를 한 것 아닙니까? 엉터리 평안입니다. 평안을 말하기는 쉽지만, 참된 평안을 누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선지자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선지자가 분명 미쳤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좋은지 봐라, 경제가 얼마나 좋은지 봐라, 우리 사업이 얼마나 잘되는지 봐라.” 그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까? 선지자는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지만, 선지자는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보았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미래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는 두 종류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평안만을 말하기 좋아하는 선지자로, 다 가짜입니다. 다른 한 종류는 늘 여러분의 잘못을 증언하는 선지자로, 이는 진짜입니다. 제 마음에는 늘 탄식이 나옵니다. ‘사람은 왜 굳이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일까?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증언이 부족하단 말인가? 하나님이 주신 경고가 부족하단 말인가?’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저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왜 자꾸만 거듭하여 죄 가운데 살아가려 합니까? 이것이 제 마음에 가장 큰 고통입니다. ‘에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그냥 마음 편히 밥이나 먹고 즐겁게 술이나 마시자’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잘못 또한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발가벗고 길거리를 한 바퀴 돌 자격도 없습니다. 경찰에 잡혀갈 테니까요. 그러니 길거리에서 알몸으로 다니는 일은 그만두겠습니다. 그 시절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았던 선지자 미가가 부럽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평안을 외치고 스스로도 평안하다고 느끼지만, 재앙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가라면, 재앙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오늘 다시 한번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두 번, 세 번 신호를 주신다면 결코 가볍게 넘기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선생님, 사실 저도 공의를 행하지 않은 건 아니고, 인자도 꽤 베풀었습니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겸손하셨습니까? 자신의 체면 때문에 실속을 다 버리더라도 자존심 싸움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면 끝장이고, 그중 하나만 걸려도 고통을 겪기에 충분합니다. 선지자가 벗은 몸으로 통곡하며 애통해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결코 스스로 이미 거룩해졌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임할 것입니다. 아합이 세운 사마리아 성은 파괴되었고, 한때 매우 번영했던 경제도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습니까? 유다의 산당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의 우상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들은 창기와 같아서 가정(하나님)도 챙기고 싶고 세상도 사랑하고 싶어 하며, 하나님의 복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짓는 죄를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거룩함을 이루려 해도 온전히 거룩해지기 어려운데, 스스로 이미 충분히 거룩하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안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면,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세상 사람들의 죄악이야 원래 그런 것이니 그렇다 쳐도, 하나님의 복도 받고 싶고 세상도 사랑하고 싶어 하니 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입니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 때문에 선지자가 벗은 몸으로 통곡하고 애통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영상이 올라온다면 조회 수가 폭발할 것이며, 당시에도 즉각 큰 뉴스가 되었고 지금도 뉴스거리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죄악을 분명하게 깨닫고 계십니까? 정말 분명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분명히 깨닫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께로부터 복도 받고 싶어 하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해 세상의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왜 우상을 숭배합니까? 세상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얻지 못하니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우상이 꽤 효험이 있어 보이니까 따라가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이 나라를 망치고 가정을 파탄 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파탄 나지 않더라도, 암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힘써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머릿속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단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국 한 대접에 쥐똥 하나가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힘써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음란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무작정 칭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시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통곡하고 벗은 몸과 맨발로 행하며 들개 같이 부르짖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미가서》 1:5-9)
이스라엘의 죄가 그곳에서 드러나다
이스라엘의 죄가 그곳에서 드러납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이름이라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모레셋가드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취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미가서》 1:10-15)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첫째, 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몸으로 수치를 겪는 일, 찢어지게 가난해져 입을 옷조차 없는 지경에 처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잘못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사아난 주민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잘못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벧에셀 사람들의 애곡으로 인해 여러분이 설 곳이 없게 됩니다. 벧에셀 사람들은 날마다 통곡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낳았는데 날마다 울어댑니다. 어디를 가나 곡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잘못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마롯 주민은 마음이 몹시 초조하여 급히 기회를 잡아 유익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루살렘에 신속히 임하게 됩니다.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왜 라기스가 말을 매었을까요?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 진을 치고 라기스로부터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의 죄과가 그곳에서 드러나 누군가가 여러분을 치러 온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읽어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평생 평안하기를 바란다면 지혜가 없이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제가 평소에 말씀드리듯, 언제 소변을 보고 대변을 볼 수 있을지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벼운 미열 하나로, 속이 뒤집히는 증상 하나로,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증상 하나로, 눈이 보이지 않는 증상 하나로 역사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유다가 모레셋가드에 예물을 보냅니다. 날마다 예물을 보내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좋지 않습니다. 오늘도 뇌물을 주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내일도 뇌물을 주며 사람을 찾는 것은 사람이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툭하면 패배하여 남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것 자체가 죄 때문입니다. 악십의 족속들은 이스라엘 왕들을 속였습니다. 남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빼앗을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걸핏하면 남에게 약탈당하고, 걸핏하면 강도를 만납니다. 사람의 머릿속에 품은 생각이 참으로 가증스럽고 더럽다 보니 결국 뿌리째 뽑히는 일을 당합니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는 격인데,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제 동창 하나도 그렇게 쇠망치로 맞아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그야말로 근본이 뿌리째 뽑혀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귀한 자들)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했습니다. 아둘람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숨었던 굴입니다.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쳐 숨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도구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온갖 죄를 드러내는 도구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작은 죄 하나를 지으면 내일 무슨 일이 생기고, 모레 또 죄를 지으면 또 다른 일이 생깁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일을 많이 겪었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길지도 않습니다. 2주만 지나면 틀림없이 잊어버립니다.
옷을 찢고, 아예 마음을 찢어야 하는데, 2주만 지나면 상처가 아물어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상처가 아물면 흉터의 아픔을 잊는다’는 옛말이 참으로 정확합니다. 오늘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겨 죄를 처리하지 않고 있으면 즉시 일이 터진다는 점입니다. “제가 과거의 죄는 잘 처리했는데요”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도 처리해야 할 죄가 남아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기적으로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대변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며, 두통이나 몸살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죄가 이러한 일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 그렇게 손해 보는 짓만 하고 사실 것입니까? 할 일 없다고 곰을 쑤시거나 멧돼지를 쑤시지 마십시오. 멧돼지가 들이받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건드려서야 되겠습니까? 할 일이 없어서 하나님을 건드리십니까? 이제는 조금 더 지혜로워집시다.
유다가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미가서》 1:16)
제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반응은 대개 비슷합니다. 다들 괜찮다고 하고, 사업은 여전히 돌아가니 눈앞의 이익만 바라봅니다. 이 구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흉측한 몰골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생님, 제 디자인 어때요?”라고 묻길래 보니 참으로 흉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제가 칭찬해 줄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유다의 자녀들을 왜 이토록 흉측하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적들이 보고도 욕보이고 싶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포로로 끌려가면 적들이 제멋대로 대할 텐데,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셔서 백 년 전부터 경고하셨고, 사실은 이백 년 전, 삼백 년 전부터도 경고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모세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지난 때입니까? 모세로부터 약 15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모세의 경고가 귓가에 우레처럼 맴도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선지자를 통해 벌거벗고 맨발로 통곡하며 울부짖게 하셨고, 날마다 외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았습니다. 결코 이 타락의 길을 향해 계속 질주하지 마십시오. 멸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마십시오.
저는 무지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만 있었어도 그런 비참한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완악하여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고, 미가가 틀렸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너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병에 걸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착오를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서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틀리지 않으시고, 귀신도 틀리지 않으며, 틀린 것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신호가 오고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완악하게 굴지 말고 속히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한마디를 평생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도 틀리지 않으시고, 귀신도 틀리지 않으며, 앗수르도 틀리지 않았고, 바벨론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틀린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이었고, 결국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 유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곧 백 년 후에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다시 칠십 년이 지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는데도,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었습니다.
제가 줄곧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왜 그렇게 세상살이에만 집착할까요? ‘사람이 먹고사는 일을 안 하면 뭘 하겠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먹고살아야지요. 하지만 살더라도 재앙 속으로 빠져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구별하여 드려야 할 시간을 드려야지, 거꾸로 작정하고 하나님을 거역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이 성경공부가 얼마나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까? 온갖 세미나(seminar)에 갈 시간은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은 없고, 오직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오늘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우리의 잘못을 증언하시리라.’ 이 말씀을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