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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요한일서 3장 -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

2023-12-27 34,995 约翰一书 约翰一书03章 约翰一书第三章 神的标准 为爱弟兄的心舍命 所求的神都应允 彻底除掉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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约翰一书03章-彼此相爱
  • 1 你看父赐给我们是何等的慈爱,使我们得称为 神的儿女;我们也真是他的儿女。世人所以不认识我们,是因未曾认识他。
  • 2 亲爱的弟兄啊,我们现在是 神的儿女,将来如何,还未显明;但我们知道,主若显现,我们必要像他,因为必得见他的真体。
  • 3 凡向他有这指望的,就洁净自己,像他洁净一样。
  • 4 凡犯罪的,就是违背律法;违背律法就是罪。
  • 5 你们知道主曾显现,是要除掉人的罪,在他并没有罪。
  • 6 凡住在他里面的,就不犯罪;凡犯罪的,是未曾看见他,也未曾认识他。
  • 7 小子们哪,不要被人诱惑。行义的才是义人,正如主是义的一样。
  • 8 犯罪的是属魔鬼,因为魔鬼从起初就犯罪。 神的儿子显现出来,为要除灭魔鬼的作为。
  • 9 凡从 神生的,就不犯罪,因 神的道(原文是种)存在他心里;他也不能犯罪,因为他是由 神生的。
  • 10 从此就显出谁是 神的儿女,谁是魔鬼的儿女。凡不行义的就不属 神,不爱弟兄的也是如此。
  • 11 我们应当彼此相爱。这就是你们从起初所听见的命令。
  • 12 不可像该隐;他是属那恶者,杀了他的兄弟。为什么杀了他呢?因自己的行为是恶的,兄弟的行为是善的。
  • 13 弟兄们,世人若恨你们,不要以为希奇。
  • 14 我们因为爱弟兄,就晓得是已经出死入生了。没有爱心的,仍住在死中。
  • 15 凡恨他弟兄的,就是杀人的;你们晓得凡杀人的,没有永生存在他里面。
  • 16 主为我们舍命,我们从此就知道何为爱;我们也当为弟兄舍命。
  • 17 凡有世上财物的,看见弟兄穷乏,却塞住怜恤的心,爱 神的心怎能存在他里面呢?
  • 18 小子们哪,我们相爱,不要只在言语和舌头上,总要在行为和诚实上。
  • 19 从此就知道我们是属真理的,并且我们的心在 神面前可以安稳。
  • 20 我们的心若责备我们, 神比我们的心大,一切事没有不知道的。
  • 21 亲爱的弟兄啊,我们的心若不责备我们,就可以向 神坦然无惧了。
  • 22 并且我们一切所求的,就从他得着;因为我们遵守他的命令,行他所喜悦的事。
  • 23  神的命令就是叫我们信他儿子耶稣基督的名,且照他所赐给我们的命令彼此相爱。
  • 24 遵守 神命令的,就住在 神里面,神也住在他里面。我们所以知道 神住在我们里面是因他所赐给我们的圣灵。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일서> 3장을 함께 배우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정말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은 이후로 한 번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고, 이전에 읽었던 관련 성경공부 자료들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설명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들이나 저나 다를 바 없이 모두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데, 왜 다들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날마다 죄를 짓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3:9)

하나님의 기준은 결코 낮아진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온종일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논리 체계를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직이나 지위를 얻으며 살아가는데, 당신은 관절염에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며, 갖가지 이상한 병이나 심지어 암에 걸려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는데, 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까요?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우리 안의 논리 체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이건 불가능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이러면 끝난 것이고, 더 이상 성경을 읽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 3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우리 마음 판에 깊이 새겨지게 하십시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큰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며, 죽기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명이며, 군령과 같이 엄한 것이니 장난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밥을 먹여주는지, 돈을 주는지, 약이 되는지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의문이 아니며, 저의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혼란

제 생각에 당시의 교회도 사도 요한이 쓴 이 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수많은 문제와 혼란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끊임없이 교회 안으로 파고들고, 귀신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귀신은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붙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겁을 좀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신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사탄이 귀신들에게 교회를 무너뜨리면 상을 주겠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귀신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나이트클럽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굳이 무너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귀신은 교회 문앞에서 기회를 엿보며 기다립니다.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드나들 때 틈만 나면 귀신이 붙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 안에 담겨 있는 체계가 귀신과 같은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수년간 저는 사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깊이 배웠습니다. 이전에 섬겼던 어떤 성도는 싱가포르에서 10년을 살았지만 빈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재정 상황을 보며 본인도 괴로워했고, 우리도 함께 애가 탔습니다. 때로는 서둘러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만약 키도 작고 못생겼으며 부유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다면 더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그녀 안에 있던 귀신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노래를 전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 귀신을 쫓아내자 경극을 부르기 시작하더니 전문가 수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희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에게 붙은 귀신의 이름은 '샤오칭(小青)'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 대 전에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부잣집의 첩 중 하나가 샤오칭이었습니다. 생전에 늘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목을 매고 자살했던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대에 이르기까지 샤오칭이라는 귀신이 그녀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의 체계가 세상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교회에 와서 우리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귀신은 더 이상 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이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제가 나가라고 명령하자, 귀신은 갈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가라고 했더니 그것도 거절하며, 반드시 교회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자신에게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담 임무를 주었기 때문에 나이트클럽에 가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죽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보이스피싱 조직처럼 매우 잔혹했습니다. 귀신도 사실 매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 친구가 목사로 있는 다른 교회로 가라고 권유했더니, 귀신은 그곳에 가려 하지 않으며 그 교회 사람들은 다 농민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귀신 주제에 가리기까지 하냐"고 했더니, 농민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는 특별히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도 요한 시대에도 귀신들이 똑같은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드러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무너진 교회는 다시 가 무너뜨려도 상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에 종교적인 겉옷을 덧입히고, 목회자가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옆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처럼 말로만 그치는 짓입니다. 겉치레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옆 사람과 포옹하고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따위의 일은 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와 혼란은 모두 영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가장 겉치레를 좋아하며,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진짜 믿지 않는 곳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두 겉치레만 하는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행위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굳게 믿으며, "바울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으며, 예수님을 자신들의 걸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걸레가 얼마나 쓰기 편합니까? 쓸 때 한번 쓱 닦으면 그만이고, 예수님의 보혈이 있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소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한일서> 3:11)

사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러분이 옛 계명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마치 새 계명을 전하는 것처럼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래전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이 기준은 결코 낮아진 적이 없습니다. 율법은 본래 요구 조건이 매우 낮은 마지노선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미 율법을 초월한 것이므로 율법을 지킬 필요조차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히 그 자리에 당당히 서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사랑타령만 끝없이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한 혼란이 찾아옵니다. 바울이든 요한이든 그들이 이 기준을 다시 하나님의 높이로 끌어올렸는데,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왜 읽으면서 멍해질까요? 지금 손을 가슴에 얹고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자녀입니까? 마귀의 자녀는 죄를 짓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겨우 반만 태어난 난산 상태라며 핑계를 대는데, 그렇다면 그의 머리가 서양호박처럼 짓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더 이상 이런 혼란을 겪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니, 더 이상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한다면 이런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겠습니까? 얼굴을 붉히고 정색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표정을 굳히고 대들며, 그것도 심하게 따지고 드는 이유는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언제 저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입으로는 저를 무척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전 교회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에게 따지고 들겠습니까?

제가 기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면 우리 사이에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나는 당신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고, 당신은 당신의 육신을 따르고자 하니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수많은 혼란을 해결해 주었는데, 가장 먼저 해결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기준의 문제입니다. 비록 아직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의 기준을 향해 매우 열심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고, 모두가 치유받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시대든,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대든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응답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구름같이 허다한 간증이 나타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만족할지 몰라도 저는 아직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많은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님을 닮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혼란은 바로 사랑에 대한 혼란입니다. 우리의 질의응답에 나오는 수많은 질문도 다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들이 저를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제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라는 확고한 관점이 있어, 모든 혼란을 단번에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혼란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장 혼란을 주는 단어입니다. 지난 수년간 제가 가장 많이 경험한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많은 부부 사이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물고 뜯으며 상처를 줍니다. 사실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의로 그를 괴롭게 만들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지만, 당신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매우 괴롭게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혼란은 모두 육신적인 사랑을 사용하고 세상의 논리 체계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 아니며, 많은 것들이 매우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속하고 육신에 속한 사랑은, 비록 '사나운 호랑이라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육적인 사랑일 뿐이며,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이 사랑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누군가 입으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쉽게 내뱉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당신이 만 번을 외치고 내가 2만 번을 외치며, 할 일 없이 차를 우려 마시며 목이 마를 때까지 서로 외치다가 차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외친다 한들, 그것은 아무것도 대변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자매가 질병의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제가 병상에 누워 있다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정말 묻고 싶습니다. 대답도 못 할 것이면서, 그저 입만 살아있는 싸구려 주전자처럼 굴 뿐입니다. 이제는 그 싸구려 주전자마저 입만 뻣뻣하게 굳은 오리 주둥이처럼 고집만 세졌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의 찬양 한 곡 불러드리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 혼란에 직면했을 때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일서> 3:16)

진정으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수준의 상태는 가르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교회를 청결하게 섬겨왔습니다. 교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그의 이름으로 하나의 영을 정의했을 정도였으며, 훗날 그가 제 설교를 듣고 또 자기 이야기를 했다고 할까 봐 여기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는 발바닥에 종기가 나고, 동성애를 하다가 생식기에 온갖 질병이 생겼으며 무좀도 있었는데, 제가 다 기도해 주어 낫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고혈압, 할머니의 뇌출혈도 제가 기도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피해망상증에 걸려 죽네 사네 하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제가 섬겨서 온전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때는 제 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오기만 하면 저는 제 일을 내려놓고 그를 섬겼습니다. 세상적인 말로 해도 이 정도면 참 의리 있게 대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그가 취직하여 일하게 되자, 저도 그를 밀어붙여 사역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처럼 새벽 두 시까지 섬기지 못하면 우리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몇 시까지 섬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밤 10시 반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약 내가 너를 섬길 때 밤 10시 반에 자러 들어갔다면, 지금의 네가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귀신도 가기 싫어하는 교회로 갔습니다. 귀신도 가기 싫어하는 교회에 그는 왜 가기로 선택했을까요? 떠나기 전에 그는 저에게 무척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듣기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하며, 차라리 나를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는 잠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들을 탐방해 보고, 탐방해 봐서 별로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스페어타이어 취급한 셈인데, 탐방하고 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교회를 찾았다고 다시 전해왔습니다. 과연 육신을 위하는 목회자가 육신을 위하는 성도를 양육하는 격이었으니 아주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저는 이런 입발린 사랑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혼란에 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예수님의 모습대로 행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의 기준대로 행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제 얼굴을 보고 매우 지혜로워 보인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손해라면 저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손해라면 저 역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 십일조를 아끼면 1년에 고작 2천 위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적은 급여에서 아껴봤자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를 세전 10%로 계산해야 하는지 세후로 해야 하는지, 집을 판 돈은 양도차익으로 계산해야 하는지 매매 총액으로 계산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이 일을 유익하다고 여기는지 손해라고 여기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 목숨도 하나님의 것인데, 돈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게 복을 주시는데, 마치 하늘에서 떡이 떨어져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떡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목에 턱 걸치기만 하면 입만 벌려 먹으면 될 정도로 은혜가 넘칩니다.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남는 장사이니 바보같이 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매우 영리해 보이지만,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한눈에 봐도 매우 어리석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 내면의 가치 체계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에 대해 혼란을 겪는 것은 실상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논리와 가치가 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준이지만, 당신이 정한 기준은 비표준(非標準)이며, 그것은 당신 스스로도 통할지 어떨지 모르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모두 손해입니다. 왜 비표준을 만들어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본을 보이시며 목숨을 버리셨고, 이로써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얼핏 들으면 무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형제를 위해 칼을 맞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영원 속에 살면서 영생을 믿지 않으면 이 길을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돈만 믿는다면 그냥 열심히 돈을 사랑하십시오.

이전에 한 사역자가 저에게 자신은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달부터 돈을 주지 않을 테니 거저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그는 불편해하며 자신도 주택담보대출을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을 왜 합니까? 그래서 저에게는 몇 가지 습관이 있는데, 사람들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진실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까? 만약 제가 정말로 월급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로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우리 중의 한 동역자처럼 밖에서 직장 일을 하고 제가 사례비를 주어도 그 사례비를 전액 헌금하는 것처럼, 이것이 진정으로 남는 장사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형제라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만, 저는 아직 당신에게 저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정말로 목숨을 버리라고 요구한다면 당신은 진작에 발에 기름을 바르고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정말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요? 뼛속 깊은 곳에 있는 본모습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직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죄가 있는 것을 무죄하다고 포장하지 말고, 거룩한 척하지 말며,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더러움을 보십시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예수님께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매우 거룩하다고 여기며 길거리를 어깨에 힘주고 활보하며 머리에서 신령한 김이 모락모락 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통하지 않으며 예수님도 당신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처리하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평범한 기준이 아닙니다. 생사를 초탈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하찮은 일들을 꿰뚫어 보아야 하며,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소망이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의 혼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일서> 3:14)

당신이 한밤중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주어 병이 낫게 하고, 대가를 조금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당신의 핵심 이익이 심각하게 침해당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실제로 닥치지 않고 모의 훈련만 해보아도 당신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죄를 해결하는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저주를 끊어내는 기도를 할 필요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저주가 단번에 청산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시험해 보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고 모욕했을 때도 우리를 짓밟아 죽이지 않으셨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기준으로 달아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록 몇 명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저 역시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가늠합니까?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으시는지, 즉 제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응답해 주시고 기억해 주시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혼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4-10)

이 말씀은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왜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혼란스러워하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합니다. 사람이 왜 죄를 짓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들어차 있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영적 흑암의 세력(老马)입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죄를 짓고,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속으로 '너희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가 죄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왜 굳이 내 앞서 달려가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마귀에게 속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마귀가 당신 안에 거하는 것이 합법적이 됩니다. 할 일 없이 선악을 분별하고 육신을 위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가늠하는 기준이 있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이 기준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지,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이 손해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사람이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이며, 죄에 대해 매우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마귀가 당신을 찾아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마귀 떼를 보내 당신을 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혼란과 죄에 대한 혼란을 모두 해결하십시오. 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려 하지 마십시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노력하는 태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의 태도를 올바르게 조정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지만, 태도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우리 안의 태도는 너무나 악합니다. 서로 다른 교회에서 왔든 우리 교회에서 자라났든 간에, 겉으로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일에는 매우 능숙합니다. 우리는 이 거짓된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진실하게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귀신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고 사람에게도 잘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승 노잣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못할까요? 자기 집 베개 밑에 저승 노잣돈을 잔뜩 넣어두고 자기가 죽을 때 태워달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초록색을 보면 달러인 줄 알고, 붉은색을 보면 100위안짜리 묶음 돈인 줄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일을 바로잡아야 하며, 우리는 가인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한일서> 3:12)

사람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아무리 많은 혼란이 있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몸의 질병은 범죄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미 자신의 죄로 인해 무거운 대가를 치렀는데, 왜 여전히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계속합니까? 왜 끝까지 이처럼 어리석게 굴며, 도대체 언제까지 미련하게 굴다가 죄악을 떠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저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요구할 자격은 없지만,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도록 스스로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면 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세상이나 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화인 사명 신학의 중요한 논점입니다. 이것은 올해 들어 새로 만들어진 말이 아닙니다. 수년 전부터 제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저는 매일 이 일을 묵상했고, 30대부터 예수님을 무척 닮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네 꼴에 감히 예수님을 닮으려 하느냐'며 한마디로 저를 깎아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며, 주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일서> 3:2-3)

마지막 날에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매우 유머러스하신 분이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죽인 유대 대제사장들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주 예수님께서 벽을 뚫고 들어가 유대 대제사장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 다시 살아났다"고 하셨다면 그들은 놀라 까무러쳤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자신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지금도 날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무엇을 나타내십니까?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덮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하기를 갈망합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것을 믿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으며, 우리의 논리 체계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텐데, 세상을 사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존귀한 왕자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한다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늘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존귀한 왕자임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나아가 우리 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가 쥐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사람의 논리 체계가 왜 가인을 닮으려 합니까? 가인은 정신병자처럼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단지 자신이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 아우를 쳐죽였습니다. 왜 그를 닮으려 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계명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이토록 유익한 일을 왜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작은 흠집만 보여도 버럭 화를 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안의 상태를 명확히 정리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를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싶습니까? 당신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당신의 창조력은 폭발할 것이며, 내면의 복된 것들도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위의 수많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겠습니까?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한일서> 3:17)

어떤 사람들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물론 마약 중독자의 마약 빚을 갚아주거나 도박꾼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한 끼 식사가 부족하다면 밥 한 끼 값을 주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시내에서 국수 한 그릇이 15위안이라면 외곽에 가면 7위안이면 먹을 수 있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송금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죄를 이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죄가 네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당신은 가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여전히 선악을 분별하겠습니까? 아무리 선악을 분별하려 해도 자신에게 선악을 분별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상태를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 천 가지 만 가지 이유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닮지 않은 것이라면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당신의 논리일 뿐이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음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것은 참으로 남는 장사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믿으십니까? 만약 당신이 세상과 육신에 속한 것들의 위험성을 알지 못한다면 정말로 고통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면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9-11)

당신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먹을 것은 오늘 반드시 있고, 내일 먹을 것도 내일 있을 것이니 모레 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 3:22-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어찌 받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의 안팎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으며, 베푸는 삶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천천히 깨달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므로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만약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이 논리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내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네"라는 찬양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습니까? 아무리 찬양을 불러도 소용없습니다. 저 역시 "내일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라는 식의 마음의 위로를 던져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일은 더 나빠질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위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 체계를 세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 상급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 세상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됨을 알게 됩니다. 하늘로 돌아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장차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함께 이 땅을 다스리며 만왕의 왕 아래 있는 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두 개의 성읍을 다스리게 될 텐데, 당신은 어느 성읍을 다스리고 싶습니까? 란저우입니까, 우한입니까, 아니면 항저우입니까? 장차 그 성읍들이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는 알 수 없으나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며, 어쩌면 하나님께서 싱가포르를 맡기실지도 모르니 그때는 잘 다스리십시오.

우리 안의 가치 체계가 새롭게 세워졌습니까?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제자매들이 제 갈 길로 치우쳐 행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몹시 괴롭습니다. 이러한 근심으로 인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속에서 요동치며 소란스러워져 범죄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분별했기 때문이며, 사람은 자기 기준대로 보게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은 행함을 낳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집을 팔고 나서 십일조를 드릴까요? 그것이 옳고 복된 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집을 팔고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데, 돈을 쥐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손해라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러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사람의 내면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결정되며,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우리 안의 논리에 기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장차 아들에게 집도 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귀신이 찾아와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귀신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귀신을 보내 당신을 치실 텐데,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내면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새롭게 재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을 그토록 중하게 여긴다면 형제를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갈 수 없으며, 영원한 영광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돈이라는 작은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관문은 어떻게 넘어가겠습니까? 이제 결단하여 돌아가서 <요한일서> 3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고, 과연 그러한지 확인해 보십시오. 단 몇 마디 말씀만으로도 우리 안의 거짓된 껍데기는 벗겨질 것이며, 우리 안의 가치 체계가 과연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일단 깨닫게 되면 한순간에 모든 혼란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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