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1. 서론
오늘 전할 말씀의 제목은 참으로 좋습니다. 바로 ‘영광의 그릇이 되십시오!’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 무수히 많습니다. 사람이 만든 물건 중에는 존귀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비천한 것을 나타내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물 하나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와! 이 보물은 조각도 꽤 훌륭하게 잘 되어 있었고, 고대 어느 왕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 같아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아꼈습니다. 때로는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정교했습니다. 손잡이도 있고, 주둥이도 있고, 볼록한 배도 있는 어엿한 용기이자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어, 이 보물이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는지 골동품 감정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아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감정해 보고 나서야 그것이 ‘요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요강이 뭔지 아십니까? 요강은 쓸모가 있습니다. 아주 쓸모가 많지요.
요강이 뭔지 모르시나요? 쉽게 말해 밤에 오줌 누는 그릇입니다. 너무 노골적인가요? 요강(夜壺)이라는 아주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오줌통입니다. 병들어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그것을 다시는 손에 들고 감상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 요강으로 술을 꽤나 마셨는데, 그때는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그 요강은 한구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왜일까요? 그런 물건을 손에 쥐고 노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실 말씀드리자면 참 괴이한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할 짓이 없어서 요강을 그렇게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겠습니까?
사실 어떤 집에 갔을 때 그 집이 고급스러운지 아닌지를 보려면, 화장실과 변기를 봐야 합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하지만 그런 물건을 두고 고급스럽다거나, 존귀하다거나, 영광스럽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고대 중국에서는 상인을 몹시 천대했습니다. 사실 고대 중국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상인을 천시한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훗날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고 경제를 살리면서 상인이 큰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고대에는 상인을 가리켜 ‘황제의 요강’이라고 빗대기도 했습니다. 황제가 다급해지고 국고가 비면 상인이 절실히 필요하니 급할 때는 한번 쓰고, 급하지 않으면 내팽개쳤기 때문입니다.
‘만 가지가 다 하품(下品)이요, 오직 글공부만이 고귀하다(萬般皆下品 唯有讀書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사상에 물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만든 그릇에도 귀한 것과 비천한 것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다 똑같을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그렇다고 합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때로 ‘일언구정(一言九鼎, 한마디 말이 아홉 개의 솥처럼 무겁다)’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정(鼎, 솥)’은 매우 존귀한 상징입니다. ‘일언구정’, ‘문정중원(問鼎中原)’처럼 정(鼎) 자와 관련된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은 참으로 존귀한 그릇입니다. 존귀하든 비천하든 모두 그릇입니다.
그것이 쓸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실 요강의 쓰임새가 솥의 쓰임새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요강의 쓰임새가 꽤 크지 않습니까? 아래쪽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위쪽 문제도 골치 아파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먹으면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아래쪽이 해결되지 않으니 위쪽도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영광의 그릇’입니다. 영광의 그릇이 되는 것, 여러분은 요강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그릇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난도가 있습니다.
지난 세월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의 내면의 생각이 참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너무나 기이해서 도대체 어떤 논리로 그런 결론을 도출해 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치밀하게 계산한 것도 아닌데, 어떤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길을 택합니다. 치밀한 계산을 거친 것도 아닌데 결국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의 온갖 근심으로 찔림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깊이 계산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합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람이 설득한다고 해서 설득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보려고 시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천지가 개벽할 만한 표적을 경험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것이 참 신기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천지가 뒤집히는 표적을 경험하고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내 여전한 모습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기꺼이 비천한 그릇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이처럼 참 묘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나 이삭, 아브라함처럼 날 때부터 하늘의 일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멸망하여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오직 땅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이 원래부터 그러합니다. 그러면 그런 대로 두는 것입니다. 자식은 다 제 복을 타고나는 법인데 무엇을 설명하겠습니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 위한 그릇이 있으며, 그분께서 본래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처럼 스스로는 매우 존귀하다고 여기며 기세등등해했습니다. 애굽 땅에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들먹거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비천한 그릇이자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입니다. 이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겪은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열 가지 재앙이 닥쳤으니 요강으로 한두 사발 들이켠 것 이상의 고초를 겪은 셈입니다. 요강을 통째로 들이켜도 소용이 없었고, 여전히 열 가지 재앙 앞에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끝까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결국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른 것을 보고 ‘하늘이 주신 기회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고, 바로 왕은 홍해 바다 밑바닥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결말입니다!
제가 과거에 섬겼던 사람들 중에는 저를 너무나도 놀라게 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어젯밤에도 몇몇 형제자매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번 꺼내면 멈출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늘은 그중 몇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략 십여 년 전의 일인데, 어떤 분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들에게는 작은 병에 걸렸다고 말해놓고, 저에게는 “목사님, 제가 암에 걸렸어요”라고 하더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아이고, 암에 걸리셨군요! 저주가 참 깊네요.” 당연히 저주가 깊은 것입니다!
제가 “왜 저에게 전화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암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부작용 때문에 온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었더니 바로 다음 날 그 부기가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저 스스로도 깜짝 놀라 ‘와! 이분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광의 그릇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믿으라고 격려했습니다. 다 낫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남편이 밥을 해줘도 먹지 못했는데, 기도받고 다음 날부터는 남편에게 밥을 지어줄 수 있게 되어 부부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다 나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 나았을까요? 아닙니다. 뼛속까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굳이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축복받는 길을 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자매님, 이제 십일조와 헌금 생활을 제대로 배우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싫어요! 저는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갈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어라? 이상하네’ 싶었지만, 저는 이런 일을 만나면 더는 말하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Very good, very very good!” 정말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속으로 참 씁쓸했습니다. 3년 전에 그 교회에 다니다가 암에 걸렸는데, 발뒤꿈치로만 생각해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3년 전 그 교회에 다니다가 암에 걸렸고, 암에 걸린 후에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제가 돌봐주었습니다. 제가 헌금하라고 한 것이 해를 끼치려는 것이겠습니까, 축복하려는 것이겠습니까? 그녀는 제가 돈을 밝힌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정말 상관없습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월급에서 십일조를 내봤자 제게는 간에 기별도 안 갑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지역 교회로 돌아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흘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제가 주례 자격증이 있어서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제 옆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제 결혼식에 오실 수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아, 엄마가 지금 몸 상태가 이래서 갈 수가 없단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니, 다 나았는데 왜 못 오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누우면 숨이 차고 앉으면 잠을 못 자서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하더군요. 속으로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 생각이 엉덩이에 붙었나, 발뒤꿈치에 붙었나?’ 싶었습니다. 발뒤꿈치로 생각해도 그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다시 맡아서 사역을 섬겼습니다. 기도를 해주자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숨차는 것도 사라졌으며 모든 것이 좋아졌습니다.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아들 결혼식 주례를 제가 섰고, 그 어머니는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이 끝나고 저에게 묻기를 “유 목사님, 제 아들이 목사님을 따라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먹고살 수는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가를 치르는 교회이고, 정말 철저하게 대가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이 좋은 일인 줄 모르고, 그렇게 대가를 치르면 어떻게 사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내가 이렇게 섬겨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싶었습니다. 도대체 뇌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원숭이나 물고기 뇌가 더 나을 지경입니다. 나귀도 제 임자의 구유를 알고 소도 제 주인의 구유를 아는 법인데, 그런 사람을 두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욕설을 섞지 않고 말하지만, 욕을 안 한다 뿐이지 질책하는 말이니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꾸 나무라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지난 수년간 이런 경우가 소의 털처럼 수없이 많았습니다. 어제 한 자매를 맞이했는데, 문득 그 자매의 어머니를 섬겼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 어머니가 폐암에 걸렸는데, 전화로 사역을 해주었습니다. 상태가 나빠질 때마다 저와 제 동역자들이 함께 섬기며 살아있는 동안 꼬박 1년 가까이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거의 1년 동안 섬기면서 일상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기도하면 나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기도받으면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시골집이라 계단이 있었는데 밭에 나가 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변화되라고 요구한 것이 제게 무슨 유익이 있어서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변화를 요구한 것은 오직 영광의 그릇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1년 뒤에 “교회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왜 교회를 떠나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당신들이 나를 섬겨주며 그렇게 오래 기도했는데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본인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완전히 낫겠습니까? 그 정도 수준까지 호전된 것만 해도 의사들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폐암이 어떤 병입니까? 3~4개월이면 끝나는 병입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한 말씀대로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고자 했다면 그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녀는 교회를 떠나 누구를 따르려 했을까요? 바로 자기 어머니였습니다. 정작 자신이 암에 걸렸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해괴한 사이비 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곳으로 간 지 일주일 만에 악한 영에 끌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생각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참으로 기이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영광의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을 너무나 무겁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딸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은 참으로 음란하여 수수밭이니 옥수수밭이니 하며 온갖 추잡한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더러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듣고 나면 불쾌하고 메스껍기까지 합니다. 사람을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가 지난 세월 동안 감당한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수많은 놀라운 사역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뒤집히는 표적을 경험하고도 오늘날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에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들 대열에서 낙오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끌려오다시피 하면서도 끝까지 따라온 분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낙오했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영광의 그릇이 될 기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 나눔을 듣고,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던 자신이 참으로 복된 자임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그릇들이 많이 있으며, 기쁨과 자원함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섬김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놀라운 표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그릇이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을 향해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박수치며 응원할 것입니다!
영광을 받도록 예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영광을 얻도록 예비된 우리 같은 그릇들에게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얻고, 하나님의 권능을 증언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섬김은 제가 과거에 걸어왔던 길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섬겼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낙오했거나 세상을 떠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찬란하지 않습니까? 지난 세월 동안 끝까지 남은 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늘의 일을 마음에 품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눈에 보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며,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고, 이를 위해 태어났으며, 이를 위해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바보 같아 보이고, 할 일이 없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영광스러운 그릇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임을 알지 못합니다. 깊은 밤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면,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놓고 기도하며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 마음에는 감사함과 동시에 가슴 찡한 아픔이 밀려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비록 저 역시 그렇게 사역해 왔지만, 주변의 동역자들도 한밤중에 사역하는 저를 보며 감사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밤낮으로 사역하며, 때로는 제가 아픈 중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병들어 고통당하면서도 남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훌륭한 동역자들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는 훗날 저의 동역자가 되었는데, 퇴근하자마자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교회에 도착해서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막차 시간까지 섬기다가, 다시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왔습니다. 하루 이틀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자매는 석 달을 그렇게 지속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오늘날까지도 잊지 않고 마치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바로 영광의 그릇입니다! 석 달 후, 그 자매의 섬김을 통해 우울증 환자였던 지체는 완전히 자유케 되었고 지금은 아주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약함이나 허물이 전혀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한 걸음씩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헛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모든 계산은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들도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일지라도 저는 감사하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 영광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우리는 다 함께 영광의 그릇이 되어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성적표를 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으셨는지, 여러분을 위해 이 영광의 길을 어떻게 열어놓으셨는지를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권면하여 영광의 그릇이 됩시다. 인색한 자는 너그러워지고, 세상을 사랑하던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기적인 자는 나누어주는 법을 배우십시오. ‘어차피 주는 것이니 상관없다, 양털은 양의 몸에서 나오는 법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래일 뿐입니다. 양털은 양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개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영광을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지 않고 적습니다! 보물이 많습니까, 쓰레기가 많습니까? 쓰레기는 많지만 보물은 적습니다. 귀한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구원받는 자는 오직 ‘남은 자’뿐이었습니다. 많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많은 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보배여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9장 22절부터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 본문 말씀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로마서 9:22-24)
3.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기로 결단하며, 주님의 풍성한 영광을 얻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합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멸망할 그릇이 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자들이오니,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뵐 때까지 끝까지 주를 따를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사,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은 참으로 귀합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로마서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제가 쓴 로마서 강해 책의 제목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로마서 강해 책을 썼습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능력이 무엇을 합니까? 이 그릇을 빚으셔서 영광의 그릇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은근슬쩍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멸망의 그릇으로 지어졌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지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그럴 권한이 없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신학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인데 왜 멸망했을까?’라고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인들이 믿었던 복음이 다소 기이하여,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고 온갖 혼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인데 어째서 버림받았는가? 아, 하나님의 약속은 효력이 없구나’라는 식의 논리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생각도 이와 비슷합니다. 로마 교인들의 이러한 혼란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 그들은信仰의 기초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기초란 바로 하나님께서 멸망할 그릇도 만드시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낼 그릇도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시고 그렇게 행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하기로 작정한다면 혼란스러울 일투성이고, 걸려 넘어지기로 작정한다면 넘어질 기회와 핑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많은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예정된 자인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그들이 태어난 후의 삶을 보면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야곱의 일생이 에서의 일생보다 더 나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에서는 꽤나 화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작은 자가 큰 자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에서나 야곱이나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고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태어나서 실제로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결론을 보고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이 간섭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나도 상관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여긴다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면, 여러분이 한번 완벽한 공평을 보여줘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물을 담을 때 수평을 맞추듯 공평하셔야지 그렇게 편애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편애하신들 어쩌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면 베푸시는 것이니, 결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면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곰곰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예로 바로 왕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수많은 재앙을 겪었습니다. 성경은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왕을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애굽 인구의 20%가 죽었습니다. 다섯 식구 중 한 명이 죽었으니 20%가 죽은 것이며 가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그리 가혹하시냐고 하겠습니까? 가혹하시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막으려 해보십시오, 막을 수 있는가!
결국 바울의 신학관이 로마 교인들에게 설명하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변호하려 애쓰지만,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본래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앙망하는 법을 배우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신학적 관점인데, 어떤 이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로마서 9:19)
어떤 이들이 이렇게 질문했지만 바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질의응답을 할 때 바울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저도 어떤 질문에는 직접 대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로마서 9:20)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습니까? 진흙 한 덩이로 존귀한 솥을 만들고, 다른 한 덩이로 요강을 만든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드시는 분의 뜻입니다. 진노를 보이시고 권능을 알게 하시기 위해 멸망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그 풍성한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그릇들이 바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심의 문제가 논란이 됩니까?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지만,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과 행위 사이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그곳에 빠집니다. 또한 커다란 반석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그 반석에 걸려 넘어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넘어지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사도 바울이 사역할 때 느꼈던 그 안타까움을 깊이 공감합니다. 엄청난 표적을 직접 보고도 중간에 변심하고 걸려 넘어져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이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 있느냐? 지금 아무렇지도 않고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 반석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흥하고 많은 사람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흥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넘어지는 사람은 많습니다. 어디 가서 따지겠습니까? 믿음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입니다. 믿음은 논리적인 추론이 아닙니다. ‘나는 믿는다’로 끝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논쟁을 종식시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저에게 “왜 카레를 좋아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카레가 좋을 뿐입니다.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두리안은 냄새가 지독한데 왜 좋아합니까?”라고 물어도, 그냥 맛있으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앞으로는 ‘왜 이렇고 저렇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이미 선택을 내렸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주님을 믿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내가 주님을 믿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가족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믿니?”라고 묻는다면 “좋으니까요. 모든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서 믿는 것입니다. 누군가 막아선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도 못 합니까? 부부로 산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왜 막습니까? 나는 이게 좋습니다!”라고 하십시오. “왜 그렇게 사역합니까?”라고 물어도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서 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설명되지 않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복음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그릇도 지으시고, 영광을 나타낼 그릇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고 적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본문에는 바울의 매우 흥미로운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았겠습니까? 멸망할 그릇을 애초에 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멸망할 그릇인 바로를 지으신 것도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할 자를 완악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설명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완악하게 하시면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세우사 그들 위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고 멸망할 그릇이 되게 하시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5. 더 이상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인 사명신학(중국인 사명신학)은 사도 바울의 신학과 맥을 같이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계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을 계승한 것입니다. 벌을 받을 자는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로써 수많은 의문이 해결됩니다.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이 있지 않았는가?’ 율법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모세오경을 그토록 오랜 세월 읽고도 믿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넘어진 것입니다.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비참했던 민족도 드뭅니다. 이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두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입니다. 이스라엘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마찬가지이니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라면서 왜 저럴까?’라고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에서와 야곱, 그리고 바로의 예를 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완악하게 하겠다는데 어쩔 셈이냐? 내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역하는 우리는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릇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이 비밀을 밝혀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이삭의 자손이든 육적인 혈통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삭의 아들인 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저주의 그릇이 되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이삭의 아들이라고 해서,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 곧 믿음으로 약속을 취한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이며 참된 이삭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으로 난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자녀 문제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진노의 그릇으로 지으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영광의 그릇으로 지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속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넘어지는 자는 제 탓이요, 긍휼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피조물인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왜 이렇고 저러냐고 따질 자격이 없습니다. 바로나 에서를 위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할 필요도 없고, 멸망당한 가나안 족속을 위해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하나님께 대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행사를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는 법을 배우십시오. 두 종류의 그릇 중에서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6. 영광의 그릇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영광의 그릇이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바울도 모두 영광의 그릇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그릇이 어떠한지를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나 바울을 직접 보지 못했고 매주 제 설교만 듣는다면 저를 본받으십시오. 섬기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입니다. 섬김을 받고 은혜를 얻는 것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나았습니다. 집 앞의 참나무나 버드나무를 만져서는 소용이 없었고, 집에서 키우던 돼지의 머리나 엉덩이를 만져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져야 했습니다. 그 여인이 이전에는 온갖 것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세대에서 사람이 제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대변 하나 마음대로 보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거친 표현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영광의 그릇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피조물이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몸에 문제가 생기고 연약함이 찾아올 때, 영광의 그릇이 되기로 선택하십시오. 영광의 그릇에게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신을 만지는 자들이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당신 곁에 있는 자들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에 주변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 위에 머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섬김을 받았다고 해서 대단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어제까지 아프다가 오늘 나은 것은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제남(濟南)에서 한 청년을 섬긴 적이 있습니다. IELTS와 GMAT 시험을 망치고 석사 진학이 어려워지자 길거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던 청년이었습니다. 학벌도 변변찮고 나이도 적지 않아 절망했던 것입니다. 제가 전화로 간곡히 설득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뛰어내리지 마라.” 그리고 그 석사 과정의 내막을 분석해 주었습니다. “그 학교는 너의 20만 위안 학비를 벌려는 것이니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 다행히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학비를 내고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방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왔습니다. 마치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유 목사님, 목회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훈수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자살하겠다던 친구가 저를 가르치려 들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책에서 읽었습니다”라고 하기에, “그 책이 맞더냐? 네가 직접 해보았느냐? 안 해봤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의견도 못 냅니까?” 하기에 제가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것을 영광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섬겨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제 동창 모임에서 식사할 때 맞은편에 학창 시절 기가 세기로 유명했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는데 온몸에 병이 가득하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님이 도합 14년 동안 전신마비로 누워 계셔서 병간호하느라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대놓고 병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식사가 끝난 뒤 악수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습니다. 다음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친구야, 너 정말 신기하다! 식사할 때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는데 네가 어깨를 툭 친 순간 통증이 사라졌고, 오늘 아침까지도 멀쩡해!” 제가 답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몰랐니? 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 이것이 영광의 그릇입니다!
표적만을 좇는다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나타납니다. 제 뼛속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영적 혈통이 흐르고 있으며, 저는 영원한 영광을 소중히 여깁니다. 저는 이를 위해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게 뭐 대수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돈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제 모든 돈이 사라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돈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저는 동역자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바로 돈이다! 나는 돈보다 더 값지다!”라고 말합니다. 영광스럽고 존귀한 그릇은 돈보다 귀하며 온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흘려보냅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역사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의 그릇입니다.
7.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영광의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무엇을 말씀드릴지 짐작이 가십니까? 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참으로 큽니다. 비록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때라도 믿음이 있으면 표적이 나타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6: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음에 아주 작은 믿음만 보여도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와! 이렇게 좋구나!” 하며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을 통해 “아,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깨달으며 하나님을 아는 길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감정을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붓는 것은 다름 아닌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고, 그 약속으로 난 자라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어찌 없겠습니까? 지난 세월 동안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진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아주 작은 표적 하나에도 감격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직장을 주신 은혜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그릇이 되는 비결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저는 땡전 한 푼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제 동역자들에게 “그 시절에 내가 가난해 보였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이 부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급하시는지 지켜보았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앙망하고,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며 긍휼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단순해집니다. 시도해 보십시오. 주를 신뢰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8. 영광의 그릇은 남은 자일 뿐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로마서 9:27)
‘남은 자’는 참으로 적습니다. 나눗셈을 하고 남은 찌꺼기처럼 아주 적은 수입니다. 영광의 그릇은 남은 자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저의 내면의 중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던 첫날부터 요구했던 기준이 바로 오늘날의 기준과 동일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 그렇게 목회하면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이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람 수를 모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영광의 그릇입니다. 숫자만 채우려고 쓰레기 같은 신앙인을 모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만을 원합니다. 저는 과거에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 저 혼자 남을지라도 저는 영광의 그릇이 되기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관을 잃어버리고 수천 명씩 교회에 끌어들여 알곡과 가라지를 거르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저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이 영광의 그릇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영광의 그릇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곳에 잘못 오신 것입니다. 이곳에서 축복을 조금 누릴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영광의 그릇이 될 것을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 ‘남은 자’일까요? 많은 사람이 도중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제가 시험에 들어 넘어졌습니다”라고 하기에, “넘어지긴 뭘 넘어집니까? 당신은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기어 다니는 생물처럼 엎드려 살았으면서 넘어진 척하지 마십시오. 두 다리로 일어서 본 적도 없는 연체동물과 같습니다. 영어로는 ‘spineless’, 즉 줏대와 뼈대가 없다는 뜻입니다. 화인 사명신학의 성품은 기개와 뼈대가 있는 성품입니다. 믿음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복음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기에 수많은 사람이 엎어집니다.
주를 신뢰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을 신뢰하는 자의 평생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모진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 이겨냈습니다.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영광의 그릇은 소수이며 남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영광의 그릇이 된다면 참으로 존귀한 보배입니다. 이 신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오늘 우리 위에 나타나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으시며 참으로 풍성하신 분입니다.
9. 결론: 주를 신뢰하는 자는 평생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인색함을 버리고 너그러워지십시오. 이기심을 버리고 베푸는 법을 배우십시오. 영광의 그릇이 되어 수많은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에서가 어떻게 야곱을 섬겼는지 아십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는데 어떻게 섬겼습니까? 에서가 야곱에게서 엄청난 양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섬긴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자가 섬김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야곱에게 머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색한 자는 너그러워지고,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이기적인 자는 나누어주는 법을 배우고, 땅의 것을 바라보던 자는 하늘의 것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이 존귀한 그릇임을 아는 삶의 습관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서로를 격려하며 존귀한 그릇이 되어 이 시대를 축복합시다. 이 세대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며, 우리는 이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아낌없이 베푸십시오. 아멘!
찬양을 부르며 헌금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헌금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마음 중심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우리 모든 형제자매가 주님 앞에서 존귀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영원 속에서 우리를 택하사 주님을 알게 하셨사오니, 오늘 우리는 주님만을 굳게 신뢰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을 우리 위에 더욱 풍성히 부어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를 통해 온전히 나타나 이 시대를 축복하게 하옵소서. 비록 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축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본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택함받은 자요, 부르심을 받은 자요, 영광의 그릇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서 다듬으시는 역사를 끊임없이 행하사, 이 세대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광의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에 보배로운 자가 되어 끊임없이 나누어주게 하옵소서! 여기 있는 모든 형제자매를 주께서 친히 사용하여 주시고, 주의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고, 주의 전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