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
지난번 목사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매우 따뜻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수준 높은 섬김이지만, 이것은 믿음과 소망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꿈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도 매우 따뜻한 이름으로 정했는데, 바로 “하나님 나라에 꿈을 심기”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사람은 자매님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중 한 자매님의 꿈은 어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음, 이런 꿈은 사고만 나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중국의 문학가이자 발명가인 린위탕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은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잠복해 있어, 그 꿈이 현실이 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결코 평온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땅속의 씨앗처럼 반드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땅 위로 나와 햇빛을 찾는다.” 알고 보니 꿈은 씨앗 한 알과 같습니다. 여러분, 씨앗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놀라운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들에는 아직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씨앗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든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씨앗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분별함에도 정도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핵심은 무엇입니까? 핵심은 우리가 오늘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계속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그것이 계속 자라나 우리의 생명을 타락시키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생명의 길이든 선악을 분별하는 길이든 조금씩 자라난 것입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꿈이 스포츠카 한 대를 갖고, 양옥집에 살고, 좋은 아내를 얻고,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고, 수많은 산과 강을 여행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들을 평생의 추구로 삼을 경우 반드시 자신을 선악을 분별하는 영역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을 하나님 나라에 심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도 임하는 것을 위해 아름다운 꿈을 꾼다면, 반드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토요일마다 인도하던 《창세기》 성경공부도 이제 마지막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믿음과 비전과 꿈에 관한 책이며,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잉태하는 하나의 씨앗입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마치게 되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저는 거의 빠짐없이 《창세기》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과정에 함께했는데, 매번 창세기 공부를 마치고 나면 물을 흠뻑 공급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어제 왕치 자매님이 세례를 받고 바다에서 올라왔을 때 온 세상이 밝아지고 새롭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느낌을 자주 경험하고 싶다면 창세기 성경공부를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마 창세기가 하나의 씨앗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씨앗에는 생명력과 가능성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공부하면 자주 생명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도 모두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마지막 믿음의 위인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꿈을 완성해 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오늘은 요셉이 하나님 나라 안에 어떻게 한 꿈을 심고, 그 꿈을 이루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창세기》 37:18-19, 그들이 그를 멀리서 보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기도:
하나님 나라에 꿈을 심읍시다!
우리는 꿈을 심을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 시야
먼저 요셉의 이야기를 간단히 돌아보겠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들이 모두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꾼 후부터 요셉은 험난한 꿈의 성취 여정을 겪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형들의 배신을 당해 노예로 팔려 갔고, 노예로 지내는 날들을 겪은 뒤에는 여주인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와 죄수로 지낸 기간은 무려 13년이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가족들과 실제로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후였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거의 20여 년의 시간을 들여 자신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가문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요셉의 가문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고, 그것은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가 가문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인류 역사에 지극히 깊은 영향을 미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런 꿈을 주셨지만, 그 꿈을 심을 것인지는 요셉이 반드시 선택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라는 사람들이 가문을 구원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땅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도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이러한 구속의 계획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여 이러한 꿈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꿈이자 우리의 꿈을 심기 원합니까?
사실 우리 가운데서 설교하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목사님도 자주 이런 느낌을 가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가서 논거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논거가 가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왕치 자매님이 세례를 받았고, 방금 우리도 왕치 자매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왕치 자매님은 택시 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왔는데도 전혀 낯선 느낌이 없었어요.”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 물에서 나왔을 때 느꼈던 새로워진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런 자매님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오늘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PL 자매님과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저는 많은 경우 자매님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습니다. 아마 자매님은 제가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없고, 교회가 없고, 목사님이 없다면 오늘 내가 고개를 돌려 보게 되는 것은 한 덩어리의 공기뿐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감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었다면 오늘도 저는 여전히 루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다시우 형제님의 아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전히 타락 가운데 살고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미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겠습니까?
한번은 우리가 교회에서 직접 만든 찬양을 부르던 주일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격려를 받은 일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원합니다. 저는 이런 꿈을 심고, 하나님과 함께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창세기》 2:15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책임이자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꿈을 심을지는 우리의 시야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꿈은 아마 마귀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마귀는 그런 꿈에 거름을 주고, 그런 꿈의 잡초를 뽑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라나는 것은 타락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형제자매님들이 모두 이러한 시야를 갖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심어야 할 꿈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꿈, 곧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꿈의 씨앗을 위한 아름다운 환경을 마련하기 – 계승
사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늘 요셉에게는 이런 꿈이 있었는데 왜 그의 형들에게는 없었을까 생각해 왔습니다. 요셉에게는 꿈을 잉태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계승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것은 평범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생사가 걸린 순간에 요셉을 대열의 맨 뒤에 세웠던 일부터, 《창세기》 37장에 기록된 것처럼 요셉을 위해 채색옷을 지어 준 일까지, 야곱이 요셉이라는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주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삭에게 말씀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말씀하셨는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이라면, 나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어야겠다.’ 사실 《창세기》 전체는 성경의 축소판입니다. 요셉의 시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의 가문은 정말로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도 복을 주셨고, 이집트를 통해 그 시대의 많은 지역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요셉이 이집트 땅에 양식을 많이 비축해 두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계승은 꿈이 자라나는 데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계승이 없다면 우리는 꿈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계승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우리의 101 과정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설계한 201 과정에서도 계승과 본받음은 매우 중요한 한 과목입니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 그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만약 우리의 목사님이 하나님과 성경으로부터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없고 교회가 발전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질병과 억압에서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승은 꿈이 자라기에 가장 편안한 환경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님들이 모두 계승하는 삶을 살아 내기를 바랍니다.
꿈에 물을 주기 – 믿음
마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과 허풍의 가장 큰 차이는, 허풍은 다른 사람은 믿게 하면서 자신은 믿지 않는 것이고, 꿈은 내가 반드시 믿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믿든 말든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요셉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7:10에서 요셉이 자신의 꿈을 선포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요셉을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조차 이렇게 반응했으니, 그의 형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의 꿈은 막 시작되자마자 가족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님들도 주님을 믿으면서 가족의 많은 반대를 받습니다. 저도 전임으로 섬기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께서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우리 형제자매님들이 요셉의 이러한 관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복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의 반대 앞에서 우리는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거나 두려워하거나 타협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갔을 때, 함께 노예 생활을 하던 노예 친구들이 요셉의 꿈을 믿었을까요? 허허,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표현하자면 요셉은 노예 중의 노예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요셉은 히브리 사람이었고, 이집트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예들 가운데 이집트 사람도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노예들 가운데서도 괴롭힘과 미움을 받는 노예였습니다. 그런 노예들이 요셉의 어떤 꿈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수들이 요셉의 꿈을 믿었을까요?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처지는 정말 온 세상에 그의 꿈을 믿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고, 오직 요셉 자신만 믿는 상황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은 미래에 관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미래에 관한 일은 다른 사람이 믿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믿지 않는지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 목사님께서 원거리 사역을 추진하셨을 때,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의 모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오늘 형제자매님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꿈의 씨앗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믿음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꿈의 성장을 막는 가시를 이기기 – 감정
많은 형제자매님들에게 왜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물어보면, 제가 듣는 대답은 거의 비슷합니다. “제가 이 업종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 꿈이 조금 터무니없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별로 지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 꿈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아요.” ‘느낌’, ‘느낌’ 하며 온통 느낌에 관한 말뿐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에는 ‘느낌’이라는 두 글자가 처음부터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느낌은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셉의 느낌에 대해 묻는다면, 요셉에게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자신의 느낌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여주인이 그를 유혹했을 때 요셉에게 느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에게 느낌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아들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살펴봅시다. 장자의 이름 므낫세의 뜻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을 잊게 하셨다”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 에브라임의 뜻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가족들과 다시 만났을 때 통곡하던 장면을 보면 요셉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노예와 죄수의 삶을 살았으니, 느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찌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요셉에게 느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느낌이 자신을 이끌어 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저는 감정과 결혼 문제에 억압받는 몇몇 자매님들을 섬겼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자매님들이 상처받은 느낌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느낌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두려움의 영과 경쟁의 영에서 해방되고 있는데, 가장 어려운 점 역시 그들이 두려운 느낌과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느낌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문제의 근원이 문제가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무엇인가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선악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느낌을 다루는 방법은 느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느낌을 대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느낌을 제거하실 수 있다고 믿으며, 저도 그에 관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승리는 다소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느낌을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능동적으로 승리해 가는 과정입니다. 느낌을 없애느냐 없애지 않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성장입니다.
로마서 8:6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느낌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느낌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순종하도록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느낌을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 축복
꿈이 이루어질 때 반드시 가져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가문을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이집트와 주변의 많은 지역도 축복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그들 안에 영생에 대한 관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점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죽을 때 이삭을 축복했고, 이삭은 죽기 전에 야곱을 축복했으며,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이 자신의 손자들을 앞으로 데려오게 하여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가문은 죽음이라는 일보다 축복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이 계속 전달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축복을 계속 전달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에 대한 관념입니다.
최근 저는 “생사의 지혜”라는 강연을 보았습니다. 대만대학교 병원의 의사인 커원저 교수가 한 강연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인생과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강연 중에는 그들이 만들어 낸 의학적 기적도 언급되었습니다. 에크모라는 장비가 중증 심장병 환자들의 목숨을 많이 구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의학적 난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많은 환자가 이 장비를 사용하면 생명은 유지할 수 있지만 손발이 모두 검게 변해 절단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살아 있을 것인가, 절단할 것인가. 얼마나 어려운 선택입니까? 의사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선택일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죽음에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죽음을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과 죽음을 꿰뚫어 보고 영생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영생에 대한 관념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에크모는 의학계에 골칫거리이자 문제입니다. 사용해도 옳지 않고 사용하지 않아도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와 고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셉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번성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핵심은 그의 안에 영생에 대한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형제자매님들이 영생에 대한 관념을 갖기를 격려합니다. 여러분의 목표가 이 세상에만 놓여 있다면 많은 일이 우리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본래 하나의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역설을 이기셨고, 우리가 영생의 생명을 살아 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론 –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꿈을 꾸는 사람이 됩시다
어렸을 때 저에게도 많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많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꿈속에서는 수천 갈래 길을 생각하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원래 가던 길을 간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은 후, 이번에는 반드시 꿈을 단단히 심고, 꿈을 위해 계승의 환경을 마련하며, 믿음으로 물을 주고, 느낌을 이겨 내어 꿈의 열매를 맺기로 결단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기를 갈망합니다! 저는 중국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부흥하기를 꿈꿉니다. 우리 교회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중국인 운명신학의 이름을 듣고, 우리의 이름을 듣고, 제 이름을 듣고, 형제자매님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렇게 반응하기를 꿈꿉니다. “와! 주님을 믿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