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열왕기상 1장으로,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할 뜻을 품은 자를 세워 다윗의 왕좌에 앉히신다’입니다.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다니엘 2:20-21)
왕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결코 다른 사람의 행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합을 세우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솔로몬을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울 왕을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렇게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원해서 그랬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니므롯을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고레스 왕을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페르시아 제국의 왕을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니, “하나님, 왜 그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습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을 뿐입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폐하십니다. 결코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이면을 다 알지 못합니다. 중국 고대 황제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온갖 사람들의 음모와 술책이 난무해도 결국에는 그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유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유방(劉邦)입니다. 그는 홍문연에 가서도 죽지 않았고, 결국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누가 세웠을까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훗날 중국에서 왕을 세우는 일에 대해, 황제를 일컬어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라고 부르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악한 왕이든 선한 왕이든 모두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러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일도, 국가의 중대한 일도 함부로 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고자 하시면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상 1장에서 솔로몬을 세우신 일에서도 우리는 그 영적 법칙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솔로몬을 세우셨을까요?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비록 1장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후의 이야기에서 다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한 장만 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이미 2천여 년 전, 기원전 약 1000년 전의 일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천 년이 흘렀고 이 일은 이미 다 이루어졌는데 왜 아직도 의심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왕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실제로 성전을 다 지었고, 오늘날의 성전 터나 통곡의 벽 같은 것들도 다 솔로몬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모든 왕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세상의 재상은 누가 주관하십니까?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상의 일개 병사는 누가 주관하십니까?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참 바쁘시겠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초당 연산 능력이 인류 전체의 연산 능력의 총합을 뛰어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것을 주관하시느라 바쁘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하나님께는 너무나 가볍고 유쾌한 일이며, 하나님께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여러분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만큼 큰 일일 수 있습니다.
왕을 세우실 때 때로는 선한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때로는 악한 왕을 세우시기도 합니다. 악한 왕을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라, 바로 왕을 만들어 놓으시고 마음까지 완악하게 하신 뒤에 그를 치시다니, 이게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렇게 묻지 마십시오. 그렇게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묻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순리를 거스르고 운명을 바꾸려고 합니다. 고양이 한 마리를 붙들고 개가 되게 해달라고 결사적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겠습니까?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양이로 지으셨으면 그것은 고양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주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꾼 것입니까? 사람을 사망에서 건져내고, 음부와 지옥과 사망의 영에서 건져내며, 사람에게 권세를 주어 원수를 짓밟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을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에 앉을 아들을 주시기를 갈망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에 앉을 아들을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이 장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솔로몬도 왕좌에 앉았고 왕의 신하들도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또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오늘 내 왕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내 눈으로 보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열왕기상 1:46-48)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들 암논을 키웠더니, 암논이 자기 누이를 성폭행했습니다. 이게 무슨 집안입니까? 다윗이 자녀 교육을 잘못했다고 탓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윗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이 암논은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보니—둘째 아들이 누구인지는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십시오—그 둘째 아들도 왕이 될 그릇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을 보니, “내가 너더러 왕이 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쫓아내더니, 결국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요압의 칼에 찔려 죽었구나” 한 것입니다.
다윗이 넷째 아들 아도니야를 보니 한숨만 나오고 머리가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다윗이 왜 그를 모자라다고 여겼는지 아십니까? 이 아들은 평소에 멍청한 짓을 자주 저지른 데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어설픈 꾀나 부릴 줄 알았지 치밀한 계략도 세우지 못하고, 무슨 일만 벌였다 하면 다 어그러뜨리는, 그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아래로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 열째… 도대체 아들을 얼마나 낳았는지도 모를 자식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찌하여 내 왕위에 앉을 만한 아들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 들인 후, 밤낮으로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 드릴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한 아들이 네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며,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아들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못나고 볼품없는 자식들뿐이었습니다. 하나는 나사가 빠졌고, 하나는 머리에 구멍이 났고, 하나는 혹이 달린 듯 온통 문제투성이인 자식들이었습니다. 여호와 자신의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옵소서! 하나님, 이 자식들을 보옵소서. 주를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못난 것들은 제가 모아둔 금은보화를 탕진이나 안 하면 다행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어리석은 고관 2세, 재벌 2세의 모습이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행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다윗이 근심하고 또 근심하던 어느 날, 밧세바가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제 발로 온 것이든 다윗이 데려온 것이든, 그 경위는 차치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밧세바가 낳은 아들의 이름이 솔로몬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밧세바는 사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빼앗아 아내로 삼은 여인입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할 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부끄럽든 아니든 간에, 솔로몬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너무나 총명하고 말문이 트이자마자 다윗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왜일까요?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였고, 웬일인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좌에 앉았을 때 다윗은 이미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침상에서 몸을 굽혀 경배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누운 채로 다리를 웅크려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왕이 또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찬송하리로다 그가 오늘 내 자리에 앉을 자를 내게 주사 내 눈으로 보게 하셨도다’ 하였나이다”(열왕기상 1:48)
다윗이 뒤를 돌아보며 그 못난 아들들을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식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더냐? 너희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 왕위가 너희 것이 되지 않았겠느냐?’ 그러므로 이 구절에 담긴 뜻은 매우 깊습니다. 제가 이 의미를 파낸 것이 보이십니까? 여러분도 이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정말 만감이 교차합니다. 다윗이 밤낮으로 깊이 고민하고 꿈에서조차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기를 갈망했는데, 마침내 이런 보배로운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아들의 출신은 떳떳하지 못했고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다윗도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어쩌면 이렇게 절묘합니까? 하필 밧세바의 태를 통해 태어났는데도 주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군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밧세바는 엄연히 재가한 여인입니다. 재가한 데다 벌어진 일들도 결코 훌륭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하게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주를 찬양합니다. 주께서 제게 이런 아들을 주시되 밧세바를 통해 주셨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일을 통해 드러나는 한 가지 뜻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출신 배경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족보를 자세히 따져보면 다윗의 가문에서도 떳떳하고 흠 없는 사람이 몇 안 됩니다. 다윗의 고조할머니뻘 되는 조상은 라합인데,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세상에, ‘하나님, 좀 다른 가문으로 하실 수는 없었습니까?’ 이 일은 다윗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그는 몸을 굽혀 경배하며 아들 솔로몬이 왕좌에 앉은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 후에는 룻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룻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룻 역시 다윗의 증조할머니뻘인데, 그녀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상상을 뛰어넘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솔로몬이 바로 이 가문에, 다윗이 노년에 얻은 아들로 태어났으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출신이 좋지 않다 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그리 대단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솔로몬과 같은 마음,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로를 얻지 않았습니까? 그 수많은 아들이 다 쓸모없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경 쓰시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내가 몇 명인지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맨날 일부일처제 같은 사소한 문제에만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다윗 시대의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도덕경에 갇힌 분이 아니시며 도덕의 범주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목사님도 밧세바 같은 여인을 얻고 싶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귀가 솔깃해지시겠지만—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온전히 건축하는 일에 힘쓸 뿐이며, 밧세바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할 뜻을 품은 사람을 세워 다윗의 보좌에 앉히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할 기회를 얻었으니 평생에 더없는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역자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이 저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할 기회를 얻었으니 여러분과 저는 모두 크고 작은 솔로몬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우리 가운데 있는 많은 소그룹 사역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기에 이렇게 섬기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모두가 크고 작은 솔로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다만 여러분이 큰 왕이 될지 작은 왕이 될지, 아니면 비장의 패가 될지는 굳이 따지지 맙시다.
장차 여러분 모두가 솔로몬을 본받는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한 성읍을 맡기시면 한 성읍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다섯 성읍을 맡기시면 다섯 성읍의 왕이 되며, 열 성읍을 다스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백 성읍을 다스릴 자도 있겠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워낙 광대하니 여러분에게 왕위를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으로 그 자리에 올랐습니까? 솔로몬이 연기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신비로운 아이였습니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에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훗날 건륭제가 되었습니다. 강희 황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어린 손자가 왕궁을 뛰어다니다가 할아버지 품에 쏙 안겼습니다. 건륭은 강희 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훗날 총명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대략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태어나서부터 확고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밧세바가 가르쳤는지는 몰라도 제 생각에는 밧세바가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밧세바 역시 위대하고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비화(外傳)를 말씀드리자면, 밧세바는 일찍부터 다윗의 한 아들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불륜의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아에게 시집을 간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밧세바의 마음속에는 늘 다윗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게 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순순히 따라왔겠습니까? 밧줄로 묶어서 끌고 온 줄 아십니까? 그녀가 목욕을 한 것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마치 다윗이 숏폼 영상을 넘겨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처럼, 알고 보니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이었던 셈입니다. 이 모든 일을 엮어보면 어떻게 설명해도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밧세바는 마음속으로 이미 이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엮어준 것일까요? 우리가 다 규명할 수는 없지만, 너무 깊이 말하면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일은 그렇게 성사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과 밧세바의 첫 아이는 합당치 못했기에 죽었습니다. 훗날 우리아도 죽고 밧세바는 홀로 남겨졌으며, 다윗은 그녀를 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궁에 들어와 낳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다윗이 그를 돌볼 시간이 많았겠습니까? 그러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솔로몬은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기적인 어머니가 가르친 아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돈을 밝히는 어머니가 가르친 아들은 돈을 밝히기 마련입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닮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아들은 늘 어머니의 기질을 이어받습니다.
그 이야기는 차치하고, 솔로몬은 왜 아버지 다윗 왕과 성전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좋아했을까요? 어머니 밧세바가 들려주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쉽게 빚어집니다. 솔로몬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몰랐지만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배운 것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이렇습니다.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 왜 다윗 왕에게서 너를 낳았는지 아느냐? 거기에는 다 사연이 있단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성전을 짓지 못하나 네 아들이 내 성전을 지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밧세바는 다윗을 통해 아들을 낳기를 원했고, 마침내 솔로몬이 태어났습니다. 밧세바는 “아들아, 너는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한단다”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제 추론이 맞지 않습니까? 솔로몬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생각에 젖어 자랐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두세 살배기 어린 나이에 아버지 다윗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고, 다윗이 무릎에 앉히자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저에게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다윗의 얼굴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단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러자 솔로몬이 말합니다. “아버지, 다른 아들을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성전을 지을 자가 바로 저입니다. 자, 설계도를 가져와서 한번 펼쳐보시지요.” 세 살짜리 아이가 아버지와 성전 건축을 논하기 시작하여, 다윗이 늙고 솔로몬이 왕이 될 때까지 그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다윗은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붙여 가르치게 했고, 다윗 자신도 직접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성전 건축을 가르쳤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출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어머니가 우리아의 아내였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다윗에게 성전을 지을 아들을 낳아주기만 했다면 복된 것입니다.
자격으로 따지자면 솔로몬이 정실 왕후에게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유방과 여후 사이에서 난 적자가 아니라 다윗이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인데 왕위를 이을 수 있겠습니까? 출신은 중요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 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장 나이가 어려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솔로몬 위에는 넷째 형이 있었습니다. 첫째 암논, 둘째는 모자랐고, 셋째 압살롬은 죽었으며, 넷째 아도니야를 비롯해 솔로몬 위에는 수많은 형이 있었습니다. 서열대로 따진다면 당연히 아도니야 차례였습니다. 아도니야 역시 당연히 자기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도니야는 제가 성경을 푸는 방식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첩과 동침하여 탈락했고, 야곱의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을 저질러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유다가 어부지리로 기회를 잡았습니다. 유다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했습니까? 딱히 위대해 보이지도 않고 집안도 복잡했으며, 훗날 다말에게서 세라와 베레스를 낳아 다윗의 조상이 되는 논리였습니다.
아도니야는 “우리 조상 유다도 어부지리로 복을 얻었으니, 이번엔 내 차례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됩니까? 성전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볼품없는 자가 어떻게 복을 가로채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얻었을지 몰라도 아도니야 당신은 얻지 못했습니다. 왜 얻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막내아들 솔로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계산을 잘못했고, 요압도 잘못 계산했으며, 아비아달도 잘못 계산했습니다. 그들은 유다가 어부지리를 얻은 이야기만 들었지 솔로몬의 존재는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몇 번째로 교회를 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대가를 치르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평생 솔로몬처럼 주를 위해 영광스러운 성전을 짓게 하옵소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 명정신학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신학이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계승된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얼마나 깊이 상고했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로부터 계승된 신학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틴 루터 같은 분들의 어깨 위를 딛고 서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들을 일으키시고, 이 시대에는 우리를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을 거쳐 오늘 우리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계승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예 군사 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바 아버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 가운데 더 많은 솔로몬을, 더 많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면류관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훗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과 나무, 온갖 자재들을 아득히 먼 곳에서 운반해 왔는데, 수백 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고 수십 톤짜리 긴 자재들도 있었으며 수 톤짜리는 부지기수였습니다. 그 어려운 난제들을 솔로몬은 다 돌파해 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면 온갖 험난한 장애물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번거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역을 이어오던 중 우리 시대에 AI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한 목양을 선포해 왔는데, 실제로 인공지능이 나왔을 때 “하나님, 참으로 선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저를 위해 예비하신 자재가 아닙니까?”라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크고 작은 솔로몬이 되어 어려서부터 성전을 건축할 뜻을 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난제를 하나씩 풀어가며 오늘날 우리는 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그룹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노트를 저보다 더 훌륭하게 첨삭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3천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고, 이 3천만 자는 자체적인 완결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제 자료들이 서로 모순되었다면 AI를 혼란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 체계는 완벽한 닫힌 고리(closed loop)를 이루고 있으니 하나님의 계시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라면 온갖 산전수전을 겪는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돌이 아무리 크다 해도 큰 산은 평지가 되고 작은 산은 옮겨질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대로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실 일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참으로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당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할 때 품었던 마음입니다. 나이는 어려도 그릇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려 다윗 왕의 나라보다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솔로몬에게 “그 거대한 목재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라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답했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석재는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두께 2cm, 가로 3m, 세로 2m짜리 대리석만 해도 손으로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르지도 않은 백 장 분량의 통바위를 어떻게 운반하겠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번거롭습니까?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도, 번거로움도, 심지어 피와 땀을 흘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하셔서 온갖 험난함을 뚫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할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道)를 계시하시고 앞길을 평탄케 하시며 친히 우리 앞에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왕위는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다윗은 노년에 이르러 침상에 누워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꾀를 내어 천사처럼 아리따운 처녀 아비삭을 구해 다윗의 품에 두었습니다. ‘다윗이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왜 이리 여색을 밝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그런 말을 꺼내면 복잡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윗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 사실을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하는 육신의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을 보며 선악을 분별하여 비판한다면 큰일 납니다.
성경 기록자도 참 대단합니다. 왜 이런 것까지 기록해서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까요? 우리는 아비삭의 문제에 걸려 넘어지지 맙시다. ‘다윗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여전히 여자를 밝히는구나’라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고, 사실 그럴 기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을 몰고 가면 곤란해집니다. 다윗이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으니 따뜻하게 해줄 처녀를 둔 것뿐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윗이 국정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돌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기회가 왔다고 여겼습니다. ‘나는 넷째 아들이고 아버지는 누워 계시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그러니 요압 장군과 줄을 대고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관계를 맺어두자.’ 그 관계는 꽤 탄탄하게 맺어졌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신하도 바뀌는 법입니다. 이때 아비아달과 요압은 아도니야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줄을 잘못 서면 패가망신하는 법인데, 군권을 쥔 사령관과 대제사장, 그리고 다윗의 넷째 아들이 결탁했으니 권력을 잡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왕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아도니야는 왕위 등극을 자축하는 잔치를 열고 사람들은 “아도니야 왕 만세!”를 외쳤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지 못하니 다 된 줄 알았습니다. 아도니야가 한쪽에서 왕으로 추대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솔로몬이 왕으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편에는 선지자 나단뿐이었으니 세력 면에서는 아도니야에게 턱없이 밀렸습니다. 넷째 왕자에 대제사장, 군대 장관까지 갖추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음모든 양모든 결국 ‘허모(無謀)’가 되어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왕이 되는 일은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솔로몬이 나이가 어리고 세력이 부족해 보였어도, 다윗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항우에게는 황제가 될 분복이 없었고, 시정잡배 출신이었던 유방이 황제가 된 것과 같습니다. 유방은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항우는 명문 귀족 출신이었으며, 무예와 재능과 가문 등 모든 면에서 항우가 유방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항우는 왕이 되지 못했을까요? 왕을 세우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도니야의 모략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압살롬을 본뜬 것입니다. 압살롬은 왕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왜 그런 자를 흉내 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온갖 음모와 수단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헛된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우고자 하시는 자의 자리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한 아들이 왕위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지을 자가 아니라면 비켜서야 마땅한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듭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벌이다가 스스로를 망칩니까? 가만히 순종했다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있었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다니 얼마나 좋은가’ 하고 축복했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다른 아들들에게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얻기까지 그렇게 애태울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자격도 없는 자가 분수도 모르고 감히 다윗의 왕좌를 넘보았으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다윗이 침상에 누워 있어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왕위가 더욱 심히 크리라
왜 솔로몬의 왕위가 더 컸을까요?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도 지을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할 자격을 솔로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적 위치와 권세가 더 큽니까? 솔로몬의 자리가 더 큽니다.
솔로몬의 왕위와 그가 다스린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르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그들이 왕의 앞에 이른지라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좌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열왕기상 1:32-37)
이것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모든 자의 영적 위치와 권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단순히 사람 수만 많은 볼품없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진 교회를 세우는 자는 그 위상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앞서 행하셔서 우리가 건축하는 교회 가운데 더 큰 영광과 더 풍성한 하나님의 임재를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