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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023-04-16 8,487 快乐地活着系列 荣耀 尊贵 神的国 神的荣耀 神的权能 神的属性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나눌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번에는 어떤 주제를 나누었나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 후에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복을 구하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사실 이 단어들은 다 너무나 좋습니다! 듣기만 해도 참 좋은 말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어서 더 나누고자 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기도할 때 자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주께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다 하나님께만 돌려드렸습니다. 그러고는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능도 없이, 아무런 영광도 없이, 아무런 존귀함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진짜 전부 다 하나님께만 돌려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린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다 돌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가끔 이런 말을 할 때 오해하기 쉽습니다. 다 하나님께 돌리니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눈에 영광스럽고 존귀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음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 일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의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 바울 이전 베드로와 야고보 그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일들로 인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어머니를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왜 어머니를 저에게 보냈을까요? 그 목사님은 제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제 앞에서는 온전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역하는 이 치유와 축사에 대해 그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불면증이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들 목사님이 어머니를 위해 7년 동안 기도했지만 수면제 복용량만 네 배로 늘어났습니다. 기도가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기도할수록 약의 복용량만 늘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더해지지 않고 약의 양만 올라갔습니다. 결국 먼 길을 차를 갈아타며 저에게 왔는데, 제가 사역을 진행하자 그분의 불면증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저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이걸 해결해 내다니요.”라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내 손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하는 말만 듣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많은 경우 수많은 이야기를 간증합니다.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하는 것은 전부 제가 직접 행한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제가 전하는 말은 어린아이도 알아듣고, 어르신도 알아듣고, 지식인이 들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깊은 맛이 있다고 느낍니다. 왜일까요? 제가 전하는 것은 다 제가 직접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보지 않은 것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깊이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함께하시든지, 그 사람에게 그분의 영광과 권능을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권능! 어떤 사람은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지만, 쓰고 나서는 그만 흐지부지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맙시다. 어쨌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하는 이 섬김의 방식대로 사역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또 다른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떤 분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사람 몸 안에 있던 종양이 원래는 대추알만 했는데 기도하고 기도하니 달걀만 해졌고, 더 기도하니 거위 알만 해졌고, 더 기도하니 커다란 무처럼 커졌습니다. 그러다 더 기도하니 아예 임신 7개월 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묻기를, “왜 제 기도는 효과가 없을까요?”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말은 입가에 맴돌아도 차마 꺼내기 힘든 말입니다. 왜 말을 못 하겠습니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없다고 하자니, 가끔은 또 기도가 먹히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일은 사람을 참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고 하자니 가끔은 있는 것 같고, 가끔은 없는 것 같습니다. 참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항상 작동해야 마땅합니다.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 된다는 것은 고장 났다는 뜻입니다. 마치 계산기를 두드릴 때 어떨 때는 숫자가 나오고 어떨 때는 안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고장 난 계산기입니다. 어떨 때는 1+1=2가 나오고, 어떨 때는 1+1=3이 나오고, 어떨 때는 1+1=4가 나온다면 그것은 고장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한 가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충성인가, 불충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충성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몸을 통해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할 때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미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라도 여러분이 믿음으로 선포하면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관계가 얼마나 끈끈합니까? 참으로 끈끈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와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 이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입니까? 저는 이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어제 우리는 어떤 연구 기지를 견학하러 갔습니다. ‘당신이 웬 연구 기지 견학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본래 과학 연구를 좋아합니다. 연구 기지를 방문했는데, 우리와 함께 간 사람 중 한 명의 눈에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으니 길거리에서 이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은 제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화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도했습니다. 차에 올라타 기도했습니다. 10분 뒤에 모래가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모릅니다. 손으로 꺼내지 못했는데 사라졌습니다.

눈에 들어간 모래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생선을 먹다가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생선을 먹었는데 살은 내려가고 가시가 목에 걸려 버렸습니다.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렸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어서 저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에게 기도를 받으러 왔을 때, 정말 흥미로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러스하십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이 가시가 도무지 내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셔서 교훈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생선 가시는 기도하면 10분, 15분이면 거의 다 사라집니다.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낫지 않자 결국 그 사람은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온갖 시도를 다 해도 그 가시를 빼내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어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반나절 넘게 가시가 목에 걸려 고생하다가 다시 저에게 기도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의사를 찾아가서 이 가시를 빼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의사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니 그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자마자 가시가 싹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참 유머러스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권능입니다! 의사도 손대지 못한 것이 기도하니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대에는 이러한 권능 있는 복음이 너무나 절실합니다! ‘온전할 전(全)’ 자가 아니라 ‘권세 권(權)’ 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권세를 가진 바로 그 권능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만 하고 행하지 못한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없는 복음을 몹시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음이라.” 눈에 모래가 들어가고,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이런 일들, 제가 사역하면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사람들을 참으로 놀라게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믿음조차 없지 않습니까? 목에 가시가 걸렸는데 기도해서 낫는다고요? 그런데 제가 이 간증을 전한 뒤에, 정말로 또 어떤 사람 목에 가시가 걸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저를 찾아오지 않고, 제가 기도한 녹음 파일을 들으며 기도했는데 가시가 사라졌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몇 달 전, 대략 반년 전쯤 한 사람이 발바닥 뼈 세 개가 부러졌습니다. 발이 퉁퉁 부어 깁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붙잡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전통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손을 좀 봐주고’, 기도로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발 뼈가 나아 버렸습니다! 발이 낫고 나서 저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말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신기하지 않습니까! 올 때는 뼈가 부러져 형편없이 붓고, 붕대로 칭칭 감고, 깁스를 하고, 덧대어 고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신고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집에 돌아간 뒤, 원래 화요일에 수술이 잡혀 있었는데 화요일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왜 수술받으러 안 오십니까?” 그 사람이 “저 다 나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믿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나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농담할 일이 아니니 당장 오세요, 당장 오세요!” 병원에 가서 X-레이를 다시 찍어 보았습니다. 뼈는 여전히 부러진 채로 찍혔지만, 그 사람은 정말로 다 나아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 뼈가 부러지면 웬만하면 병원에 가십시오.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시고요. 어쨌든 의사가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사람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며 의사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뼈는 분명 부러져 있는데 정상인처럼 걷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걸어 보세요.” “지금 걷고 있잖아요.” “다시 한번 걸어 보세요.” 또 걸어 봅니다. “안 되겠습니다. 다시 걸어 보세요. 차라리 X-레이를 한 번 더 찍어 봅시다!” 너무 곤혹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능력이 없는 복음을 몹시 증오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 아래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보게 되고, 날 때부터 다리 저는 자가 걷게 되는데, 후천적으로 다리를 절게 된 사람이 걷지 못하겠습니까? 걸을 수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보지 못하겠습니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권능의 복음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온갖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으며, 단지 죽은 뒤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 하나만을 준다면, 그런데 그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정말 그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여러분은 속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천국에는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정말 속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속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어디가 흥미롭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복음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좋은 복음이 왜 이 시대에는 그토록 찾아보기 힘들까요? 사실 능력이 넘치는 복음을 능력 없는 복음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능력 없는 복음을 능력 있는 복음으로 되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오늘날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바울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능력 없는 복음으로 변질시키는 역사적 과정, 교회의 역사는 어찌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하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온 역사적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세대에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그분의 능력 있는 복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음을 우리가 진실로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는 것이라면 정말 큰일입니다. 여러분, 말은 누가 제일 잘하는지 아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누가 제일 말을 잘합니까? 동베이(동북) 사람들이 말을 제일 잘합니다. 동베이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잘합니까? 자오번산이 제일 잘합니까? 사실 아닙니다. 토크쇼 하는 사람들이 말을 제일 잘합니까? 그중에 리쉐친이라는 동베이 사람이 제일 잘합니까? 아닙니다!

자오번산이나 리쉐친, 샨톈팡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이 말을 제일 잘합니다. 사기꾼은 무슨 말이든 다 지어낼 수 있습니다. 말을 사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슴을 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청산유수로 말할 수 있지만 정작 행하지는 못합니다. 해내지 못합니다. 사기꾼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누가 말을 제일 잘합니까? 바리새인이 제일 말을 잘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과 권능 사이의 싸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권능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속성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래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당시에 아담이 일할 때 왜 그렇게 효율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은 대단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람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이 길로 인해 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라는 속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간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간증할 때 기도했더니 눈이 나았고, 기도했더니 생선 가시가 사라졌다고 하면 사람들은 제게 아주 커다란 프레임을 씌웁니다. 그 모자는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왜 맞지 않을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말이 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 아직도 이런 혼란을 겪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여전히 혼란스럽다면 오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고, 나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고, 나의 영광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화인명정신학(중화권 사명 신학) 안에서 ‘살아내어 열매로 나타나야 진짜다. 말만 하는 것은 소용없고 반드시 실제로 행해내야 한다’는 개념을 세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닮아야 진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를 보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어쩌면 그렇게 큰절의 대사 스님처럼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이 세대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점점 대사 스님을 닮아 갑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석가모니를 닮아 버린다면 다 망가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닮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닮았다는 말입니까? 살아내어 열매로 나타나야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우리도 행하고,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은 우리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잃어버리게 만든 그 악한 영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해 왔습니다. 바울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존귀를 잃고 권능을 잃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의 제목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음이라》는 예전에도 전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고린도교회를 본보기로 삼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정말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연구 사례입니다. 자, 오늘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 본문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20)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릇이며, 우리 안에 주님의 존귀한 형상이 있음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때 주님의 권능 또한 우리를 통해 나타남을 보게 하옵소서. 이 세대에 우리는 맹인이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를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뜻이 본래 그러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신 구원을 믿습니다. 이 복음은 본래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하나님! 오늘 이 능력의 복음이 우리 가운데 다시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도 바울이 감당했던 그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려가게 하시고, 이 능력의 복음이 교회 안에 회복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행사가 온 우주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선 우리 성도들이 다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경외하며 충성스러운 종과 청지기가 될 때, 주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의 배경

《고린도전후서》는 제가 자주 강해하는 성경입니다.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사도행전》을 하나로 꿰어 읽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비밀을 발견하게 될까요? 바로 사기꾼들은 다 고상하고 점잖은 군자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사기꾼이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고 무서운 송곳니를 번뜩이며 여러분 앞에 나타나 “내가 예수다”라고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어린아이도 귀신인 줄 알고 도망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무서운 송곳니를 보고 누가 믿겠습니까? 자기가 예수라고 해도 그만둘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잖은 군자의 모습을 하고 아주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며, 그런 말을 할 만한 자격까지 갖춘 무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제가 연구한 바로는,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고린도 지역에 와서 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복음, 아무런 능력이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보이십니까? 사도 바울 시대에도 이미 이 악한 세력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아주 잘하여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간질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직접 눈물로 세운 교회인데, 이 무리에 의해 관계가 갈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잃어버린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의지했습니까? 오직 입술 하나만을 의지했습니다. 우리 동베이 속담에 ‘2전짜리 주전자는 입만 살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몸통은 다 깨지고 주둥이만 남았는데, 그게 주전자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 대지의 배경을 아시겠습니까? 바로 이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말을 잘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요?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이간질당한 후, 교인들 안에 생겨난 온갖 혼란 때문에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혼란이 일어난 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 변호를 통해 우리는 상대편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다른 논리 체계를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에게는 핑계가 많았습니다. 첫째,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애초에 사도가 아닙니다. 왜냐고요? 말이 너무 거칠고 투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을 보십시오, 얼마나 품격이 있습니까? 아나운서 같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마치 고결한 군자처럼 말도 아름답게 하고 포장도 그럴듯하게 했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활합니까!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제 연구로는 틀림없이 야고보나 베드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거칠다고 깎아내리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저 사람처럼 거칠게 전해질 수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눈치채셨겠지만 저도 말이 꽤 거칠지 않습니까? 멍청하다는 소리도 자주 하고, 때로는 아주 매섭게 말합니다. 훗날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내 말이 투박할지라도 내 지식(도)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아주 직설적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그럴듯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장을 다 벗겨 버렸습니다. 자기 영적 자녀들에게, 자기 아이들에게 굳이 위선적인 포장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후 그들은 사도 바울이 겪은 수많은 박해와 환난을 문제 삼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말을 듣고 덜컥 믿어 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환난을 겪을 수 있겠는가? 때로는 먹지도 못하고, 때로는 마시지도 못하고, 헐벗고, 매를 맞되 여러 번이나 맞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정말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이럴 수 있겠는가?” 여러분, 오늘날 우리 중에도 이런 혼란을 겪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늘 꽃길만 걷고, 말도 새소리처럼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바울이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말을 돌리거나 가식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환난을 겪으며 친히 손으로 수고하여 일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옳다면 왜 친히 손으로 노동을 하겠는가?”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손으로 일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손으로 일하지 않고 하늘에서 공짜 떡이라도 떨어지기를 기다립니까? 하늘에서 공짜 떡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복음의 논리 체계는 대단히 타락한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한 자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자매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 저도 아버님과 취향이 같습니다. 저도 그리스도인들을 참 싫어합니다.” 그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기만 바라고 있지 않소.” 저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수고하여 친히 일하는 바울을 보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지, 저렇게 고생하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일하는 게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냐?”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참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혼란스럽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가운데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도 아주 고생스럽습니다.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피곤해 죽을 지경일 때도 있습니다.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기꺼이 이 일을 합니다. 저는 보통 사람보다 손으로 직접 일하는 양이 훨씬 많습니다! 철저히 직접 일하며,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고 박해를 당합니다. 비방을 받으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훼방을 받으면 권면합니다. 지금까지도 세상은 우리를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깁니다. 이상합니까?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겪은 이 모든 고난을 빌미 삼아 “보라,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고요? 바울은 한마디로 답합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던 수많은 문제를 바울에게 가져와 기도하면 깨끗이 나았습니다. 대단한 능력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왜 서신서에 적었을까요?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가시를 가지고 물고 늘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도 바울의 가시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 보라, 자기 눈에도 병이 있지 않느냐.” 제가 말씀드리자면, 그 가시는 바울의 눈의 질환이었습니다. 한의학에서 간은 눈을 주관한다고 합니다. 간의 기운이 눈으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노여움은 간을 상하게 합니다. 바울은 성미가 좀 급하고 다혈질이었습니다. 성격이야 어쨌든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미가 불같았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눈이 멀었습니다. 나중에 기도할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나았지만, 그 뿌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흔적이 남아 가시가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아냥거렸습니다. “저 사람 눈을 보라. 자기 눈도 저 모양이면서 어떻게 남을 위해 기도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권능은 무슨!” 얼핏 들으면 아주 그럴듯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듣고는 “어머, 그러네! 우리가 복음을 잘못 믿었나 봐. 뿌리로 돌아가야겠어. 저분들은 한 분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고, 한 분은 예수님의 수제자인데, 그분들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순전한 복음으로 갈 수 있겠어?”라며 흔들렸습니다. 큰일입니다. 그것이 과연 순전한 복음이었을까요? 사람들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이 제게 사역을 받으러 올 때, 사실 제 몸에도 통증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늘 아무 병도 없이 사는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도 아플 때가 있고, 그 아픔 중에도 사람들을 섬깁니다. 섬기면 어떻습니까? 여전히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루실 몫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사람이 트집을 잡으려면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여러분, 절대로 저를 거룩의 모범으로 삼지 마십시오. 저는 모범이 아니라 죄인의 표본입니다. 왜 죄인의 표본일까요? 성질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밥 먹을 때 저는 간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거위 간은 너무 비싸서 못 먹으니 돼지 간이라도 먹어 간을 보충합니다. 속 썩는 일이 많아서 도를 닦는 사람처럼 초연해지려 애써 보았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지금은 보온병 하나 들고 다니는 중년 아저씨, 노인네 같은 모습으로 구기자차를 타 마시며 간을 달랩니다. 속에 화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정말 그렇습니다. 속상한 일이 너무 많아서 가끔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후회하고, 후회하다가 낙심하고, 낙심하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주님 얼굴 뵙는 그날까지 어쨌든 그렇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역자와 비교까지 했습니다. “아볼로를 보라, 바울과 비교해 보라. 아볼로는 얼마나 훌륭한가!” 하면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울을 안팎으로 샅샅이 뜯어보며 헐뜯었습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고린도 교인들은 “아, 바울은 가짜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그는 눈물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침묵하자니 고린도 교인들이 이 구덩이에 빠져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고, 말하자니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되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변호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 이 능력의 복음 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나의 행실을 보라! 내가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보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행했는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하며 어떻게 가르쳤는지 보라!”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너희에게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나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노라. 너희는 다 나의 영적 자녀들이다.” 내가 나 자신을 변호해서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한 변호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는 바울이 왜 이렇게 자기 변호를 좋아할까 생각했는데, 다 그들이 바울을 몰아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내세운 비교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두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서 담대히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성되게 행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견주어 보려면 충성을 견주어 보아야 합니다. 비교하려면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비교해야 하고, 사람의 행실을 비교해야 하며,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인도했는지를 비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비교하려면 하나님의 권능을 비교해야 합니다! 말재주로 따지자면 사기꾼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견주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능력의 복음이라는 터 위에 굳게 서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권능은 영적 세계에서의 능력이요, 원수 마귀를 짓밟는 권세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본문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영적 자녀들을 섬길 때 마치 맨 끝에 둔 것같이 섬겼노라고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사역자란 다른 사람을 먼저 앞으로 보내고, 자신은 가장 위험한 짐을 짊어진 채 맨 끝에 서는 사람입니다. 왜 맨 끝에 서야 합니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사도 바울에게 섬김을 받는 자일지라도, 저는 여러분 또한 이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품고 수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배경이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음이라!” 기억하십시오. 능력 넘치는 복음을 능력 없는 복음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능력 없는 복음을 다시 뜯어고쳐 회복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능력의 복음 안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의 배경을 설명해 드렸으니, 이제 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논지를 이어가겠습니다.

5.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그 행함을 보라

사역을 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어서 말하자면 눈물겨운 사연투성이입니다. 한 자매가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붓는 아주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날 제가 그분을 붙잡고 기도해 주는데, 제 손등에 메추리알만 한 커다란 혹이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눈앞에서 뼈마디 근육이 불룩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자매의 병은 나았는데, 제 손등에는 혹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당신도 별수 없네, 실력이 없네”라고 할지 모릅니다. 저는 손등에 혹이 생기든 어디에 생기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나았으니까요. 한두 달 뒤에는 그분의 시누이 둘을 섬기고, 또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참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매정하게 차 버린 것입니다. 그 손등의 혹이 바람 든 기포인 줄 아십니까? 힘줄이 뭉친 딱딱한 결절이었습니다. 저를 차 버렸는데, 어떻게 버렸을까요? 나중에 그분을 아는 사람이 제게 전해 주기를, 그 집 근처에 어떤 예언자가 있는데 그 자매에게 “저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온몸이 아파 죽더라도 천국에 가야지, 이단에 빠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투 익숙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몸의 통증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 고통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천국에 간다고요? 천국이 아니라 흑설탕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무슨 천국에 가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설탕물에 절여지러 가는 것입니까? 설탕에 절인 음식은 썩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설탕물에 재워 둔 고기는 상하지 않고 썩지 않습니다. 설탕은 방부제 역할을 하니까요. 제 생각에는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설탕 속에 들어가 박제 표본이나 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러면 썩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그 사람이 행한 것을 보십시오! 다섯 번째 대지입니다. 다 적으셨습니까?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그 사람이 행한 것을 보라.’ 그 자매의 통증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어디서 자칭 선지자를 데려왔는데, 그런 선지자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그런 자가 무슨 선지자(先知)입니까? 먼저 먹어 치우는 선식자(先食)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훌륭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일찍이 혼란에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몹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이 정말 오실 그 메시아인지를 확인하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정면으로 말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라. 그러고 나서 스스로 판단하라.”

이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이런 큰 능력의 나타남,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무슨 형광빛으로 번쩍이며 나타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곧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맹인이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그 행함을 보십시오. 행함은 형편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하다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기꾼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 자들은 수많은 사람을 천국이 아니라 설탕 절임 통으로 끌고 들어갈 뿐입니다.

6. 예수님을 닮아야 진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자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예수님을 닮지 않은 자는 자기가 닮은 대상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귀신을 쫓아낼 때 종종 발견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쫓아내면 또 돌아오고, 쫓아내면 또 돌아오는 참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하루는 제가 말했습니다. “이 흉악한 귀신 놈아, 내가 너를 두들겨 패서 쫓아냈는데 며칠 뒤에 왜 또 기어들어 오느냐?” 그러자 귀신이 말했습니다. “나도 참 억울합니다.” 제가 “네가 뭐가 억울하냐?”고 묻자 귀신이 답했습니다.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저 사람을 봤는데, 어라? 생각이 나랑 똑같고 나를 너무 쏙 빼닮았더라고요. 그래서 쏙 들어갔지요. 저 사람이 나를 불러들인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패서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며칠 뒤에 다시 보니까 여전히 나랑 똑같이 굴고 있길래 들어갔는데, 내가 내 사람 속에 들어간 게 무슨 잘못입니까?” 이 말을 듣고 참 씁쓸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닮은 자는 자기가 닮은 곳으로 갑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을 닮은 자는 예수님께로 가고, 귀신을 닮은 자는 귀신에게로 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귀신이 여러분에게 찾아오든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오시고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님을 닮지 않은 자는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귀신을 닮은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한번은 어떤 교회에서 부흥 강사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강단에 서더니 “천 명 중에 한 명만 천국에 가고, 999명은 지옥에 갑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교회의 한 성도가 생각이 좀 있는 분이라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식사를 하면서 묻기를, “목사님, 우리 교회에 온 강사 목사님이 천 명 중 999명은 지옥 가고 한 명만 천국 간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종종 저에게 이런 골치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가 지어낸 문제인지 진짜 겪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도 천국에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 저보고 숫자를 세어 보라 한들 어디 가서 세겠습니까? 셀 수가 없지요.”

그러고 나서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제게 답은 하나 있습니다.” 그가 “그 답이 뭡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죽어서 예수님께로 가고, 살아 있을 때 마귀를 닮은 사람은 죽어서 마귀에게로 갑니다. 만약 절반은 예수님을 닮고 절반은 마귀를 닮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답이 있지 않습니까? 네 팔을 찍어 버리고 네 다리를 잘라 버려라, 너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찍어 내버리라 하셨습니다. 찍어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겠지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권능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제가 대답한 방식으로 답해 보십시오. 얼마나 명쾌합니까!

어떤 사람은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을 사과 고르듯 이리저리 훑어보며 앞뒤로 자세히 살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문제가 좀 있네요. 아무리 뜯어봐도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천국 가기가 좀 힘들겠습니다. 지금 당신 모습을 보니, 만약 천국에 온통 당신 같은 사람만 있다면 저는 천국에 별로 가고 싶지 않네요.” 제가 질문에 답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직접적으로 대놓고 말하면 상처를 받으니 그렇게는 안 했지만, 돌려서 분명히 답을 해 준 것입니다. “천국에 온통 당신 같은 사람만 있다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갈 곳은 분명 천국이 아닐 테니 우리는 절대 그곳에 가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아야 진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어렵습니까?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예수님을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아주 준엄하게 책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 육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영적인 사람이 되어 스승이 되고 남을 가르쳐야 할 터인데, 뼛속까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육에 속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인데,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어렵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며,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사도 바울로부터 이어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말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닮으려 합니까?” 그 말을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를 닮고 싶단 말입니까? 예수님을 닮기 싫다면 도대체 무엇을 닮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닮지 않을 거라면 도대체 예수는 왜 믿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닮는 것입니다.

7.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가?

여러분, 눈치채셨겠지만 요즘 제 설교는 꽤 실천적입니다. 따라 행할 수 있는 실천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진짜다’라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오늘 성도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사장이면서 불충한 제사장이라면 어찌 되겠습니까? ‘불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충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렇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불충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람을 피웠다는 뜻입니다. 몸으로 바람을 피울 틈이 없었더라도 마음으로 이미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음란함과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하면서 충성이 없다면 얼마나 심각한 모순입니까? 성도 여러분, 충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종이 되고, 충성스러운 십자가 군사가 되고,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십시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목사님은 왜 그렇게 사역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충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영적 자녀들을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정 이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제발 어디 가서 “목사님, 그날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제 병이 나았어요. 저 정말 영적이지 않나요?”라는 따위의 간증을 늘어놓지 마십시오.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당신이 영적이라고요? 그날 기도할 때 당신의 육적인 악습을 쳐서 복종시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경험한 것으로 다 되었다고 착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일 뿐, 여러분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논하려거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고,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은 우리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리고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품고 섬길 때,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기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왜일까요?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길 때 하나님의 능력이 끊임없이 부어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 어머니가 지진이 일어난 후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아래 자기 아이가 깔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깔려 있는 것을 본 어머니가 온 힘을 다해 그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려 치워 버렸습니다. 결국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사람들이 믿기지 않아서 어떻게 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냥 저 콘크리트를 번쩍 들어 치우고 아이를 꺼냈을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콘크리트가 그대로 있으니 다시 한번 들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들었습니까?”라고 묻자 어머니는 “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을 뿜어냅니다. 아이가 무거워질수록 어머니의 힘도 세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갓 태어났을 때는 3~4킬로그램이던 아이를 안고 다니다가, 10킬로그램이 넘어가고, 15킬로그램이 넘어가도 어머니는 거뜬히 번쩍 안고 걸어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는 철저히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권능을 풀어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충성심을 가지십시오.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기십시오.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기는 것은 손님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 손님이 아니라 내 영적 자녀입니다. 섬김에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나눔과 질의응답 시간에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또 묻지 마십시오. 이미 다 말씀드렸으니 돌아가서 설교를 다시 들으십시오!

8.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에는 영광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복음을 믿는다면,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만약 입술로는 “정말 믿습니다” 하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좀 받아야 할 때가 오면 발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꽁무니를 뺀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겪은 비난과 고난을 보며 불평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난을 겪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들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그들을 덮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길은 그저 떡고물이나 얻어먹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대가를 지불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귀하게 여기고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르지 않는 길이란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면서 고난을 전혀 겪지 않고 어떻게 주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가셨는지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왜 기꺼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었을까요? 인생이라는 것의 본질을 이미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산을 명백하게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 충성스러운 종과 군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논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삽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합니다.

9. 요약: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에 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계에서의 권세와 능력, 곧 영계의 권능에 달려 있습니다. 권세와 능력을 합쳐 ‘권능’이라 부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권능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오늘 나눈 말씀 그대로입니다. 순전한 복음은 반드시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원수 마귀를 짓밟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어떤 일이든 영적 세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영적인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계의 일화들을 풀자면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겪은 후에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권능을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그저 권능을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여러분을 통해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사 원수 마귀를 짓밟고 음부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여러분 발아래 굴복시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모든 곳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아멘!

찬양 한 곡 부르신 후 오늘의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분은 헌금하지 마십시오. 이 시간 다 함께 손을 들고 저를 따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기를 결단합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권능이 나를 통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게 하시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품고 섬기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수많은 성도를 일으켜 세우사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모두의 심령을 감동하사 주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주님의 권능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기를 사모하며,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섬기기를 사모하게 하옵소서. 우리 가운데 강림하사 우리를 존귀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빚어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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