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원수의 성문을 취하라” 제6강,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짐”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오늘 전하는 이 제6강은 정말로 특별히 좋은 말씀입니다. 바울 시대에도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별로 특별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류 목사를 보아도 외모도 볼품없고 말도 투박하며, 때로는 욕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대의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시대의 바울은 사람들이 “내가 예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나는 도저히 본받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러면 나 사도 바울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를 본받으라고? 네 그 형편없는 꼴을?” 그러나 바울은 결코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여러 교회에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예수가 여러 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는 오직 한 분이시지만, 이제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더해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런 글을 썼을 때 많은 이들이 우스갯소리로 여겼지만, 바울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지난 강박 제목은 “주 예수님의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들려 있다”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강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치유와 축사가 효력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꾸짖는 것은 예수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큰 능력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자 구주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바울은 목숨을 걸고 반박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능력은 어디서 오며, 우리의 승리는 어디서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들려 있음을 알지 못했다면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우리가 그분을 본받아 승리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면 오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승리하는지, 어떻게 원수의 성문을 취하는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어차피 승리하지 못해도 그렇게 살다가 맥없이 죽는 것이고, 승리해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이치이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사도 바울을 본받으십시오.
어제 제가 짧은 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도 영상을 보십니까?”라고 하겠지만, 저도 할 일 없을 때 가끔 봅니다. 아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영상이었습니다. 증기기관차 시대의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플랫폼에 빨간 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기차가 수십 미터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 청년이 철로로 뛰어내려 레일 위에 목을 대었습니다. 곧바로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습니다.
모자이크를 처리했어도 자살 영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 멀리서 기차가 다가오는데, 정말 끝장나 버렸습니다(Game Over). 이 영상을 찍은 사람은 사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모습을 찍으려던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한 사람이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는 순간을 찍게 된 것입니다. 이 영상이 공개된 후 아래에 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나도 투신하고 싶다.” 제가 단 댓글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단 댓글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죽을 테면 죽으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것이 더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그렇게 괴로워해야 합니까? 귀신에게, 음부에게, ‘라오마(老马)’와 ‘우두마면(악한 영들)’에게 짓눌려 죽어가는 것입니다. 승리하지 못한 인생이 얼마나 괴로우면, 얼마나 극단적으로 괴로우면 철로로 뛰어내리겠습니까? 왜 사람에게 죽을 마음은 있으면서 살 마음은 없겠습니까? 귀신이 사람을 극도로 괴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아직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제가 아직 다 건져내지 못했습니다. 승리하지 못하면 사는 것이 이토록 괴롭습니다.
여러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들려 있기 때문에 사망을 이기고 지극히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달관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달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달관했다고 해서 가출을 하거나, 속세를 떠나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철로에 눕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눕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누워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승리하십시오! 사람은 살고자 애쓰지만 결국 잘 살지 못하고 귀신에게 휘둘립니다. 그러나 살기를 구하지 않고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져 이 세상의 것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게 만들면, 모든 귀신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뿐만 아니라 ‘라오마’와 악한 영들까지도 우리가 장악하게 됩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친구 몇 명을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두 명은 암으로, 한 명은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다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교회의 작은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였기에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너무 진지하게 살았고, 너무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그들을 섬겨보았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결국 죽었습니다. 살고자 했던 이들은 다 죽었는데, 살기를 구하지 않은 저는 아직 살아 있으니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습니까?”라고 물으면 “빚을 졌습니다”라고 합니다. 빚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뭐가 고통스럽습니까?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파산했습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일대에서는 이를 “궁적(파산자 명부)”에 올랐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국적을 얻은 것이 아니라 파산자 명부에 오른 것입니다. “목사님, 사장님한테 욕을 먹어서 괴롭습니다”, “고객에게 호되게 당해서 괴롭습니다”, “사기를 당해 60만 위안을 날려서 괴롭습니다”, “일감이 끊긴 지 오래되었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괴롭습니다”. 저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여러분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제부터 오늘까지 살았으면 오늘부터 내일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일은 큰일이 아닙니다. 사기를 당했어도 오늘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을 여러분은 천천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 오직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벗어나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벗어납니까?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괴로워하면서 찡그린 얼굴로 밥을 먹어도 밥을 먹는 것입니다. 러간몐(열간면)이나 샹양 우육면을 먹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얼굴을 사과처럼 환하게 펴고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먹어도 국수 한 그릇 비우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제 우리 성도 중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자매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왜 철로에 눕지 않았을까요? 철로에 누울 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를 철로에 데려다 놓을 수도 없고 스스로 갈 수도 없으니 집에서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저는 요즘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들을 단순히 육신적으로 살려두는 데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목사님, 이 사람이 죽어갑니다.” 제가 기도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지만, 결국 그들은 나중에 또 죽었습니다. 마음에 일종의 장애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일찍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폐암 환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폐암은 보통 3~4개월 만에 급격히 악화됩니다. 그 서너 달 동안 그분은 병상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자, 그는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며칠 지나 또 아프다며 병상에 누워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제가 다시 기도하자 또 밭에 나가 일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이 없으면 또 아파했습니다. 이런 ‘암 성격’은 아프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결국 나중에 죽었습니다. 참으로 허탈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삶. 그래서 때로는 “이런 고생 그만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로로 뛰어내릴 힘조차 없어 병상에 누워 있는 것, 이것이 인생의 결말입니다. 이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저와 같은 생각을 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34세까지 살았다면 이미 주 예수님보다 더 오래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33세까지 사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승리의 길을 여셨고 그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니,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가장 잘 본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내가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노라.” 그러나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멀쩡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에 제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이 시대에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바울을 가장 잘 본받은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저는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미련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삶이 대단히 고통스러워집니다. 많은 성도들이 제게 “목사님, 답답했던 마음이 목사님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왜 이렇게 편안해질까요?”라고 말합니다. 제가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보배가 있고 특효약이 있습니다. 특효약이 무엇입니까? 먹으면 낫는 약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연출하십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제 삶을 연출하시고 여러분의 삶도 연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상황을 연출하시며 제 안에 있던 세상적인 소망들을 모조리 무너뜨리셨습니다. 저더러 평범하고 안락하게 살라고 해도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제가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이 모든 것은 참으로 선합니다. 여담이지만, 사도 바울은 결혼이나 남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단히 경험이 풍부하게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한 뒤, 오랜 기간 자취를 감추어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에 가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부모님이 분명 결혼을 강요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니 이것으로 따지지는 마십시오. 기록되어 있어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설교에 양념을 치는 일종의 추측, 골드바흐의 추측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설교할 때 이런 외전(外傳)을 덧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바울은 결혼 독촉을 받아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등 많은 일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장가가는 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 하고, 시집가는 자는 남편을 기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들지 못할 때 큰 고통을 겪으며 육신에 고난이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분명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세상적인 가정을 꾸려 살아가려는 마음을 철저히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결혼 때문에 자신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형제들이 모여 술 한잔 기울이며 집안일을 털어놓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것은 바울이 처음부터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살고자 하는 미련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 길로 이끄시어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게 하셨고,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선악과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왜 그 나무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암직하게 보았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연출하신 것입니다. 그 나무를 두리안처럼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겉껍질만 먹게 하셨다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속은 냄새가 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열매를 선악과처럼 탐스럽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까? 고향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왜 그를 흔드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를 흔들고자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은 이 땅이 내가 네게 주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기근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흔드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품고 있는 아주 작은 미련마저도 다 흔들어 없애버리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괴롭고, 일자리를 찾기 힘들며, 결혼 생활이 고통스럽습니까?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세상적인 꿈을 무너뜨리시고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삭이 자신을 바친 것도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쥐고 외삼촌 집으로 가서 학대를 받았습니다. 품삯을 떼이고 약속한 것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는 지팡이 하나 짚고 찢어지게 가난한 채로 14년을 아무것도 없이 살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 것 모두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게 하여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여러분을 덮게 하려는 것입니다. 좋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까?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혹독하십니다. 기도할 때 한 자매가 남편이 자기에게 “당신 요즘 좀 독해졌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참으로 독하게 흔드십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으면 왜 홍해 앞으로 데려가셨을까요? 얼마나 절망스럽습니까? 여러분의 처지가 그 정도로 절망스럽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더 강도를 높여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여러분 앞에 홍해가 놓이도록 제가 더 기도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누가 여러분더러 이 세상에 아직도 미련을 두라고 했습니까?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구름 기둥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장막을 걷었습니다. 자기 집 장막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막까지도 걷어서 메고 가야 했습니다. 걷고 또 걷는 광야 길이 걷기에 좋았겠습니까? 풍경이 아름다웠겠습니까? 광야를 헤매는 여행은 사서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한바탕 흔들어 놓으시고, 조용히 살고 싶은 내 뜻을 꺾으시며 기어이 흔드십니다. 그러나 제게는 작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흔드시는구나. 내 안의 세상적인 꿈을 무너뜨리려 하시는구나. 좋다, 협조하자.’
“하나님, 주님이 감독이 되십시오. 제가 이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쳐 반드시 남우주연상을 받겠습니다.” 모든 것을 연출하시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시대에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이 자신에게 있고, 이 보배가 질그릇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요 구주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오라! 하나님, 주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의 뜻대로 연출하시옵소서. 우리 안에서 다시 한번 허무는 작업을 행하시옵소서.”
여러분이 지금 “목사님, 괴롭습니다”라고 하십니까? 좋습니다! 괴롭지 않으면 벌써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겠습니까? “목사님, 사기를 당했습니다.” 좋습니다! 잘 당했습니다! “목사님, 파산했습니다.” 파산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연출하신 것입니다. “감독님, 오십시오!” 다만 죽기 직전까지만 연출하십니다. 주인공이 죽으면 연극이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제 많은 친구들은 죽었지만 저는 살아남아 연속극을 계속 찍고 있으며, 저는 주님의 연출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것, 오늘날 보배를 소유한 우리에게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으십시오. 죽을 사람은 죽으라 하십시오. 내 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원수의 성문을 취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성도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죽을 뻔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끝장날 뻔했으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연출하고 계시며 아직 끝장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하는 매 순간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랜 훈련 끝에 저는 바울의 경험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바울의 경험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승리의 열쇠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귀신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짓밟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괴롭히려 하느냐? 너는 나를 보기만 해도 괴로울 것이다.” 이렇게 선포하다 보면 괴로움이 웃음으로 바뀌고 연극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본문 말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7-14)
기도
하나님, 오늘 주의 뜻대로 행하시고 주의 뜻대로 연출하시옵소서. 우리의 평생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주의 긍휼을 입어 이 직분을 받았사오니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의 뜻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감당하는 이 무대를 아름답게 연기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바울과 같이 우리 안에 이 보배가 있어 주의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를 위하여 우리가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주께서 우리 몸에 주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심임을 압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와 함께 부활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우리를 예비시키사 승리의 뜻을 품게 하시고, 세상에서 날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요 며칠간 저는 고린도후서를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승리’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고린도 교회에 베드로 일행과 아볼로 일행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베드로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베드로 형제의 말인가, 바울 형제의 말인가? 베드로 형제는 이러이러하게 가르치고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 형제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적이 없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떤 무리는 바울을 따르고, 어떤 무리는 베드로를 따랐습니다. 바울, 베드로, 게다가 아볼로까지 셋으로 나뉘니 교회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철없는 자들이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입니다. 교회가 난장판이 되자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이전에는 기도하면 병이 나았는데 이제는 기도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아내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교회에서 베드로에게 결혼과 가정에 대해 묻자 베드로는 많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편지를 보냈고,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써서 교회에서 낭독하자, 베드로를 따르던 이들이 난리를 치며 바울을 비난하고 온갖 모함을 씌웠습니다. 상황이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교회 안에 온갖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성찬식만 보아도 흥미롭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행하던 성찬은 거의 성대한 만찬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작은 떡 한 조각과 작은 잔 하나를 나누게 했습니다. “그걸로 배가 차겠는가?” 그런데 베드로 쪽에 가보니 떡이 큼직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은 참 옹졸하다. 우리는 떡을 큼직하게 만들어 목에 걸고 뜯어먹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유추해 본 상황입니다. 어쨌든 교회가 큰 혼란에 빠졌고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후 혼란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바울은 눈물로 고린도중서(우리가 볼 수 없는 실전된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또 다른 편지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눈물로 편지를 쓴 후 바울은 마음이 몹시 무거워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며 디도를 고린도로 파견했습니다. 디도는 매우 영리한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와는 다른 성향이었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가서 처신을 훌륭히 하여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생각과 신학 체계, 그리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섬겨야 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교회의 타락한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섰습니다.
디도가 돌아와 바울에게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고린도 교회가 다시 바울의 신학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배후에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패망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서신인 ‘고린도후서’를 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그의 승리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비결은 “고린도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져야 합니다. 나 바울을 본받으십시오”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이 승리의 길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더 큰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은혜를 받으십시오.” 바울은 거침없이 고린도후서를 써 내려갔고, 저는 이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아 수없이 읽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은 바울이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경험을 기록합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으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쉽게 죽지 않았습니다.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교회를 위해 직분을 받은 후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그만큼 큰 위로도 받았습니다.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을 경험했고, 소망이 끊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형제는 아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아내도 남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부모도 자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손으로 붙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강건해질 때마다,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마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2장에서는 승리의 향기에 대해 씁니다. 우리 몸에는 일종의 향기가 있습니다. 이 향기는 죽을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살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도 바울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너의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누군가 바울에게 와서 죽어가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할 때 바울은 ‘죽으면 죽는 것이지’라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리하여 3장에 이르러 모세를 언급합니다.
모세의 사역에도 영광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비하면 모세의 영광은 이미 사라져 가는 영광에 불과했습니다. 이 논리는 명확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으나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거쳐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그 영광은 모세의 영광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나 사도 바울이 받은 직분은 모세의 직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직분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3장의 내용입니다. “나의 섬김은 모세를 뛰어넘는다. 모세를 들먹이며 할례니 무할례니 따지지 말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설령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라 할지라도 모세를 들먹인다면 그것은 사라질 영광에 불과하다.”
이 말씀은 대단히 강력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네가 어디서 불쑥 나타나 감히 모세와 비교하느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네가 뭔데 ‘사명(命定) 신학’을 운운하느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전통 교단과 비교하느냐? 저들의 교회가 얼마나 큰지 보라”고 말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승리하는 교회이며, 그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로 이어집니다. 영광이 가득한 섬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을 복음 안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더 이상 나약하고 흐리멍덩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의 복음입니다. 4장에 이르러 우리가 읽은 본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직분을 받았으니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에 넘겨져 골고다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도 본받기를 원하십니까?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항상 죽음에 넘겨져, 예수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믿으십시오. 구약의 사람들도 믿었기에 살았고, 오늘날 우리도 믿기에 그렇게 살며 선포합니다. 우리는 장차 주 예수님과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5장에서는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으므로 오직 주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6장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봅니다. 바울이 여기서 전하는 것은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신학 체계입니다.
6장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예전에 잘못 읽었을 수도 있으니 다시 나눕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형제자매 여러분,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영광이든 욕됨이든, 진리의 말씀이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속이는 자 같든 아니든, 유명하든 무명하든, 유명한 목사든 아니든, 예수님을 따랐든 따르지 않았든, “나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으며 애초에 신경 쓴 적도 없다! 신경 쓰지 않기에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되지 않게 한다. 매를 맞는가? 좋다, 문제없다!” 모든 것에 초연해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졌는데 이런 것들에 얽매이겠습니까? 얽매이지 않습니다. 철로에 뛰어내릴 각오는 있으면서 십자가에 누울 믿음은 없습니까?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떠하든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직분은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설교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원수의 성문을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선포하십시오. “마귀야, 물러가라! 나를 건드리지 마라, 너는 감당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신경 씁니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내게, 여러분에게,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에만 집중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맡겨진 연극을 최고의 배우처럼 훌륭히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힘차고 담대한 승리의 속성입니다.
어젯밤에 이 말씀을 읽으며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를 위해 승리의 길을 열어주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승리의 비결을 전해준 사도 바울에게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비결을 얻으셨습니까? 비결을 얻었다면 여전히 괴로워하겠습니까? 세상일에 얽매이겠습니까? 힘들다고 불평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질그릇에 담긴 이 보배로 심히 큰 능력을 나타냄
철로로 뛰어내린 사람은 보배가 없었기에 작은 고통 앞에서도 철로로 향했던 것입니다. 돈 때문이든, 아내의 배신 때문이든, 집안의 문제나 자신이 집착하던 일 때문에 극심한 괴로움을 겪은 것입니다. 보배가 없는 인생은 비극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는 보배가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선포하십시오. “내 질그릇 안에 이 보배가 있으니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의 고난이 바울보다 큽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각자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보배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를 해결합니다. 이 보배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원수를 사로잡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결핍을 느끼는 이유는 보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배를 가졌다면 어찌 오늘처럼 살겠습니까? 왜 보배의 능력을 얻지 못합니까?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에는 온통 신경 쓰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무관심합니다. 세상에서 헛된 소망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절망뿐입니다. 절망스럽다면 철저히 절망하십시오. 세상적인 꿈을 무너뜨리고 보배를 여러분 안에 모셔 들이십시오.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질 때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것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돌에 맞았을 때 앞니가 부러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 네 예수는 별 볼 일 없구나. 앞니가 빠지지 않았느냐.” 이것은 제가 꾸며낸 말이지만 돌에 맞은 것은 사실입니다. 돌에 맞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시체처럼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난 후 흙을 털고 걸어갔습니다. 비록 이는 빠졌을지라도 겉사람은 낡아질지언정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치아에 집착하지만 바울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단순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돌에 맞았는데 몸과 얼굴에 흉터가 없었겠습니까?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졌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 알아들으셨습니까? 이 보배는 얼굴에 흉터가 남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돌에 맞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보배에 대해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보배를 취하십시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매번 사소한 일 때문이지 않습니까? 늘 보배의 배터리를 방전시켜 버립니다. 보배를 방전시키는 데는 일등이면서 정작 보배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문제는 많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함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며,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목양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두 은밀하게 사역해야 했으니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았습니다. 보배가 있으니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가 둘러싸도 두렵지 않고 앞에 홍해가 있어도 두렵지 않으나, 속에 보배가 없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아도 갇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연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만큼 큰 환난을 겪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지만, 문제는 원수의 성문을 취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소망을 무너뜨리고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직분 때문에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다가 욱여쌈을 당해 보배가 방전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보배의 배터리를 다 써버리니 지속력이 없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 직분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직분은 무엇이며, 여러분을 둘러싼 대적은 누구입니까? 그러나 갇히지 않습니다. 오늘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은혜를 입으십시오.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와 주님의 각본대로 연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겪는 욱여쌈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결코 싸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꿈을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한 욱여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결코 갇히지 않을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함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쓴 고린도후서는 눈물의 시기를 지나온 고백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였으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들어와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성도가 견디지 못하고 멸망과 타락의 길로 갔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낙심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속에 보배가 있었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일부는 돌아왔으나 일부는 그대로 멸망했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죽을 자는 죽게 하고 살 자는 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이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죽을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고 살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걸을지라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섬겼던 사람들 중에는 죽음에서 살아난 것과 다름없는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돌아서서 하나님을 모른 체했고, 저는 마음이 찢어지듯 괴로웠습니다. 왜 사람이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승리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성도들을 볼 때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모두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기도합니다. 저와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제가 얼마나 전심전력하는지 압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한 것 중에 얻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보배를 소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보배가 있고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있다면 이 보배는 강력히 역사합니다. 언제 꺼내어 써도 충만하며 배터리가 닳지 않고 지속력이 뛰어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욱여쌈을 전혀 당하지 않거나 마음에 답답한 일이 전혀 없도록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이 직분을 감당하려면 욱여쌈과 답답함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썩지 않을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다면 세상에서 살아가고 섬기는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저의 소망은 땅 위에 거대한 예배당이나 랜드마크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소망은 하나님 앞에 서서 칭찬을 받는 것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습니다. 피곤해도 피곤치 않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안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함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박해가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죽을 것 같았으나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해를 받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겪은 일이며 모든 곳에서 겪은 일입니다. 박해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길이겠습니까?
며칠 전 한 자매의 아들이 자살하려 하여 오랫동안 기도한 끝에 겨우 호전되었습니다. 최근 그 자매가 담당 목회자와 함께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그 아들은 이전에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했던 아이였습니다. 철로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수면제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리어 엄마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기도의 역사가 나타나 귀신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충격을 받자 귀신 들린 사람이 엄마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엄마는 ‘내가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회복되고 승리합니다.
버린 바 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경험하게 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 기가 죽습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가르쳐 준 대로 “내가 뭘 잘못했어? 무슨 일인데?”라고 담대히 맞서십시오. 수면제를 먹을 용기는 있으면서 기도를 받을 용기는 없습니까? 영적인 논리는 마귀가 충격을 받으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함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은 십자가를 피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증명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지 십자가를 면제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을 때 잔이 지나갔습니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진 우리가 어찌 넘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연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런 깊은 고난을 다 겪지 못했을지라도, 겪게 될 때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힘이 될 것입니다. 망하지 아니합니다.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가는 길에서 여러분 또한 “하나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싶겠습니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싶습니까? 답답한 일을 당하고 싶습니까?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싶습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졌기에 이러한 일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나타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고난과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과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직분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택하심과 긍휼을 입어 이 직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직분을 맡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 직분을 맡았으니, 작은 목회자가 되었든 사역자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직분을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직분을 감당함을 통해 우리 몸에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삽니까? 그저 살기 위해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어 이 직분을 맡은 것은 살아가는 데 큰 미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미 죽어간 사람들을 수없이 보지 않았습니까? 몇 년 전 제가 고향에 갔을 때 동창회가 있었습니다. 식사 도중 전화가 왔는데 다른 동창 하나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위암 수술은 잘 끝났으나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위액이 복강으로 흘러나와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면회가 금지되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장례식장 관 속에 누워 있는 그 친구를 보았습니다. 사는 것은 참으로 덧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세상에 미련이 많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복을 택했습니다.
최근 우리 성도들이 “화인 사명(命定) 음악”을 통해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라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소망도 없이 그저 살다가 죽어갈 존재였으나, 이제는 영원한 영광의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직분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제가 가장 많이 본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작은 유익을 얻었으나, 아직 얻지 못한 수많은 은혜가 있음에도 그 작은 유익만 챙겨 떠나버렸습니다. ‘라오마(세상 영)’에 이끌려 간 것인지, 자신이 ‘라오마’를 데리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은 늘 아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겨우 구우일모, 바닷물의 한 방울만큼 경험해 놓고 왜 떠나버립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여,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이것은 바울이 친히 경험한 후 고린도 성도들과 우리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더 큰 능력과 약속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아멘이십니까?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