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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느헤미야 13장 -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2025-12-19 41,889 尼希米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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尼希米记13章-与外邦人隔离
  • 1 当日,人念摩西的律法书给百姓听,遇见书上写着说,亚扪人和摩押人永不可入 神的会;
  • 2 因为他们没有拿食物和水来迎接以色列人,且雇了巴兰咒诅他们,但我们的 神使那咒诅变为祝福。
  • 3 以色列民听见这律法,就与一切闲杂人绝交。
  • 4 先是蒙派管理我们 神殿中库房的祭司以利亚实与多比雅结亲,
  • 5 便为他预备一间大屋子,就是从前收存素祭、乳香、器皿,和照命令供给利未人、歌唱的、守门的五谷、新酒,和油的十分之一,并归祭司举祭的屋子。
  • 6 那时我不在耶路撒冷;因为巴比伦王亚达薛西三十二年,我回到王那里。过了多日,我向王告假。
  • 7 我来到耶路撒冷,就知道以利亚实为多比雅在 神殿的院内预备屋子的那件恶事。
  • 8 我甚恼怒,就把多比雅的一切家具从屋里都抛出去,
  • 9 吩咐人洁净这屋子,遂将 神殿的器皿和素祭、乳香又搬进去。
  • 10 我见利未人所当得的份无人供给他们,甚至供职的利未人与歌唱的俱各奔回自己的田地去了。
  • 11 我就斥责官长说:“为何离弃 神的殿呢?”我便招聚利未人,使他们照旧供职。
  • 12 犹大众人就把五谷、新酒,和油的十分之一送入库房。
  • 13 我派祭司示利米雅、文士撒督,和利未人毗大雅作库官管理库房;副官是哈难。哈难是撒刻的儿子;撒刻是玛他尼的儿子。这些人都是忠信的,他们的职分是将所供给的分给他们的弟兄。
  • 14 我的 神啊,求你因这事记念我,不要涂抹我为 神的殿与其中的礼节所行的善。
  • 15 那些日子,我在犹大见有人在安息日榨酒(原文是踹酒榨),搬运禾捆驮在驴上,又把酒、葡萄、无花果,和各样的担子在安息日担入耶路撒冷,我就在他们卖食物的那日警戒他们。
  • 16 又有推罗人住在耶路撒冷;他们把鱼和各样货物运进来,在安息日卖给犹大人。
  • 17 我就斥责犹大的贵胄说:“你们怎么行这恶事犯了安息日呢?
  • 18 从前你们列祖岂不是这样行,以致我们 神使一切灾祸临到我们和这城吗?现在你们还犯安息日,使忿怒越发临到以色列!”
  • 19 在安息日的前一日,耶路撒冷城门有黑影的时候,我就吩咐人将门关锁,不过安息日不准开放。我又派我几个仆人管理城门,免得有人在安息日担什么担子进城。
  • 20 于是商人和贩卖各样货物的,一两次住宿在耶路撒冷城外。
  • 21 我就警戒他们说:“你们为何在城外住宿呢?若再这样,我必下手拿办你们。”从此以后,他们在安息日不再来了。
  • 22 我吩咐利未人洁净自己,来守城门,使安息日为圣。我的 神啊,求你因这事记念我,照你的大慈爱怜恤我。
  • 23 那些日子,我也见犹大人娶了亚实突、亚扪、摩押的女子为妻。
  • 24 他们的儿女说话,一半是亚实突的话,不会说犹大的话,所说的是照着各族的方言。
  • 25 我就斥责他们,咒诅他们,打了他们几个人,拔下他们的头发,叫他们指着 神起誓,必不将自己的女儿嫁给外邦人的儿子,也不为自己和儿子娶他们的女儿。
  • 26 我又说:“以色列王所罗门不是在这样的事上犯罪吗?在多国中并没有一王像他,且蒙他 神所爱, 神立他作以色列全国的王;然而连他也被外邦女子引诱犯罪。
  • 27 如此,我岂听你们行这大恶,娶外邦女子干犯我们的 神呢?”
  • 28 大祭司以利亚实的孙子、耶何耶大的一个儿子是和伦人参巴拉的女婿,我就从我这里把他赶出去。
  • 29 我的 神啊,求你记念他们的罪;因为他们玷污了祭司的职任,违背你与祭司利未人所立的约。
  • 30 这样,我洁净他们,使他们离绝一切外邦人,派定祭司和利未人的班次,使他们各尽其职。
  • 31 我又派百姓按定期献柴和初熟的土产。我的 神啊,求你记念我,施恩与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어서 《느헤미야》 13장, 곧 마지막 장을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이며, 이는 느헤미야의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탄식이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끌고 나아와 복 받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기에, 손에 쥔 행정 권력을 사용하여 이 백성들을 억지로 축복 속으로 밀어 넣고 재앙 가운데서 건져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건져낼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가 십여 년 동안 이렇게 사역하면서 느낀 것은 참으로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자들이었고, 기를 쓰고 재앙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마음은 몹시 답답하며, 종종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깨부수고, 사람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깨뜨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며,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여 일을 올바르게 이루어 내도록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매번 사람을 거스르게 됩니다. 부딪치지 않고는 이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나와 당신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나와 당신 뒤에 있는 그 논리 체계 사이의 충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저희는 한 암 환자를 섬겨왔는데, 섬길 때마다 충돌이 일어나 참으로 답답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려 해도 되질 않습니다! 그는 기어코 마귀의 거짓말을 따르려 합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재앙을 향해 질주하는 것을 눈 뜨고 보면서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으니,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제가 구체적인 일을 하든 치유와 축사를 하든, 매번 맞닥뜨리는 원수는 동일합니다. 바로 세상적인 논리 체계입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이 모임에는 참석하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연신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으며, 비참한 지경의 문턱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제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틈만 나면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며 스스로 재앙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켜 행하고 그분을 의지하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을 받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기에 저는 늘 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어리석은 것을 깨부수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며칠이 지나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지난 12년 동안의 수고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 있었고, 성벽만 겨우 무너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이 재앙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을 보고도 막을 길이 없자, 느헤미야는 마음이 몹시 아팠고, 다시금 그들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자, 레위인들은 드릴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지자 다시 밭으로 일하러 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이를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지역 유지와 결탁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성전 안의 큰 방 하나를 그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말한 대로 살면 도대체 어떻게 먹고산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느헤미야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고, 이스라엘 백성이 재앙을 향해 질주하는 것을 지켜보던 끝에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재앙은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재앙은 닥쳐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에게 임하는 재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를 범하게 됩니까? 바로 세상적인 논리 체계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내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불을 지른 것도 아닌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 체계는 매우 완고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만듭니다. 이 체계를 허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폭약이라도 터뜨려야 할 판입니다.

한번은 사람들을 이끌고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보탑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온통 노반(魯班)이 창안한 장부맞춤 구조로 짜여 있어서 해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끼워 맞추기는 쉬워도 분해할 수가 없었기에, 수많은 보탑들이 천 년의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논리 체계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상적 논리 체계는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말인데도 상대방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우깁니다. 제가 그것은 안 된다고 하면, 그는 그것이야말로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과학이 과연 능사가 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반면에 세상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쉽습니까? 그야말로 극과 극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듭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암 환자들은 많은 고통을 겪지만, 그들 안에 자리 잡은 그 논리를 깨뜨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모두가 다 그 세상적 틀에 갇혀 있습니다.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인간은 본성상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집집마다 저마다의 골칫거리가 있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결국 멸망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제 권면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유익한 일은 제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성경에 “힘써 지켜 행하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힘써 지켜 행하려 합니까? 그것을 믿는 것이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불가능하다고만 여깁니다. 세상에 재앙이 가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매주 주일, 수요일, 금요일마다 와서 제 설교를 듣지만, 과연 여러분 안에서 무엇이 무너져 내렸습니까? 극히 적습니다! 조금만 일이 생기면 선악을 분별하고, 육신을 따르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분통 터지는 일입니까? 제가 이 체계를 깨부수려는 것은 여러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홀로 세상적 논리 체계에 맞섰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세상적인 논리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라오마(老马)’입니다! 이 영은 저와 수없이 맞붙었으나 팽팽하게 맞서며 호각을 이루었습니다. 놈은 제게 “수천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를 참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제 자신만 보더라도, 몇 가지 혹독한 경험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저의 모든 안일한 생각을 산산조각 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저를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건져내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느헤미야는 세상의 논리 속에 파묻혀 사는 자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부터 레위인, 평민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과 뜻을 품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취한 조치들은 겉보기에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습니다. 예컨대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사돈을 맺었는데, 서로 아들과 딸을 주고받으며 통혼했습니다.

한쪽은 대제사장이자 영적 지도자였고, 다른 한쪽은 지역 유지이자 세상의 권세가였습니다. 이렇게 두 세력이 결탁하니 이스라엘 땅 전체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도비야가 막강한 지역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도비야가 “이 방을 비워 내게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자 그대로 내주었는데, 그곳은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난 10여 년간 성벽을 재건하고, 십일조를 회복시키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세상의 어둠의 권세가 이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느헤미야가 홀로 세상의 논리 체계에 맞서 싸울 때, 그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감정은 비통한 탄식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임한 저주를 끊으실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붙들 때에만 온갖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와 규례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행이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숨을 거두고 눈을 감아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장나고,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기를 쓰고 재앙을 향해 내달릴 것임을 말입니다. 그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가치 체계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지극히 견고하고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재앙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맙니다. 인터넷 뉴스를 보십시오. 별다른 잘못을 하지 않은 것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암에 걸립니다.

어떤 유명 연예인이 암에 걸렸다느니, 또 다른 스타가 암에 걸렸다느니 하는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암에 걸려 미국의 최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죽었고, 또 다른 최고의 병원에 갔던 이들도 줄줄이 죽어 나갔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말라 마치 유령처럼 변해버린 환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을 붙들고 살아가시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나는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으니, 암 같은 건 내게 오지 않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닥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하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재앙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으며,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세대마다 멸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 한 사람을 제외하고 온 세상 사람이 약육강식이라는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것이 통했습니까? 통하는 듯 보였으나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들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 후 노아의 가족이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구었으나, 살아가면서 또다시 저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경제적으로 얼마나 번영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불길 앞에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며, 이는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수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암 발병률이 수직 상승하고 있음을 우리는 명백히 보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지만, 암은 더욱 많아졌고 자폐증도 늘어났으며 병원마다 환자들로 넘쳐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원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암 환자로 만들지 않으면 병원이 어디서 돈을 벌겠습니까? 그러니 계속해서 그 길로 달려가 보십시오! 그 재앙이 누구에게 닥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며 마음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는 홀로 세상의 가치 체계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효과가 있었습니까? 별로 효과가 없어 보였습니다.

저희가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 역시 절망 속의 부르짖음이었으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사역 가운데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절망이 엄습합니다. 사람의 내면에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희는 꺼져가는 믿음 속에서 다시금 믿음을 추스르고 계속해서 사역을 이어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느헤미야의 자리에 선다면 저와 똑같은 심정을 느낄 것입니다. 영적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하나님 맙소사, 저들이 멸망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자신의 득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은 우리는 참으로 평안히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몹시 괴로운 것입니다.

어떤 분이 라이브 방송 채팅창에 요즘은 암 환자가 감기 환자만큼이나 흔하다고 썼습니다. 사실입니다. 종양 병원에 가보십시오. 빈 병상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차 있어서 진료 예약조차 잡기 어렵습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华人命定神学)은 다시금 강건하게 일어나 이 세상적 논리 체계와 맞서 싸우며, 사람들을 세상의 논리에서 해방시켜 축복의 삶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암에 걸렸으면서도 자기 자식은 걸리지 않을 거라 믿으며, 여전히 자녀에게 세상적인 방식을 가르칩니다. 훗날 그 자녀마저 암에 걸린다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세상의 논리 체계를 버리고 자녀의 육신에 속한 악한 성향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부모가 얼마나 됩니까? 극히 드뭅니다. 다들 그 멸망의 길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집집마다 저마다의 골칫거리가 있다”는 말처럼,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짐이니 계속 그렇게 짊어지고 가 보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했다

도비야의 자녀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자녀가 혼인하여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습니다. 한쪽은 지역 유지이고, 다른 한쪽은 성전의 대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두 권세가가 결탁하여 무슨 짓을 벌였습니까? 백성의 재물을 갈취하고 성전을 쪼개어 임대용 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임대용 인테리어라면 제가 아주 전문가입니다. 임대 공간에 무엇이 필요한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성전을 임대 공간으로 개조하니 얼마나 좋고 돈이 쏠쏠하게 벌립니까? 왜 돈을 벌려 합니까? 돈을 벌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엘리아십과 도비야는 재앙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닥치겠습니까? 대를 잇지 못하거나 자손에게 참혹한 저주가 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저주는 실로 깊고 무섭습니다.

백성들이 헌물을 드리지 않으니 레위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내가 왜 헌금을 해야 하지? 저 레위인들과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꼴을 봐라, 내가 저런 자들에게 헌금을 줘야 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 돈을 쥐고 내 자신을 위해 쓰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물을 제 손에 쥐고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은 《말라기》에서 말씀하듯이 저주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아끼려다가 결국 오십 퍼센트를 날리게 되고, 쥐면 쥘수록 줄어드는 기이한 악순환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묻겠습니다. 9가 큽니까, 10이 큽니까? 많은 이들이 영적 원리를 알지 못합니다. 장사꾼에게 물으면 당연히 9가 10보다 작으며, 헌금을 내고 나면 수중의 돈이 줄어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주머니에 구멍이 난 것처럼 열 개를 다섯 개로, 다섯 개를 두 개로 줄어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계산을 한번 해보십시오. 돈을 아꼈다 한들, 큰 병에 걸리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까? 게다가 돈은 돈대로 쓰고 결국 목숨까지 잃는다면 그것이 과연 남는 장사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미련하여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신장이 망가지면 요새는 수억 원의 비용이 들고,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하며 조직 적합성 검사도 맞추고 장기 기증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증자가 그렇게 쉽게 나타납니까? 설령 차례가 돌아온다 한들 나와 완벽하게 일치하겠습니까? 어찌 그리 쉽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면, 신장 기증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간이 망가지고, 내장이 상해 대소변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그런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기어코 사망의 길을 향해 걸어갑니다.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자, 느헤미야는 강제로 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세금을 거두듯 “마태야, 가서 헌금을 거두어라! 레위인들을 위해 헌금을 거두어라” 하며, 레위인들을 시켜 집집마다 거두어들이게 할 기세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품으로 이끌 뿐입니다. 그러나 당시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행정적 명령을 통해서라도 억지로 그들을 축복 속으로 밀어 넣고자 했던 것이니, 생각할수록 비통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지역 토호 세력들을 처단했습니다. 남들이 사돈을 맺고 혼인을 했는데도 기어이 갈라놓았고, 머리채를 쥐어뜯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겠습니까? 백성들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가? 내 아들이 저 집 딸을 좋아하고, 저 집 딸이 내 아들을 좋아해서 결혼했을 뿐인데, 아이들을 갈라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도 느헤미야를 뼛속 깊이 증오했고, 주변의 모든 사람도 느헤미야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비록 한 가정에 국한된 일처럼 보일지라도 일가친척 수많은 가문들이 느헤미야를 저주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눈물겨운 충정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쏟아낸 느헤미야의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깊은 뜻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여러분 스스로도 유익을 얻기를 원할지라도,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여러분 안에 있는 그 본성이 너무나 더럽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만 더럽고 당신은 깨끗합니까?”라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저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에 부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앞에 놓인 길은 재앙의 길이며, 이 재앙을 피하려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세상의 논리 체계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 체계가 아무리 견고해 보일지라도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물질을 건드리고,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것을 건드렸으며, 혼인을 깨뜨리면서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빚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이스라엘 백성

느헤미야가 떠나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갖가지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큰 사단이 나서 황제의 진노를 사 옥에 갇혔다더라. 그가 왜 소환되었겠는가? 황제가 대노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났으니 만세다!’라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축배를 들기가 무섭게 느헤미야가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를 따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려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도비야를 거스른 것을 깨닫고, ‘관리는 오고 가도 토호 세력은 영원한 법인데, 느헤미야가 떠났으니 도비야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죽이려 들겠구나’ 하고 염려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겠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인간의 논리 체계는 이토록 완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세상만을 사랑할 뿐,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암 병동으로 보내실 수도 있고, 신체 장기 하나를 망가뜨려 기능을 멈추게 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계속 장기를 갈아 치우며 살아보십시오. 하나 바꾸고 또 하나 바꾸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더 이상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리하여 그들은 십계명을 어겼고, 안식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안식일은 장사하는 날이 되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듯 직무를 행하고, 이방인과 통혼하며,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느헤미야가 돌아와 그들의 ‘돈줄’을 끊어버렸으니, 세상 속담에 “남의 밥줄을 끊는 것은 부모를 해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우매합니까?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대대로 깊은 저주를 겪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400년의 암흑기가 이어졌고, 결국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논리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마귀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려 하면, 마귀는 반드시 그곳에 자신의 보좌를 틀고 선지자들을 죽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듭니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고작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힘써 싸워 마귀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야 합니다. 누군가 암에 걸렸을 때 그 암세포가 얼마나 무섭게 증식하는지 아십니까? 저희가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철저히 훈련시켜 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깨부수었을 때, 마침내 암세포의 광기 어린 증식이 멈추고 서서히 메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았다면 어찌 그러한 심판을 받았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십일조와 헌금을 제 손에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아직 여러분에게 온전한 헌금을 드릴 믿음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 물질을 구별하여 따로 떼어두었다가 온전히 드릴 자격이 갖추어졌을 때 드리십시오.

어떤 사업가가 제게 교회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물으며, 교회가 헌금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헌금을 받는 것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의 헌금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지만, 장사꾼의 눈으로는 이를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 체계가 뼛속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완전히 도려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이 되고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뼈를 깎아 독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갱신을 거쳐야 합니다.

훗날 느헤미야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아 천지를 두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전에도 맹세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이번 맹세라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너무나 답답하여 속으로 탄식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복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 어찌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그러나 인간이란 본래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야 돌아서고, 관 뚜껑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면, 내가 왜 이런 사람들을 섬기겠는가? 진이 다 빠지도록 차고 밀고 당기며 겨우겨우 붙들어 마침내 치유를 받게 해 주었더니 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암 치유를 받았다 할지라도 내면의 세상적 체계를 지속적으로 부수지 않는다면 조만간 반드시 재발합니다. 저희가 수많은 암 환자를 섬겼으나, 결국 하나둘씩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영적 미래를 내다보는 목회자로서, 그 사람이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암이 재발하면 더 이상 손쓸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암 치유를 받고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재발한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원한다면 지금 당장 철저히 돌이키십시오.

얼마 전에도 일흔이 넘은 한 할머니가 암에서 깨끗이 나았으나 다시 재발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이 낫자 말씀 노트도 쓰지 않고 예배도 등한히 하더니 주식 투자에 빠져들었고, 결국 암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저희도 더 이상 사역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모든 형제자매와 사역자, 동역자 여러분, 암 치유를 받은 후 다시 재발한 사람을 만나거든 분명하게 말하십시오. “이제 그만두십시오! 지난번에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으나 당신은 또다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맹세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맹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맹세하고 또 죄를 짓고, 죄를 짓고 또 맹세해 보았자 헛될 뿐입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으로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가벼운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하며, 지혜로워져서 십일조와 헌물이 복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켜 행하는 것이 복되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참으로 유익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맹세할 필요도 없습니다. 억지로 맹세하게 하는 것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를 붙잡아 누르는 것과 같아서, 속으로는 ‘당신이 강요하지 않았다면 내가 왜 이런 맹세를 하겠는가? 칼을 목에 들이대고 있으니 안 베이려고 억지로 맹세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명백히 알아야 유익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면,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맹세만 거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힘써 지켜 행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남긴 깊은 탄식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보옵소서, 내가 내 동족 백성과 원수가 되었으며, 내 안에 있는 것이 이 백성들 안에 있는 것과 정면으로 대치되나이다. 나는 그들을 이끌어 축복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려 하나, 그들은 기어코 저주의 길로 가려 하나이다. 그들로 힘써 지켜 행하게 하려고 맹세도 시키고, 경고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차고 밀고 당기며 온갖 수고를 다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부디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형제자매 여러분, 깊이 돌이켜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여러분 또한 저와 동일한 뜻과 비전, 동일한 사명(命定)을 품고 있다면, 우리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합시다. “하나님, 우리를 기억하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번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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