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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디모데후서 1장 - 너는 다시 불일듯 일어나게 하라

2025-11-26 16,860 提摩太后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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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摩太后书01章-问候
  • 1 奉 神旨意,照着在基督耶稣里生命的应许,作基督耶稣使徒的保罗
  • 2 写信给我亲爱的儿子提摩太。愿恩惠、怜悯、平安从父 神和我们主基督耶稣归与你!
  • 3 我感谢 神,就是我接续祖先用清洁的良心所侍奉的 神。祈祷的时候,不住的想念你,
  • 4 记念你的眼泪,昼夜切切地想要见你,好叫我满心快乐。
  • 5 想到你心里无伪之信,这信是先在你外祖母罗以和你母亲友尼基心里的,我深信也在你的心里。
  • 6 为此我提醒你,使你将 神藉我按手所给你的恩赐再如火挑旺起来。
  • 7 因为 神赐给我们,不是胆怯的心,乃是刚强、仁爱、谨守的心。
  • 8 你不要以给我们的主作见证为耻,也不要以我这为主被囚的为耻;总要按 神的能力,与我为福音同受苦难。
  • 9  神救了我们,以圣召召我们,不是按我们的行为,乃是按他的旨意和恩典;这恩典是万古之先,在基督耶稣里赐给我们的,
  • 10 但如今藉着我们救主基督耶稣的显现才表明出来了。他已经把死废去,藉着福音,将不能坏的生命彰显出来。
  • 11 我为这福音奉派作传道的,作使徒,作师傅。
  • 12 为这缘故,我也受这些苦难。然而我不以为耻;因为知道我所信的是谁,也深信他能保全我所交付他的(或译:他所交托我的),直到那日。
  • 13 你从我听的那纯正话语的规模,要用在基督耶稣里的信心和爱心,常常守着。
  • 14 从前所交托你的善道,你要靠着那住在我们里面的圣灵牢牢地守着。
  • 15 凡在亚细亚的人都离弃我,这是你知道的,其中有腓吉路和黑摩其尼。
  • 16 愿主怜悯阿尼色弗一家的人;因他屡次使我畅快,不以我的锁链为耻,
  • 17 反倒在罗马的时候,殷勤地找我,并且找着了。
  • 18 愿主使他在那日得主的怜悯。他在以弗所怎样多多地服侍我,是你明明知道的。

《答疑解惑》

우리는 이제 《디모데후서》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제는 ‘네가 다시 불일듯 일어나게 하라’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목사님,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열정이 다 식어버린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목사님, 열정이 생기지 않아요.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 디모데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 형제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디모데는 나중에 변화되었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디모데후서》가 기록되지 않았겠죠.” 나중에 제가 《디모데후서》를 읽어보니 그가 바뀌었습니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냉랭해졌습니다. 아,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기에 바울은 간곡한 마음으로 《디모데전서》를 썼는데, 《디모데후서》를 쓸 때가 되자 이 디모데가 이미 식어버린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요? 참, 우리는 추측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쓴 후, 디모데는 어떻게 되었는가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쓴 후, 실제로 에베소로 갔습니다. 그때 바울과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디모데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버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 곁에 있으니 일단 그런 척, 흉내를 낸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흉내를 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디모데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고, 소망을 잃어버렸으며, 소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지각(깨달음)이 완전히 막혀버렸습니다. 장폐색으로 장이 막히는 것은 그나마 낫습니다. 변을 보지 못할 뿐이니까요. 하지만 뇌가 막혀버리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장이 막히기 전에 먼저 뇌의 막힘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냉랭해졌습니다.

디모데는 왜 냉랭해졌을까요? 바울이 체포되자 그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왜 우리 사도 바울을 지켜주지 못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바울은 다시 체포되었고, 《디모데후서》를 쓸 때는 기본적으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지나친 슬픔으로 인해 냉랭해졌거나, 아니면 어떤 여인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 또한 디모데에게 수없이 바람을 넣었을 것입니다. “디모데, 그만둬! (동북 방언으로 ‘라다오바’, 상하이 방언으로 ‘바울도 안 되는데 네가 여기서 뭘 설쳐?’, 허난 방언으로 ‘그만 까불어!’)”

이 일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부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는지는 우리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때 디모데는 대략 30대 후반에서 40세 정도였습니다. 서른 몇 살, 마흔 살이면 꽤 성숙한 나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미성숙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울이 체포되어 충격을 받았거나… 사실 사람이 머릿속에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 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모릅니다. 사실 바울이 주를 위해 순교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주를 위해 죽는 복된 죽음이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저는 언제쯤 사람들이 이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지 한탄스럽습니다. 사람은 언제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다시금 불일듯 일으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저에게 “목사님은 식어지거나 냉랭해질 때가 없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없습니다. 저는 냉랭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게는 냉랭해지는 것도 없고, 광신적인 흥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저는 순전히 지각으로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느낌을 믿지 않습니다. 느낌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저는 지각(悟性)의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언제 느낌을 의지했습니까? 부부가 결혼하면 처음에는 열렬히 사랑해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 책임을 짊어졌기에 제 안에서는 느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따라 행합니다. 좋든 싫든 이 책임이 내게 맡겨졌으니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머리가 아주 맑고 또렷하며, 하나님 앞에서 헛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사실 별로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옛말에 “자식을 낳으려면 손중모(손권) 같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손권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왕의 역할을 참으로 잘 해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을 때 절대로 디모데 같은 자식을 낳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로이스(외할머니)이든 유니게(어머니)이든 간에 디모데 같은 자식은 낳지 마십시오. 디모데는 너무나 연약했습니다. 마치 담장의 풀처럼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흔들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흔들렸습니다. 중심이 없어서 느낌이 오면 뜨거워지고 느낌이 없으면 냉랭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간절히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다

디모데 같은 자식을 키운다면 가슴이 타들어 갈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심하게 말할 수도 없고, 가볍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아들아, 내가 감사하노니, 내가 조상 적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이 아이의 표정을 볼 수도 없고 반응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표정을 봐야 보디랭귀지라도 알 텐데 말입니다. 바울은 이 아이가 넘어질지, 연약해질지, 뒤로 물러설지 알지 못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아들아, 네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선한 싸움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지금은 식어버렸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디모데는 완전히 소진된, 영어로 ‘번아웃(burnout)’ 상태였습니다.

성경에는 실로 많은 사람이 넘어졌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실제로 “아, 나 좀 쉬었다가 갈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달리는 이 길은 믿다가 연약해져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어제 제가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어떤 자매가 냉랭해졌다고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뜨거웠던 적도 없었습니다. 냉랭해진 후 하루하루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다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음부에 물집이 생기고 종기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구나.”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바울은 이 아이 디모데를 마음에 품고 간절히 그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바울이 그토록 디모데를 보기를 원했지만, 디모데가 그를 만나러 올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야, 내 겉옷을 가져오너라” 하고 부탁합니다. 아, 이 대목을 말할 때 제 마음에서도 눈물이 나고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형제자매가 연약해진 것을 보는 것은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며,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이 네 안에도 있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후서》 1:5)

디모데가 이미 식어버렸는데, 만약 그 믿음이 정말 그 안에 있었다면 그가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를 격려하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네 안에도 그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이런 말을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양의 언어입니다.

디모데가 알아들었을 수도 있고,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원래 디모데는 매우 뜨거웠고, 눈물로 기도하며 열정적으로 섬겼고, 찬양을 부를 때마다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곤 했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당신 안에 있던 그 거짓 없는 믿음은 과거형입니까, 현재형입니까? 현재형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문제에 대해 말해보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이 네 안에도 있기를 바라며, 네 안에도 있는 줄 확신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게 변해버렸습니까? 그런 거짓 없는 믿음에는 가식이 없습니다.

이제 한 차례 시험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체포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문제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 영적 전쟁을 보십시오. 마귀가 어찌 그들을 가만두겠습니까? 사실 제 마음도 늘 아픕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 안에 그 거짓 없는 믿음이 간직되기를 바라며, 여러분 안의 그 열정이 간직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라오마를 이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라오마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지각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 없다면 라오마를 이기기 어렵습니다. 라오마가 거짓말 하나만 던져도 여러분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놈은 너무나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 도(진리)를 굳게 지키고, 진리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며,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고, 인간이 살아가는 일의 본질을 명확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장이 막히고 나서야 깨닫지 말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고 나서야 라오마가 무섭다는 것을 알지 마십시오.

마음속에 깊은 탄식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진실로 형제자매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결과는 바로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해 우리 내면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삶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국 살아내는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착하고 얽매여 있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부분이 그저 육신으로 먹고사는 시시한 일들에 불과합니다. 너무나 저급합니다! 여러분 저급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완전히 바닥 웅덩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사람의 영적 높이가 저 바닥 웅덩이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치명적입니다.

네가 다시 불일듯 일어나기를 바라노라

최근에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저는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장폐색과 난소암을 앓는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아, 그 통증이 밀려올 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암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화면 너머로도 그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우리 소그룹 목자가 조원들과 함께 하루에 10시간, 12시간, 14시간씩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들의 힘이 다 빠지기도 전에 암 환자가 “통증이 가라앉았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처참한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기서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기 전에 우리는 다시금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대가를 치르며 섬길지언정, 모든 것이 한계에 부딪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열정을 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열정을 낼 힘도 없습니다. 만약 그때 열이 난다면 그것은 체온이 너무 올라 고열이 나는 것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열과 이 영적인 열정은 다른 것입니다. 수많은 형제자매가 이를 보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큰 충격을 받은 후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 다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디모데후서》 1:6)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냉랭해진 사람들을 대할 때는 때로 ‘은사’라는 두 글자가 정말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역할 때 어떤 형제자매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는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역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은사입니다. 이때 환상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왜일까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며 그 환상으로 그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환상을 보는 것은 장난이 아니라 사역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할 일 없이 환상을 보는데, 사역을 위한 것도 아니고 덕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점치는 것처럼 그저 재미로 봅니다. 그런 짓을 왜 합니까? 때로 형제자매들이 마귀의 거짓말에 빠져 믿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저런 환상과 은사를 자주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다!’라며 깊이 감격합니다.

제가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기도할 때 마음속으로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북돋워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환상이 열려 들판 가득 무르익은 곡식과 이삭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밀밭을 보며 제가 “이제 풍성한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선포하자 사람들의 믿음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사역할 때는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때 바울은 무엇을 기억해 냈습니까? ‘나의 안수로 네게 임한 은사로 인해 너의 믿음이 다시 하나님을 향해 불일듯 일어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후 디모데가 실제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디모데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이 길을 가다가 도중에 냉랭해지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안에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배가 고파 앙앙 울어대면 아이에게 젖 주는 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잊지 못합니다. 그것은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느낌을 따라가지 말고 책임을 따라가십시오. 아이를 기르는 것은 내 아이이고 내 살붙이이기 때문에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목양의 책임은 잊어버립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식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섬긴다면 쉽게 식어지지 않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처럼 결코 냉랭해질 수 없습니다.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먹이지 않으면 아이가 울어댑니다. 우리는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평생 뒤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제 평생 다시는 냉랭해지지 않겠습니다. 제 평생은 주께서 내게 맡기신 책임을 따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사명(命定)’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바를 따라, 우리가 받은 은사를 따라 다시 불일듯 일어나 결코 물러서지 말고 결코 식어지지 맙시다. 사역하다가 “아, 나 너무 지쳤어. 당분간 내려놓고 쉬어야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러서면 곧 침륜(멸망)이며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물러서는 순간 끝장입니다! 그 불을 다시 지피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지니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7)

이제 감이 좀 잡히십니까? 디모데가 왜 연약해졌습니까? 왜 냉랭해졌습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엄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유황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여러분은 “저는 태어날 때부터 겁이 많아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겁이 많은 것입니까?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두려움은 참으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어떻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왜 디모데는 이 대가를 치르지 못했을까요? 아직 마음에 미련과 염려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가 결혼을 했는지 처가살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음에 얽매인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내 아내는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의 가장 큰 원수는 바로 자신의 집안 식구입니다. 아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다면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높은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기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라오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면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디모데를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대단히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두려움, 연약함, 냉랭함이 있었고 지각(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디모데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바울이 굳이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디모데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아, 저 사람 또 디모데처럼 되었네, 이 사람도 디모데, 저 사람도 디모데가 되었네”라고 말하는 일이 절대로 없게 하십시오. 절대로 디모데처럼 되지 말고, 본받으려면 바울을 본받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참하게 죽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 늘 숨을 거두고 싶어도 숨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에 이런 사람들을 염려하느냐고 묻는다면? 염려됩니다. 정말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어찌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연약해지고 싶은 사람은 연약해지고, 디모데가 되고 싶은 사람은 디모데가 되고, 바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刚强)과 사랑(仁爱)과 절제(谨守)하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들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건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강하게 하실 것이고, 사랑을 품고 섬기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랑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시작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오지만,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거기에 배나 진노를 더하게 만드는 것은 귀신입니다. 처음에 여러분 안에 강인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배나 더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처음에 약간의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은 배나 더 사랑을 더하실 것입니다. 처음에 절제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배나 더 절제하는 마음을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귀신을 불러들이는지,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까, 아니면 귀신이 함께합니까? 사람이 연약해지고 넘어지는 데는 늘 핑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핑계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은 강건함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강해질 것입니다.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절제를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절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하여 증언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8)

이 말씀이 얼마나 엄중합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디모데가 어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를 증언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니, 주를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단 말입니까! 세상에, 디모데가 도대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것입니까? 우리 주를 증언함과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는 그런 심지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9-12)

그리고 바울은 한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여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은 섬김을 베풀었는지는 네가 잘 아느니라 (《디모데후서》 1:16-18)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말씀이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대단히 무겁습니다. 주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내가 체포되고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내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에 있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그 후 에베소에서 그가 어떻게 함께 섬겼는지는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바로 디모데를 격려하여,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운 일로 여길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언젠가 하나님께서 저더러 주를 위해 죽으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저의 복입니다. 마침내 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많은 단점이 있을지라도 주를 위해 죽기를 원한다면 단번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너 나를 위해 죽을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지체 없이 대답하십시오! “집에 가서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집에 가서 다 생각하고 나면 하나님은 이미 받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셨으며, 이 복음은 능력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 내 위에 임하셨는데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는데 모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역사와 간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빚을 졌고, 동시에 저에게도 빚을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무리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모택동 주석이 말했듯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겠습니까? 그깟 남녀 간의 정과 사사로운 감정을 좇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저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에 더 마음을 두십시오! 오네시보로가 어떻게 행했는지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연약해지고 식어졌습니까? 누가 당신을 식어지게 만들었습니까? 그 여인 때문입니까? 끝장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독신이 가장 좋다고 말씀드립니다. 얽매인 것이 있으면 강건하기 어렵습니다. 제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대목을 말할 때면 제 마음은 깊은 감동으로 벅차오릅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평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섬기게 되었으며, 이런 은혜를 입어 주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주를 위해 살 수도 있는 기회를 얻었단 말입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대가 지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세상을 위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십시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을 위하며 선악을 분별하느라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무런 영광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마귀의 손에 넘겨주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분이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합니다. 내 생명을 그분께 맡기면 그분께서 내 생명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생이 아니라 영생이며, 아무런 영광도 없이 완전히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맡긴 것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나는 온 힘을 다해 완벽하게 이루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러한 결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할 때마다 암 환자들에게 간곡히 권면하고, 육신을 따르고 세상을 사랑하며 선악을 분별하느라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형제자매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가장 먼저 전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삶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삶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의 결말은 반드시 비극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처럼 반드시 연약해지고 반드시 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것이 당신의 핵심 이익과 충돌하기 때문이며, 당신이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을 추구한다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고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데 어찌 수치스러워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고역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말씀드리건대, 목회자라는 직분 가운데 저처럼 기쁘게 사역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는 저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인생을 어찌 살겠습니까? 온통 헛된 것뿐인데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굳게 지키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1:13-15)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은 두 나라, 두 가지 세계관, 두 가지 가치관의 싸움이며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자신의 핵심 이익으로 삼는다면 이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극소수일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도를 굳게 지키라, 굳게 지키라.” 어떤 이들은 3분의 1은 간다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쉬운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세상적인 가치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마의 가치관은 받아들이기 아주 쉽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먹고사는 일이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가슴을 쥐어짜며 호소합니다. “너는 지켜야 한다! 네가 내게 들은 바른 말의 본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도를 지키라.” 이제 거의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했는데, 당신의 선한 싸움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한바탕 싸움을 치르게 됩니다. 이것은 두 나라의 영적 전쟁입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히든지, 아니면 기를 쓰고 하나님의 나라로 뚫고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아들인 세상적 논리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만약 산다는 것 그 자체에만 소망을 둔다면 그만두십시오. 소망이 없습니다. 스무 살이어도 소망이 없고, 쉰 살이면 더더욱 없으며, 일흔 살이 되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깟 일에 집착한다면 끝장난 것이며 라오마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고 하셨으면 정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다고 하셨으면 정말 그런 것입니다! 매일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육은 무익하며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은 전쟁입니다! 가치관의 전쟁이며, 영적 전쟁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귀신과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귀신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결코 귀신에게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에 가르침 받은 아름다운 도를 굳게 지키십시오. 제 안에는 감사가 넘쳐납니다. 영적 세계에서 수많은 선한 싸움을 싸워 이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제 어머니가 저와 함께 사실 때였습니다. 제가 “어머니, 준비하세요. 같이 식사하러 가요” 하고 어머니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소리가 이상해서 돌아보니 어머니의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고, 양손과 양발이 굳어 비틀린 채 입이 돌아가고 침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뇌경색입니까, 심근경색입니까? 저도 무슨 경색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막힌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런 일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일을 만났을 때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저는 어머니의 몸에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라오마가 쫓겨나갔습니다! 몇 분 뒤에 귀신이 다시 찾아왔고, 저는 또다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동역자들이 “목사님, 어떡하죠?”라고 묻길래 제가 “무슨 뜻입니까? 병원에 보내자는 겁니까?”라고 했습니다. 한 시간 뒤,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하러 갔고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다 비우셨으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는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으셨고, 이를 직접 목격한 수많은 사람이 “와, 목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제가 믿는 것은 참된 진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질병은 귀신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귀신이 왔는데 병원에 보냅니까? 병원이 귀신을 쫓아냅니까? 솔직히 제가 정말 병원에 보냈다면, 병원은 제게 중풍 걸린 노모를 돌려주었을 텐데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종일 끙끙 앓으며 재활치료나 받고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당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당신이 믿는 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까? 오늘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하나님이 맞습니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저 목회자의 하나님이 맞습니까? 제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연약합니다! 강건하게 일어나십시오! 마음을 가다듬으십시오!

한편으로는 강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가족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섬겨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분이 저와 같은 선천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울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훗날 당신의 어머니가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이 돌아가고 침을 흘리며 손발이 굳어 있는데 재활치료 받으러 모시고 다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저만의 논리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영적 세계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복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제 어머니는 진작에 전신마비가 되셨을 것이고, 저는 몇 년 동안이나 마비된 노모를 병수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 어머니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이 능력 있는 복음을 이 세대에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저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신학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존의 전통 신학의 수많은 것들을 철저히 부정했기에 거의 모든 기독교인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수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고 복음의 유익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디모데는 많으나 바울은 참으로 적습니다. 이제 지금부터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과 나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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