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베드로전서 3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베드로에게 프레임을 하나 씌우자면, 그는 ‘기독교의 불교화’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불교화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바로 베드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신기한 일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나면 바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주님을 믿고 나서 다행히 바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서 왜 바보가 되는 걸까요? 우리 중 많은 형제자매들이 믿다 보면 기독교가 불교화되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여기며 멍청해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감히 이런 제목을 썼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겠습니까. 어쨌든 저에게 베드로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그가 제대로 이해되게 말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바글바글하게 잔뜩 써놓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불교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배울 때 잘못 배울 바에는 차라리 안 배우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 화인 사명 신학에는 한 가지 논리가 있는데, 바로 형제자매들이 똑똑해지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잠언을 읽어보면 지혜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아무도 못 알아듣게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와, 이거 정말 잘 썼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디가 좋은데요?”라고 물으면, “이해를 못 하겠어서요”라고 답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남이 잘 말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보가 된 것이 이 베드로전서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건 구원을 받느니 못 받느니, 순교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으시니 우리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강도처럼, 결국에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 죽었습니다.
순종이 곧 복을 받는 것이다
만약 멍청하게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년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사실 그 자매 본인도 그리 똑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주식을 하다가 완전히 쫄딱 망했습니다. 자,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순종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남편과 빚을 나누어 져야 할까요? 그런데 이 자매는 돈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다행히도 돈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고, 내가 저 사람과 평생 빚을 짊어지면 이번 생에는 다 갚지도 못할 텐데 내가 어쩌겠어? 그건 당신이 날린 거지 나와는 상관없어. 내가 왜 그런 것에 순종해?”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내라면, 남편의 빚에 순종하시겠습니까? 남편의 빚에 순종하겠다면 저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감화되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베드로전서》3:1-2)
저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감화된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감화시키려다가 사기당한 아내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자매가 있었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제가 직접 본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론들은 실천할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현실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전하는 것은 최대한 현실에 적용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불교화란 무엇일까요? 바로 공중에 붕 떠서 현실에 착륙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 이 자매의 경우, 남편이 “당신 명의로 대출을 받아주면 내가 당신 따라 주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매는 대출을 받았는데, 그 액수가 수십만 위안이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그 수십만을 어떻게 갚습니까? 그 자매가 능력이 뛰어나서 연봉이 수십만씩 되는 사람도 아닌데, 진짜 수십만이 있다면 남편에게 줄 수도 있겠지요. 결국 이 자매는 멍청하게 자기 명의로 남편을 위해 수십만을 빌려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중 한 자매는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를 감화시키려 했으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주님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복을 받는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감화되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3:1)
저는 정말로 감화되어 돌아온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교화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른바 훌륭한 품행, 훌륭한 순종이라는 것을 들이대면 개 한 마리도 감화시키지 못할 텐데, 사람을 감화시킨다고요? 알아들으셨습니까? 헛소리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 남편을 감화시켜 주님을 믿게 하겠다고 기를 쓰며, 남편이 자신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제가 오늘 찬물을 끼얹어 드리겠습니다. 집어치우십시오, 바보같이 굴지 마십시오.
며칠 전 설 연휴에 우리 중 한 자매가 집에 가보니, 남편이 불량한 친구 몇 놈을 불러다 마작을 치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서 집안이 매캐하니 난장판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그런 화는 낼 만하다고 봅니다. 이 집은 당신 지분도 절반이고 내 지분도 절반인데 뭐 하는 짓입니까? 하지만 저는 화를 내더라도 지혜롭게 내야지, 분통이 터져 몸을 망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중국 고대인들의 이런 논리를 따르지 마십시오.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르고, 멜대에게 시집가면 멜대를 메고 간다”는 식의 고대 삼종사덕 논리 말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베드로전서》3:2)
저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걸까요?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3:3-4)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이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저는 목양을 하면서 전통적인 훈계 방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에 대해 여러분이 듣고 실족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단지 제 경험을 나누는 것일 뿐이며, 여러분에게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목양의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중요한 것은 사람의 육에 속한 짐승 같은 성품(수성)을 죽이는 일인데, 이것은 정말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 육에 속한 수성을 죽여야 한다고 말할까요? 사람의 육신 안에는 실제로 일종의 짐승 같은 본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들개나 사자를 여러분이 감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중동 부호들이 어릴 때부터 사자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들개는 고사하고 집에서 기르는 개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사람을 공격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한 자매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자매는 두 아이에게 꽉 쥐여 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자매가 아이에게 “세숫대야를 이렇게 더럽혀 놓으면 어떡하니”라고 하자, 아이는 도리어 당당하게 “이깟 사소한 일로 그렇게 유난을 떨어야 해요?”라고 대들었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자 엄마는 멍해져서 저를 찾아와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요 녀석 봐라, 이렇게 사소한 일도 못 하면서 네가 사람이냐?” 저는 현장에서 그런 말투를 시범 보이며 자매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오만한 기세를 꺾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다소 독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육신을 다룰 때는 이런 방식이 확실히 효과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인용하며 정결한 행실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아야 하고,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무작정 그렇게만 행동하면 상대방은 여러분의 목덜미 위에 올라타 똥을 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제 목에 올라타 똥을 싸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우리는 ‘순종이 곧 복’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분별없는 들짐승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특정한 상태에 놓이면 짐승과 같아집니다.
저는 목사직을 아주 즐기며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들과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제 입이 험하다고 하지만, 독하게 하지 않고서야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주 통쾌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목에 올라타 똥을 싸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할 것임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비록 이런 말들이 듣기에 거북하고 독해서 보통의 목회자들은 입에 담지 못하겠지만, 저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온전히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저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그 아이를 토닥이며 말했습니다. “얘야, 앞으로 관리자가 되려면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한단다.”
여러분이 최고위 관리자든, 중간 관리자든, 하위 관리자든, 어느 단계의 관리자이든 간에 제가 어떻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왜 이렇게 할까요? 저는 실천하는 사람인데, 사역할 때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온유함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자매님들 한번 해보십시오. 주님을 믿더니 멍청해져서, 예전에는 집에서 사납고 기가 센 여자여서 남편도 무서워했는데, 주님을 믿고 나서는 양이 되어, 어린 양이 되어버려 결국 남편이 목덜미에 올라타 똥을 싸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믿음을 가져도 바보같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짓밟히고 억척스럽던 여자가 어린 양으로 변해버리면 그 세월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거 정말 기괴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믿는다면서 이런 짓을 누가 가르쳐 준 겁니까?” 베드로가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화인 사명 신학이 형제자매들을 똑똑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존귀함을 살아내며,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남에게 이런 식으로 짓밟히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디 그런 적이 있습니까? 순종은 사악하고 비뚤어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비뚤어진 아내에게 순종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결코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저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못 믿겠으면 직접 찾아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언제 우리더러 이따위로 멍청해지라고 가르치셨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이 베드로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여러 과목 점수를 다 합쳐야 100점 나오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엄마에게 “나 이번 시험 100점 맞을 수 있어”라고 하니, 엄마는 기뻐서 “아들아,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라고 했는데, 성적표가 나오고 보니 여러 과목을 다 합쳐서 겨우 100점이었던 격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런 인물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3:5-6)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여러분, 여러분 남편의 꼬락서니가 아브라함 같습니까? 그 사람에게 아브라함다운 모습이 있습니까?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만약 남편이 진짜 아브라함이라면 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사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주님을 믿지도 않는데 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까? 믿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말씀도 듣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쥐뿔도 모르고 돈만 목숨처럼 밝히는데, 집어치우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똑똑해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결혼한 남편이 비록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답게 산다면 괜찮습니다, 굳이 주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툭하면 거액을 날려먹습니다. 어떤 자매의 남편은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클릭하다가 60만 위안의 빚을 졌는데, 돈은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빚만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대가리냐?” 이런 남편에게 시집간 사람은 쪽박을 찬 것 아닙니까? 결코 기독교를 불교화하지 마십시오.
본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지혜롭고, 존귀하며, 능력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것이지, 온종일 남의 발밑에 깔려 목덜미에 똥이나 싸지르게 내버려 두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또 누가 여러분 목에 올라타 똥을 싸려거든, 내려올 때 똥구멍이 두 개가 되도록 혼쭐을 내주십시오. 어떤 이는 “목사님, 그런 상스러운 말씀은 정말 못 듣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이고 저는 그리 고결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형제자매들이 제발 똑똑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똑똑한 것이 도덕적으로 고결한 척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괴한 일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를 여러분 부부 사이에 갖다 붙여 비교하다니, 완전히 헛소리 아닙니까? 이 베드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이런 것을 명확하게 쓸 수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하면 억압당하지 않을지를 가르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자유를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을 억압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는데, 사양하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남을 억압하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 억압당하는 것은 더 나쁩니다. 권위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를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억압하지 않으면 됐지, 왜 억압당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뒤틀리고 억울하게 사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제가 하는 말이 전부 진리는 아닐지라도, 억압당하며 사는 것은 분명 비극입니다. 억압당할 바에는 차라리 남을 억압하는 게 낫습니다. 물론 남을 억압하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닙니다.
복을 이어받는 사람이 되라
이런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면, 그가 한 말 자체는 맞을지 모르나 그 말에 대한 해석과 설명, 이해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그는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여겨 결국 억압당하게 만드는데,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3:7)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무슨 가르침입니까? 제 기도가 왜 막힙니까? 제가 아내에게 꼭 억압을 당해야 기도가 안 막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저와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데, 저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저를 억압할 수 없고 저 또한 남을 억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일을 아주 잘한다는 것입니다. 집안일도 빠르고 깔끔하게 잘합니다. 그러나 만약 저더러 하나님을 내려놓고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이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지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의 이 헛소리를 믿겠습니까? 인류 최초의 결혼부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결혼은 ‘뼈 속의 가시요 살 속의 가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 부부의 금슬이 아담과 하와를 능가한다면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첫 번째 부부도 그 꼴이었으니 그 후손들도 다 그런 법입니다. 사실 바울이 말한 부부의 일은 여러분 부부의 그ꟷ 사소한 잡사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하는데, 마음을 같이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이 같아집니까? 한 가지 일에서만 마음을 같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신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을 같이하게 되는 것이며, 모두 진리의 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3:8-9)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들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여러분은 머지않아 불교 신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작은 일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니 삶이 뒤틀리고, 그렇게 비비 꼬여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지도 못하고, 생사도 초월하지 못하니 끙끙 앓다가 암에나 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이어받게 하신다는데, 어떻게 해야 복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께 말씀드리건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말한 이런 따위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명이 있으셨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길을 다 걸어가셨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을 억압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억압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단번에 쏘아붙이셨습니다. “동전 하나를 가져와서 보아라! 이것이 누구의 형상이냐?” 그들이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입니까?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는다’는 게 도대체 뭡니까? 상대가 타락하면 나도 같이 타락해야 합니까?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도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는 것입니까? 그래서 나중에 제가 부부 문제를 다룰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붙어 있기만 하면 싸우는데 어떻게 성장을 하겠습니까? 무슨 창조적인 열매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따로 떨어져서 각자 조금씩 성장하십시오. 성장이 다 끝난 다음에 다시 합치든가 하십시오.”
두 사람이 온종일 멱살잡이를 하며 네가 내 멱살 잡고 내가 네 멱살 잡는데 무슨 성장이 있겠습니까? 저는 “제대로 성장이나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 부부 사이의 지저분한 잡사 따위에는 신경도 안 씁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왜 신경을 안 쓰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한 가지만 다룰 수 있습니다. 인생을 꿰뚫어 보고, 세상의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두 사람이 만나면 당연히 좋아집니다. 만약 치고받고 싸우다가 이 세상에서 오순도순 잘 살아보겠다는 소시민적 헛된 소망이 산산조각 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드디어 그따위 얄팍한 안일에 빠져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베드로전서》3:10)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이 말은 사실 베드로가 바울을 겨냥해서 한 말입니다. 바울의 입담도 꽤나 매서웠고, 말을 아주 매섭게 했습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내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한번은 바울이 편지를 써서 베드로가 외식을 부렸다고 폭로하며 베드로를 사정없이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바울의 편지에는 알기 어려운 것들이 더러 있으니 억지로 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베드로가 여기저기 순회하며 다녔던 곳이 전부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베드로 사도님, 바울이 사도님이 가식을 떨었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얼버무리며 “그런 건 묻지 마시오, 잘 모르면 억지로 풀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악한 말이란, 온종일 이것저것 판단하는 것을 두고 ‘나는 대사도 베드로이고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사람인데, 바울 그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녀 보기나 했느냐’라는 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따랐으면서도 가식을 떨었구나”라고 하자, 베드로는 “억지로 풀지 마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 엉터리 소리를 늘어놓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체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체계 안에 있지 않으며, 베드로가 자기 생각들을 잔뜩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왜일까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아래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얼른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고 말을 바꾼 것입니다. 아내에게 꽉 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도 딱 사모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베드로전서》3:11-13)
제가 듣기에는 영 맞지 않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어디 한번 해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나니 남들에게 괴롭힘만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로지 선을 행하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는 말 자체가 매우 불교적인 언어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해석한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행과 근본적으로 같은 체계가 아닙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머니 손잡고 길을 건너주신 적이 있습니까? 채소 바구니를 들어 집까지 배달해 주신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말하는 그 선행이 도대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사람을 저주에서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이며, 사람의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 가장 큰 선이고, 사람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가장 큰 선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열심 있는 선행 따위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선행이란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자신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행 개념은 매우 골치 아프며 수많은 사람을 오도했습니다. 비록 사용하는 글자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을지 몰라도, 그 내면의 뜻은 이미 변질되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보살피시고 주의 귀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데,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화인 사명 신학 초기에 연구했던 과제 중 하나가 바로 많은 교회 안에 수많은 착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기도는 적나라하게 말해서 기차 몇 량 분량의 기도를 쏟아부어도 응답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불교 쪽으로 빠져서 불교 방식을 따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를 들으시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그리 많이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온통 불교화되어 불교와 매우 흡사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3:17-18)
듣고 나면 얼핏 흠잡을 데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우리더러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까? 그런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귀함과 영광과 능력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는다니, 예컨대 길 건너는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더니 뺑소니 누명을 씌워 물고 늘어져 수십만 위안을 물어주게 된 꼴입니다. 이게 멍청해진 게 아니고 뭡니까? 그것을 선을 행하다 고난받는다고 부릅니까? 그건 그냥 사기당해 뜯긴 것입니다. 왜 뜯겼을까요? 바보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3:16)
상대방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할 게 뭐 있습니까?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사람을 오도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도된 여러분은 속히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서 빠져나오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이것은 완전히 불교적인 언어요 고행승의 논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선은 그들이 말하는 그런 시시한 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루셨습니까, 안 이루셨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지, 멍청한 꼴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보 같은 꼴로 살아가게 된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서 저를 보고 있다면—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그는 영계에서 우리를 보고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다 듣고 있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목사님, 당신 가르침이 정말 옳습니다! 당시에 내가 했던 말들이 많은 사람을 오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성경에 수록되었을까요?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시고자 하나님께서 파놓으신 함정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깨달으려 하지 않고 그저 읽고 맹신해 버리면 망하게 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다는 이따위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왜 고난을 겪게 될까요?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과정이 대단히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싶다면 육신을 위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육신을 죽이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가 있어야 하고 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고행승의 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육체와 영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3:18)
여러분, 이 구절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베드로의 가르침은 매우 악합니다. 육체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부활하신 것이지,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부활하셔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위해 영광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은 극도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참 대단하십니다.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육신이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라는 사람은 자기가 횡설수설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분의 무덤이 빈 무덤이라는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의 육신 또한 구속을 받을 것입니다. 이 논리가 훨씬 명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베드로가 쓴 극도로 혼란스러운 베드로전서입니다. 아이고, 실라만 고생했습니다. 실라가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할 지경이었을 겁니다. 이런 헛소리를 받아 적으면서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썼겠습니까? 실라가 속이 뒤집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실라였다면 베드로 대신 이런 걸 대필해주다가 다음 날로 배탈이 났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부활만을 믿는다면 그게 불교와 다를 게 뭡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다 읽고 나서 “와, 베드로가 정말 잘 썼네”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 베드로가 잘 썼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이해를 못 하니까요.” 이해도 못 하면서 ‘좋아요’를 누릅니까? 삐딱하게 믿지 말고, 믿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체계 안에 있는 것들을 믿으십시오.
주께서 노아 시대에 멸망당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심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저 지옥에 가셔서, 노아 방주 시대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3:19-20)
하나님께서 신경이나 쓰시겠습니까? 당시에 방주에 들어가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몇 명 안 되어 겨우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는 엉터리로 지어내고 제멋대로 연출하는 편집장이라도 된 듯 거짓말을 꾸며냈습니다. 저는 ‘그가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4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기록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저는 ‘이게 죽은 자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십니까? 이런 것을 바로 불교의 영혼 천도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자대비하신 부처 같은 예수 그리스도로 여겼습니다. 그게 기독교입니까? 그게 도대체 뭡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일을 잘못 처리하셔서 그 사람들이 죽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왜 죽지 말았어야 합니까?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날마다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평안했습니까? 다들 평안하다고 여겼지만 결국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영혼 천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떤 형제가 제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빨리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으니, “빨리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곧 죽어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나더러 그 사람 영혼 천도라도 해주라는 말입니까?”라고 하니, 그는 “목사님, 빨리 그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준다면, 저는 누가 천국으로 보내줍니까? 저도 아직 모르겠는데요. 그럼 그 사람은 저한테 표를 사야 합니다. 한 장에 10만 위안짜리 표 말입니다. 그런데 표도 안 사고 이제 죽어가면서, 돈은 의사한테 다 갖다 바치고 저한테 와서 천도재나 지내달라는 격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형제님, 저는 정말 그런 일 못 합니다. 우리는 천도재를 지내주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 곧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제가 어떻게 기도를 인도합니까? ‘주 예수님, 주 예수님, 주님을 저의 주와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따라 하게 해야 합니까?” 아이고 맙소사,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불교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말씀드리건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복을 받고 싶으십니까? 복을 받고 싶다면 어떻게 복을 받아야 할까요? 바로 승리해야 합니다. 저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번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아주 명명백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그것은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세기》22:17)
네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훗날 리브가는 멀리서 이삭과 이삭의 후손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복을 주셔서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하리라’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은 바로 승리의 신학입니다! 살아있는 자의 신학이며, 살아있는 동안 승리하는 신학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승리하지 못하고 매캐한 연기처럼 엉터리 같은 것들만 잔뜩 늘어놓으며, 그럴싸하지만 틀린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치명적인 일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베드로가 왜 이 많은 것들을 발명해 냈을까요? 다른 것을 말하려니 딱히 새로운 것도 없고, 그에게는 승리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다 보면 맨날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너무 지루하니 새로운 것들을 지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은사주의 교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은사주의 교회는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털이 곤두섰다, 온몸이 떨렸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식의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그런 이야기만 하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면 베드로처럼 새로운 것들을 지어내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진짜 승리여야 하며, 승리의 도를 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왜 끊임없이 샘솟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승리는 그저 허튼소리나 지껄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지어내어 ‘주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사람들이 주님을 믿어 그 영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떠벌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이런 헛소리를 지껄여야 합니까? 저도 모릅니다. 그런 소리를 하고 나면 자기가 대단히 고상하고 거룩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그날 기도하는데 주 예수님이 내 앞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와, 사람들이 다 박수를 치며 “베드로 대단하다, 또 주 예수님을 뵈었네”라고 환호합니다. 완전히 지어낸 헛소리일 뿐이며, 바울의 깊은 진리는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더러 똑똑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고, 열심히 일하며 정당한 일을 제대로 하라고 가르치면, 마치 제가 세상을 몹시 사랑하는 것처럼 느끼실 겁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불교화를 창시한 사람은 지식이 없고 지식이 부족했던 위대한 사도 베드로입니다. 아이고, 베드로도 저에게 ‘좋아요’를 눌러주었으니 여러분은 저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전하는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할 때,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똑바로 못 박힐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며 평생토록 엉망진창인 짓만 저질렀음을 알았습니다. 본인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아 못 박아다오, 그래야 영생을 얻겠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은 살아있는 자의 신학이며,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솔직히 한 사람 더 죽고 덜 죽는 것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쓸어버리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든 다 마찬가지이며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우리와 다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수제자가 되었고 가장 큰 제자가 되었지만,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떤 이는 “베드로의 순교는 매우 겸손했다”고 말합니다. 겸손이 아니라 회한이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더 이상 이런 헛소리를 믿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살아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반면교사로 삼아 배우시면 됩니다. 저도 배짱이 꽤나 두둑한 편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참으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 해 전, 제가 《야고보서》를 길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서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을까 두려워 그 글에 암호를 걸어두어 일반인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암호를 풀고 그냥 공개해 두었습니다. 볼 사람은 보고 말 사람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비난할 테면 비난하라지요. 이번 《베드로전서》도 앞의 두 장은 그래도 봐줄 만했는데, 3장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똑똑히 보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그럴싸하지만 거짓된 가르침에 더 이상 미혹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이 “노아의 방주가 물과 물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은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그런 것을 가르치셨습니까?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일종의 세례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런 것들을 한데 뒤섞지 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