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1. 서론
- 행위에 근거하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종의 멍에가 메여 있으면 행위에 근거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이 주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완고함, 어리석음, 무지함, 피해망상에 종의 마음까지 더해지면 그것이 바로 암을 유발하는 성격입니다.
-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믿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2. 본문 말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3. 기도
4. 본문 배경
- 사람은 할례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증명하려 드는 순간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 할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 작은 행위 하나를 행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으로 삼가 지켜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 축복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이며, 저주 안에서도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은 곧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으니, 예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신 문제는 없습니다.
6.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처럼 되지 마십시오. 이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종의 심보이며, 사실 자신의 주인은 그 한 달란트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7.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 마귀가 사람을 속이는 수법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단맛을 보게 한 뒤, 곧바로 사다리를 치워버려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지 마시고,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성령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8.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
-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한 걸음씩 하나님을 알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일하며, 성령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마음이 가진 근본적인 논리입니다.
9. 더 이상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마십시오
- 사람은 왜 행위에 근거하려 할까요? 행위는 하기가 쉽고, 행위를 의지하면 헛된 영광을 얻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 얽매이기 쉬운 모든 짐을 벗어버리십시오. 일을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고, 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더 이상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도리어 힘을 북돋아 주는 도움으로 삼으십시오.
핵심 단어
- 종의 멍에
- 헛된 영광을 구함
- 하나님과의 거래
- 성령을 힘입음
- 믿음으로
- 자유를 얻음
- 행위에 근거함
- 축복과 저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심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말라!'입니다. '다시는'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또다시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제목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을 해방하여 자유를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의 멍에라는 것이 너무나도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종의 멍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여 드리는 것 같고 겉보기에는 아무런 흠도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종의 멍에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훗날 이런저런 교파로 갈라져 수많은 교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모두 종의 멍에를 메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한번 보십시오.
제가 이런 제목으로 설교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저의 화법에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제 화법이 어떤지 아십니까? "목사님, 또 본인 이야기하시려는 거죠?"라고 하실 것입니다. 다들 익숙해지셨습니까? 아직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저는 정말로, 아주아주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대단히 자유롭다는 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들으면서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자유롭다지만 나는 아직 자유롭지 못한데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려는 것 아닙니까!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저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제가 살아가는 그 자유로움, 그 지극한 자유로움을 참으로 부러워합니다! 오늘 이 설교는 제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종의 멍에를 함께 벗어던지자는 것입니다.
이 종의 멍에는 지극히 사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 것을 몹시 힘들어합니다. 왜 믿음 생활을 그토록 힘들어할까요? 여러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학생이 평소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데, 거기에 《성경》 한 권이 더 얹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고 맙소사! 학교 공부도 다 못 끝냈는데 이제 《성경》까지 한 권 더 늘어나서 골치가 아프네!" 듣기만 해도 골치가 아픕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서 "아이고, 나랑 같이 주님을 믿읍시다!"라고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주님을 믿으면 좋습니다." "어떻게 좋은데요?" "주님을 믿으면 십자가를 하나 더 질 수 있습니다." "아이쿠, 됐습니다, 됐어요. 지금도 집안에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느라 가정의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데, 십자가까지 또 지라고요? 그냥 당신이나 지십시오. 삶의 무게만으로도 짓눌려 죽겠는데, 거기에 십자가까지 더 얹어지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아십니까? 이것은 우리 화인 사명(华人命定) 사역이 전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사역이 전하는 복음은 평소에도 지쳐 힘들어 죽겠는데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화인 사명 신학에 오니 더 힘들어졌네. 예전에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는데, 지금은 과정 공부도 산더미네. 너무 힘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오늘 제가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해 드리고자 합니다. 왜 힘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행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근거하니 저주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참으로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덤으로 얹어지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넘치는 조력(助力)이 됩니다. 오늘 그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하나의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의 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혜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실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저주 가운데 살면서 바쁘고 분주하게 요란을 떨며 사는 삶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바쁘게 살아봤자 허무함만 남고, 바쁘게 맴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바쁠까? 왜 저렇게 정신없이 바쁠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쁜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셨습니까? 제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저는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전혀 바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일을 적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저는 한가하다 보니 일거리를 찾아서 맡아 하곤 했습니다. 일을 다 해주고도 상대방에게 돈 한 푼 받지 않았습니다. 정말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 한 명이 제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가공해 달라고 물건을 보냈는데, 맡길 때마다 꼬박꼬박 돈을 주었습니다. 그 친구의 사업이니까요. 저는 정당하게 돈을 주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다루는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며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회사에서 제대로 된 서비스도 제공해 주지 않아 그 부분에서 완전히 막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한번 보여줘 봐."라고 하고는, 음력 1월 5일에 시스템 코드를 짜기 시작해서 1월 10일부터 바로 사용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 벌써 한 달 가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작업하다가 조금 진전이 있을 때마다 단톡방에 "이제 커밋(제출)합니다" 하고 올리니, 사람들이 보면서 은근히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습니까? 사람이 바빠야만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지 않아야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기를 "저 사람은 참 못됐다"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는 말을 못 하더군요. 제가 그들에게 "일찍들 퇴근해서 집에 가세요. 집에 가서 푹 자고 푹 쉬세요."라고 해놓고, 그들이 자고 일어나 보면 제가 이미 시스템을 다 완성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와, 정말 지독하게 경쟁을 부추기네(卷)'라고 생각했겠지만, 남들과 경쟁하며 피 말리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행위에 근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는 것보다 결코 더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온종일 바쁘게 쫓기며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정신없이 살면 안 됩니다. 바쁨에 정신이 팔려 머리가 핑 돈 상태에서 팥죽 한 그릇을 들이켜고는 장자의 명분을 통째로 날려버린 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진정 귀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우리 사역자 중에 아주 재미있는 동역자가 한 명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에게 "목사님, 영으로 일하셔야 합니다. 영으로 공부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좋았습니다! 성령을 힘입어 공부하고, 성령을 힘입어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보면 제법 실력이 있고 일을 아주 잘해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 참 맞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한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저는 전혀 자유롭지 못합니까?"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할까요? 여러분 내면에 여전히 종의 마음, 즉 노예근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이 노예근성을 낱낱이 파헤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명쾌하게 설명해 드리는 만큼, 여러분도 온전히 깨달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종의 마음을 품고 살지 마십시오. 이 종의 마음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여전히 종의 멍에에 얽매여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내 안에 종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노예의 근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종은 말하는 것부터가 종 티가 납니다. 저 멀리서부터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와 한쪽 무릎을 털썩 꿇고 "예이!" 합니다. 청나라 사극을 보면 늘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종이니까요. 반면에 의자에 앉아 있는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그 대우를 받습니다. 주인이 직접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제 사역의 초점은 사람들을 종의 마음가짐에서 벗어나도록 풀어주는 데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저주를 받는 길임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저주를 받아서는 결코 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행위에 근거하게 될까요? 종의 멍에를 메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멍에를 메고 있으니, 하나님의 집에서 자기가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자식을 키워보신 분들 계십니까? 아이를 낳아 길러놨더니 어째 행동하는 게 꼭 가정부(식모) 같습니다.
예전에 저희 이웃집이 입주 가정부를 한 명 두고 세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그 세 아이가 가정부가 걷는 모양새 그대로 걷는 것이었습니다. 가정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 하니 꼭 세 명의 가정부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가정부에게 맡겨두었더니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싶어 몹시 기이했습니다. 죄다 가정부 꼴이 되어버렸으니, 가정부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다 종처럼 변해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주객이 전도되어 아이는 영락없는 상전 같은데, 미련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줄 몰라 모든 일을 가정부를 불러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별의별 일이 다 있습니다.
부모가 조금만 훈계하면 아이는 부모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친자식을 훈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친자식인데 어떻게 훈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훈계하면 원망을 품고 "내가 주워 온 자식이에요?"라고 따집니다. 우리 중에도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이 계시는데, 큰아이가 엄마가 남동생을 예뻐하는 것을 보고는 시험에 듭니다. 그러더니 경추와 요추가 옆으로 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더 휘어지면 마비가 올 지경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속으로 '나는 친자식이 아니고 동생만 친자식인가 봐'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과 표정마다 가시가 돋쳐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홧김에 심한 말을 쏟아붓습니다. "에라이,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남의 집 이야기이지 제가 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 널 그냥 확 안 치워버린 게 한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종의 마음이 더욱 굳어집니다. '거봐, 날 정말 죽여버리려 했잖아!' 홧김에 내뱉은 소리까지 다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본인이 그런 표정을 짓지 않고, 종 짓을 하지 않으며, 종의 태도를 갖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자녀의 마음을 품고 '나를 훈계하신다고? 당연하지. 아빠니까 날 훈계하시는 거지, 부모가 훈계 안 하면 어떡해?'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입니다. 이제는 부모를 끌고 가서 DNA 유전자 검사라도 할 기세입니다. '내가 친자식이 아니면 진짜 친부모를 찾을 테야.' 그러다 친부모를 찾고는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엔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이 저에게 찾아와 "목사님, 목사님은 모르십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내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라고 반문합니다. "당신이 아직 똥오줌도 못 가리고 혼자 화장실도 못 갈 때, 부모님이 똥오줌 다 받아내며 키워주셨고, 밥도 혼자 못 먹을 때 젖 한 모금 한 모금 먹여가며 키워주셨다는 사실 하나는 압니다. 도대체 뭘 모른다는 겁니까? 정작 모르는 사람은 당신인 것 같은데요." 그러면 그 사람은 "목사님, 목사님은 저희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셔서 그럽니다."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종이나 하는 소리를 해대지 않았습니까? 부모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그런 소리가 튀어나오게 한 것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사람들을 상담하고 섬기느라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아이고, 저 집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여권을 만들어 해외로 나갈 정도인데." 하며 속을 끓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는 나타(哪吒, 중국 신화의 신동) 같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도 조심해야겠구나. 나는 그들의 부모도 아니고 똥오줌을 갈아준 적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그 정도까지 뒷바라지해 준 것도 아닌데 나중에 나를 인간도 아니라고 욕하면 큰일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역할 때 지난 수년간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키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말 머리 아픈 일입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몇 사람을 건져냈습니다. 속으로 '아, 이제야 겨우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 사역 방식이 조금 특이하지 않습니까? 제 사역의 특징을 아십니까? 여러분과 제 관계가 아직 깊지 않으면 제가 차마 이런 말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스스로 알고나 있습니까?" 제가 한 사람에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정말 답답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리석게 행동하니까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습니까? 만약 그걸 모른다면 나는 당신을 섬겨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비로소 사역을 통해 도울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와줄 수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거봐요, 날 도와줄 마음이 없으신 거죠?"라고 합니다. 도와주기 싫어서 그렇겠습니까? 그 고집스러운 눈빛과 얼굴 표정을 보면, 어릴 때 어머니 앞에서 짓던 표정 그대로 저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목사님은 날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으시잖아요." 하는 것을 보면 옛 버릇이 또 도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사역하기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자니 속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마디 더 거들곤 하는데, 참 부모들이 자식 못 놓듯 미련한 짓입니다. "제대로 된 대처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몰랐다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내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 제가 정말 어리석었군요." 하고 단순하게 반응하면, "그렇지, 바로 그겁니다!" 하며 소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반응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목회자라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지혜로워집니다. 순식간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섭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도 영적인 자녀로 바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난장판이 됩니다. 완고함, 어리석음, 무지함은 모두 종의 멍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종의 마음, 피해망상증입니다. 완고함, 어리석음, 무지함에 종의 마음과 피해망상증까지 합쳐지면, 그것은 완벽하게 암을 유발하는 성격이 됩니다.
방금 많은 분이 채팅창에 "저 어릴 때 딱 저랬어요."라고 올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시집살이 오래 해서 시어머니가 되었을 뿐,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늘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원래 가지고 있던 그 문제가 전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전혀 고쳐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겉모습만 새롭게 포장했을 뿐입니다. 껍데기만 바꾼 것입니다. 제가 즐겨 쓰는 비유대로 조끼 하나 갈아입었다고 해서 제가 못 알아볼 줄 아십니까? 코미디 프로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노인이 뱀을 노려보고 있는데 뱀이 휙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거북이 한 마리가 헤엄쳐 나오자 노인이 "흥, 조끼 하나 걸쳐 입었다고 내가 널 못 알아볼 줄 아느냐?"라고 합니다. 겉옷 하나 바꿨다고 못 알아보겠습니까? 다 알아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제게 올 때는 마음가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요? 밉상스러운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먼 곳에서 찾아와 놓고는 속으로 '내가 여기에 와서 절대 미움받지 말아야지, 조심해야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 '조심'하겠다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 순간 이미 제 눈 밖에 난 것입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고 미움받기 싫어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제가 얼마나 질색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제 집에 묵으러 왔다면 여러분이 집주인(임대인) 노릇을 하고, 제가 세입자(임차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이 집주인이고 제가 세입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일일이 챙겨줄 시간이 없으니 스스로 알아서 지내십시오! 지하철 티켓을 사서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다니십시오. 냉장고 문을 열고 무엇이든 꺼내 드십시오.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넉넉하니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단, 너무 자유로워서 변기 물 내리는 것까지 잊어버리지는 마십시오! 세입자인 제가 집주인인 여러분에게 변기 물은 내려야 한다고 알려드려야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챙겨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는 여러분이 나를 챙겨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체력이 있어서 모든 사람을 일일이 챙기겠습니까? 그러니 편하게 드십시오. 언젠가 제가 국수를 끓이고 있는데 여러분이 제 등 뒤로 지나간다면 저는 아는 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국수 드셔보셨죠? 젓가락으로 집어서 후루룩 한 입 베어 물면 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반은 그릇으로 떨어집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놓고 그 국수를 내밀며 "드셔보세요." 하면, 남의 침이 묻은 국수를 어떻게 먹습니까? 그걸 먹을 수 있겠습니까? 방금 베어 물다 만 국수를 주면 저도 예의상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해 먹겠습니다."라고 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스스로를 남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집주인 노릇 하는 법을 배우며, 종의 마음을 벗어버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왜 그럴까요? 과거에 가난하게 살다 보니 종의 마음가짐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됐습니다. 죄송해서 어쩌죠! 하나님, 제가 무언가를 드릴 테니 저에게도 무언가를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밉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밉상이지만 하나님께서도 몹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왜 격식을 차리고 염치를 따집니까? 여러분 같은 미미한 존재가 감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금성에 있는 금광을 보십시오. 금성에 금광이 있는지 없는지 제가 지어낸 말일 뿐 연구해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이 금성(金星)이니 금광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금성에 있는 금광에서 몇 덩어리만 캐어 주셔도 여러분 평생 먹고살기에 충분합니다. 믿으십니까? 사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일인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듭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양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이미 이토록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죄송스럽습니다."라고 합니다. 꼴불견입니다! 우리 자매님들 중에 꼭 "아이, 얄미워!"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 속뜻을 압니다. 자매들이 "얄미워!"라고 할 때는 사실 "사랑해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꼴불견이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정말로 싫어하신다는 뜻임을 아셔야 합니다! 자매들은 반어법을 쓰지만, 하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시므로 그것은 정말 꼴불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부부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 성도님이 폴더블 스마트폰을 샀는데, 그게 꽤 비싸지 않습니까? 요즘 중국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여러 대 들고 다니길 좋아합니다. 남편이 폴더블폰을 사고 나니 이전에 쓰던 메인 폰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폴더블폰이 메인 폰이 되었지만, 이전 폰도 여전히 최상급 성능의 훌륭한 기기였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거 당신 써!"라고 하니, 아내가 "싫어요, 난 남에게 신세 지는 거 딱 질색이에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당시 아내의 표정과 말투를 제게 그대로 묘사해 주었는데, 정말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남편의 기분이 상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체면 차리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 자매가 이전에 쓰던 컴퓨터는 그 스마트폰보다 훨씬 비싼 것이었고, 그것도 남편이 사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숭을 떱니까?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또 내숭을 떨겠습니까? 과거에 수많은 은혜를 받아놓고, 오늘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렸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틀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을 때에도 우리가 주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를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원리를 명확히 깨달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부분을 잘못 알고 계셨다면 오늘부터 새롭게 바로잡으십시오.
제가 묻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메뚜기 한 마리를 만났는데, 그 메뚜기가 입을 열어 말을 하더니 뒷다리로 버티고 서서 앞다리를 까딱이며 "이리 와봐! 내가 너한테 뭐 좀 줄게."라고 한다면 기가 차겠습니까, 안 차겠습니까? "메뚜기 주제에 네가 나한테 뭘 준단 말이냐? 차라리 네 몸뚱이나 내놓아라." 하지 않겠습니까? 딱밤 한 대만 톡 때려도 죽어버릴 나약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메뚜기처럼 굴며 "하나님, 제가 뭐 좀 드릴까요?"라고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무언가를 바치지 않으면 굶주려 허덕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신데, 여러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자녀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받는 것만이 가장 복된 일입니다. 저는 이 원리를 너무나도 명확히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집에서 결코 염치를 차리거나 사양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목회자가 이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나중에 한 가지 사실을 연구해 보았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교회 안에 사례비를 받지 않으려는 목사님들이 간혹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제사장은 제사장의 몫으로 정해진 음식을 반드시 먹어야 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규례였습니다. 제사장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은 "교회가 너무 가난해서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교회가 너무 가난해서 저는 사례비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 사례비를 받지 않는 목사님이 이끄는 교회는 목회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가난뱅이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가난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교회를 가난하게 만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의 길, 베드로가 갔던 그 길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을 가난하게 보지 마십시오! 종은 그저 종일 뿐이고, 노예근성은 노예근성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집 열쇠 꾸러미를 주셨으니 하나씩 열어보십시오. 무엇이 있습니까? 주인처럼 행동하십시오. 최근에 제 집에 오셔서 집주인 노릇을 하셨듯이, 하나님의 집에 와서 자녀가 되었다면 어찌 세입자처럼 굴겠습니까? 주인처럼 행하십시오.
제가 전할 설교는 사실상 여기서 다 끝났습니다. 들으실 분들은 들으셨을 것이고 깨달을 것은 다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전반부는 설교이고, 후반부는 일종의 논문과 같습니다. 본문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또 갈라디아서를 물고 늘어지십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2. 본문 말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을 얽매고 있는 종의 멍에를 완전히 끊어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지각으로 분명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안에서 이 놀라운 역사를 행하사 마귀의 거짓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행위에 근거하는 누룩과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는 누룩을 제하여 주옵소서. 더 이상 행위로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 담대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마땅히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집에서 참으로 자유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본래 주님의 뜻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내어주셨으니, 오늘 우리가 주께로 돌이켜 자유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오늘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 안에 있는 종의 마음은 그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노릇 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로 착각하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마귀는 실로 간교합니다. 예수님 당시 마귀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마귀의 말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이 말에 일절 말려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말려드셨다면 어땠을까요? "뭐라고? 내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데, 돌로 빵 하나 못 만들 줄 알고?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보란 듯이 만들어 보여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겠다!" 증명하려 드는 순간 끝장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증명하려 나서는 순간 마귀의 덫에 걸립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보니 많은 사람이 자꾸 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들고 증명하려 듭니다. 증명하려 들수록 제 눈에는 더 꼴불견으로 보이고, 설명하려 들수록 더 피곤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나중에 이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대체 무엇을 설명하겠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까? 자꾸 설명하려 하기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무엇을 설명하려는 겁니까?"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면 아들이고, 아들이 아니면 아닌 것이지, 이토록 단순한 이치를 두고 무엇을 또 증명합니까? 증명하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어리석음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귀가 그렇게 시험했는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마귀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여전히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했을까요? 야고보와 같은 자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무엇을 주장했습니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할례를 받아야 할까요?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마귀의 간계에 빠진 것 아닙니까? 사실 할례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통해 그들이 증명하려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되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그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는 순간, 율법의 모든 조항을 행해야 하는 빚을 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이런 짓을 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날려버리니 온갖 고생을 자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할례만 붙들고 있는 꼴입니다! 할례 배후에 깔린 근본적인 논리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던 논리와 똑같습니다. 이것을 통해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도 다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극히 일부분만 행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치레로 조금 행해놓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껍데기일 뿐, 결코 삼가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할례의 길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논리를 좋아할까요? 할례는 단번에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작은 할례 하나를 행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은 마귀의 이 간계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습니다. '네가 근본적인 논리를 바꾸고 전체적인 설계를 변질시키려 하는구나. 큰일이로구나!' 그렇게 행한 결과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상실하며, 종의 멍에를 덮어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작은 누룩 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난 2천 년의 교회사(敎會史)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고, 바울도 빠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빠져든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모세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행위에 근거하느라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이 웅덩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피 터지게 싸워가며 오늘날 순전한 복음을 지켜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2천 년 동안 교회는 또다시 그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이 뭐라고 합니까? "교회에 오면서 어쩌면 그렇게 불경건합니까? 청바지를 입고 와요? 운동화를 신고요?" "목사님, 그럼 무엇을 입어야 합니까?"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구두를 신어야지요." 정장을 입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정장을 차려입는 것은 할례보다 훨씬 쉽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두를 신고 정장을 입었다고 해서 "어라, 조끼 하나 갈아입었다고 내가 널 모를 줄 아느냐?"라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속마음은 여전히 종의 마음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진지하게 임해야지!" 그것이 진지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시킬 뿐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의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성령께서 교회를 떠나시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를 떠나게 하여 교회를 '이가봇' 교회로 만들어버릴 뿐입니다. '이가봇'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겉치레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드는 데는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조끼 하나 걸쳐 입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그랬지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의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를 오직 그런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곤 했습니다. 여러분, 이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본래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 하심입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은 당시에 이 일의 근본 논리를 간파했고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 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당신들의 그 할례를 조금만 더 베어내라. 아예 생식기 전체를 다 잘라버려라. 다 잘라버리면 얼마나 거룩하겠느냐? 아주 거룩해 죽겠구나!"라고 일갈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거기를 자른다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그곳을 잘라서 거룩해질 수 있다면 다 잘라버려야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5:12)
그들은 자르지도 못했습니다. 진짜 결단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런 것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숨겨진 궤계는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해방하셨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축복과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는 어디서 올까요? 우리가 죄 가운데 살기 때문에 옵니다. 죄 가운데 살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고, 마귀가 합법적으로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저주 속에 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한마디로 '불운의 아이콘'입니다.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여러분, 오늘 제 권면을 잘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을 알아볼 때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들어보면 됩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입니다. "몇 년도에는 이런 일을 했고, 몇 년도에는 저런 일을 했으며, 몇 년도에는 이것을 했고, 또 몇 년도에는 저것을 했습니다." 들어보면 그가 손댄 모든 일마다 실패하고 낭패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저주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왜 그렇게 재수가 없을까요? 저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저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그의 저주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셔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저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그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행위에 근거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면, 그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기는 순간 큰 사달이 납니다. 한번 지켜보십시오.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행위에 근거하여 칼을 의지해 살아가는 자는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굴레입니까? 일하고, 기를 쓰고 일하고, 또 일합니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다가 털썩 쓰러져 헛수고로 끝납니다. 기를 쓰고 일해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놓고는 거기에 스스로 털썩 빠져버리니, 차라리 일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고달프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해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해결하신 이 문제는 실로 위대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 해도 비뚤어지게 행할 뿐 온전히 행할 수 없었습니다. 육신을 의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은 곧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의 상태에 머물러 살지 않게 됩니다.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한마디를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실 수 있겠습니까? 저주 안에서는 무언가를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축복 안에서도 무언가를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들리십니까? 이 말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오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오해하셨다면 제가 차차 바로잡아 드리겠습니다. 축복 안에서는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온 우주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은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은 자녀인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돈이 문제입니까? 돈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돈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돈의 문제는 분명히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아무런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기필코 사망으로 끌고 가려는 이 사망의 육신, 이 질긴 육신의 힘이 해결되었습니까? 해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진실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셨으며,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의 문제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지 못하신 문제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자유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 여러분은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메고 계십니까? 조심하십시오, 조심해야 합니다!
6.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소제목을 기억하시면 여러분은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어찌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을 버는 일입니다. 돈 버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수많은 고민과 문제들이 예수님을 의지할 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역자가 "영으로 공부하고 영으로 일하라"고 한 것입니다. 육신으로 해보십시오, 고생문이 훤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자유입니까? 평생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의 것들이 더 이상 우리를 얽매지 못하는 자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내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소망을 둔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삶의 소망을 병원에 둔다면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실망합니다. 낫지 않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자유를 얻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어젯밤 한 형제가 제게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가 죽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툭하면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너 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하여 오늘은 이 약을 찾아 먹고 내일은 저 약을 찾아 먹더니,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 것입니다. 다음 날 병원에 가기로 다 예약까지 해두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 성도 중 한 자매님의 시어머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시어머니가 코로나19에 걸렸는데, 사실 음성 판정을 받고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두려워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폐가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백폐). 사실 아무런 증상도 없었는데 폐가 하얗다는 것입니다. 집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습니다. 정신이 나가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에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 사람이 귀신입니까, 사람입니까? 귀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나흘이 지나자 콩팥, 간, 심장 등 모든 장기가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중환자실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결과가 이것 아닙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으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해방하셨고 은혜를 예비하셨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만약 일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좋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좋습니다. 일평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면 어찌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돈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목숨 걸고 돈을 벌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 눈에는 돈이 안 보일까요?"라고 하신다면, 목숨 걸고 계속 벌어보십시오. 결국 허무함만 남을 텐데 그것이 좋습니까? 전혀 좋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은 후 일을 대충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자유를 얻은 후에는 일을 하더라도 아주 자유로운 마음으로 일하게 됩니다.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남들과 피 말리는 경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와,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사는데!" 하며 또다시 경쟁에 뛰어든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천 달러를 주시든 5천 달러를 주시든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이 돈을 날리면 어쩌지? 날리면 큰일인데.' 하며 안절부절못하시겠습니까? 2천 달러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2천 달러를 받은 자는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돈이 얼마든지 있으니 담대하게, 기쁜 마음으로 장사하자!" 하며 얼마나 자유롭게 행했습니까. 그렇게 하니 또다시 2천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천 달러)를 받은 자는 종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아이고, 이 돈은 절대 손대면 안 돼. 잘못 썼다가 주인이 돌아와서 내놓으라고 할 때 없어졌으면 큰일 나잖아." 이해가 되십니까? 2천 달러를 받은 자는 왜 또 2천 달러를 벌 수 있었을까요? 담대하게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재물이 넘쳐나는데 고작 그 돈에 연연하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2천 달러를 준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이전에 2천 달러를 주었을 때 그 돈을 다 날렸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다가 다 날린 것입니다. 다 날린 후에 "주인님, 죄송합니다. 어차피 주인님께는 돈이 많으시니 제가 수업료를 낸 셈 쳤습니다. 이전의 그 2천 달러는 수업료로 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수업료 잘 냈다! 배운 점이 있느냐? 어디 말해봐라.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습니다. "아, 이 부분에서 실수가 있었고 저 부분에서 판단이 잘못되었습니다." "오, 교훈을 얻었구나! 그럼 어떻게 해줄까? 2천 달러를 더 줄 테니 다시 힘껏 해보아라!" 수업료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종은 어떻습니까? "손해를 보면 주인님이 문책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정말로 그 책임을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5천 달러를 받은 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5천 달러를 받은 자도 이전에 2천 달러를 날려보며 수업료를 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수업료를 내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수업료 안 내보신 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다 수업료를 냅니다. 저도 엄청난 수업료를 냈습니다. 다 날리고 났을 때 하나님은 넉넉하게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잘했다."라고 하셨습니다. 2천 달러를 주었더니 또 2천 달러를 벌어 4천 달러가 되었습니다. "아주 잘했구나. 1천 달러를 더 얹어주마." 해서 5천 달러가 된 것입니다. 5천 달러를 받은 자는 그렇게 생겨난 것이고, 2천 달러를 받은 자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천 달러를 받은 자는 어찌 된 일입니까? 1천 달러를 주었더니 스스로를 사람 대접하지도 않고 주인 대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주인의 아들이라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한테 돈이 얼마든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하면 끝날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종의 멍에에 얽매이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이것도 조심해야 하고, 저것도 조심해야 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와서 "조심하세요, 목사님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합니다. 제가 함정을 파서 무엇 하겠습니까?
7. 다시는 종의 멍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다시는'이라는 말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제가 암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대부분 깨끗하게 낫곤 합니다. 그런데 낫고 나서는 도로 예전의 어리석은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놓고도 다시 종의 멍에에 얽매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마귀는 매우 간교하여 어느 누구도 그냥 놓아주지 않습니다.
마귀의 속임수는 지극히 교묘합니다. 단지 "만일"이라는 말 한마디만 덧붙이면 사람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돌을 진짜 빵으로 바꾸셨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입에 넣고 막 깨물려는 순간 마귀가 "변해라!" 외치면 빵이 다시 돌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이빨이 부러져 나가며 "아이고, 하나님! 제가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까?"라고 절규할 것입니다. 그것은 돌로 변한 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그 빵을 다시 돌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바꿀 수 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고 있는데 마귀가 사다리를 쓱 치워버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귀가 일하는 방식을 보면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단맛을 조금 보게 한 뒤 사다리를 치워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늘 그런 식으로 역사합니다. 지금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1만 달러를 투자했더니 2만 달러로 불어납니다. 20만 달러를 넣었더니 40만 달러가 됩니다. 그래서 200만 달러를 쏟아부었더니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알거지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의 수법이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시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지 마십시오.
할례 수술을 예로 들어봅시다. 살점을 조금 잘라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는데 한 사람이 "너는 너무 조금 잘랐네. 봐라, 나는 훨씬 많이 잘랐다."라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다음 날 다른 사람이 병원에 가서 살을 조금 더 잘라내고 돌아와 둘이 다시 마주 앉습니다. "이번엔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잘랐으니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 이 말을 들은 친구가 다음 날 또 수술을 받고 와서 둘이 다시 앉아 "이번엔 내가 더 많이 잘랐다."라며 서로 경쟁합니다. 자르고 또 자르다 결국 다 잘라버리게 됩니다! 두 사람 다 모조리 잘라버린 뒤에 후회합니다. 그게 다시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고작 이런 것을 두고 다투는 꼴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증명하려 드는 순간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할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병원으로 끌고 가 유전자 검사를 하며 "내가 진짜 친자식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우리 성도 중에 양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자란 자매가 한 분 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분을 친아버지로 여겨라." 그러자 자매가 "그럼 제 친아버지는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친아버지는 더 이상 친아버지로 생각하지 말아라. 아버지를 너무 많이 만들지 마라. 아버지가 너무 많으면 이름만 복잡해지고 뒤죽박죽이 된다. 그렇게 하지 말고 양아버지를 향해 '나는 아버지의 친자식입니다!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입니다'라고 굳게 믿어라." 그렇게 하니 양아버지와의 관계가 친부모 자식처럼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8.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그래, 나는 믿는다, 어쩔래?" 하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믿음의 길을 걷기를 기뻐합니다. 왜 자유로울까요? 믿음이 주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무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덟 번째 대지는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 걸음씩 하나님을 알아가십시오.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성령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과거에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일해야 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문을 열 때도 성령으로 열었으니 끝까지 달려갈 때도 성령을 힘입고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 근본 논리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다!"라는 확신입니다. 무언가를 행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그러한 존재입니다. "내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쩌란 말인가? 증명이 필요한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의 믿음과 성령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언하십니다! 어떻게 증언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행한 일의 많고 적음을 따지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손을 통해 행하신 표적들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영과 진리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내가 아직 부족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알았을 때는 훨씬 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진보하고 끊임없이 성장해 갑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직장 일이든, 학업이든, 일상생활이든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도리어 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이 아니시며,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이 아니시며,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이 아니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시니, 결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9. 더 이상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헛된 것을 참 좋아합니다. 왜 행위에 근거하는 길로 빠져들까요? 그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할례를 지키려 할까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하기 쉽고 헛된 명성을 얻기 쉽기 때문입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할례를 지킬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면서 누가 어느 자리에 설 것인지, 누가 한 소절을 더 부르고 덜 부를 것인지를 두고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며 싸웁니다.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교회 안에 이런 것들이 가득합니다. 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짓들입니다. 교회는 헛짓거리에 가장 능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이러한 헛된 것에 빠지지 않게 할까 머리를 싸매고 연구했습니다. '교회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직원은 이렇게 많이 채용해 놓고 무엇을 하는가?' 제가 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많이 뽑아서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킵니까?" 그들이 하는 일을 가만히 보면 정작 한 일이 없습니다. "아, 처리해야 할 영수증과 서류가 많아서요." "전기세, 수도세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는데 뭐가 그리 많습니까? 은행 전표가 얼마나 된다고 그럽니까? 고작 몇 장 안 되는데." 그들이 하는 일을 다 합쳐도 제가 하는 일보다 적습니다. 행정 직원들을 잔뜩 뽑아놓고 기껏 하는 일이 파워포인트(PPT) 슬라이드나 만드는 것입니다.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입니다.
우리 직원 중에는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온 분들이 있습니다. 전 교회에서 행정을 맡아보던 분들인데 우리 사역에 와서야 비로소 올바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전에는 다 엉뚱한 짓을 한 겁니다."라고 하니, 그분도 "맞습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PPT 만들고 전단지 만드는 일이 뭐가 그리 많겠습니까? 저도 참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식사 당번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결국 무엇을 합니까? 헛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며 이상한 놀음을 합니다. 둘이 마주 앉아서 "목사님,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제가 "그럼 우리 다시 기도해 봅시다. 나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내게 말하지 말고 나도 당신에게 말하지 맙시다. 등을 맞대고 각자 들은 것을 종이에 적어 서로 맞는지 확인해 봅시다. 맞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안 맞으면 그만둡시다."라고 합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등을 맞대고 각자 적은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왜 서로 맞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내용이 같아야 할 것 아닙니까? 툭하면 자기가 선지자라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합니다. 환상은 사진을 찍어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런 것들을 늘어놓아서 도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이런 일을 수없이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예언을 많이 할수록 대단히 영적인 사람 취급을 받고, 대선지자 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헛된 것을 좇으면 결국 서로 노엽게 하고 다투며 시기하는 열매밖에 맺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경고한 '헛된 영광을 구함'입니다. 끝이 좋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헛된 영광을 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도 예언 한마디, 나도 예언 한마디 하며 아무 말이나 지어내고, 너도 방언 통역, 나도 방언 통역을 하겠다며 소란을 피웁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실질적인 일을 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겉치레는 오래 버티지 못하며 풍파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 주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 모여 앉은 수많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들 엉뚱한 일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제가 미처 다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저를 탓하지는 마십시오. 만약 저를 납득시켜 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온종일 그런 헛된 일에만 매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예전 지역 교회에 있을 때 "여러분은 교회에서 종일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전화 심방하고, 양육하고, 방문 심방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전화 심방이요? 저는 왜 전화를 한 통도 못 받았을까요?" "성도님한테는 안 걸었으니까요. 다른 분들에게 걸었습니다." "그럼 누구한테 거셨습니까?" 기업 관리자 출신인 저는 꼬치꼬치 묻기를 좋아합니다. "심방 명단이 있습니까?" 명단이 없습니다. 다 거짓말이고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늘 심방을 다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 집에는 한 번도 심방을 안 오셨습니까?" "성도님 댁 말고 다른 댁을 심방하니까요." "그 다른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들은 저 같은 사람을 몹시 질색했습니다. 제가 실질적인 사역을 좋아하고 헛된 껍데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을 저는 참지 못합니다. "당신들이 실제로 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도 무엇이 참으로 유익하고 무엇이 헛된 것인지 서서히 깨달아가고 계실 줄 압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남들을 비난하거나 헐뜯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비방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더 이상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종의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을 좇는 자는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일하다가 주인이 사라지면 꾀를 부립니다. 겉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든 보시지 않든 우리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질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집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먹이고 양육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사 주신 그 참된 자유 안으로 모든 성도를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 모든 얽매이기 쉬운 짐을 벗어던지는 도전을 해보십시오. 더 이상 염려하지 말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일을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고, 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하지 마십시오.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능력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찬양 한 장을 부르고 헌금 순서를 갖겠습니다. 헌금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신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부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을 먹고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물을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주께 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헌금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향을 피우거나 닭이나 오리를 바쳐서 신을 배부르게 하려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헌금은 은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값주고 산 것이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값을 주고 샀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손을 높이 들고 저와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는 종의 멍에를 완전히 거절하노라! 나는 더 이상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사려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앞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 성령께서 내 앞서 행하시며 나를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종의 멍에로부터 온전히 해방되게 하실 것을 선포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의 거짓말을 완전히 거절하노라! 마귀는 완전히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영원히 떠나갈지어다!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것이며, 육체의 정욕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땅에서 내가 달려갈 길을 온전히 마칠 것이라. 하나님 나라의 승리하는 백성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