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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베드로전서 요약

2026-03-11 1,314 彼得前书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드로전서》의 총정리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이 《베드로전서》를 소리 내어 크게 읽어 보면 정말 잘 썼다고 느낄 것입니다.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서신을 왜 이 목사는 하나도 쓸모없는 것처럼 말할까?' 사실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맞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것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커피 한 잔을 주었는데 그 안에 쥐똥 반 알이 들어 있다면 드시겠습니까? 분명 마시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죽 한 솥에 쥐똥 한 알이 들어가 있거나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있다면 드시겠습니까? 먹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글을 읽을 때 어느 정도 분별하고 따져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 바퀴벌레가 있고 쥐똥이 있는데 어떻게 그냥 읽겠습니까?

사기꾼이 말을 아주 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기꾼이니까요. 제가 베드로가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저의 인식도 조금씩 더 깊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권세: 원문은 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 16:15-23)

그리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베드로라는 사람이 어떻게 말했는지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 26:33-35)

우리는 베드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는 입만 살아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눈치채셨습니까? 말은 기가 막히게 잘해놓고 진짜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함께 생선을 구우시며 대화하셨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셔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주 예수님도 안 보이시고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르니, 그냥 놀러 가자며 물고기나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는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한복음》 21:15)

예수님께서 연달아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누가 기록했습니까?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말하지 못했고, 아무도 이 일을 감히 쓰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죽고 나서야 요한이 베드로의 밑천을 다 드러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 하심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베드로입니다. 처음에는 꽤 괜찮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이 임하시기를 구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 그는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운 교회는 다소 기괴하고 빗나간 형태였습니다. 사실 그가 세운 그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교회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헌금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마음대로 먹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우라고 하신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5천 명이 주를 믿고 3천 명이 주를 믿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온갖 분쟁이 일어나는 형편없는 무리들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는 상황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아주 많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베드로를 일으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며 정말로 수차례 기회를 주셨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보자 외식하며 “나는 그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결국 제가 말씀드리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보시고 '차라리 사람을 바꿔야겠다'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으로 바꾸신 것은 하나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받지 못했고, 거듭해서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베드로라는 사람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입니까? 입으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가 행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었습니까? 오늘 여러분께 일깨워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완수(deliver)하지 못한다면, 즉 실행해 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대로 행하지 못한다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으나,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거두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거듭해서 놓쳤기 때문이며, 결국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기회를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거듭해서 상실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사울이 당한 고통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든 저를 부르셨든, 우리는 굳게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예전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고, 천사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가 나온 후 야고보에게로 갔고,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그는 2인자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갑자기 2인자가 되어 버렸습니까? 누가 1인자가 되었습니까? 주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또 다른 아들, 바로 《야고보서》를 쓴 그 야고보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가 2인자가 된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도행전》 15장에서 그 야고보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바울을 일으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깨달음이 뛰어났고 생각도 명확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거듭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실했다면, 그가 받은 고난은 사울과 같은 고난입니까, 아니면 다윗과 같은 고난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울처럼 고난을 받고 섬기기도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치기만 할 뿐 아무런 영광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잃어버렸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의인 롯의 논리'라는 아주 기괴한 논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롯이 의인입니까? 롯은 사명을 잃어버린 롯입니다. 롯이 충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온종일 부동산 투자만 하다가 점점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사람이 어때 보입니까? 별로입니다. 사실 그는 아브라함의 것을 계승했어야 했는데, 그의 논리는 돈을 사랑하는 논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아내가 그랬고, 부부금슬도 좋고 자녀 교육도 잘 시킨 편이었지만, 결국 사명을 잃어버린 롯일 뿐이었습니다. 바울의 눈에도, 예수님의 눈에도 롯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와서 유전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의인 롯'의 유전자 말입니다. 의인 롯이 그곳의 죄인들 때문에 날마다 근심했다니,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순 엉터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롯과 같은 사람 아닙니까? 어쨌든 둘 다 참 한심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건대, 베드로를 본받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그가 행한 일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비록 그가 한 말이 듣기에는 그럴듯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별 볼 일 없습니다.

베드로가 세운 교회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별로였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지식이 있었다면 이 지경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사실 말씀드리자면, 이 베드로는 성경 읽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즉,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은 있었지만, 깨달음은 정말로 꽉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베드로후서》 1:5-7)

《베드로전서》를 쓸 때도 실라가 그를 도와 대필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지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몰랐는데, 그가 열심을 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조금이라도 열심을 냈다면 글자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글씨도 쓸 줄 몰라서 비서를 둬서 대신 쓰게 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여러분은 이런 사람의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예를 들어, 초등학생처럼 삐뚤빼뚤 글씨를 쓰면서 고객과 계약을 하러 가서 자신이 디자이너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글씨를 안 쓰면 모를까, 글씨를 쓰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초등학생처럼 글씨를 쓰면서 무슨 디자인을 하겠습니까? 그동안 진작 무엇을 했습니까? 나이가 수십 살인데 열심을 냈습니까? 내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글은 그렇게 그럴듯하게 썼을까요? 이런 것을 써서 무엇 하려는 것입니까? 남들에게 말하고 남들에게 들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식당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에게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식당으로 만들어 놓고 밥 먹는 문제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밥 먹는 일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나는 사역자니 밥 먹는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힘쓰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밥 먹는 일이 얼마나 사소한 일입니까? 뇌세포를 얼마나 쓴다고 그럽니까? 별로 쓰이지도 않는데 수많은 사람을 세워 관리하게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첫 번째 사람이었고 아주 성공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를 세워 나가면서 교회가 이방인을 포용하지 못하고 유대인만을 위한 교회로 전락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끝까지 고집하다가 전부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라는 다른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지식이 있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베이징대 석학들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세운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였지만,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지극히 형편없는 교회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고작 식당이라면 너무나 더러운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보고 제 설명을 들으시면 대략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셨습니다. 귀신이 핍박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핍박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두고 보실 수가 없어서 예루살렘 교회를 치신 것입니다. 그 후 사람들은 흩어졌고, 기독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습니다. 안디옥에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왔고,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결국 무너졌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재산을 팔아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먹고 마시며 떡을 떼는 식으로만 운영되는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핍박을 내리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세운 교회가 형편없었는데, 그가 쓴 《베드로전서》가 유려하고 문장이 아름답다고 해서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믿으시겠습니까?

베드로의 양육과 섬김

베드로의 양육은 사실 형편없었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실라와 마가는 모두 베드로의 제자였지만, 나중에 바울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가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실라와 마가는 사실상 베드로의 비서였습니다.

저는 실라가 베드로를 도와 《베드로전서》를 정리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 고통스러웠을까요? 실라는 베드로가 말하는 대로 써야 했는데, 말하는 그대로만 쓰자니 논리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회자를 따르는데 그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실라를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가를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가는 대학 졸업자 수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마가나 실라와 대화할 때 그들은 대사도라는 명분을 보아 예우를 갖추었겠지만, 마음속으로 베드로를 진정 인정했다면 바울에게로 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베드로와 같은 목회자를 따른다면 얼마나 오래 따를 수 있겠습니까?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 자신을 소그룹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라고 요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며, 각자의 직분을 다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며, 당신을 따라도 성장하지 못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공허한 말뿐이고 날마다 하는 말이 《베드로전서》의 말과 비슷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베드로의 양육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남에게 양육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처음 믿은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아이고, 목사님!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의 교회 목사님은 허구한 날 순종만 요구해서 순종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고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원래 다니던 교회가 있으면서 우리 모임에서 공부하는 한 형제가 있습니다. 이 형제는 명문대 졸업생으로 지금 기업에서 꽤 잘나가는 인재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의 목사가 온통 상식 밖의 짓만 하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선악을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상태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교회를 완전히 망쳐놓았고, 그의 섬김은 지극히 형편없었습니다.

오늘 오후 한 자매가 제게 전화를 걸어와서 코스 조교가 자기 글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자꾸 지적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연하지요. 당신이 쓴 글은 《베드로전서》처럼 구체적이지 못한데, 그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구체적이지 않고 허풍만 가득합니다. ‘아이고! 내가 또 선악을 분별했네’, ‘아이고! 오늘 또 감정적으로 굴었네’, ‘다음에 또 감정적이었네’, ‘얼마 지나 또 감정적으로 굴었네.’ 이런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무도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구체적으로 쓴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변명하는 것을 보니 짜증이 났고, 통제력을 잃고 감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구체화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짚어야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성장합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아직 하나님을 덜 사랑하나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었습니까? 하나하나 구체적인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제 친구 중에도 목사가 한 명 있었는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하는 일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위대합니다.” 위대하다고요? 실제 삶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위대할 수 있겠습니까? 훈련받아 나온 이들이란 죄다 청산유수로 말만 잘하고 온종일 거창한 이론만 늘어놓는 사람들뿐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든, 제가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교회를 세워서는 절대로 잘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매우 구체적이며, 섬김과 양육의 과정에서 거창한 이론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거짓되고 거창하며 공허한 구호만 외칠 뿐입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교회도 아직 부족하며 제가 그리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해결하지 못한 형제자매들의 문제들이 많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연구기관처럼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힘이 부쳐 늘 빚진 마음이 들고, 저는 진심으로 형제자매들에게 빚진 심정입니다. 형제자매들의 문제를 볼 때마다 이러한 연구에서 온전히 돌파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읽으며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양육과 섬김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슨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성도의 무슨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거짓되고 거창한 빈말을 하지 마십시오. 만약 해결했다면 당신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연구했을 것이고,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과 동역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당신이 무엇을 했습니까?

제가 섬기는 분에게 “사업은 좀 어떠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사업이 참 잘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게 말하기 귀찮았던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셨길래 잘됩니까?” 그분이 “별로 한 것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말하기 귀찮았던 것입니다. 제게 말해봤자 소용없고, 제가 알든 모르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저와 기꺼이 나누려 하는 이유는 제가 구체적인 일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고, 제가 아는 것은 성심껏 말해주고, 모르는 것은 성실히 성장해 나갑니다.

베드로의 습관과 그가 받은 고난

베드로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었습니까? 입이 가볍고 말이 앞서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칭찬입니까, 깎아내리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듣기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정말 알았습니까? 정말 알았을까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사탄이 역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 번 입을 열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사탄이 말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가 영적 분별과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에게 영생을 향한 추구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것은 분명 그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극히 얕았고, 귀신에 대한 이해도 지극히 천박했습니다. 그는 그저 입만 빨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입이 빠르고 솔직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만두어라, 무슨 큰소리냐?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베드로는 깨달음이 온전히 통하지 않는 상태였고, 그저 말만 번지르르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쓴 《베드로전서》가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베드로는 이 점 때문에 바울과 비교했을 때 한참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추구한 것은 영적 깨달음 속에서 힘써 추구하며, 깨달음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고난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망했는데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망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찢어지게 가난해져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에서 헌금을 모금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전달하고 나니 바울이 붙잡혔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바울을 붙잡은 자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즉 야고보와 베드로 수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한 짓이 어때 보입니까? 정말 형편없지 않습니까? 교회가 망하고 가난해졌는데, 예전에는 돈이 많았는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바리새인 같은 무리들을 양산하여 곳곳에 다니며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걸핏하면 고린도 교회로 가고, 걸핏하면 갈라디아 교회로 갔는데, 모두 야고보와 베드로 밑에서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난이 사울이 겪은 고난과 닮은 점이 있지 않습니까?

날마다 남의 교회에 가서 어지럽히니, 바울이 가서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베드로파도 있고, 아볼로파도 있고, 바울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하는 데 대단히 능했습니다. 알맹이는 없으면서 현혹하기는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말씀드리지만 많은 사람이 알맹이는 없으면서 말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변변찮은 재주 몇 개로 사람들을 홀려 버립니다. 그러니 그가 고난을 받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분란을 일으키는데 고난을 받지 않겠습니까? 귀신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 그를 치시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이 한 말을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온통 허황된 거창한 말뿐이며, 겉으로는 딱히 큰 흠을 잡을 수도 없게 쓰여 있어 분별하기가 참 힘듭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쓴 목적

베드로는 왜 《베드로전서》를 썼을까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그가 얼마나 많은 혼란을 일으켰습니까? 바울이 쓴 서신들을 보면 종종 “내가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는 식의 언급이 나옵니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쓴 것은 실상 베드로가 꽤 윤택하게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그가 정말 고난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어디를 가든 어느 교회가 그를 대접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교회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강단에서 설교 한 편 하면서 구호를 요란하게 외치면, 아래에 앉아 있던 많은 형제자매들, 아마 자매들이 더 많았겠지만 달려 나가 봉투를 건네고 사랑의 헌금을 주었을 테니 베드로는 참 윤택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고난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가 《베드로전서》를 쓴 것은 팬 관리, 즉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고 팬들의 수를 관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전서》를 써서 무엇을 하려 했겠습니까? 자신에게 사랑의 헌금을 주었던 이들, 이리저리 다니며 알게 된 이들이 있었고 그에게는 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팬들도 대개 베드로 같은 부류로 생각이 썩 밝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여러 교회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 여전히 자신의 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웅변은 분명 대단했을 것이고, 자신의 인기와 마땅히 누려야 할 후광을 유지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저 역시 제 말이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그러나 그의 동기가 정말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겠습니까?

베드로의 문장

베드로의 문장은 사실 매우 유려합니다. 며칠 동안 1장부터 5장까지 오디오로 들어보았는데, 들으면서 참 말을 잘 썼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베드로전서》 1:3-9)

베드로라는 사람의 실체를 모른 채 이 글만 보면 얼마나 훌륭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어떤 탐관오리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까지도 강단에 서서 부패 척결을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거물급 탐관오리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얼마나 높입니까? ‘무엇을 단호히 따르겠다’며 온갖 거창한 말을 늘어놓지만, 뼛속 깊이 뒤에서는 온갖 더러운 짓을 저지릅니다. 구호는 누구나 외칠 수 있고 번지르르한 빈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진심으로 여러분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사기꾼이 다가왔을 때 좋은 기회를 가져다준 줄로 착각하다가, 사기를 다 당하고 나서야 그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절대로 화려한 미사여구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혜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가 쓴 글들을 보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왜 그가 한 이런 말들을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실까요?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기괴합니다. 말씀하시지도 않은 것을 천사들이 무엇을 살펴본다는 말입니까?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팬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야, 봐라, 베드로가 바울보다 아는 게 훨씬 많잖아. 천사들까지 알고 있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합니까? 팬을 끌어모으려는 수작이고, 문장은 아주 유려하며 거창한 명사들이 수두룩하지만, 도대체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세상에, 이 말이 얼마나 멋집니까!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도 이와 비슷한 화려한 문장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내용

우리가 이러한 거창한 명사들과 화려한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개념이 불분명하고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면 온통 허점투성이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형제자매들이 훈련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가 훈련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 역시 여러분을 현혹하고 싶지 않으며, 여러분이 정말로 남에게 속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께 늘 말씀드립니다. 제가 하는 말을 듣지 말고 제가 행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행하는 것을 보시고 제 말만 듣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여러분을 섬길 때 때로는 심하게 질책하기도 하고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지만, 제 중심에는 여러분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속임수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이 직접 분별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나중에 제가 아주 결정적인 개념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으면 그대로 행해야 하며, 문제를 변명하고 설명하려 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드리자면 《베드로전서》, 특히 《야고보서》는 더욱 터무니없으며,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는 삶에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베드로전서》와 이런 글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탓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저 역시 처음에는 그들의 서신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처음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바로 《야고보서》였는데, 다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이고 거듭해서 필사적으로 읽었습니다. 《베드로전서》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는데, 심지어 《창세기》를 읽을 때보다 더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제가 진지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진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창세기》를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하겠다는 태도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의 많은 내용들은 행할 수가 없고 삶에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적용할 수 있다면 제게 와서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배우겠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적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이상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의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막으라’고 합니다. 못 막습니다! 여러분이 막을 수 있습니까?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막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집에 가서 삼촌, 이모, 사촌 형제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주님을 믿으니 내가 지금 얼마나 좋아졌는지 보세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네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너 같은 애가?” 어릴 적부터 기저귀 차고 함께 자란 가족들이 여러분을 보고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기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오늘 너를 보니 어릴 때 그대로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이불도 개지 않는 칠칠치 못한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고쳐졌습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여깁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얼마나 좋아졌는지 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의 선행으로 그들의 입을 막는다니, 어떻게 막습니까? 이것은 제가 그저 든 한 가지 예일 뿐입니다. 끝까지 다 읽어보면 그 안의 논리가 지극히 혼란스럽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잘한다고 해서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첫째, 막지 못합니다. 둘째, 당신의 그 행실은 선행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행하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는 행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도저히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성경》에 수록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왜 이것이 성경에 수록되었는지 묻습니다. 오늘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주후 60년경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그 당시 '성경'이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구약》이었으며, 아직 《신약》은 정경으로 묶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서신들을 정리해 성경에 넣으라고 했다면, 그는 결단코 《베드로전서》를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는 내가 잘 아는데,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온통 훼방만 놓던 사람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쓴 것인데, 바울이 기록할 때 베드로가 쓴 이런 글들을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수록되었을까요? 주후 400년경 대주교들이 베드로의 서신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맡겼다면 결코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바울은 성경 정경화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성경이 정리된 것은 주후 400년경이었습니다. 주후 400년경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정당에 입당하듯 정교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대주교들이 모여 성경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자리에 없었고, 성경이 주후 400년경에 최종 정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성경이 정리되던 당시의 교회는 베드로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고 있었습니다. 즉,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중세에 접어들면서 극도로 어두워진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소행입니까? 베드로가 저지른 일입니다! 아, 마음속으로 참 많은 감회가 듭니다. 기독교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우리 시대에 이르러 베드로가 저에게 호되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그 안에서 실제 삶에 적용할 만한 것을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고, 게다가 그 안에 독이 든 내용이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찾는 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구하여 신학의 체계를 세우면, 풍문으로 듣거나 이리저리 짜깁기하여 갈팡질팡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반드시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은 하나의 체계이며 완전한 체계이므로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고 구하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말한 이러한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체계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 그 안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의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본래 베드로를 택해 이 일을 맡기셨으나 그가 일을 완전히 그르쳤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도 바울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체계를 세워야 한다

제 설명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구해야 하고,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체계를 세우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바로 《창세기》부터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과 아브라함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언약은 다른 언약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이 당시에 받았던 그 언약입니다. 그것이 옛 언약(구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시내산의 언약이 옛 언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새 언약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시내산 이전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핏하면 아브라함을 내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약속이며, 승리한 후에 얻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며, 그가 개척한 이 믿음의 길은 행위의 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롯의 아버지이자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늘이 무너져라 울부짖으며 동생이 살아나기를 바랐으나 결국 동생은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슬픔에서 벗어난 후 사람이 사는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사는 의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헛되다고 느끼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았으며, 삶의 유일한 의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발견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명을 주시어 땅의 모든 족속의 으뜸이 되게 하셨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축복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이 생사를 꿰뚫어 보았다면 이것저것 두려워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저는 참으로 의아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사소한 일들을 너무나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길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생사를 꿰뚫어 보았기에 기꺼이 이삭을 바쳤고, 이삭 또한 생사를 꿰뚫어 보고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복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큰 복을 주시며 네가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라는 뿌리에서부터 우리 형제자매들은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각 속에는 실상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을 구했고, 영원 안에서의 축복을 구했으며, 영원 안에서의 사명을 구했고, 영원 안에서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지 않다면 헛수고한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이러한 열정과 기개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그에게도 있었습니다. 다만 영적 깨달음이 잘 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순교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는 영원을 추구했고 영생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깨달음이 부족했기에 공부하고 글자를 배우려고만 하면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중의 어떤 형제자매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까지도 글자를 몇 자 알지 못했고, 그의 깨달음은 몹시 제한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노선에 부합해야 하고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의 노선에 부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져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창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게 이어질 때 비로소 체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단 체계를 세우고 나면,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이 가난했습니까?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비참하게 고통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건대 아브라함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체계를 세우기 시작하고, 이러한 어둠의 권세를 이기기 시작하며, 이 세상의 신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이 어떻게 가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알아가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평생의 가장 훌륭한 복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건대, 《창세기》가 기초이므로 《창세기》를 깊이 읽으십시오. 더욱이 우리 사명신학의 《창세기》는 참으로 탁월하며,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사도 바울 이래로 《창세기》를 우리처럼 막힘없이 통달하게 풀어낸 곳은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이 땅의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기를 갈망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교파에 속해 있든 모두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여 신앙의 체계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흐리멍덩하게 이랬다저랬다 믿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고 기초가 튼튼한 완전한 체계를 세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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